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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5. 초품 중 왕사성(王舍城)1)에 머무시다를 풀이함
【經】 왕사성에 머무셨다.
【論】 이제부터 설명하리라.
【문】 어찌하여 바로 반야바라밀의 법을 말하지 않고,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머무셨다고 말하는가?
【답】 위치[方]와 때와 사람을 말해 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머문다[住]고 하는가?
몸의 네 가지 거동이니, 즉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는 것, 이것을 머문다고 한다.
또한 마군의 무리를 두려워 떨게 하고, 제자들을 기쁘게 해서 갖가지 선정에 들게 하고자 여기에 머무시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머무름이 있으니,
하늘의 머무름[天住]2)ㆍ
범왕의 머무름[梵住]3)ㆍ
성인의 머무름[聖住]4)이다.
6욕천(欲天)에 머무는 것은
하늘의 머무름이요,
범천5)에서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6)에 이르기까지 머무는 것은 범왕의 머무름이요,
부처님ㆍ벽지불ㆍ아라한들이 머무는 것은 성인의 머무름이다. 이 세 가지 머무름 중에서 성인의 머무름에 머무르셨으니,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까닭에 왕사성에 머무신 것이다.
또한 보시ㆍ지계ㆍ착한 마음의 이 세 가지를 하늘의 머무름이라 하고,
자ㆍ비ㆍ희ㆍ사의 4무량심(無量心)7)을범왕의 머무름이라 하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세 가지 삼매를 성인의 머무름이라 하는데, 부처님은 성인의 머무름에 머무셨다.
또한 네 가지 머무름이 있으니,
하늘의 머무름ㆍ
범왕의 머무름ㆍ
성인의 머무름ㆍ
부처의 머무름[佛住]8)이다.
세 가지 머무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부처의 머무름이란 수릉엄(首楞嚴)9) 등
부처님들 한량없는 삼매ㆍ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10)ㆍ18불공법(不共法)11)ㆍ
일체지 등 갖가지 지혜와 8만 4천 가지 법장(法藏)이자 사람들을 제도하는 법문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부처님의 공덕이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니,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에 머무신다.
‘머무시다’를 간략히 설명해 마친다.
【문】 사바제(舍婆提)12)나 가비라바(迦毘羅婆)13)나 바라내(波羅奈)14)등의 성에도
모두 왕사(王舍)가 있거늘 어찌하여 이 성만을 왕사라 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마가다국의 왕이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에 얼굴은 둘, 팔은 넷이었다.
사람들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왕이 곧 그 몸과 머리를 쪼개어 광야에 버리니,
리라(梨羅)15)라는 나찰녀(羅刹女)16)가 그 몸을 도로 모아 젖을 먹여 길렀다.
나중에 장성하니 그 힘이 여러 왕을 합해 놓은 것 같았다.
그는 천하를 차지하고는 여러 나라의 왕 1만 8천 명을 모아 이들을 5산(山)17) 속에 두고는
큰 세력으로 염부제(閻浮提)를 다스렸으니, 염부제의 사람들은 이 까닭에 이 산을 왕사성이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마가다의 왕이 먼저 살던 성이 있었는데,
성이 불에 타면 다시 짓고 또한 타면 다시 지었다.
이렇게 하여 일곱 차례에 이르니, 나라 사람들은 노역으로 몹시 지쳤다.
왕이 매우 걱정하여 지혜로운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화재의 이유와 그들의 생각을 물으니,
어떤 사람이 ‘터를 옮기시오’ 했다.
왕은 곧 살 곳을 다시 구하다가 이 5산이 주위가 마치 성 같음을 보고는 여기에다 궁전을 짓고 살기 시작하니,
이 까닭에 왕사성이라 한다.”
또한 옛날에 이 나라에 바수(婆藪)18)라는 왕이 있었는데,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떠나 선인(仙人)이 되었다.
이때 집에 머무는 바라문들과 집을 떠난 선인들이 함께 토론을 하였는데, 집에 사는 바라문이 말했다.
“경서(經書)에 ‘하늘에 제사를 드릴 동안에는 살생을 하거나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였소.”
출가한 선인들이 말했다.
“하늘에 제사를 드릴 동안 살생을 하거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오.”
이렇게 끝없이 다투다가 출가한 바라문이 말했다.
“이 나라의 대왕이 출가하여 선인이 됐는데, 그대들은 그의 말이라면 믿겠는가?”
집에 사는 바라문들이 대답했다.
“믿겠소.”
출가한 선인들이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19)을 증인으로 삼아 뒷날 그에게로 가서 물어봅시다.”
집에 사는 바라문들이 그날 밤 먼저 바수 선인이 머무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로 물은 뒤에 바수 선인에게 말했다.
“내일 토론을 하거든 그대는 우리를 도와주시오.”
이와 같이 하여, 이튿날이 되자 출가한 선인들이 바수 선인에게 물었다.
“하늘에 제사를 드릴 동안에 살생을 해서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바수 선인이 대답했다.
“바라문의 법에 하늘에 제사를 드릴 동안에 살생을 해서 고기를 먹어도 좋다 하였소.”
출가한 선인들이 물었다.
“그대의 참 마음이라면 어떠한가?
정말 살생을 해서 고기를 먹어도 좋은가?”
바수 선인이 대답했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살생을 하고 고기를 먹어도 좋소.
그 생명은 하늘 제사로 인해 죽었으므로 하늘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오.”
집을 떠난 선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대는 크게 틀렸다. 그대는 큰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침을 뱉으면서 말했다.
“죄인아, 망해 버려라.”
이때 바수 선인이 땅으로 빠져들어 발등이 묻히었으니,
이것은 처음으로 대죄의 문을 연 때문이었다.
출가한 선인들이 말했다.
“그대는 참말을 하라. 만일 고의로 거짓말을 한다면 그대의 몸이 땅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이때 바수 선인이 말했다.
“나는 하늘을 위하는 까닭에 염소를 잡아 그 고기를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아오.”
이 말에, 곧 무릎까지 빠져들었다.
이와 같이 차츰차츰 빠져들어 허리까지 이르고 목에까지 이르니,
출가한 선인들이 말했다.
“그대가 지금 거짓말을 하다가 현세의 과보를 받고 있지만
다시 진실한 말을 한다면 비록 땅속까지 들어갔더라도 우리들은 그대를 건져낼 수 있다.”
그때 바수 선인이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존귀한 사람이니, 두 가지 말을 할 수가 없다. 또한 바라문의 4위타(圍馱)의 가르침에
갖가지 인연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법을 찬탄하고 있다. 이 가르침을 어기는 일에 비한다면
나 한 사람 죽는 일이 어찌 비교가 되랴.’
그리고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말했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서 살생하고 고기를 먹어도 죄가 되지 않소이다.”
출가한 선인들이 말했다.
“그대는 중한 죄를 범했다. 빨리 사라져라. 그대를 더 볼 필요가 없다.”
이에 온몸이 땅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바수 선인의 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서 염소를 죽이는데,
칼을 칠 적에는 ‘바수가 너를 죽인다’라고 외친다.
바수에게는 광거(廣車)20)라는 아들이 있었다.
자리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역시 세상 법을 싫어했으나 집을 떠나지는 못하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아버지이신 선왕(先王)께서 출가했다가 산 채로 지옥에 드셨다
내가 천하를 다스리다가 또한 큰 죄를 짓게 되리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스스로 처신해야만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가다가 만나기 어렵고 보기 드문 곳[稀有]을 보거든 그대는 거기에다 집을 짓고 살거라.”
이 소리만 들리고는 다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 한 마리가 질풍 같이 달리는 것을 보았다.
왕은 곧 그를 뒤쫓았으나 미칠 수가 없었으므로 더 이상 쫓기를 그만 두었다. 백관과 시종들도 따라오는 자가 없었다.
그때 문득 앞을 보니, 그곳은 다섯 산으로 주위가 둘러싸이고 험준하고 견고했다. 땅은 평평하고 반듯하며 부드러운 풀이 돋아 있었다. 보기 좋은 꽃이 땅에 두루했고 갖가지 숲과 나무와 꽃과 열매가 무성했다. 온천과 목욕터는 모두 청정하게 그 땅을 장엄했으며, 곳곳에 하늘의 꽃과 하늘의 향기가 가득했고 하늘의 풍악이 들려왔다.
이때 건달바(乾闥婆)의 광대들은 우연히 왕이 오는 것을 보자 제각기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곳은 희유하며 아직 본 적이 없는 곳이다. 내 이제 여기에다 집을 짓고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러 신하들과 백관들이 자취를 따라 왕을 찾아왔다.
王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에 공중의 소리를 들은 바에 의하면 ‘네가 가다가 만나기 어렵고 보기 드문 곳을 보거든
거기에다 집을 짓고 살라’ 하였는데 내가 이제 이 보기 드문 곳을 보았으니, 나는 여기에다 집을 짓고 살겠다.”
그리고는 곧 본래의 성을 버리고 이 산에 살았으니, 이 왕이 최초로 여기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차례로 살기 시작했는데 왕이 처음으로 궁전을 만들어 세웠던 까닭에 왕사성이라 불리는 것이다.
왕사성의 본기(本起)를 간략히 설명해 마친다.
【經】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論】 기사(耆闍)21)는 취(鷲)라 하고, 굴(堀)22)은 두(頭)라 한다.
【문】 어째서 취두산(鷲頭山)이라 하는가?
【답】 이 산의 머리가 새매를 닮았는데, 왕사성 사람들이 그 새매 같음을 보고
서로 전하기를 취두산이라 했으며, 그로 인하여 취두산이라 불렀다.
또한 왕사성 남쪽의 시타림(屍陀林)23)에는 시체가 많은데,
온갖 새매들이 항상 와서 쪼아 먹고는 다시 산꼭대기로 모여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취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은 다섯 산 가운데서 가장 높고 크며, 좋은 숲이 많고 물이 많아 성인이 머무를 만한 곳이다.
【문】 기사굴산의 뜻은 이미 알았거니와 부처님은 어찌하여 왕사성에만 계셨는가?
부처님의 법은 두루 모든 것을 사랑하시되 마치 해가 만물을 비추면 광명을 받지 못하는 것이 없듯이 해야 하거늘,
구지니(漚祇尼)24) 대성과
부루나발단(富樓那跋檀)25) 대성과
아람거다라(阿藍車多羅)26) 대성과
불가라바다(弗迦羅婆多)27) 대성 같은 이들
큰 성들은 사람도 많고 풍요하건만 머무르시지 않고
어찌하여 왕사성과 사바제 대성에만 주로 머무르셨는가?
또한 바라내(波羅柰)28)와
가비라바(迦毘羅婆)29)와
첨파(瞻婆)30)와 바시다(婆翅多)31)와
구섬비(拘睒鞞)32)와 구루(鳩樓)33)등의
성에는 가끔 머무르셨는데 어찌하여 왕사성과 사바제 대성에만 주로 머무르셨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두 곳에만 주로 머무셨음을 아는가?
부처님의 여러 경전을 보건대 대개는 두 성에 계시면서 말씀하셨고
일부가 그 밖의 성에 계시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답】 비록 부처님의 대자비는 균등하게 두루 미치지만,
구지니 등 대성은 변두리 나라인 까닭에 머무르지 않으셨다.
또한 미리차(彌離車)34)는 어리석고 악한 사람이 많고
선근이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니,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햇빛이 골고루 비출 때
꽃망울이 익어지면 즉시에 피지만
아직 익지 않은 꽃이라면
강제로 터뜨리지 아니하나니,
부처님도 그러하셔서
평등한 마음으로 설법을 하시되
선근이 익었으면 펴 주시고
아직 익지 않았으면 열지 않으시네.
그러기에 세존께서는
세 가지 인간 가운데 머무시니
지혜롭고 선근이 익었고
결사의 번뇌가 엷은 사람들이라네.
또한 은혜를 알기 때문에 왕사성과 사바제 대성에 많이 머무르셨다.
【문】 어찌하여 은혜를 알기 때문에 두 성에 많이 머무셨다고 하는가?
【답】 교살라국(憍薩羅國)35)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나라이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 빈바사라왕에게 답한 게송이 있다.
좋고 묘한 국토가
설산 기슭에 있어
풍요롭고 보물도 많으니
그 이름은 교살라라네.
해의 종족[日種]36)인 석씨의 아들들이 있었으니
나는 그들 가운데 태어나
늙음ㆍ병듦ㆍ죽음을 싫어하여
집을 떠나 도를 구했다네.
또한 교살라의 국왕인 바사닉왕이 사바제 대성에 살았고
부처님은 법의 왕이시니 역시 이 성에 사셨던 것으로, 두 왕이 한 곳에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교살라 나라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니, 은혜를 갚기 위해 사바제에 주로 계셨다.
【문】 은혜를 갚기 위해 사바제에 주로 살았다면, 가비라바성도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과 가깝거늘 어찌하여 많이 계시지 않았는가?
【답】 부처님은 모든 번뇌[結]가 다하여 남은 습기가 없으니, 친척들을 가까이하여도
특별히 여기는 생각[異狀]37)이 없다. 그러나 석씨 종족 출신의 제자들은 대체로
애욕을 여의지 못했으므로 친척들 가까이 있으면 물든 마음이 싹트게 되기 때문이다.
【문】 어째서 사바제의 제자들은 보호하지도 않으면서 사바제에만 주로 계셨는가?
【답】 가비라바 출신의 제자들은 많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본국에 돌아오시니,
가섭 형제 등 천 명의 비구가 본시 바라문의 법을 닦아 산중에서 고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초췌했다. 부왕이 이를 보자 그 비구들로서는 세존을 빛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곧 석씨 종족의 귀한 집 자제들이나 그 밖의 사람 가운데 젊고 건강한 사람을 한 집에
하나씩 뽑아 강제로 출가를 시켰다. 그들 가운데에는 착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이도 있었지만,
즐기지 않는 이도 있었으니, 이러한 비구들을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38)
하지만, 사바제 출신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바제에 주로 계셨으며
가비라바에는 많이 머물지 않으셨다.
또한 친척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바로 출가한 사람의 법이다.
친척들은 마음에 집착함이 불같고 뱀같다. 집에 사는 바라문도
학문을 위해서는 집에 있지 않거늘 하물며 집을 떠난 사문이겠는가.
또한 사바제성은 큰 성이지만 가비라성은 그렇지 못하다.
사바제성에는 9억 호의 인구가 사는데 여기에 계시는 시간이 적으면
많은 사람을 제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주 머무셨다.
또한 가비라바성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므로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고
닦아 선근이 익어지고 지혜가 예리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잠깐만 머물러
설법하시고 오래 머무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제도하시고는 바로 떠나신 것이다.
사바제 사람들은 처음으로 익히어 행한 이도 있고 오래 닦아 익힌 이도 있으며,
선근이 익은 이도 있고 선근이 익지 않은 이도 있으며, 지혜가 수승한 이도 있고
지혜가 둔한 이도 있으며, 갖가지 경서를 배워서 마음을 영리하게 연마하여
갖가지 삿된 소견의 그물에 걸려든 이도 있고 갖가지 스승을 섬기고 갖가지
하늘에 매이거나 갖가지 행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오래 계셨다.
마치 종기를 치료하는 의사가 종기가 이미 곪았음을 알면 곧 터뜨려서
고름을 짜내고 약을 주고는 떠나거니와 종기가 곪지 않았으면 오래 머물면서 치료를 해 주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제자들의 선근이 익어지고 교화가 끝나면 다시 딴 곳으로 가시지만
제도할 제자들의 선근이 익어지지 않았으면 오래 머무신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신 뜻은 중생들을 열반의 경계와 안온한 즐거움에 들도록 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사바제에 주로 계셨고, 가비라바에는 많이 계시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마가다국의 니련선하39) 가까이에 있는 구루빈나(漚樓頻螺) 마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는 법신(法身)40)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수도인 왕사성에 주로 계셨다.
【문】 왕사성과 사바제에 많이 머무신 인연은 이미 알았다. 그렇다면 이 두 성 가운데 어찌하여 왕사성에 더 많이 계셨는가?
【답】 태어나신 땅의 은혜를 갚기 위해 사바제에 많이 머무르셨다. 모든 중생은 모두가 태어난 땅을 생각하나니,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모든 논사(論師)들도
자신이 아는 법을 사랑하니
마치 사람들이 태어난 곳을 생각하고
출가를 했으나 여전히 다투는 것과 같네.41)
법신이 태어나신 땅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왕사성에 많이 머무신 것이다.
부처님들이 모두 법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들이
법신에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한다네.
법신이 생신(生身)42)보다는 수승하기 때문에 두 성 가운데 왕사성에 많이 계셨다.
또한 좌선할 정사(精舍)가 많기 때문인데,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하다.
곧 죽원(竹園)43)ㆍ
비바라발서(鞞婆羅跋恕)44)ㆍ
살다반나구하(薩多般那求呵)45)ㆍ
인다세라구하(因陀世羅求阿)46)ㆍ
살파서혼직가발바라(薩簸恕魂直迦鉢婆羅)47) 등 왕사성에는 다섯 개의 정사가 있는데,
이 가운데 죽원은 평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이렇게 많은 정사가 있지 않다.
사바제에는 두 곳이 있으니 한 곳은 기원정사(祇洹精舍)48)이고
또한 한 곳은 마가라모(摩伽羅母)49) 강당으로, 세 번째 것은 없다.
바라나사(婆羅奈斯)50) 나라에는 한 곳이 있으니
사슴숲 가운데 있는 정사로서 이사반타나(梨師槃陀那)51)라 하며,
비야리(毘耶離)52)에는 두 곳이 있으니
하나는 마하반(摩呵槃)53)이고 또한
하나는 미후지안(彌猴池岸) 정사54)이다.
구섬미(鳩睒彌)55)에는 한 곳이 있으니 구사라(劬師羅)56) 동산이다.
이와 같이 여러 나라에는 한 곳에 정사가 있거나
혹은 빈숲이 있을 뿐인데 왕사성에는 정사가 많아서 좌선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곳이기에 여기에 많이 머무셨다.
또한 여기에는 부나라(富那羅)57) 등 여섯 스들이 있어 장담하기를
“내가 곧 일체를 갖춘 사람이니 부처와 대론하리라”고 하며,
나아가 장조범지58)와 구가나대(拘迦那大)59)라는 성을 가진 바차(婆蹉)60)등은
모두 외도의 큰 논사이었다. 또한 장자 시리굴다(尸利崛多)61)와 제바달다(提婆達多)와
아사세(阿闍貰)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부처님을 해치려고 음해하며 불법을 믿지 않고 제각기 질투를 품었다.
이러한 무리들이 있는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많이 머무셨다.
마치 독초가 나는 근처에는 반드시 좋은 약초가 나는 것과 같으니, 이런 게송이 있다.
비유하건대 사자는
모든 백수의 왕이거늘
작은 벌레를 보고 소리 지르면
무리의 비웃음을 산다네.
호랑이나 이리 등의
맹수들 사이에서
기지개 켜고 크게 소리 지르면
지혜로운 사람들 옳다고 여기네.
모든 논사들이 사나운 호랑이 같거늘
이 무리 사이에서 두려움 없으시고
크게 지혜로운 이, 아는 것 많아
이런 무리 사이에서 으뜸이시라.
이렇게 크게 지혜롭고 아는 것 많은 사람들이
왕사성에 많이 사는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많이 계셨다.
또한 빈바사라왕이 가야사사(伽耶祀舍)62)에 왔을 때,
그는 부처님과 그 밖의 머리를 묶은[結髮] 천 명의 아라한을 청해 공양했는데,
그때 부처님께서 왕을 위해 설법해 주어 수다원도(須陀洹道)63)를 얻게 했다.
그러자 그는 부처님께 청하기를 “부처님과 스님들이 저의 왕사성에 오셔서 목숨이 다하도록
저의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 등을 받아 주십시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모두 공급하겠습니다” 하니,
부처님께서 곧 그의 청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왕사성에 많이 머무셨다.
또한 염부제의 사방 가운데 동쪽을 으뜸으로 여기니, 해가 처음 뜨기 때문이다.
이런 차례로 남쪽ㆍ서쪽ㆍ북쪽을 치는데 동쪽에서도 마가다가 으뜸이요,
마가타에서도 왕사성이 으뜸이다.
여기에는 12억의 집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아사세왕은 백성들이
줄어든다 하여 왕사성을 버리고 그 곁에다 다시 하나의 작은 성을 만들었으니,
길이와 너비가 각각 1유순(由旬)이요 이름은 파라리불다라(波羅利弗多羅)64)로서
그것마저도 다른 성들 가운데서 가장 크거늘 하물며 본래의 왕사성이겠는가.
더구나 여기에는 사람들이 모두 총명하고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도 많지만 다른 곳엔 이런 일이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반드시 도를 얻고자 한다면 때와 장소와 사람을 기다리는 법인데,
부처님은 석제환인(釋提桓因)65)과 8만 하늘의 무리들이 마가다국의 석실(石室)66)에서
도를 얻게 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많이 머무셨다.
또한 그 나라는 풍요해서 걸식하기가 쉽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또한 세 가지 인연 때문이니,
첫째는 빈바사라왕이 칙령으로 궁중에서 항상 천 사람의 비구에게 공양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수제가(樹提伽)67) 같은 이는 비록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항상 하늘 세계의 부귀와 쾌락을 누렸고 또한 부귀한 우바새68)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요,
셋째는 아파라라(阿波羅羅)69)용왕이 착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감화를 받아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세상의 굶주림을 없애기 위하여 항상 단비를 내려주어 나라가 풍요롭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장로 마하가섭이 가르침을 집성하고자 생각했다.
‘어느 나라가 풍요하고 걸식도 하기가 쉬워서 결집을 빨리 마칠 수 있을까.’
그리고는 다시 생각했다.
‘왕사성의 빈바사라왕은 명을 내려 항상 천 명의 비구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빈바사라왕이 죽더라도 이 법은 끊이지 않으리니, 여기에서는 음식을 얻기가 쉽고 가르침을 결집하기도 쉬우리라.
다른 곳에는 이처럼 항상 공양하는 일이 없다.만일 걸식을 할 때 외도들이 와서 토론을 하자 할 수도 있는데,
토론을 하자니 결집을 중단해야 되고, 토론을 피하자니 외도들이 말하되 ‘사문들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는 가장 뛰어난 천 명의 아라한을 가리어 기사굴산으로 데리고 가서는 경장을 결집하고자 했다.
이 세 가지 인연 때문에 마가다국은 걸식하기가 쉬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함(阿含)과
비니(毘尼)에서 말하기를
“비야리(毘耶離)국에는 때때로 흉년이 든다”고 하였고,
『항난타바난타용왕형제경(降難陀婆難陀龍王兄弟經)』70)에서 말씀하시듯이
사바제국에도 기아가 있으며, 또한 다른 나라에도 굶주리는 일이 있는데,
마가다국에는 이런 일이 없다. 그러므로 마가다국은 풍요롭고 걸식하기 쉬운 줄 아는 것이다.
또한 왕사성은 산중에 있어서 한가하고 고요한데,
다른 나라의 정사는 평지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서 오가기 쉬운 까닭에 조용하지 못하다.
또한 이 산에는 정사가 많은데
좌선하는 사람들이나 성인들이 모두가 조용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에 많이 모여 산다. 부처님은 성인으로서 좌선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왕사성에 많이 머무르셨다.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왕사성에 많이 머무르셨다.
【문】 왕사성에 머무르신 뜻이 그렇다면 어째서 죽원(竹園)에는 많이 머무시지 않고 기사굴산에만 주로 머무셨는가?
【답】 내가 이미 먼저 대답했듯이 성인이나 좌선하는 사람은 한적하고 고요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 이 밖에도 비바라발서(鞞婆羅跋恕)71) 등 네 산이 있거늘 어째서 많이 머무르지 않고 기사굴산에만 많이 머무르셨는가?
【답】 기사굴산이 다섯 산 가운데서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승한가? 곧 기사굴산의 정사는 성과는 가까우면서도 산에 오르기가 어렵다. 이 까닭에 잡된 사람이 오지 않고, 성이 가깝기 때문에 걸식하기에 피로하지 않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기사굴산에 주로 머무시고 다른 곳에는 머무시지 않았다.
또한 장로 마하가섭은 기사굴산에서 3장을 결집하고, 제도할 중생을 다 제도하고는
부처님을 따라 열반에 들려 했다.이른 새벽에 옷을 입고 바릿대를 들고 왕사성에 들어가 걸식을 한 뒤
기사굴산으로 올라와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리라.”
이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온갖 무루의 선정으로 스스로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이에 마하가섭의 제자들은 왕사성에 들어가서 귀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아십니까? 존자72) 마하가섭께서 오늘 무여열반에 드십니다.”
귀인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근심하면서 말했다.
“부처님께서도 이미 열반에 드셨고 마하가섭께서 불법을 보호해 유지하시다가
오늘 다시 무여열반에 드시려하시다니.”
귀인들과 비구들이 오후 네 시[哺時] 무렵 모두 기사굴산으로 모여드니
장로 마하가섭도 포시에 선정에서 일어나 대중 가운데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는 무상(無常)을 찬탄해 말했다.
“온갖 유위의 법은 인연으로 생겨난 까닭에
무상하고 본래 없는 채 지금 존재하며,
이미 있었던 것이 도리어 없어지므로 무상하다.
인연으로 생겨난 까닭에 무상하고,
무상한 까닭에 괴로움이며,
괴로움인 까닭에 나가 없고,
나가 없는 까닭에 지혜 있는 이는 나와 내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나와 내 것에 집착하면 한량없는 근심과 고뇌를 얻게 되리라.
온갖 세간에 대하여 싫어하는 생각을 내고, 욕망을 여의기를 바랄지어다.”
이와 같이 세계 안의 괴로움을 갖가지로 말하여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인도해 열반에 들게 했다.
이 말씀을 마치고는 부처님께 받은 승가리(僧伽梨)73)를 걸쳤다.
그리고는 의발(衣鉢)을 들고 지팡이를 짚고
마치 금시조(金翅鳥)74)가 날듯이 눈앞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라 몸의 네 가지 위의,
즉 눕고 앉고 다니고 멈추는 일로써 한 몸에서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어 동쪽 세계에 가득하게 하거나
여러 몸이 다시 한 몸이 되게 하며,
몸 위로 불을 내면서 아래로 물을 내거나 몸 위로 물을 내면 아래로는 불을 내기도 했다.
남쪽ㆍ서쪽ㆍ북쪽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보는 이 모두가 세상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모두 환희하게 한 뒤에 기사굴산 꼭대기에서 의발을 갖추고는 이렇게 서원했다.
“내 몸이 무너지지 않았다가 미륵(彌勒)75)이 성불하시거든
나의 이 골신(骨身)이 다시 나오게 되리라. 그리하여 이 인연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장 산마루의 돌 속으로 들어가니 마치 부드러운 진흙에 드는 것 같았다.
들어가자 산은 다시 합쳐졌는데 나중에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 세이고 키가 80척이 될 때에
미륵부처님이 나타나실 터인데, 그 부처님은 키가 160척이고,
얼굴의 길이는 24척이며 원만한 광채[圓光]가 10리에 뻗을 것이다.
이때 중생들은 미륵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 한량없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는데,
부처님은 대중에게
처음 설법하실 때 99억의 사람들이 아라한의 지위를 얻어 6신통(神通)이 구족하게 되며,
두 번째 대회(大會)에서는 96억의 사람들이 아라한의 지위를 얻고,
세 번째 대회에서는 93억의 사람들이 아라한의 지위를 얻게 되니, 그로부터 계속하여 무수한 사람을 제도하리라.
그때 사람들은 오랜 뒤에 싫증을 내고 게으름을 피우게 되는데, 미륵부처님이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자 발가락으로
기사굴산을 밟아 눌러서 열리라.
이때 마하가섭의 골신이 승가리를 걸치고 나오니,
그는 미륵의 발에 절하고 허공으로 올라가서 전과 같이 신통을 나타내고는
허공 가운데에서 몸을 멸해 열반에 들리라.이때 미륵부처님의 제자들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리라.
“이는 누구이기에 사람 비슷하나 작은 몸에 법의를 입고 능히 신통 변화를 보입니까?”
미륵부처님이 말씀하시리라.
“이는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이시니, 마하가섭이라 한다. 아란야(阿蘭若)76)를 행하여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아 두타행77)을 행하는 비구 가운데서 으뜸으로, 해탈과 더불어 6신통을 얻으신 큰 아라한이다.
그때의 인간 수명은 백 세로서 느는 일은 적고 주는 일은 많았다. 이렇게 적은 몸으로도 능히 이러한 일을 하시거늘
그대들은 큰 몸에 영리한 근기이면서도 어찌하여 이러한 공덕을 이루지 못하는가?”
이때 제자들은 모두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세상 싫어하는 마음을 내리라.
미륵부처님은 대중의 이러한 마음에 따라 갖가지 법을 말씀해 주시리니,
어떤 사람들은 각각 아라한ㆍ아나함78)ㆍ사다함79)ㆍ수다원의 지위를 얻고,
어떤 이는 벽지불의 선근을 심고, 어떤 이는 무생법인(無生法忍)80)을 얻어
아라한의 지위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고, 어떤 이는 하늘이나 인간에 태어나서 갖가지 복락을 받으리라.
이 까닭에 기사굴산은 복스럽고 길한 곳이며, 성인들이 머물기 좋아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성인들 가운데서 주인이기에 기사굴산에 많이 머무신 것이다.
또한 기사굴산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들이 머무시는 곳이다.
『부루나미제레야니자경(富樓那彌帝隷耶尼子經)』8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곧 부처님께서 부루나(富樓那)82)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령 삼천대천세계가 겁의 불길에 다 타거나 다시 생기거나 나는 항상 이 산에 머무르고 있거늘
중생들은 번뇌[結使]에 얽매여 있어 부처를 볼 공덕을 짓지 않는 까닭에 나를 보지 못한다”고 하신다.
또한 기사굴산은 청정하고 맑아서 3세의 부처님과 보살들을 받아들이기에 달리 이와 같은 곳이 없다.
그러므로 기사굴산에 많이 머무셨다.
또한 마하연경(摩訶衍經)83)들을 주로 기사굴산에서 말씀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많이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곳은 정결하고 복덕이 있고 한가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3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머무시고
시방의 보살들도 찬탄하고 공경하는 곳이며, 하늘84)ㆍ용85)ㆍ야차86)ㆍ아수라87)ㆍ가루라88)ㆍ건달바89)ㆍ
견다라90)ㆍ마후라가91) 등 힘센 뭇 신들이 옹호하고 공경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 기사굴산은
부처님들이 머무시는 곳이고
성인들이 쉬는 곳이며
모든 것을 덮어 가려 주는 까닭에
뭇 고통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오직 참된 가르침만이 있다네.
또한 여기는 항상 시방의 한량없고 지혜와 복덕과 큰 힘을 구족한 보살들이 찾아 와서
석가모니부처님을 뵙고 예배하고 공경하며 법을 들었으니,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
마하연경을 말씀하실 때에는 주로 기사굴산에 머무셨다. 모든 마하연경에서 반야(般若)가 으뜸인데,
이제 그것을 말씀하시려 하거늘 어찌 기사굴산에 머무시지 않겠는가.
‘기사굴산에 머무셨다’라는 인연을 대략 말하여 마친다.
6. 초품 중 큰 비구승과 함께하시었다를 풀이함
【經】 큰 비구승92)과 함께 [머무셨다.]
【論】 함께[共]93)라 함은 한 장소, 한때, 한마음, 한 계행, 한 소견, 한 도, 한 해탈을 말하니,
이것이 ‘함께’이다[마하(摩訶)94)는 진나라말로는 ‘크다(大)’ 혹은 ‘많다(多)’ 혹은 ‘뛰어나다(勝)’는 뜻이다.]
어찌하여 크다 하는가?
모든 무리 가운데서 가장 높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가 끊겼기 때문이며,
천왕(天王)95) 등 큰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많다 하는가?
수효가 5천에 이르는 까닭에 많다고 한다.
어찌하여 훌륭하다 하는가?
일체의 96종의 논의96)를 능히 깨뜨리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비구(比丘)라 하는가?
비구란 구걸하는 자[乞士]라 하나니, 청정하게 살아가는 까닭에 걸사라 하는 것이다.97)
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사리불(舍利弗)98)이 성에 들어가서 걸식을 하고는 벽을 향해 앉아서 먹고 있었다.
이때 정목(淨目)99)이라 부르는 여자 범지가 와서 사리불을 보자 이렇게 물었다.
“사문이여, 그대는 먹고 있는가?”
사리불이 대답했다.
“먹고 있다.”
정목이 다시 물었다.100)
“그대는 하구식(下口食)101)을 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앙구식(仰口食)102)을 하는가?”
“아니다.”
“ 그러면 방구식(方口食)103)을 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사유구식(四維口食)104)을 하는가?”
“아니다.”
정목이 말했다.
“음식을 얻는 법[食法]에는 네 가지가 있다.
나는 그대에게 모두 물어 봤는데 모두 아니라 하니, 알 수가 없구나. 그대는 설명해 달라.”
사리불이 대답했다.
“출가한 사람이 약을 조합하거나 곡식을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등의 일로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하다면 이를 하구식이라 한다.
출가한 사람이 별자리나 해와 달이나
바람ㆍ비ㆍ우레ㆍ번개ㆍ벼락을 관찰하는 등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이를 앙구식이라 한다.
출가한 사람이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 아첨을 떨면서 사방으로 심부름을 다니거나
교묘한 말로써 많은 것을 구해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이를 방구식이라 한다.
출가한 사람이 갖가지 주술을 배워 길흉을 점쳐주는 등
갖가지 깨끗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이를 유구식이라 한다.
누이여, 나는 이 네 가지 부정한 식사법[不淨食]에 떨어지지 않으니,
나는 오직 청정한 걸식으로 살아간다.”
이때 정목은 청정한 법식(法食)105)을 설함을 듣고는 기뻐하며 믿고 이해하니,
그 때문에 사리불은 법을 설해주어 수다원도(須陀洹道)를 얻게 했다.
이와 같이 청정하게 걸식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걸사라 한다.
또한
비(比)는 ‘부수다[破]106)’이며
구(丘)는 ‘번뇌’107)이니,108) 번뇌를 능히 깨뜨리기 때문에 비구라 하는 것이다.
또한 출가한 사람을 비구라 하니,
마치 호한(胡漢)ㆍ강로(羌虜)109)가 제각기 이름이 있는 것 같다.
또한 계를 받을 때에 스스로 “나 아무개 비구는 목숨이 다하도록 계를 지니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기 때문에 비구라 한다.
또한
비는 ‘두려워하다[怖]110)’이고,
구는 능(能)111)이다.112)
곧 마땅히 마왕과 마의 백성을 두려워해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계를 받아야 한다.
이때 마(魔)가 겁을 내는 것이다.
어찌하여 겁을 내는가?
마왕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반드시 열반에 들게 되리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고 일심으로 계를 받으면
이 사람은 차츰차츰 번뇌를 끊고 괴로움을 여의어 열반에 들 것이다” 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승가(僧家)113)라 하는가?
승가는 진나라에서는 무리[衆]라 한다. 곧 많은 비구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승가라 한다. 예를 들어 큰 나무가 모여 있으면
숲이라 하지만 하나하나의 나무를 숲이라 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하나의 비구를 승가라 하지는 않지만,
하나하나의 비구를 제하고는 승가도 없나니, 모든 비구가 화합해 있기 때문에 승(僧)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이 승가에 네 종류가 있으니,
유수승(有羞僧)114)ㆍ
무수승(無羞僧)115)ㆍ
아양승(啞羊僧)116)ㆍ
실승(實僧)117)이다.
어찌하여 유수승이라 하는가?
계를 지키어 깨뜨리지 않고 몸과 입을 깨끗이 간직하며 좋고 나쁨을 잘 분별하되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를 유수승이라 한다.
어찌하여 무수승이라 하는가?
계를 범하고 몸과 입을 깨끗이 간직하지 못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 것을 무수승이라 한다.
어찌하여 아양승이라 하는가?
비록 계는 범하지 않았으나 둔하여 지혜가 없고 옳고 나쁨을 가릴 줄 모르고 가볍고 무거움도 모르고
죄 있고 죄 없음도 모르고, 대중에 일이 있어 두 사람이 싸우면 판결을 하지 못하고 잠자코 말이 없는 것이
마치 흰 염소가 사람이 죽어도 소리치지 못하는 것 같은 이를 아양승이라 한다.
어찌하여 실승이라 하는가?
유학(有學)이나 무학(無學)이 네 가지 과위에 머물러서 4향도(向道)를 실천하는 것을 실승이라 한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승은 함께 백일갈마(百一羯磨)118)를 하고,
계를 설하고,119) 법랍을 받는[受歲] 등 갖가지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실제의 성문승120)은 6천5백이요,
보살은 두 종류인데
유수승과 실승이다.
이 실승으로써 나머지도 모두 승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비구승이라 부르는 것이다.
【經】 대략의 수효 5천 분(分).
【論】 【문】 어찌하여 대략의 수효라 하는가? 곧 조금 지나거나 조금 모자라는 것을 대략의 수효라 한다.
어찌하여 분(分)이라 하는가? 곧 많은 대중에서 일부분을 취한 까닭에 분(分)이라 한다.
이 비구들이 천만 명인데 그 가운데서 일부분을 취한 5천 사람이니, 그러므로 5천 분이라 한다.121)
【經】 모두가 아라한(阿羅漢)이었다.
【論】 【문】 어찌하여 아라한이라 하는가?
아라(阿羅)122)는 도적123)이요,
한(漢)124)은 깨뜨림[破]125)이니,126) 곧 모든 번뇌의 도적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한다.
또한 아라한은 모든 누(漏)127)가 다하였기 때문에 온갖 세간과 하늘과 사람의 공양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아(阿)128)는 부정하는 것[不]이요,
나한(羅漢)129)은 태어남[生]130)이니,131) 곧 다시는 뒷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아라한이라 한다.
【經】 모든 누(漏)가 이미 다했다.
【論】 삼계(三界) 가운데에서 세 가지 누132)가 이미 다하여 남음이 없기 때문에 누가 다했다 한다.
【經】 다시는 번뇌가 없었다.
【論】 모든 결사의 흐름[結使流]ㆍ
수액(受扼)133)ㆍ
결박[縛]134)ㆍ
덮개[蓋]ㆍ
견해[見]135)ㆍ
얽매임[纏]136) 등이 다 끊겼으므로 번뇌가 없다고 한다.
【經】 마음으로 잘 해탈하였고[心解脫] 지혜로도 잘 해탈하였다[慧解脫].
【論】 【문】 어찌하여 마음으로 좋은 해탈을 얻고 지혜로 좋은 해탈을 얻었다 하는가?
【답】 외도로서 욕심을 여읜 자는 한 장소와 한 도에서만 심해탈을 얻을 뿐 온갖 장애의 법에서 해탈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을 ‘마음으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고, 지혜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다’ 한다.
또한 아라한들은 두 가지 도에서 심해탈을 얻나니,
견제도(見諦道)137)와
사유도(思惟道)138)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다 한다. 아직 배울 것이
남은 사람[學人]은 비록 심해탈을 얻기는 해도 훌륭한 해탈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번뇌[結使]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도들은 길을 돕는 가르침[助道法]이 만족치 못하나니,
하나의 공덕만을 행하거나 혹은 두 가지 공덕만을 행하고서 도를 구하나 얻지 못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보시만을 해서 청정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며, 또한 어떤 사람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서 말하기를 “능히 근심과 걱정을 벗어나며, 항상 즐거운 국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여덟 가지 청정한 도가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깨달음이요,
둘째는 들음이요,
셋째는 경을 읽음이요,
넷째는 안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요,
다섯째는 큰 중생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요,
여섯째는 하늘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요,
일곱째는 좋은 스승을 만남이요,
여덟째는 크게 보시를 하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러니 앞의 사람은 여덟째 것만을 청정한 도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어떤 외도는 보시와 지계만을 청정한 도라 하고,
또한 어떤 이는 보시와 선정만을 청정한 도라 하고,
또한 어떤 이는 보시와 지혜 구하는 것만을 청정한 도라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길은 충분하지 못하다. 공덕이 없거나 공덕이 적으면서 청정하다 하면
이 사람은 비록 한 곳에서는 심해탈을 얻을지라도 호해탈(好解脫)이라 할 수는 없나니,
열반의 도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생ㆍ노ㆍ병ㆍ사의 큰 바다를
공덕 없는 사람은 건너지 못한다.
공덕이 적은 이도 건너지 못하니
길을 잘 행하라 하심은 부처님의 말씀이라.
여기에서 『수발타범지경(須跋陀梵志經)』139)을 얘기해야 하리라.
수발타140) 범지는 120세에 5신통(神通)141)을 얻고서 아나발달다(阿那跋達多)142) 못 가에 살고 있었다.
밤에 꿈속에서 보니, 사람들이 모두 장님이 되어 벌거벗은 채 어둠 속에 서 있었으며, 해는 떨어지고
땅은 깨어지고 바다는 마르고 큰 바람이 일어 수미산을 불어 깨트려 흩어버리는 것이었다.
깨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무슨 까닭일까? 나의 목숨이 다하려는 것인가. 혹은 천지의 주인[天地主]이 떨어지려는 것인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 이러한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세상부터 선지식143)이었던 신(神)이 있었는데,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수발타에게 말했다.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일체지를 갖추신 분이 계시니, 부처님이라 한다.
그 분이 새벽녘에 무여열반에 드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꿈을 꾼 것이지 그대의 몸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이때 수발타는 이튿날 구이나갈국(拘夷那竭國)144)의 숲 속에 이르러 아난(阿難)이 경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난에게 물었다.
“내가 듣건대 그대의 스승이 새로이 열반의 진리를 말씀하시고 오늘 저녁 한밤중에 열반에 드신다 합니다.
저에게 의문이 있으니 부디 부처님을 뵙고 내 의문을 해결하게 해 주시오.”
아난이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몸이 극히 피로하시니, 그대가 따져 묻는다면 세존을 번거롭게 할 것이오.”
수발타가 마찬가지로 거듭 청하고 세 번째 청하니, 아난도 세 번까지 처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때 부처님께서 멀리서 이 대화를 들으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수발타 범지가 내 앞에 와서 마음껏 따지고 묻도록 허락하라. 그는 나의 마지막 도를 얻은 제자가 될 것이다.”
이때 수발타가 부처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는 한쪽에 앉아서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외도들이 은애(恩愛)와 재물을 버리고 출가하였어도 모두가 도를 얻지 못했거늘
오직 사문 구담(瞿曇)만은 도를 얻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염부제 땅에 있는 6사(師)145)의 무리들이 모두 말하되
‘내가 일체지를 갖춘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인지요?”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내 나이 열아홉에
집을 떠나 불도를 배웠다.
내가 출가한 뒤 오늘까지
이미 50년이 지났다.
청정한 계와 선과 지혜를
외도는 하나도 갖지 못했고
아주 조금도 없거늘
하물며 온갖 지혜이겠느냐.
“만일 8정도(正道)146)가 없다면 여기에는 제1과도 제2ㆍ제3ㆍ제4과도 없거니와
만일 8정도가 있다면 여기에는 제1과와 제2ㆍ제3ㆍ제4과가 있느니라.
수발타야, 나의 법에는 8정도가 있으니, 여기에는 제1과와 제2ㆍ제3ㆍ제4과가 있느니라.
그 밖의 외도의 법은 모두가 공하여 도도 없고 과도 없고 사문도 없고 바라문도 없나니,
이렇게 나는 대중 가운데서 진실로 사자후를 외치노라.”
수발타는 이 법문을 듣고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부처님보다 나중에 열반에 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처님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스스로의 신통력으로 몸에서 불을 내더니 몸을 태워 멸도를 택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덕이 없거나 공덕이 적으면 조도법이 원만히 갖추어지지 못한다” 하셨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든 공덕이 구족하므로 능히 제자들을 제도하시나니, 마치 작은 약장사는 한 가지 약이나 두 가지 약뿐으로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중대한 병을 고치지 못하지만 큰 약장사는 여러 약을 갖추고 있기에 모든 병을 다 치료하는 것과 같다.
【문】 삼계의 온갖 번뇌를 여의는 까닭에 심해탈을 얻는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욕에 물든 마음을 여의면 해탈을 얻는다’ 하시는가?
【답】 애욕[愛]은 능히 마음을 얽매고 막는 큰 힘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만을 말씀하시고
다른 번뇌를 말씀하시지 않았으니, 애욕이 끊어지면 다른 번뇌도 끊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온다” 하면 반드시 데리고 온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애욕도 그렇다.
또한 수건의 한 끝을 잡으면 나머지는 모두 따르는 것같이, 애욕에 물드는 일 역시 그와 같아서
애욕이 끊기면 나머지 번뇌는 이미 다 끊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번뇌[結使]는 애(愛)와 견(見)에 속하나니, 애에 속한 번뇌는 마음을 가리고, 견에 속한 번뇌는 지혜를 가린다.
그러므로 애를 여의는 까닭에 애에 속했던 결과 사 역시 여의게 되어 심해탈을 얻는다. 이와 같이 해서 무명을 여의는
까닭에 견에 속하는 결과 사도 여의게 되어 혜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5천명의 아라한은 물러나지 않는 법에서 무생지(無生智)147)를 얻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훌륭한 해탈을 얻고 지혜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다 하나니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러나는[退法] 아라한이 시해탈(時解脫)을 얻음은 마치 구제가(劬提迦)148) 등이 비록 해탈을 얻었으나
퇴법인 까닭에 훌륭한 해탈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經】 마음이 길들여져 유연했다.
【論】 어떤 이가 공경하고 공양하거나 성내고 때리더라도 마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소중한 보배를 얻거나 기와쪽을 얻거나 동일하게 보고, 칼을 들어 손발을 끊거나
전단향을 몸에 발라 주거나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또한 음욕ㆍ진애ㆍ교만ㆍ의견(疑見)149)의 근본 번뇌가 이미 끊겼으므로 마음이 잘 길들었다 한다.
또한 이 아라한들은 욕망에 물들기 쉬운 곳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고, 성내기 쉬운 곳에서도 성내지 않고,
우치해지기 쉬운 곳에서도 우치해지지 않고 6정(情)을 지키고 보호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잘 길들여졌다 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사람이 6정을 수호함이
잘 길들여진 좋은 말같이 하면
이는 실로 지혜로운 사람이니
모든 하늘이 우러러 받든다.
그 밖의 범부들은 6정을 잘 수호하지 못하여 음욕ㆍ성냄ㆍ교만ㆍ어리석음ㆍ의혹ㆍ사견을 끊지 못했으므로
잘 길들지 못했으니, 마치 길들여지지 않고 유연하지 않기가 사납고 버릇 나쁜 말과 같다.
그러므로 아라한들을 마음이 잘 길들여지고 유연하다 하는 것이다.
【經】 마하나가(摩訶那伽).
【論】 마하(摩訶)는 대(大)요,
나(那)는 불(不)이요, 가(伽)는 죄(罪)이다.150)
아라한들은 모든 번뇌가 끊겼다. 그러므로 부죄(不罪)라 한다.
또한 나가(那伽)는 용(龍)이고도 하고 코끼리[象]라고도 한다.
이 5천의 아라한들은 무수한 아라한 가운데서도 가장 힘이 세다.
그러므로 용 같고, 코끼리 같다 한다. 물로 다니는 것 가운데에서는
용의 힘이 으뜸[大]이요, 육지로 다니는 것 가운데에서는 코끼리의 힘이 으뜸이다.
또한 잘 길들여진 코끼리왕은 능히 큰 무리의 군사를 무찌르고 곧장 뛰어든다.
고개를 돌리거나 칼과 몽둥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물과 불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니
, 도망가거나 물러섬이 없어 죽음에 이르러도 피하지 않는다.
아라한들 역시 그와 같아서 선정과 지혜를 닦았으므로 마군과 모든 번뇌[結使]의 도적을 능히 무찌르고,
욕하거나 때려도 원망하거나 성내지 않으며, 늙음ㆍ죽음의 물ㆍ불도 두려워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큰 용왕은 큰 바다에서 일어나 큰 구름을 일으키어 온 허공을 두루 덮게 하고, 큰 번개와 광명을 놓아 천지를 밝게 비추며, 큰 비를 내려 만물을 윤택하게 한다. 아라한들 역시 그와 같아서 선정과 지혜의 큰 바다에서 일어나 자비의 구름을 일으켜서 축축이 적셔줄 중생이 있는 곳에까지 미치게 하며, 큰 광명과 갖가지 변화를 나타내고 실상의 법을 연설하여 제자들의 마음을 적시어 선(善)의 싹이 돋아나게 한다.
【經】 할 일을 이미 다했다.
【論】 【문】 무엇을 할 일[所作]151)이라 하며, 무엇을 이미 다했다[已辨] 하는가?
【답】 신(信)ㆍ계(戒)ㆍ사(捨)ㆍ정(定)152) 등 온갖 착한 법을 얻었기 때문에 할 일이라 하고,
지혜ㆍ정진ㆍ해탈 등 모든 착한 법을 얻었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하나니,
두 가지 법이 구족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할 일을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모든 번뇌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애욕에 속하는 번뇌요,
또한 하나는 견해에 속하는 번뇌이다. 애욕에 속하는 번뇌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할 일이라 하고,
견해에 속하는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색법(色法)153)을 잘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할 일이라 하고, 무색법(無色法)154)을 잘 보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가견(可見)과 불가견(不可見)155), 유대(有對)156)와 무대(無對)157) 등 두 가지 법도 이와 같다.
또한 불선(不善)과 무기법(無記法)158)을 끊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선법(善法)을 사유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문(聞)ㆍ사(思)의 지혜를 성취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수(修)의 지혜를 성취하였으므로 이미 다했다 한다.
갖가지 세 가지로 된 모든 법 역시 모두 이와 같다.
또한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159) 등을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고법인(苦法忍) 등 무루의 선근들을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견제도(見諦道)를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사유도(思惟道)를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유학도(有學道)를 성취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무학도(無學道)를 성취하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심해탈을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혜해탈을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누(漏)를 다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공해탈(空解脫)을 얻는 까닭에 이미 끝냈다 한다.
또한 온갖 번뇌[結使]를 제거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때 아닌[非時] 해탈을 얻은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스스로의 이익을 끝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이와 같이 할 일을 이미 다했다는 이치를 자유롭게 설명할 수 있다.
【經】 짐을 버리어 능히 짊어질 수 있었다.
【論】 5중(衆)이 거칠고 무거워서 항상 괴롭히기 때문에 짐[擔]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짐이라 하는가? 5중(衆)이 짐이다” 하신 것과 같다.
아라한들은 이 짐을 이미 제거했다. 그러므로 ‘짐을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능히 짐을 진다’ 했는데,
불법 가운데에는 두 가지의 짐이 있으니,
공덕의 짐과 남에게 응하는 짐이다.
전자는 스스로를 이롭게 함이요, 후자는 남을 이롭게 함이다.
모든 누가 다하고 원망 없는[不悔] 해탈 등 모든 공덕을 갖춘 것을 일컬어
‘스스로를 이롭게 함’이라 하고, 신(信)ㆍ계(戒)ㆍ사(捨)ㆍ정(定).혜(慧) 등의 모든 공덕을
능히 남에게 줄 수 있으면 이를 ‘남을 이롭게 함’이라 한다.
이 아라한들은 스스로의 짐과 남에 응하는 짐을 능히 질 수 있기 때문에 ‘능히 짐을 진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비유하건대 큰 소가 강력한 힘으로 무거운 짐을 능히 감당해 내는 것과 같으니,
이 아라한들 역시 그와 같아서
무루의 근(根)ㆍ힘[力]ㆍ각도(覺道)를 얻어
능히 불법의 큰 일[大事]를 걸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들을 일컬어 ‘능히 짐을 지는 자’라 하는 것이다.
【經】 자기의 이득을 체득했다.
【論】 무엇을 자기의 이득[己利]이라 하고, 무엇을 자기의 이득이 아니라 하는가?
곧 모든 착한 법[善法]을 행하는 것을 자기의 이득이라 하고, 그 밖의 옳지 못한 법[非法]을 자기의 이득이 아니라 한다.
또한 신(信)ㆍ계(戒)ㆍ사(捨)ㆍ정(定)ㆍ혜(慧) 등 모든 공덕은 온갖 재물이나 보배보다 수승한 까닭이고,
이 세상과 뒷세상에서 항상 쾌락을 얻는 까닭이며, 능히 감로의 성(城)에 이르게 되는 까닭이니,
이러한 세 가지 인연 때문에 ‘자기의 이득’이라 한다.
「신품(信品)」160)에서 게송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믿음과 지혜를 얻으면
이 보물은 으뜸이며 제일이니
그 밖의 세간의 재물들은
이 법 보배에 미치지 못하리.
또한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고,
뒷세상에서도 즐거움과 열반을 얻어 항상 행복하다면[樂]
이를 자기의 이득이라 한다. 그 밖의 것은 자기의 이득이 아니다.
이런 게송이 있다.
세상이 알고 있는 갖가지 무도(無道)의 법은
금수(禽獸)와 꼭 같아 다를 바 없나니
바른 지혜와 요긴한 도법을 구하여야
늙음과 죽음 벗어나 열반에 들리라.
또한 8정도와 사문의 과를 아라한의 자기 이익이라 하는데,
이 5천 아라한은 득도(得道)와 과위의 두 가지 일을 모두 얻는 까닭에 자기의 이득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득을 얻었다’고 한다.
【經】 모든 유(有)161)와 결(結)162)이 다했다.
【論】 세 가지 유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163)이다.
욕계에 얽매이는 업은 인연을 취해 능히 뒷세상에서 그 업의 과보를 내니,
이것을 욕유라 한다. 색유와 무색유도 이와 같으니, 이것을 유라 한다.
결(結)이 다했다고 했는데,
결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애결(愛結)ㆍ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치결(癡結)ㆍ의결(疑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간결(慳結)ㆍ질결(嫉結)인데,
이들 결사가 다하여 유가 다함에 이르고, 이 유가 다하여 결이 다함에 이르는 것이다.그러므로 ‘유와 결이 다했다’고 한다.
【문】 아라한들은 번뇌[結使]가 영원히 다했다. 일체의 번뇌를 여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유는 결코 다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아직 멸도에 들지 않는 한, 안근 등의 5중(衆)이나 12입(入)ㆍ18계(界)의 모든 유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답】 방해될 것은 없다. 이는 과위(果位) 가운데서 인위[因]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와 같다.
“단월(檀越)164)이 음식을 보시할 때는 다섯 가지 일[五事]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곧 목숨[命]과 모양[色]과 힘[力]과 즐거움[樂]과 변재[𥊳]165)이다.
음식이 항상 다섯 가지 일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음식을 얻어먹고도 죽거니와 어떤 사람은 적은 양의 음식을 먹고도 살아간다.
음식은 다섯 가지 일의 인위가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음식을 보시할 때 다섯 가지 일을 베푼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음식을 끊으면 틀림없이 죽지만
먹은 이는 죽는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음식을 베풀면 다섯 가지 일을 준다 하시네.
또한 어떤 사람이 백 근의 금을 먹었다 하는 것과 같다. 금은 먹을 수 없지만
금이 음식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금을 먹었다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계율의 티166)가 된다” 하셨는데, 이는 여자가 계율의 티라는 것이 아니라 계율의 티가 되는 원인이기 때문에 여자는 계율의 티가 된다 하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과 같다. 아직 땅에 닿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죽었다”고 한다.
곧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한들은 이미 번뇌가 다하고 있는 까닭에, 존재[有] 역시 반드시 다할 것이 틀림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유와 결이 다했다’고 하는 것이다.
【經】 바른 지혜로 이미 해탈을 얻었다.
【論】 마건제(摩犍提)167) 범지의 제자가 그의 시체를 평상에 얹어 메고 성안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외치기를 “누구든지 눈으로 마건제의 시체를 보기만 하여도 그 사람은 모두가 청정한 도를 얻게 된다. 그러니 하물며 예배하고 공양하는 사람이겠는가” 하니, 그 말을 믿는 이가 많았다.
이 말을 들은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일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소인은 눈으로 보아 청정을 구하지만
이렇게 지혜 없는 자에게 참된 도는 없도다.
모든 결(結)과 번뇌가 마음에 가득하거늘
어떻게 눈으로 보아서 청정한 도를 얻으랴.
만일에 눈으로 보아 청정함을 얻는다면
지혜공덕이라는 보물이 무슨 소용 있으랴.
지혜의 공덕만이 청정함이 되나니
눈으로 보아 청정을 구함은 옳지 못하네.
그러므로 ‘바른 지혜로 해탈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문】 아라한들은 해야 할 일[所作]에 관해서는 이미 끝내서 다시는
더 나아가 구할 것이 없거늘 어찌하여 항상 부처님 곁에만 머물러 다른 곳에서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가?
【답】 일체 시방의 중생들도 부처님께 공양을 드려야 하지만, 아라한이 받은 은혜는 무거운 까닭에
더 많이 공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아라한들은 부처님을 좇아 무량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니,
결과 사가 끊어져서 신심(信心)이 더욱 많아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대덕 아라한들은 부처님 곁에서 공덕의
즐거움[樂味]을 느끼고, 공경하고 공양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까닭에 부처님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아라한들이 부처님을 둘러싸고 있는 까닭에 부처님의 덕은 더욱 존귀한 것이다. 마치 범천의 사람들이 범천왕을 둘러싼 것 같고, 삼십삼천(三十三天)168)이 석제환인을 둘러싼 것 같고, 귀인(鬼人)169)들이 비사문왕(毘沙門王)170)을 둘러싼 것 같고,
작은 왕들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둘러싼 것 같고, 병들었던 사람이 병이 나은 뒤에는 큰 의사171) 곁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한들이 부처님의 곁에 머무니, 아라한들이 둘러싸고 공양하기에 부처님의 위덕은 더욱 존귀한 것이다.
【문】 아라한들은 이미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자신의 이익을 얻었다면, 다시 가르침[法]을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반야바라밀을 설하실 때 5천의 아라한이 함께했는가?
【답】 아라한들은 할 일을 이미 다하기는 했어도 부처님께서 깊디깊은 지혜의 가르침으로써 시험하려 하신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물으신 것과 같다. 『바라연경(波羅延經)』172)의 아지타(阿耆陀)의 질문173)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종종의 학인 및
모든 수법(數法)의 사람들
이 사람들이 행하는 법을
여실하게 설해 주시옵소서.
여기에서 “무엇이 학인(學人)이고 무엇이 수법인(數法人)인가?”라며 물으셨지만 이때 사리불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세 번에 걸쳐 물었지만 세 번 모두 침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의단(義端)을 내보이시며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생(生)은 있는가, 없는가?”
사리불이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생은 있습니다.”
생이 있는 자는 멸을 이루고자 한다.
유위의 생법인 까닭에 학인이라 하고,
지혜로써 무생법(無生法)을 얻는 까닭에 수법인이라 한다.
이 경의 이 아지타의 질문 가운데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또한 혹은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의 모든 선정(禪定)을 아직 얻지 못했기에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을 견고하게 하고 깊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아라한들은 부처님 곁에서 가르침을 듣는 것이다.
또한 현전의 즐거움을 위함이기도 하니, 『난타가경(難陀迦經)』174) 가운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금생의 즐거움을 위해 가르침을 듣는 것이다.
또한 아라한들은 부처님 곁에서 가르침을 들으면서 마음으로 싫어하는 일이 없다.
『비로제가경(毘盧提迦經)』175)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곧 사리불이 비로제가176)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법 가운데에서 가르침을 들으면서 싫어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또한 큰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스스로 일심으로 제자 곁에서 가르침을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비난해서 “아라한은 이미 할 일을 다 마쳤거늘, 어찌해서 가르침을 듣는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비유하건대 배부른 사람도 좋은 음식을 만나면 다시 먹으려 하거늘 어찌 시장한 사람에게 먹지 말라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아라한들은 할 일을 이미 끝냈으되 항상 부처님 곁에서 법을 듣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해탈법 가운데 머무셨고 아라한들 역시 해탈법 가운데 머물렀다.
법에 머무는 자에 상응하는 권속들이 장엄을 이루는 것이다. 『전단비유경(栴檀譬喩經)』177)에서 말씀하셨다.
“어떤 전단 숲에는 이란(伊蘭)178)이 둘러싸고, 어떤 이란 숲에는 전단이 둘러싼다.
또한 전단이 있으면 전단이 숲을 이루고, 이란이 있으면 이란이 저절로 둘러싼다.” 부처님이나 아라한 역시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훌륭한 법의 해탈에 머무셨고, 아라한들도 훌륭한 법의 해탈에 머무니,
법에 머무는 자에 상응한 권속으로 장엄하고 있는 것이다.179)
대중이 둘러싼 것은 마치 수미산왕180)을 10보산(寶山)181)이 둘러싼 것 같고,
횐 코끼리 왕[白香象王]을 여러 횐 코끼리가 둘러싼 것 같고, 사자의 왕을 사자들이 둘러싼 것 같으니,
부처님 역시 그러하시다.부처님은 위없는 복전(福田)이기에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머무시는 것이다.
【經】 오직 아난만을 제하니, 그는 배움의 경지[學地]182)에서 수다원을 얻었을 뿐이었다.
【論】 【문】 어째서 아난만은 제외되었는가?
【답】 위에서 찬탄한 것은 아라한들인데, 아난은 그 범주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아직도 배우는 경지에 있어서 애욕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 대덕 아난은 제3의 스승이며 대중의 법장(法將)183)으로,
열반의 종자를 심은 지 이미 한량없는 겁을 지났고,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어 법장(法藏)을 지녔다.
대덕이시고 예리한 근을 지닌 분이거늘 어찌하여 아직껏 애욕을 여의지 못하고 배우는 경지의 사람으로 있는가?
【답】 대덕 아난은 본래 서원을 세우기를 “나는 들은 것 많은 무리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이 되리라” 했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에 의하면 아라한은 할 일을 이미 끝낸 자이기에 시중들고 공양하는 사람이 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며,
불법 안에서 능히 큰 일을 마치고 번뇌의 도적을 부숨으로써 부처님과 더불어 해탈의 평상에 나란히 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로 아난은 갖가지 경전을 듣고 지니고 외우고 관찰하였으므로 지혜는 많으나 마음을 거두는 힘이 적었다.
만일 두 가지 공덕이 균등하였더라면 누가 다한 경지[漏盡道]184)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 아난은 배우는 사람으로서 수다원의 지위에 머무른 것이다.
또한 세존께 시봉하기를 탐내었기 때문이다. 아난은 부처님의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서 생각했다.
‘내가 일찍 누가 다한 경지를 얻으면 문득 세존과 멀어져서 시봉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
그런 까닭에 아난은 비록 아라한의 도를 얻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억제하여 취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처(處)와 때[時]와 사람[人]이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처(處)에도 능히 법을 결집할
천명의 아라한이 아직 기사굴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처(處)이다. 세존께서 떠나실 때[時]에
도착하지 못한 채 장로 바기자(婆耆子)185)가 곁에 있지 않았다.186) 그러므로 장로 아난은 누가 다하지 못한 것이다.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것과 법을 결집할 대중이 모인 것과 바기자가 설법을 권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모여서 누진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또한 대덕 아난은 세상의 법을 싫어하는 생각이 적어서 다른 사람만 못했기 때문이다. 아난은 여러 세상마다 왕족으로 태어나 단정함이 견줄 데 없고 복덕이 한량이 없었다.
세존께서 친히 가까이해 주시고 항상부처님을 시중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나는 부처님을 친히 가까이 모시었기에 법의 보장(寶藏)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누진도법(漏盡道法)을 잃을 일은 두렵지 않다.’187)
이런 일 때문에 그다지 부지런히 힘쓰지 않았던 것이다.
【문】 대덕 아난의 이름은 무슨 인연으로 생겼는가?
전생의 인연인가?
부모가 지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인연에 의해서 지은 것인가?
【답】 전생의 인연인기도 하고, 부모가 지으셨기도 하고, 인연에 의하기도 하다.
【문】 어찌하여 전생의 인연이라 하는가?
【답】 석가문(釋迦文)부처님은 전생에 대광명(大光明)188)이라는 기와장이[瓦師]였다.
그때에 석가문이라는 부처님이 계셨으며, 사리불ㆍ목건련ㆍ아난이라 불리는 제자가 있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기와장이의 집에 가서 하루 저녁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기와장이가
풀자리[草座]와
등불과
꿀물[石蜜漿] 189) 등 세 가지로써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공양하고 발원했다.
“내가 미래의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과 5탁악세[五惡世]190)에 태어나서
부처를 이루면 지금의 부처님과 같이 석가모니라 하고, 나의 제자들도 지금의 제자들의 이름과 같아지리다.”
곧 부처님의 서원에 의해 아난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아난은 세세(世世)에 서원을 세우기를,
“나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로서 들은 것이 많은 이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
이름은 아난이라 불릴 것이다”고 했다.
또한 아난은 세세에 인욕에 의해 성냄을 제거했다. 그 인연으로 태어나자마자 용모가 단정했다.
그 단정함으로 인해 보는 이가 기뻐했기에 아난의 부모는 그를 아난이라 이름 지었다.
아난은 진나라 말로는 환희(歡喜)이다.
이것이 전생의 인연으로 이름이 생긴 사연이다.
어째서 부모가 이름을 지었는가?
옛날에 일종왕(日種王)191)이 있었는데 사자협(師子頰)192)이라 불렀다
. 그 왕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정반(淨飯)193)이요,
둘째는 백반(白飯)194)이요,
셋째는 곡반(斛飯)195)이요,
넷째는 감로반(甘露飯)이었다.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니, 감로미(甘露味)196)라 불렀다.
정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부처님과 난타(難陀)197)였고,
백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발제(跋提)198)와 제사(提沙)199)였고,
곡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제바달다(提婆達多)200)와 아난(阿難)201)이었고,
감로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마하남(摩訶男)202)과 아니로두(阿泥盧豆)203)였고,
감로미에게 외아들이 있었으니, 시바라(施婆羅)204)였다.
이 가운데서 실달다(悉達陀)205)보살이 점점 자라서 전륜성왕의 지위를 버리고
밤중에 출가하여 구루비라국(漚樓鞞羅國)206)의 니련선하 기슭에 이르러 6년 동안 고행을 했다.
이때에 정반왕이 아들을 염려하는 까닭에 항상 사자를 보내 문안하여 소식을 듣고자 했다.
“내 아들이 도를 얻었더냐? 아니면 병이 나거나 죽었더냐?”
사자가 와서 왕에게 말했다.
“보살께서는 오직 가죽과 뼈와 힘줄만이 상접하여 겨우 목숨을 지탱할 뿐 심히 허약하시니,
오늘이나 내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몹시 걱정하여 근심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내 아들이 전륜성왕도 되지 못하고 부처도 되지 못하면서
어찌 그다지 심한 고행만 하다가 아무것도 얻는 바 없이 죽어가게 되었느냐.”
이렇게 근심하고 괴로워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기운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때 보살은 고행하던 곳을 버리고 백 가지 맛이 구족한 우유죽을 드시고 몸의 기운을 회복했다.
니련선하의 물에서 몸을 씻은 뒤에 보리수 밑으로 가서 금강좌207)에 앉아 스스로 맹세했다.
“이 결가부좌를 헐기 전에 반드시 일체지를 이루리라. 만일 일체지를 얻지 못한다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때에 마왕208)이 18억의 무리를 이끌고 보살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감히 보살과 우열을 겨루고자 했다. 보살이 지혜의 힘으로 마군을 크게 무찌르니,
마왕이 당하지 못하고 물러가면서 생각했다.
“보살은 이길 수가 없으니, 그 애비를 괴롭혀 주리라.”
그리고는 정반왕에게로 가서 거짓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아들은 오늘 저녁에 이미 죽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놀랍고 두려움에 평상에서 떨어지니,
울부짖는 모습이 마치 뜨거운 모래 위의 고기와 같았다.
왕은 이때 통곡하면서 이러한 게송을 읊었다.
아이타(阿夷陀)209)도 거짓말이었고
상서로운 감응도 영험이 없도다.
이득을 얻으리라는 좋은 이름도
아무런 소득이 없구나.
이때에 보리수신210)은 매우 기뻐하면서
하늘꽃 만다라211)를 가지고 정반왕에게 와서 게송으로 말했다.
그대의 아드님은 도를 얻으셨으니
악마의 무리들 이미 깨져 흩어졌고
광명은 돋는 해 같으시니
두루 시방의 국토를 비쳐 주시네.
왕이 말했다.
“아까는 어떤 하늘이 와서 말하되 ‘그대의 아들은 이미 죽었다’ 했는데
그대는 이제 와서 악마를 무너뜨리고 도를 얻었다 한다. 두 말이 서로 어긋나니,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나무신이 다시 말했다.
“실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까 왔던 하늘은 거짓으로 ‘이미 죽었다’ 한 것입니다.
이는 마라가 질투심을 품고 괴롭히려 왔던 것입니다. 오늘 모든 하늘ㆍ용ㆍ신 등이 꽃과 향으로 공양하고,
공중에 비단기[繪]를 드리웠으며, 그대의 아드님은 몸에서 광명을 뿜어 하늘과 땅 사이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일체의 고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왕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비록 전륜성왕의 지위를 버렸으나 이제 법의 전륜왕의 지위를 얻었으니,
기필코 큰 이익을 얻을 뿐 잃어버리는 일은 없도다.”
왕이 이렇게 매우 기뻐하고 있는데 이때에 곡반왕 집의 사자가 와서 말했다.
“작은댁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왕은 몹시 기뻐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대단히 상서롭고도 기쁜 날이로다.”
그리고는 찾아온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아기는 꼭 아난이라 부르게 하라.”
이 때문에 그 부모는 아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 것이다.
어째서 인연에 의해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가?
곧 아난은 단정하고 청정하여 마치 맑은 거울과 같았다.
늙고 젊고 예쁘고 미움이나 얼굴과 맵시는 모두 몸에서 드러나는 법인데,
아난의 그 몸은 청정하여 여자들이 보기만 하면 욕심이 곧 발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어깨 덮는 옷[肩衣]을 입도록 허락하셨다.
이 아난은 능히 보는 사람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아난[歡喜]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에 논(論)을 지은 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찬탄을 했다.
얼굴은 맑은 보름달 같고
눈은 푸른 연꽃 같은데
불법의 큰 바닷물이
아난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갔도다.
사람들의 마음과 눈으로 하여금
보기만 하면 크게 환희하게 하고
부처님을 뵈러 온 모든 이들
잘 인도하여 화목함을 잃지 않네.
이와 같이 아난은 비록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나 부처님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스스로가 누를 다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공덕으로 인하여 무학[無學]의 경지는 아니나 무학의 범주에 들며, 아직 애욕을 여의지 못했으나
애욕을 여읜 자의 범주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5천인 가운데 있는 것이니, 실제로는 아라한이 아닌 까닭에 ‘아난만은 제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7. 초품 중 사중(四衆)을 풀이함
【經】 다시 5백 명의 비구니212)와 우바새ㆍ우바이213)가 있었으니, 모두가 성스런 진리를 보았다.
【論】 【문】 어째서 비구들은 5천 명인데 나머지 세 대중은 각각 5백 명씩뿐인가?
【답】 여자는 대체로 지혜가 적고 번뇌의 때가 두텁다.
다만 기쁨과 애행(愛行)을 구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번뇌[結使]를 끊고 해탈을 증득하는 이가 적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은 제일이며 심히 깊어서 얻기가 어렵다.
그러니 일체의 번뇌가 다하고 애욕을 떠나 열반을 얻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여자는 대개는 열반을 얻기 힘드나 비구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또한 우바새ㆍ우바이는 집에 있는 까닭에 마음이 맑지 못하고 누가 다하지도 못하니,
겨우 4성제(聖諦)를 얻을 뿐 학인(學人)이 됨에 그친다.
이런 게송이 있다.
공작은 비록 좋은 모양으로 몸을 단장했으나
큰 기러기처럼 멀리 날지 못한다.
재가[白衣]는 비록 부귀하고 힘은 있으나
출가한 공덕의 훌륭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구니들은 출가해서 세속의 일[世業]을 버렸더라도 지혜가 짧다.
이러한 이유에서 5백 명의 아라한 비구니가 있는 것이다.
백의와 두 대중214)은 집에 살면서 일에 분주하기 때문에 도를 얻는 자가 적으니, 각각 5백 명인 것이다.
【문】 5천 명의 아라한은 모두 찬탄하였는데 세 대중은 어찌하여 찬탄하지 않는가?
【답】 대중을 이미 찬탄했다면, 나머지도 역시 찬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만일 따로이 찬탄하면 외도의 무리들이 “어째서 비구니를 찬탄하느냐”며 비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속인[白衣]을 찬탄하면 “공양을 받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리라. 그러므로 찬탄하지 않으셨다.
【문】 모든 마하연경에는 부처님이 큰 비구의 무리들과 함께하시되 8천, 6만 혹은 10만 명과 함께하신다.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은 모든 경 가운데서 으뜸가고 위대하니,
촉루품(囑累品)에 말씀하시기를 “다른 경은 몽땅 망실하더라도 그 죄가 적지만 반야바라밀은
그 일구(一句)만 잃어도 그 죄가 크고 많다”고 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경』이 으뜸이고 위대함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으뜸가는 경에 대해서는 당연히 으뜸가는 큰 모임이 있어야 하거늘
무슨 까닭에 성문의 무리는 그 수가 적어서 단지 비구가 5천 명이요, 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는 각각 5백 명뿐인가?
【답】 이 대경(大經)은 심히 깊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에 성문의 수가 적은 것이다.
비유하건대 왕에게 진실한 사연이 있으면 범인에게는 보여 주지 못하고,
큰 사람이나 믿고 아끼는 자에게만 말해 주는 것과 같다.
또한 왕이 모의(模擬)를 할 때는 여러 대신이나 믿고 아끼는 자나 지혜 있는 자에게만 논의하고,
나머지 작은 신하들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 6천 5백 대중은 모두가 도를 얻었으니, 비록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두가 무루의 4신(信)215)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경에서 성문의 무리는 비록 크고 많으나 뒤섞여 있어서
모두 다 도를 얻지는 못했다.또한 여기에서는 먼저 천만 명의 아라한을 찬탄한 가운데 가장 수승한 5천명만을 뽑았던 것이다.
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역시 마찬가지이니, 수승한 이는 쉽사리 만나지 못하는 까닭에 많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