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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10대왕 연산군과 중종조에 참판을 지낸 박종권의 야사를 읽으시면서 잠간 머리를 휴식하시기 바랍니다
-풍각쟁이 박중권-
남의 집 앞에서 각설이타령을 해 주고 동냥을 받는 젊은 풍각쟁이가 평안도 정주(定州) 땅 외딴 산골짝 조그만 동네 우물가에서 물 긷는 처녀에게 물 한 바가지를 얻어 마셨다.
“물로 목을 축이셨지만 까치고개를 넘어오자면 몹시 시장하실 텐데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초가삼간 처녀의 집에 가서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보리밥 한그릇을 비우고 나니 처녀의 부모가 삽짝문을 열고 들어왔다.
처녀의 부모는 유장(柳匠)이었다.
버들가지 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로 고리짝이나 바구니를 짜서 파는 천민으로 사람들은 고리백정이라 불렀다.
개울가에 움막을 지어 놓고 거기서 일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풍각쟁이는 처녀의 부모에게 인사하고 떠나려는 데 처녀가 사립문 밖에까지 따라 나왔다.
“마땅히 밤이슬 피할 곳이 없으면 저희 움막에서 주무십시오.”
비록 배는 해결을 했는데 잘 곳 걱정을 하던 풍각쟁이는 귀가 번쩍 띄였다.
움막에서 하룻밤 잘 잔 풍각쟁이는 이른 아침, 떠나기 전에 처녀에게 인사나 하고 가야겠다고 우물가로 가서 기다리자 처녀가 물을 길러 왔다.
“정해진 곳이 없으면 부모님 일을 도우며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서 유하시는 게...”
그는 너무나 반가워 처녀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은혜 잊지 않겠소이다.”
그날부터 풍각쟁이는 유기장 일을 거들게 되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날,
밤은 깊어 삼경일 제 소쩍새 울음소리에 풍각쟁이는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처녀가 불쑥 움막 속으로 들어왔다.
도롱이를 벗고 들고 온 보자기를 풀자 삶은 닭과 청주 한 호리병이 나왔다.
그날 밤 움막에서 풍각쟁이는 처녀의 옷고름을 풀었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포식하고 술 한 병을 비우고 얌전한 처녀를 품었으니 당연히 기뻐야 할 터인데,
웬일인지 풍각쟁이의 두 눈엔 눈물만 쏟아졌다.
격렬한 운우가 지나고 풍각쟁이의 품에 안긴 처녀가 물었다.
“서방님, 무엇 하시던 분입니까?”
“나는 풍각쟁이요.”
처녀는 진실을 숨기려는 풍각쟁이의 태도에 뾰로통해서 돌아갔지만 며칠마다 깊은 밤이면 움막을 찾았다.
날이 지날수록 처녀도 음양의 이치를 깨우쳐, 등줄기엔 땀이 나고 고양이 울음소리에 몸을 바르르 떨게 되었다.
처녀가 입덧을 하며 풍각쟁이는 꼼짝없이 이 집 사위가 됐다.
장인 장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하며 외동딸을 나무랐다.
“이것아, 네가 눈으로 보면 알 것 아니냐.
네 어미 아비는 손이 부르트도록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저 솜씨 없는 풍각쟁이를 짝으로 만들어 임신까지 해 놓았으니 앞으로 무슨 수로 살아갈 테냐?
차라리 같이 풍각쟁이로 나가거라.”
처녀의 어미는 손바닥으로 딸의 등짝을 때렸다.
풍각쟁이는 밥만 축냈다.
버들을 베어 오라면 손을 베어 피범벅이 되어 들어오지 않나,
바구니를 짜라면 울퉁불퉁 버들가지만 축내지 않나…
장인 장모는 구박이 심해도 신부는 신랑을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었다.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초래 소리가 들리더니 정주 사또가 육방관속을 데리고 유장집 삽짝을 열고 들어왔다.
풍각쟁이는 엉겁결에 부엌 짚풀더미 속에 숨었다.
사또와 육방관속이 마당에 엎드렸다.
“참판(參判: 조선시대 육조의 종2품 관직) 나리,
조정에서 모셔오라는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고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갑자사화(갑자사화; 1504)로 억울하게 귀양 가던 도중 도망쳐 풍각쟁이로 변장해 숨어 지내던 젊은 참판 박중권은 세상이 바뀐 걸 몰랐었습니다.
부엌에서 기어 나온 풍각쟁이(?)는 사또가 가져온 사모관대를 입고 사또의 큰절을 받으려다 뒤돌아 손짓했다.
“부인도 와서 내 옆에 앉으시오.”
처녀의 깊은 안목으로 참판을 살리고 참판의 정실 부인이 되었으니 유기장이 부모는 물론 온 동내 사람들 모두 잔치를 벌리고, 처녀를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그 무엇이 있겠는가!
되돌아 생각하면 아무것도 없다.
베풀면 베푼 대로 인색하면 인색한대로 다시 돌아온다.
(두번째 이야기)
보다 고귀한 사랑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조용필"씨의 명곡인 '비련'에
얽힌 일화로
"조용필"씨의 전
매니저인 "최동규"씨가 과거 "조용필"
4집 발매 당시 인터뷰했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조용필"씨가 과거
4집 발매로
한창 바쁠 때,
한 요양병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병원장은 자신의 병원에 14세의
지체장애 여자 아이가 "조용필씨"의
4집에 수록된
"비련"을 듣더니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입원 8년 만에
기적같은 반응으로 처음 감정을
나타내어 보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어 병원 원장은
이 소녀의
보호자 측에서
돈은 원하는 만큼
줄테니 "조용필"씨가 직접 이 소녀에게
'비련'을 불러
줄 수 없냐? 며
아니면 잠깐 와서
얼굴이라도
보게 해줄 수 없냐
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매니저 "최동규"씨는 당시 "조용필"씨가 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
지금 돈으로
3,000~ 4,000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용필"씨에게 매니저
"최동규"씨가
이 얘기를 했더니
피던 담배를 툭
끄더니 바로
그 병원으로 가자고 했답니다.
그날 행사가 4곳
이었는데 모두 취소하고 위약금 까지
물어주고는
시골 요양병원으로
단숨에 달려
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병원 사람들과 환자, 환자 가족들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조용필"씨는 병원에 들어서자 마자
사연속의 소녀를
찾았습니다.
소녀는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기적은 이 때
시작됐습니다.
"조용필"씨가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부르자 잠시
전까지 그렇게
무표정이던 그 소녀가 펑펑 우는
것이었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주위 사람들 까지도
온통 울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조용필"씨는 여자 애를 꼭 껴안아 주고 싸인 CD를 주고서 차에 타려는데,
여자 아이 엄마가
"돈은 어디로 얼마를 보내면 되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조용필"씨는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돈보다 더 비쌉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너무나 아름다운
사연의 글인데
또 다시 읽어도 감동의 물결이 밀려
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돈보다 귀한 것은 어려운
이들에게 감동과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더 행복합니다!
받는 고마움 보다
베푸는 즐거움이
한결 큽니다!
감사합니다!
늘~행복하세요!~...
[받은글]
(세번째 이야기)
■호강에 똥싸는 대한민국 국민들! -
한국에 와 보니 웬만한 동네는 모두
고층 아파트로 되어 있다.
가정집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중화장실에도 미국에서는 부자들만 쓰는 비데가 설치되었고,
주차티켓을 뽑는 그런 촌스런 행동은 하지 않고 우아하게 자동인식으로 주차장에 들어간다.
모든 대중교통은 카드 하나로 해결되고,
집에 앉아서 롯데리아 햄버거를 배달시켜 먹고, 어느 집을 가도 요즘은 비밀번호나 카드 하나로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열쇠, 주차티켓, 화장실 휴지 등등은 이제 구시대의 물건이 되었다.
차마다 블랙박스가 달려있고, 방문하는 집마다 거실에 목받이 소파가 있고, 집안의 전등은 LED이며 가스, 심지어 콘센트도 요즘은 리모컨으로 켜고 끈다.
미국에서 나름대로 부자동네에서 살아온 나도 집마다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사치스럽고 고급스런 제품들에 놀라고 부러워하며 마치 예전에 일본제 제품들을 보는 듯한 신기함에 빠지고,
내 삶은 마치 2~ 30년은 과거에 살다온 느낌이 든다.
오늘도 너무나 부드럽고 고급스런 창문을 열면서 우리집의 뻑뻑거리며 자주 레일을 벗어나는 문을 이렇게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움으로 괜히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본다.
집집마다 수십 개의 스포츠 채널을 포함하여 끝없는 채널이 나오고, 가는 곳마다 즉,
지하철, 고속철도, 음식점,상점가, 심지어는 버스정류장에서도 자동으로 초고속 와이파이가
잡힌다.
"역"마다 '정류장'마다 몇분 후에 내가 기다리는 차가 온다는 정보도 뜨니, 옛날처럼 도로를 쳐다보며 버스를 놓칠까 염려하는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나도 우아하게 비데를 사용하며 편리한 지하철, 고속열차를 이용하고, 요금이 싼 택시도 타고 다녀보고, 그리고 몇 걸음만 걸으면 먹을 수
있는 수 없이 다양한 음식과 디저트를 즐기면서 목받이 쇼파에 눕듯이 앉아 수 많은 채널을
돌려가면서 이 고급스런 생활을 며칠만 있으면 두고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에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토로한다.
전세값이 얼마나 비싼지,정치는 얼마나 헛짓을 하는 지,아이들 교육시키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 지,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지옥에 살고 있다고 모두들 아우성이다.
돈이 없다고 하면서 땅이나 주식투자 안 하는 친구들이 거의 없고,고급차 한 대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고, 아이들 스포츠나 과외 안 시키는 사람이 드물다.
같은 가격이면서 우리집 보다 방은 두배 많고,
연 이자도 2% 대인 모기지를 가진 한국에서 전세라는 훌륭한 제도를 통해 매달 이자를 안 내고 살 수도 있는 이곳 사람들이 오늘도 모기지(부동산담보대출이자)로 매달 3~ 4천 불을 내며 미국에 사는우리들 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연봉이 나보다 반이나 적은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차를 몰고, 더 비싼 걸 먹고, 더 편리하고 더 고급스런 제품이 가득한 삶을 살면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의료보험은 열 배나 싸고, 치료비도 열 배 싸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같은 10불 짜리 밥을 먹어도 팁이 없어서 늘 몇 프로 할인 받는 느낌인 이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삶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신기하다.
50대가 되면 쫓겨나야 하는 현실, 줄어드는 일자리에 대한 말을 많이 듣지만, 실제로 내 주변에 해고 당한 사람은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많은데, 미국의 반도체 기업 3사의 엔지니어들이 직업을 잃어, 몇 개월을 다른 일자리를 찾아
헤매도 쉽지않은 나로서는 미국이 일자리가 더 안정되었다는 이들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미국생활이 길어져서 감을 잃어버린걸까?
아마 나도 이곳에 살아보면 이들처럼 느끼게 되겠지 하며 나는 공감능력이 확실히 떨어진 상태로오늘도 수 많은 이들의 불평을 듣고
있다.
냉장고를 두 세개 가지고 고기를 종종 먹으며 사시미를 먹고, 좋은 차를 몰고,편하고 고급스런 집에서 살면서도 만족을 모르고 가난과 위기를 노래하게 된 내 조국,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안식과 평안이 필요함을 느낀다.
언제쯤 되면 우리는 진짜 가난한 북쪽의 동포를 돌아보는 그런 여유가 생기는 진짜 부자가 될까?
"스스로 부한 체 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 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잠 13:7)
대한민국은 초고속으로 압축성장한 나라다.
아마도 기네스북에 올려야 할 나라다.
세계가 다 아는 데,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그래서 이민을 가려는 자들이 줄을 선다.
자신은 아니더라도 자식만은 미국에 보낸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면 거의가 다 그렇다.
자식을 이중국적자로 만든다. 무엇이 불안한 지 위장전입도 서슴치 않는다.
그렇게 바쁜 인생들을 산다. 우리나라는 국토도 최선진국이다. 산에는 나무가 너무 많아 간벌을 해야 할 지경이다.
공중에서 본 국토는 온통 푸르다.
그리고 넓게 거미줄 같이 뻗은 고속도로, 다목적댐과 물은 항상 넘실댄다.
홍수와 가뭄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더 기가 막히는 사연이 있다. 한민족은 5천 년을 배고프게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쌀이 넘쳐나 저장 할 창고가 없다.
그뿐이랴 각종 먹거리가 산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뚱보가 늘어나고 당뇨와 혈압 환자가 줄을 잇는다.
세상은 이렇게 풍요로운 데 왜 우리는 바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가?
더 많이 소유하고 싶고, 남 보다 더 앞서고 싶은 욕구를 이루지 못한 불만 때문이 아닐까?
그렇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진리를 깨닿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좋은 집, 좋은 교통, 좋은 의료제도 안에서 불안한 삶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지 한번 생각 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부탁 드립니다 .
*재미교포가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