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준장을 비롯한 25명의 포병장교들은 1953년 크리스마스 직후 대구에서 미군 비행기를 탔다. 일본의 미공군기지 다치카와 비행장에 내 렸는데 다음 비행편을 기다린다고 한 일주일을 대기했다. 호놀룰루를 거 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미군측에서는 세단을 내주어 박정희 준장, 이상국 대령 등 고급 장교들이 관광을 하도록 했다. 유학생들은 로스앤 젤레스에서 오클라호마주의 포트 실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박정희에게 는 만주, 일본에 이은 세번째의 외국나들이였다. 전쟁통을 막 벗어난 조 국의 현실과 비교할 때 눈앞에 펼쳐진 미국의 풍요함과 거대함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박정희는 과묵함을 유지 했다. 미국에 유학간 한국군 장교들이 써 보내는 편지에는 '자동차의 홍 수, 빌딩의 숲'이란 귀절이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갈 때였다.
1954년 1월부터 시작된 박정희 유학생의 포트 실 생활은 겉으로는 단조로웠다. 유학반은 한국군 통역장교를 데리고 갔고 우리 말로 번역된 교재를 썼다. 포술학, 전술학, 자동차학, 실습 따위 과목은 박정희가 한 국에서 배운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보다는 미국, 미국인, 미국사회, 미국군대에 대한 체험이 진짜 교육이었다.
육군포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미군들과 싸웠고,이것이 그의 반미 성 향을 심화시켰다는 속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박정희는 언제나 그러하듯 모범생이었다. 그는 영내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미국인이나 외부 와의 접촉을 활발하게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다른 한 준장과 함께 유 학생반의 선임자였다. 미국인들에 대해서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장교가 있으면 조용히 숙소로 불러 주의를 주는 정도였지 겉으로 불만을 드러내지 는 않았다. 박정희 준장 바로 옆방을 썼던 임상균 중령은 혼자 있기를 좋 아하고 과묵한 박정희가 어렵게느껴졌다. 박정희는 가끔 임 중령 방의 문 을 두드리고는 "맥주 좀 사다 줘"라고 했다. '저 양반또 돈이 떨어졌구나' 라고 생각한 임 중령이 자기 돈을 내 사다주면 박정희는 혼자서 마셨다.체 재비를 받을 때마다 박정희는 임 중령에게 맥주값을 정확히 계산해주었다. 임 중령은 동전을 넣는 세탁기로 빨래를 직접 하는 박정희가 안쓰럽게 보 여 다리미질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박정희는 유학생들이 텍사스주 댈러스 로 단체여행을 갈 때도 빠졌다. 아마도 돈이 없었기때문일 것이다. 박정 희는 미군들이 주최하는 파티장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한번은 드물게 미군 대위 부부가 초청하는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했는데 이부부가 무슨 일이 생 겨 먼저 떠나는 바람에 부대로 돌아올 길을 몰라 고생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영어 실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박정희는 적극적으로이 미지의 세계를 탐험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상균 당시 중령의 증언--.
"우리 학생들은 월 1백50달러를 체재비로 받았습니다. 외출을 나갔다가 점심값을 아끼려고 굶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장군은 공부를 열심 히 하고 숙소에 돌아오면 조용히 지내니 옆방에 있는데도 함부로 말을 붙 이기 어려웠습니다.".
박정희 3군단 포병단장의 작전참모였던 오정석은 포트 실에서 정말로 배운 것은 포술학보다는 미국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미국인 가정에 초대되어 그들과 며칠 함께 생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 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 에 무척 놀랐습니다. 늦은 밤에 인적도 없는데 빨간 신호등에 멈춰서는 자 동차, 스쿨버스가 지나가면 속도를 줄이는 차들을 보고 '아하, 사람 사는 데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기생들끼리 모이면 '이러다가는 친미파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경계심을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많은 한국군 장교들은 왜 도로에 중앙선이 있어야 하는 지, 들이받힌 자동차를 몰던 장교가 들이받은 자동차를 몰던 부하를 왜 두 들겨패주지 않고 무슨 서류에 사인만 하고 보내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1954년 4월25일 박정희 준장이 쓴 일기--.
포트 실(Fort Sill)의 일요일. 고국을 떠나온 지 3개월. 고국산천에 서 백설이 분분하고 찬 바람이 살을 에일 듯하던 날 대구공항을 떠났는데 벌써 초하를 맞이하게 되었다. 포트 실은 봄 여름을 구별하기 어려운 고장 이다. '춘시춘비사춘'이라 봄은 봄인데 봄 같지 않은 봄이었다. 4월20일 경부터는 훈풍이 넘실넘실 나뭇가지를 스치며 분명히 초하의 면목을 갖추 었다. 서늘한 나무그늘이 그윽하고 신선한 경치를 만들어서 산책하는 이의 발걸음을 상쾌하게 한다. 영수와 근혜를 생각하며 한적한 숙사에서 향수에 잠겨본다.
유학생들이 도시구경을 나가고 혼자 영내에 남아서 그 한적함을 즐기면 서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는 박정희의 모습에서 우리는 통상적인 혁명가와 는 다른 조용한 인간형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성정은 침착과 사색을 바 탕으로 하는 결단과 행동이었다. 결정적 시기에 보여준 그의전광석화 같은 행동의 밑에는 기나긴 준비의 세월과 고독한 사색의 축적이 있었다.
박정희가 유학을 떠난 후 전속부관 원병오(경희대 조류학 교수)중위는 2사단 포병단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육영수가 인편으로 "쌀이 떨어 졌다"는 연락을 전해 왔다.
"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그런지 배고픔이란 것을 절감하지 못했 어요. 왜 육 여사가 남편 부하에게 이런 구차한 부탁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다소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니 저 같은 사람 에게 부탁할 정도라면 얼마나 다급할까 싶어 26사단 김재춘(중앙정보부장 역임) 참모장을 찾아갔지요. 쌀 한 가마와 1만 환을 주면서 육 여사에게 갖다주라고 하더군요." 박정희는 귀국을 앞둔 6월14일 이런 일기를 썼다.
번잡한 서울 한 모퉁이에서 내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영수! 인천부두에서 기다릴 영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근혜, 아빠 오셨네" 하고 웃으면서 나를 맞아줄 영수의 모습!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 안에 우물 하 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도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불원 우리 가정에는 새로운 희보가 기다리고있다. 남아일까 여아일까.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남아일 때는 태평양상에서 본 구름과 같은 기운을 상징시켜 운자를 넣을까. 시운, 수운, 일운, 일운, 일 훈. 여아일 때는 근숙, 운숙, 근정, 근랑, 운희. 결정권은 영수에게 일임 하자.
박정희 일행은 6월 하순 시애틀에서 미군 수송선 제너럴 포프호를 타 고 태평양을 건넜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하룻밤을 잔 뒤 규슈 남단을 돌아 인천으로 향했다. 박정희는 선수 쪽 좋은 방을 쓰고 있었다. 6월26일 박정 희는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갑판으로 나갔다. 오른쪽으로 제주도가 보였 다. 박정희는 반년 만에 보는 조국을 스케치했다. 그는 '내일이면 그리웠 던 조국강토에 제1보를 디디게 될 기쁨, 부두에 마중나온 사랑하는 처자의 모습을 그리면서 선실에서의 마지막 잠을 재촉했다.
1954년 6월27일 오전 박정희 준장이 여섯달간의 미국 유학에서 돌아 와 인천항에 내렸을 때 그 또한 대부분의 장교들처럼 '너무나 비참한 조 국의 현실에 분노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의 한미간 격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과 지옥의 대비를 경험하고 온 장교들 의이런 충 격은 나라를 뜯어고쳐야겠다는 개혁에의 의지로 발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