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정민 부장판사(서울남부지방법원)
2023-10-18 05:56
구속영장 심문 법정에 선 A 씨의 변소는 여느 피의자들과는 좀 달랐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조사과정에서 변호인도 선임하지 않고 검사님만 믿었는데 어떻게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 돌고 돌아 반복되는 변소의 요지다.
게다가 뇌물공여자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맞지만 빌린 것이라며 범죄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차용증도 쓰지 않았고 이자를 준 적도 없지만 자산가라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피의자에게 돈을 빌려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자선사업가 항변이 피의자가 말하는 금전대여의 동기이다.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해명을 앞세워 범죄혐의를 부인하여야 방어권 보장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것이지 범죄사실을 부인하기만 하면 무조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는 없을진대, 억대가 훌쩍 넘는 뇌물을 수수를 하였다는 범죄사실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피의자의 주장치고는 상당히 궁색하다.
나는 피의자가 도대체 검사를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A씨는 명문대를 졸업한 후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으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여 돈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법정에서는 그러한 배경과 지식은 온데 간데 없는듯했다.
검사는 수사를 하는 사람이고, 수사는 범죄혐의를 밝히는 일이며, 지금 검사는 피의자가 뇌물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하여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A씨는 어떻게 구속영장을 청구해서 본인을 배신할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검사를 바라본다.
의사의 진단도 없고 외상도 안 보이지만 정상적인 판단력이 마비되는 위기 상태. 인생이 걸린 문제를 마주한 피의자의 지위가 그런 것인가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실은 피의자 A는 7회에 걸친 피의자 조사에서 일관되게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백하였다.
수회로 나누어 억대 금액의 돈을 주었다는 뇌물 공여자의 진술, 피의자가 돈을 받은 다음 날 받은 액수와 유사한 금액을 본인의 통장에 입금한 거래내역, 돈을 주고받은 장소로 지목된 곳과 일치하는 공여자의 휴대폰 기지국 위치정보와 그 장소 주변에서 사용한 피의자의 신용카드 결제 내역 등 수집된 보강증거는 꼬리표가 없는 현금이 오고 가는 뇌물사건의 특성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준이다.
또한 이 사건은 모 기업체 임원의 횡령, 배임 사건 수사 중 드러난 단서를 기초로 돈을 받은 쪽인 A가 자백하고 이를 기반으로 또 다른 기업체 차원의 입찰 관련 청탁과 뇌물공여 수사로 나아가기에 이른 것으로, 뇌물 사건 수사로서는 통상과는 반대의 흐름이 이어진 다소 이례적인 과정을 거쳤다.
검사는 피의자 A가 조사과정에서 범죄혐의를 자백하였지만 범죄의 중대성과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뇌물 액수가 억대를 넘어 실형선고가 예상되는 한편 피의자가 직장에서 해임된 후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이 사건과 유사한 형태의 부패 비리에 연루되고 있다는 구체적 정황이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면 구속사유가 충분히 인정된다는 설명이다.
형사소송법은 법원이 구속사유를 심사할 때는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우려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는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라는 구속사유 판단 시 일반적인 고려사항으로 해석되고 있으니, 법규정에 의하더라도 검사가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이 예측불허의 불의타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백 후 선처를 바랐던 피의자 입장에서는 불구속 수사가 ‘어쩌면 해피엔딩’의 시나리오였을 터이니, 피의자 심문 법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어쩌다 새드엔딩’의 현장이었나 보다.
피의자심문 결과를 토대로 수사기록을 검토하다 보니, 피의자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여 수사에 협조하고 장기간에 걸쳐 수차례 피의자 조사가 이루어진 이 사건과 같은 경우, 여러 이야기가 오가다 보면 검사도 피의자도 사람인지라 동상이몽의 착각 섞인 나름의 신뢰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인지상정일 수도 있겠다는 상념에 이르고, 그러자 ‘검사님의 배신’을 변소의 주요요지로 들이민 피의자의 태도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A 씨는 기소 이후 재판 과정에서 다시 범죄사실을 전부 자백하였다. 실형 선고는 불가피하였으나 수사기관에서 자수한 사정이 반영되어 형량을 정할 때 자수감경 및 정상참작 감경이 거듭 인정되었다. ‘어쩌면 새드엔딩’이 될 것처럼 갈팡질팡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악을 피한 ‘어쩌다 해피엔딩’의 결말이라고 해도 좋을까. A 씨의 생각이 문득 궁금해진다.
김정민 부장판사(서울남부지방법원)
■ 피의자로 조사받을 때 유의할 점
글 : 법무법인 바른
2018. 5. 25. 17:48
김씨(45)는 얼마 전 경찰서로부터 출석해 조사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채무 관계인 지인이 사기죄로 고소한 것이다. 김씨는 별다른 대비 없이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다.
떳떳했기에 별 탈 없이 일단락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는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 검찰의 기소로 형사재판이 잡히자 극도의 불안을 느꼈고, 그제야 변호사를 찾았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형사사건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경찰은 피해자나 고소인을 먼저 조사한 뒤 피의자를 소환하기 때문에 이미 김씨가 범죄자라고 예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것을 ‘피의자 신문’이라고 하는데, 위 사례처럼 아무 대책 없이 나섰다가 상황이 악화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피의자 신문 조서의 내용은 검사가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와 기준이 됩니다. 또한 이후 이어질지 모르는 형사재판에서 판사가 유죄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므로 그 중요성이 매우 큽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보장한 자신의 권리를 정확히 알고 제때 행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다음 3가지 사항을 잘 기억해두면 만일의 상황이 닥쳤을 때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을 활용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피의자가 신문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변호인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권리입니다.
법원에서는 피고인 대신 변호인이 주로 말을 하지만, 피의자 신문은 다릅니다. 대부분 피의자가 직접 진술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신문 때 변호인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수사 기관과 피의자의 대결은 현저히 불공정한 게임이 될 수밖에 없는 탓입니다. 수사기관은 이미 확보한 각종 증거를 토대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음에도 피의자는 수사기관이 파악한 게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이때 범죄 유형에 따라 불리한 진술이나 불필요한 진술, 인정할 부분, 사실과 다른 부분을 분명하게 가려서 대처해야 하지만 홀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변호인의 체계적인 조력을 받는다면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사건의 방향을 바로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접견 시까지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피의자는 조사를 받으면서 냉정한 판단 능력과 평정심을 잃기 쉽습니다. 그와 같은 심리 상태에서 진술하게 되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보다 되려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의자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부여하고 있는 진술거부권을 적절하게 행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피의자가 변호인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면, 신원 확인 절차까지는 수사기관에 협조하고 변호인이 올 때까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유죄를 밝히는 것은 수사기관의 임무인 것이고, 피의자가 반드시 적극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 조서를 꼼꼼히 확인하고 잘못된 부분은 수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피의자에게는 조사가 끝난 뒤 수사기관이 출력하여 준 조서를 확인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때 피의자는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조서에 작성된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 자신이 진술한 내용과 정확히 부합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진술한 내용과 다른 부분이 발견되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수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거나 수사기관 측이 수정을 해주지 않으면 조서에 서명과 날인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작성한 조서는 일단 피의자가 서명·날인하고 나면 증거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사실상 곤란하므로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학력
1999 서울대일외국어고 졸업
2003 경찰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2012 제54회 사법시험 합격
2015 사법연수원 제44기 수료
경력
2003 ~ 2006 강원춘천경찰서
2006 경찰청
2007 ~ 2010 서울중부경찰서
2015 ~ 2017 서울고등법원 재판연구원
2017 ~ 현 재 법무법인(유한) 바른 소속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