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북방사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 [펌]
K스피릿 / 민 성 욱 박사 202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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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과 말갈 vs. 말갈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한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나라(민족)들과 말갈(靺鞨)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말갈(靺鞨)이 한민족과의 친연성뿐 아니라 한민족을 구성하는 일정한 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말갈과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발흥한 여러 북방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한다면, 한민족과 북방 민족들 간에도 그 연결고리가 있다고 하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고대 숙신(肅愼)은 단군조선이 본격적으로 중국 한족(漢族)에게 알려지기 전에 중국 한족들에게 먼저 알려진 존재이다. 처음에는 단군조선과는 종족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나, 중국 한족들의 압박에 못 이겨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지 퉁구스계와 융합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한족의 압박을 물리적으로 이겨내려면,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에 단군조선이 숙신에 대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과 동북아시아 북방 민족 간의 관계사를 통해 혈연적, 문화적, 언어적 융합이 일어났고, 그것이 종목명이 다를 뿐 북방유목 민족으로서 동일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고대 유목사회에서는 혈통을 중시하고 이동을 통한 선진문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빠른 기동력과 자유자재의 활쏘기 실력은 단기간 내에 세력을 팽창시킬 수 있었다. 말갈 또한 동일한 전철을 밟았으며 다른 북방 민족들보다는 늦었지만, 오히려 잠재된 역량이 발현되어 최후의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선진문화와 천하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덕택이었다.
지금도 동북아시아는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다. 우리 역사는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너무 많은 생채기가 났다. 이제 피해의식의 발로로 우리 역사만 부각하거나 확대하여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인정하고 실체를 정확하게 연구한 결과를 공유하고, 나라마다 이견이 있으면 충분한 학술 토론을 통해 역사적 갈등을 해소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북방 민족과 말갈(靺鞨) 간의 관계사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고대 역사 인식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이었다.
말갈은 실체가 있는 집단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른 북방유목 민족과 혈연적 융합과 고도의 선진문명을 가진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고유한 문화를 만들었으며, 내부 역량을 키워 발해 건국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고, 숙신-퉁구스계의 반란으로 여겨지는 여진족과 만주족을 거치면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말갈이 북방유목 민족으로서 고대 숙신과 단군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예맥계인 부여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와 서로 다른 관계를 유지하였고, 단군조선과 흉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신라와도 한반도 내에서 각축전을 벌여 왔다.
말갈은 유목민족의 특성상 광범위한 영역이 있었는데, 동일한 종족 계통으로 보는 숙신, 읍루, 물길, 여진, 만주로 이어지는 숙신-읍루계, 즉 퉁구스계 민족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역에 따라 친예맥계(부여, 고구려, 백제, 낙랑, 옥저 등), 친동호계(거란, 해, 실위, 몽골 등), 친돌궐계, 친중국계 등 대외관계를 달리하는 말갈 집단들이 존재했다. 그 이유는 말갈이 중앙집권 형태가 아니라 촌락 단위로 흩어져 있어 지정학적 위치, 정치적 상황,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독립적으로 대외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말갈은 고구려군의 용병이 되어 수와 당을 끝까지 괴롭히기도 하고, 나당전쟁 시에는 거란과 같이 당나라 군대에 편성되어 신라를 괴롭히기도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문왕 때는 신라의 중앙군사조직인 구서당 중 제6서당인 ‘흑금서당’의 일원이 되어 신라왕의 친위부대 역할을 하였다.
돌궐이 거란을 요서 지역에서 몰아낸 이후에는 송화강 유역에 있던 물길 집단이 요서 지역으로 이주해와 요서말갈(속말말갈, 백산말갈)로 친돌궐 또는 친고구려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옥저 지역에는 읍루가 이웃하고 있었는데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읍루가 내려와서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후에 백산말갈이 되어 속말말갈과 함께 고구려의 구성원이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말갈에서 발해말갈로 변신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발해 건국 후에는 말갈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발해의 기층민이 되어 발해 역사와 문화의 발전을 이끌었다. 발해는 동아시아 역사의 변방이었던 극동 지역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 올려‘해동성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발해가 주변의 제 종족들을 통합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춥고 황량한 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낸 비결은 훗날 거란이나 여진이 각각 요와 금 제국을 일으키는 데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결국 말갈의 후예인 여진족은 후금에 이어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게 된 청 제국을 탄생시켰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말갈로서 고수 및 고당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도록 견인차 구실을 했던 말갈은 전쟁 후 당으로부터 참혹한 학살이라는 보복을 당하기도 하였고 발해 건국 후에는 5경 15부 62주 중 막힐부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면서 일부는 고려, 요, 돌궐, 당, 여진 등으로 흩어졌지만 또 다른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훈족(흉노), 아바르족(유연), 튀르크족(돌궐) 등의 전철을 밟아 서유럽 지역에 강력한 인상을 남겼으며, 지금 헝가리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
- 21세기, 왜 북방인가?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풀꽃들을 우리는 야생화라고 부른다. 풀꽃의 생명력은 정말 경이롭다. 조그마한 공간만 있으면 척박한 환경에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말갈이 그러한 존재였다. 분명 독립된 문화를 갖고 고유한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으며,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때로는 주인공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왔다. 만주족이 숙신ㆍ식신ㆍ읍루ㆍ물길ㆍ말갈ㆍ여진 등으로 불리면서 만주와 한반도에 살아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신라ㆍ백제와 싸웠고, 고구려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발해의 건국을 도왔다. 여진족은 근세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출처 : https://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67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