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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방장에서 벗을 만나다
종일 전투를 하고 돌아와 보니, 그사이 토벌대가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갔다. 쌍치 북재마을 아래에 보기에도 다정하게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던 대여섯 채의 초가집이 불타버렸다. 겨우 방장은 남아 있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박학규를 만났다. 박학규는 전주공업학교 토목과에 함께 다닌 다정한 친구였다.
“야, 이거 얼마 만이냐?”
우리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해 서로를 끌어안았다. 타다 남은 서까래와 널려 있는 나무를 모아다가 아궁이에 불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전쟁 동안 학도병으로 끌려가거나 해방전선에 동원된 벗들의 소식을 비롯해 저간에 궁금했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밤 가는 줄을 몰랐다. 새벽녘에야 따뜻한 방장 위에서 눈을 붙였다.
후퇴할 곳이 없소
다음날 1951년 4월 24일, 아침부터 토벌대가 나타났다. 모두 산으로 붙었다. 부대원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 배치하고 사령부와 보위부대 일부가 북재 뒷고지로 올라갔다. 아홉 시가 지나면서부터 사방에서 들려오던 총성이 점점 사라졌다. 연락병이 속속 도착했다. 퇴각했다는 보고였다. 사령부가 있는 북재 뒷고지만 토벌대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정읍 쪽으로 국사봉, 시산 뒷능선 모두가 토벌대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사령부의 퇴로가 없었다. 조철호 남부지도부 참모장 동지가 불렀다. 참모장은 선이 끊겨 분산되어 사령부에 찾아온 동무들 십여 명의 지휘권을 내게 맡겼다.
“후퇴할 곳이 없소. 산 밑에 매복하고 있다가 최후까지 싸우시오.”
치고 빠지는 유격전에서 최후까지 싸우라는 군사명령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사령부를 지키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다지며 능선을 타고 매복 장소인 산 밑으로 내려갔다.
바위틈에 큰 소나무가 있고 그리 깊지 않은 낭떠러지가 있는 양 옆으로 참호가 파여 있었다. 나는 대원들을 그곳에 매복시켰다. 삼십여 분이 지났을까? 토벌대가 앞 고지에 올라와서 중기를 걸어 놓았다. 그리고는 이개 소대쯤 되어 보이는 병력이 내려왔다.
토벌대는 북재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모닥모닥 다가앉아서 쉬었다. 정찰병 두 개조가 북재마을 쪽과 정읍 쪽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정찰병에게 노출될 것 같아 할 수 없이 칠팔십 미터의 사정거리 안에 앉아 있는 토벌대에게 일제사격을 했다. 불시에 기습당한 토벌대는 아무 곳으로나 들고 뛰었다. 돌격을 하면 적의 수가 많고 나무가 없는 평평한 곳이라 거의 전원이 희생될 것 같아 도망치는 놈들을 쫓으며 사격만을 했다. 여러 명이 쓰러졌다. 부상자들은 기어서 잡목 속으로 숨었다. 고지에 있던 토벌대가 내려와 중기를 갈겼다.
총이 땅에 떨어지다
전투 경험이 있는 지휘관은 총성으로 적의 병력을 파악한다. 우리가 수적으로 적음을 안 토벌대는 도망치던 자들을 수습하여 달려들었다. 산개해서 다가오기 때문에 사격을 해도 좀처럼 맞지 않았다. 드디어 절벽 아래에 붙었다. 우리가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어서 그들도 바로 기어오르지 못했다. 큰 돌을 밑으로 던졌다. 후다닥 흩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이다! 돌이다!"
수류탄인 줄 알고 놀라 도망치던 토벌대가 돌이라고 하는 바람에 전열이 수습되는 듯했다. 벼랑으로 인해서 적들의 말소리만 들릴 뿐 십여 미터 앞은 보이지 않아서 소총은 쏘지 않고 연발총만 총구를 벼랑 아래로 불을 뿜었다. 비 오듯 날아오는 총탄에 바위가 부서지고 솔잎이 뿌옇게 흩날렸다. 나는 손 신호로 사격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일이 미터 옆에서 먼지가 오르는 것과 동시에 오른팔과 가슴을 싸잡아서 메로 치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총이 땅에 떨어졌다. 왼손으로 총을 집어 들면서 손가락으로 후퇴신호를 했다. 나를 주시하고 있던 동무들은 참호 속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왼쪽 어깨에 총을 걸치고 나는 맨 뒤에서 뛰었다.
오른팔을 끊고 어떻게 사나?
오르막길이라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거기다가 오른팔은 제멋대로 덜렁거렸다. 팔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감각이 사라진 손끝을 타고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오른팔을 끊고 어떻게 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최후를 마치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런데 장탄을 하려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탄창과 조준기, 총신에 수류탄 파편 자국이 선명했다. 따발총은 스프링에 의해서 총탄이 올라오는 것인데, 스프링 작동이 안 되면 총을 쏠 수가 없다. 몽둥이만도 못한 무용지물이 돼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돌아서서 뛰었다. 숨이 목에 찼다. 헐떡거리며 힘들게 고지에 올라갔다. 위생병이 달려왔다. 험하게 찢겨진 옷과 쏟아지는 피를 보고 당황했던 모양이다. 위생병은 옷을 벗기려고 애를 썼다.
“옷소매를 자르시오.”
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위생병이 가위로 옷소매를 죽 잘랐다. 밖으로 드러난 상처가 컸던지 한 동무가 못 보게 내 머리를 잡고 돌렸다. 상처를 소독하고 피가 멎도록 신속하게 응급조치를 했다.
흑인 병사
치료를 막 끝내자 토벌대가 고지에 기어오르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흑인들이 총도 없이 수류탄 두 개만을 양손에 쥐고 엄호사격을 받으며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백인 하사관들은 흑인을 앞세워 올라가다 흑인이 뒤로 돌아서면 사살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흑인들은 전진하거나 후퇴하거나 총 맞아 죽는 것은 매일반인데, 전진하다가 다행히 고지를 점령하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전진했다고 한다.
수류탄 하나 줘!
사령관이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지에서 방어하는 동무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고 나머지 동무들은 산 밑으로 내달렸다. 나는 피를 많이 쏟은 탓인지 뛸 수가 없었다. 걸음을 떼었지만 허방을 딛는 듯 곧 맥없이 엎어졌다.
“이계수! 계수!”
내가 불렀다. 남부사령관 호위병 이계수 동무가 돌아보았다.
“수류탄 하나 줘!”
사령관이 돌아보며 소리질렀다.
“무엇하게?”
“잽히면 죽어야지요.”
“죽기는 왜 죽어?”
사령관 동무는 저만큼 뛰어가는 이치백 동무를 불러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책임지고 나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하고는 뛰었다. 이치백 동무는 내 어깨를 끼고 힘들게 내려갔다. 마음은 바쁘고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이치백 동무가 꼬꾸라지려는 나를 끌다시피 해서 가시에 긁히고 찢기며 산 아래에 이르렀다. 논밭을 한참 지나야 앞산 기슭에 닿을 수 있었다. 고지를 점령한 토벌대는 총을 갈기며 추격했다. 은폐물이 없는 평평한 논밭 말고는 돌아갈 데도 없었다. 이치백 동무가 나를 업고 뛰었지만 십여 미터도 못 가서 엎어지고 말았다. 숨은 차고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질질 끌려가다가 논두렁을 넘어서다 주저앉고 말았다. 고함을 지르며 뒤쫓아 오는 토벌대가 마침내 산 아래에 이르렀다.
“치백 동무, 나 놓아주고 빠지시오.”
이치백 동무라도 살려야 하겠기에 재촉했지만 허사였다. 이치백 동무는 내 팔을 잡고 끌었다. 총탄이 비 오듯이 날아왔다. 좌우, 앞뒤에서 총탄이 날아와 박히면서 먼지를 일으켰다.
생사를 함께 한 사랑에 목이 메다
삼분의 이쯤 갔을까? 앞산 골짜기에서 쏜살같이 여러 동무들이 뛰어나왔다. 안전지대에 간 동무들이 우리가 오지 않는 것을 알고 달려온 것이었다. 총탄이 빗발치는 곳을 향해 세 동무가 논둑에서 대응 사격을 하고, 억센 두 동무가 교대로 나를 들쳐 업고 뛰었다. 한 동무가 숨이 차면 다른 동무가 바꿔 업고 뛰었다. 아, 생사를 함께 한 동지애! 동무의 등에 업혀서 사지를 벗어날 때 그 절대적인 사랑에 목에 메었다. 안전지대에 이르자, 살아왔다고 동무들이 모두 쫓아와서 기뻐했다.
양지쪽에 앉아 밥보자기를 펼쳐놓고 점심을 먹었다. 고동무가 밥을 먹여주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고동무는 바늘을 챙기더니 헤어진 바지를 꿰매주었다. 우리 여동무들은 정이 많고 언제나 자상했다. 고동무는 합법 당시 진주시 여맹에서 사업을 했고 후퇴할 때 함께 임실 성수산에 입산한 동무다.
1951년 여름, 미제의 세균전으로 빨치산과 해방구 인민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날, 고동무는 가막골 개천가의 작은 트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음이 아팠다.
세균전, 열병을 이기다
나도 열병에 걸려서 비트 생활을 했다. 함께 앓던 여섯 명 중 네 동무가 끝내 돌아가시고 회복기에 있던 김막동 동무와 둘이 살아남았다. 고열로 심하게 앓다가 열이 차츰 식고 구미가 돌아오던 무렵 채소가 하도 먹고 싶어서 동무들에게 부탁했더니, 강용기 동무가 먼 길에 배추 두 포기를 가져왔다. 양재기에 배추를 썰어서 넣고 소금으로 배춧국을 끓여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그게 체했던 것인지 으슬으슬 추웠다. 재통을 한 것이다. 열병환자들은 거의 다 재통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나를 김막동 동무가 업고 트 밖에 나가서 대소변을 보게 하고 밑을 씻어 주었다. 김막동 동무는 내 몸도 닦아 주었다. 김막동 동무의 극진한 간호로 나는 열병을 이길 수가 있었다.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에 대한 부동의 결심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물 두 해의 생애를 돌아보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것은 이성(異性)을 모르고 죽는 것이었다. 사랑이 담긴 편지를 여인에게 주어본 적이 없고 받아본 적도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전혀 일구어보지 못한 묵정밭을 마음 한편에 그대로 두고 떠나는 것이 애석했다.
내가 사랑했던, 아니 이성간의 달콤한 정이 오갔던 여인은 없었던가. 죽음을 앞두고 기억에 남는 여인들을 더듬어 보았다.
지하로 잠적한 아버지를 찾아나서다
그렇다. 1948년 열일곱 살 때 겨울이었다. 아버님이 인천에서 한동안 피신하고 계셨는데 하루는 지명수배 중인 유석동 동무가 와서 아버님한테 가자고 했다. 학생복 차림으로 새벽에 따라 나섰다. 되도록 마을을 피해서 오솔길로 사십 리를 걸었다. 신태인역에서 기차를 탔다. 여덟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역 광장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노폭이 넓고 전차와 자동차가 꼬리를 잇는 서울 야경에 시골 중학교 2학년짜리 꼬마는 촌닭 관청에 온 듯 어리둥절했다.
원효로에 있는 고향사람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새벽에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나왔다. 인적이 드문 거리와 높은 담, 지저분한 골목길을 걷고 있자니 도적 소굴에 들어온 듯한 묘한 감정이 일었다. 낮에 본 서울은 밤과는 달리 남대문통도 그렇고 별 것이 아니었다. 서울역에서 인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동인천역에서 내려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길을 이리저리 빠져 나갔다. 나는 아버님 생각으로 마음이 급해 유석동 동무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마침내 유석동 동무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님이 내 손을 꼭 쥐셨다. 방에 들어가서 아버님께 큰 절을 올렸다. 책상 위에는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잘 정돈된 깨끗한 방이었다. 그곳은 나보다 2살 연상인 고향 처녀 큰애기의 형부 외가였다.
1946년 말부터 지하로 들어가셨던 아버님과 사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 아버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 황해의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다. 인천서 돌아올 때는 언니가 죽고 없는 큰애기 형부로부터 처가에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고향처녀, 큰애기
고향에 돌아와서 다음날 밤에 큰애기 집에 갔다. 큰애기 가족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인천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고무신을 끌며 급히 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큰애기였다.
“아버님이 고생하시지?”
“어려우신 것 같아.”
“그러시겠지. 객지라. 어서 세상이 좋아져야 할 텐데. 형부는 어떻게 살아?”
“그런 대로 먹고 지내는 것 같애.”
“언니만 안 죽었어도……. 형부가 불쌍해.”
희미한 달빛 아래 큰애기와 애절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가슴이 두근거리며 큰애기를 끌어안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옷이 닿는 순간, 큰애기가 뒤로 물러섰다.
그때 고샅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큰애기가 얼른 내 팔을 끌어당겼다. 사립문 너머로 남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볏가리와 벼가리 사이에 몸을 숨겼다. 서로 몸이 붙어 있어서 쉽게 안을 수 있었지만, 이미 마음이 식어버린 뒤라서 발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밖으로 나왔다.
“아버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어. 우리 집에는 친구가 없어서 놀러올 수도 없을 것이 고…….”
“어머님이 안 계셔서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애쓰겠어.”
“조심해서 가.”
아쉬움을 남긴 채 사립문을 빠져나왔다.
전주고녀 여학생
1949년 전주공업학교 사학년에 다닐 때다. 동산촌 주익이 아저씨 댁에서 기차 통학을 했는데 그런 지 서너 달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전주역전에 만발한 벚나무 밑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돌아보았는데 줄곧 여학생은 강렬하고도 야릇한 시선을 내게 던지고 있었다. 삼례에 사는 그 여학생은 전주고녀 4학년인데 늘 세 사람이 함께 다녔다. 얼굴은 예쁜 편인데 눈두덩이 도독해서 한 성질 있어보였다. 활달하다고 할까, 조금은 덜렁거렸다.
학교에 가고 올 때 같은 기차를 타기 때문에 기차 통학생들은 하루에 한두 번은 만나게 돼 있었다. 특히 하학 열차는 학생들이 대합실 안팎에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면 일렬로 서서 정기 승차권을 내보이며 개찰구를 빠져 나가기 때문에 마주칠 기회가 많았다. 내가 줄을 서면 어느 결엔가 그 여학생이 내 뒤에 와서 섰다. 사람들이 밀칠 때는 엎어질 듯하며 젖가슴을 내 등판에 붙이기도 하고, 한가할 때는 책가방으로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기도 하다가, 내가 타는 열차 칸에 어김없이 뒤따라 타곤 했다. 의자에 앉든 서 있든, 그녀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열차를 기다릴 때나 차안에서 책을 읽었는데 그녀도 다소곳이 책을 펴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이따금씩 바라보았다. 하루는 친구가 떠들자,
“조용히 해라 얘.”
하고 주의를 주었다.
“야, 네가 다 얌전을 피우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야는?”
여학생은 친구를 꼬집으며 안달을 했다. 나는 그녀의 속마음을 헤아리며 빙긋이 웃었다.
몇 개월이 지났다. 하루는 기차에 오르는 두 번째 계단에 앉아서 스쳐가는 논밭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형님, 집안일들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무언가 내 모자에 닿는 것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녀가 굽은 쇠를 양손으로 짚고 몸을 내밀어서 치마 끝으로 나를 건드렸던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나는 한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이 발그레해졌을 뿐,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내 얼굴과 그녀의 배가 거의 닿을 뻔했다.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그녀의 팔 아래로 머리를 숙여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제야 그녀는 한 팔을 들어 주었다. 못난 아이.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부끄러워진다.
전주고녀 여학생은 내가 없을 때 옆집 여학생(옆집 여학생은 젊은 아주머니한테 이따금 놀러오곤 했다)과 내 공부방에 들어와서 책을 뒤져보고 생리학 노트를 읽어보면서 남학생들도 이런 것을 다 배운다고 웃어댔다고 한다. 내가 기차통학을 그만두면서 그녀와 만날 기회가 없어지고 말았다.
붕대를 살며시 들고 나가던 여동무
부상을 당하고 가마골에 있을 때였다. 군사 간부학교(노령학원)에 다녔는데, 점심시간에는 밥 먹고 곧 삼백여 미터 떨어진 도 의무과에 가서 치료를 받곤 했다. 사나흘만 치료를 받지 않아도 똥파리가 쉬를 싣고 고자리가 굼실거리기 때문에 매일 거르지 않고 뛰어서 다녀왔다. 상처에서 나온 진물이 붕대와 살을 붙여놓아서 붕대를 뗄 때는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새 살 위에 버케가 끼어 있는데 소금물에 적신 솜을 핀셋으로 버케를 긁어낼 때는 좁쌀처럼 돋아난 새살이 터지면서 송곳으로 뼈를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날도 의무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통증이 심해 여동무 앞에서 비명을 지르기도 그렇고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데 누군가 나무에 걸어놓은 내 붕대를 들고 나가는 것이었다.
“동무! 동무!”
여동무가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것 버리지 마세요. 빨아서 써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붕대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명베를 째서 만든 붕대를 빨아서 여러 번 사용했다. 진땀을 흘리며 치료를 받고나자, 붕대를 들고 나갔던 여동무가 그새 깨끗이 빨아가지고 돌아왔다. 가슴이 뭉클했다. 아무리 빨치산 동무지만 썩는 냄새가 나는 붕대를 주물러서 빨아온 여동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배옥순 동무였다.
“고맙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동지애에 머리를 숙였다.
그것이 사랑일까?
그날 일을 계기로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만나면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의무과 트 가까이 가면 배동무를 찾곤 했다.
일주일쯤 뒤 치료를 받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개천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돌다리를 건너가다가 저만큼 위쪽에서 빨래하는 배동무를 발견했다. 발을 멈추었다.
“빨래하세요?”
“예. 벌써 가세요? 놀다 가시지.”
허리춤에 찬 무명베 수건에 손이 갔다.
“비누 좀 빌립시다.”
“무얼 하시게요?”
“수건 좀 빨게요.”
“이리 주세요.”
비누가 없어서 늘 맹물로 빨아온 터라 기름때가 찌든 데다가 땀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수건을 나는 배동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빨렵니다.”
“어서 주세요.”
“아니, 내가 빨게요.”
“동무가 나보다 총은 잘 쏘지만, 빨래는 내가 동무보다 잘합니다.”
더 이상 고집할 수가 없었다.
“그럼 받아요.”
나는 수건을 배동무한테 던졌다. 배동무는 능숙하게 받았다. 돌 위에 앉아서 빨래하는 배동무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두 번 비누칠을 해서 깨끗이 빤 수건을 비틀어 짜기에 던지라고 했다. 배동무는 빙긋이 웃으며 돌아와서 두 손으로 수건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악수를 하고 떠났다. 가다가 나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지 배동무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다가 모퉁이를 돌 때 또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배동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동무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의무과에 가면 내 눈은 배옥순 동무를 찾았다. 배동무가 없으면 서운했고, 만나면 반가웠다. 그것이 전부다. 내가 간부학교를 졸업하면서 다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일까?
죽음을 앞두고 벼가리 사이에서 큰애기를 안을 수 있었을 텐데, 입을 맞춰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오곤 했다……. 이따금 큰애기와 배옥순 동무가 꿈에 보였다.
불알잡이 친구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자, 지난날의 어느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는 전부가, 표정까지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때가 있었다.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형님과 형수씨, 순덕이, 순이, 흥규, 조앙니 조카, 종조할아버님, 종조할머님, 작은집 할머님, 두 분 작은 아버님, 작은 어머님, 큰 당숙, 두 작은 당숙, 내동 고모, 고향집, 고샅길, 당복산 바위나 노송마을 어른들, 불알잡이 친구들, 서당에 다닐 때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의 친한 벗들이 이름은 잊었어도 얼굴 모습들은 남아 있어서 선하게 떠올랐다.
일제 말엽 소학교 시절, 조리(일본짚신) 삼고, 새끼 꼬고, 가마니치고, 모 심고, 피 뽑고, 보리 베고, 풀 베고, 김매고, 벼 베고, 똥통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농사짓고(학교 농토가 있었음) 삘기 뽑고, 까치밥, 괴밥 캐고, 연뿌리 캐고, 고기 잡고, 붕어 낚시, 망둥이 낚시질 하고, 참게 잡고, 나무하고, 솔공이 따고, 학교에서 우리말 하다가 얻어맞고, 겨울밤에 참새 잡고, 눈 온 날 동무들과 몰이해서 꿩 잡고, 배고팠던 일, 밤밭과 참외밭, 복숭아밭에 들어가 주인 몰래 따먹던 일 등등 그 모두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해방직후 상황, 학생운동 할 때 잡혀서 고문당한 일, 구빨치산을 만났던 사연, 전쟁이 일어나면서 총 들고 낙동강으로 삼천포로 고성으로 남진할 때, 후퇴 이후 빨치산 생활과 크고 작은 전투, 무장부대의 내부 생활 등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만일 죽지 않고 산다면,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
머슴애 꼭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 있다. 예닐곱 살 때 서당에 다니면서 있었던 일이다. 남자아이들이 다니던 서당에 여자아이 한 명이 있었다. 나보다 서너 살 윈데 그래도 머슴애 꼭지라고 곧잘 놀려 주었다. 그러면 여자애는 약이 올라서 날 잡으려고 쫓아다니다가 결국 못 잡고 씩씩거리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소녀의 아버지 이름을 알아가지고 옥환이, 옥환이 하고 그 애를 곯려 주었다. 다음날도 다시 옥환이 하고 또 그 애를 놀리는데 이번엔 그 애가 병기, 병기 하고 나를 놀리지 않는가. 아버님 이름을 부르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붙으면 맞을 판이라 덤벼들 수도 없고, 댕기를 잡아당기는 게 고작이었다.
하루는 점심시간인데 여자애가 가만히 나를 부르더니 누룽지를 내밀었다.
“너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아주 친한 친구시란다. 우리도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
아버지 친구분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죄스러워서 그 뒤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최옥환 선생님은 일제 때 배재중학교에 다니다가 반일독립운동을 하셨으며 결국 학교를 못 마치고 퇴학당하신 분이다. 아버님도 옥환 선생의 영향을 받지 않으셨나 싶다.
아이를 똥통에 빠뜨린 이야기
서당 이야기가 나오니까 또 할 이야기가 있다. 여름철에는 공부하는 게 고역이었다. 파리는 벼루에, 얼굴에 달라붙지, 졸음은 오지, 몇 번 선생님께 머리를 얻어맞고는 소변보러 간다고 밖에 나갔다.
대문 밖에는 아이들 칠팔 명이 새금팔(사기그릇을 깬 조각)을 가지고 돈치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끼었다. 한참 돈치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어느 아이가 ‘선생 온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한마디에, 놀란 꿩 새끼들이 길섶 풀숲에 숨듯 아이들은 새금팔을 내던지고 달아났다. 나는 정말 선생님이 오시는지 문 쪽을 엿보았다. 선생님께서 회초리를 들고 마루에서 막 토방으로 내려오고 계셨다. 겁이 났다. 바로 큰 측간으로 뛰어갔다. 옛날에는 변소라고 하는 것이 큰 독을 묻어놓은 것인데, 독 가로 엉덩이를 깐 아이들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큰일이었다. 나는 다시 작은 측간으로 갔다. 다행히도 박광옥이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같이 누자고 사정을 했다. 박광옥은 단번에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때였다. 큰 측간에서 등판을 후려치는 매질과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박광옥은 정말로 변보기 위해서 나왔는데 둘이 앉아 있다가는 자기도 돈치기 했다고 얻어맞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박광옥의 양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다가 그만 독 위의 판대기가 미끄러지면서 박광옥이 똥통 속으로 빠져버렸다.
“사람 죽네!”
외마디 소리를 듣고 선생님이 뛰어오셨다. 선생님은 똥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광옥을 건지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곧 큰 아이들이 합세해 아이를 똥통 밖으로 꺼내놓았는데, 똥투성이가 된 광옥은 죽을상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도 못 내고 떨고만 있었다. 선생님과 큰 아이들은 징징 우는 광옥이를 끌고 방죽으로 갔다. 똥 묻은 옷을 벗겨서 몸을 씻기고 한 아이는 옷을 가지러 뛰어갔다.
담력 시험
그 일이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오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공부는 파했는데 아이들은 집에 못 가고 창고 처마 밑에 늘어져 있었다. 점점 어두워졌다. 열댓 살 먹은 큰 아이들이 예닐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처마 밑에 오더니, 상여 집에 들어갔다 올 수 있는 용기 있는 아이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했다.
상여집이라니, 비가 올 때나 밤에는 귀신 소리가 난다는 상여집이었다. 낮도 아니고 날이 어두워졌는데 어느 누가 갈 것인가? 상여집 안은 말할 것이 없고, 그 앞을 지날 때도 무서워서 얼른 지나갈 만큼 아이들은 상여집을 무서워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재차 물어보던 큰 아이가,
“이 녀석들, 맨 겁쟁이들뿐이잖아. 간뎅이가 콩알만 해. 이것들이 커서 무엇이 되겠 어?”
하고 계속 큰소리로 우리를 약 올렸다.
하도 부아가 나서 내가 가겠다고 나섰다. 큰 녀석들이 좋아했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발소리를 죽이며 상여집에 가까이 갔다. 전신이 오그라들고 귀신이 나오면 어쩌나 겁이 났다.
'그냥 돌아갈까?'
그러나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발짝씩 걸음을 떼었다. 온 신경이 눈과 귀에 모아졌다. 상여집의 거적을 반쯤 밀쳤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고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송장을 나르는 상여, 죽은 사람의 피가 묻어있는 상여,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캄캄한 안을 쏘아보다가 이를 악물고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 삼사 미터 들어갔을 때였다.
“악!”
귀신울음 같은 소리에 홱 돌아서서 뛰다가 그만 기둥에 안면을 받아버렸다. 주르륵 무언가 쏟아졌다. 거적문까지 나왔는데, 큰 아이들이 안팎에서 쫓아왔다. 쏟아지는 피로 온통 옷을 적셨다. 앞니 두 대가 나가버린 것이다. 큰 아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수건을 찢어서 틀어막고 입을 동여맸다.
세 사람이 교대로 나를 업고 집으로 갔다. 도중에 지혈이 된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큰 아이들이 할아버님께 백배 사죄했다. 철없는 장난이 손자를 이토록 다치게 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날 상여집 안에 누가 숨어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아이 담력을 그들 나름대로 시험한 것이다. 할아버님은 이야기를 들으시고 어린 아이를 너무 놀라게 하면 자칫 정신 이상이 올 수도 있다고 심한 장난은 삼가라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정월 열나흘, 전쟁놀이
정월 열나흘이 되면 이웃마을 아이들과 방죽 둑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놀이를 했다. 줄줄이 횃불을 들고 와서 기세를 올리고, 특공대가 돌팔매질은 물론 활을 쏘고 목검으로 치고 횃불을 모빌유에 담갔다가 뿌렸다. 맹렬히 싸웠다. 힘이 부친 편은 밀리고 이긴 편은 만세를 불렀다.
이 놀이 또한 서당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웃 마을과 원한 관계가 있어서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게도 장래의 이 땅의 주인인 어린이들에게 서당에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마을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전쟁놀이를 통해 만일의 태세에 대비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특히 서당을 통해서 이 전통이 내려온 것 같다.
참외 서리
한번은 아버님께 호되게 매를 맞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다. 여름인데 윗마루에서 등불을 켜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 성동중학교에 다니던 학건이가 그날 밤 집에 왔다.
“방규야, 낮에 밭에 갔다 오다 보니까 외밭에 참외가 누렇게 익었더라. 따먹으러 가자.”
귀가 솔깃했지만 집 밖에는 어른들이 계셔서 싫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두 녀석이 울타리를 타고 넘었다. 어두운 곳에서 더듬더듬 더듬어 가다가 큰 놈으로 세 개를 골라서 참외를 막 땄을 때다. 누군가 흰옷 입은 분이 참외밭을 가로질러왔다. 그만 참외를 팽개치고 도망쳤다. 밭도랑을 뛰어 넘고 밭뙈기를 지나서 솔밭 속으로 단숨에 언덕을 넘어 도망쳤다.
“방규, 방규야!”
언덕에서 학건이가 불러댔다. 돌아섰다.
“방규야.”
“왜 그래? 큰소리 치지 마. 집에 들리겠다.”
“아버지가 너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뭐?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아버지가 어떻게 아셨니?”
“아까 쫓아오신 분이 아버지야. 아버지한테 잡혔다. 도망간 놈이 방규지야, 하시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너를 데리고 집으로 오라고 하시더라.”
“병신 같으니 왜 잽혀?”
그러나 저러나 큰일이 났다. 맥이 쫙 풀려버렸다. 아버님이 오라고 하셨으면 가야하는데 죄를 졌으니 이를 어쩌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두 녀석이 집으로 갔다.
아버님이 마루에 앉아 계셨다. 학건이가 먼저 빌었다.
“방규가 안 간다고 하는 것을 제가 몇 번이나 가자고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 아버님은 나한테 한 말씀도 안 하시고 학건이를 꾸짖으셨다.
“이놈아, 중학교에 다니는 놈이 어린놈하고 못된 짓을 같이 해? 방규가 가자고 해도 네가 말렸어야지.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한다. 다음에 또 못된 짓하면 단단히 매 맞을 줄 알아라(학건이 아버님과는 친한 사이며, 아버님은 남의 자식이지만 능히 매를 때리실 분이다.). 어서 가서 책 한자라도 보거라."
학건이가 밖으로 나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은 매
아버님은 내게 매를 해가지고 오라고 엄히 분부를 내리셨다.
나는 아버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물러가서 황새목 낫으로 플라타너스 가지를 서너 대 잘라서 다듬어가지고 아버님께 바쳤다. 아버님은,
“이놈아, 남의 한 해 농사를 버려놓은 놈이 이것만 맞을 테냐? 아무리 어린놈이라고 해도 초통에 줄기를 밟아버리면 외 농사는 버린다는 것을 알 것이 아니냐? 끝물이라고 하면 또 모르겠다. 이놈, 더해가지고 와!”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에 올라가서 손에 닿는 가지를 모조리 잘랐다. 어린 마음에 반항심이 생긴 것이다.
'잘못했지만 아이가 한 짓인데 서너 대만 때리면 되셨지…….'
어디 한 번 몽땅 때려보시라고 매를 한 아름 다듬어 가지고 갔다. 아버님은 내 멱살을 잡더니 매를 두세 대씩 싸잡아 가지고 종아리를 후려쳤다. 부러지면 또 한 줌을 쥐고 때리셨다. 나는 아픔을 참아가며 맞았다. 아마 매가 열 대는 부러졌을 것이다. 평소에 손자 역성을 드시는 법이 없으시지만, 손자가 매 맞는 것을 본 적이 없으신 할머님이 내가 안쓰러웠던지 오셔서 그만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한 해 농사를 망쳐놓은 놈인데요.”
하며 매질을 계속하셨다. 그러자 할머님이 나를 안았다. 그제야 아버님은 매를 놓으셨다. 아버님으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은 매였다. 그때를 회상하면 매를 맞았는데도 교훈으로, 흐뭇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아버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도 잘잘못을 안다. 잘못해서 맞는 것은 불만이 없다. 혹 과하게 맞았을지라도 크면서 부모님의 사랑임을 느낀다. 어릴지라도 나름의 판단력이 있어서 부모를 평가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어 알게 된 일이다. 그날 옆집 장환이네 외밭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대문 앞에 계셨던 아버님은 혹시나 하고 집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등불 밑에 책만 펼쳐져 있는 것을 보시고는 두 녀석이 외밭을 망쳐놓을 것 같아 밭에 쫓아 오셨던 것이다.
제주도 혼례식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지난날을 몇 번이고 회상하는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우리는 감방 안에서 일제 치하와 해방 후에 전개한 투쟁, 산에서 용감하게 싸운 경험담을 나누었다. 또 재미있었던 일, 고생했던 일, 애정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결혼한 분들은 총각들 등살에 초야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제주도 결혼 풍습이다. 김익휴 선생의 고향은 제주도다.
“우리 연배가 결혼할 때는 맞선이라는 게 도대체 없었어. 중매인들을 통해서 양가 부모님이 보고 택일하면 그뿐이야. 예식 또한 특이했어.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식을 올리는데 가운데 장막을 높이치고 신랑은 신부를, 신부는 신랑을 볼 수 없도록 해놓고는 장막에 대고 절하고 합환주를 들었지. 식은 간단히 끝나. 그러고는 술좌석이 벌어지는데 신랑한테 연방 술을 권하는 거야. 밤이 이슥해서야 신방에 들여보내데? 신방이라고 하는 것이 촛불은 고사하고 달빛, 별빛까지도 가려버린 먹방이야. 캄캄한 방에 신부가 앉아 있었어. 처음에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네. 손으로 더듬더듬 해보니까 신부가 손에 잽히데 그려. 그래서 옷을 벗기려고 안 했나? 그러자 신부가 밀어붙이면서 당신이 언제 보았다고 이러느냐는 거여. 결혼식을 올린 내 아내 몸을 못 만지느냐고 쏘아붙였지. 말은 되지만 말로는 통하지 않았어. 그래서 완력을 쓴 거야. 웬 놈의 여자가 그리 세? 아무튼 밤새 네 귀퉁이를 돌며 엎치락뒤치락 한 거야. 새벽녘에야 힘이 빠져서 퍼져버리데. 다음날 날이 훤히 밝아서야 일어났는데 아내가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어. 세숫물을 떠오지, 수건을 받혀주지, 미음을 쑤어오고. 얼굴은 거무데데해도 그리 밉지는 않더구만.”
왜 제주도에 이런 독특한 결혼풍습이 생겼을까. 아마도 제주도 여성들은 거의가 바다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해녀들이라 혼례식에서 태양에 그을린 검은 얼굴을 보고 신랑이 정 떨어질까 봐 그런 모양이었다. 하룻밤을 한 품에서 자고 나면 검은 얼굴도 예뻐 보여 평생을 해로하게 되는, 육지와는 사뭇 다른 결혼풍습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과거를 회상하며 가장 가슴 아팠던 일
그런데 과거를 떠올리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지난날의 잘못을 회상할 때였다. 가족과 조직생활에서 범한 잘못을 되돌아보며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누이 순덕이가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고향집에 갔다가 수학문제를 묻기에 공식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응용문제를 내주었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못 풀고 말았다. 다시 응용문제를 공식에 적용해서 푸는 방법을 실례를 들어가면서 설명해주고 또 문제를 내주었는데 못 풀었다.
“에이, 녀석.”
학교성적도 우수했고 능히 풀 수 있는 문제임에도 못 푸는 누이한테 꿀밤 한 대를 주었다.
순덕이는 여남은 살 때부터 아버님 레포 심부름을 하고 연락을 다니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만 못한 아이들이 여학교에 가는데 집안형편으로 진학을 못하고 애를 태우며 비쩍 야위었다. 그런 누이한테 꿀밤을 주다니.
죽음을 앞두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가슴 아프게 후회했다.
순덕이 누이는 열다섯 살 때 삼십 리 길을 걸어서 변산에 나무하러 다녔고, 어린 것이 혼자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당시 변산 빨치산 참모장으로 있던 큰오빠를 몇 번이나 만나 보았단다. 두 오빠가 감옥살이를 할 때는 집안일을 돌보며 옥바라지를 했고 시집간 뒤에도 33년, 그 긴 세월을 오빠 옥바라지를 했다.
1950년 봄 어느 날이었다. 돈암동 신흥사 옆 산동네에 살던 때다. 오후 늦게 집에 갔는데 평소에 온순하고 말을 잘 듣던 여섯 살 난 여동생 순이가 어쩐 일인지 토라져서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심통을 부렸다. 화가 난 나는 방바닥에 있던 대자를 집어 들고 순이의 종아리를 때렸다. 발을 동동거리며 울던 순이는,
“오빠 안 할게! 오빠 안 할게!”
하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도 감옥에 가시고 없는 어린 누이가 안쓰러워서 나는 순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만 그치라고 눈물을 닦아주자 서러웠던지 순이는 엉엉 울어버렸다. 나도 울었다. 그때 왜 어린 것을 때렸을까?
너희를 지도하는 선생이 누구냐?
죽음을 앞두고 지난날의 잘못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고창중학교에 다닐 때다. 민주학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따라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함께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취방 문이 열렸다. 누가 몽둥이로 나를 툭툭 쳤다.
“이방규가 누구야?”
“이방규는 없고, 내가 임방규다.”
“네가 맞아? 어서 일어나.”
나는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가자.”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교교한 달이 중천에 떠 있고 삼월 중순이라 밤 공기가 조금은 쌀쌀했다. 고창천 둑길을 따라가면서 한 녀석이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을 지도하는 선생이 누구냐?”
“모릅니다.”
“사무실에 가면 너는 죽어 나온다. 선생만 대면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마.”
“모릅니다.”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는 듯이 멍청하게 대답했다.
“너희 세포 성원이 몇 명이냐? 누구 누구냐? 이름을 대라.”
“모릅니다.”
함께 자던 벗들이 다 맹원이었고, 그들 중엔 학년 책도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 내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놈, 쬐깐한 녀석이 보통이 아닌데, 이 자식 두고 봐. 네 놈 입에서 나오나, 안 나오나.”
서북청년단, 학련 학생들
어디서 정보가 새 나간 것인가. 가슴은 두근거리고 도무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나를 잡아온 것은 서북청년단에서 한 녀석하고 학련(반공 학생단체)에서 세 녀석이었다.
경찰서 앞의 기와집에 악명 높은 서북청년 사무실이 있었다. 뜰 안에 들어서자 한 녀석이 주둥이에다 손가락을 넣고 휙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잡아왔다는 신호였던 모양이다. 미닫이를 열고 여러 녀석들이 나오며 나를 잡아왔다고들 좋아했다. 그 중 한 녀석이 나를 끌고 가서 대청마루 가운데 세워놓고 묻지도 않고 붕대를 감은 주먹으로 가슴과 배, 양 볼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마치 권투장의 샌드백을 치듯 마구잡이로 쳤다. 오면서 회유했던 녀석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자식, 단단히 손봐줘.”
얼마나 맞았을까. 입 안은 터져서 피가 흐르고 주먹은 힘이 약해졌다. 한 녀석이 오더니 바통을 이어받기라도 한 듯 처음 녀석을 밀어내고는 내 목을 잡았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가 하면 다시 바닥에 메어치면서 유도의 갖가지 기법으로 나를 마룻장에 내리쳤다. 그 녀석이 지칠 무렵, 다른 두 녀석이 오더니 한 녀석은 내 어깨를, 또 한 녀석은 엉덩이를 받쳐 들고 높이 올렸다가 동시에 바닥에 놓아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마룻바닥에 그대로 패대기쳐졌다. 이 고문이 세 번 거듭되자, 나는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아서 땅에 치면 바르르 떨다가 뻗어버리듯 바닥에 쭉 뻗어버렸다. 손이고, 발이고 어느 곳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룻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뻗어 있는데 녀석들은 다시 나를 질질 끌어다가 나무의자에 앉히고 양팔을 의자 뒤로 묶고는 한 말들이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명주 수건을 물에 적셔서 얼굴을 덮고 물을 부었다. 코로, 입으로 물이 쏟아졌다. 숨이 컥컥 막혀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너를 지도한 선생이 누구냐?”
학련 위원장, 김철하
세 주전자를 부어도 내가 이름을 대지 않자, 이번에는 김철하(고향은 군산이고 목사 아들이며 이름난 악당이었다. 당시 학련 위원장)한테 넘겼다. 철하는 몽둥이를 들고 의자에 앉아 나를 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쪽 구석 어둑한 곳에 진영초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감이 조금 잡혔다. 또 한편에 진영도(영초 사촌형, 아버지가 전선에 나왔고 가정환경이 좋았다)와 상급반 학생이 매를 맞고 있었다. 진영초는 내가 보증을 서서 학생동맹에 가입시켰는데 아직 세포에 배치시키지 않은 상태였다. 개별학습 중이었다. 따라서 영초는 나 이외에 아무도 모른다.
“영초를 네가 가입시켰나?”
“예.”
“네 소속 세포성원이 몇 명이며 누구누구야?”
“모릅니다.”
“네가 영초를 가입시켰다면서 세포원을 몰라?”
“모릅니다.”
영초는 아무리 고문을 해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불 수가 없음을 알고 나는 모른다고만 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민주학생동맹에 가입했냐?”
“가입했습니다.”
“누가 가입시켰냐?”
“김시봉이가 가입시켰습니다.”
“시봉이 이 자식.”
시봉이 말이 나오자마자 몽둥이가 날아왔다. 얼른 손으로 머리를 덮었다. 내 손등은 금새 밤알만큼 부어올랐고 머리에도 혹이 생겼다.
“이 자식, 안 되겠다.”
그들은 기둥에 나를 꽁꽁 묶어놓고 몽둥이 끝을 목대줄에 대고 기둥에 힘껏 밀어붙였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만 같았다.
김시봉 동무는 이미 지하로 들어간 뒤였다. 전날에 철하가 시봉이한테 죽을 뻔 한 사건이 있었다. 시봉이 수배되어 피해 다닐 때였다. 고창천 상류 냇가에서 철하가 시봉이를 발견하고 추격했다. 거의 잡힐 뻔 한 순간, 시봉이가 홱 돌아서며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운동선수인 철하가 몸을 날려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래서 시봉이 이름이 나오자 내게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고창을 탈출하다
다음에 서북청년 간부인 듯한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일문일답으로 조서를 작성했다. 그는 먼저 이름, 나이, 고향을 물었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
문득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서 턱없이 많은 논밭 평수를 댔다. 그러자 펜을 든 채 나를 바라보더니,
“학생동맹에 가입할 학생이 아닌데?”
하며 말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적는 것을 그만두고 물었다.
“어떻게 해서 학생동맹에 가입하게 되었나?”
“시봉이하고 친했는데 아주 좋은 모임이라고 해서 시봉이 말만 믿고 가입했습니다.”
“가입한 사람들을 아나?”
“모릅니다.”
“왜 몰라?”
“내가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차차 알게 된다고 하데요.”
영초가 학습기간이라고 나와 같은 대답을 했기 때문에 그는 앞서서 영초 취조를 했던 터라 내 말에 얼마간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영초와 내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초가 나를 업고 갔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는데 눈앞이 온통 별이었다. 목이 부어서 침마저 삼킬 수가 없어서 영초 등에 침을 질질 흘렸다. 영초에게 어떻게 잡혀왔느냐고 간신히 물었다. 한 방을 쓰는 하숙생을 잡으러 왔다가 저놈도 수상하니까 데리고 가자고 해서 덤으로 끌려왔다가 매에 못 이겨 나를 불었다며 몇 번이나 사과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 나는 고창을 탈출했다. 위로부터 조직이 노출돼 다시 잡히게 되면 그때는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지하에 묻혀서라도 싸웠어야 했지만, 나는 조직의 결정도 없이 고창을 떠났다. 뒤에 들었는데 조재민, 이대규 등 벗들은 입산해 끝까지 싸웠다고 한다.
보초 없이 자다
이런 잘못은 입산 후에도 있었다. 1951년 3월, 선이 떨어진 채 여덟 명이 임실 성수산에 있을 때였다. 사업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장수군 유격대와 함께 골짜기에서 밥을 해먹고 안전지대에 들어간 것이 새벽 세 시쯤 되었다. 성수산 상봉에서 삼백여 미터 떨어진 자연 동굴에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보초문제가 나오자 동무들이 보초 없이 서너 시간만 자자고 했다. 지서까지는 이십 리가 넘고 그들이 뒤를 밟았다면 우리가 밥을 해먹을 때 기습했을 것이니, 피곤하니 그냥 자자고 했다. 보초를 세우고 자야 한다는 유격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나의 주장도 완강했다. 그러자 박근주 동무가 굴 앞 바위 밑에서 자겠다는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만일의 경우 토벌대가 온다고 해도 앞에 바위를 지나기 때문에 동굴 안에 있는 동무들은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동의했다. 박동무와 조동무가 바위 밑에 가서 자고, 나머지 동무들은 추운 때라 동굴 안에 불을 피워놓고 쪼그리고 잤다.
넝쿨을 잡고 절벽을 타다
오래지 않아 귀창을 뚫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동굴 천정에서 돌조각과 총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이다. 동무들은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안쪽에 있었던 나는 연발총을 들었다. 두세 동무는 엉겁결에 총을 놓고 굴 밖으로 나갔다가 손을 내밀며
“내 총 내 총.”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총을 내주고, 날 새기 전이라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적의 위치를 파악한 뒤 잽싸게 굴 밖으로 나가서 위쪽 바위에 등을 붙였다. 동무들이 아래로 빠지고 토벌대 또한 아래쪽으로 몰려가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때 사람이 벽에 붙으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올라갔다. 바위가 길게 이어진 중간에 낮은 부분이 있어서 그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날이 막 밝아서 십여 미터 전방을 볼 수 있게 되자, 아래쪽 바위 끝에 있던 경찰 두 명이 소리쳤다.
“저기 간다! 저기 간다!”
칠팔 미터 거리였지만 총성을 내면 내 위치가 노출되어 포위망을 빠져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살짝 바위를 안고 돌았다. 그런데 더 갈 수가 없었다. 절벽이었다. 되돌아가자니 이미 날이 밝아서 적 앞에 노출될 것이다.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그 때 바위틈에 난 소나무 위로 칭칭 감겨 있는 칡넝쿨과 댕댕이 넝쿨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소나무 밑에 가서 두 종류의 넝쿨을 힘껏 잡아당겼다. 더 이상 풀리지 않고 팽팽하게 되었을 때 따발총을 거꾸로 메고 굵은 넝쿨을 쥐고는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잡아당긴 힘보다 체중이 주는 무게가 컸던지 소나무에 감긴 넝쿨이 주르륵 풀리면서 떨어지다가 멎는 바람에 그만 벼랑에 부딪혔다. 따발 탄창이 허리를 쳤다. 숨이 막힐 듯 아팠다. 가까스로 너덜겅에 닿았으나 주저앉은 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탄창이 찌그러져서 작동이 안 되고, 놈들의 수색대가 오면 잡힐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몸값을 해야지.’
배낭 속에 예비탄창을 꺼내서 소리 안 나게 바꿔 끼우고 주위를 살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성이 들렸다. 허리를 주무르며 몸을 움직였다. 차츰 몸 놀리기가 나아져서 억새풀을 제치며 기어 나갔다. 허리에 손을 짚고 통증은 있었지만 살살 걸어서 작은 능선을 넘었다. 북쪽은 눈이 쌓여 있고 이삼 미터 폭의 빙판이 낭떠러지 저 아래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다. 숨을 멈추고 왼발로 턱진 빙판 복판을 살짝 딛고는 뛰어넘었다. 뒤돌아보니 아찔했다. 조금만 삐딱했으면 굴러 떨어졌으리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평상시라면 도저히 넘지 못하리라.’
살아남으면 겨울에 다시 오리라
살아남기만 하면 겨울에 꼭 한 번 다시 와보리라 생각하면서 위험지대를 빠져나왔다. 성수산 최고봉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추운 겨울일지라도 해만 나면 바람막이 양지쪽은 봄 못지않게 따뜻한 법이다. 마른 풀을 뜯어다가 깔고 누웠다.
‘동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희생이 있었을 텐데…….’
사방이 조용했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너 시 경에 깨어났다. 한기가 들었다. 산은 여전히 이따금 새 나는 소리와 골바람에 마른 풀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인적이 없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추워오는데 총을 가지고는 있지만 돌아다닐 수가 없고 웅크리고 앉아서 밤을 기다렸다.
살아남은 사람들
깊은 산 중에 어느새 어두움이 깃들었다. 다리를 주물러서 펴고 일어났다. 제1비상선, 성수산 상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몸이 떨리고 허리도 아팠지만 따뜻하게 자고난 탓일까. 비교적 몸이 가벼웠다. 산봉우리에 올라갔을 때는 사방이 어두웠다. 누가 와 있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바람소리 뿐 인적이라고는 없었다. 귀를 곧추 세우고 앉아 있다가 걷다가 하는데 잔가지 꺾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소대장 동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상훈 동무?”
“예.”
“혼자야?”
“예.”
반가움과 동시에 맥이 빠졌다. 상훈 동무의 손을 꽉 잡았다. 상훈 동무도 기습당했을 때 위로 빠져서 가까운 곳에 잠복해 있다가 올라왔다고 했다.
‘다 희생되지는 않았을 텐데…….’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도 동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했다. 비상선이 노출되었을 것으로 보고 안 온다는 말인가. 상훈동무가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며 떠나자고 했다.
“30분만 더 기다려 봅시다.”
고지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데, 언뜻 바스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구여?”
날카롭게 쏘았다.
“백두산.”
“두만강.”
“동옥 동무요?”
“예.”
쫓아가서 안았다.
“어찌 이렇게 늦었어?”
“기습당했을 때 굴 밖으로 나와서 뛰다가 부상당한 조동무를 만났습니다. 다리를 맞았데요. 조동무를 업었는데 뛸 수가 있어야지요. 적들은 여리저기서 총을 쏘아대고 날은 밝아오지, 할 수 없이 가까운 잡목 속으로 조동무를 끌고 갔습니다. 날이 새니까 잡목 사이로 놈들이 보이데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놈들이 못 보았어요.”
“조동무는 어데 있어?”
“낮에 있던 곳에 계십니다.”
“총 맞은 데가 다리 어데요?”
“허벅지인데 통 걷지를 못합니다. 어찌 될지 몰라서 총을 달라고 했더니 총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데요.”
“왜 이렇게 늦었소?”
일선에서 일곱 시에 만나기로 했었다.
“동무들이 다 죽은 것만 같아서요. 몇 번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나는 안 오려고 했는데 조동무가 그래도 모르니까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어서 갑시다.”
동옥 동무가 앞장서서 내려갔다.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이백여 미터나 내려갔을까, 앞서가던 동옥 동무가 멈추라는 손짓을 했다. 귀를 기울였다. 사람 발자국 소리도 아니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솔길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위로 몇 발짝 올라갔다. 총을 겨누고 쏘아보고 있는데 눈 위에 무엇인가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다. 바짝 긴장했다. 가까이 왔다. 짐승이 아닌 사람이었다.
“누구요?”
“백두산.”
우리는 달려갔다. 상체를 일으킨 것은 박근주 동무였다. 나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총끈을 목에 걸고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눈 위를 기어서 선을 찾아가는 박동무의 몰골은 참담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발 위에서 아래로 총탄이 관통한 것이다.
“뛰다가 총을 맞았어. 더 갈 수가 있어야지. 가까운 산죽 속으로 숨어 들어갔어. 그런데 놈들은 삼사 미터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나를 못 보더구만. 날이 밝아오면서 빨리 가자고 서둘러대데. 어쩐 일인지 몰라. 수색하지도 않고 철수했어. 동무들이 여러 명 희생된 것 같아. 최동무가 앞 능선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총성과 함께 비명소리를 들었어. 오면서도 피가 묻은 혁대하고 갈기갈기 찢어놓은 배낭을 서너 개나 보았어. 아마도 모두 죽었을 거야.”
비통했다. 성수산에서 선 떨어져 있던 여덟 명은 각기 소속이 다르지만 내가 결론을 내려야 할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보초를 세우는 원칙을 고수했다면, 이런 희생은 없었을 것이었다.
박동무를 업고 선에 갔다. 부상당한 동무들이 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두움 속에 잠겨 있는 봉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결한 동지
이상훈 동무와 박동무를 남겨두고 동옥 동무와 나는 조동무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골짜기에 들어섰을 때다.
“만세! 만세! 만세!”
팡! 팡!
세 번의 만세소리와 두 발의 총성이 고요한 골짜기를 찢어놓았다. 한발이면 오발로 볼 수가 있지만 두 발이 아닌가. 밤에 동료들의 시체를 찾으러 빨치산이 올 것을 예상하고 토벌대들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쏜 것인가. 두 발이니 그럴 리도 없었다.
'자살했나?'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사태를 파악하지 않고 총성이 난 곳에 무턱대고 갈 수가 없어서 삼십여 분 동안 살폈다. 발도 시려오고 한기가 온 몸에 스며들었다. 캄캄한 골짜기를 따라 조심스럽게 접근해 갔다.
“조동무! 조동무!”
이동옥 동무가 낮에 숨었던 부근에 가서 조동무를 불렀으나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대답이 없자 우리는 조동무를 찾았다.
아! 반듯하게 누워 있는 조동무는 이미 얼음처럼 차디차게 굳어 있었다. 조동무의 볼을 비볐다. 총을 맞아 한 발을 못 쓰는 몸으로는 싸움은 고사하고 동지들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을 생각해 스스로 자결한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조동지는 쓰러진 고목에 앉아서 총구를 심장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것 같았다. 상체는 위로 반듯이 넘어져 있고 가슴이 피에 젖어있었다. 총은 발밑에 있었다. 괭이나 삽이 없어서 매장을 다음으로 미루고 동무의 시체를 반듯이 눕혀 놓았다. 언 땅 위에 동무만 혼자 남겨두고 뒤를 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떠났다.
상봉에 근주 동무와 상훈 동무만이 떨고 있었다. 아, 동무들은 어디로 갔는가. 다 죽었는가? 절통한 밤이었다.
팔공산 능선에 트를 잡다
그날 밤으로 비상선에 나갔다. 우리 부대와 선이 닿을 때까지 장수군 동무들과 활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우리는 팔공산 능선 한 골짜기, 소쿠리 안처럼 오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소대 단위로 트를 만들었다. 땅을 파고 그 위에 나무를 걸치고 산죽을 덮어놓은 트가 있는가 하면 통나무를 넓고 둥그렇게 세워서 끝을 모으고 산줄을 엮어서 두른 트가 있고, 경사진 곳을 파고 페치카를 만들어 놓고 위를 덮은 트 등 모양이 다른 트가 서너 시간 만에 만들어졌다. 팔공산, 삼각산, 덕대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장수군 남부 유격대 부대장은 인민군 출신이었고 지역책은 장수군당 조직부장 동무였다. 반합법적인 거점을 구축해놓고 남은 겨울을 날 계획이었다. 앞뒤 능선에 땅을 파고 그 안에서 보초를 서도록 했는데 숯불을 피우고 발을 녹여가면서 망을 보도록 허락한 점이 잘못이었다. 십여 일 뒤였다. 초저녁에 지방 출신 두 사람이 사업 나갔다가 적을 끌고 들어온 것이다. 지도부에서도 도착 시간이 조금은 지났지만 염려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변절자가 초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소리를 죽이며 초소에 접근했고 보초는 숯불을 쬐다가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졸았던 것인지 적들이 초소 가까이 와서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벽력 같은 비명소리와 뒤이은 총소리에 동무들은 트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미 능선을 장악한 토벌대가 집중사격을 하고 동무들은 각자 흩어져서 뛰었다. 나도 트 입구로 빠지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제치고 잽싸게 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박근주 동무를 들쳐업고 뛰다
그때였다.
“소대장 동무! 임동무!”
홱 돌아보았다. 부상당한 박근주 동무였다. 반쯤 빠져나오면서 앞에 뛰어가는 나를 보고 불렀던 것이다. 걷지 못하는 박동무를 그대로 두고 가면 죽을 것인데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얼른 돌아가서 박동무를 들쳐 업었다. 그 사이에 동무들은 모두 없어지고 박동무와 나만 남았다. 총탄은 사방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박혔다. 박동무를 업을 때 따발총을 동무에게 주었다. 등에 업힌 박동무는 엠왕을 자신과 내 등 사이에 옆으로 놓고 따발총을 장탄해서 쏘았다. 적의 추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였다.
박근주 동무는 덩치도 크고 몸무게도 대단한 동무였다. 총탄이 쏟아지는데도 나는 빨리 뛸 수가 없었다. 총알을 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코스를 택해서 뛰다가 개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만 돌이끼에 미끄러져서 엎어졌다. 일어났지만 곧 다시 엎어졌다. 마음은 바쁜 데 엎어지기를 반복하니 물속의 도랑길은 멀고 힘겹기만 했다. 조금만 가면 모퉁이였다. 온 힘을 다해서 걸었다. 산죽이 우거진, 호랑이라도 나올 법한 모퉁이를 돌아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 데다 물속에 엎어져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젖어 있었다. 박동무는 내 얼굴의 땀을 닦아 주었다.
물속에 서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개울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따발총을 받아서 겨누었다. 장총을 들고 올라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동옥 동무였다. 얼마나 감격했던가. 적탄이 빗발치는 곳으로, 적이 있는 곳으로 동지를 찾아 단신으로 올라온 이동무 또한, 살아있는 우리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우리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내가 트에서 나오다가 박근주 동무를 구하려고 되돌아갔다는 얘기를 장수동무로부터 듣고 올라오는 길이라고 했다. 동옥 동무가 근주 동무를 업고 나는 동무들을 호위하며 개천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박근주 동무는 56년까지 노령지구에서 부대장으로 견결히 치열하게 싸우다 가셨다는 소식을 같은 부대원이던 고광인 동무에게 나중에 들었다. 영예롭게 최후를 마친 박근주 동무에게 깊은 존경을 보내며 더불어 동무의 명복을 빌었다.
분산된 부대를 규합하라는 임무를 받고 떠나다
1952년 1월 24일이었다. 외팔이 참모장 동지가 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성수산으로 가던 중이었다.
공세가 한창일 때라, 국군은 평상시에는 엄두도 못 내다가 야간에 기차로 군 병력과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다. 3대대를 인솔하고 다니던 참모장 동지는 서도역 부근에서 밤 열 시경, 아주 손쉽게 기차를 전복했다. 자루 침낭 안에서 자던 군인들이 다급하게 지퍼를 열려다가 못 열고 마치 네 다리를 묶어놓은 돼지처럼 열차칸 의자 밑에서, 통로에서 뒹굴고 있었기에 저항 없이 군인들을 생포했으며 많은 총과 탄약을 노획했다. 3대대 성원들은 모자와 군복, 총, 군화, 모포, 공병삽이 꽂혀 있는 배낭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군인으로 변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마터면 군인인 줄 알고 선에서 도망칠 뻔했다. 무장을 한 3대대는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과 남부지구 사령관이 인솔했던 2대대와 6대대는 아침에 임실 성수산에 들어가다가 비행기 공습과 토벌대의 협공을 받고 희생이 많았을 뿐 아니라 부대가 분산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참모장 동지가 분산된 부대를 규합하라는 임무를 우리에게 준 것이었다.
보상할 수 없는 일
새벽이 가까워 오기에 임실군 삼계면 세심리에 들어가서 옥내 트(집안에 마련하는 트)를 만들었다. 산봉우리와 능선, 골짜기 할 것 없이 군경이 진치고 있어서 큰 산이나 야산을 막론하고 하루해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때였다. 외딴집에 가서 오십대 아주머니한테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하루를 쉬었다 가라고 허락하셨다. 헛간에 솔가지단이 쌓여있어서 한 쪽을 치우고 긴 나무 너댓 개를 벽에 걸쳤다. 그 위에 멍석을 펴고 솔가지단을 쌓아 올렸다. 이십여 분만에 트가 완성되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트를 만들기 전과 다름없이 솔가지단이 쌓여 있지만 나뭇단 하나를 빼면 출입구가 되고 안으로 들어가면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바닥에 짚을 깔고 호롱불을 켜놓았다. 강용기 부대대장 동무, 나, 민흥 지도원, 정진순 위생병, 이일성 연락병, 아주머니 등 여섯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배낭에 짊어지고 다니는 식량을 꺼내서 점심을 먹고 지루한 오후를 보냈다. 어두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계 바늘은 더디 갔다. 네 시가 되어 저녁밥을 시켰다. 마음이 푹 놓였다. 토벌대의 활동은 중지되고 우리들의 세계가 어두움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방에다 밥상을 차려놓았으니 나와서 자시지요."
그 집 며느리의 말이었다.
나뭇단을 빼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움이 짙어가는 골짜기, 산골마을에 저녁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방에 들어갔다. 의당 보초를 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낮에도 무사했는데 오 분 동안에 무슨 일이 있겠냐는 해이한 생각에, 보초를 세우면 식사시간이 십 분 연장된다는 구실로 전원이 밥상머리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밥그릇이 삼분의 이쯤 비었을 때다.
“손 들엇!”
서쪽 문종이가 뚫리면서 총구가 들어왔다. 숨이 멎고 등골이 곧추섰다. 동무들의 표정이 굳었다. 가만히 벽에 세워놓은 총을 들었다.
‘장탄을 하자니 소리가 날 것이고, 장탄소리가 나면 밖에서 쏠 텐데.’
소리 안 나게 살짝 기병 단총 날창을 꽂았다. 아직 인기척이 없는 부엌문을 발로 박차고 나갔다. 집 모퉁이를 휙 돌아나가자 눈 위에 기관단총을 든 군인이 보였다. 그대로 돌아서서 뛰었다. 뜰 앞 울타리를 힘껏 양손으로 가르고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내밀자 여러 명이 논두렁에 엎드려서 총구를 이쪽으로 겨누고 있는 게 아닌가. 사립문 쪽으로 뛰었다. 막 문을 빠져 나가려는데 울타리에 붙어있던 놈이 갈비에 총구를 들이댔다. 순간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낮에 있었던 헛간으로 들어갔다. 숨이 목에 찼다. 전방을 살피기 위해서 뒷걸음으로 들어가다가 그만 나뭇단에 걸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다. 캄캄한 헛간에 군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두 명이 등판에 총구를 들이댔다. 누가 날창을 세운 내 총을 덮쳤다. 나는 격투도 해보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체포당한 것이다. 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체포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다른 동무들도 부엌에서 다 잡히고 말았다. 전선줄에 줄줄이 묶였다.
언제 어디서나 원칙을 고수해야 했지만 원칙을 끝까지 관철해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내가 비원칙적인 의견과 타협함으로써 네 동무를 잃었고 나까지 다섯 동무가 잡혔다. 이를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1951년 여름 우리 부대가 가마골에 있었을 때였다. 식량사정이 어려워서 멀리 보급사업을 나가게 되었는데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내가 나가서 식량을 얻어오지 않으면 다른 동무들이 가져온 식량을 먹어야 함을 번연히 알면서 태만했던 것이다. 그 뿐인가, 1951년 12월 대공세 때다. 대원들이 소유하고 있던 실탄이 떨어져가기 때문에 참모장 동지는 나에게 소대 병력을 인솔하고 쌍치에 가서 비장해 둔 탄알을 파오도록 과업을 주셨다. 당시 나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오한이 들었다.
“독감에 걸려서 가기가 어렵겠네요.”
“독감에 걸렸어?”
참모장 동무는 이마를 짚어보시고 머리가 펄펄 끓는다고 걱정하시며 그 임무를 부대대장 동무에게 주어서 떠나보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용골산 밑의 깊은 산 여기저기에 정찰부대로부터 토벌대 대병력이 골짜기를 타고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부대가 급히 이동할 때 동무들과 함께 행군하지 않았는가? 감기 그것이 죽을 정도도, 못 걸을 정도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고지마다,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적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쌍치까지 가려면 여러 위험지대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감기를 핑계로 안 간 것이 아닌가? 그렇다.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순간
또 하나, 모닥불 옆에서 자다가 급히 떠날 때 총과 배낭만을 걸머지고 중대 명단과 학습노트 세미나 제강이 들어있던 작은 가방을 놓고 왔다. 서류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뿐인가, 체포된 뒤 언제 어디서나 자기 사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습을 하지 않았다.
‘만일에 살아서 나간다면 깊은 산중이나 먼 섬에 가서 살리라.’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패배주의자요, 도피주의자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도 일어서서 거짓을 폭로하지 않고 데데한 발언을 한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일해 보았으면……. 돌아갈 수 없는 과거, 목숨이 다한 때라 더 아프고 안타까웠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동무들도 지난날의 잘못을 고백하며 가슴 아파했다.
이런 젖을 가지고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국중기 동무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국중기 동무는 전남 단양군 담양읍 향교리에 집이 있었고 일제시대에 군대에 끌려가다가 대구 밑에서 기차가 산모퉁이를 돌 때 탈출해 산으로 도망쳐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다가 고향인 담양에 갔다. 친척 집에 숨어살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다. 그 때의 감격은 형언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해방 후 민주청년 단체에서 활동했고, 1950년 합법시에는 내무서에서 사업했으며 9.28 후퇴 이후 애인과 함께 입산하여 담양 유격대 정치부 중대장으로 잘 싸운 동무였다.
“1951년 여름이었어요. 가마골에서 애인을 만났습니다.(소속 부대가 다르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었다고 함) 동무들이 알고 있는 사이라 두 사람이 이야기하라고 자리를 피해주데요. 으스름 달밤이었습니다. 숲속이라 어두웠지만 얼굴도 보이고 달 없는 밤보다는 좋데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나란히 앉아서 한동안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사이에 그녀는 내 손을 끌어다가 옷 속의 젖 있는 곳으로 가져갔어요. 그때 그만 머쓱해서 손을 빼려다가 마음 아파할까봐 만져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엔 봉긋하고 부드러워야 할 처녀 젖이 없었어요. 포탄에 젖이 날아가 버린 겁니다. 손가락이 들어가게 움푹 움푹 패인 젖을 만질 때 전율을 느꼈습니다. 애인은 이런 젖을 가지고도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우유로 키울 수 있지 않느냐고 위로하면서 그녀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때 ‘이 고생스럽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빨치산 생활을 청산하고 사랑하는 애인과 자수해서 행복하게 살거나.’
하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아파옵니다. 부끄럽습니다.”
말을 마친 국중기 동무는 머리를 떨어뜨렸다. 자수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애인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용을 털어놓으면서 마음 아파하던 국중기 동무…….
충남 빨치산이며 평소에 말이 없던 동무가 있었다. 동무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을 때 그 동무도 입을 열었다.
‘나만 적에게 투항하라구요?’
“저는 한금산에서 전투하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비트에 있었어요.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지만 총알이 등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걷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수일 내에 부대 복귀가 가능했는데 그만 수색대에 발견되고 말았어요. 손들고 나오라는 투항을 종용하는 메가폰 소리를 들으면서 한 동무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들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총상환자인 우리들은 나가도 놈들이 죽입니다. 손들고 나가서 죽으나 트 안에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매일반입니다. 영예롭게 최후를 마칩시다. 함께 자결합시다.’
‘좋습니다.’
동무들이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한 사람의 반대도 없었어요. 저도 찬성했습니다.
‘여동무(환자들을 치료해주고 식사나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헌신적으로 해결해 주던 간호원)는 나가도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가도록 하지요.’
한 동무의 새로운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동무들이 찬성하고 나올 때였다. 여동무가 말했습니다.
‘저는 동무들과 생사를 함께해 왔습니다. 동무들이 최후를 마치는데 나만 적에게 투항하라구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죽어도 안 됩니다.’
불덩이 같은 눈의 여동무는 단호했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밖에서 놈들이 총을 쏘며 떠드는 소리만 들릴 뿐 트 안에는 동무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론을 내려야 할 위치에 있던 소대장 동무가 말했습니다.
‘여동무의 결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동무들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반대가 없느냐는 소대장 말에 그제야 동무들은 머리를 끄덕였어요.
한 동무가 일어나 수류탄을 꺼냈습니다. 안전장치의 안전핀을 뽑았습니다. 여동무까지 아홉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상체를 앞으로 머리를 맞대고 숙였습니다. 수류탄 스프링을 놓았습니다. 폭발 직전에 저는 두 동무의 팔을 풀고 바닥에 엎드렸어요. 동무들은 그날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저는…….”
눈물이 그 동무의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일 년만이라도 아니 반년만이라도 조국과 겨레를 위해 혼신을 바쳐서 일해보고 죽었으면 하는 절절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누군가가 이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우리들이 죽음 앞에서 아파했던 것,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를 밖에 있는 동무들에게 전해주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최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사업경험이 풍부하고 역량 있는 많은 동무들이 총살당했지만, 마지막 순간을 투쟁으로 장식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들이 마지막 순간을 맞으면서 최후투쟁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 다만 사전에 동지들과 의논해서 현실에 맞는 투쟁방법을 강구하고 실천하기 위한 준비가 없었던 데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휴전 감시단에 성명서를 보내다
휴전 감시단원인 체코와 폴란드 대표가 군산에도 상주하면서 감시 임무를 수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을 통해서 우리의 글을 체코와 폴란드 대표에게 보낼 수 없을까 하고 머리를 맞댔다. 이 계획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홍철 동지의 제의에 따라서 연락은 순남 동무의 동생이 맡도록 하고 글은 성명서의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정치공작원 홍철, 충남유격대 참모장 이욱, 전북 45사단 작전과장 장윤규, 정읍군 군사부장 강재권, 407연대 정치부 중대장 임방규가 서명하기로 했다. 서명할 동지들에게 취지와 전달가능성, 우리에게 미칠 파장을 설명하자 모두 찬성했다.
수건에 자수를 놓아준다고 해서 소제에게 연필토막과 얇은 종이를 쉽게 구했다.
성명서는 정전 조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에서 정치범을 대대적으로 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확인하기 위한 국제인권위 조사단 파견을 촉구했다.
두 나라 대표에게는 정치범 학살의 구체적인 사실을 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남은 사람들의 생명이 구출될 수도 있고(광주 말고 다른 감옥에도 사형수가 많이 있었다), 설사 구출되지 않더라도 진실을 알리는 데 여러분들의 역할이 지대한 만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실천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가족에게는 이 글을 체코나 폴란드 대표에게 전해달라고 전했다. 각자가 문안을 읽어보고 서명했다.
솜옷을 뜯어서 솜 안에 성명서를 넣었다. 성명서가 들어 있는 부분은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도록 바늘로 여러 번 꿰매놓았다. 솜옷을 빨 때 겹쳐 박아놓은 실밥을 뜯으면서 가족들이 성명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머리를 썼다. 면회할 때 순남 동무의 솜옷은 무사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기다려도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후투쟁
성명서를 통해 우리의 처지를 바깥에 알리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제는 우리가 직접 싸워서 세상에 우리가 사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나서 내가 구상한 안을 내놓았다.
“정전이 되었지만 우리는 총살당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최후 순간까지 조국에 이바지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투쟁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고 봅니다. 동무들! 군 트럭에 실려서 광주 시내를 빠져나갈 때 차에서 뛰어내리면 어떨까요? 오라에 묶인 몸이라 사람이 대롱거리지 않겠습니까? 차가 멎겠지요? 시민들이 모여들 것이고, 그때 군중을 향해서 정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에서 정치범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으면 말로, 말로 할 수 없으면 몸짓으로라도 알린다면, 여론을 국내외에 환기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육체적인 폭행이 가해지겠지만 얼마 후에 죽을 텐데 문제가 되겠습니까?”
모두 긴장했다. 이욱 동무가 나섰다.
“대찬성입니다. 우리가 최후 투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방법상에 이견이 있습니다. 만일에 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럴 수가 없다면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저들이 면회실에서 우리를 묶으려고 할 때 저들을 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기만 손에 쥐면 소내에서 전투를 하게 될 것이고, 죽어도 핏값을 하고 죽지 않겠습니까? 대낮에 총성이 콩 볶듯이 울리면 사건이 담 밖에 알려져서 여론 또한 환기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도 좋은 의견입니다만 일단 작은 공간에 들어가면 치고받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이가사에서 면회실까지 가는 사이는 저들이 무장하고 있지만 우리 또한 양손이 자유로우니까 미리 준비한 대젓가락이나 뜰 한편에 널려있는 벽돌 조각이나 돌을 가지고 불시에 치면 총 몇 자루는 탈취할 수 있을 겁니다.”
“호명하지 않은 동무들은 어떻게 합니까?”
김창묵 동무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었다.
“불가피하지요. 호명되지 않은 동무들은 방 안에 있고 일단 밖에 나간 동무들이 싸워야지요.”
“결국은 죽을 것인데 문을 따면 한꺼번에 나가서 싸웁시다.”
변절자 박기환
그때였다. 박기환이 벌떡 일어났다.
“관에 보고하겠습니다.”
청천병력이었다. 관에 우리 계획을 알리겠다니, 큰일이었다.
이가사 담당은 감방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급한 일이 생기면 고함을 질러서 계호과 직원으로 하여금 열쇠를 가져오도록 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이가사를 철조망으로 둘러치고 출입문에 열쇠를 채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자물쇠를 두 번이나 따야 감방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따라서 박기환이 밀고한다 해도 그는 사오 분 동안은 방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박기환에게 환기시켰다.
큰 소리가 밖으로 나갈까 봐 옆 동무가 마구 팔을 흔들었고, 박기환도 한 풀 꺾이는 것 같았다. 바짓가랑이를 움켜잡고 만류하는 동무의 뜻에 따르는 척 박기환이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도 무기형을 받았는데 동무들의 투쟁을 무엇 때문에 방해하려고 하겠습니까? 동무들이 싸우면 무기수까지 죽일 것 같아 비상수단이라도 써서 살려고 한 것입니다.”
박기환은 산에서 부대장을 했고, 체포된 후 이용당한 자였다. 발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투쟁인민들이 업고 이 비트, 저 비트 옮겨 다니며 먹여주고 보살펴 주었는데 그 분들을 다 불어서 인민들에게 피해를 크게 준 변절자였다. 그와 같은 '공로'로 부대장이란 직책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을 받은 것이었다.
“나도 반대합니다.”
순남이도 반대했다. 순남이는 사형을 받고 있었으나 가족과 연결이 되어 있었고 가족들이 밖에서 석방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총살당했다)
마지막 희망-나는 감옥에서 최후를 맞고 싶었다
그날 이후 감방 생활은 차디찬 겨울이 되었다. 우리는 신경이 곤두섰다. 일체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박기환 옆 동무뿐만 아니라 방안 사람들 모두가, 반대하는 쪽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각별히 조심했다.
그러니 학습이나 토론도 할 수 없었고, 줄곧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많은 동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는 죽음이 견디기 어렵게 괴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내 생각은 오로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인생을 값있게 마감하겠다는 평상시 생각이 실제로 총살당하러 나갈 때 결행하는 행동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명이 되고 나서 옆 동무와 악수를 나누고 동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며 담담하게 가신 동무들이 있는 반면, 호명과 동시에 사색이 되거나 맥을 못 추던 동무도 있지 않았는가. 마지막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우리가 끌려 나가는 시간은 오전 열한 시경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 동지들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해시계가 열 시를 넘어 반쯤 가면 말이 줄어들고 좀 더 지나면 온 신경이 귀에 집중되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가 싶어 말소리도 끊어졌다.
나는 끝을 시멘트바닥에 갈아놓은 굵직한 대젓가락을 쥐면서 생각했다.
'오늘 호명하면 동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문 밖에 나가서 비호처럼 몸을 날려 무기를 탈취해 사동에 다니면서 아지프로를 하고 만세를 부를 거다.'
나는 구덩이를 파놓은 총살 집행장이 아니라, 감옥에서 최후를 맞고 싶었다.
열한 시의 고비가 지나가면 긴장이 풀리면서 평상시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날마다 열 시 부터 열한 시까지 한 시간 동안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희망과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떤 고통 속에서도 몸 구석구석에 생이 약동하는 삶이 이어진다. 죽기 전 마지막 투쟁은 내게 큰 희망이었다. 그것은 불충분하고 부족했던 나를 온전히 조국에 바칠 투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게 하루하루는 극비리에 한 사람, 한 사람씩 투지를 결속시키는 나날이었다. 누가 한 사람 선두만 끊으면, 그 다음은 총살당하러 나가는 마당이며 무장투쟁으로 단련된 빨치산이라 화산처럼 저항이 폭발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남은 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 학습에 열중하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지만 아무도 불려나가지 않았다. 1953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밤은 홑옷을 입고 마룻방에 누워 있는 우리에게 긴긴 밤이었다. 낮 또한 길었다. 가신 동무들이 사용했던 양철식기가 구석에 수북이 쌓인 채 녹슬어가고 있었다.
남은 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 학습에 열중했다.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에 파고들었다. 또한 강의 내용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를 보충하기 위해서 지학선 동무에게 당사를 정리해서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지학선 동무는 며칠 후에 강의를 시작했다. 낮에는 감시 때문에 못 하고, 밤에 솜저고리(어머님이 넣어주신 솜옷)를 벗어서 머리를 싸고 저고리 겨드랑이에 입을 묻고는 작은 소리로 강의했다. 나는 옷소매 끝에 귀를 대고 들었다.
한 해를 보내며 1953년뿐만 아니라, 내 생애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그날까지의 온 과정을 다시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