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05.
- 대기업=약탈자(掠奪者) 프레임으로
- 정부·여당발 규제입법 봇물
- 공정(公正) 가치로 국민들 현혹
- 도덕적(道德的) 이분법(二分法)이 가장 위험
정부와 여당은 기업규제법안을 쓰나미로 쏟아내고 있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개원 3개월 만에 국회가 494건의 규제법안을 발의했고 그 중 기업경영에 직접 부담되는 것이 284개에 달한다고 한다. 전례 없는 일이다. 규제의 양만이 문제가 아니다. 규제의 질에서 심각한 것들이 너무 많다. 주식회사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위헌 소지까지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담고 있는 상법개정안이다. 대주주는 아무리 지분이 많아도 3%밖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공정'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 뒤에 가려진 실체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대주주 '나쁜 놈', 소수주주 '좋은 놈'이라는 선입견이다. 그래서 '악한' 대주주들이 '선한' 소수주주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감사를 소수주주들이 선임해야 한다고 내세운다. 둘째는 대주주 경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선입견이다. 소수주주가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전문경영체제로 가야 하고 이것이 '주주민주주의'의 완성판인 듯이 전제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사실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 첫째, 소수주주 중에도 '나쁜 놈'들이 즐비하다.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대표적이다. 극소수지분을 매입한 뒤 소수주주들을 부추겨 기업에 압력을 넣고 자사주매입 등으로 주가를 끌어올린 뒤 '먹튀'한다. 소수주주 중에 '힘센 놈'들도 즐비하다. 블랙록, 뱅가드, 국민연금 등은 소수주주로 분류되지만 재벌보다 훨씬 힘이 강한 초재벌 기관투자가들이다.
둘째, '전문경영체제'는 극히 일부 기업에만 나타나는 예외적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마치 전문경영체제의 이상향인 듯이 치부하지만 전문경영 기업은 주식회사 숫자로 보면 0.2%에 불과하다. 창업기업이나 중소기업들은 거의 다 대주주경영이다. 미국 증시에 상장되어 있는 대기업 중에서도 3분의 1은 대주주경영이다. 잘나간다는 5대 테크기업 FAANG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은 애플만 빼고 다 대주주경영이다. 미국에서 99.8%의 기업이 나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가? FAANG을 전문경영체제로 바꾸기 위해 사회적 압력도 가하고 상법도 바꿔야 하나?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대주주를 악한으로 매도하고 무력화하려는 광풍이 이렇게 강하게 불고 있는가?
사실을 왜곡한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고 있을 때는 '공정'과 같이 겉으로 내세운 구호는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 낫다. 대신 누가 이득을 보고 손해를 보는지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대주주 때리기'를 통해 이득을 보는 집단은 정치인 및 정부 관계자들과 단기 금융투자자들이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있는 국민의 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계산한다. '경제민주화'가 정강으로 채택되는 실상이다. 또 대기업에 쉽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사람을 많이 심을 수 있다. 실제로 선거 캠프 출신, 검찰, 공정위 등에서 대기업으로 영입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금융투자자들 입장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투기판이 만들어진다. 내부자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쉬워지고 주가를 출렁이게 만들어서 투기 이익을 얻기 편해진다. 대기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시켜 '떡고물'을 챙기기도 쉬워진다. 지금 정치권은 대기업을 약탈자로 규정한다. 그러나 국제경쟁에 처해 있는 대기업들이 약탈로 성공할 방법은 별로 없다. 일부 약탈의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끊임없는 혁신의 결과 한국경제를 지금 수준으로 올려놓은 생산자라고 봐야 한다.실제로는 정치권이나 소수주주 중에 약탈자가 훨씬 더 많다. 경제민주화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집단의 기업약탈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국민은 실상에 눈을 감고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있다. 경제를 살리려면 이 미몽(迷夢)에서 먼저 깨어나야 한다.
신장섭 /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