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9. 02.
결국 대통령이 약속했던 '짧고 굵은 방역'은 고통스러운 희망 고문이 되고 말았다. 물론 정부가 자랑하는 K-방역의 통계적 성공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국민이 체감하는 방역 상황은 딴판이다. 연일 확진자가 2000명을 오르내리고, 사망자가 20명까지 치솟기도 한다. 감염 경로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33.1%나 되고, 백신 확보도 여의치 않다. 정치적으로 오염되어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온 국민이 지쳐가고 있다.
앞으로의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다. 이번 주에 문을 여는 학교와 다가오는 추석이 모두 불안하다. 그렇다고 학생들의 수업 결손과 가족과의 단절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특히 비대면 수업의 한계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빈틈없이 준비하겠다"는 교육부 장관의 고답적·형식적·관료주의적 호언장담이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졌던 청소년 확진자도 1만 명을 넘어선 상황이다.
세계 최초로 진단 키트를 개발하고, 드라이브 스루 검사의 아이디어를 앞장서서 채택하던 질병관리청의 열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의 질병청은 극도로 경직된 행정기관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준비된 원고만 읽어주는 형식적인 브리핑에서는 전문가의 열정이나 자신감이 사라져버렸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열린 자세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도 작년 2월에 개발한 RT-PCR 키트만 고집하고 있다. 새로 개발된 '신속PCR'은 여전히 응급실에서나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고, 대량으로 수출하는 '자가진단키트'에 대한 관심도 시들하다. 오히려 자가진단키트가 4차 확산을 촉발시켰다는 엉터리 가짜 뉴스를 먼 산 바라보듯 방치해 버렸다. 자칫하면 질병청이 윤리적으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백신 접종의 이상반응에 대한 대응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이상반응 신고자의 누적 비율이 0.41%라는 매우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고, 그마저도 절대 다수가 접종부위 발진, 통증, 부기, 근육통, 두통, 발열, 메스꺼움 등의 비교적 가벼운 증상인 것은 다행이다. 그런데 아나필락시스 의심 사례가 796건이나 되고, 주요 이상반응 신고도 6274건이나 된다. 누적 사망신고 사례도 무려 522명이나 된다. 다른 증상으로 신고했다가 사망한 경우까지 합치면 사망자는 총 760명에 이른다. 코로나19에 의한 사망자 2284명의 33.3%에 이르는 수준이다.
질병청이 백신과의 인과성 인정에 지나치게 인색하다. 혈소판 감소성 혈전증과 심근염의 경우에만 인과성을 인정해준다. 실제로 지금까지 질병청이 인과성을 인정해준 경우는 고작 3명뿐이었다. 환경부가 PGH·PHMG를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고 폐섬유화가 나타난 경우에만 피해 사실을 인정해준 것과 똑같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백신 접종 후의 부작용을 모두 책임지겠다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저질환을 '약속을 회피하는' 핑계로 써먹어서는 안 된다. 질병청이 진단기록만 검토해서 인과성을 판단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해서도 안 된다.
사실 질병청의 인과성 판단은 설득력이 없다. 백신 접종으로 기저질환이 악화된 경우에도 백신과의 인과성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들의 상식이다. 국제 학술지에 실린 학술논문이 인과성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언론을 통해 떠들썩해지는 경우에만 선별적으로 인과성을 인정해주거나 지원을 해주는 행정은 공정한 것도 아니고,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자칫하면 인과성 인정의 인색함이 백신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정부가 백신 접종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선제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질병청이 전문성을 앞세워서 방역에 대한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한다. 어쭙잖은 선무당급 전문가들과 눈앞의 이익을 챙기겠다는 비윤리적 제약사들의 무책임한 억지는 설자리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집단면역은 다양한 방역 대책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질병청이 결정해야 한다. 물론 마스크 착용이나 손 씻기와 같은 개인 방역도 포함된다. 코로나19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위드 코로나' 요구에 대한 입장도 정리가 필요하다. 국무총리와 보건복지부 장관의 정치적 고려 때문에 뒤죽박죽 돼버린 사회적 거리두기 원칙도 바로잡아야 한다.
이덕환 /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디지털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