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밧#홀로코스트#래지스탕스
니싼월 27일(5월 6일) 홀로코스트 기억일을 앞둔 특집 기고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그가 사람에게 해를 준 것처럼 그대로 그에게 주어져야 한다.” (레 24:20)
“네 눈이 불쌍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 (신 19:20)
나캄은 히브리어로 복수(Revenge)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복수를 위해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단체이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는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학살당한 유대인의 숫자는 무려 6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에 유럽은 나치의 전범들은 전범재판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1, 2차로 진행된 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이는 38명에 불과했습니다.
서독에서만 나치에 종사한 이가 1,320만 명이었는데 이중 기소 350만 명, 재판 없이 풀려난 이들이 250만 명, 4년 뒤 감옥에 수용된 나치의 수는 불과 3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복수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나캄의 이름을 보복조직에 대한 명칭으로 그대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체의 목적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복수이며, 나치 독일, 독일인들에 의해 수많은 유대인의 맞이한 죽음을 똑같이 수많은 독일인의 죽음으로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홀로코스트에 직접 관여한 나치 독일의 관리, 군인뿐 아니라 독일인 자체가 이들의 보복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독일 전역에 남아있는 나치 전범들에게 직접 복수를 행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는 핵심 전범들을 추적해 자살이나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주사액에 석유를 주입해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아주 끔찍한 계획인 ‘플랜A’를 세웁니다.
이것은 독일 5개 도시의 상수원에 독극물을 주입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도 수도 베를린을 비롯해 뮌헨, 뉘른베르크, 함부르크, 바이마르 등 독일인 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합니다.
우리가 몰랐던 ‘나캄’의 역사
나캄의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들이 비밀리에 활동했다는 점, 두 번째는 당시 유럽의 분위기상 나캄의 존재가 퍼지면 또다시 유대인이 탄압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나캄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알려졌다면 다수의 유대인이 이들을 지원해 말 그대로 제2의 피의 전쟁을 유발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자 애썼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한데 나캄의 존재가 알려지고 이들의 플랜A가 성공하면 이스라엘 개국에 국제사회가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도부는 이 계획을 막고자 했습니다.
요세프 하마츠
나캄의 존재와 활동상은 띄엄띄엄 이런저런 책 등을 통해 개략적으로 알려져 왔지만. 전모, 특히 집단 독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50여 년이 지난 1998년, 나캄의 소조 리더였던 요세프 하마츠(Joseph Harmatz)의 회고록 ‘from the Wings; A Long Journey 1940~1960’이 출간되면서부터였습니다. 종전 당시 스무 살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하마츠는 자신이 46년 나치 친위대 집단 독살 작전을 지휘했노라 책에 썼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비영리 국제 유대인 공동체 직업교육프로그램인 ‘월드 ORT’의 유럽지역 사무총장을 지내며 유네스코 등 유엔 기구와 세계 여러 나라 정부ㆍ민간 기관과 협력 사업을 벌여온 유명 인사여서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1998년 옵저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치가 학살한 유대인 숫자와 똑같은) 600만 명의 독일인을 죽이는 거였다. 나는 독일인과 나치가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도 내 생각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향년 91세로 그해 9월 22일 별세하였습니다.
요세프 하마츠는 1925년 1월 23일 리투아니아 로키슈키스(Rokiskis)에서 태어났습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리투아니아가 독일 지배에 들 무렵 가족은 수도 빌니우스로 이주했고, 10대의 요세프는 소련 공산주의 청년정치조직 콤소몰(Komsomol)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가정은 41년 여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풍비박산 났습니다. 소비에트 군대에 입대한 형(43년 전사)을 뺀 온 가족, 즉 그와 동생, 부모는 빌니우스의 유대인 게토에 수용됐습니다.
그는 43년 9월 게토 소개 직전 몇몇 청년들과 함께 하수구를 통해 극적으로 탈출, 수도 남부 루드니키 숲속 코브너의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합니다. 아버지는 게토에서 자살했고, 동생은 학살당했고, 어머니만 노동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종전 후 동생이 숨진 수용소 참상을 전해 듣고 “복수하기 전까지 쉬지 않기로 결심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2차대전 중 가장 참담한 홀로코스트 피해를 당한 곳 중 한 곳이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인데, 유대인 4만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수백 명이었습니다.
전후 하마츠는 생존자를 당시 영국령이던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일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남았습니다. “그 모든 살인과 대량 학살에 대해 우리가 참고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후 많은 악질 전범이 신분을 바꾸거나 절차의 허술함을 틈타 피신했습니다. 사실 연합국으로선 개별 사안들을 일일이 들춰 조사하고 재판하는 것 자체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고, 특히 미국에겐 서둘러 서독 정부를 수습해 냉전의 방패로 내세우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유럽 재건프로그램인 마셜플랜이 가동된 것은 47년 6월이었습니다.
나캄은 프랑스나 영국군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도피한 핵심 전범들을 추적해 자살이나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기도 했고, 병실에 잠입해 주사액에 석유를 주입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살해한 이들의 숫자가 10여 명이라는 설부터 수백 명에 이른다는 설까지 있습니다. 당연히 나캄은 비밀 결사였고 그들은 신분과 활동 일체를 감춘 채 비밀을 공유했고, 전설 같은 소문을 통해서만 제 존재를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런 소문들은 유대인의 민족적 단결과 건국ㆍ시오니즘의 열정을 돋우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나캄의 첫 독일인 대량학살 계획은 뮌헨과 베를린 바이마르 뉘른베르크 함부르크의 5개 도시 상수원에 독극물을 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마츠는 당시 도시의 배ㆍ급수 망 도면을 입수해 독일인 거주지 관로에만 비소를 투입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구체적 실행계획(플랜A)까지 마련해 두고 있었다고 책에 썼습니다. 그 계획은 팔레스타인에서 대량의 비소를 구해 오던 코브너가 프랑스행 선상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불발됐다. 코브너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추진하던 시오니스트 지도부와 협의했고, 48년 초대 대통령이 된 하임 바이츠만의 주선으로 그 약을 구했다는 설이 있지만, 주요 외신은 바이즈만이 ‘플랜B’만 승인했고 저 계획은 알지 못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플랜 B는 뉘른베르크 전범 중에서도 나치 친위대대원 1만 5,000여 명이 수감돼 있던 ‘슈탈라크 13(Stalag 13)’을 겨냥한 작전이었고, 감옥에 있던 코브너 대신 작전을 지휘한 게 하마츠였습니다. 그들은 재소자용 빵 공장에 46년 4월 13일 밤 잠입하여 그림 붓으로 비소와 풀을 섞어 반죽한 독극물을 검은 호밀빵 3,000여 개에 발랐습니다. 그해 4월 20일 자 AP는 미군 주둔군사령부 발표를 인용 “비소가 든 빵을 먹고 전범 수감자 1,900여 명이 중독돼 병원에 후송됐다”라는 뉴스를 내보냈고, 23일 자 뉴욕타임스에는 “2,283명이 중독돼 증상이 심한 207명이 병원에 후송됐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나캄 대원들은 작전 직후 체코와 이탈리아를 거쳐 이스라엘로 피신했습니다.
하마츠는 혼자 남아 유럽과 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의 귀국을 돕다가 50년 이스라엘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60년부터 94년까지 월드 ORT에서 일했다. 은퇴 직전 13년간은 런던 사무총장으로서 유네스코 등 유엔 여러 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독일 등 여러 나라와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습니다.
은퇴 직후인 98년 출간한 그의 자서전은 충격적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회고록 속의 그가 아니라 ‘현재의 그’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드레스덴 폭격 영웅인 ‘바머 해리스의 흉상을 제막(1992)했을 때 나는 무척 기뻤다. 드레스덴 폭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물론 기뻤다. 복수란 바로 그런 거다.” “양심의 가책? 내가 나쁜 놈(bastard)인지 몰라도 가책 같은 건 조금도 없다. 양심의 가책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금세 과거를 잊는 이들)이 느껴야 한다.” “우리는 어벤져스였다. 불행히도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게 안타깝다. (…) 지금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뉘른베르크 검찰은 회고록 출간 직후 그의 테러 혐의를 조사했지만, “특수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 기소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2000년 5월 밝혔습니다.
나캄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라는 텔아비브 야드 바솀(Yad Vashem) 홀로코스트 추모센터 수석 사학자 디나 포라트(Dina Porat)는 인터뷰에서 “끔찍한 비극이 잊히고 있다. 범죄에 온당한 처벌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다른 범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 그들(나캄)이 원한 것은 정의뿐 아니라 세계를 향한 경고였다. 유대인을 다치게 하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라고 말했습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이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 손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2021년 <플랜A> 이름의 영화가 독일과 이스라엘 공동으로 제작, 개봉되었습니다. 감독은 도론 파즈, 요아브 파즈, 주연배우는 오거스트 딜, 실비아 획스, 마이클 알로니가 맡았습니다.
근대적인 법률에서는 일체의 사적인 복수가 금지되고 국가의 배타적인 형벌권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적인 복수는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범죄로서 처벌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혼란의 야기, 기준 산정 과정의 어려움, 그리고 법의 존재가치를 부정의 이유로 사적 복수는허용되지 않습니다.
또한 사적 보복 금지의 역사는 뿌리 깊습니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분노가 ‘부당함에 복수하려는 욕구’인데 부당함은 복수가 아닌 이성적인 교화를 통해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분노와 복수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무익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사상은 중세에 기독교 교리 “원수를 사랑하라”와 합쳐져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글은 원래 <플랜A>라는 독특한 소재의 영화의 평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도 현실 같은 영화, 너무도 영화 같은 현실에 글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나캄에 대하여 가능한 객관적 자료를 모아 옮겨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이웃을 그렇게 잃은 적도 없고, 같은 민족 600만 명이 인간의 손에 학살된 기억도 없는 우리가 이들을 평가하려 했다는 것이 너무도 우매하고 교만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 평가와 판단은 여러 독자분께 맡깁니다.
나캄의 복수는 정당합니까? 아니면 부당합니까?
"여호와의 은총의해를 선포하며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여 애곡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고"(이사야 61:2)
마쉬아흐의 날에 진정한 나캄이 이루어질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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