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은 제 삶에서 아주 소중한 장소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 학창 시절부터 오디오에 심취했던 저는 언제나 고급 오디오를 가져볼까?
하는 희망을 항상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아버님이 "인켈 오디오 세트"를 장만해 주셨고 한 동안 잘 들었었죠.
그런데 이 "귀"라는 놈이 아주 간사스러워 친구 집에서 마란츠, JBL, 켄우드, 세트를 듣고 난 후부터
인켈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어떡합니까?
돈이 없는데...
그래서 오직 희망을 품고 기다렸죠.
언젠가는 꼭 최고의 오디오를 가지리라... 하고 말입니다.
▲ 그러던 어느 날...
이모 건물(신촌)에서 수학 강사를 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같은 건물에서 레코드 가게, 비디오 대여점, 도서 대여점으로 이어집니다.
이때부터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그때 인연을 맺게 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 지금은 전자랜드로 이전을 하고 없지만 그당시 "조은 전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탄노이 스피커 "스터링"을 구입한 곳입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하이엔드급에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가져본 앰프를 나열해보면 "피셔" "마란츠 진공관" "메킨토시" "오라" 등
스피커는 "탄노이" "B&W 메트릭스" "스펜더" "JBL" "보스" 등
턴테이블은 "온쿄" 정도...
CD플레이어는 "메킨토시" "와디아"등
이것을 한꺼번에 가진 것이 아니라 조금 듣다 바꾸고 또 바꾸고 해서 이렇게 된겁니다.
▲ 오디오 마니아들은 절대로 한 오디오를 오래 듣지 못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환이라는 끊임없는 순환이 이뤄지고 그 차액으로 이곳 상권이 유지됩니다.
▲ 저는 중급 정도의 고객이었던 거죠.
그런데 이처럼 오디오가 그 급이 높아질수록 감동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커졌습니다.
▲ 고급이 추구하는 것은 음질, 음장감, 해상도, 뭐 이런 것들이죠.
그런데 음악이라는 것은 그런 분석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너머서 있는 어떤 감흥입니다.
그 감흥을 표현하고 수용하는데 꼭 음질의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분석이 음악의 순수한 감흥을 손상시켰습니다.
▲ 이처럼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오디오 장비가 고급화돼갈수록 오히려 감동이 떨어지고
고통이 커갔습니다.
(음악 자체의 순수함이 차지하고 있어야 할 공간을 음악에 대한 욕심이 점유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 이렇게 수년간을 고통받다가 겨우 풀려났습니다.
(지금은 온쿄 5.1 시어터와 NAD엠프에 각각 5개의 스피커와 2개의 스피커를 연결하고
이 두 앰프를 NAD CD플레이어에 동시에 연결하여 CD플레이어 한 대로 두대의 앰프를 구동시켜
7개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고급을 다 팔아치우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나니 이런 시스템이 남더군요.
지금은 이 시스템으로 무난히 듣고 있습니다.
서로 상이한 두 앰프가 서로 상이한 7개의 스피커를 구동시키므로 해서 균형 잡힌 소리가 납니다.
▲ 이런 추억을 더듬고 거닐다가 나옵니다.
▲ 이제는 다리 위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태로 다리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 이 다리 위는 예로부터 "성인 잡지나 비디오"등 외설적인 물건들을 취급하던 곳입니다.
그러다가 청계천 대 공사로 인해 큰 전환을 맞고 여기까지 버텨온 것입니다.
이제 그런 외설 품들은 PC에서 쉽게 얻을 수 있으므로 자취를 모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런 장비류가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 실로 고향 같은 곳인데 오랜만에 와봅니다.
▲ 이곳은 아세아 극장 자리였죠.
매표소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 가끔 씩 영화 보러 왔던 곳입니다.
▲ 그런 곳이 텅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 그 구역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단지 업종만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곳은 주로 성인물들을 취급하는 곳이었어요.)
▲ 이 일대가 다 그랬습니다.
▲ 또한 '빽판"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기도 했죠.
원판은 너무 비싸고 라이선스는 금지 곡들이 빠지고 발매 시기가 더디고 해서
빽판을 주로 구했었죠.
가격도 싸고....
음질도 좋았어요.. 나름대로...
대학시절(건국대학)은 등교 때부터 노상 최루탄 가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저는 그런 상황 자체가 싫었고 그런 방식으로 저항하는 학우들의 방식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대학 시절 대한민국에 "비틀즈 팬클럽"을 최초로 창설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그대로 오쇼로 이어집니다.)
▲ 오디오는 MP3에 밀리고
성인물은 인터넷이 접수했고
카메라 조차도 핸드폰에 서서히 먹혀가고 있고
이곳의 주 수입원들이 전부 이렇게 잠식되어 갔습니다.
스마트폰은
오디오, 인터넷, 카메라, 데스크톱 PC...
엄청난 규모의 상권을 순식간에 흡수합니다.
(모든 것이 소형화되고 고성능화돼가는 추세에
이 스마트폰이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 이렇게 과거의 추억을 더듬으며 걷다가
▲ 이곳을 내려옵니다.
▲ 과거의 활발했던 자취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점점 삶의 흥미를 잃어갑니다.
▲ 문명의 발전 속도와 의식의 발전 속도가 불균형 상태이며 그 격차가 계속 증가합니다.
▲ 이제 레코드 판 바늘 팔았던 곳으로 들어가 봅니다.
▲ 그 당시 주로 빽판을 들었으니 당연히 레코드 바늘이 있어야 했죠.
(주로 "슈어 55"를 사용했습니다.)
▲ 이 골목이 그 당시 레코드 바늘을 팔았던 곳입니다.
▲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 문을 닫은 곳도 많습니다.
▲ 바늘도 수 십 종류였죠.
3천 원에서 몇 십만 원 까지 종류가 다양했기에 그 선택 또한 고통이었습니다.
(음질의 차이 때문이었는데 그 차이란 것이 며칠을 못 갔습니다.)
▲ 그래서 이것저것 구하느라 용돈 낭비 열정 낭비하고 허탈해지기 일수였죠.
(음악을 통해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집착이 너무 강했던 겁니다.)
▲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기 까지(오쇼를 만나기 까지) 이처럼 처절한 체험을 해 나갔습니다.
그 당시(학창 시절) 제 마음은 상상의 차원에 있었고 그 마음 안에서 낙원을 추구했습니다.
(감옥 안에서 새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 삶 전체가 "비틀즈"이며 오디오였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에고가 이렇게 결정화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 이렇게 추억을 더듬으며 걷다가 밖으로 나옵니다.
▲ 레코드 바늘 가게 들이 즐비했던 곳에는
아답터, 충전기, 무대 장치 , 공업용 기구, 선풍기, 조명기구.. 등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 레코드 판이 CD에 밀리고 CD가 DVD로 블루레이로 3D로 4K로 진화하면서
레코드 바늘은 이처럼 그 자취를 감추어 갔습니다.
▲ 저는 매우 불행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교육 자체가 저의 생존 방식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 지구라는 행성에 갇히고 육체에 다시 갇히고 교육에 다시 갇힙니다.
(이러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은 "비틀즈"라는 탈출구를 찾게 되었고
"록 르네상스"의 전 과정을 겪으면서 실재에 대한 갈망을 야기시켜 나갔습니다.
오쇼의 활동도 같은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었는데 저는 다른 경로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러다가 몸무게 미달로(그 당시 43Kg) 군대 면제를 받습니다.
▲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몸이 거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작은 골방에 시체처럼 방치되는 상태가 계속 이어져 나갔습니다.
▲ 그러면서 비틀즈 팬클럽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감옥(마음) 탈출이 그 목표였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회원들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비틀즈는 학교에 적응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활성제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설득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이것은 <초극을 지향>하는 "존 레넌"의 의식과
<사회 적응>을 지향하는 "폴 매카트니"의 의식과의 간격으로
비틀즈가 붕괴되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당시 같은 존 레넌 팬들 과도 견해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회(마음) 적응의 한 도구로 비틀즈를 활용하자는 취미생활 지향팀과
사회(마음)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초극 지향적인 저의 견해와의 마찰이 계속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보문고에서 오쇼를 만납니다.
▲ 오쇼를 서적으로 접하고 얼마 안 있다가 각성이 일어났고(30년 전)
그것이 계속되면서 실재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한 참 뒤에 오쇼 카페를 알게 되었고 4년 이상 활동해 오면서
그 당시 비틀즈 팬클럽에서 겪었던 동일한 상황이 재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