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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一. 저 자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이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저서라는 명백한 기록은 없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고대로부터 누가가 저자라는 것이 정통적인 견해이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은 동일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① 이 두 책은 모두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행1:1, 눅1:3 참조).
② 두 책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쓴 글(누가복음)은 예수의 행하시며 승천한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고, 나중 쓴 글(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의 일을 기록하였다. 또 누가복음24:49에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지기까지 이 성(예루삼렘)에 유하라고 하였으며, 사도행전1:4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③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의학적 술어가 많고 공통된 술어가 40여 군데나 된다. 이상의 이유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 저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증명된다. 사도행전에 "우리"란 말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므로(행16:10-17, 20:5-15, 27:1, 28:16 참조), 바울과 함께 다니며 그를 보조한 자에 의해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은 분명하다. 의사로서 바울을 따라 다니며 보조한 사람은 누가밖에 없다(골4:14, 딤후4:11, 몬1:24참조).
二. 기록한 장소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2년간 전도한 일까지 기록하고 그 후 재판 받은 일이나 재판 받은 후의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三. 기록한 연대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던 2년간으로 보아 주후 62년경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장
제 1 장 성령 받을 준비
(대 지)
一. 서언(序言)(1-2)
二. 주님의 분부(3-8)
三. 승천과 재림의 약속(9-11)
四. 기도에 전력을 다함(12-14)
五. 유다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 해결(15-20)
六. 사도 보충(21-26)
(본문 강해)
一. 서언(序言)(1-2)
. 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데오빌로 본서는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누가 복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낸다고 하였다. "각하"라는 칭호를 보면 데오빌로가 어떤 개인의 이름이며, 그가 높은 관직에 있었던 것 같다(총독 이상을 각하라 하였다고 함). 그러므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을 먼저 써 보내었고 두 번째로 사도행전을 써 보낸 것이다.
먼저 쓴 글 이것은 누가복음을 말한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시며 복음 전파하신 것을 처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기록한 것이다.
二. 주님의 분부(3-8)
.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해 받으신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친히 부활하신 몸을 많은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사십 일 동안 많은 증거로 자신이 부활하신 것을 나타내 보여 주셨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증거 하셨다.
.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셔서 저희에게 분부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 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 때에는 아무 곳에서나 기도하면 안되고 예루살렘에서 기도하여야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 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이다(요15:26, 16:7, 14:16, 눅24:49 참조).
그 당시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이므로 보혜사 성령이 오시지 않았었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 첫번 오순절날에 강림하셨다. 지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도 보혜사 성령이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전에도 성령님이 세상에 계셨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셨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에도 성령으로 한 것이다. 마리아에게 성령이 충만하였고(눅1:34-35), 세례요한(마3:1-12), 엘리사벳(눅1:41), 사가랴(눅1:67), 시므온(눅2:27), 안나(눅2:38)와 같은 사람에게도 성령이 함께 하였다. 그러나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보혜사 성령인데 대언자의 직책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기도하면 주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므로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이 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①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누가 24:47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②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하여야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 간절한 기도를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잡아죽인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다 있고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어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간절한 기도를 하라고 하여도 하지 않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급한 환경에 빠뜨려서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신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죽게 되고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환경에 빠뜨려 놓아야만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하지 않던 사람도 이러한 환경 속에 빠뜨려 놓으면 결사적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아도 6.25사변 전에는 간절한 기도를 그다지 많이 하지 못하였으나 6.25때에 죽을 지경을 당하여 참으로 간절한 기도를 하였다.
평소에 새벽기도를 하지 않던 사람도 어떤 위급한 일이 생기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참된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③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려는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환난을 이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였다.
④ 하나님께 생명을 바쳐 놓고 헌신하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생활을 하려면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 놓고 헌신 봉사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할 때에는 그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 놓고 기도하게 되고 앞으로도 하나님께 생명을 바쳐서 봉사할 수 있게 된다.
⊙ 당시 예루살렘의 상황은 어떠한 상황이었나?
㉠ 예루살렘은 사단의 위가 득세한 곳이다. 마귀의 세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곳이다.
㉡ 예루살렘은 어두움의 세계요, 빛이 없는 세계이었다. 요한 11:9-10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잡히실 때부터 어두움의 권세가 시작이 되어 이때까지 계속되었다.
㉢ 예수 믿는 자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곳이다. 예수님을 잡아 죽였을 뿐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도 잡아죽이려고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숨어서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때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은 기독교 박멸 운동이 한창 전개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어 있는 그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신앙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는 목적
㉠ 생명을 내어놓고 말씀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생명을 내어놓아야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킬 수 있고, 내어놓지 않으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을 내어놓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빌2:8참조). 바울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행21:13 참조).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가다가 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다. 하나님의 명령은 니느웨로 가라고 하였으나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가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나가면 요나와 같이 풍파가 일어나고, 모든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며 마지막에는 환난의 바다에 빠져 징계의 채찍을 맞게 된다.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사망이요, 그 말씀을 귀히 여겨 순종하면 생명을 얻는다.
그러므로 말씀을 생명과 바꾸어 가질 수 있는지 시험하여 능력을 주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육신의 생명보다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그 말씀을 떠나지 않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성도에게 허락하신다(신13:1-3, 8:2-3 참조). 성도가 평안할 때는 잘 믿는 것 같고 성경 말씀을 잘 지키는 것 같으나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성경 말씀을 헌 신짝처럼 내어버리는 사람이 많이 있다. 제자들이 시험을 치러서 생명보다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말씀을 떠나지 않으면 제자의 자격이 있고 예수님의 증인의 자격이 있다. 그 자격을 만들려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 하나님의 능력을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의 생명보다 귀히 여겨야 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은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생명이므로 능력의 사람이 되도록 힘은 써야 한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있어야 그 능력을 사모하게 되고 그 능력을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는 자리에 들어 갈 수 있다. 바울은 살전1:5 에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복음을 말로만 전해도 안되고 말로만 믿어도 안 된다.
능력과 성령으로 전하여야 한다. 교역자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서 영적 생명의 역사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역자가 설교집이나 사다 보고 말로만 전하면 교인들의 영혼이 살지 못한다. 능력과 성령(영권)이 아니면 교인들의 생명을 살려내지 못한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과 능력으로 전하여 줄 때에 성도들의 영혼이 힘을 얻어 일어선다. 예배드릴 때에 교역자를 통하여 나오는 능력이 신자들의 영혼을 움직여 영이 새 힘을 얻어 야 한다. 이러한 교역자가 되려면 기도를 많이 하고 영권이 입혀지기를 사모하여야 한다. 영권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많은 기도와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 많은 시련과 인내를 이루어 나가야 조금씩 얻어지는 것이다.
㉢ 생명을 내어놓고 사명을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생명이 위험한 곳에서는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나아가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다.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의 사명을 귀히 여기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자기 생명을 더 귀중히 여기면 예루살렘을 떠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의 사명을 더 중히 여겨 생명을 내어놓고 나가는 훈련을 받게 한 것이다.
㉣ 자기 위치를 떠나지 않고 지키게 하기 위해서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세워 놓은 각자 자기의 위치가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위치에서 생명을 내어놓고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예루살렘에 있으라"고 하면 예루살렘에 있어야 하고 "감옥에 있으라"고 하면 감옥에 있어야 한다. 성도가 자기의 위치를 떠나면 안 된다. 천사가 자기의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마귀가 된 것이다. 천사로서의 위치가 따로 있는데 교만하여져서 자기 위치보다 더 올라가려고 하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유1:6참조). 교인은 교인의 자리를 지켜야 되고, 집사나 장로들은 집사나 장로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전도사는 전도사의 위치를 지키고, 목사는 목사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목사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며 선후배의 위치가 있다. 가정에서도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위치가 있고, 아들과 손자의 위치가 다르다.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자기 위치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가 오고 고난이 와도 하나님이 세워 놓은 자기 위치에서 탈선하면 안 된다. 자기 위치보다 넘어가지도 말고 뒤로 물러서지도 말아야 한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에는 자기 위치를 지키다가 자기에게 불리하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은 절도요 강도들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려면 환난을 겪고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 첫번 오순절 날 보혜사 성령이 오셨고, 그 성령이 신약 교회 시대에 계속 역사하여 우리를 믿게 하시고 우리 속에 내주하여 계시고 계속하여 감동을 시키고 계신다. 그런데 성도가 성령의 능력을 입지 못하는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를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전3:16, 빌2:13 참조). 요한일서 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였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계속하여 감동을 시키고 또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다(롬8:26 참조). 열광적으로 손뼉을 치고 육신의 감정을 흥분시켜 얻는 감동은 외부적인 감동이며 감정적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는 것은 영혼이 자라나서 거기에서 역사하는 능력이다. 참된 능력은 영혼이 자라나면서 입혀지고, 능력이 입혀지면서 영혼이 자라나는 것이다.
.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①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지는 것을 가리킨다(눅24:49 참조).
② 세례는 정결케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운동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말씀대로 점점 깨끗하여져 나가는 운동이 성령의 세례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시고 우리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들어 나가는 일이 곧 성령의 세례이다.
③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일이다.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정결함을 입어 나가야 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면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눅19:11 참조). 또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눅24:21 참조). 그러므로 요한의 형제는 자기 어머니를 내세워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원운동을 하면서도 아직 민족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구원운동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 나가는 것으로 알았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운동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믿기는 하지만 지상적인 나라와 혼동하고 있었다. 영적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지상적이고 이스라엘 중심의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신령한 나라와 이 세상나라를 혼동하며 영적인 구원과 육체적인 구원을 혼동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다. "하늘나라"와 "구원"을 믿고 있지마는 세상나라와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유브라데강(교회와 세상과의 경계선)이 말랐기 때문에 하늘나라 운동과 세상운동이 혼동되고 영적 운동과 육적 운동을 혼동하고 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하늘나라를 자기들만의 하늘나라로 생각하는 편협하고 파당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생각에 빠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면 인정을 하지 않았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따져보고 이방 사람이면 낮추어 보고, 같이 먹다가도 슬그머니 돌아앉았다.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하늘 나라를 바라보고 구원역사에 참여하고 있으나 아직도 자기네 중심의 하늘나라, 자기 교파 중심의 구원운동, 또 자기민족 중심의 구원운동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느 시대나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참된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으며 그 완성의 때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마24:36참조).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님이 영광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는 날 완성된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는 아버지의 권한에만 속한 것이고 아들에게도 그것을 알게 해 주지 않았다. 아들도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날은 예수님도 알지 못한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여 물어보았으나 예수님의 답변은 바른 답변을 해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운동으로 이 세상에서 신령한 하늘나라가 이루어져 나가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완성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이스라엘 회복을 바라고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의 답변은 영적 이스라엘과 하늘나라에 대하여 답변하여 주셨다. 제자들은 가끔 잘못된 질문을 할 때가 있었으나 예수님은 언제나 바른 답변을 해 주셨다.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주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내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잘못 구할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3)고 바른 답변을 해 주셨다.
.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고전2:4-5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능력과 성령으로 전했다(살전1:5 참조).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전4:20참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복음의 빛은 가까운 데부터 비취어 나가게 되어 있다. 등불을 켜면 집안 사람에게 먼저 비치게 되는 것이다(마5:15 참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부활하셨으니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나가야 한다(눅24:47 참조). 그 다음에는 가까운 유대와 사마리아에 전파하고 나중에는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것이다. 이 복음은 이기고 또 이겨 전 세계 땅 끝까지 전파되게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증인이 되리라 성도는 말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행동과 인격으로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나라 회복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하여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또 그리스도의 증인은 자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빌1:20 참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15:14-16)고 하였다. 이것이 곧 증인이 되는 생활이다. 성도를 통해서 예수 믿는 향기가 퍼져 나가야 한다(고후2:15 참조). 말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또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여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생활이다. 살든지 죽든지 자기에게서 그리스도가 높아지고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존귀하여지도록 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요 금생과 내세에 많은 복을 받는다.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여지는 생활을 하면 자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가 과거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지 못하고 마귀의 냄새(썩은 냄새)를 피우던 것과 우리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여지지 못하고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게 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로마2:24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 때문에 모독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잘 되고 하늘나라에서도 복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복에서 떠나고 도리어 저주와 앙화 속에 들어간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있지만 자기 몸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팥죽 한 그릇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의 축복이 야곱에게로 돌아갔다.
술을 마시고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을 집사나 장로로 세우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복음의 문이 막힌다. 그러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점점 타락한다. 일반 신자도 이러한 행동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 지겠는데 집사와 장로가 그렇게 하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 지겠는가 ! 오늘날 교회들이 사람 많이 모으는 데만 급급하여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도 마구 직분을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교회가 타락되어 간다.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도록 해나가는 생활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 진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반대로 아무리 손해가 나고 괴로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복음전도에 유익이 된다면 하여야 한다.
三. 승천과 재림의 약속(9-11)
.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이 구름은 실제의 구름이다. 하나님께서 실제의 구름으로 예수님을 가리워서 보이지 않도록 역사하셨다. 이 구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또 이 구름이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영광의 구름을 타고 오신다.
. 1:10-11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흰옷 입은 두 사람은 천사를 가리킨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두 천사가 예수님을 호위한 것이다. 이 천사가 증거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해 주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갈릴리 지방은 비천한 지방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만 갈릴리라 하면 알아주지 않는 곳이다.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여 우월감이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천한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것을 늘 잊지 말고 겸손하도록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산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교회를 훼방하고 핍박하였으며 스데반을 잡아죽일 때 동참한 것을 언제나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다고 말했다(딤전1:13 참조). 누구나 교만하여지면 망한다. 우쭐하여 "나다"하면 벌써 망한 것이다. 언제나 겸손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지 못할 줄 알고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야 한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①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② 눈으로 보이는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으므로 또 눈으로 보이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③ 육신의 눈으로 보이게 올라가셨으니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재림하실 것이다. ④ 신령한 몸으로 올라가셨으니 신령한 몸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이 네 가지 사실이 맞지 않으면 예수님의 재림을 잘못 깨달은 것이다. 요즈음 예수님이 이미 재림했다고 미혹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온 것도 아니요, 육신의 눈으로 보이게 하늘로서 온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재림 예수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이 네 가지 사실이 맞지 않으면 거짓 그리스도요 적그리스도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이시요 그리스도는 그의 영광의 아들이시다.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기를 예수라 하는 것은 참람되고 악독한 마귀 놀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데, 죄인이 어떻게 자기를 하나님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는 성도가 영적으로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권능이 입혀지기를 기다려 영적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미혹에 빠지면 권능에 참여할 수가 없다.
四. 기도에 전력을 다함(12-14)
.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 (눅19:29 참조). 누가 24:50-51에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올리우셨다고 하였다. 이 두 곳은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감람산 남쪽 기슭에 베다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므로 모든 것이 끝났다 하지 아니하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기도하기를 힘쓴 것을 보면 희망이 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결사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 그 당시에는 안식일에 먼길을 가지 못하도록 규례로 정해져 있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도 갈 수 있는 길이었다.
. 1:13-14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저희 유하는 다락은 마가요한의 다락방이다. 마가요한의 다락방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성찬예식을 거행하시던 방이다(눅22:12 참조). 제자들도 마가요한의 다락방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사도 시대에는 개인의 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한 예가 많다(몬1:1-2, 고전16:19, 골4:15 참조). 전도하여 교인들이 생기면 적당한 가정집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자기집 다락방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하면 참으로 귀한 일이다. 마가요한의 가정이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바치는 생활을 하므로 마가요한이 복을 많이 받았다. 하나님 앞에 바친 사람은 자신과 그 자손이 많은 복을 받는다.
딤후4:11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하였다. 바울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마가요한이 유익한 존재라고 하였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요한의 형), 안드레(베드로 동생),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열심당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룟유다가 아님)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칼빈은 이 여자들을 "사도들의 부인이다"라고 하였으나(주. 칼빈 저 사도행전 I p53 신교출판사) 근거가 없다. 이 여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이다(마27:55-56, 눅24:10 참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데 항상 선봉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곳에 갔었고 예수님의 무덤에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찾아갔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여자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120명과 더불어 같이 기도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우상화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으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마태13:55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형제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 한 분만 낳고 동정을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제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전심으로 기도했다. 제자들은 기도를 안할래야 안 할 수 없고 힘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잡아죽인 무리들이 예수교를 박멸하려고 성도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살벌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생명을 내어놓고 힘써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결사적인 기도를 시키려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이 많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 참된 기도를 하게 하여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이 올 때에 넘어지지 말고 기도로 이겨 나가야 한다.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는 말은 기도를 전문적으로 했다는 뜻이다. 평소에도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특별히 기도해야 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더욱 힘써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써 기도해야 할 처지에 놓였으면 다른 일은 제쳐놓고 힘써 기도해야 한다. 힘써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지게 된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기도에서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까지 열흘 동안 힘써 기도하였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시험이 많이 있었겠지만 제자들이 잘 참고 끝까지 기도했다. 참고 끝까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주간 동안 작정하고 산에 기도하러 가면 도중에 집에 돌아가야 할 만한 일이 생긴다. 무슨 급한 소식이 오기도 하고, 기도가 전혀 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할 때에도 기한 전에는 기도를 중단하고 돌아가면 안 된다. 끝까지 기한을 채워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한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입히워지는 정도가 다르다. 성도들이 시간이 없어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것은 다른 일에 시간을 다 빼앗겼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시간을 첫째로 생각하면 기도할 시간이 많다. 초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기도할 시간이 많다. 또 저녁에 일찍 집에 돌아와서 기도해도 된다. 밤늦게까지 T.V 구경하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다니엘은 다리오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이 내려 졌음을 알고도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다니엘이 생명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기도를 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마귀는 성도에게서 다른 것보다도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이용도 목사 서간집에 보면 "마귀는 우리의 신앙이나 열심을 빼앗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다만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으면 신앙도 열심도 봉사도 다 빼앗은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마귀를 이길 수 없다(막9:29 참조).
五. 유다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 해결(15-20)
. 1:15-17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 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은 일에 대하여 문제가 생겼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예수님은 왜 가룟 유다를 제자로 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마음속에 의심이 들어오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오면 기도가 잘 안 된다. 그러할 때에는 성경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베드로가 일어나 가룟 유다의 사건이 성경대로 되었다고 증거했다.
. 1:18-19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차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예수님을 배반하고 무죄한 피를 판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으려고 나무에 매달렸다가 끈이 끊어져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 나와 비참하게 죽었다. 이 일에 대하여 베드로는 시편에 기록한 대로 된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시편69:25에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방해하는 자는 저주받아 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저주를 받아 멸망하게 된 것이 당연하다.
우리 성도들에게 무슨 사건이 생기면 성경대로 해석하고, 성경대로 처리해 나가야 한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제자로 택한 이유는 다음 몇 가지가 있다.
① 교역자 중에도 불택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② 불택자도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이용되는 것을 알게 하려고,
③ 택자와 불택자를 추수 때까지 함께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④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시편 41:9참조).
⑤ 범죄자의 말로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룟 유다는 불택자인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로 택한 것이다. 불택자도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이용하는 것은 비계(日語 :아시바리)와 같은 것이다. 집 지을 때는 비계를 이용해서 건축 재료도 운반하고 작업도 하지만 집을 다 지은 다음에는 그 비계(아시바리)는 치워버린다.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은 것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나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한 것은 사실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에는 돈을 받아 잘 살려고 하였으나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면서 죽었다. 가룟 유다가 목을 매었다가 끈이 끊어져 곤두박질하고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으니 예수님을 팔아먹은 범죄자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하다. 예수님을 팔아먹고 믿음을 팔아먹은 결과는 비참한 것이다. 교회를 팔아먹고 구원운동에 손해를 주면 가룟 유다처럼 비참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머리요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교회에 손해를 주면 예수님께 손해를 준 것이 되고, 교회를 팔아먹으면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 된다. 예수님을 팔아먹고 구원운동에 손해를 주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된다.
. 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예수님을 팔아먹고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방해한 자는 그 집이 저주를 받아서 망하게 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예수님을 잡아죽이는데 동참했기 때문에 유다의 집이 저주를 받아서 망하게 되었다. 구원운동을 방해하면 저주를 받아 반드시 그 집이 망하게 된다.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유다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에게 손해 주고 교회에 손해를 준 사람은 하나님이 그 직분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신다. 교역자가 교회에 손해를 주게 되면 하나님이 그 종을 쓰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역자가 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고 쫓겨나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절대로 손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역자가 교인들에게 배척받으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 우리 성도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교회에 손해 줄까봐 벌벌 떨어야 한다. 자기가 낮아지고 멸시를 받더라도 교회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구원운동에 손해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六. 사도 보충(21-26)
. 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가룟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 두 사도 중에 하나가 결원이 생겼다. 열 두 사도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원만하게 되어 나가겠으므로 한 사도를 보충시켜야 한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의 수를 충족하게 세워 나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 것이다. 자기의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기도하여야 한다. 자기의 할 일을 안하고 기도만 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 진리를 세워 나가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있어서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사도를 보충하는데 있어서 첫째 조건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한 때부터 예수님과 항상 같이 다니면서 배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진리를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은 나가서 바른 증거를 할 수 없다. 진리를 많이 배우고 제대로 배운 사람을 선택하기 위하여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까지 따라다닌 사람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요한의 세례는 준비과정이고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배운 것은 본 과정을 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준비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깨달은 사람이 제자의 자격이 있다.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교역자 중에서 잘못된 길로 탈선된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은 대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배운 것이 없으므로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된다.
.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 보충에 있어서 둘째 조건은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닌 사람 즉 충성된 사람이라야 한다. 다니고 싶을 때는 다니고 그만두고 싶을 때는 그만두는 사람은 안 된다. 시종일관 충성되고 덕이 있는 사람이어야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다. 셋째 조건은 우리로 더불어 다닌 사람 즉 협동 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하려면 더불어 정신이 있어야 한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같이 협력하는 덕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하여도 자기 혼자서 개인주의로 나가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같이 협력하여 일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있다. 자기만 잘난 줄 알고 독선주의로 나가는 사람은 안 된다.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일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자격이 있다.
. 1: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사도가 될 만한 조건을 갖춘 두 사람을 택하여 제비를 뽑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과 맛디아를 추천하였다. 이 두 사람을 공천하여 놓고 제비를 뽑았다.
. 1:24-26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제비를 뽑기 전에 간단하게 기도를 하였다. 제비를 뽑는 것은 많은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자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자는 것이다.
잠언 16:33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다. 주권과 결정권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어떠한 문제를 투표하여 결정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이 완전한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의 의견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없을 때에 부득이하여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도 제비를 뽑아서 무슨 일을 결정하면 안 된다.
구약시대와 사도 시대에는 표준계시의 한 방법으로 제비를 뽑았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였다. 즉 하나님의 음성, 환상, 꿈, 우림과 둠밈, 비의적 현상, 제비 뽑는 것 등이다. 그러나 표준계시가 사도와 사도의 수종자까지 끝났기 때문에 지금 신약시대에는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이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뜻대로 맛디아를 사도로 보충했다. 사도의 직무 사도의 직무는 봉사직이다. 교회의 직분은 모두 봉사의 직무이다. 목사, 장로, 집사가 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을 맡아 가지고 봉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직분을 맡지 않는 것이 좋다. 교회의 직분은 명예 영광직이 아니다. 집사가 되면 봉사를 잘하고 집사가 안되면 봉사를 잘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모든 성도는 직분을 맡았거나 맡지 않았거나 봉사를 잘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는 더욱 충성스럽게 봉사를 잘하여야 한다. 맛디아는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한 자이다. 원 사도 (12사도)에는 맛디아 대신 바울이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서 보내신 자이기 때문이다. 맛디아는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고 간접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 보낸 사람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의 할 바를 바로 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힘써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고, 큰 권능이 입혀졌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생활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 생활을 바로 하는 법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권능을 입어야 증인이 될 수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증인노릇을 바로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다. 성도가 말로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자기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나가야 한다. 비록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지라도 거기서 믿음을 지켜야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유다는 이 일을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유다가 지옥으로 갔다고 하지 않고 제 곳으로 갔다고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3년간 있었으므로 내세에 대한 결정권은 하나님께 맡기고 인간이 판단하려 하지 않음이다.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가룟 유다가 없어졌으므로 열 한 사도였으나 맛디아가 거기 가입하므로 열 두 사도가 되어 결원이 보충되고 충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