요절/사도행전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I. 시골뜨기를 지성인의 목자요 파라과이 선교사로
저는 1951년 2월 27일 전남 광주시 외곽에서 평범하지만 성실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25 격변기를 보냈으며, 기억이 시작되는 50년대 후반기와 6-70년대는 가난의 상징인 보릿고개와 벌거숭이 민둥산,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했던 새마을 운동을 지켜보며 살았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으로 부터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는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직장으로 서울에 정착하며 당시 이사무엘 목자님이 개척하시는 UBF 초기 종로 5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1977년 7월 처음 해보는 로마서 말씀공부는 꿀맛 같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 말씀은 당시 작은 교회에서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많은 일에 지쳐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저에게 복음이 무엇이며 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므로 저를 거듭나게 한 생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항상 섬기기만 하던 자가 1:1목자의 섬세한 사랑과 섬김을 받으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때 저는 비로소 한 영혼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심방 때는 빨간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대우 중공업 기숙사에서도 많은 직장동료들을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이렇게 속성으로 목자가 되고 이듬해 1978년 4월 5일에는 당시 수많은 미혼 형제목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저의 1:1목자님과 가정교회를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후 한양대 개척 역사에 동역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으며 1988년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가기까지 약10년 동안 한양 캠퍼스의 지성인들을 섬기는 성경선생이요 기도의 동역자로 살도록 축복하여 주셨으며, 1차 한양센터 건축역사도 섬기게 하셨습니다.
제가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아가게 된 동기는 한양대 개척 원년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성령의 역사는 누구나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도 이 성령의 역사를 따라 아직 개척되지 않은 대륙 호주에 점을 찍어 놓고 지부장으로 나아고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여러 번 취업이민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하고 대신 지방의 한 목자가 유학생 선교사로 먼저 호주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저는 방향을 바꿔 미국 메릴랜드 미싱 수리공으로 수속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파라과이에 사는 처형으로부터 방문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센타에서는 양들부터 시작하여 모든 동역자님들이 저희 가정이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아가도록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기도에 저희는 처음엔 당황하였지만 곧 이를 주님이 주신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다니고 있던 영어회화 학원을 스페인어 학원으로 바꾸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호주와 미국 메릴랜드 선교 비전은 영어권 선진국에 나아가고자한 저의 야망을 대신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를 아신 성령께서는 매번 길을 막으시고 파라과이에 사시는 처형의 손짓을 통해 저의 선교지를 파라과이로 돌리셨습니다. 이후 저희는 불타는 선교비전 가운데 당시 좋은 직장이었던 한국은행을 퇴직하고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3자녀와 함께 올림픽을 약 한달 앞둔 1988년 8월 18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을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II. 파라과이 선교보고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를 경계로 남미 중앙에 자리 잡은 내륙 국가로 아열대 기후에 속해 덥기는 하지만 비가 적당히 오고 수자원이 풍부하여 역사적으로 배고픔을 모르는 축복된 나라입니다. 국토는 한반도 2배 넓이에 인구는 겨우 500만이 거주하므로 주거공간이 넓고 어디를 가나 푸른 숲과 맑은 물 그리고 철따라 열리는 풍성한 과일과 후덕한 민심, 싼 물가는 좁은 공간과 경쟁사회에 길들어진 저에게는 마치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하고 착각 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환경은 황무지와 같습니다. 1992년까지 카토릭이 국교였기 때문에 카토릭 문화가 이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므로 미혼모와 거리의 아이들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대학을 나온 지성인들도 비전 없이 그때그때 현실에 만족하며 주말이면 축구장, 배구장, 디스코 장으로 몰려다니며 삶을 즐기므로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도착 후 믿음으로 국립대 캠퍼스를 매일 심방하며 기도의 단을 쌓고 대학 주변에서부터 벤데라는 할부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초인종이 없는 집들이라서 손뼉을 쳐서 사람을 불러내야 했습니다. 처음엔 너무나 자의식이 들어, 박수치며 물건 파는 일등 힘든 일은 동역자에게 맡기고 저는 운전만 하였습니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하루 종일 박수를 치고 목이 쉬도록 권해야 겨우 몇 장의 카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초기 선교사생활의 어려움은 전혀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3년 내에 12제자를 세우고 돌아와 동역자들 앞에서 선교보고를 하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23년이 지난 지금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기도 제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양성은 힘들어 보이고 결국 선교라는 것이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마른땅을 파는 것과 같은 자기와의 싸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중간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왔다 가는 과정에서 뿌려진 말씀의 작은 씨들은 조금도 헛되지 않을 줄로 생각 합니다. 그 중에 3년이나 센터에서 살면서 제자 훈련을 받았던 Candido, Venancio 그리고 한때 리더로 성장하여 역사에 동참하며 미국 국제 수양회까지 참석했던 Sara Patricia, Enrique, Daniel, Tadeo등은 믿음이 부족해 끝까지 잘 돕지 못해 떠나긴 했지만 어디선가 주님의 제자로 살 줄 믿습니다. 그리고 또 감사한 것은 파라과이가 작은 나라지만 모으셨다 흩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라 한때는 6선교가정이 역사를 섬기기도 했고 그곳에서 말씀으로 변화되어 선교사 된 김 요셉 선교사가정을 포함하여 총 10가정 19명의 한국 선교사님들이 지나갔거나 현재 남아 섬기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개척역사에도 쓰임 받았습니다.
저에게 선교 20주년이 되는 2007년은 특별한 해였습니다. 연초 풍토병인 댕게열로 입원한 것을 시작으로 온 세계 동역자들을 놀라게 했던 총상과 대 수술, 수술 후 생긴 악성빈혈, 담낭염, 면역 결핍으로 인한 세균감염, 혈액암 판정등으로 이후 약 2년 반 동안 입원과 요양을 반복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인생의 안식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본국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동역자님들로 부터 집중적으로 기도 지원을 받았으며 그 중 많은 분들이 치료비까지 송금해 주시는 UBF 초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덕분에 저는 온전히 치유함을 받고 개인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약해진 육체도 리모델링하여 전보다 더욱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국에 머물며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세 자녀들의 믿음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이 시간 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또한 그동안 저를 위해 기도와 사랑을 배풀어 주신 여러 선교사님들, 목자님들, 형제자매님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뜨거운 감사를 표합니다. 제가 주님과 여러 동역자님들께 생명의 빚을 진 자로서 남은 생애를 주와 복음을 위해서, 파라과이와 세계선교를 위해서 드려 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현재 파라과이에는 허 안드레, 허 안나, 황 후안 선교사가 있습니다. 리더로는 아직 연약 하지만 Rocio, Oscar, Sergio목자들이 있고 Hilda, Ferando, Miriam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Rocio목자는 아순시온 국립대 약대를 졸업하고 2006년 황 후안 선교사와 선교가정을 이루었고, Oscar목자는 동 대학 축산 대 1년 때부터 나와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여 재학 시에는 학생회장까지 하고 현재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학교에 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Sergio목자는 문리대를 수석 졸업하고 학교 내 원자력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Hilda자매는 축산대를 졸업하고 학교부설 가축병원에서 근무하며 교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곱이 시기심 많은 네 부인 가운데 시달리며 소망 없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중에도 장차 이스라엘 12지파를 세울 족장들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지난 23여년의 파라과이 역사가 거듭된 실패로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를 받으시고 파라과이 지성인 복음 역사를 위해 이와 같이 이미 여러 주인들을 예비하시고 그 가운데 1명은 선교사 동역자로 3명은 우리가 개척하는 Asuncion 국립대에 교수 내지는 직원으로 포진시켜 주시지 않으셨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렇고, 현실에서는 아직도 거리가 먼 것을 느낍니다. 우선 선교사들 간에 성령의 그릇을 이루고, 머리가 다 자란 리더들을 훈련하여 복음적이고 순종적인 제자 삼는 일이 요구됩니다.
저는 그동안 본국에 머물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이제 자녀들도 다 안정되었으니 앞으로는 본국에 남아 건강관리하며 본국역사에 참여하고, 파라과이는 후배 선교사들에게 맡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주권을 반납하고 주민등록을 회복하였으며, 자격증을 살려 건축 감리 회사에 취직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년 동안의 혈액암 치료가 끝나고 건강이 회복되자 회사로부터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겜에 안주하다 디나 사건을 통해 다시 벧엘로 돌아오게 된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저를 다시 파라과이로 보내시고자 하심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시간을 내어 지난 2월 15일 동역자와 함께 파라과이 심방 길에 올랐습니다. 2년 반 만에 파라과이에 돌아온 느낌은 한마디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고생하던 선교사들이 우리를 보자 너무 반가워하고, 동네 이웃들도 남녀노소 모두 반가워하며 어떤 이는 제가 총 맞고 죽었다는 소문이 있어 너무 슬퍼 교회에서 특별 미사를 드렸다고도 하였습니다. 리더들도 그동안 중심을 안 지켜 겸연쩍어 하면서도 반가워하고 말씀으로 다시 회복되며 예배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Oscar목자는 그동안 센터도 나오지 않으며 Hilda자매와 성당에서 가정까지 이루었는데 갈급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많이 회복되었으며 이번 볼리비아 국제 수양회에 아침강사로 세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볼리비아 수양회 후 Iguazu 관광 팀을 섬기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파라과이에서 학원선교를 크게 하시는 한 선교사는 파라과이 한국학교 교장 경력이 있는 저의 동역자에게 학교를 맡아 관리해 달라는 제의를 해 왔습니다. 저도 전에 힘들게 경영했던 농장을 정리하고 보니 건축 관련 전문인으로서 나이와 상관없이 가볍게 할 수 있는 합당한 일들이 보였습니다. 저희는 이번 심방을 통해, 우리가 만일 본국에 있으면 나이가 많아 어디를 가나 소외당하고, 자녀들 눈칫밥 먹지 않으면 다행인데, 파라과이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다시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가자’ 입니다. 제가 다시 파라과이로 나갈 것을 생각하니 파라과이가 너무 좋고 저에게 주신 약속의 땅으로 기대가 새롭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장성한 두 자녀 가정교회 세우는 일을 5월 29일과 6월 5일에 연이어 이루고 6월 17일에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가고자 비행기 표를 구하였습니다. 저는 저희가 이제 파라과이에 가서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후배 선교사들을 격려하며 기도로 지원하고, 몇몇 리더들을 말씀으로 돕고 훈련하며, 성령의 그릇을 이루고, 환경을 예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옵기는 주님께서 이번 저희의 작은 결단을 받으사 파라과이가 주님의 사랑과 긍휼로 긴 잠에서 깨어나 이 시대를 먹이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역사에 오병이어로 쓰임 받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