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
손톱만한 꽃이라도
사랑에 목매이면 자줏빛 물이 든다는 걸
나 이제야 알았다
꽃들이 모두 져야 할 계절에도
저 혼자 남아 다소곳이 꽃산을 지키는 평화여
아는가, 그대여,
낮게 피는 꽃이 저렇게 슬프다는 걸,
가을 이슬 마시고
영롱하게 꽃 피운 구절초에 비길까
언제 돌아올까,
집 나간 그리움 한쪽
서늘히 몰려오는 구름 그늘에 앉아
허전한 가슴만 마구 두근거린다
실바람 살랑대는 길목에 서서
언제까지 오지 않는 그리움 기다릴건가
첫 손님
언제부터 이 땅에 온다고
연한 마음 다독였는가
꽃샘바람 물러간 뒤끝
얼어붙은 관절 풀며 고물고물
일어서는 꽃망울들,
온밤을 저리 설레었는가
3월 하늘 은빛으로 물들게 할 꽃이여
목련이라 하기엔 저 자태
눈물겹게 화사하구나
이 땅에 어느 누가 첫 손님인가
목련과 산수유가
첫 손님이라 우기며 서로 다툴 때
말없이 하얀 손 흔들며 다가온 목련
짙은 향기 뿌리며
꽃 물살 일렁이는 저 손끝을 보면
어두운 세상 희망 일구는 모습이 보인다
누가 뭐래도
이 땅에 소리 없이 향기 퍼뜨리며
찾아오는 첫 손님은 목련이다
헌혈
맨살에 주사바늘 푹 꽂고 피를 뽑아낸다
한 대롱 뽑혀 나오는 피,
지금 보니 그 피 활짝 핀 꽃처럼 화사하구나
오랫동안 내 몸 돌고 돌아
피와 살을 만들더니
바깥으로 나올 땐 몽울몽울
그늘진 꽃처럼 활짝 피어났구나
피가 꽃처럼 붉어져야만
내 몸 온전한 것이니
그래서 오늘 내 피 한 대롱 뽑아 그대 몸에 넣어주려 한다
산소마스크 쓰고
죽음을 부르는 그들,
곧 생명 꺼질 듯 호흡조차 거칠지만
그대가 기다리는 것은
내 몸 수없이 돌고 온 피,
화사한 꽃처럼 피어난 피,
내 피가 그대 몸을 쉼 없이 돌때
그대 혈색도 꽃처럼 붉게 번져 올랐으면,
수제비 놀이
냇가에 나가 수제비 놀이를 한다
건너편으로 던진 납작한 돌멩이
서커스하듯 물 위를 통통통 뛰어간다
돌이 물 위로 톡톡 튀어 오른 자리,
물 주름 잡힌 그 파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힘차게 던진 돌멩이
꼬리를 내리고 물에 잠길 때쯤
파문지어 올라오는 싱그러운 기운을 본다
아마도 건너편 골짝에서 봄이 오는가 보다
심심할 때마다 수제비 놀이를 하는 것은
건너편 산자락에 꼭꼭 숨겨둔
싱그러운 봄날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돌멩이가 통통통 물살을 칠 때마다
그 소리 건너편 산자락에 전해지고
온 잎 다 떨어낸 잿빛의 나무들
웅성웅성 잠깬 소리를 듣는다
힘차게 던진 돌 길게 징검다리 놓은 그 길로
내 마음속에 넣어둔 그리움도
함께 꼬리치며 돌아오겠다
하루살이
본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생이다
영겁의 세월에 하루치의 시간을 받았어도
기꺼이 뜨겁게 생을 불사른다
그래도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있어선가
하루살이에겐 눈물나게 귀중한 시간이다
그 시간 위해 메마른 허공
까맣게 태우는 걸 보면
문득 인간으로 태어난 게 부끄러울 때 있다
부질없는 욕망을 위해
생의 끈을 놓아버리는 사람을 보라
하루살이보다 더 긴 생명 부여받고도
가슴에 피멍들었다고
흔적 없이 제 이름 지우는 이들,
그들이 걸어온 삶이 고된 것처럼
하루살이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다
그러나 겉만 보고 말하지는 말라
하루살이 온종일 하늘 까맣게 수놓는 건
저들의 삶이 즐거워서가 아니다
제 닮은 후손 잇기 위해
순간의 밀애 달콤하게 즐기는 것이다
어차피 일몰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어도
뜨겁게 하루 불사르다 가는 걸 보면
내 앞에 놓여진 어두운 길이
갑자기 환해질 때가 있다
고사
교자상에 돼지대가리 한통 올라와 있다
순교자처럼 목 잘리고서도
걸걸하게 웃음 띠는 저 표정,
목 잘린 죄는 오직
디룩디룩 살찐 것뿐,
폭식이 죄가 된다면
험한 세상 순결한 이 어디 있을까
돼지대가리 앞에 공손하게 절하는 것은
가련하게 살아온 세월을 동정해서가 아니다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웃는 기개에
무서운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다
새로 산 자가용 앞에 두고
머리 조아리며 무탈을 빌 땐
그 소원 더욱 희까번쩍 빛을 발한다
달나라 가는 세상에도
돼지대가리 앞에 머리 조아리는 이들,
목 잘리면서 웃는 걸걸한 기개가
아마 사람들의 연약한 마음을 잡아 끌었나보다
바이러스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한 숫자가 유행인 시절이 왔다
그늘진 불황 아래
그 숫자는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반이라는 숫자,
들어보면 눈물나는 말인데
짠 냄새 풍기는 말인데
그 반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순식간에 세상을 덮쳐버렸다.
고등어 반 손 주세요,
쌀 반 포대 주세요
반이라는 숫자 읊조리며
허리 휘며 살아온 세월인데
갑자기 주가마저 반 토막 나버렸다
이 세상 바이러스에 전염이 된 것일까
바이러스 앞에 모든 것들 무너져
펀드와 아파트마저 반이 돼버렸다
그때의 허리 휘는 삶도 부질없게 되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반이라는 숫자 언젠가는
하나로 온전히 채워질 것이니,
그날 또 다시 해일처럼 밀려오면
반이라는 숫자 그리웠다고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니,
바람개비
날쌔게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
세상을 돌리려는 힘에서
푸른 봄날의 기운이 느껴진다
문득 땅을 휘저어 솟구치는 돌개바람처럼
그 어디에 강한 떨림이 숨어있었던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날개에서
그리움에 목마른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난다
앞으로 달려갈수록
세상을 더 빨리 돌게 하는 바람개비,
흩어지는 바람 앞에서
푸른 꿈에 묻힌 마을이 정겹게 돈다
그때마다 안개 묻은 풀들이
머리 풀고 부스스 일어선다
바람개비에겐 들판을 들어올리려는 힘이 있다
재빠른 바람을 받아
어질증으로 돌아갈 때마다
들판 한 자락 한 폭 풍경이 되어 일어선다
쉬지 않고 도는 바람개비 멈추려 해도
이미 붙어버린 가속도 어쩔 수 없다
쉼 없이 돌아가는 날개를 따라
깡마른 민들레 홀씨 날아간 자리,
그 곳이 우리들의 꿈이 영그는
마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
부드럽게 날개 돌리는 이유는
다만, 거기 고즈넉한 들판에서
싱그러운 봄날이 머리 풀고 일어서라는 기원일 게다
복창
베롱나무꽃 뜨겁게 뭉쳐
송알송알 피어오르는 날이면
매미들 한데 어울려 복창을 한다
세상살이 서러운 듯
매미들 떼 지어 내지르는 울음 속엔
가슴을 찌르는 칼날이 있다
베롱나무 가지 끝마다
붉은 꽃물 넘쳐흘러
제 생애의 절반을 오롯이 울음으로 쏟는 것이다
꽃 빛 더욱 붉어져
어둑어둑 그늘로 일렁이면
손톱만한 저 몸통에도
세상을 향한 시위가 있다
염천 녹일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
허공을 펴져 오르면
내 몸 속의 피도 꿈틀꿈틀 용솟음친다
매미소리 저리 뜨거운 것은
아마 피처럼 붉고 선연한 꽃을
마음껏 피우게 해달라는 신호일 게다
해바라기
온종일 허리 굽힌 해바라기의 행렬을 본다
허공 향해 꽃대 쑥쑥 밀어 올릴 땐 몰랐지만
꽃 뜨겁게 피워 올릴 때도 몰랐지만
어느 날, 해바라기
한없이 허리 굽혀 땅을 배알하는 모습을 본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던가
어찌 보면 오체투지로 길을 밀고 가는 것 같고
어찌 보면 큰절 올리는 것도 같다만
홍염 같은 누런 꽃 활활 피워 올리던
저 당당함 어디 갔는가
이제 보니 저 해바라기
마음속에 씻지 못할 죄 넣어두고 있다
죄 너무 무거워 허리 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만 하면 다 됐다고
잔뜩 구부린 허리 들어보니
떡판 같은 얼굴에 거뭇거뭇 저승꽃 투성이다
속 통통한 씨앗들 빽빽이 박고
활활 피워 올렸던 꽃 시들고 있다
갈수록 시들어가는 제 얼굴 내놓기 싫어
세월 잊으며 한없이
허리 굽히고 있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