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世 諱 希敎임희교 선조님(링크)
돈녕부란 조선시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에 대한 사무를 처리하던 관청으로 태종 14년(1414)에 친척간의 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설치된 기관이다.
내용은 영조가 신하를 데리고 돈녕부를 방문하여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면서 서로 화답한 시를 모은 것이다. 먼저 영조가 「今辰此饌從何至/追憶己年予懷深」이라고 시를 내리자 이 시의 운자인 「深」자에 맞추어 왕세손인 후일의 정조가 「春滿法樽邦永/禮成敦府聖思深」으로 화답한다. 이어 신하들이 각기 "官職 人名 進"의 형식으로 운자를 따라 화답하고 있다. 당시 영조와 시로 갱운한 신하들은 다음과 같다. 지돈녕부사 서명응(徐命膺), 병조판서 이경호(李景祜), 병조참판 윤득우(尹得雨), 부총관 윤동석(尹東晳), 행돈녕부도정 이양(李瀁), 행승정원도승지 김구주(金龜柱), 승정원좌승지 임희교(任希敎), 승정원우승지 심이지(沈之), 승정원좌부승지 안겸제(安兼濟), 승정원우부승지 서유린(徐有隣), 승정원동부승지 임정원(林鼎遠), 병조참의 심이지(沈履之), 시강원겸문학 김보순(金普淳), 병조정랑 허유, 병조좌랑 이형필(李衡弼), 병조좌랑 조정상(趙貞相), 시강원설서 박상갑(朴相甲), 승정원주서 이정규(李鼎揆), 승정원가주서 김효진(金孝眞), 예문관대교 이도묵(李度黙), 예문관검열 이정훈(李正薰) 등이다.
형태적인 특징은 연화문양(蓮花紋樣)의 황색표지에 고급스런 외형, 옥색으로 인찰한 쌍변의 테두리와 정성스런 글씨, 영조와 왕세손의 시는 반엽(半葉)에 한 수, 나머지는 반엽에 두 수를 필사한 것 등 내외형상의 형식이 ≪기영관갱운첩≫과 동일하다. 곧 ≪기영관갱운첩≫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있었던 갱운시를 모아 같은 기관에서 정성 들여 필사하여 완성한 책이다.
1770 영조 46 돈녕부 갱운첩
다투어 기원한 큰 복 냇물처럼 흘러오니
爭祈景福川方至 쟁기영복천방지
모두를 포용한 크신 은혜 바다처럼 깊네
咸囿洪恩海共深 함유홍은해공심
승정원 좌승지 신 임희교 갱진
承政院左承旨臣任希敎賡進
賡韻갱운은 갱재가(賡載歌)에서 나온 말인데 임금이 시를 먼저 지으면 신하들이 차례로 임금의 시운에 맞추어 시를 짓는 것이나 그러한 작품을 말합니다.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문고전번역서비스' 도움을 받았습니다.(김민선 번역 김종태 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