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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 먹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음식 중 하나가 우무냉국이다.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콩국에 우무를 말아 먹어도 좋고, 젤리처럼 맑고 투명한 우무를 콩국수와 함께 씹는 것도 별미다. 혹은 채 친 오이와 함께 매콤새콤하게 비벼 먹는 우무냉채 한입이면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우무냉국은 무더위가 한창일 때 특히 어울리는 음식으로, 조선 후기 정조 임금 역시 속을 식힐 때 우무 요리를 즐겨 드셨다.
“요즘 아침과 낮의 날씨가 고르지 못해 감기가 극성인데 이럴 때 건강을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내의원에서 올리는 석화채는 성질이 몹시 차서 날마다 드시는 것은 담체증에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담이 몰려 답답한 증세는 열이 많아 생기는 것이니 찬 성질의 음식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열이 올라 속이 답답하다며 찬 음식인 석화채(石花菜), 즉 우무 요리를 날마다 먹었다는 것이니 한여름의 물리적인 더위뿐만 아니라 몸속에서 일어나는 열불을 가라앉힐 때도 우무로 만든 냉국이나 냉채가 제격이었다.
요즘 우무냉국과 냉채는 집에서 특별히 만들어 먹지 않는 한, 주로 분식집이나 재래시장에 가야 먹을 수 있다. 사실 우무로 만든 반찬이 특별히 고급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것처럼 고급 음식점보다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무가 무척 고급 음식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해동죽지》에서도 우뭇가사리를 원료로 만드는 우무는 남해안의 명물로 여름철이면 임금님도 즐겨 드시던 청량 식품이라고 소개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남해안에서 생산되는 우뭇가사리로 투명한 우무묵을 만들어 궁궐에 진상하는데, 묵을 가늘게 썰어 초장을 쳐서 냉탕으로 만들어 마시면 상쾌하기 때문에 더위를 씻을 수 있고 갈증도 덜어낼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의 우무냉국이나 우무냉채처럼 더위를 식히는 여름 별미였던 것이다. 여름에 먹는 우무냉국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저자인 최영년은 시까지 한 수 읊었다.
해천(海天)은 소털처럼 생긴 풀로/ 끓여서 묵을 만들면 흰 기름 같아서/ 국물과 함께 마시면 가슴까지 시원해/ 탄성이 나무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조선 후기, 우무는 양반들의 별미였다. 순조 때 실학자 이규경은 여름에 먹는 우무는 수정처럼 맑고 차가운데 국수처럼 초장에 말아 먹으면 몹시 상쾌하다고 했다. 들깨탕이나 콩국에 말면 여름 더위를 막을 수 있고, 초장이나 겨자장에 무쳐 먹어도 좋은 밥반찬이 된다고 했으니 지금 우무로 만든 반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무는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초인 우뭇가사리를 끓인 후 굳혀서 묵처럼 만든 식품이다. 조선 중기인 광해군 무렵에도 만들어 먹던 식품으로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전국의 유명 음식을 품평한 《도문대작》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해초 중에 우모(牛毛)라는 것이 있는데 열을 가하면 녹는 성질을 이용해 묵으로 만든다고 적었다. 소털이라는 뜻의 우모는 생김새가 마치 소털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참고로 우무를 동결건조 한 것이 한천인데 아이스크림, 또는 양갱의 원료로 쓰인다. 한천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추운 겨울날 햇볕에 우무를 집 밖에 내놓고 말리다 우연히 동결건조 된 우무를 얻게 되어 한천(寒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어로는 아가(agar)로 어원은 말레이어이며 현지어로 젤리라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옛날 우무가 귀한 대접을 받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별 맛이 없는 심심한 음식이라서 큰 인기가 없지만 예전에는 우무 자체가 귀했으니 대접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무는 한철에 그것도 먼 남해안 바닷가에서 채취하는 우뭇가사리를 끓여 만드는 식품이니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 도성인 한양까지 보내온 우무는 희소가치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무는 만들기도 힘들고 맛도 밋밋해서인지 도토리묵이나 메밀묵에 밀려 한양 도시민들의 밥상에서 사라졌다. 이런 우무가 최근에는 낮은 칼로리 덕분에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하는데, 음식에 대한 선호도 시대에 따라 돌고 도는 모양이다.
#음식#역사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