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연보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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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신유) 61세 1월, 부름에 따라 서울로 가려 하다가 마침 말에서 떨어져, 병으로 사면되다. 얼마 후에 명나라 사신이 결국 오지 않아 마침내 부름을 정지하였다. 3월, 절우사(節友社)를 짓다. 하루는 선생이 계상(溪上)에서 도산으로 걸어나와 매화를 찾아서 시를 지었는데,
꽃은 바위 벼랑에 피었는데 봄은 적적하고 / 花發巖崖春寂寂 새는 시냇가 나무에서 우는데 물은 졸졸 흐른다 / 鳥鳴澗樹水潺潺 우연히 산뒷길을 따라 어린것과 젊은이를 데리고 / 偶從山後攜童冠 한가로이 산 앞에 이르러 고반(考槃)을 보았네 / 閒到山前看考槃 하였다. 이덕홍이, “이 시는 위와 아래가 같이 흘러서 각기 꼭 맞는 자리를 얻은 묘함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은, “비록 대략 그러한 의사가 있기는 하나 그와 같이 추측하여 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4월 16일, 달밤에 탁영담(濯纓潭)에서 뱃놀이를 하다. 형의 아들 교(㝯)와 손자 안도(安道)와 문인 이덕홍이 따랐다. 〈청풍명월(淸風明月)〉 4운으로 각각 시를 지었고, 〈전적벽부〉ㆍ〈후적벽부〉를 읊은 뒤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11월, 〈도산기(陶山記)〉를 짓다. 41년 (임술) 62세 3월 3일, 도산에 나와 배를 타고 청계(靑溪)에 이르러서 시냇가에 대를 쌓고 청계대라 이름 짓다. ○ 이구암(李龜巖 이정(李楨))이 방문하다. 유숙한 지 며칠 후에 돌아가는데 선생이 석간대(石磵臺)에 가서 송별하였다. 7월 16일, 풍월담(風月潭)에서 노닐려다가 하지 못하다. 적벽 고사(赤壁故事)처럼 친구들과 노닐기로 약속하였다가, 큰비를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시 두 수가 있다.42년 (계해) 63세 3월, 황금계(黃錦溪)의 부음(訃音)이 와서 곡하다. 황금계의 이름은 준량(俊良)이요, 자는 중거(仲擧)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만년에 다시 이 성리학에 뜻이 있어 여러 번 선생에게 의심나는 것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여 왕복한 편지가 매우 많았다. 이때에 성주 목사로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선생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사람을 보내어 제문을 지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 제사 지내고, 장사 때에는 행장을 지었다. 9월, 왕세자의 상을 듣고 도산으로 나아가 허위(虛位)를 모셔 놓고 예를 행하다. 10월 4일에 복이 다하여 5일에 복을 벗었다.43년 (갑자) 64세 윤2월, 안동에서 고조와 증조의 묘에 제사 지내고, 일가 사람들과 회합하였다. ○ 4월, 여러 제자들과 청량산을 유람하다. 산에서 노닐면서 지은 여러 시가 있다. 9월, 정암(靜菴) 조 선생의 행장을 짓다. ○ 〈심(心)에 체(體)와 용(用)이 없다는 말에 변박하는 글〉을 짓다. 종실에 종성령(鍾城令 이구(李球))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는 연방(蓮坊)이었다. 일찍부터 서화담을 좇아 배웠다. 이때에 〈심무체용설(心無體用說)〉을 지어 김취려(金就礪)를 통하여 선생에게 질문하므로, 선생이 이것을 변정하였다. 요약하면, “적(寂)과 감(感)을 체와 용으로 삼는 것은 주역에 근본한 것이고 동과 정으로 체ㆍ용을 삼는 것은 대기(戴記)에 근본한 것이며,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체와 용을 삼는 것은 자사에게서 근본한 것이고, 성과 정으로 체와 용을 삼는 것은 맹자에게서 근본한 것으로 모두 심(心)의 체와 용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은 비록 육합(六合)에 가득하고 고금에 뻗쳐 있으며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고 만물에 통하는 것이지만, 그 요점은 이 두 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체ㆍ용이란 말은 비록 진나라 이전의 서적에는 보이지 않으나, 정자ㆍ주자 이래로 여러 학자가 도를 논하고 마음을 논할 때는 이것을 주로 하여 강론하고 분변하여 밝혀지지 아니할까 두려워하였고, 진북계(陳北溪)의 심설(心說)에는 더욱 이것을 강조하여 말하였으니, 일찍이 마음에 체와 용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이제 연방(蓮坊)은 ‘마음에는 확실히 체와 용이 있으나, 그 근본을 더듬어 보면 체와 용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듣기에 정자는 ‘마음은 하나일 뿐이나 체를 가리켜 말하는 경우도 있고, 용을 가리켜 말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이제 그 체와 용이 있는 것을 가리켜 마음이라고 하였으니 마음에 대해서는 이미 다 말했는데, 또 어디서 별도로 체와 용이 없는 마음을 얻어서 마음 이전에 근본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동(動)과 정(靜)은 진실한 이(理)요, 체와 용이라는 것은 허위의 설이니, 도리(道理)는 본래 체와 용이 없고 동ㆍ정으로 체와 용을 삼는다.’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도리에는 동도 있고 정도 있는데 그 정을 가리켜 체라 하고, 동을 가리켜 용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즉, 도리의 동ㆍ정의 실체가 바로 도리의 체ㆍ용의 실체인데, 또 어찌 체와 용이 없는 별도의 도리가 있어 근본이 되어 동ㆍ정의 앞에 있겠는가. 또, 체(體) 자는 형상[象]에서 생긴 것이요, 용(用) 자는 동(動)하는 데서 생긴 것이니, 동하기 전에 어떻게 용이 있을 수 있으며, 형상 이전에 어떻게 체(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소자(邵子)의 ‘본래 체(體)가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체가 없으면 용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체와 용은 두 가지가 있다. 도리로서 이것을 말하면, 아득히 형체가 없이 아무런 조짐이 없으나[沖漠無朕] 만상(萬象)이 이미 구비되어 있는 것 같은 것이 이것이요, 사물로써 이것을 말하면 배가 물에서 갈 수 있고, 수레가 뭍에서 갈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배와 수레가 물과 뭍에서 가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여자약(呂子約)에게 회답한 글에서, ‘형이상(形以上)으로 말하자면, 아득히 형체가 없는 것이 본래 체이고, 사물 사이에서 발한 것이 용이 되는 것이요, 만약 형이하(形以下)로 말하자면, 사물이 또 체가 되고 이(理)에서 발현된 것이 용(用)이 되니, 대개 형이상이 도의 체가 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도리 다섯 가지는 도의 용이 된다고 대략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배와 수레의 형상을 체로 삼고, 물로 가고 뭍으로 가는 것을 용으로 삼는다면, 비록 형상 이전에는 체가 없고, 동 이전에는 용이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지만, 만약 아득히 형체가 없는 것을 체로 삼는다면, 이 체는 형상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상이 이에 구비되었다는 것을 용으로 삼는다면, 이 용이라는 것은 동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연방(蓮坊)이 말한 ‘체가 형상에서 생기고 용이 동에서 생긴다.’라는 것은 다만 형이하의 사물의 체와 용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니, 한쪽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니, 실로 아득히 형체가 없고 아무 조짐이 없는 것이 바로 용과 체의 같은 근원이 된다는 형이상의 신묘함을 망각한 것이다. 오직 형상의 말단만을 보는 데 국한되었기 때문에 형상 이전에 체가 없다고 말하였고, 소씨(邵氏)의 말을 인용해서 증명하였지만, 소자(邵子)의 이른바 ‘체가 없다.’는 것은 단지 형체가 없다는 것일 뿐이요, 아득히 형체가 없다는 의미의 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미 체를 인식하는 데 원만하지 못하였으니 용을 인식하는 데 원만하지 못하였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아득히 형체가 없고 조짐이 없는 그것이 천지간에 있어서도 무극과 태극의 체가 되어 만상이 이미 갖추어졌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서는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고요한 체가 되어 온갖 용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요, 사물에 있어서는 도리어 발현하여 유행(流行)하는 용이 되어서, 어느 때건 어느 곳이건 없는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 선생(程先生)이 이미, ‘체와 용이 같은 근원이다.’라고 말했고, 또 ‘반드시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은미한 것에 틈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대개 체와 용의 두 글자가 살아 있는 것이고 죽은 것이 아니며 원래 모든 것을 포괄하므로 그 묘한 것을 다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어찌 체(體) 자가 형상에서 생겨 형상 이전에는 체가 없었다고 하겠으며, 어찌 용(用) 자가 동(動)에서 생겨 동 이전에는 용이 없었다고 하겠으며, 어찌 태극을 성인들이 억지로 지은 이름이라고 하여 체도 용도 없다고 하겠는가. 더구나 ‘사람 마음은 그 향하는 곳을 모른다.’는 맹자의 말은, 다만 마음이 두루 흐르고 변화하며 신명하여 예측하지 못하는 미묘함이 있어서 이것을 잃기 쉽고, 보수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고 한 것이니 바로 이 마음의 용이 사물 사이에 발현된 것을 말한 것이다. 참으로 마음이 체도 용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이 용이 어디로부터 있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44년 (을축) 65세 4월, 글을 올려 동지중추부사의 직명(職名)을 해임하여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다. 전교(傳敎)에 “내가 항상 경을 기다리며 자리를 비워 놓은 지 여러 해이건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무리하게 청하니, 이는 어진 이를 대우하는 나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경의 뜻이 깊고 간절하므로 마지못해 들어주노라.” 하였다. 이어 본도에 명하여 먹을 물건을 내려 주게 하였다. ○ 〈은덕을 입어 물러나게 되다〉라는 절구(絶句) 8수가 있다. 문정왕후의 상사(喪事)를 듣고 지곡하고 성복(成服)하다. ○ 〈경재잠도(敬齋箴圖)〉와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와 〈명당실어(名堂室語)〉를 써서 완락재 벽 위에 걸다. ○ 8월, 여러 생도들과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론하다. ○ 《경현록(景賢錄)》을 개정하다. 구암(龜巖) 이공(李公 이정(李楨))이 기록한 것을 살펴보면, “내가 전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가범(家範)과 행장(行狀), 의득(議得) 등의 책을 얻어 《경현록》으로 편찬하였다. 그러나 견문이 부족하여 소루한 것이 너무 많으므로 의심나는 바를 퇴계 선생에게 질문하니, 선생이 의흥(義興) 김입(金立)과 수재(秀才) 정곤수(鄭崑壽) 등이 기록한 것을 함께 가져다가 참고하고 정정하여, 정본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경현록을 개정한 시말이므로 여기에 부록한다. 12월, 특명으로 부르다. 전교에, “내가 총명하지도 못하여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알고 빨리 올라오라.” 하고는, 또 역마 타는 것을 허락하였다.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다. 45년 (병인) 66세 1월, 부름을 받고 서쪽으로 가다가, 영천에 도착해서 병으로 사장(辭狀)을 올리고, 풍기에 가서 머무르면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사장이 허락되지 않다. 유지(有旨)에, “경의 사장을 보니, 내 마음이 섭섭하다. 사직하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와서 여러 번 부르는 나의 정성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는, 또 연로(沿路)의 각읍에 명하여 보호하게 하고, 내의에게 약을 주어 문병하게 하였다. 두번째 사장을 올리다. 풍기에서 예천에 이르러 또 사장을 올려 사면되기를 청하였다. 윤허하지 않고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으로 승진 임명되어 또 사장을 올리다. 선생은 승직되었다는 말을 듣고 예천으로부터 학가산(鶴駕山) 광흥사(廣興寺)로 들어갔다. 3월에 또 사장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난 무오년(1558, 명종13)에 조정에 들어가 성균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신병이 이미 극에 달하여 두서너 달 동안에 출근한 날이 4, 5일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승직시키라고 명하시고 본조의 참판으로 삼으셨으나 두 달 동안 애써서 겨우 3일을 출근했을 뿐입니다. 이제 한치의 남은 힘도 없어서 성상의 은혜에 보답할 가망이 없으므로 황송해서 물러나 돌아왔사온데, 이제 까닭 없이 갑자기 승진되었으니, 예로부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사옵니까. 엎드려 비오니, 성상께서는 신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고 살펴 주시와, 해골(骸骨)이나 고향에 가서 묻힐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지난해 4월 20일에 허락하신 대로 신을 동지중추부사에서 체차하여 직분 없는 자리로 두셔서, 조금이라도 목숨을 보전하다가 의리를 다하고 죽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윤허하지 않고 재촉하여 부르다. 선생은 사장을 올린 뒤 광흥사에서 봉정사(鳳停寺)로 옮겼다. 또 사장을 올려 아뢰기를, “새로 제수하신 관직과 품계는 도리에 비추어 보거나, 자격과 이력으로 보거나 하나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머뭇거리면서 명을 기다린다는 것이 오히려 승직되기를 원하는 뜻이 있는 것 같게 되었사오니, 신의 죄가 더욱 중하옵니다.” 하고, 드디어 봉정사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다. ○ 4월, 체차되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또 교지를 내려 부르다. 사장이 상달되지 않아 문형(文衡 대제학)에 제수하는 명령이 또 내렸다. 얼마 후에 왕이 사장을 보시고 선생이 조정에 나올 뜻이 없음을 알고 대신을 불러 의논하니, 대신이 “6경은 오랫동안 비워 둘 자리가 아니오며, 대제학은 임금의 사명(辭命)을 내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비울 수 있는 관직이 못 되니, 마땅히 우선 체차해야 합니다.” 하니 왕은 그대로 따랐다. 한가한 관직에 제수하라고 명하여 지중추부사에 임명되다. 또 교지를 내려, 안심하고 조리하면서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올라오라고 하였다. 7월, 사장을 올려 가자(加資)된 자헌대부와 지중추부사의 직명을 사면하고 이전의 직명으로 치사(致仕)하기를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병의 차도가 있거든 올라올 것을 명하다. 임금은 선생이 조정에 나오기를 매우 간절하게 기대했으나 선생이 여러 번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임금의 뜻은 그래도 간절하여,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라는 것으로 글제를 삼아 독서당 유신에게 각각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짓게 하고, 또 선생이 사는 도산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시고는,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을 시켜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그 위에 쓰게 하고, 병풍을 만들어서 처소에 펼쳐 놓게 하셨다. 10월, 회재(晦齋) 이 선생의 행장을 짓고, 또 문집을 교정하다. ○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짓다. 선생은 심경(心經)을 존중하고 숭상하는 것이 더욱 지극하여, 사서(四書)나 《근사록(近思錄)》에 못지않게 여겼다. 금계 황준량(黃俊良)이 전에 편지로써 심경의 내용을 희롱하고 배척하기를, “진서산(眞西山)은 속은 비고 거죽만 화려하여 실상이 없고, 범난계(范蘭溪)는 덩굴지기만 하고 절실하지 못하여, 황자계(黃慈溪)는 관찰한 것이 두 사람에 비하여 더욱 떨어지고, 정황돈(程篁墩)은 관찰한 것이 분명하지 아니하며, 택한 것이 정하지 못합니다.” 하여 선생에게 다시 더 깎고 고치기를 청하니, 선생은 회답하는 편지에서 그렇지 아니한 것을 밝혔다. 이에 또 이 논설(심경후론)을 지었는데, 심학의 연원을 천명하고, 이단의 거친 가시덤불을 물리친 것이 깊고 절실하고 분명하여, 초려(草廬)와 황돈(篁墩) 등의 말에 대해 진실로 털끝같이 나누고 실오라기같이 분석하였으며, 겸하여 그 장점되는 바를 매몰시키지 아니하고, 학문의 바른 명맥이 환하게 밝아져서, 다른 갈림길에서 헤매지 않게 하였으니, 선생이 후세를 위하여 생각한 것이 지극하였다. 선생은 또 중국의 학술이 잘못되어 백사(白沙)와 양명(陽明)의 여러 학설이 세상에 성행하고 정자와 주자가 서로 전해 오던 전통이 날로 인멸되어 가는 것에 대해 깊이 탄식하고 근심하였다. 이에 백사의 《시교(詩敎)》와 양명의 《전습록(傳習錄)》 등의 책에 대해 모두 논변하는 글을 지어 그 잘못을 바로잡았다. 유인중(柳仁仲)과 편지로 속몽구(續蒙求)를 논하였다. 목종(穆宗) 융경(隆慶) 원년 (정묘) 67세 2월, 임금이 다시 부르다. 이때 가정(嘉靖) 황제가 죽고 새 황제가 즉위하여 조사(詔使)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대신 이준경(李浚慶) 등이 문학하는 선비들을 불러 모아 조사를 접대하는 데 대비하기를 계청함으로 해서 부르시는 명이 또 내렸다. 5월, 유지(有旨)로써 올라오기를 재촉하다. ○ 6월, 부름에 응하여 서울로 들어가다. ○ 명종대왕이 승하하다. 선생은 서울로 들어온 지 3일 만에 병으로 숙배(肅拜)를 미처 드리지 못한 채, 변을 듣고는 오사모(烏紗帽)와 흑각띠(黑角帶)로 갖추고 곡에 임하였다. 7월, 대행왕(大行王 승하하신 왕)의 행장 수찬청(行狀修撰廳) 당상관이 되어 행장을 짓다. ○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다시 올렸으나 또 허락되지 않다. ○ 8월, 병으로 면직되어 즉시 동쪽으로 돌아오다. ○ 9월, 대행왕의 만시(挽詩)를 지어 올리다. 5언으로 배율된 20운(韻)인데, 서문에 말한 개략을 들면, “6월 25일에 신이 서울에 들어왔고 26일에 주상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27일에는 위독하시다 하고, 28일에는 승하하시고 말았습니다. 신은 올라오는 도중에 병이 더하여 미처 숙배도 드리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큰 변을 당하여, 부여잡고 통곡하여 숨이 끊어질 것 같고 오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조사(詔使)가 오기 때문에 분주하여 과로에 지쳐서 몸에 병이 부쩍 심하였는데, 때마침 춘관(春官 예조 판서)에 제수하는 특명이 있었으므로 하루도 관직에 봉사하지 못하고 사양하여 체차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전조(前朝)에서 병으로 물러간 신하로서 뒤를 이은 임금의 새 정치를 하는 처음 시기에 또 제수하는 은명을 이처럼 저버렸으니 신하의 의리가 다 없어지게 되었는데, 만약 다시 이럭저럭 하다가 가지 못하고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을 도적질하다가 죽는다면, 수십 년간 괴롭게 사직할 것을 빌어 왔던 의리가 어디에 있겠으며, 치사한다든지 해골을 보존한다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못하게 될 것이라 여겨 관직에서 체차되는 틈을 타서 몸을 빼 돌아왔으니,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이미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만사를 지어 올리게 하심을 들었으나, 신은 병으로 정신이 혼몽하여 글을 짓지 못하던 차에, 겨우 죽게 됨을 면하게 되자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이제 겨우 지어서 죄스러움을 무릅쓰고 인편에 도감에 바칩니다. 신이 인산(因山)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중이므로 물리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 시에,
관에 임명되어 직임을 다하지 못했는데 / 命官官失守 녹은 녹대로 여전히 과분하네 / 言祿祿仍奢 옛 의리는 마땅히 빨리 가야할 것인데 / 古義當遄去 지금 실정은 준열한 비난이 있구나 / 今情有峻訶 의리와 실정은 다 같이 합치되기 어려운 것 / 義情難並處 지금과 예전이 다른 데에야 어찌할까 / 今古柰殊何 라는 구절이 있다. 18일, 용수사(龍壽寺)에 머물다. 19일이 대행왕의 발인날이므로 집에 있는 것이 편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명언(奇明彥)의 편지에 회답하다. 선생이 물러나 돌아온 것이 산릉(山陵)의 일을 마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때의 여론이 분분하였는데, 기명언이 편지로 물으므로 선생이 회답한 것이다. 그 개략을 들면, “인산(因山)은 참담하니 흠위(廞衛)가 임할 때에는 여러 백관이 좇아 받들고 모두 애통해하는 법인데, 병든 신하만 그럴 수가 없어 옛 절에 와서 의지하고 있는데, 마침 편지가 와서 옛 의리로 책망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마는, 저의 사람됨이 남들과 또 다르고 저의 처신이 또 남들과 다르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저의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고 병이 심해서이고, 헛된 명성을 얻어서이고 잘못된 은명(恩命)을 받아서입니다. 매우 어리석은데도 헛된 명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망녕된 짓이고, 심한 병을 앓으면서 잘못된 은명을 받아들인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망녕된 짓을 한다는 것은 덕에 있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사람에 있어서 길하지 못하며, 나라에 있어서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벼슬하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고 항상 몸을 빼려고 하는 것이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옛날의 군자로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의리에 밝은 자는 한 가지 일도 허술하게 지나쳐 버리지 아니하고, 조금이라도 관의 직무를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몸을 빼 급히 물러갔습니다. 임금을 사랑하는 정으로는 못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만, 그 때문에 물러가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몸을 바치는 마당에 의리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반드시 물러나야 그 의리를 좇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가 되면 비록 차마 그럴 수 없는 정이 있더라도 부득이 의리에 따라야 합니다. 도(道)가 같은 자는 말하지 아니하여도 서로 이해할 수 있고, 같지 않은 자는 자세한 얘기를 해도 이해하지 못하며, 제 몸이 당(堂) 위에 있어야 당 아랫사람들의 옳고 그른 것을 분변할 수 있는 법입니다. 알 수 없지만 공의 뜻은 이 두 가지 것에 있어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겠습니까. 수고롭지만 아낌없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10월, 용양위대호군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다. 유지에,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는 것은 임금의 덕에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현인을 존경하고 학문을 강구하는 데 달려 있다. 부지런히 경연에 나가서 날마다 어진 선비를 만나 보아야 마음과 지혜가 고명하게 되고, 그런 뒤에야 어진 사람인지 간사한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마땅히 경연에 입시하여야 할 사람이 멀리 있으면 의당 가까이 오도록 하여 경연을 맡아보게 해야 할 것이다. 경이 내려간 것이 경황이 없고 망극한 중이었으므로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하였노라. 정치를 새롭게 하려는 처음에 침체하였던 사람들을 모두 발탁하여 써야 할 것인데 더구나 어진 재상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은 역마를 타고 빨리 올라오라.” 하시었다. 이는 대사간 목첨(睦詹)이 아뢰기를, “이황은 학문이 널리 통하고 공부가 돈독하오니, 마땅히 교지를 내려 부르셔서 경연 석상에 두셔야 반드시 성학을 펴는 데 공효가 있을 것이옵니다.” 한 까닭에 부르신 것이었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겸직은 종전과 같다. ○ 사장을 올려, 소명(召命)을 멈추고, 경연에서 강의하는 직무에서 체차해 주며, 예법에 따라 치사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다. ○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겸직은 종전과 같았으며, 또 교서를 내려 특명으로 부르다. 허엽(許曄)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어진 스승을 얻어서 배운 연후라야 사업이 월등했습니다. 이황은 병이 있어서 돌아갔으나, 상께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절을 극진히 하여 스승으로 삼으신다면 오게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여, 임금은 이 말을 좇아서 선생과 조식과 이항(李恒)을 교서로써 특별히 부른 것이다. 얼마 후 날이 추워서 길에 오를 수가 없자, 느리고 빠른 데 구애되지 말고 날씨가 따스해지면 천천히 올라오게 하였다. 12월, 유지로써 올라올 것을 재촉하다. 명나라 사신이 올 것이므로 응접할 일이 급하기 때문이었다.2년 금상(今上) 원년 (무진) 68세 1월,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고, 거듭 치사할 것을 청하며 아울러 사장을 올려 소명(召命)을 사양하다.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옛날의 성덕 있는 황제나 명철하신 임금들은, 현인을 존경하고 선비를 임용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사옵니다. 그러나 이른바 어진 선비는 반드시 바른 사람을 얻어서 진실로 그 실제를 얻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혹 어진 이를 좋아하는 뜻과 선을 즐기는 정성만 있고 어진 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그 사람의 그릇이 어떠한 것도 묻지 않아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자를 부지런하게 맞아들이는 잘못을 범하여,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는 선비가 급작스레 어진 이로 존대하는 의례를 받게 한다면, 굽은 것을 들어서 곧은 것 위에 놓는 것 같아서 만백성이 심복하지 아니할 것이며, 어질고 어리석은 것이 뒤섞여서 나라의 정치가 날로 문란하여질 것이옵니다. 신이 선조(先朝)에서 여러 번 부르심을 받았사온데, 전의 세 번 부르셨을 때는 다 품계가 낮은 벼슬이어서 별달리 혐의될 것이 없었으므로 명령을 받으면 즉시 출발하여서 일찍이 꾸물거리거나 의심하여 올라가지 아니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두 번 부르셨을 때는 품계를 높여서 중직에 임명하려고 하시었고, 혹은 이미 품계를 높여서 중직에 임명하셨으므로, 신의 좁은 생각으로는 위태롭고 난처하여 극력 사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 서울로 올라갔을 때는 망극한 변을 만나고 신의 병이 급히 더쳐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을 돌보지 않아야 할 처지에 있었사오나, 의리를 펼치지 못했으니 오직 물러나야 하는 의리만 남았다는 것이 매우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산릉(山陵)이 임박했는데도 머물러 기다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바로 돌아왔사오니, 그 역시 이(理)가 극에 달하면 의(義)가 변해지는 것으로서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었사옵니다. 그러나 당시의 여론이 모두 괴이하게 여겨서 혹은 ‘이름을 내기 좋아해서 그런다.’ 하고, 혹은, ‘거짓 병이다.’ 하고, 혹은 산새에 비유하고, 혹은 이단이라고 배척하였사오니, 이것은 신이 신하로서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에 당대의 현인들에게 크게 죄를 얻은 것이니, 다시 무슨 도리로 전하께서 돌보아 주신 뜻을 감당하여 때에 맞는 쓰임이 되겠습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우인(虞人)의 이르지 아니한 죄를 너그러이 벌하시옵고, 선왕께서 사람을 물리친 예법을 참고하셔서, 잘못 내리신 윤음을 도로 거두소서. 소명도 그치시고, 치사하게 하는 좋은 법을 밝게 거행하시어 고향에 돌아가 죽겠다는 신의 청을 허락하옵소서.……” 하였다. 숭정대부로 올려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하고 유지로써 올라올 것을 재촉하다. 선생이 올린 상소가 상에게 아직 올라가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또 대신에게 이르기를 “이황을 군직(軍職)에 둔다는 것은 어진 이를 존대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것 같으니, 특별히 찬성을 제수하고, 다시 일러서 올라오게 하라.” 하셨기 때문에 이번의 임명이 있었던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은 어필로 쓴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경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니, 겸양한 것이 지나치다. 경은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한 옛 신하로서 덕행이 높고 학문이 정대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 누군들 어찌 모르겠는가. 나도 들은 지가 오래되었노라. 경이 선조에도 여러 번 부름을 받아 올라왔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도 또 서울에 왔었으나, 망극한 변을 만나 급하게 도로 되돌아갔으니, 이는 필시 새 임금의 정치가 무도(無道)하고 어진 이를 존대하는 데 정성스럽지 못한 때문이리라. 나의 뉘우치고 한스런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의 인군은 비록 명철하고 성스러워도 반드시 어진 이를 구하여 스승으로 삼았는데, 하물며 나는 어려서부터 엄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도 못하였고 갑자기 어려운 대업을 이었으니, 대비께서도 역시 이르시기를, ‘내가 아는 것이 없고 게다가 고독하고 병 중에 있으면서 어찌 가르치고 지도하겠느냐. 마땅히 이황과 같은 이가 있으면 좋겠다.’ 하시며 항상 경이 올라오기를 바라신다. 대비의 의사도 이같이 근간하신데도 경이 오려 하지 않는다면, 경이 생각을 좀 덜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조정에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이 비록 많지만, 내가 경을 바라는 것은 역시 북두성 같은 바와 같으니, 경은 모름지기 나아가고 물러서는 데 혐의스러움을 생각지 말고, 올라와서 병을 무릅쓰고 조정에 머물러서 나의 어리석고 못난 자질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3월, 또 소를 올려 새로 승진된 관직을 사양하고, 이전 관직으로 치사할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다시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였으나, 또 사직하다. 소의 개략을 들면, “신은 지난해 10월부터 금년 2월 그믐에 이르는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성상의 교지를 받았습니다. 모두 불러서 제수하는 것이었으므로 보잘것없는 신으로서는 크게 바라시는 바에 부족되고 명철하신 교지에 보답하지 못할 것을 깊이 알았기 때문에, 명령을 내리실 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장계로 아뢰거나 소를 올려 파면하여 주실 것을 빌었습니다만, 정성이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허락하시는 말씀이 아직도 없었사옵니다. 대개 천하 인재의 등분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어서, 큰 것은 작은 것이 될 수도 없고, 작은 것은 큰 것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그런 줄을 아셨기 때문에 관작을 각각 그 재능에 따라서 주셔서, 큰 것은 큰 데 처하게 하시고, 작은 것은 작은 데 처하게 하시어, 분수를 넘어서 지나치게 주시는 일은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인군이 사람 쓰는 데만 그러하겠사옵니까. 그 신하 된 자로서 나아가서 세상에 소용되려는 자도,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자신이 요량하여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요량해서 들어갈 것이요, 들어간 뒤에 요량할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극히 비루한 자질에다가 오랫동안 앓아온 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돌아가 농사나 지어 먹고 살면서 타고난 본분을 지키고 관리들의 처분[吏議]을 면하려 하였는데, 뜻밖에 이 때문에 헛된 이름을 얻게 되어 성조로 하여금 은명을 여러 번 잘못 내리시게 하였사옵니다. 신은 본직을 사직하고 물러가 쉬고자 하는데, 조정에서는 그 사직한 것으로 인하여 다시 더 발탁하여 승진시켰습니다. 신이 그 승진을 힘껏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다시 승임시키시니, 고생한 공적으로써 말한다면 털끝만 한 것도 드러난 것이 없으면서, 관직으로 말한다면 높다랗게 6경의 열에 반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금 천하에 절대로 없는 일이어서, 신의 큰 허물이 되어 굽어보고 쳐다보니 부끄럽고 떨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사옵니다. 이제 용이 구오(九五)에 나니, 만물이 모두 쳐다보는지라, 어진 이를 좋아하시고 착한 것을 즐기심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소견이 막힌 신하가 외람되이 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과장해서 떠들고 천거하여서 자리를 차지하게 하니, 간절히 어진 이를 구하시는 아름다우신 뜻을 그릇되게 하였사옵니다. 그러므로 신을 부르시는 것과 신에게 명하시는 것이 잇달아 거듭되어 매우 무거우나, 모두 신이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여 성은으로 사면하시기를 바랐사온데, 그 소가 미처 성상께 상달되기 전에 또다시 특별히 찬성으로 승진시키라는 은명이 있게 되었으니, 신이 이보다 먼저 사면되기를 빌던 뜻에 비해 보시면, 과연 그 가볍고 중한 것과 크고 작은 것과 능히 감당하느냐 못 하느냐가 어떻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염려해 주시고 불쌍히 여기심을 억지로라도 내리셔서 말씀을 거두시어 이미 잘못 받은 관직과 품계를 급히 모두 체차해 주시기는 바라지 아니하오나, 이번에 새로 내리신 숭품(崇品)의 품계와 이공(貳公)의 관직과 겸대한 경연관을 즉시 도로 환수하라고 명하시고 이전의 관직명으로 치사하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교지로 간곡하게 타이르시고는, 각 도 감사에게 명령을 내려 수로ㆍ육로에서 수레나 말과 배로 호송하게 하였다. 선생이 또 사장(謝狀)을 올려 숭품을 사양하였다. 그때에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에 여러 신하에게 비단과 향 등의 물건을 나누어 하사했는데, 선생도 역시 거기에 끼게 되었다. 아뢰기를, “이것은 조정에서 황은(皇恩)을 감사하게 받잡고 아름다운 경사를 모든 조정과 같이 하자는 것인데, 신은 찬성의 임명을 숙배하지 아니하였으니, 관이라 하여 물건을 내리시는 것을 감사하게 받기 어렵사옵고, 또 몸이 멀리 밖에 있어서 중국 사신이 오고 가는 데 한 가지도 힘쓰거나 수고한 것이 없었으니 감히 여러 신하와 같이 내리시는 물건을 받을 수가 없사옵니다.” 하여,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5월, 찬성에서 체차하고, 판중추부사로 부르다. 선생이 이미 힘써 새 벼슬을 사양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억지로 불러 일으킬 수 없음을 알고 경연에서 낮추어 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지성으로 부르면 의당 오지 않을 리 없다고 아뢰는 이가 있어서, 찬성에서 체차하고 판중추부사로 임명하여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나는 조그마한 몸뚱이로 민간에서 생장하다 들어와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즉위한 이래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어진 덕이 있는 선비를 모아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까 생각하였노라, 경은 본래 성품이 맑고 담백하고,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순수하고 명철하며, 한가한 중에 고요한 것을 지켜, 유자의 학문에 잠심하였으니, 대개 진심을 쌓고 힘들인 지가 오래인지라, 그 의리와 성명(性命)의 오묘함과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요점을 환하게 해석하고 깨달아서 월등하게 터득한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경연 석상에 두고 그 행동을 보면서 논하는 것을 들으면, 나의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고, 나의 마음과 지혜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수차 부른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거늘, 그래도 일어나 올 뜻이 없으니, 내가 매우 섭섭하노라. 저번날 경에게 우찬성의 관직을 제수한 것은 내가 경을 사모함이 깊은 때문이요, 경에게 바라는 것이 중하여서이니, 실로 모두가 말하는 공정함을 따른 것인데, 경은 이것을 도리어 혐의쩍게 여기어 물러나 사직하기를 더욱 힘쓰니, 내가 경을 표창하려는 것이 마침내 경을 막는 것이 되었을 뿐이었노라. 이미 체차하라고 명하였으니, 경이 무엇을 다시 혐의쩍게 여길 것이 있는가. 예전에 선왕께서 경을 총애하여 남달리 우대한 것이 가히 지극하다 할 것이다. 제갈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선제(先帝)의 특별한 대우를 추념하여 폐하에게 갚고자 한다.’ 하였으니, 경도 진실로 차마 선왕을 잊어버리고 나를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경은 이런 것을 생각하여 편안한 데 안주하여 더디고 더디게 와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6월, 명령에 따라 서(西)로 가면서, 길에서 잇달아 소를 올려 다시 숭품을 사양하고, 모든 관직과 품계를 개정해 주기를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선생은 관직에서 체차되었다는 명을 받고 곧 소를 올려 감사했는데, “미천한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찬성의 관직을 체차하라고 특별히 명하셨으니, 성상의 사랑하심이 여기까지 이르시니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리이까. 신은 마땅히 부축을 받아 나아가서라도 은명에 감사하겠사오나, 다만 일품(一品)의 외람된 품계는 도저히 받을 이유가 없사오니, 모두 다시 바로잡으셔서 넓은 혜택을 베푸소서.” 하였다. 떠나가다가 문경(聞慶)에 이르러 다시 상소를 올려 숭품을 사양하고, 충주에 이르러 또 표문을 올려 힘써 사양하였으나, 왕은 다 허락하지 아니 하시고는, 표문 가운데, “길에서 병이 났다.”라는 말이 있으므로 내의를 보내어 돌보도록 명령하시었다. 7월 병인, 서울에 들어가다.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고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이상(李貳相)이 왔다.” 하였다. 신미, 대궐에 들어가서 숙배를 드리고, 소명(召命) 받고 늦은 것으로 대죄하다.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이제 내가 경을 얻었으니 이는 실로 국가의 복이다.” 하였다. 또 숭품을 고쳐 바르게 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임신, 사정전에 들어가 대면하여 또 힘써 아뢰어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 8월, 홍문관 제학을 겸하게 하므로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옛 전례에 지경연(知經筵)은 단지 조강(朝講)에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정언(正言) 오건(吳健)이 아뢰기를, “이황이 올라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니, 전례대로만 만나지 마셔서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에도 불러서 강론하게 하시면 반드시 유익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선생은 법규를 벗어난 일은 편안치 않다고 사양했으나, 임금이 위로하여 타이르시고 허락하지 않으셨다. 계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지성균관사를 겸하다. ○ 소를 올려 여섯 가지 조목을 진술하다. “첫째, 계통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하소서. 주상께서는 왕실의 지친으로 들어오시어 대통을 이으셨습니다. 무릇 선왕의 뜻을 계승하시고 사업을 계속하시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시니, 그 인효의 도리에 있어 융숭함을 다하지 않을까 하는 근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소반의 물을 엎지르지 않는 것보다 지키기 어렵고, 착함은 바람 앞에 촛불보다 보전하기 어려운 것이오니, 훗날 귀와 눈을 막고 가리는 것이 잡다하게 널려 있고, 사랑과 증오의 요망스럽고 현혹됨이 함께 생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사업은 대수롭지 않게 되고, 심정은 거기에 습관이 되면 종묘를 모시고 대비를 받드는 마음이 자칫하면 어그러지시어 태만하게 되고, 마땅히 높일 바를 깎고 마땅히 깎을 바를 높이게 되는 데 점점 익어지는 일이 어떻게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증하겠습니까. 이것은 예로부터 방계에서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신 인군이 대부분 떳떳한 가르침에 죄를 얻게 된 까닭이며, 오늘날 마땅히 경계하셔야 할 바입니다.둘째,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하소서. 효도하고 사랑하는 도리는 천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윤리가 지극히 중하고 그 정이 매우 간절하니, 의당 극진하지 못한 자가 없어야 할 텐데, 혹은 효도에 결함이 있게 되고, 혹은 자애하는 마음 역시 잘못되는 데 이릅니다. 보통 사람들도 이를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사온데, 제왕의 집에 이런 걱정이 더욱 많음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친숙하게 좌우에 모신 자나 편리하고 마음에 들게 심부름하는 자는 모두 환시(宦寺)와 여자입니다. 이 무리의 성질은 음험하고 간사하며 교활하고 노회한 자가 많아서, 간사한 것을 끼고 사사로운 마음을 품으며, 분란을 기뻐하고 화란을 즐기어서, 패를 나누어 대립하며, 많고 적은 것을 다투고 찢고 하여 그 정상이 만 가지가 넘는 것입니다. 만일 혹시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이시고 그 말을 듣고 믿으신다면, 스스로는 불효에 빠지시고, 어버이는 자애롭지 않은 데로 빠지시게 됨이 뻔할 것입니다. 또 오늘날 전하께서 어버이를 섬기심은 이른바, 의리로써 은혜를 융성하게 하시고 변칙의 처지에서 상례에 처하시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상황은 실로 소인과 여자들이 틈을 타서 흔단(釁端)을 조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궐 안에는 능글맞은 간인과 늙고 남을 속이는 무리들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비단, ‘여윈 돼지가 아직 꾸물거리는 것’ 같은 정도가 아니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주역》에 있는 가인(家人)괘의 뜻을 거울삼으시고, 《소학》의 명륜(明倫)의 뜻을 규범으로 하시어, 자신을 다스리는 데 엄격하게 하시고 집을 바로잡는 데 삼가시며, 어버이를 섬기시는 데 돈독하게 하시고, 자식 된 직분을 다하소서. 그리하여 좌우에 가깝게 모신 자들로 하여금 모두 양궁(양가(養家)와 생가(生家))의 지극하신 정은 효도와 자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어, 자신들이 참소하고 이간 붙이는 것이 그 사이에서 행해질 수 없는 것을 환히 다 알게 하신다면, 자연히 음험하고 간사하며 이간 붙이고 분란을 일으킬 걱정이 없으며 효도함에 결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또 더 나아가 그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공의전(恭懿殿)에게도 다하신다면 도리의 융성함이 이어지고 인이 지극하고 의리가 극진해져서 3궁이 즐겁고 흡족하며 만 가지 복이 모두 다 올 것입니다.셋째, 성학을 독실히 하시어 정치의 근본으로 세우소서. 제왕의 학문과 마음을 가지는 요점은 대순(大舜)이 우(禹)에게 명한 데에 근원하였습니다. 그 말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오직 정하고 한결같이 하여 중(中)을 잡으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의 이 말은 다만 위태롭고 미묘한 것만을 말하였고, 그 위태롭고 미묘한 까닭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다만 정일(精一)하여야 한다는 것만을 가르쳤을 뿐이고 정일하게 하는 방법은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뒷사람이 비록 이에 의거하여 진실하게 알아서 도를 실천하려고 하여도 역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 여러 성인이 서로 계승하셨는데 공자에 이르러 그 법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 《중용》의 명선성신(明善誠身)이 그것입니다. 신이 먼저 ‘치지’ 한 가지부터 아뢰겠사옵니다. 나의 성정(性情)이나 형용, 안색이라든지 날로 쓰이는 인륜에 가까운 것으로부터 하늘과 땅, 만 가지 사물, 고금(古今) 사변(事變)의 많고 적은 것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실질적인 이치와 지극히 당연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없사오니, 즉 이른바 천연의 스스로 존재하는 중(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배우는 것을 넓히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을 사고하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을 변증하는 것을 명석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니, 이 네 가지는 치지하는 조목이오며, 네 가지 중에도 ‘신중히 사고한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 시초를 시작하시고 그 실마리를 일으키셨으니, 더욱 쌓고 더하시어 더욱더 공부를 쌓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오래되고 공력이 깊어져서 하루아침에 시원스레 진리에 관통하여지면, 비로소 체(體)와 용(用)의 근원이 하나이고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것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 진실로 그런 줄을 알게 되어, 위태롭고 미미한 데로 헤매지 아니하며 정일한 데로 현혹되지 아니하고, 중(中)을 잡을 수 있사오니, 이것을 이른바 진실로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은 다시 역행(力行)의 일에 대해 아뢰겠습니다. 성의(誠意)는 반드시 그 낌새부터 살펴보아서 털끝만큼의 부실한 것도 없는 것이고, 정심(正心)은 반드시 동정을 살펴서 한 가지 일의 부정도 없는 것이며, 수신(修身)은 한 가지의 편벽된 데 빠지지 않는 것이고, 제가(齊家)는 한편으로 치우치치 않는 것이며,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홀로 있을 때에 근신하며 끊임없이 뜻을 강하게 갖는 것이오니, 이 몇 가지는 역행의 조목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때와 장소에 따라 생각마다 깨우치시고 일마다 조심하셔서 여러 가지 허물과 욕심을 영대(靈臺 마음)에서 깨끗이 씻어 버리시면, 오상(五常)과 모든 행동이 지극한 선으로 단련되어 먹고 쉬고 말을 주고받는 데도 의리에 젖어 함양될 것입니다. 울분을 가라앉히고 욕망을 막으며, 허물을 고쳐서 착하게 하고 마음과 뜻이 참되고 오로지하는 데 힘쓰고, 광대하고 고명하되 예법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천지의 조화에 참여하고 천하의 일을 경륜(經綸)하되 옥루(屋漏)에 근원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진실을 쌓은 것이 많고 세월이 오래 지나면 자연히 의가 정밀해지고 인이 숙달하게 되어,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만두지 못하고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현의 중화(中和)된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넷째, 도덕과 학술(道術)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하소서. 요순과 삼대가 융성할 때에는 도술이 크게 밝혀져서 다른 갈림길에 미혹된 것이 없었으므로 인심이 바르게 되어 정치의 교화가 쉬웠습니다. 주나라가 쇠퇴한 이후로는 도술이 밝혀지지 않아서 간사하고 음특한 일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인심이 바르지 아니하여 다스리려고 해도 다스려지지 아니하고, 교화하려고 해도 교화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엇을 도술이라고 합니까? 이는 천명에서 나와 떳떳한 윤리를 행하는 것이니, 천하 고금에 모두 다 같이 말미암는 길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반드시 도술을 밝혀 인심을 바로잡는 것이 새 정치에 공헌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밝히는 일에도 역시 본말과 선후와 완급이 있사오니 인군이 몸소 실천하여 깨달은 것을 근본으로 한 다음에 백성이 일용하는 떳떳한 윤리에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본(本)이요, 옛 법제를 따르고 문물을 의지하고 모방하여 비교하는 것이 말(末)이오니, 본은 먼저 할 것이기 때문에 급하고, 말(末)은 뒤에 할 것이기 때문에 천천히 하는 것입니다. 신은 엎드려 보건대, 우리 동방에서 이단으로 해가 되는 것은 불교가 가장 심하나, 노장(老莊)의 허탄(虛誕)한 것을 탐닉하고 숭상하여 성현을 업신여기고 예의를 멸시하는 기풍도 간혹 있사오며, 관상(管商)은 다행히 전하여지는 것이 없사오나, 공을 계획하고 이(利)를 도모하는 폐습이 오히려 고질이 되었습니다. 향원(鄕愿)이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습성은 말류(末流)의 세태에 아첨하는 데서 시작하였고, 속된 선비들이 방법을 찾아 헤매게 된 것은 과거 보는 자들이 이름과 이익을 좇는 데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더구나 명리(名利)를 좇는 벼슬길에서 기회를 타서 막고 방해하고 배신하고 속여 넘기는 무리가 또한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본다면, 지금 인심은 바르지 못한 것이 매우 심하옵니다. 만일 불행히 주상께서 도에 뜻을 두시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처음과 같지 아니하다면, 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반드시 우하고 함께 덤비어 온갖 방법으로 뚫고 들어올 것이고, 한번 그 안에 들어가면 곧 저들에게 동화될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뜻을 잡으시기를 금석같이 굳건히 하셔서 시종일관 변함이 없으시고, 도를 밝히시기를 해나 달같이 하셔서 요사스럽고 음흉한 기운을 깨끗이 숙청하여 침범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대로 오래되면, 흥기할 것을 기다리는 선비와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백성들이 모두 다 큰 범주에 들어오게 되고, 여러 간사한 것들과 잡되고 음특한 것들도 역시 신성한 감화를 받아 변화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옵니다.다섯째는 심복(心腹)에게 맡기셔서 이목(耳目)을 통하게 하소서. 인군은 한 나라의 원수(元首)요, 대신은 심복이요, 대간은 이목입니다. 3자가 서로 맞아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인군 가운데에는 대신을 믿지 아니하고 대간의 말을 듣지 아니한 이가 있었사오니, 비유하면, 사람이 스스로 그 복심을 끊으며 그 이목을 싸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실로 머리만으로 사람이 되는 이치는 없습니다. 혹 대신을 신임하는 데에도 그 도리로써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신을 구할 때에 널리 주선하여 보필할 수 있는 현인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첨하고 뜻에 맞추어 주는 자를 구하여 그 사사로운 욕심을 수행할 것을 도모하시면, 이렇게 해서 얻은 인물은 간사하여 정치를 문란하게 할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흉악한 역적으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려는 자일 것입니다. 인군은 이런 사람으로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복심으로 삼고 신하는 이런 인군을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는 원수로 삼아, 상하가 서로 합하여 굳게 결속하여 떼어 놓을 수 없게 됩니다. 이로 인해 충성되고 어진 신하는 다 쫓겨가서 나라가 텅 비게 되고, 이목을 맡은 자는 모두 정권을 쥔 자의 사인(私人)이 되어 버리는 것이오니, 그렇게 되면 소위 이목이라는 것은 원수의 이목이 아니라, 정권을 쥔 자의 이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목을 빙자하여 세력을 떨치고, 기염을 통하여 권신(權臣)의 악을 편들어 도와주고 심복임을 이용하여 악을 쌓아 올리며 화란을 거듭하여 못난 인군의 사특함을 길러 주면서, 각자의 욕망하는 것을 얻었다고 만족합니다. 그러나 원수(元首)의 짐독(鴆毒)이 심복에서 생기고, 심복의 사갈(蛇蝎)은 이목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고요(臯陶)의 노래에 ‘원수가 번잡하구나, 수족이 게으르구나. 만 가지 일이 타락되었구나.’ 하였으니 만 가지 일이 타락한 책임이 원수에게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송나라 신하 왕개지(王介之)가 말하기를, ‘재상으로서 궁중의 의향에 따르고, 대간으로서 재상의 눈치만 받들어 행한다면, 조정의 기강은 땅에 떨어진다.’ 하였으니, 올바르지 않은 일의 폐해를 말한 것입니다. 여공필(呂公弼)이 인종(仁宗)에게 간하여 아뢰기를, ‘수족과 이목이 반드시 서로 쓰이게 된 연후라야 몸이 편안하고 원수가 높아집니다.’ 하였사옵니다. 그러므로 올바르지 않은 길을 따르지 아니하면서 서로 쓰이게 되는 것이 지선(至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여섯째,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하소서. 전하께서 옥새를 쥐시고 극진히 높은 자리에 즉위하신 지가 이제 한 돌이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천문에 여러 번 변괴가 나타나서, 화란이 나고 화기(和氣)가 응하지 아니하여 보리와 밀이 온통 없어지고, 수재가 옛날에 비할 수 없이 참혹하며, 바람ㆍ우박ㆍ메뚜기ㆍ병충 등의 여러 괴이한 것이 모두 보이니, 이것은 천심이 전하를 사랑하셔서 전하를 경계하심이 지극한 것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전하께서는 어버이 섬기시는 마음을 미루셔서 하늘 섬기시는 도리를 다하시고, 일마다 닦고 살피지 아니함이 없으며, 때마다 두려워하지 않으심이 없게 하소서. 성상의 몸가짐에 비록 과실이 없다 하더라도, 마음속 은미한 곳에 병통이 산같이 쌓여 있사오니, 깨끗하게 없애지 않을 수 없사오며, 궁중에는 비록 본래부터 가법(家法)이 있다 하더라는 척속(戚屬)이나 환관 궁녀들의 무리가 진상하고 알랑거리면서 안개처럼 모여드오니, 막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간언을 들으시는 것은 둥근 고리를 돌리는 것같이 쉽게 따라 주시는 미덕이 있으시지만 때로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굳게 거절하시는 것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옵니다. 착한 것을 즐기심은 비록 색을 좋아하시는 것같이 성실하시나, 혹 가식적으로 억지로 구하는 것은 마땅히 살펴야 하실 것이옵니다. 작록이나 상을 주시는 것을 함부로 하여 공이 없는 자가 요행으로 얻게 하고 공이 있는 자가 흩어지게 하시지 마시고 사면하고 풀어 주는 것을 자주하시어 악한 사람이 벌을 면하게 되거나 착한 사람이 해를 받게 하지 마옵소서. 절의(節義)를 숭상하시고 염치를 장려하시어 명교를 방위하는 것을 튼튼하게 하시는 것을 소홀하게 생각지 마시고, 검약을 숭상하시고 사치를 금하셔서 공사(公私)의 재력을 넉넉하게 하시는 것을 느슨히 해서는 안 됩니다. 조종의 옛 법이나 조목 중에 오래되어서 폐단이 생긴 것은 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사오나, 혹 그 좋은 법이나 아름다운 뜻까지도 아울러 함께 일체를 뜯어고친다면 반드시 큰 환란이 이를 것이옵니다. 사대부들 중에서 바른 사람을 질투하고 다른 사람을 꺼리어 틈을 엿보아 사단을 만들어 내는 자는 진실로 미리 진정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나, 혹 스스로 어진 친구나 착한 동류끼리 반목하여, 서로 배척해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손상을 입게 될 것이옵니다. 오로지 옛것만 지키고 상도(常道)만 따르는 신하들을 믿는다면, 지극한 태평 정치를 분발해 일으키는 데 방해가 될 것이며, 편벽되이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맡긴다면 분란을 도발해 내게 될 것이옵니다. 서울과 시골의 아전이나 노복들은 공납품을 이리 떼처럼 뜯어먹으면서도, 오히려 부족하여 관청 창고를 도둑질하여 비게 하고, 진포(鎭浦)의 장수들은 군졸을 호랑이처럼 삼키면서도, 오히려 만족하지 아니하여 이웃과 일가에까지 독을 부립니다. 흉년의 기근이 극심하건만 구휼할 방책이 없으니 도적이 떼로 일어날까 두렵사오며, 변방 방비가 모두 허술한데 남북으로 틈이 벌어지니 고약한 오랑캐들이 줄지어 침입할까 염려되옵니다. 대개 이런 유는 신이 낱낱이 들 수 없사오나, 오직 전하께서, 하늘이 자신을 인애하는 것이 이처럼 공연히 그러한 것이 아니심을 깊이 아셔서,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스스로 반성하시기를 한결같이 경(敬)으로 하여 중지함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정치에 실행하기를 한결같이 성(誠)으로 하여서 가식이 없게 하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은 형통하던 끝에 비색(否塞)함이 찾아들고 치세 끝에 화란이 생겨나듯 수백 년 태평하던 끝에 국사에 대한 우려가 장차 날로 일어나서 어느 때의 폐단보다도 곱이나 되어 하늘이 전하를 인애(仁愛)한 것이 도리어 전하를 자포자기하게 할까 두려워하옵니다.” 하였다. 어필로 답하여 이르기를, “내가 소의 글을 보니, 경의 도덕은 옛사람에게 물어보아도 역시 그 짝이 될 만한 이가 드물 것이다. 대개 이 여섯 가지 조목은 참으로 천고의 격언이요, 지금에 당한 급한 일이라,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어찌 감히 간직하고 지키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병으로 휴가 중에 있기 때문에 본직과 겸직한 대제학을 사면하여 줄 것과 숭정대부로 가자(加資)한 것을 고쳐줄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므로, 잇달아 사장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다. 신축, 대궐에 나아가 또 대제학을 극력 사양하여 세 번 아뢰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이튿날 또 굳이 사양하니 허락하다. 전에 대제학 박순(朴淳)이 아뢰기를 “대제학이나 제학은 비록 같은 홍문관의 벼슬이지만, 제학의 소임은 대제학만큼 중대하지 아니하옵니다. 이제 신은 대제학이 되고, 이황은 제학이 되었사오니, 나이 많은 큰 선비가 도리어 낮은 직위에 있고, 후진이고 처음 배우는 선비가 중요한 지위에 있게 된 것이옵니다. 조정에서 사람 쓰는 데 전도된 것이 이같이 심할 수 없사오니, 모두 신의 직임을 체차하여 그에게 주기를 청하옵니다.” 하므로,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은 것이라 하였다. 이에 박순과 서로 관직을 바꾸기를 명하여, 선생이 대제학이 되고 박순이 제학이 되자, 선생은 늙고 병들어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 연일 극력 사양해서 허락을 받았다. 계묘, 도로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춘추관사에 제수되다. 대제학을 체차하였으므로 다시 비답(批答)을 내렸다. 9월 1일, 헌관(獻官)으로 강릉(康陵 명종대왕릉)에 제사 지내다. 기유, 석강(夕講)에서 일을 아뢰다. 그때에 병적(兵籍)을 정리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아뢰기를, “이제 겨우 인산(因山)을 치르고 또 명나라 사신을 겪었으며, 풍년도 들지 못하였으니, 병적을 정리할 때가 아니옵니다.” 하고는 어탑(御榻) 앞에서 차자를 올려서 펴 읽었다. 그 개략을 들면, “병적을 정리하여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마땅히 급하게 할 일입니다. 단지 지난해 이래로 국상과 인산 등의 큰 역사가 잇달아 겹쳤고, 또 여덟 번이나 명나라 사신이 잇달아 와서 민생이 괴롭고 피로한 데다가, 금년에는 또 바람과 가뭄의 재앙이 있고, 메뚜기가 하늘을 가리어 사방에서 재앙을 걱정하고 있으며 흉년을 구휼하여야겠다는 보고가 연달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에서는 법을 마련하고 명령을 내려 백성을 구호할 방책은 한 번도 세우지 아니하면서, 아전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소요를 피우고 따져서 협박하며, 몰려가서 침해하고 독촉함이 성화같이 급하오니, 나라의 근본이 어찌 동요하지 아니하겠사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병적을 색출하는 것을 일단 멈추었다가 풍년이 들어 백성이 숨을 돌린 뒤에 하는 것이 의리에도 합당하고 좋을까 하옵니다.” 하였다.또 아뢰기를, “옛날의 성스러운 인군들은 궁중의 일이라면 외정(外廷)이 참예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환관이나 궁녀들도 모두 다 정승에게 영도되었습니다. 제갈량(諸葛亮)이 후주(後主)에게 아뢰기를, ‘궁중이나 부중(府中)이 모두 일체이니, 잘하고 못하는 것을 높이거나 벌주는 데 마땅히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간사한 짓을 하였거나 죄가를 범하였거나, 혹은 충성되고 선한 일을 한 자가 있으면 마땅히 유사에게 내려서 그 형과 상을 논하게 하여, 평등하고 명철한 정치임을 밝혀야 하고 편벽되고 사사롭게 하여 안과 바깥에 법을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한 것이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만약에 ‘내간의 일을 외정에서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매우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이어서 주자가 효종(孝宗 송나라의 황제)에게 올린 봉사(封事) 중의 한 대목인, “예로부터 성스러운 인군은 조심조심하고 차근차근하여 남겨 놓은 미풍과 나머지 공적이 모두가 뒷세상의 법규가 된다.”는 말을 별도로 기록하여 올렸다. 그때에 늙은 궁녀 석 상궁(石尙宮)이란 자가 있어서, 선조(先祖) 때부터 바깥과 교통하여 간섭하고 참여하는 죄상이 있었기 때문에 대간에서 논핵한 일이 있음을 알고 선생이 아뢴 것이었다. 임금은 다 받아들여서 병적 정리를 정지하게 하였다. 임자, 석강(夕講)에 입시하여 정자(程子)의 사잠(四箴)을 강의해 드리다. 강의가 끝나고 아뢰기를, “사잠은 안자가 인(仁)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장에 있사옵니다. 공자 문하의 많은 제자에게 인을 훈시한 말이 매우 많으나, 오직 안자만이 이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주자는 성문(聖門)의 전수해 주는 심법(心法)의 간절하고 중요한 말이라 여겼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차자를 올려 펴 읽으니 임금이, “이것은 진실로 격언이니, 마땅히 좌우에 두고 날마다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을묘, 조강(朝講)에 입시하다. 《논어집주(論語集註)》를 강의하다가 “《주역》을 배우면 길흉소장(吉凶消長)의 이치와 진퇴존망(進退存亡)에 밝게 된다.”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서, 선생이 그 뜻을 추리하고 부연하여 아뢰기를, “64괘에《주역》의 이치가 모두 갖추어졌으나, 우선 건괘(乾卦)로 말하오면, 초효(初爻)는 ‘못에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않는다.[潛龍勿用]’ 하고 구이(九二)는 ‘보이는 용이 밭에 있다.[見龍在田]’ 하였으며, 구삼(九三)은 하괘(下卦)의 위에 있으니 용으로써 대상을 삼지 아니하고 다만 경계할 것을 말하였으며, 구사(九四)는 ‘혹은 뛰어 오르거나 못에 있다.[或躍在淵]’ 하였고, 구오(九五)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 하였으며, 상구(上九)는 지위가 이미 극진하므로, ‘귀하면서도 지위가 없고 높으면서도 백성이 없기 때문에 항용(亢龍)은 후회가 있다는 형상이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만약 숭고하다고 자처하여 현인을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자기만이 성스러운 체하거나, 자기만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며 아랫사람에게 굽히는 뜻이 없으면, 이 형상에 응하여 맞아서 궁하게 되는 재앙이 있을 것이오니, 반드시 겸허한 태도로 묻기를 좋아하시고, 덕이 같은 이와 서로 도와야만 항용(亢龍)의 재난을 면하는 것이옵니다.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위태롭다 하는 자는 그 지위를 편안하게 하는 자이요, 망할 것이라 하는 자는 그 있는 것을 보존하는 자이며, 어지럽다고 여기는 자는 그 다스릴 수 있는 자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는 이는 포상(苞桑)에 매여 있다.’ 하였으니, 임금으로서 이것을 아신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제 이 강의해 드린 것은 성현의 격언이옵니다. 그러나 한갓 음과 뜻과 구절을 떼어 읽을 줄만 알고, 스스로 깨닫는 실상이 없으면 무익한 것이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어둡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마음속에서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어두워서 얻는 것이 없고, 그 일에 익지 않았기 때문에 위태로워서 편안하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모든 경서에 다 통하여도 마음속에 있는 실상이 없으면 어두워서 얻는 것이 없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익혀서 능숙하지 못하면 위태롭고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연평(延平 이동(李侗))이 주자에게 말하기를, ‘이 도리라는 것은 온전히 날마다 쓰는 것의 숙달함에 있는 것이다. 날마다 쓰면 동하고 정지하며, 말하고 다물고 하는 사이에 마음을 보존하고 반성하고 살펴서 그 일에 익숙해진 연후에 아는 것이 실제 터득한 것이 되나니, 이것이 진실한 학문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경신, 주강(晝講)에 입시하다. 선생은 전날 아뢴 항용(亢龍)은 후회가 있다는 뜻에 아직도 미진한 점이 있다 하여 또 특별히 차기(箚記)를 지어 강의 끝에 나아가 읽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계하라는 말은 내가 마땅히 날마다 경계를 삼겠노라.” 하였다. 신사정(申士楨)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공주의 아들로서 그 아비에게 불효하여 마침 대간이 논핵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근일 대간의 논하는 바가 집안일을 간섭한다거나 사적인 일에 관계된다 해서 들어주지 아니하시니, 한 가지 일이 이 같고 두 가지 일이 이 같아서 쌓이고 쌓여 그치지 아니하면, 사심(私心)이 공심(公心)을 이기게 되는 데 이를 것이니 나라를 어지럽히고 망하게 하는 조짐이 생기게 될 것이옵니다. 삼강오륜이란 우주를 붙들어 유지하는 동량(棟樑)이요. 백성을 편안하게 만드는 주석(柱石)이옵니다. 이 때문에 대간이 다투고 논핵하는데 듣지 아니하면 주석과 동량이 무너지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의 건강이 형편없는 처지이므로 문한의 임무와 사국(史局)의 중책을 맡아 감당하기 어려우니 오직 경연 석상에나 출입하기를 바라나, 그 또한 겨울 추위가 심하기 때문에 역시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랏일을 하지 않고 나라의 녹만 그대로 먹는 것은, 거리의 장사치들이 이익만을 따지고 염치를 돌보는 데 궁색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신을 사대부라 해서 부르셨사온데, 신이 시정배로 자처한다면 과연 의리에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하고, 이어서 물러갈 것을 간절히 빌었다.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상하가 모두 경을 의지하고 있는데 이 무슨 말인가?” 하였다. 이때에 성상의 뜻이 선생을 매우 간절히 아끼는 데로 기울어지고, 선생도 역시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학문을 권하고 강의하는 것으로부터 그 외에 정치의 득실(得實)에 대해서도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열거하여 논평하였다. 비록 궁중 안의 일이나 척속(戚屬)에 관계되는 일이라도 역시 임금을 위하여 아뢰었고, 임금도 역시 사심 없이 좋게 받아들여서 심지어는 말마다 듣고 계획마다 좇겠다고 하시는 전교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늙고 병들었으므로 직무를 다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항상 물러갈 것을 청하려는 뜻이 있었다. 사대부들은 선생의 거취를 보고 세도(世道)가 잘되고 못되는 것을 점쳐서, 오직 선생이 서울을 너무 빨리 떠나서 그 학문을 다 실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날 대간에서 여러 가지 논박한 것이 모두 윤허되었으니, 선생이 나아가 아뢴 힘에 의한 것이다. 실록찬집도청 당상(實錄撰集都廳堂上)에 임명되다. 총재관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이황은 성문(聖門)의 노성한 선비이오니, 의논하여 붓으로 칭찬하거나 깎아내리는 데 이런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한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다. 병인, 대궐에 들어가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전교하기를, “경이 만약 직무에서 해임된다면 누구와 같이 나랏일을 하라는 것인가. 겨울철이라 병나는 것을 면할 수 없다면, 비록 출사(出仕)하는 것을 전폐한다 하여도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사임하지 말기 바란다.” 하고는 또 다음 날의 석강에 입시할 것을 명하였다. 정묘, 석강에 입시하다. 임금이 묻기를, “전번에 조정의 의논이 조광조에게 관직을 추증하자고 하였는데, 그 사람의 학문이나 행한 일은 어떠한 것인가?” 하였으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조광조는 타고난 천품이 우수하였으며, 일찍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고 집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였사옵니다. 중종께서 태평한 정치를 바라시는 뜻이 목마른 데 물 구하시듯 하시어, 장차 삼대[夏殷周]의 정치를 일으키려 하시었으므로, 조광조도 역시, ‘어느 세상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회를 만났다.’ 하여 김정(金淨)ㆍ김식(金湜)ㆍ기준(奇遵)ㆍ한충(韓忠) 등과 함께 서로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크게 경장(更張)한 것이 있었고, 법조(法條)를 설립하여 《소학》으로써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정하고, 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행하려 하니, 온 백성들이 바람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버리지 아니하였다면 태평 정치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 연소한 무리들이 태평 정치를 이루는 데 급급하여 너무 서두른 폐단이 없지 않았던 차에 배척받아서 실직한 옛 신하들 중에 원한을 품고 있던 자들이 온갖 계교로써 잘못되기를 노리다가 망극한 참소로 얽어매니, 당대의 선비들 중 귀양 보내거나 혹은 죽게 하여 남은 화가 지금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림 중에 학행(學行)에 뜻을 두는 자가 있으면 그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곧 기묘사화 때의 무리들과 같다고 지목하오니, 누가 화를 겁내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선비의 기풍이 크게 흐려지게 되어 이름 난 선비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번에 홍문관에서 남곤(南袞)의 관작을 추삭(追削)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그것은 또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기묘사화는 바로 남곤과 심정(沈貞)이 간사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오며, 끝내는 중종의 허물이 된 것이오니, 죄가 하늘에까지 닿았다 할 것이옵니다. 주상의 의향으로는 전조(前朝)의 대신을 추삭한다는 것이 미안한 일이라 여기시는 것 같사오므로 매우 충후(忠厚)하오나, 중론으로 아뢴 바는 착한 것을 표창하고 악한 것을 벌주라는 정론이오니, 조광조를 포상하여 관작을 추증하시고 남곤을 추삭하오면,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여질 것이옵니다.” 하니, 왕이 명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게 하고, 홍문관ㆍ양사와 정원에 명하여 각각 남곤의 죄상을 진술하게 하여, 마침내 남곤의 관작을 추삭하였다. 10월 1일, 모의전(慕義殿) 명종의 혼전(魂殿) 의 제사에 배석하다. 기묘, 주강(晝講)에 입시하다. 무자, 석강(夕講)에 입시하다. 아뢰기를, “근래에 일식이 있었고, 또 겨울에 천둥의 변괴가 있었사옵니다. 옛날 임금들은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할 줄 아시고 몸을 굽혀 덕을 닦았고, 다만 형식만으로써 높으신 하늘을 감동시키려고 하지는 않으셨사옵니다. 《시경》에서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말하기를, ‘공경하고 공경하라. 하늘은 오직 분명한 것이니라. 높고 높은 위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 땅 위에 강림하시어 날로 감시하심이 여기에 있느니라.’ 하였으니, 대개 하늘은 곧 이치옵니다. 하늘의 이치는 유행하여 어느 때나 그렇지 않을 때가 없기 때문에, 사람의 욕심이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끼면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중용》에도 역시 말하기를, ‘신(神)의 생각하는 것은 헤아릴 수도 없겠거늘, 하물며 알아맞힐 수가 있겠는가.’ 하였고, 맹자도 말하기를, ‘그 마음을 잡고 그 성정을 기르는 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하였으니, 하늘을 섬기는 것은 단지 마음과 성정을 바로잡아서 기르는 데 있을 뿐이옵니다. 송나라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가 지은 〈서명〉에는 이 이치를 말한 것이 매우 분명하옵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로써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밝혔으니, 그 극진한 곳까지 미루어 가면, 이것은 바로 성인의 경지의 일입니다. 그러나 아래서부터 배워 가는 공부도 겸하여 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안 연후에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밖에서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진실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어서《소학》을 강의하여 마친 뒤에 먼저 〈서명(西銘)〉을 강의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동중서(董仲舒)가 한 말이 있는데,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과 백관ㆍ만민을 바르게 하고, 사방의 멀고 가까운 데 이르기까지 모두가 바른 것으로 하나가 되지 않은 것이 없으면, 간사한 기운이 그 중간에 끼이지 못할 것이오니, 그러면 음양이 조화되고 풍우(風雨)가 때를 맞추어서 모든 복된 물건이 상서롭게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사옵니다. 위로 임금의 마음으로부터 조정ㆍ백관ㆍ만민에 이르기까지 바르지 아니함이 없으면 무슨 간사한 기운이 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사오며, 그중에도 많은 공부의 조목이 있는 것이옵니다. 만약 단지 한두 가지 하찮은 일들을 고침으로써 재난을 없게 하고자 한다면 되지 않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경자, 석강(夕講)에 입시하다. 〈동생행(董生行 당나라의 한유(韓愈)가 지은 시)〉을 강의하고 아뢰기를, “화평한 기운이 상서로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감동하는 것이 있으면 왕왕 상서로운 일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귀중한 것은 덕에 있지 상서로움에 있지 아니하오니, 진실로 그 덕이 없다면 또 무엇이 상서로움을 귀하게 여기겠사옵니까.” 하였다. 11월 무신, 석강에 입시하다. 이날《소학》을 강의하고 끝난 뒤에 선생이 아뢰기를, “《소학》과《대학》은 성현의 학문을 하는 처음과 끝이 되는 것이오니, 마땅히 옛것을 복습하셔서 새것을 아셔야 할 것이옵니다. 이제 비록 모두 다 강의하였으나 역시 항상 유념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옛말에, ‘배우는 공부는 전진하지 아니함을 염려하지 아니하고, 퇴보하지 아니함을 염려한다.’라고 하였사옵니다. 퇴보라는 말은 물러서서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전날의 배운 것을 항상 생각하여 잊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옛것을 복습하는 공부가 깊고 지극하면, 새것을 아는 공부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계축, 홍문관에 들어가서 〈서명(西銘)〉을 교정하다. 그때에 〈서명〉을 강의하려 하는데 대신이 선생에게 나아가 읽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쇠하고 병들어 기력이 없고 말소리도 작아서 성상께서 들으실 수 있게 뜻을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대신이 다시 관원과 서로 만나 의논하여 교정한 연후에 진강할 것을 청하여 명령에 따랐고, 또 〈서명고증〉을 만들어서 참고에 대비하였다. 경신, 병으로 사면하기를 청하였더니, 왕명으로 휴가를 내리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며 음식물을 하사하다. 기사, 또 내의를 보내어 문병하다. 12월, 두 번 세 번 사면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다 허락되지 않다. 경인, 〈성학십도〉와 차자를 올리다. 첫째는 태극도요, 둘째는 서명도요, 셋째는 소학도요, 넷째는 대학도요, 다섯째는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요, 여섯째는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요, 일곱째는 인설도(仁說圖)요, 여덟째는 심학도(心學圖)요, 아홉째는 경재잠도(敬齋箴圖)요, 열째는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배우는 데 매우 절실한 것이다.” 하고는, 병풍을 만들어 들이게 하였다. 무술, 나와서 감사를 드리고 또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3년 (기사) 69세 1월 경술,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숙배하지 않고 병으로 세 번 사양하니, 면하는 것을 허락하고 다시 판중추부사에 임명하다. 갑자, 대궐로 들어가 성은에 감사하고, 곧 향리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이날 문소전(文昭殿)의 의논이 시작되다. 처음에 세종이 한나라의 원묘제(原廟制)를 모방하여 문소전을 세우고, 사친(四親 고조ㆍ증조ㆍ조부ㆍ부친의 4대)과 태조의 신주를 뒷 방에 모시었는데, 같은 집으로 칸이 달랐고 서쪽을 상(上)으로 삼았었다. 사시(四時)에 일이 있으면 앞 전각에서 같이 제사 지냈는데, 태조가 가운데 있어서 남으로 향하고, 고조ㆍ증조ㆍ조ㆍ부의 네 사당은 동서로 벌려 있어서, 대략 소목의 제도와 같았다. 성종이 덕종(德宗)을 추숭하고, 예종(睿宗)을 이미 문소전에 들여 모셨기 때문에, 덕종을 별전에 모시고 그 전각의 이름을 연은전(延恩殿)이라 하였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때 의논이 인종을 모시면 세조가 마땅히 조천(祧遷)할 것이나, 명종에게는 친(親)이 다하지 않았고, 조천하지 아니하면 다섯 칸이 되기 때문에 세종의 뜻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종을 연은전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에 이기(李芑)ㆍ윤원형 등이 국정을 맡아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통분히 여겼다. 여기에 이르자 대신 이준경 등이 건의하기를, “인조가 승하한 뒤에, 당시 신하들이 예절과 의리를 돌보지 아니하고 경솔한 뜻으로 마음대로 하여서 문소전에 모시지 아니하고 별묘에 받들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평판이 분하게 여기고 답답해하고 있으니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천지간의 화기를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신하의 의논이 명종(明宗)을 사당에 모실 때 응당 인조도 문소전으로 들여 모셔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의리에 매우 분명합니다. 다만 인조와 명종은 마땅히 같은 대(代)가 되어야 하므로 자릿수를 좀 더 늘려야 하오니, 문소전에 칸살을 조금 넓혀야 모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신들이 예관과 같이 본전의 구조를 살펴보고 미리 수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허락되었다. ○ 그때 하동군부인(선조의 생가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우제(虞祭)를 지낸 때였다. 본가(선조의 생가)에 사당을 세우려 하여 2품 이상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선생은 의견을 아뢰기를, “추숭하는 일은 마땅히 국상 3년이 지난 뒤에 송나라 복(濮)ㆍ수(秀) 두 왕의 고사에 모두 다 의거할 것이오나, 오직 가묘는 지금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2월 1일, 모의전(慕義殿)에 제사 지내는 데 배석하다. ○ 기묘, 춘추관 사관으로 들어가서, 여러 재상들과 함께 《세종실록》을 꺼내, 문소전의 의궤(儀軌)를 상고하여, 정원에 나아가 묘도(廟圖)와 차자를 올리다. 차자에 아뢰기를,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문소전은 즉 한나라의 원묘(原廟)를 모방하여 그 제도를 삼은 것입니다. 뒤 전각이 다섯 칸으로 고조ㆍ증조ㆍ조ㆍ고와 태조 다섯 분의 신주를 모시었고, 앞 전각은 세 칸인데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곳에서 같이 합향(合享)합니다. 태조께서는 북쪽에 위치하여 남으로 향하고 소(昭) 2위는 동쪽에 위치하여 서쪽을 향하고, 목(穆) 2위는 서쪽에 위치하여 동으로 향하였으니, 이것이 당초에 정해진 제도입니다. 그러나 그동안에 형제가 계승하여 대통을 받드는 일이 있으면 ‘같은 소목은 한 자리에 같이 모신다.’라는 것이 《오례의》 〈종묘도설(宗廟圖說)〉에 보입니다. 그러나 한 감실(嵌室 신주 모시는 조그만 벽장 같은 곳)의 한 자리에 같이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마땅히 하순(賀循 옛날 서진의 예학가)의 ‘7실(室)에 하나를 더한다.’라는 이론과 ‘위(位)는 같이 해도 좌(坐)는 달리한다.’라는 송사(宋史)에 의거할 것이옵니다. 인종은 명종과 같은 소목이기 때문에 인종이 종묘에 들어가실 때에 세조는 명종에게도 역시 고조가 되시어 옮기지 못하므로, 실(室)의 수와 위(位)의 수는 하나를 더해서 여섯이 될 것이옵니다. 이와 같다면 본침(本寢)과 본전(本殿) 안에서 변례(變禮)의 논의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찌 사곡하게 다른 이론을 내어서 다른 사당에 들어가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과 신이 모두 울분을 억제한 지 20여 년이 되었사옵니다. 더구나 당시 명종의 교지에 ‘인종은 뒷날 마땅히 문소전으로 들여 모셔야 한다.’라는 말씀이 《승정원일기》에 보이니, 명종이 남기신 뜻만은 본래 그와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사옵니다. 다행히 이번에 성상께서 계승하여 ‘같이 모신다.’는 청을 이미 허락하셨으니, 예법의 잘못된 것을 바루게 되었고, 신인(神人)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그같이 모실 때에는 예법이나 절목의 상세한 것을 반드시 미리 충분하게 강구하여 바르게 해야 할 것이옵니다. 또 후침(後寢)의 실수(室數)로 말씀드리오면, 세조께서 이제 친진(親盡)하였으니 마땅히 옮겨 모시고, 그 실(室)을 비게 하여 예종(睿宗)을 올려 거기에 모셔야 됩니다. 그 아래로는 차례로 올라가, 인종은 제5실에 들여 모셔야 될 것이나, 또 명종 한 분이 계시니 여전히 6위(位)가 되어 실(室)이 없어서 들여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동쪽에다 종묘의 칸을 늘리는 고사에 의거하여 새로 한 칸을 세워서 명종의 신위를 받들어 모시면 바로 옛사람의 말대로 ‘실(室)의 수 때문에 신주의 수를 제한하지 아니한다.’는 의리에도 합당할 것이옵니다. 이것이 즉 후침육간도(後寢六間圖)의 설명이옵니다. 앞 전각 세 칸은 오로지 합향하는 여러 위를 위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그 구조도 남북은 짧고 좁으며, 동서는 길고 넓어서, 종전에 자리를 배설(排設)할 때에 북으로부터 남으로 꼭 다섯 자리를 배설시키면 더 이상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제 한 자리를 더한다는 것은 실로 난처한 일이오니, 만약 이 일 때문에 걱정이 되어 다시 크게 지어 그 장소를 넓히려고 하면, 전각을 뜯어 헤쳐야 할 것이므로, 일이 매우 가볍지 않고 큰 재목도 얻기 어려워서 역사가 쉽지 않기 때문에, 종묘에 모시는 기한 전에 짓기가 어려울까 하옵니다. 또 엎드려 듣자오니, 옛날에 합향을 올릴 때에는 모두가 태조께서 동으로 향하시고 남북으로 좌우 소목의 열을 갈라서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만대를 두고도 마땅히 본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남향하신 자리가 좁고 막혀서, 실행하기가 이처럼 어려우니, 시대를 따라서 처리하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옛날의 합향을 드리는 제도로서, 현재 합향을 드리는 데 장애되는 것을 변통하여 거행하여도 하나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이미 앞서 전각의 도면을 만들어 남향하는 일이 실행하기 어려운 이유를 보여드렸고, 또 주자의 〈주협구도(周祫九圖)〉와 〈송협일도(宋祫一圖)〉를 계승하여, 합향을 드릴 때에 반드시 동향을 하여야 하는 뜻을 밝혔고, 끝으로 다시 전각 도면을 만들어서 동향하는 것이 예절에 합치하는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전하께서는 도면을 살피시고 예에 의거하셔서 의리로 결정하시되, 단지 전각 안에서 북쪽 자리를 서쪽으로 옮겨서, 태조는 서쪽 벽을 등지시고 동향하시고, 예종과 중종은 남쪽에 위치하여 북향하시고, 성종ㆍ인종ㆍ명종은 북쪽에 위치하여 남향하게 하소서. 세조는 이제 비록 옮겨 모시었으나, 그대로 그 자리를 비워 두고, 성종은 종전대로 중종과 서로 마주하여 계시게 하여 감히 세조의 빈 자리로 올라가시지 않아야 할 것이오니, 이것이 바로 〈주자협도〉의, ‘무왕(武王)이 감히 문왕과 상대하지 못한다.’는 주자의 설이옵니다. 이같이 하면 전각을 뜯어 헤치는 소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요, 또 땅이 좁아서 거행하기 어렵다는 근심도 없을 것이오니, 그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있어서도 진실로 편리하고 합당한 것이옵니다.” 하였다. 차자가 올라가자 임금이 곧 불러 보시고, 상세히 물으시니 선생이 부연하여 아뢰기를 차자의 뜻과 같이 하였다. 대신과 예관에게 내려서 의논하기를 명하셨다. 선생이 물러난 뒤 또 고묘도(古廟圖)를 올렸다. 얼마 뒤 대신과 예관이 모여 의논하기를, “대궐 안에서 제향 올리는 의례는 순전히 옛날의 예절만을 쓴 것은 아니며, 세종대왕의 무궁하신 효성으로써 아침저녁 살아 계신 이를 섬기듯 하는 공경심을 펴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리의 위치와 향하고 등진 것의 법제가 이미 정하여져 140년 동안 줄곧 실행하여 온 제도인데, 하루아침에 고쳐 바꾼다는 것은 이러한 일 자체가 거북스러운 일이옵니다.” 하므로 의논이 저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신이 원묘(原廟)가 속례(俗禮)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속례 중에도 한 가지라도 거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변통하여 옛 예절의 아름다운 점을 좇자는 것이옵니다. 총명하시고 정직하시어 하늘과 덕을 합하신 조종(祖宗)의 신령이, 어찌 그 옳은 것을 아시지 못하시고 예가 아니라고 하여서 그 흠향하심을 달게 여기시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을미, 조강(朝講)에 입시하다. 기해, 선인문 밖에 가서 차자를 올려 물러갈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임인, 다시 차자를 올려 물러갈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숙배하지 않고, 대궐 밖에 가서 차자를 올려 힘써 사양하니, 체차하도록 허락하다. ○ 3월 병오, 또 대궐에 들어가서 겸대한 직함까지 모두 체차해 줄 것과 치사하고 시골로 갈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이때에 이르자, 선생은 물러갈 뜻을 이미 결정하였기 때문에 연일 대궐에 들어가서 힘써 사면하려 하였다. 마침 임금이 장차 모의전에서 친히 제사하시게 되었기 때문에, 정원에서는 선생이 그대로 내려갈까 염려하여 제사 지내신 후에 불러 보시고 보내실 것을 아뢰어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주서(注書) 유대수(兪大脩)에게 명하시어 성지(聖旨)를 읽게 하셨다. 판중추부사에 제수하다. 무신, 대궐에 들어가서 성은에 감사하고, 야대청(夜對廳)에 입대하여 물러갈 것을 빌어서 허락되다. 왕이 선생을 불러 보시고 머물러 있을 것을 재삼 권하였으나, 선생이 물러갈 것을 더욱 간절하게 비니, 임금이, “경이 이제 돌아간다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 하였사옵니다. 대개 밝은 임금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태평한 세상에는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는 것이옵니다.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으면 혼자만의 지혜로써 세상을 주무르며, 여러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고,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으며 반드시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오니, 이것은 두려워할 만한 일이옵니다. 지금 세상도 비록 태평하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남북에 모두 분쟁의 조짐이 있고, 백성들은 살기에 쪼들리며 나라의 창고는 텅 비었사오니,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되어, 갑자기 사변이라도 생기면 토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흩어질 형세가 없지 아니하오니,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사옵니다. 성상의 자질은 고명하셔서 경연에서 글의 뜻에 정통하시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의 재주나 지혜가 성상의 뜻을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논의하고 처사함에 있어서 혼자만의 지혜로 세상을 주무르는 조짐이 없지 아니하오니, 그것이 식자들이 미리 근심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신이 전날에 아뢴 바, 건괘의,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 한 외에 또,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함이 있다.[亢龍有悔]’는 말이 있사옵니다. 대개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임금의 자리는 지극히 높은 위치인데 그 위에 또 한 자리가 있으니 지나치게 높은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높은 체하여서 신하들과 함께 마음과 덕을 같이하려고 하지 아니하면, 어진 신하가 하급의 지위에 있어서 도울 수가 없게 되오니, 이것이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할 것이 있다.’는 것이옵니다. 대개 용이라는 것은 구름을 만나서 그 변화하는 것을 신령스럽게 하여, 혜택을 만물에 입히게 되는 것인데, 임금이 아랫사람과 함께 마음과 덕을 같이하지 아니하면 용이 구름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아서, 비록 그 변화를 신령스럽게 하여 혜택을 만물에 입히고자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임금의 덕이 큰 병통인 것이옵니다. 또 태평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난리가 생길 징조가 생기는 것이온데, 오늘날이 바로 그렇습니다. 일에 혹시라도 그릇된 것이 있으면, 마치 배를 끌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한 번 손을 놓는 날이면 흐름을 따라 내려가다가 풍파를 만나서 뒤집히는 것과 같사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학문하는 공부를 폐하지 마시고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 내야 이런 병통이 스스로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옵니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마음을 보존하는 법이 아닌 것이 없으나, 역시 그 요점을 아는 것이 귀중하옵니다. 신이 전일에 올린 〈성학십도〉는 신의 사사로운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니옵고, 모두 옛 현인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오며, 그중에 한두 가지의 그림만 신이 보충하였을 뿐이옵니다. 공부하는 방법인즉, 전날 올린 차자에도 사(思) 자ㆍ학(學) 자로 주장을 삼았사온데, 이로써 사색하시면 얻으시는 것이 더욱 깊으셔서 사업에 발휘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오니, 소신이 마지막으로 충성하려는 생각에서 아뢰는 정성이옵니다.” 하였다.임금이, 이르기를,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가 셋이 있는데, 중도(中圖)와 하도(下圖)를 경이 만든 것인가?” 하니, 선생은, “정복심(程復心 원나라 선비)의 〈사서장도(四書章圖)〉에 이 그림이 있사온데, 위의 한 도면은 즉 정씨의 도면이고, 그 나머지 이(理)와 기(氣)를 갈라서 말한 곳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맹자와 정ㆍ주가 논한 ‘본연의 성’[本然之性]과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갈라서 만들었사옵니다. 본연의 성은 이(理)를 주로 해서 말한 것이요, 기질의 성은 이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옵니다. 정(情)을 말하면, 이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사단이 되고, 이와 기를 겸하여 나오는 것은 칠정이 되는 것이옵니다. 중도는 본연의 성으로 사단을 주로 하여 만들었고, 하도는 기질의 성으로 칠정을 주로 하여 만든 것이옵니다. 이것이 비록 신이 만든 것이오나 다 성현의 말을 인용한 것이오며, 신이 망녕되이 만든 것은 아니옵니다.” 하였다.임금이, “심통성정(心統性情)이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고 물으니, 선생은, “서명(西銘)에 말하기를, ‘천지에 찬 기운은 나의 몸뚱이[體]요, 천지에 거느린 이는 나이 성품[性]이다.’ 하였습니다. 기는 형체가 되고 이는 그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이와 기가 합해져서 마음이 되어 한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므로, 성과 정을 통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이 성을 간직하는 것도 마음이요, 나아가서 작용하는 것도 역시 마음이니, 이것이 심통성정인 까닭이옵니다.” 하였다.임금이 또 묻기를, “그림 안의 ‘허령(虛靈)’ 두 글자는 위에 있고 ‘지각(知覺)’은 아래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선생이 “허령은 마음의 본체요, 지각은 사물을 응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할 말은 없는가.” 하니, 선생은 “우리 조종들께서는 깊으신 은혜와 두터운 혜택으로 공덕이 높고 높사옵니다마는 다만 사림의 화가 중엽에 일어났사옵니다. 폐조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말할 것도 없사옵니다마는, 중종 때의 기묘사화는 현인과 군자가 모두 큰 죄를 입었사옵니다. 그로부터 사(邪)와 정(正)이 한데 섞이어서 간사한 자가 뜻을 얻어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때에는 반드시 ‘기묘의 여습(餘習)’이라 일컬으며 사림의 화가 잇달아 일어났으니, 옛날부터 이 같은 때는 있은 적이 없었사옵니다. 명종이 아직 춘추가 어리셨으니 권세 있는 간신이 뜻을 얻어서, 한 사람이 패하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 서로 잇달아 정권을 농락하였기 때문에, 사림의 화는 차마 말할 수 없었사옵니다. 신이 이미 지나간 일을 아뢰는 것은 장래에 큰 경계를 삼고자 하는 까닭이옵니다. 옛날부터 임금이 처음에 정치를 시작할 때는 어질고 바른 사람이 등용되었기 때문에, 임금의 허물을 간하고 잘못을 다투어서 임금이 반드시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는 뜻이 생기게 되옵니다. 간사한 사람들은 그 틈을 타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아 받들기 때문에, 임금은 이 사람을 등용하면 나의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이로부터 소인과 합심하게 되어 바른 사람은 손 댈 곳이 없게 되옵니다. 그런 뒤에는 간신이 뜻을 얻어 한 패거리를 불러들여서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은 혁신하시는 정치의 처음이므로 간하고 논란하는 것은 모두 다 뜻을 굽혀서 좇으시니 큰 과실은 없으시오나, 날이 오래 감에 따라 성상의 마음이 혹시 바뀌신다면 어찌 오늘 같으실 것을 보증하겠사옵니까. 그렇게 되면 간사한 세력과 바른 세력이 장차 나뉘어질 것이고 간사한 무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오니, 처음의 정치와 서로 반대되는 일이 많을 것이옵니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요송(姚宋 요숭(姚崇)과 송경(宋璟)) 등의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 차서 태평정치를 누렸으나, 현종은 욕심이 많았으니 군자들은 이것을 간하였고, 이임보(李林甫)ㆍ양국충(楊國忠) 등의 무리는 오로지 그 뜻을 맞추었으므로 영합하였사옵니다. 군자는 다 떠나가고 소인만을 써서 끝내는 천보(天寶)의 난(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불러왔습니다. 한 임금이 하는 일이 두 사람이 하는 것처럼 되는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합하였고 나중에는 소인과 합하였던 까닭이오니, 주상께서는 이것을 큰 거울로 삼으셔서 착한 무리들을 보호하시어 소인들이 모함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이것은 종사(宗社)와 백성의 복이옵니다. 신이 경계하여 고하고 싶은 것은 이보다 큰 것이 없사옵니다.” 하였다. 임금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을 마땅히 경계로 삼겠노라.” 하였다.또 묻기를, “조정의 신하 가운데 천거할 만한 자가 없는가?” 하니, 선생이, “오늘날 대신들은 모두 깨끗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6경은 간사하거나 음흉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의 수상을 말하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해서도 말소리나 얼굴빛을 변하지 아니하고 나라의 형세를 태산같이 편안한 곳에 앉혀 놓았으니, 진실로 국가의 기둥이나 주춧돌과 같은 신하입니다. 마땅히 의지하고 중히 여겨야 할 사람은 이 밖에 더 나을 사람이 없을 것인가 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학문하는 사람을 물으니, 선생은, “그것은 아뢰기 어렵사옵니다. 옛날에 정자에게, ‘문인 중에 누가 학문에 얻은 바가 있겠습니까?’ 하고 묻는 자가 있었는데, 정자는, ‘얻은 바가 있다고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때에 유작(游酢)ㆍ양시(楊時)ㆍ사양좌(謝良佐)ㆍ장역(張繹)ㆍ이유(李籲)ㆍ윤돈(尹焞) 같은 여러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정자는 감히 경솔하게 허락하지 아니하였거늘, 신이 어찌 감히 위로 임금을 속여서 어느 사람이 어떻게 얻은 바가 있다고 하겠사옵니까.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는 문자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역시 본 바가 가장 뛰어났으니, 과연 통한 선비이옵니다. 그러하오나 다만 수렴(收斂 내성(內省)한다는 뜻)하는 공부가 적사옵니다.” 하고는 드디어 물러가니, 표범가죽의 요 한 벌과 호초(胡椒) 2말을 하사하고, 본도에 명하여 쌀과 콩을 내리게 하였으며, 또 연도(沿途)에 명하여 말을 지급하고 배를 끄는 군인을 주어 그가 돌아가는 것을 보호하라고 하였다. 오정 때에 하직하고 성을 나와 동호몽뢰정(東湖夢賚亭)에서 자다. 기유, 배를 타고 동으로 향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자다. 명사들이 온 조정을 비우다시피 하고 나와서 전송할 제, 각각 시를 지어 이별의 뜻을 표하기 때문에 선생도 시를 지었으니,
큰 배에 벌여 앉은 분 모두 명사일세 / 列坐方舟盡勝流 돌아가고픈 마음 온종일 끌리어 머물렀네 / 歸心終日爲牽留 원컨대 한강물 가져다가 벼루에 부어서 / 願將漢水添行硯 작별할 때의 끝없는 수심 그려 내고자 한다네 / 寫出臨分無限愁 하였다. 경술, 양주(楊洲) 무임포(無任浦)에서 자다. 신유, 집에 도착하다. ○ 4월, 글을 올려 물러남을 허락해 준 것과 먹을 물건을 하사한 것에 감사하고, 이어 관직을 벗어나 치사할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처음 선생이 조정에 있을 때에 사방에서 그 풍채를 바라보기를 원하였고, 물러남에 이르러 조야가 모두 섭섭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집의(執義) 권덕여(權德輿)가 소를 올려 아뢰기를, “어진 선비가 가고 머무는 것은 인심의 향배(向背)에 관계되고, 국가의 흥망이 매였사옵니다. 지난번 판부사 이황이 글을 올려 치사하게 해 달라고 기다리고 있을 때 정원에서는, ‘비록 안 보내지는 못하겠사오나, 원컨대 불러 보시고 보내소서.’ 하였고, 불러 보시는 날에는, 미리 말[馬]을 주실 것을 아뢰었기 때문에 주상께서 온당치 못하다는 뜻으로 하교하시자 또 간곡히 물러갈 것을 비는 이유를 진술하였사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오며 정원에서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때 정원에서 어진 선비의 가고 머무르는 것이 인심과 국가의 향배와 흥망이 매여 있은 까닭을 아뢰고, 또 성상의 학문이 급한 때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경연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뢰어, 주상께서 굳게 고집하셔서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도록 인도해서 지성으로 머무를 것을 청하였다면, 이황이 비록 가려고 한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었겠사옵니까. 신이 살피건대, 《시경》 〈소아(小雅)〉의 백구편(白駒篇)은 어진 이를 머물러 있게 하는 노래이옵니다. 그 첫 장에 말하기를, ‘희고 흰 망아지가 나의 마당 싹을 먹는구나. 얽어 매고 붙들어 매어 이 아침이나 길게 하자. 이른바 그 사람이 이제는 마음껏 노닐겠구나.’ 하였고, 둘째 장에는 말하기를, ‘희고 흰 망아지가 나의 마당 명아주를 먹는구나. 얽어 매고 붙들어 매어 이 저녁이나 길게 하자. 이른바 그 사람이 이제는 반가운 손님이로구나.’ 하였고, 셋째 장에는 말하기를, ‘희고 흰 망아지 빛나게 타고 오면 그대를 공작(公爵)으로 삼고, 그대를 후작(侯爵)으로 삼아 편안과 즐거움을 무한하게 하리, 그대 우유(優游)함을 삼가고 은둔을 결단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대개 사랑함이 간절하여 좋은 관작으로 붙들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함이요, 만류하기에 고심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이처럼 옛날 사람들이 어진 이가 떠날 적에 만 가지로 만류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을 염려할 겨를도 없었던 것인데, 지금은 망아지를 붙들어 매자는 사람은 없고, 도리어 말을 주자는 청이 있었으니, 어째서입니까? 이황이 어진 신하인 것은 다른 것은 논하지 말고라도, 학문으로만 말하여도 지금 세상에 누가 그에 비할 수 있겠사옵니까. 평생의 정력이 다 학문에 있었으니 진실로 알고 실천하여, 공부가 이미 성공된 뒤에는 깨끗하고 고요하게 스스로만을 지키고 바깥 허영은 쳐다보지도 않으니, 참으로 선비의 높은 태도요, 학문의 큰 스승이옵니다. 여섯 가지 조목을 아뢴 것과 십도(十圖)를 올린 것과 또 일에 따라 손수 바친 차자라든지, 소론한 글이나 말로 아뢴 것을 보아도, 식견이 높고 깊으며, 이론이 정박하고 순수하여 과연 그 내력이 있으니, 결단코 속된 선비의 미칠 바가 아니온데, 간절한 일편 정성은 오직 〈성상의 학문〉을 열어 넓히는 데에만 있었사오니, 이처럼 진강(進講)이 급한 때를 당하여 경연에 큰 선비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을 놓아두고 그 누구를 청하겠사옵니까. 이 같은 사람이 비록 옛날에 있었다 하여도 만나지 못한 것을 한할 것인데, 하물며 같이 한 세상에 났으면서 도리어 버릴 수 있겠사옵니까. 전날 청해 올 때에는 전하의 모든 생각이 오로지 현인을 좋아하신 데에 있으셨고, 조정에서도 상하가 보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 같았사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이미 돌아간 뒤에도 전하의 모든 생각이 아직도 전과 같음을 보증할 수 있사온지, 조야의 여러 마음이 이미 보고는 의심하고 괴이쩍게 여겨 마음이 풀어지지 아니하셨는지요? 이런 마음이 계속 자라게 되면 인심이 방탕하고 흩어져서 어디에도 귀속될 곳이 없을까 근심하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하에 가장 좋은 일이다.’ 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어진 이가 있지 아니하면 어떻게 그 나라가 되겠는가?’ 하였으니. 엎드려 비옵건대, 전하께서는 인심의 향배와 국가의 흥망하는 연고를 근심하셔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생각을 깊이 하시고, 몸을 굽히셔서 어진 이를 부르시고 여러 사람의 정의를 붙들어 대업(大業)의 바탕이 되게 하시오면, 종사에 매우 다행할 것이요, 백성에게 매우 다행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래서 체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유지를 내리기를, “경이 전부터 물러 돌아갈 것을 간절히 청하였기 때문에 뜻을 빼앗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대로 허락하여 경의 뜻을 편안하게 하였을 뿐이다. 치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체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것은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니, 경은 마땅히 그리 알라.” 하였다. 7월, 천곡서원(川谷書院)의 두 선생의 축문을 초하다. ○ 9월, 노이재(盧伊齋 노수신(盧守愼))가 보낸 상례(喪禮)를 논한 편지에 회답하다. 4년 (경오) 70세 1월, 글을 올려 치사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글을 올려 직명을 사면할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유지에, “경의 나이 비록 70이나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에 허락하지 아니하노라. 그 관직을 체차하지 않는 것은, 경의 어진 덕을 생각하여 우선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 준 것이지 사면하고 물러갈 것을 허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정으로 돌아오는 기일을 내가 날마다 바라노니, 역마를 타고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3월, 또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이어서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4월, 소명을 사양하고 거듭 치사할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아니하고, 잇달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 5월, 제생들과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모이다. 도산에 나와서 제생들과《계몽(啓蒙)》을 강론하다. ○ 7월, 역동서원에 가서 제생과 《심경(心經)》을 강론하다. 〈재중야기간월(齋中夜起看月)〉 시가 있다. 8월, 역동서원의 낙성식에 가다. 9월, 글을 올려 치사할 것과 직명을 사면할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다만 겸대하였던 교서관과 활인서(活人署)의 제조(提調)만 체차되었다. 다시 도산에 나가서 제생들과 《계몽》ㆍ《심경》을 강의하다. ○ 10월, 기명언에게 편지를 보내어 〈심성정도(心性情圖)〉를 논하다. ○ 11월, 병으로 피곤하다 하여 제생들을 돌려보내다. 유응현(柳應見)이 정사에 머무르면서 보낸 절구 시에 화답한 시 3수가 있었는데, 그 하나에,
공자 성인도 되려 동네 고르는 사람을 경계하였고 / 孔聖猶箴擇里人 일찍이 글로 모여 서로 도와 인을 이룬다 하였네 / 曾云文會輔成仁 늙어지면서 다시 학문하는 데 소홀함을 깨달았노라 / 老來更覺疎爲學 빈손으로 돌아와서 또 봄 기다리는 것 부끄럽네 / 慙愧空還又待春 하였다. 가묘(家廟)에 시사 제향을 올리다. 그때에 선생은 이미 병환이 있었기 때문에, 자제들이 제사에 참여하지 말기를 청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므로 제사 지낼 날이 많지 않으니,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독(櫝 신주 모시는 궤)을 받들고, 제물을 드리는 것을 손수 맡아 보았기 때문에 기력이 더욱 쇠해졌다. 기묘, 기명언의 편지에 회답하여 치지격물설(致知格物說)을 고치다. ○ 12월 병신, 자제들에게 명하여 다른 사람의 서적을 기록하고 돌려보내게 하다.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경계하였다. 그때에 아들 준(寯)이 봉화 현감이었는데, 사면하는 글을 감사에게 올리게 하고 집안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금하였다. 정유, 형의 아들 영(寗)에게 명하여, 유계(遺戒)를 쓰게 하다. “첫째는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이고, 둘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그 전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志行)ㆍ출처(出處)를 쓰되, 《가례(家禮)》중에 말한 것처럼 하라. 만약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짓는다면, 서로 아는 기고봉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 없는 일을 장황히 늘어놓아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전부터 스스로 뜻하였던 것을 기술하려고 먼저 명문(銘文)만을 지어 놓았고, 그 나머지는 이럭저럭하다가 마치지 못하였는데, 초한 글이 여러 초서 속에 함부로 섞이어 있을 것이니, 찾아내거든 그 명문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들이 사방에서 보고 듣고 있으니, 너의 거상(居喪)하는 것도 다른 예가 아니니, 모든 일과 법도를 예절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묻는다면, 지금 세상에도 마땅하고 옛날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그 나머지 두어 가지 집안일을 처리하였다. 낮에 제생들을 보다. 자제들이 중지하기를 권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이때에 아니 볼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명하여 웃옷을 덮게 하고, 여러 제자들을 불러서 영결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그릇된 식견을 가지고 제군과 같이 종일토록 강론하는 것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였다. 무술, 수기(壽器 염습할 때 쓰는 제구)를 준비할 것을 명하다. 경자, 문인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도록 명하다. 선생의 병세가 이미 중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점쳐서, 겸괘(謙卦)의 “군자가 마치는 때가 됐다.”라는 괘사(卦辭)를 얻었다. 신축일 유시, 정침에서 돌아가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다. 유시 초에 드러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편한 듯이 운명하였다. 신해, 부고가 올라가니, 명하여 영의정으로 증직하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선생이 병환 중임을 듣고 내의에게 약을 가지고 역마로 달려 내려가서 구원하게 명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선생이 이미 운명하였다. 감사가 장계를 올리니, 정원에 이르기를, “이황이 죽었다 하니 매우 아깝고도 슬프다. 영의정으로 추증하게 하고, 부의(賻儀) 보내는 일 등을 속히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올리라.” 하였다. 예관이 계청(啓請)하여 상사와 장사의 은전은 모두 대신의 예를 쓰고, 별도로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제민(李齊閔)을 보내어 조상하게 하고, 또 우승지(右承旨) 유홍(兪泓)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니, 모두 각별한 배려였다. 을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를 추증하다. 5년 (신미) 3월 임오, 예안 건지산(搴芝山) 남쪽에 장사 지내다.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의 언덕이니, 선생의 살던 곳과 거리가 2리(里)쯤 되는 곳이었다. 아들 준(寯)이 유언이라 하며 두 번이나 글을 올려 예장을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묘비에는 유언대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썼다. 처음에 선생이 돌아가신 뒤 원근에서 조상하기를 미처 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며, 비록 평소에 일찍이 문하에 와 수업하지 못한 자라도 모두 슬퍼하여, 동네에서 서로 조상해서 탄식하였고, 무지한 백성과 천한 사람들도 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장사 때에는 사대부로서 모인 사람이 3백여 명이었다.6년 (임신) 만력(萬曆) 원년 계유 11월 1일, 위패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하고, 석채례(釋菜禮)를 거행하다. 서원은 영천군 읍내 동쪽 6, 7리 되는 곳에 있었다. 무오년 가을에 군수 안상(安瑺)이 세운 것인데, 선생이 일찍기 기(記)를 지었었다. 이때에 군수 허충길(許忠吉)이 서원 안에다 사당을 세우고 선생을 제사 지냈더니,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다음 해에 현판을 내려서 이산서원이라 하였다.2년 (갑술) 봄, 서원을 도산 남쪽에 세우기로 하다. 온 고을 선비들이 의논하기를, “도산은 선생이 도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서당 뒤에 두어 걸음 나가서 땅을 개척하여 짓기로 하였다.3년 을해 여름, 서원이 낙성되니, ‘도산서원’이라고 사액(賜額)되다. 4년 (병자) 2월 정축,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거행하다. 이날 여강 서원(廬江書院)에서도 역시 위패를 받들어 모시고 제사 지내다. 이보다 먼저 안동 선비들이 낙동강 상류에다 서원을 세웠으니, 읍내 동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이것은 백년사(白蓮寺)의 옛터이니, 이름하기를 ‘여강서원’이라 하고, 앞에 누(樓)가 있었는데, 이름을 양호(養浩)라 하였다. 12월, 시호를 문순(文純)이라 추증하다. 도와 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립해서 올바르고 정하고 순수한 것은 순(純)이라 한다.24년 (병신) 윤8월 무인, 지석(誌石)을 묻다.
[주D-001]절우사(節友社) : 도산서당 왼편에 석축으로 조그만 단(壇)을 만들고 거기에 매(梅)ㆍ죽(竹)ㆍ송(松)ㆍ국(菊)을 심어 놓고 절우사라고 이름하였다.[주D-002]고반(考槃) : 《시경》 〈고반(考槃)〉에 나오는 말로 은사(隱士)의 생활을 뜻한다.[주D-003]적벽 고사(赤壁故事) : 본래 적벽은 중국 호북성(胡北省)에 있으며 주유(周瑜)가 조조(曹操)를 격파한 곳이다. 훗날 소동파가 양자강 가 황강현(黃岡縣)에 있는 적벽강을 주유가 싸웠던 적벽으로 잘못 알고 전ㆍ후 〈적벽부〉를 지었다.[주D-004]적(寂)과 감(感) : 《주역》에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느끼면 드디어 천하의 이치를 통한다.[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는 적(寂)을 체요, 감을 용(用)이라고 본 것이다.[주D-005]대기(戴記) : 한나라의 대성(戴聖)이 전한 《예기(禮記)》이다.[주D-006]육합(六合) : 동서남북과 상하를 말한다.[주D-007]두 자 : 체(體)와 용(用)을 말한다.[주D-008]진북계(陳北溪) : 송나라의 학자로 주희의 제자인 진순(陳淳)이다.[주D-009]소자(邵子) : 송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으로 자는 요부(堯夫), 강절은 시호이다.[주D-010]성복(成服) : 초상시 3~5일 후에 상복을 입는 것이다.[주D-011]근사록(近思錄) : 주희(朱熹)와 여동래(呂東萊)의 공편(共編)으로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소자(邵子)의 말을 편집한 책이다.[주D-012]진서산(眞西山) : 송나라의 학자 진덕수(眞德秀)를 말한다.[주D-013]범난계(范蘭溪) : 송나라의 선비 범준(范浚)이다.[주D-014]황자계(黃慈溪) : 역시 송나라의 선비 황간(黃榦)이다.[주D-015]정황돈(程篁墩) : 명나라의 선비인 정민정(程敏政)이다.[주D-016]초려(草廬) : 원나라의 선비 오징(吳澄)이다.[주D-017]백사(白沙) : 명나라의 선비 진헌장(陳獻章)이다.[주D-018]양명(陽明) : 명나라의 철학자인 왕수인(王守仁)을 말한다.[주D-019]흠위(廞衛) : 흠(廞)은 수레 즉 영려(靈擧)요, 위(衛)는 영려를 호위하는 사람들이다.[주D-020]용이 구오(九五)에 나니 : 용비구오(龍飛九五)라는 말이 있는데, 새로 제왕의 자리에 오른 것을 말한다.[주D-021]이공(貳公) : 좌ㆍ우찬성을 이상(貳相) 혹은 이공이라 한다.[주D-022]여윈 …… 것 : 《주역》 〈구괘(姤卦) 초효(初爻)〉에서 인용한 말로, 주희는 이를 “여위고 약한 돼지는 맹렬하고 굳세지는 못하지만 그 속마음은 날뛰려는 데 있다.”라고 하며 소인이 군자를 해치려는 것에 비유하였다.[주D-023]공의전(恭懿殿) : 한나라에서 태후를 모신 궁 이름인데, 태후나 대비 모신 곳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는 인종의 왕후인 인성왕후 박씨를 지칭한다.[주D-024]옥루(屋漏) : 《시경》에 “옥루에 부끄럽지 아니하다.[不愧屋漏]”라는 구절이 있는데, 옥루는 방 안의 그윽한 구석이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이런 구석진 데에서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삼간다는 뜻이다.[주D-025]관상(管商) :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이니 그들은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였다.[주D-026]향원(鄕愿) : 공자(孔子)의 말에 “향원(鄕愿)은 덕(德)의 적(賊)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온 고을 사람에게 얌전하다는 말은 들으나 사이비(似而非)인 것으로써 덕을 혼란하게 한다는 뜻이다.[주D-027]사잠(四箴) : 공자(孔子)가 안자(顔子)에게 가르진 사물(四勿)에 대하여 정자가 사물잠(四勿箴)을 지었는데, 시잠(視箴)ㆍ청잠(聽箴)ㆍ언잠(言箴)ㆍ동잠(動箴)이다.[주D-028]추삭(追削) : 죽은 뒤에라도 그의 생전의 죄목을 밝히고 관작을 모두 빼앗는 것을 말한다.[주D-029]수의(收議) :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서 서면으로 각자 의견을 진술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주D-030]소목 : 종묘(宗廟) 신주(神主)의 위차(位次)는, 태조(太祖)는 중앙에서 남향(南向)하고, 그다음부터 왼편에서부터 오른편으로 순서대로 모시는데, 태조의 다음에는 왼편에 모시고, 그다음 대의 신주는 오른편에 모시며, 또 그다음 대의 신주는 왼편으로, 그다음은 오른편으로 자리를 잡는데, 왼편을 소(昭)라 하고, 오른편을 목(穆)이라 한다.[주D-031]조천(祧遷) : 종묘에 5대(代)가 되면 그 신주는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주D-032]복(獛)ㆍ수(秀) : 송나라 영종(英宗)은 복안의왕(濮安懿王)의 아들로서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생부를 추숭하여 천자로 대우하려 하였다. 효종(孝宗)의 생부는 수왕(秀王)인데, 효종이 황제가 된 후 황족으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주D-033]한나라의 원묘(原廟) : 한(漢)나라 혜제(惠帝)가 처음 세운 것인데, 고조(高祖)의 종묘 외에 다시 한 사당을 세운 것이다.[주D-034]천곡서원(川谷書院) : 성주(星州)에 있으니, 김굉필(金宏弼)ㆍ이언적(李彥迪) 두 선생과 송나라의 정자와 주자를 모시었다.[주D-035]예장(禮葬) :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하는 것을 말한다.[주D-036]지석(誌石) : 평생에 대해 기록하여 훗날 무덤이 없어져도 찾을 수 있게 한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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