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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 이극로(李克魯·1893~1978)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조선말 큰 사전> 편찬의 주역
이극로(李克魯·1893~1978)는 독일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일제 강점기 최고의 인텔리였다. 그는 경제학자·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역사가, 한글운동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현재의 ‘한글학회’) 초대 간사장으로서 해방 전후에 우리말 맞춤법 제정, 표준말 사정, 철자법·외래어 표기법 정비 등을 주도하며 <조선말 큰 사전>을 펴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한글이 남과 북에서 지금처럼 제자리를 잡는 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한글운동가·민족운동가였다.
이극로는 1893년 경남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의령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곽재우의 고향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안희제,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조선어학회에 가장 많은 재정을 지원한 이우식의 고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이승만 정권 시절 국방부 장관과 총리서리를 지내며 악명을 떨친 신성모 또한 의령 출신이다. 이극로는 어릴 적부터 곽재우의 항일·애국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자랐다.
상해 생활과 모스크바 여행
1912년 4월 만주로 간 이극로는 서간도 회인(지금의 환인)현에서 동창(東昌)학교를 운영하던 이원식을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역사가·한학자인 박은식 선생의 저술 작업을 돕는 한편, 교사로 일했다. 이때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도가 됐다. 그는 주시경 밑에서 한글을 공부했던 김진과 함께 교원으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이극로는 만주 동창학교 시절 자신의 ‘문화민족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쌓았다.
이극로는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군사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1914년 음력 정월 그는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났으나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되돌아와야 했다. 이극로는 무송현 백산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했으며, 홍범도와 이진룡 등이 조직한 포수단에 참여해 독립군으로도 활동했다. 훈련장이자 사냥터였던 백두산은 감흥과 영감 그 자체였다. 마적떼 습격으로 죽을 고비도 수차례 겪었다. 고생하는 이극로에게 윤세복이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1916년 4월 이극로는 상해 프랑스조계에 있던 독일인이 경영하는 동제(同濟)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그는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3·1 운동 후 임시정부가 조직될 때 요인들의 활동을 적극 도왔다. 1920년 2월 동제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1921년 6월 신채호가 이극로를 국제공산당(코민테른) 3차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가는 이동휘의 통역과 경호원으로 추천했다. 이극로는 독일어와 중국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고, 영어와 일본어에도 조예가 있었다. 이동휘·이극로 일행은 1921년 6월 상해를 떠나 인도양의 험한 풍랑도 거스르면서 인도 불교 수도원, 아프리카 흑인의 서당, 성경에 나오는 시내(Sinai)산,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 피라미드, 로마 유적과 교황 궁전, 알프스산맥 등을 둘러봤다.
이극로는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하면서 크렘린궁전에서 레닌을 두 번이나 만났다. 러시아 10월 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트로츠키의 연설을 들었고, 크렘린궁전과 기계공장도 돌아봤다. 그는 모스크바 체류 중 만난 독일공산당 당수 빌헬름 피크(Wilhelm Pik)의 주선으로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1922년 초 이극로는 이동휘와 헤어지면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독일 유학 생활과 독립운동
1922년 4월 베를린대학에 입학한 이극로는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인류학·언어학을 부전공했다. 그는 독일에서 고학으로 5년간 공부한 끝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중국의 생사공업”이었는데,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중국의 견사(silk) 공업이 주제였다.
베를린대학 시절 그는 경제정책과 재정학의 권위자인 수마허(Hermann Schumacher) 교수 연구실에서 3년간 지도를 받았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사회운동> 등의 저자로 유명한 베르너 좀바르트(W. Sombart·1863~1941) 교수에게도 지도받았다. 사회사·경제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좀바르트의 저서를 밤을 새워 읽으며 자본주의 경제 발전사를 깊이 공부했다.
한편 이극로는 1923년 10월부터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과를 창설하고 조선어강사로 3년간 활동하며 한글을 서양인 학생들에게 소개했는데, 1923년 겨울학기부터 1926년 여름학기까지 17명이 수강했다. 그때 그는 서양인 학생들에게서 ‘그대 나라는 사전도 없는가?’라는 말을 듣고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껴 조국에 돌아가면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에 한평생을 바치자고 결심하게 된다.
독일 유학 중에도 이극로는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에 참여해 활동했으며, 재독한인대회에 일제를 규탄하는 영문과 독문 선전문을 작성해 배포했다. 그는 이미륵·김법린·황우일·허헌 등과 함께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
비타협 민족주의자로 활동
이극로는 1929년 1월8일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길에 미국을 경유했는데, 서재필·이승만·장덕수 등을 만났다. 장덕수가 “장차 귀국하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묻자, 그는 “나는 ‘코리언 딕셔너리(Korean dictionary, 한글사전)’ 만들러 갑니다”라고 답했다.
귀국 후 이극로는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신간회 활동, 한국 전통의 체육인 씨름과 상무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체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만주의 대종교 단체와 연계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만주 등지를 자주 왕래하면서 대종교 단체와 교류했고, 항일무장투쟁과 연계된 조국광복회 등의 소식도 접했다. 정의부 군사위원장 오동진의 서기 출신으로 1927년부터 동아일보 장춘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국광복회에서 활동한 최형우(일명 최일천)를 통해서는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소식을 상세히 전해 들었다. 최형우를 통해 보천보전투 소식을 직접 들은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주머니를 털어 소주 한 병을 사다가 나누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북한 자료에는 이극로 등이 서울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조국광복회 지부를 결성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는 않는다.
이극로에게 만주 소식을 전해 준 최형우는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자료를 이극로에게 보관해 줄 것을 부탁했고, 이극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보관했다가 해방 후 그에게 돌려줬다. 최형우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저술해 김일성 등의 항일무장투쟁을 처음으로 알렸다. 최형우는 해방 후 고려혁명당 정치부장,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6·25 때 서울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됐다.
조선어학회 활동과 한글운동
이극로의 민족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어학회 조직과 한글운동이다. 1929년 1월 귀국한 뒤 4월부터 조선어연구회에 입회해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14년간 한글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한 이극로는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어찌나 학회 활동에 열심이었던지 ‘물불’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이극로가 주도하는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어를 사정(査定)하며,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고 한글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에서 간사장(1930~1931, 1937~1942, 1945년), 상임간사(1932~1936, 1946년)를 맡아 해방 이후까지 모임을 이끌었다. 1942년 10월1일 조선어학회 사건 탄압으로 사전 편찬은 중단됐으나, 해방 이후 일제가 압수한 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돼 <조선말 큰사전> 1권이 1947년에 나왔다. 1957년 총 6권 3천558쪽으로 완성됐으나 이극로의 역할은 전혀 조명되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활동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함께 결정적인 어려움에 처했다. 1938년 중등학교의 조선어 교육을 금지했고, 1940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강요,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폐간 등 군국주의 파쇼체제 아래서 민족말살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극로가 간사장으로 있던 조선어학회는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 1939년 2월6일 임시총회를 열어 일제가 강요한 대로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들어갔다. 이극로는 친일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에도 자신의 이름을 걸어 두며 위장활동을 했다.
그럼에도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42년 9월5일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수색해 이극로가 쓴 “널리 펴는 말”이라는 편지글을 압수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 탄압을 시작했다. 일제는 1942년 10월1일에서 1943년 4월1일까지 사전편찬위원과 재정보조자 33명을 체포해 그중 16명을 기소했다. 16명 중 이윤재·한징은 심한 고문과 추위, 배고픔으로 옥사했고 12명은 재판에 넘겨졌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회원 중에서 가장 무거운 징역 6년의 판결을 선고받아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17일 석방됐다.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방 후 이극로는 재건된 조선어학회 간사장, 회장이 돼서 우리말 연구를 이끌었으며 조선 건민회(健民會)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건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극로는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무임소상에 발탁됐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등 요직에서 활동했다. 북한의 언어정책과 표준어운동인 ‘문화어운동’도 이끌었다.
이극로는 오랫동안 남에서 기피인물, 잊힌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그의 한글과 관련된 업적이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재조명되고 있다. 이극로의 민족운동을 올바르게 조명하고, 그의 한글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때다.
임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