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서포구에서 해녀박물관까지 17.6km.
겨울날씨답게 바람이 세차게 불고 눈도 뿌린다.
우비를 입고 마스크 장갑,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단단히 채비를 한다.
걷기 전에는 대체로 바당길로 채워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왠 걸.
길들이 퍽이나 다채롭다.
올레 의미가 선명히 드러나는 마을 안길과 골목길, 돌담으로 둘러 쌓인 너른 밭담길, 비밀의 숲처럼 터널을 이루고 있는 숲길, 잔디로 이루어진 태역길, 너른 뱅듸길, 바다를 낀 도로길, 바다 곁으로 바짝 걷게 하는 돌무더기길, 해변의 모래 사장길, 걷는 내내 따라오는 풍차들...
마치 잘 차려진 10첩 반상같은 맛있는 길이다.
이 길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애를 썼는지 실감나는 코스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담아 꾸벅.
김녕서포구 시작점에서 바로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돌을 인 담장이 예쁜 집들, 재미있는 벽화가 인상적인 안길이다.
마을 안길을 벗어나 바다로 나오면 도대불이 보인다.
배들의 밤길을 밝혀주는 민간등대이다.
도대불 뒤로 빨갛고 하얀 현대식 등대랑 대비되는 느낌이다.
바당길을 걷고 있는데 이런 매운 바람과 물결치는 파도에서 보드를 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저 지극 정성을 누가 말리랴.
좋아하는 일에 꽂혀 기어이 하고자 하는 집념이 엿보인다.
바닷가 담장에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글귀가 보인다.
아니 아니, 쌩쌩쌩 칼바람이 불고 있어.
그래도 뒤에서 옆에서 불어주며 등을 밀어주는 바람이 그나마 고맙다.
바당길을 지나 성세기 태역길에 접어든다.
잔디를 뜻한다는 태역.
하지만 걷기 힘겨운 거친 돌무더기길이 더 많은 느낌이다.
스틱이 돌틈에 빠져 바닥을 감싸고 있던 고무가 빠져 버렸다.
그래도 도로길보다 이 길이 훨씬 좋다.
깊은 주름이 골골이 새겨진 너른 빌레, 좀 더 수월하게 걸으라고 되도록 같은 크기의 돌을 깔아놓은 흔적이 보인다.
4km쯤 걷고 사방이 통창으로 시원한 카페 델문도에서 잠시 쉼.
핫플인가?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밭담길로 접어든다.
구멍 숭숭 뚫린 돌틈으로 바람이 넘나든다.
밭들이 무척 길게 이어진다.
흙을 곱게 갈아놓은 밭, 빈터로 남겨둔 밭, 푸릇한 이파리를 내놓은 당근밭, 갓 심어놓은 마늘밭이 주를 이루고 있다.
월정해변이다.
여전히 비취빛 맑은 물빛이 아름다운 곳이다.
또 다시 마을길과 밭담길이 이어진다.
당근을 수확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실하게 여문 당근들이 나란히 나란히 줄지어 있다.
밭 한 구획에서 저리 많은 당근들이 생산된다니.
그 이익이 고스란히 농부님들에게 돌아갔으면 좋겠다.
비밀의 숲처럼 숨겨진 길들이 나타나고 나무터널이 우리를 반겨준다.
좌가연대에 이르기까지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 글귀들이 소개된 표지판이 주르륵 따라 온다.
21년 출간된 책자니 최근 새롭게 글귀를 바꾼 듯하다.
걸으면서 음미하고 사색하란 의미인가 보다.
숲길을 나서자 불쑥 등장하는 좌가연대.
적선을 관찰하고 해안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는 좌가연대는 다른 연대들에 비해 생김새가 독특하고 반듯하게 슈트 차려 입은 잘 생긴 청년같다.
우와, 이런 곳에도 길이 있었네.
길을 만들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는 곳이 계속 이어진다.
짧지만 무척이나 멋스런 숲길, 잔디길, 돌담길
한동리에서 평대에 이르는 마을길도 참 예쁘다.
마을을 가꾸는 주민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해변에는 재미난 방언들이 눈길을 끌고, 제주스런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당근 먹는 말도 보이고, 갈색으로 바랜 핑크뮬리의 흔들거림도 정스럽다.
뱅듸길에 들어서니 거센 바람에 휩쓸리는 풀들의 뒤척임이 요란하다.
세화해변을 지나니 금세 20코스의 끝지점 해녀박물관이다.
3만보 가까운 걸음을 길 위에 남긴 날.
느긋한 피로가 찾아 오지만 길이 주는 행복감으로 가득 찬 날이다.
첫댓글 제주도에서는 요즘 당근을 캐는군요. 처음 알게 됐습니다.
소소한 것조차 관심을 가지고 올려주시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지난 가을 고교 동창들과 제주 여행 갔을 때 제주 올레길 걷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어요.
요즘 올레길 인파는 어떻던가요.
올레꾼은 뜸하게 볼 수 있어요.
8코스보다 20코스가 더 많더군요
네댓팀 정도 만났어요.
겨울날 걷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