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포지교(管鮑之交)의 허실(虛實)
문00가 서울신문에 쓴 글이다.
우정의 절정을 표현할 때 관포지교(管鮑之交)를 인용한다. 전국시대 열어구가 쓴 열자(列子)에 나오는 고사다.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 즉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우정’이라고 나온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지극한 벗을 은유하는 ‘지음’(知音)도 있지만, 관포지교가 더 대중적이었다.
관중이 남긴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다”라는 ‘생아자부모 지아자포숙아야’(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兒也)는 널리 알려진 문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중과 포숙아가 우정을 쌓는 과정을 보면 과연 어떻게 이런 우정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김영문 중문학자가 번역하고 글항아리가 최근 출간한 ‘동주열국지’ 제15회를 읽어 보면 이렇다. 관중은 포숙아와 장사를 함께 할 때 돈을 나누게 되면 늘 두 배 이상 많이 가져갔다. 포숙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내면 포숙아는 “관중이 구구히 돈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이 가난해 자급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라 내가 양보한 것”라고 해명한다. 또 전투가 벌어지면 관중은 맨 뒤로 처지고, 회군할 때는 언제나 선두에 섰다. 군사들이 관중이 비겁하다고 비웃자 포숙아는 다시 “관중은 노모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아껴 봉양해야 한다”고 감싸 줬다.
관중은 포숙아와 일을 의논할 때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계책을 짰다. 제나라를 통치하는 양공의 두 아들을 각각 나눠 가르치자고 제안할 때도 아무래도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더 큰 맏아들인 규를 자신이 맡고, 규의 이복동생이자 둘째 아들인 소백을 포숙아에게 넘긴다. 이 두 아들은 무도한 아버지 양공을 피해 각각 외가인 노나라와 거나라로 몸을 피하고 있다가 양공이 시해되자 문상을 핑계로 서로 먼저 제나라로 돌아가 왕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때 관중은 대담하게 포숙아와 소백을 찾아가 “상주는 장자인 규 공자가 할 것이니 천천히 가라”고 만류한 뒤 소백이 그 말을 듣지 않자 갑자기 화살을 쏴 암살을 시도했다. 암살은 실패하고 제나라는 소백의 손에 떨어진다. 그가 춘추전국시대 5패자인 제환공이다. 관중은 암살을 시도한 만큼 죽어 마땅하겠으나, 포숙아는 소백을 설득해 관중을 재상에 올렸다. 자신은 재상직을 마다했다.
관중이 재상으로 있는 동안 포숙아는 요직을 맡지 못했다. 관중의 죽음을 앞두고 재상 자리가 비자 소백은 포숙아를 재상으로 올려도 되느냐고 묻는다. 관중의 대답이 걸작이다. ‘포숙아는 흑백이 명확해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관중은 포숙아의 천거를 받아 목숨도 지키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포숙아가 재상이 될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소백을 제나라 통치자로 만들고 친구 관중을 천거할 만큼 안목이 있던 포숙아인데 말이다. 당신이라면 일방적 희생이 필요한 이렇게 이기적인 관계를 우정이라며 감수하고 지킬 것인가.
☆★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대한 설명되지 않은 배후의 추리
쓰여지지 않은 자리행간(字裏行間)을 읽으면서 관중은 날렵하고 포숙은 바보일지 보자
언론을 통한 우리사회의 식자(識者)내지 명사(名士)들은 직위나 이익이란 기회만 오면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현사(賢士)들은 “물은 그릇보다 많으면 넘치고 사람은 부귀가 능력보다 과분하면 몰락한다.”는 속담을 명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미래를 중요하게 여긴다. 우선 관중이 물질적 문제에 정신적 문제를 가미해보면 ‘그 예리한 안목으로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유지력을 길러주는 조언을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를 추리해보면 알 것이다. 현대는 자문비용을 아끼지 않는 시대가 하닌가?
또한 “존귀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공도(公道)를 실행하며, 개인적인 기쁨을 시행하지 않으므로, 속인(俗人)을 즐겁게 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용납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에 존귀(尊貴)하지만 어질다고 일컬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정머리가 없어야 하는 것이 고위관리직이다. 더구나 난세(亂世)였기 때문에 환공이 죽은 후 관중의 가솔들은 초(楚)나라로 피신해야 했지만 포숙의 집안은 권세가로 군림했었다. 그들이 앞날을 정확하게 한 예측까닭이다. 중국에서는 미래의 예측을 잘하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도덕관념이 강렬한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여긴다. 생각의 차이이다.
유태인들은 “그릇을 볼 때 중요(重要)한 것은 무엇이 안에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중국에는 흔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연암 박지원이 중국의 마술을 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실체나 본체가 아니므로 눈으로 본 일조차 진실(眞實)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했지만 기득권을 가진 식자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나마 언론계에서는 ‘행간(行間)을 읽는다’는 문장을 되뇌인다. 그러나 행간을 읽기 위해 어떻게 훈련을 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일부에게 알려주어도 관심이 없다. 자리행간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전혀 무감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