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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신학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필수불가결한 것이긴 하지만 신성에 강조점을 두는 큰 특징이 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날카롭게 구별하였고, 루터는 위격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이러한 점을 문제 삼아 질문공세를 펼쳤다. 츠빙글리는 루터가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인데도 그리스도로 국한시키고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가둠으로써 하나님을 제한한다고 비판을 하였다.
츠빙글리는 그의 신학적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서 성경 구절을 잘못 해석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면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W. P. 스티븐스의 책을 구분선 아래에서 확인해보자.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지위는 그의 위격, 특별히 그의 신성과 그의 사역, 특히 그의 희생적 죽음과 연관된다. 츠빙글리는 종종 67개 조항의 두 번째 조항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복음의 개요를 제시했는데, 여기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가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요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은 안셀무스(Anselmus)의 것이다.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한 효력이라는 거의 아벨라르(Abelard)주의적인 의견도 있다. 그리스도를 아담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총괄 갱신하는 자로 보려는 이레나이우스(Irenaeus)적인 해석도 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으므로 우리도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와 죽음과 마귀에 대한 승리 혹은 그것들로부터의 자유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지배적인 해석은 안셀무스의 것이다.
츠빙글리는 우리는 죄인들이기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아니 사실은 지킬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에 죄를 그대로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게 하셨다. (Z II 36.25-39.19)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 사역은 그의 자비나 선하심뿐만 아니라 그의 공의와도 연관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택하신다. 그리고 그 공의로우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속죄물로 삼으신 아들을 통해 택자들을 양자로 삼고 자신과 연합시킨다."(Z VI ⅱ. 796.25-30)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신을 화해시키기 위해 선택하신 유일한 방법이며, 화해가 다른 방법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겠는가고 묻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보았다.(Z V 391.20-2; Works ii, 27)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자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츠빙글리는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67개 조항을 설명하면서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완수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희생물이 될 수 있다고 썼다.(Z Il 182.5-13) 베른 설교에서 그는 신성은 수난을 당할 수 없기 때문에 고난 받을 수 있는 인성이 필수적이며, 동시에 아무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만족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다.(Z VI i. 464.5-17)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강조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죄의 흠을 참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인성 역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수단이 되려면 구약성서에서 희생제물이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듯이 순전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이 필수적이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남자의 개입 없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동정녀가 남자의 씨로 잉태했다면, 그것 때문에 출생이 오염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비록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남자를 알았던 여자가 잉태했다면, 누가 그 아이가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으려 했겠는가?(Z III 686.7-28; Works iii. 112)
츠빙글리는 에스겔 44:2("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같은 본문들에 근거하여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역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처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츠빙글리는 우리가 마리아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영예는 그녀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Z I 426.5-427.9)
츠빙글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려는 의식이 강했다. 이것은 이후의 개혁신학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레오의 편지(Tome of Leo)와 칼케돈 공의회의 전통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네스토리우스주의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유티케스(Eutyches)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레오(Leothe Great)의 편지를 칼케돈 공의회에서 추인한 바 있었다. -역자 주) 하지만 츠빙글리는 언제나 본성들의 구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격의 통일성도 주장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본성들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분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자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각 본성의 사역들과 특성들을 혼동하지 않고 올바로 구별하려는 것이다."(S VI i. 311.8-9, 357.15-28)
본성들에 대한 날카로운 구별은 성만찬 이해에서 츠빙글리와 루터의 차이를 초래한 근원적인 이유들 중 하나이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만찬에서 그의 인성으로 임재할 수 없었다. 그의 인성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직 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성만이 모든 곳에 임할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본성들의 구별보다는 위격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루터에게는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곳 어디서든지 그는 신성과 인성 모두로 임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위격은 분열될 것이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논쟁에서 모두 유비를 사용하였다. 츠빙글리는 교부들에게서 두 가지 유비를 받아들였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에서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Cyrilus of Alexandria)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사용된 영과 육의 유비를 선호하였다. 인간은 두 개의 상반된 본질인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분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자 인간인 것과 비슷하다. 그는 또한 (오리게네스와 다마스쿠스의 요한에게서 차용하여) 자르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칼의 유비를 사용하면서, 루터가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유비를 사용하는 데 대해 논박하였다.(루터는 벌겋게 달아오른 칼에 불과 철이라는 두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 빵 둘 다가 함께 현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유비를 사용하였다.) 츠빙글리가 사용한 또 다른 유비는 태양의 유비였다. 태양의 몸체는 한 공간에 있지만 그 빛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러한 유비들로 그는 그리스도의 위격의 통일성과 그의 두 가지 본성의 구별됨을 계속해서 주장하고자 했다.
츠빙글리는 속성들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라는 자신의 견해의 근거를 특히 요한복음에서 찾았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우리가 하나의 본성을 명명하면서 다른 본성으로 이해하거나, 두 본성을 다 거론하면서도 오직 하나만 이해하게 되는" 상황에서 종종 *알로이오시스(alloiosis)라는 수사학적 용어를 사용하였다.(Z V 926.1-3) 츠빙글리는 요한복음 3:13, 6:62, 10:30, 12:25, 28과 같은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이나 신성 둘 중 하나에 적용될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츠빙글리가 주장하는 바가 논쟁 중에 나타난다. 그는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었다"는 구절이 과연 신성과 인성 모두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닌지 답할 것을 루터에게 요구하였다. 만약 루터가 아니라고 답한다면, 알로이오시스가 확증될 것이다. 만약 그가 그렇다고 답한다면, 마리아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되거나, 혹은 그리스도가 두 개의 인성, 즉 아브라함 이전의 인성과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성을 소유한 것이 된다. (Z VI ⅱ. 138.18-139.7)
츠빙글리는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인데도 루터가 하나님을 그리스도에게 국한시키고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가둠으로써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Z V 934.11-936.10) 츠빙글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신성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Z V 700.1-17) 동일한 관심이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신뢰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루터가 이와는 반대로 무한성을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거부하는 바이며, 사실상 창조주보다는 피조물을 신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격이라고 해석하였다.(Z V 687.21-34)
비록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의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루터신학에서와는 달리 츠빙글리의 신학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조점이 우리를 구원하는 신성에 있고, 우리는 바로 그 신성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에 대한 이해는 여러 점에서 간과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자신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기도했고,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다.(S VI i. 480.28; Z III 726.33-7) 하지만 츠빙글리가 아주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을 회상한 경우들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이 항상 중요하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에라스무스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이해(예를 들어 츠빙글리는 본성들의 구별을 강조하고 루터는 위격의 통일성을 강조한다.)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위에 대한 이해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그리스도의 지위에 대한 견해차는 성령과 말씀과 성례에 대한 그들의 교리에 잘 나타나 있다.
* 알로이오시스(alloiosis): 질적 운동 또는 질적 변화
<약어표>
S M. Schuler and J. Schulthess, Huldreich Zwingli's Werke (Aurich, 1828-42).
Works ii W. j. Hinke, The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ii (Philadelphia, 1922; repr as Zwingli on Prividence and Other Essays, Durham, NC, 1983).
Works ⅲ C. N. Heller, The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ⅲ (Philadelphia, 1929; repr. as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Durham, NC, 1981).
Z Huldreich Zwinglis Sämtliche Werke (Berlin, Leipzig, Zurich, 1905- ).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100-105.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실제로 성찬에 임재한다고 하면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의 공재설이 될 수 있는데요. 츠빙글리의 표현과 논리에 다소간의 오류가 있을지라도... 화체설과 공재설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츠빙글리의 그리스도 이해가 성찬에 연장이 된 것이군요.
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의 67개조에도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풍성하게 깊이 생각할 포스팅을 올려주신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공감합니다.
신학은 잘 모르지만 루터보다 츠빙글리가 더 개혁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도 읽고 공부하고 갑니다.
네, 저도 그리 공감합니다.
신성과 인성 중 신성을 더 강조했기 때문에 기념설로 간 것 같고요. 이 포스팅을 통해서 더 깊은 내용을 알게 됩니다.
네, 이전 연재 글들도 잘 살펴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