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 26, 21 - 30 |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이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당신이 친히 선택한 사랑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사도이면서 배반을 한 그의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마태오, 마르코, 요한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유다는 은밀하게 예수님을 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이미 아셨다. 만약 제자들이 그의 계획을 알았더라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배반적인 거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것은 물론 그 죽음에 이르는 절차까지도 예견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유다의 악행을 알고 계셨으나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도록 권고하신다. 그것은 신적 사랑의 호소였다. 이처럼 하느님은 죄인을 사랑으로 회개하도록 부르신다. |
22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묻기 시작하였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요한 복음 13 장 22 절에서는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의 의아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저마다’의 본래 뜻은 ‘각자가 한 사람씩’이라는 뜻이다. 즉 각자 한 사람씩 확인해 보면서 물어 본 것이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말은 직역을 하면 ‘저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죠?’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질문에는 제자들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있다. 즉 자기가 배반자가 될 수도 있음을 의식하면서 불안해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부지 불식간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이유를 모르고 저마다 세속적인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대접’은 과일이나 어떤 소스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손으로 취식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쓴 채소와 함께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이다.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배반자가 있음을 확인해 주시지만, 그 배신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시지는 않는다.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을 보면 함께 자리한 사람들 각자가 그릇에 손을 넣어 찍어 먹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손을 넣으실 때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사람이 함께 손을 넣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식사 공동체, 가족을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에게 배반당하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나타내고 계신다.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바로 제자들 가운데, 가까운 그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 은 고난받는 종을 노래한 이사야 53 장 7-9 절 또는 다니엘 9 장 26 절과 같은 구절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낼 때 ‘사람의 아들’이라고 강조하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떠나간다’는 예수님은 메시아에 관하여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메시아로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 고난의 길을 가는 것과 그 길을 통과한 후 영광을 받아 아버지께로 간다.’ 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라는 말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라는 뜻이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리스도는 예정된 대로 죽음을 겪게 되겠지만 그를 파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 따라서 유다는 결국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불행’ 은 ‘멸망’을 뜻한다.
유다는 강요당해서 배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한 일이기에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팔아 넘기는 그 사람’ 메시아를 배반하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의 운명이 비참하게 될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하게 여겨 하신 말씀이다.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담적 표현으로 욥기 3 장 2, 10, 11 절에서 발견된다.
배신하여 절망적 운명에 처하는 것보다 차라리 세상 햇빛을 보지 않은 자가 훨씬 좋았겠다는 이 비극적 말씀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의 배반 의지를 실천해 갔다. |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물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유다는 이미 최고의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팔기로 모의하였고, 더욱이 예수님의 회개에 대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양심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위선자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유다는 아마도 자기 혼자서만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의심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 질문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의 질문을 흉내 내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한다.
유다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원문에서는 ‘랍비’로 되어 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지 않고 ‘랍비’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미 유다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사라졌음을 나타낸다. 또한 마태오 복음에서 ‘랍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적대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네가 말했다.’ 이다. 이 말은 네가 배반자라는 것은 너 자신이 더 잘안다. 네가 너의 입으로 한 말 그대로 네가 바로 배반자다. 네가 배반자라는 것을 네 입으로 말했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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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과월절 음식을 거의 다 드셨을 때이다. 과월절 본 식사가 끝나기 전 ‘축복의 잔’ 인 세번째 잔이 비워지기 전으로 추정된다.
과월절 식사 순서를 보면 물에 포도주를 섞어 첫 잔에 부으면, 가장이 이 기념일을 찬양하고 쓴 나물을 초에 적셔 먹는다. 둘째 잔을 마신 뒤 가장 젊은 사람이 이 축제의 의미를 물으면 가장은 어린양의 의미, 누룩 넣지 않는 빵을 먹는 까닭, 쓴 나물을 먹는 이유를 이야기해 준다. 그 다음에 시편 113-114 편 할렐루야를 부른다.
그리고 누룩없는 빵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어린양을 나눠 먹는다. 그리고 세번 째 잔이 주어지는데 이 잔을 ‘축복의 잔’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편 115,1-118,29 을 부른다. 그리고 이어서 네번 째 잔을 돌린다. 그리고 송사와 끝맺는 감사의 기도를 한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것은 이 순서에 의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식사 때에 빵에 대한 축복의 기도를 한 다음에 빵을 떼어서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다.
빵을 떼어내는 것은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고, 그 빵을 받아먹는 것은 주인의 축복기도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의 방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공동체적 친교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관습대로 축복기도를 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받아 먹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빵을 떼어 주면서 ‘내 몸’이라고 하신다. 몸이라는 말은 육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전부를 뜻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것이고, 그 빵을 받아먹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육체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당신 자신을 기억하도록 또 그들을 위해 대속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신다.
빵이 여러 조각을 나눠진 것처럼 예수님의 육신도 찢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의 구원을 과월절 축제와 연관 시켰듯이 그리스도의 백성들도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그분의 권위로 제정된 성찬례와 연결시킬 것이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통해 당신이 주시고자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전달하시고자 하셨다. 그 당시에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거룩한 성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영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주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한복음 6 장 53 절 참조. |
27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과월절 식사의 순서에 따른다면 이 잔은 ‘축복의 잔’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주 식사가 끝나면 찬양 기도를 드리고 포도주를 마셨다. 보통은 각자 잔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의 잔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맺어지는 하느님과의 계약에 참여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나타낸다.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26 절에서는 빵에 대한 축복 기도를 드리셨고, 여기서는 포도주에 대해 축복 기도를 드리고 있다.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처럼 하나의 포도주잔을 돌려서 나누어 마시게 하신다. |
28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죄로 인해서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인간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으로 죄의 노예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구약에서 죄를 용서 받는 방법으로는 대속 제물의 ‘피’였다. 그러나 동물을 통한 대속 제물은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죄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의 완성자로서 당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은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이 말은 예수님의 희생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흘리는’,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며 지금 제정하시는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흘리시게 될 피를 미리 앞당겨서 행하시는 것이다.
‘내 계약의 피다’, ‘계약의 피’라는 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을 때 제물로 바친 수송아지의 피를 가리킨다(탈출기 24, 8).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직후 시나이 산에서 동물의 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많은 죄에 빠져서 계약을 깨뜨렸다. 계약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이 새로운 계약이 바로 ‘신약’이다. 신약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약이다.
그래서 ‘내 계약의 피다’. 라는 말은 지금 성체성사의 포도주는 옛 계약을 폐기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한 예수님의 피라는 뜻이다.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계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
2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내 아버지의 나라’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이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 말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잔치를 하게 될 그날까지 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하느님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뜻한다.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기존 질서와 차원을 달리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진입하려고 하고 있다. |
30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올리브 산의 겟세마니로 간다. 제자들이 부른 찬미가는 시편 115-118 편을 노래했다. 과월절 만찬이 끝난 뒤에 부르는 시편이다.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 산 서쪽 비탈에 위치해 있다. 예수님은 묵상과 기도의 장소이며 동시에 시련과 고통의 장소로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