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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박물관 편력기
이 청 규 명예교수(문과대학 문화인류학과)
박물관은 전시, 조사 연구, 교육을 수행하는 공적 기관으로, 보유 혹은 소장하고 있는 대부분은 고고, 미술, 역사, 민속자료이지만 자연, 지질, 과학, 기계, 건축 등 실로 다종다양하다.
일반시민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근대박물관은 옥스퍼드대학의 아쉬몰리안 박물관에서 보듯이 유럽에서는 17세기까지 수백 년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의 각국은 제국주의 시기에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각국의 고고미술자료를 경쟁적으로 수집하여 본국으로 이송하였다. 그렇게 수집한 박물관 자료를 바탕으로 오늘날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과 같은 세계적인 박물관이 있게 된다.
그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근대 박물관은 백 년 남짓한 짧은 역사를 갖고 있을 뿐이고, 이웃 제국주의 일본과는 달리 국외는 커녕 국내 고미술 민속자료조차 수집 소장하는 것마저 버거웠다. 국내 중요 고미술 자료 중의 상당수가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 유출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2000년대 이전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우리나라 박물관은 100여 곳 남짓하며, 국공립과 대학 박물관이 주축을 이루고 사립박물관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중앙정부에서 박물관과 미술관 진흥법을 제정하는 등 박물관 설립 지원 정책을 수립하면서 지자체가 설립한 공립박물관, 민간인이 설립한 사립박물관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대학박물관은 늘지 않았는데, 그것은 대학 설립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부속박물관이 있어야 한다는 요건을 폐기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체 예산을 투입하여 소장품을 확보한 경우가 드문 대학박물관과 달리 몇몇 재벌급 민간법인이 거액을 투자하여 고미술품을 확보하는 예가 심심치 않게 있어 왔다. 그러한 특정의 사립박물관의 경우 웬만한 국립박물관보다 훨씬 많은 국가 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대학박물관은 유적 발굴조사를 수행하면서 박물관 자료를 확보하는 경우가 일반화되었다. 발굴된 고고학자료는 국가 소유재산이지만, 전시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 대학박물관이 지역의 역사문화 센터로서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발굴기관의 요건이 강화되면서 이를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대학박물관은 조사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박물관은 기능에 걸맞은 건물과 전문 학예 연구직 인력, 그리고 소장품 자료가 갖추어져야 한다. 시설로서 전시와 수장 공간은 필수적이며, 학예직 연구 공간, 보존처리시설 등이 요구된다. 그러나 대학박물관의 경우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은 몇몇 사립대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2천 년대 이후이다. 이러한 점에서 1980 년대 말에 단독 건물을 구비한 영남대박물관은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영남대 재단과 당시 관장 정영화 교수의 노고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내가 박물관과 직접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8 년도 대학원 재학시절이다. 1974 년에 학부 재학 중이던 대학의 캠퍼스가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관악구 신림동으로 옮겨갔다. 동숭동 캠퍼스에서는 별도의 박물관 건물이 있었는데, 이전하게 되면서 미처 독립 건물을 마련하지 못하고 도서관 꼭대기 6층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경성제대 시절에서부터 소장했던 자료를 비롯하여, 몇몇 인사가 기증했던 고고 서화 미술, 자체 수집한 민속자료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의 공식적인 신분은 조교도 아니고 잡급직 제도사이었는데, 제도사라 함은 시설관리 보조원의 성격이어서 박물관 전문직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수년간 근무하더라도 기능직 공무원일 뿐 학예연구직으로서 지위를 보장받지 못할 때이었다. 1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대학박물관에 있는 동안 경기도 안산 서해안 가의 신석기시대 별망패총 유적을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현장 조사 책임을 맡은 발굴이었다.
같은 해 말에 옮겨간 직장은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유명 재벌 그룹의 미술관이었다. 우리나라 개인 박물관으로 가장 명망이 높은 곳은 서울 성북구의 간송미술관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소장가들과 경쟁하면서 한국의 고미술 자료를 수집하여 많은 국보급 자료를 소유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간송미술관보다 뒤늦게 고미술 자료 수집에 뛰어들었지만, 그룹 경영을 넘겨받은 2세대에 이르러서도 수집을 지속하여 용인의 미술관은 간송미술관에 못지않은 소장품을 갖추게 된다. 또한 고미술품에 한정하지 않고, 고고자료는 물론 국내외 회화 조각품등 현대미술품을 두루 망라하여 수집을 하였다.
내가 용인 미술관에 근무하기 시작할 무렵에 전통 건축 양식을 수용해서 지은 석조 콘크리이트 2층 미술관 건물은 완성되었지만 개관은 미처 하지 않은 상태이었다. 개관을 위한 전시 작업과 소장품 관리가 내게 주어진 업무로 대학이나 국립 박물관처럼 조사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고고미술은 물론 현대 미술 자료를 소장한 종합박물관인 만큼, 관련된 소장품의 내용은 물론 전시, 보존, 관리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으로는 소장품을 구입할 때 각 분야 원로 선생들에게 감정 평가를 의뢰하면서 두루 터득하게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울러 현대 조각과 회화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서 국가 수준의 공모전을 두루 다니고, 작가들을 만나게 되는 흔하지 않은 경험을 갖게 된다.
미술관 근무를 시작한지 4년이 되면서 개관을 하게 되었다. 2층 미술관 건물 중에 1층 1실은 현대 한국화, 2실은 현대 양화, 2층 1실은 전통회화, 2층 2실은 전통 도자와 금속공예품을 배치 전시하였다. 처음부터 조각 전시공원으로 설계된 것은 아니었지만 박물관 야외 정원에는 현대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는데,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조각 작품을 야외에 전시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미술관 개관 이후 특별기획전을 세 차례 치렀는데, 조선백자전, 민화전, 그리고 영국 현대조각가 헨리 무어 조각전이었다. 특히 민화전은 저명한 건축가의 콜렉션 전부를 인수하고 기획한 특별전이었다. 민화 이외에도 개인 콜렉션 전체를 인수하는 작업을 몇 차레 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수집도 어렵지만 관리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만만치 않은 사정임을 여러 번 접하게 된다.
6년 동안 미술관 근무를 하였지만 원래 전공이었던 고고학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제주도에 위치한 대학교에 자리가 생겨 다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제주도는 아시다시피 유일한 도 단위 섬으로 당시에 고고학 조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지의 지역이었다.
제주대 박물관은 지역 내에서 확보한 민속 자료를 주로 소장하고 있었다. 제주대학교 사학과에 재직하면서 박물관의 일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서이다. 어느 지역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고고학 전공 교수로서 소속 지역에 대한 조사연구는 거의 당연한 책무처럼 여겨졌다.
12년 동안 재직하면서 도 전역에 대한 지표조사로부터 시작해서 각 시기의 중요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신석기시대 초기의 한경면 고산리 유적, 신석기시대 후기의 구좌읍 북촌리 바위그늘 유적, 청동기시대의 대정읍 상모리 유적, 탐라 전기의 애월읍 곽지리 패총, 제주시 용담동 무덤 유적, 탐라 후기의 애월읍 고내리 유적, 고려시대의 서귀포 법화사 유적, 그리고 조선시대 제주목관아 유적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거의 전 시기에 걸친다.
이를 통해서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고고학 조사연구 기능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지만 그 성과를 토대로 제대로 전시 활용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당시 제주대학박물관은 처음 대학 본관 3층, 나중에는 도서관 건물에 세 들어 있는 형국이었다. 정작 내가 주도하는 고고학 조사연구 성과가 토대가 되어 세워진 것은 2000년 개관한 국립제주박물관이었다. 당시까지 제주도에는 도립민속자연사박물관이 있을 뿐 다른 지방처럼 지역의 고고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국립박물관이 없는 상황이었다.
1992년 제주대학교 박물관장에 봉직하게 되면서 추진했던 사업 중에 하나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대학이었다. 단독 건물이 없어 자체 운영을 못하고 궁여지책 끝에 제주시에 지원을 부탁하였다. 그렇게 하여 제주시의 예산과 인력의 지원을 받아 시립 도서관 강당에서 1년 단위 프로그램을 수 년 간 진행하였다. 그러한 박물관대학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운영되고 있어 전국적으로 지자체와 대학이 제휴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의 모범이 되고 있다.
1995 년에 제주대에서 영남대로 직장을 옮겼을 때 당시 영남대 박물관 관장은 유홍준 교수이었다. 잘 알려지다시피 유 교수는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박물관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박물관 로비에 실물대의 광개토대왕비 탁본과 대동여지도 판본 전시를 기획한 것이 유 교수이었다. 또한 민속원 경내 논에 미대생이 제작한 허수아비 조형물을 세우고, 개살구 나무를 심어 민속촌 경관을 한껏 돋구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2000 년에 관장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전임 관장이 미처 하지 못한 박물관 업무를 챙기게 되었다. 영남대 박물관은 이미 고고학 조사연구 사업과 시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은 전국 어느 대학보다 선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990년대 초에 대학박물관에서 독자적으로 사회교육을 운영한 것은 당시 전국 대학 중에서 유일하였다. 1989년 사회교육 시설 강당을 갖춘 단독 건물이 세워진 후 당시 관장이었던 권이구 교수가 주도하여 사회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였던 것이다. 당시는 대구에 국립박물관이 설립되기 이전으로 유일하게 운영된 박물관 사회교육프로그램이어서 일반시민의 반응은 뜨거웠다.
무엇보다도 박물관은 전시가 기본이며, 단순히 소장품을 분야별 시대별로 보여주는 상설전시 못지않게 특정 주제를 내세운 기획전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 대학에서는 1 년에 한 번의 특별전을 하기도 벅참에도 불구하고 재임시절에 여러 차례의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체 예산만으로는 어려워 다른 국내외 대학, 국립박물관과 공동으로 주최하면서 이루어진 작업이었던 것이다. 기억나는 대표적인 전시중에 <독도 특별전>이 있었는데 독도를 그린 현대 한국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서울대 박물관과의 협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전시로 출품된 작품은 기증을 받기까지 하였다.
영남대 박물관에는 우리 학교에 재직했던 작가의 작품을 비롯하여 현대한국 작품도 일정 수준 확보하고 있다. 유홍준 관장 시절에 이를 상설 전시할 공간을 마련했었고, 현대 미술관이 없는 우리 대학교에서 나름대로 박물관에서 지향해야할 것으로 판단하여 아트센터 전시실을 운영하였다. 지금은 그 전시공간은 학교사 전시실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잘 알려지다시피 우리 대학은 안동댐 수몰지역에서 이전 복원한 양반가옥, 서원, 누정 건물 등 여러 전통가옥으로 꾸며진 민속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전국 어느 대학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고려후기 유학자 역동 우탁 선생을 모신 구계 서원의 경우 강당 건물만 있었는데, 단양 우씨 문중의 도움을 받아 재실과 동재, 서재 그리고 외삼문과 담장을 복원하여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그러면서 양반가옥인 의인정사를 함께 활용하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서당체험 교실을 진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한 활발한 전시와 사회교육 활동으로 2002년 당시 문화체육부에서 주관한 전국 공사립 대학 박물관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영남대 박물관에 관리 활용하고 있는 학교법인 자산 중에 경주 교동 일대에 위치한 최 부자집, 최씨 고택이 있다. 국가 민속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금도 경주를 찾는 도내외의 많은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찾는 명소이다. 2010년대 이후 같은 마을에 전통가옥 한옥촌이 조성되어 있고, 바로 인접한 월성 남쪽의 남천에 통일신라시기의 월정교가 복원되어 더욱 저명한 문화유산의 공간이 되었다. 관장 재임 시절에 경주시에서도 지원 의사가 있어 전통문화의 교육 산실로서 영남대의 경주 캠퍼스 거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는데 여러 사정상 그러지 못하였다.
2020 년대에 들어서서 우리나라는 박물관의 격동기를 맞이한다. 거의 도 단위로 국립박물관이 들어서고 대부분의 시군 지역에 정부지원을 받아 지역의 역사 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제주도와 같은 관광 지역의 경우 다양한 주제를 내건 수 십 곳의 공사립박물관이 개관하게 된다. 또한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하여 구제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중요 유적이 확인되면서 사후 보존 조치의 일환으로 크고 작은 전시 박물관이 전국 각처에 설립되었다. 한편으로 소장품의 질과 양의 수준에서 최상위급인 간송미술관과 같은 기관이 자체 운영이 어려워 지자체에 전시시설의 지원을 요청하는 일도 있게 된다. 그 밖의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아예 개인 소장품을 국가에 기증하는 사례가 생기게 되어 중요 사립박물관이 위축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대학박물관의 사례를 살펴보면 국립인 경우 정부 지원으로 단독건물이 세워지면서 그 활동에 힘을 얻게 되지만, 조사연구에 치중하고 전시와 교육활동에 소홀히 한 사립인 경우 급기야는 운영을 포기하는 사례가 있게 된다. 다행히 우리 영남대 박물관의 경우 학교본부의 관심과 역대 관장 그리고 학예연구직의 노력으로 지차체나 문화재청과 제휴하는 등 전시와 사회교육 사업을 꾸준히 활발하게 이어 나가고 있어 다른 대학박물관의 모범이 되고 있다.
대학박물관은 앞서 설명한 사례에서 시사한 것처럼 대학 기능 일부를 담당하는 공적 기관으로 대학의 구성원은 물론 지역과 시민사회에 전시, 교육, 봉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서구 유명 대학에서는 한 대학 내에 현대 미술관, 고고학 박물관, 고미술 전시관, 자연사 박물관 심지어는 도서관 자체의 전시관 등 분야별 박물관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사례가 흔하게 확인된다.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대학박물관이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어 충실하게 활동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 그것은 자칫 교육과 연구에 치중하고 지역사회나 일반시민들에 대한 소통을 소홀히 할 수 있는 대학의 기능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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