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8일 토요일
13명 한모둠을 이루어서 다녀온 김해 역사여행
다녀온 곳 : 김해시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구지봉, 국립김해박물관,
노무현 대통령 생가, 묘소, 기념관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가 깃들어 있는 구지산 정상 구지봉에서
한모둠 친구들과 미국에서 온 유치부 친구들과 예쁜 선생님 두 분이서 살짝꿍~~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구하구하 수기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이렇게 구지가를 부르니 서기 42년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왕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6개의 황금 알 중에서 가장 먼저 깨어난 김수로은 금관가야를 건국했다.
금관가야의 흔적을 찾아가보자~
수로왕릉으로 들어가는 정문 숭화문에서
신비스런 공간 왕릉을 들어갈 때는 동쪽으로 들어가고
나올때는 서쪽으로 나온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을 우리 친구들은
자알~ 기억하고 있었다.
울 친구들 나중에 지적하기를 그런데 왜 샘은 동입서출을 안했냐고 묻는다.
샘의 답은 정신이 없어서 . . . .
친구들과 여행에서는 한시라도 정신줄을 놓아서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홍살문
수로왕릉 신성한 공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곳
수로왕릉 중건 신도비
왕이나 종2품 벼슬을 지낸 사람이 돌아가시면 신도비를 내렸다.
중건(重建) : 왕릉을 후세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보여주고, 보존하기 위해 손질하고 또 손질하고
거듭거듭 여러번 보기좋은 모습으로 꾸며놓았다는 말이다.
그때 내려진 비석이다.
수로왕릉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것은 조선시대 허황옥의 아들 후손인
선조 13년(1580) 영남 관찰사 허엽이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를 마친 후부터라고 한다.
지금 보이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은 조선시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도비 이수에 새겨진 무늬들 중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왕옥의 고향
당시 인도를 상징하는 태양문양을 찾아보고 땅바닥에 그려보았다.
수로왕릉 = 납릉정문
수로왕릉 정문에 새겨진 쌍어문
당시 인도 유타국 공주 허왕옥 고향의 전통문양이라고 한다,
두 마리 물고기 사이에 허황옥이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보인다.
수로왕릉
수로왕(재위 42~199)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1. 경상남도 김해시
2. 사적 제 73호
3. 서기 42년에 태어남
4. 수로왕은 158세에 돌아가심
5. 왕릉을 만든 이야기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라는 책에 전해온다.
수로왕과 수로왕비의 영정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16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수로왕과 결혼했고 9명의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9명의 아들 중에서 2명의 아들에게 왕비의 허씨 성을 물려주어 지금까지
김해 허씨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친구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결혼하면 될까요 안될까요?
숭안전
숭안전은 금관가야 10명의 왕들 중에서 무덤이 전해오지 않는 2대 왕~ 9대 왕까지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다.
선생님의 사진으로 수로왕릉 둘러본 모습 복습하기
정문 숭화문 - 신성한 공간을 뜻하는 홍살문 - 잘 꾸며놓은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안내도
우리가 둘러볼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을 먼저 알아보았다
구지봉이 있는 자리는 거북이 머리를 뜻하고, 왕비릉이 거북 등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 친구들 그렇게 보인가요?
수로왕비릉은 수로왕릉에 비해 평지에 있지않고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왕비가 건너온 바다를 내려다 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왜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무덤을 써달라고 했을까?
파사석탑
이 탑은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사나운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서 가져왔다고 전해재는 탑이다.
2000년 전의 돌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 어째서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할까? "
를 우리나라 돌과 비교하면서 색다른 부분을 먼저 찾아보라고 주문했다.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
미국에서 왔다는 유치부 친구들 부모님은 수로왕비 이야기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아이들도 우리 일행과 사진찍게 하고싶다고 하셨다.
여행의 즐거움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어서 더욱 커진다.
구지봉 오르는 길
구지산 정상에 있는 구지봉
우리는 서로 손잡고 옛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구지봉을 돌면서 구지가를 불렀다.
다 함께 세번 부르고 나더니 구지가를 외워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불러보았다.
구지봉 고인돌
조선시대 한석봉이 썼다는 글씨체 구지봉석(龜旨峯石)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렇게 생긴 고인돌을 남방식 고인돌이라 한다.
수로왕비릉과 구지봉 복습하기
구지가를 서로 손잡고 미쿡에서 온 유치부 친구들이랑 불러보았어요~
현서는 수로왕비릉에서 시원한 바람놀이를 하고 있어요.
왕비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에서 붉은 빛이 도는 무늬를 알아냈어요~
구지봉 둘러보고 국립김해박물관으로 가는 길
국립김해박물관
가야라는 이름으로
변한 12국에서 여러 가야가 나타나다.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를 6가야 라고 한다.
여러 가야중 전기에는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대가야가 가장 강력했다.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 법흥왕 때 멸망했고, 금~~법
대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왕 때 멸망 당했다. 대~~진
이렇게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덩이쇠(鐵錠)
덩이쇠는 크기. 모양. 무게를 비슷하게 만들어서 화폐나 금괴처럼 사용하기도 하였다.
지배자급 무덤에서는 다량의 덩이쇠가 10단위로 묶여 출토되기도 하였다.
새 달린 미늘쇠
무엇에 사용되었을까?
의례용(제사) 기구와 전쟁용 무기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금동관
새모양토기
수레바퀴모양토기
박물관 둘러보는 사이에 귀하게 얻는 사진 한 장
가야는 토기의 나라 가야토기 앞에서
가야는 철의 나라 - 갑옷(판갑 : 板甲)
말갑옷(마갑 - 馬甲)
가야는 말에도 철갑옷을 입혔어요.
말도 멋지게 철제품으로 꾸몄어요.
말을 장식했던 꾸미개들이 보이지요~
방패에도 꾸미개를 멋지게 장식했어요. 가야 사람들은
바람개비 모양 꾸미개로~
박물관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유물 앞에 서보기~
박물관 복습하기
가야는 다양한 모양의 '토기의 나라'~!
가야는 단단한 '철의 나라'~!
부산 가덕도 유적 29호 무덤 인골 굽혀묻기와 펴묻기
김해박물관을 둘러보고 나가는 길목이 멋지지요~~
울 남자 친구들의 맛있는 점심시간~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먹으면서 강아지 길들이기를 지켜보아요~
사람 사는 세상 봉하마을
김해 봉하마을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하(烽下)마을
이라고 불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고 있는 봉화마을이 아니고 '봉하마을' 이다.
봉하마을은 우리나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의 고향이다.
대통령이 태어나 자란 곳이고,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생활했던 곳이며,
지금은 돌아가신 대통령의 묘와 기념관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억하고 찾아가는 마을이 되었다.
그중에 한 사람인 우리 한모둠 친구들도 오늘 봉하마을을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
친구들 뒤로 대통령께서 마지막으로 서계셨던 부엉이바위가 보입니다.
헌화대에서 묵념으로 인사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묘소
"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달라 "
는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고인돌 모습인 너럭바위를 비석 겸 봉분처럼 만들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화장한 유골을 백자 도자기와 연꽃 돌함에 담아 참여정부 기록 DVD 등과
대통령 서거 후 추모인파를 촬영한 추모영상을 함께 안장했다고 한다.
이곳 대통령의 묘소는 '국가보존묘지 1호' 로 지정되었다.
너럭바위에 새겨진 글귀를 친구들과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조직된 힘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어록중에서
노무현 대통령 추모관
봉하마을을 둘러보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 마지막을 찍은 사진이다.
사람 사는 세상 봉하마을
많은 비를 만나진 않았지만 후덥지근 습한 날씨인데도
자알~ 따라준 한모둠을 이루었던 친구들과의 하루 좋았다.
광주에는 폭우가 쏟아졌다는데 우리에겐 이 빗길도 피해갔고
즐거운 역사여행이 되게 날씨가 도와준 하루이기도 했다.
7단지 선생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아이들에게 통하는 명칭 사부님의 수고로움을 선생님께서 하시느라
바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들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