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낭 : 의자
시인의 내면에 새로운 시어들이 잠들어 있다. 시인의 언어는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랑그의 언어(개념적인 말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머릿속에는 ‘의자’라는 공통의 속성이 존재한다. 다리가 있고(셋이든 넷이든 동그랗든) 중심을 잡고 사람의 엉덩이를 받칠 정도의 면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대하는 의자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사무용 의자, 나무 의자, 식탁 의자, 간이 의자, 팔걸이 의자, 스탠딩 의자, 안락 의자, 긴 의자, 흔들 의자, 사무용 의자, 학습용 의자, 휴식용 의자 등이 있다.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의자들이다. 시인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봐야 한다. 뭔가를 받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 정신은 없을까, 사랑은 없을까, 그런 역사는 없을까, 다양하게 생각을 뻗어나가야 한다. 즉, 관념이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인 빠롤의 언어(감수성의 언어, 생동감 있는 언어)를 통해 새로움을 창조해야 한다.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시는 메타언어이며 감수성의 언어이다.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의지의 ‘받침’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허리가 아프니까 / 세상이 다 의자로 보”이는 것이고 나의 아픔에서 시작된 사유가 “꽃도 열매도, 그게 다 /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고 “그래도 큰애 네가 /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 가족, 삶에까지 사유가 넓어진다. 이렇게만 사유가 넓어졌다면 시가 변화가 없고 재미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시에 변화를 준다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 저것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라고 함으로써 사유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진술의 형태인 당부로 마무리 한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다시 말해 누군가의 받침으로 살아가라는 말이다. 의자의 속성인 받침을 따뜻하게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치환했다.
시가 낯익다는 것은 랑그의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야 말로 현대시의 생명이다. 즉, 빠롤의 시어를 써야 한다. 그러니 ‘1차 정서’의 언어는 시가 아니다. 감정의 설사이다. 관념어들의 나열이고 낯익은 것들의 잔치일 뿐이다.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마라. 시는 설사하는 것이 아니다.
시를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이를 심상(心想)이라고 한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다. 이미지는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이다. 이미지네이션(imagination)은 상상이다. 그러니 이미지는 상상력에서 온다. 이러한 상상력이 구체성을 띠는 것이 이미지이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결합되어서 하나의 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언어로 그려내는 그림이다.
이러한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의미성은 시에 들어 있는 메시지이다. 시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시를 썼는가. 이것이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이러한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이미지가 잘 구현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회화성이다. ‘나팔꽃’을 ‘식도’라고 하면 이미지가 확실하게 떠오른다. 이러한 유사성에서 오는 이미지를 잘 이용하면 한 편의 시가 된다.
이미지+ 이미지+...=이미지절이 된다. 한 편의 시는 이미지 떼로 구성된다. 시는 기발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이것이 ‘낯설게 하기’의 원동력이다. ‘달, 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 달’ 이런 달은 이제 새롭지 않다. 시의 언어는 아날로지이다. 나팔꽃의 형태와 식도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이다. 병아리 이빨 닦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것이 시인이다. 시와 접신을 해야 한다. 강의는 밑자리만 깔아주는 것이다. 그 다음은 시인의 몫이다. 눈높이만 높여 놓으면 안 된다. 시인의 눈에 쌓인 백태를 걷어내야 한다. 직접 써야 한다. 시자(示者)가 아니라 견자(見者)가 되어야 한다. 손끝만 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
눈썹 날개
강대선
남자는 다리를 내보인다
아직 몸을 지탱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듯 네 개의 다리가 바짝 마른 남자의 몸을 받치고 있다
비 온 뒤에 쉽게 잡초를 뽑는 일처럼 쉽게 뽑혀 나갈 줄 알았던,
미라의 뼈처럼 영혼이 다 빠져나가고 남은 껍데기 같던 남자의 목숨은
뼈가 다 드러난 다리로도 생을 굳건하게 세우고 있다
벽을 기어오르던 담쟁이가 마지막까지 발을 벽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인다
이제 가야한다는 듯 찬 바람이 담쟁이의 등을 떠민다
눈 덮인 마당을 맨발로 서 있다 온 듯 남자의 다리는 차갑고 시리다
생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화살과 같아서, 흘러가 버린 물과 같아서, 다시는 돌아오지는 순간 같아서,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없는 막막함 같아서, 나는 말없이 남자의 다리를 달빛처럼 어루만진다
태초에 다리는 날개의 퇴화였을까
홀로 되신 어머니와 나이 어린 동생들과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가장의 어깨가 땅에 붙들렸던 것
날개가 돋았을 어깨가 한없이 땅을 보며 퇴화를 했던 것
다리는 한 생의 기념비처럼 서 있다
타버린 불꽃 같다가, 파릇함이 사라진 잎 같다가, 망자가 들어가는 관 같다가,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은 폐가 같다는 생각이 똬리를틀 즈음
둥글둥글 몽당빗자루 같이 닳아진 발가락이 보인다
젖은 눈썹이 떨린다
떨리는 눈썹을 날개로 달고 어디로 날아가려는 것일까
어룽한 눈물을 달고 네 개의 다리가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