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8. 29
8월은 우리 역사의 큰 사건이 두 개나 들어있는 달이다. 15일 광복절과 29일 경술국치일이다. 1945년 광복절은 일제로부터 광복된 날, 1910년 경술국치일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날이다. 달력으로 보면 14일간의 시간이지만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역사적 시간은 36년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36년 동안 당해야 했던 고통은 몇 마디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것이다. 광복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안다.
해마다 광복절 행사도 열리고 행사 때마다 대통령과 고위관료들이 단상에 올라 태극기를 휘날리며 기념일을 경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술국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치욕스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끄러운 과거를 굳이 들추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사람의 일생이 그러하듯 한 국가의 역사도 영광과 치욕이 점철된다. 영광이든 치욕이든 이미 발생한 사건은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서도 안 된다. 개인이나 역사나 영광의 훈장보다는 치욕의 상처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말이 그렇지, 치욕의 시간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운가?
▲ 안중식. ‘붕새’. 1908년. 140×86㎝. / 개인
나라를 팔아먹을 때 앞장섰던 사람들
경술국치를 논하기 전에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묘한 그림’ 한 점을 살펴보겠다. 묘한 그림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그림이 갖는 성격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도 이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이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독자들도 함께 고민해주기를 바란다. 먼저 그림을 보자. 화면에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한 발은 바위를 움켜쥐고 다른 한 발은 들고서 거칠게 부딪치는 파도를 내려다본다. 잔뜩 힘이 들어간 날개, 웅크린 등, 부리부리한 눈빛에서 맹수의 사나움이 드러난다. 새의 배와 등의 날개에 진한 먹을 칠해 먹이를 낚아채기 전의 긴장된 순간을 암시했다. 새가 딛고 선 바위에도 진한 먹으로 테두리를 칠해 무게감을 주었다.
육지의 참새나 바다의 갈매기와도 다른 이 새는 도대체 무슨 새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제시를 살펴봐야 한다. 제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만 리 천공을 날아 높은 벼슬길에서 빙빙 돈다.(萬里逸翶 翶翔雲衢)”
붕새다. 만리 천공을 날 수 있는 새는 붕새밖에 없다. 붕새는 ‘장자’의 첫 번째 장인 ‘소요유’ 편에 나온다. 붕새는 북녘 바다에 사는 물고기 곤(鯤)이 변해서 된 새로 바다를 날아갈 때 3000리의 파도를 일으키고 9만리 장천을 날아간다고 전해진다.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새다. 붕새 위로 빈 공간을 남겨둔 것은 그곳이 곧 붕새가 날아갈 9만리 장천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붕새의 에피소드는 엄청난 스케일과 웅장함 때문에 ‘장자’를 상징하는 새로 알려졌다. 9만리나 올라가는 붕새를 보고 기껏 느릅나무나 올라가는 매미와 비둘기가 “터무니없는 공연한 짓”이라고 비웃었다. 듣고 있던 붕새가 점잖게 한마디 했다. “이 조그만 날짐승들이 어찌 (대붕의 비상을) 알겠는가?” 그러면서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유래되어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오?”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을 대붕으로,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참새에 비유하는 우월감이 담겨 있다. ‘군계일학’보다 더 자존감이 센 문장이다.
그런데 이 제시 옆에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하사한다(賜總相李完用)’라는 글귀가 덧붙여져 있다. 이완용이라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매국노가 맞다. 그리고 글 뒤에는 ‘주연(珠淵)’이라는 호가 보이고 ‘주연지보(珠淵之寶)’라는 도장까지 찍혀 있다. 주연은 고종황제의 아호이다. 고종황제의 도장 뒤에는 ‘융희2년(1908) 9월 16일에 신하인 학부대신 이재곤이 칙명을 받들어 적는다(隆熙二年九月十六日 學部大臣臣李載崑勅謹書)’라고 적혀 있다. 그림은 당시 최고로 유명한 화가인 안중식(安中植)이 그렸지만 이름이나 도장은 보이지 않는다. 황제의 하사품으로 의뢰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붕새’는 학부대신 이재곤이 1908년 9월 16일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하사하라는 고종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제작을 의뢰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붕새’는 고종황제가 이완용을 붕새에 비유해서 그리게 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고종황제는 다음 해인 1909년에 승녕부총관 조민희, 부총관 박제빈, 승령부 시종장 김춘희에게 각각 안중식의 그림을 하사하게 했다. 이들 모두 경술국치에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에 부역한 친일파들이다.
▲ 필자미상. ‘대한제국 황제전하와 대관의 초상(大韓帝國皇帝殿下及大官之御尊像)’. 1909년. 종이에 채색. 42×57.1㎝. / 국립고궁박물관
그들에게 나라는 무엇인가
필자가 ‘붕새’를 제작배경이 명확하지 않은 ‘묘한 그림’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조민희, 박제빈, 김춘희에게 하사한 그림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고종이 이완용이라는 ‘인재’를 아끼고 신뢰해서 하사한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서 ‘나라의 실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경술국치는 ‘경술년에 일어난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붕새’가 제작되고 난 2년 후다. 경술국치는 1910년 8월 22일에 조인하고 8월 29일에 발효된 합병조약으로 그 주체는 대한제국(1897년 10월 12일~1910년 8월 29일)과 일본이었다. 흔히 ‘한일병합조약’ 또는 ‘한일합방조약’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의 입장에서는 나라의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에 ‘국권피탈’ 혹은 ‘경술국치’라고 부른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36년 동안이나 치욕스러운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이때 경술국치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대신들이 8명이었다. 그들은 이완용(총리대신), 윤덕영(시종원경), 민병석(궁내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조중응(농상공부대신), 이병무(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조민희(승녕부총관)다. ‘경술팔적’으로 비난받는 이들은 모두 일본 정부로부터 합방의 공을 인정받아 귀족 작위와 하사금을 받았다. 그중 윤덕영은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조선의 아방궁’이라 부르던 벽수산장의 주인이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팔적
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1910년이지만 사실상 주권을 빼앗긴 해는 그보다 5년 전인 1905년이라고 할 수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1905년인 을사년 11월 17일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일본의 보호국이 되겠다는 조약을 요구했다. 고종이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가운데 이완용(학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박제순(외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등이 주동이 되어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이 바로 을사보호조약이다. 이것은 강제로 체결된 불평등한 조약이기 때문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부른다. ‘늑(勒)’은 ‘굴레, 재갈’의 뜻으로 억지로 한다는 의미다. 이로써 통감부를 통해 내정간섭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조약을 체결한 다섯 명의 대신들은 국민들로부터 ‘을사오적’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가운데 모두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여러 가지 내정을 간섭했는데 1907년에 헤이그특사사건이 터졌다. 헤이그특사사건은 고종이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이 불평등조약임을 알리기 위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그 사건을 빌미로 7월 20일에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그리고 순종 즉위 4일 후인 7월 24일에 7개 조항의 한일신협약을 체결시켰다. 이것이 정미7조약이다. 정미7조약은 조선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次官)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 사법권, 행정권, 관리 임용권 등을 전부 일본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정미7조약으로 인해 사실상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게 됐다. 이때 협약을 체결한 조선 측 관리들이 송병준(농상공부대신), 이병무(군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조중응(법부대신), 이재곤(학부대신), 임선준(내부대신) 그리고 이완용(내각총리대신)이었다. 이들이 바로 ‘정미7적’이다.
정미7적은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이지만 일본에서 볼 때는 한일합방의 길을 열어놓은 조력자였을 것이다. 이들의 공을 치하한 판화가 1909년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대한국 황제폐하와 대관의 초상(大韓國皇帝陛下及大官之御尊像)’이란 판화에는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정미7적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다. 중앙에 앉은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상단에서 시계 방향으로 고영희, 이병무, 이완용, 임선준, 순종, 영친왕, 김윤식, 조중응, 이재곤, 송병준 등의 얼굴들이 들어가 있다. 이 중 김윤식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이 정미칠적이다. 물론 이 판화는 실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고 각 인물들을 조합하여 만든 이미지다. 조합된 인물들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히 보여준 증거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팔적에 들어가는 인물들을 비교해보면 유일하게 세 군데 다 포함된 인물이 있다. 그가 이완용이다. 이완용이야말로 줄기차게 그리고 시종일관 일본에 빌붙어 친일을 하고 매국에 전념했다. 그러니 고종이 이완용을, 9만리 장천을 나는 붕새에 비유해 그림을 하사한 사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고종이 천하의 간신인 이완용을 붕새로 생각해 곁에 두기를 원했다면 고종도 이완용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결국 당시의 정권수뇌부를 차지한 정치인들이 ‘그 나물에 그 밥’이었던 셈이다. 왕을 비롯해 국정을 운영하는 관료들의 결정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무겁고 막중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