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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6장: 삶 자체가 기별이 되게 하라
이제 16장으로 넘어갑니다.
1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매우 엄중한 세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별을 바르게 전하는 선지자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어렵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설교한 대로 완벽하게 살아가는 목사가 있다면 이 세상에는 목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농담입니다. 설교한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았다면 벌써 다 승천했을 테니까요.
물론 이것은 농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16장을 보면 선지자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로만 기별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 자체가 그 시대를 향한 기별이 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을 ‘사인 액션(sign action)’, 곧 상징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그 상징 행동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결혼하지 말고 자녀를 두지 말라.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렘 16:2)
둘째,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거기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렘 16:5의 뜻)
셋째, 잔칫집에 들어가지 말라.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렘 16:8의 뜻)
와우! 참으로 엄중한 명령입니다.
예레미야가 그 시대의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려면 그의 행동 자체가 기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살아가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길을 찾다』 제5권을 가지고 계신가요? 가지고 계신 분들은 함께 책을 열어 221쪽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책이 없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가지고 계신 분들은 함께 읽어 주시고, 없는 분들은 귀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예레미야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임박한 멸망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눈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명을 수행하는 선지자는 개인적인 삶에서 기쁨을 얻는 일마저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7)
앞서 읽었던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다른 번역에서는 주님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다는 뜻으로 표현합니다.
그 외로움에 이어지는 16장은 예레미야가 구체적으로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소개합니다. 그 명령은 세 가지입니다.
1) 첫째 명령: 결혼하지 말고 자녀를 두지 말라
221쪽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과 자녀는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자녀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상급으로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자녀를 통하여 자신의 생명과 인생이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얻지 못하거나 자녀를 잃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욥이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은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사야도 심판을 가리켜 하루에 갑자기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는 두 가지 일이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당시에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에는 독신을 나타내는 별도의 히브리어 명사가 없다는 점도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고 자녀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가혹한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선지자의 사역에 가족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이기 때문에 내리신 명령도 아닙니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것과 비슷합니다.
호세아는 가정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가정이 없는 삶을 통해 유다에 임할 심판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과 4절은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 곳에서 낳은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하는 어머니와 그들을 낳은 아버지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렘 16:3~4의 뜻)
그러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 현실을 삶으로 보여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둘째 명령: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이제 223쪽을 보겠습니다. 아래쪽에서 열 번째 줄 부근의 두 번째 문단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레미야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속한 사회와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초상집에 조문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슬픔을 당한 이웃과 아픔을 나누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자녀들의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친구들이 찾아와 조문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조차 행하지 말라니, 참으로 가혹한 명령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렘 16:5의 뜻)
참으로 엄중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이 백성’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평강과 인자와 사랑을 거두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유다에 임할 심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초상집에 가서 울거나 애곡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백성에게 닥칠 재앙이 그만큼 엄중했기 때문입니다.
3) 셋째 명령: 잔칫집에 들어가지 말라
세 번째는 잔칫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유다에 기뻐할 일이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225쪽 마지막 문단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삶을 요구하신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인생으로 하나님의 기별을 전해야 할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혼할 수도 없었고 자녀를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고독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조차 자유롭게 행할 수 없었습니다.
초상집에도, 잔칫집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모두 임박한 유다의 미래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식이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포로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가올 바벨론 포로의 현실이 얼마나 비참할지를 그의 삶으로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3. 예레미야 16장 10~13절: 왜 이런 재앙이 임하는가?
세 가지 명령을 주신 다음, 하나님께서는 10절에서 백성들이 보일 반응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내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 하거든.”(렘 16:10의 뜻)
백성들은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도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6:12의 뜻)
우리도 출애굽기와 광야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불순종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세대가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지자가 그토록 간절히 기도해도 심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에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4. 예레미야 16장 14~15절: 출애굽과 탈바벨론의 이중 구원
예레미야 16장 14절과 15절은 구약 전체의 구원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23장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며 그들을 자기 땅에 살게 하리라.”(렘 23:7~8의 뜻)
이제 예레미야 16장 14절과 15절로 돌아오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 16:14~15의 뜻)
여기 예레미야 16장 14~15절과 23장 7~8절은 구약의 구원 사상을 두 개의 사건으로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하나는 출애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출바벨론, 곧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중 구원입니다.
구약의 구원 역사는 애굽에서의 구원으로 시작하지만, 바벨론에서의 구원까지 이어집니다.
이 개념을 이해해야 신약에서 말하는 출애굽의 개념과 요한계시록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라는 호소까지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기별로 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왜 성경은 단순히 애굽에서 나오라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호소할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죄를 범했고, 마침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포로 생활을 겪은 후 반드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출바벨론의 하나님이십니다.
출바벨론은 출애굽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구원하셨고, 그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가시며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조직신학적으로 연결하면 칭의와 성화의 경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서 구원받는 것뿐 아니라, 삶 속에 자리 잡은 죄의 영향과 혼잡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경험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혼잡과 거짓 가르침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호소는 하나님을 떠나 혼잡에 빠진 백성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마지막 호소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심판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해도, 백성들이 조상들보다 더욱 죄를 범했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반드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십자가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해결하시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16장 16~18절은 구원의 약속을 주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면서도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이 두 가지 진리를 하나로 보여 주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죄가 죽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는 사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죽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죄인은 살아나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의 결과를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면서 죄인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갚으시고 죄인을 살리신다는 진리는 구약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반드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표현됩니다.
심판이 있지만 회복이 있습니다.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지만, 죄인을 다시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만납니다.
예레미야 16장 19~21절: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섭리
이어서 예레미야는 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렘 16:19의 뜻)
그리고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렘 16:21의 뜻)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두 가지 일을 함께 이루어 가십니다.
첫째, 죄를 해결하십니다.
둘째,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살려 달라고 간절히 중보하지만,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지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면서 백성을 구원하실 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