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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쉬타인이 one top으로 격찬한 책,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출생 : 1821.11.11.
사망 : 1881.02.09.
최제우(崔濟愚, 본명: 최복술崔福述,
출생 : 1824년 12월 18일
사망 : 1864년 4월 15일
조선 시대 말기의 동학의 창시자이자 초대 교조(敎祖)이다. 호(號)는 수운재(水雲齋)·수운(水雲)이다. 경상도 월성 생이고, 본은 경주(慶州).
아인쉬타인이 one top으로 격찬한 책,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브라티야 카라마조비
The Brothers Karamazov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https://youtu.be/uRYg9eNn2Z0?si=KH6X0l2_sdIpbamD
도스토옙스키는 **뇌전증(과거 간질)**을 앓았으며, 그의 작품에 이 증상을 재현하거나 주요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1846년 아버지 사망 이후 첫 발작이 시작되었고 평생 간질 증상을 겪었으며, 특히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뇌전증의 고통이나 심리적 묘사를 통해 현실성을 더했습니다.
발병 시기: 1846년 아버지 사망 이후, 평생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작 증상을 겪었습니다.
작품 속 묘사:
뇌전증 증상을 소설의 소재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백야』의 주인공 '무이시킨' 공작처럼, 간질증이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그의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뇌전증과 관련된 병리학적, 심리적 묘사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뇌전증과 인물 연결: 작품 속 인물들의 고통과 심리를 뇌전증과 연결지어, 간질과 살인, 분신 등 복잡한 문제들을 표현했습니다.
글. 박진석 교수 한양대학교병원 신경과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낭만주의 시대를 지나 제정러시아의 막판,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에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며 <지하 생활자의 수기>, <악령>, <죄와 벌>, <백치>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인류의 걸작을 남겼다. 암울한 현실의 인간을 기록하며 평생을 보낸 그는 뇌전증, 폐 질환으로 투병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측두엽 뇌전증
도스토예프스키의 일생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집필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매우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19세기 낭만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그의 삶을 지배했던 것은 외로움과 고독이었다. 당시의 다른 작가들이 낭만과 러시아의 풍경, 자연 그리고 서사를 이야기 할 때, 그는 일반적인 삶에서 동떨어진 삶을 이야기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반정부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게 되었고, 처형 직전 극적으로 황제의 사면을 받고 얼어붙은 동토 시베리아에서 수년 동안 유형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이후 가족사의 비극,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매일매일 죽음과 같은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 이런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는 외부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지병인 폐 질환과 뇌전증으로 어두운 날이 많았다. 그는 뇌전증 발작의 경험을 ‘이승과의 단절’, ‘저승의 시작’이라 표현하였고, 작품 집필 도중 뇌전증 발작으로 인한 공포감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와 뇌전증 발작으로 인한 공포와 같은 위기의식이 그로 하여금 더욱 작품 활동에 매달리게 한 것이 아닌가 짐작게 한다.
뇌전증의 역사와 치료
뇌전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그리고 로마 시대에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래된 질병이다. 당시에는 신성, 혹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여겼으며 이후 중세 시대에는 뇌의 체액이 빠져가나 발생한다고 여겼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뇌전증은 뇌에서 발병하는 질환이라는 이론이 자리를 잡았으며 전기 이상과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20세기에 와서야 약물적, 수술적 치료가 본격화되었다.
측두엽 뇌전증(Temporal Lobe Epilepsy)은 측두엽에서 기원하는 발작과 관련한 여러가지 상황을 일컫는다. 측두엽 뇌전증은 뇌전증의 일부로 약물난치성 뇌전증 중 흔한 형태로 알려져 있다. 주로 해마(Hippocampus)에서 기원하여 해마경화증(Hippocampal Sclerosis)을 동반하게 되고, 특징적인 증상으로 조짐, 자동증, 정신이상 등의 증상을 보인다. 뇌전증의 증상 중 가장 흔한 주관적 증상은 조짐으로 뱃속에서 치밀어 오는 느낌, 공포감이 엄습하는 느낌 등이 있다. 그 외에 기시감(Deja vu), 이인증(Depersonalization) 등의 증상이 있다. 객관적 증상으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멍하게 응시하는 동작(Motionless Staring), 자동증이 나타난다. 자동증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입맛을 다시거나, 침을 꿀꺽꿀꺽 삼키거나, 혹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하며 행동을 멈추거나 동공이 확대되는 증상도 있을 수 있다.
진단은 뇌파, 뇌자기공명영상(Brain MRI) 그리고 양전자방출촬영(PET) 등이 사용되며 주로 항뇌전증약제로 치료하게 된다. 약제에 대한 반응성은 초기 수 년 동안은 약에 반응하다가 이후 점차 약물에 저항하는 약물 난치성 뇌전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약물에 대한 반응성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좋은 반응을 보이다가 나쁜 경과를 보이는 등 다양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관해(Remission)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또한 약물에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으므로 여러 가지 약제를 시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약물 난치성 뇌전증의 경우 해마, 편도, 해마곁이랑 등을 절제하는 수술적 방법으로 60~80%의 환자에게서 질병의 완화를 기대해 볼 수 있으며, 브레인 MRI가 정상인 경우에도 환자의 병변이 측두엽기원임이 확인되었을 때 수술적 치료로 관해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19세기까지는 뇌전증의 치료가 정립되기 전이었다. 양차대전과 이념의 대립으로 폭풍과 같았던 19~20세기를 지나 인간의 이성과 인공지능을 통한 치료가 가능한 현재, 뇌전증은 더이상 신령이나 악마에 의한 질병이 아니다. 이제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로이 하고 치료와 조절이 가능한 질병임을 인지해 뇌전증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할 때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 Fyodor Dostoevsky
본명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출생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
사망 1881년 2월 9일 (향년 59세)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설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형제자매: 미하일 도스토옙스키, 안드레이 도스토옙스키, Varvara Dostoyevskaya, Vera Dostoyevskaya
영향을 준 인물: 니콜라이 고골, 알렉산드르 푸시킨, 윌리엄 셰익스피어, 미하일 레르몬토프, 찰스 디킨스
■ 거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암
글 :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422호
그의 끔찍한 군사주의·배타주의 사상은 빨갱이 딱지를 떼기 위한 노력이었나
1877년 말,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이 막바지를 향할 무렵이다. 우세한 무기를 갖고 있는 러시아 군대는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비잔틴 제국 시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할 정도로 확실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서구의 금융자본에 의한 착취, 러시아의 끊임없는 남하, 근대화 부진으로 ‘유럽의 병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약해진 터키 제국은, 발칸 지역에 대한 패권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셈이 되었다.
독일인과 손잡고 프랑스를 박살내자?
30여년 뒤에 바로 발칸의 패권 문제가 발단이 되어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줄 알 리 없는 러시아의 보수적 지식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을 그들은 외면한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토론하고 있다. ‘러시아 문명론’을 내놓은 당대 우파의 유명 논객 다닐레프스키(N.Y.Danilevsky)는, 콘스탄티노플을 “러시아를 위시한 모든 동방민족을 위한 자유 도시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꽤 관대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멸시와 러시아의 ‘영성’에 대한 거의 광적인 집착에서 다닐레브스키보다 한수 위인 우파의 저명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1821∼81)는 “그 따위 비열한 타협”이라며 단호하게 반대한다:
“러시아인과 기타 슬라브 민족들이 서로 비교라도 될 만한가? 러시아는 기타 슬라브의 각 민족보다 위대하고,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도 그들보다 위대하다. 거인이 난쟁이들 보고 평등을 설교해봤자 쓸데없는 일 아닌가? 우리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은 영원히 우리만의 도시로 남아야 하고,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지역, 그리고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해협을 지키기 위해 육·해군을 주둔해야 한다”(,1877년 11월 ;러시아어 원본은 http: //www.magister.msk.ru/library/dostoevs/dostdn21.htm 참조)
이 정도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도덕성의 절대성과 인간의 심층적인 심리를 매우 깊숙이 아는 작가’로만 알고 있는 한국의 일반 독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일은 절대로 선(善)이 될 수 없다”는 이념을 기조로 전 세계의 독자를 매료시킨 사람이, 콘스탄티노플을 ‘우리 도시’로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로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야 하는지는 몰랐던 것일까?
위대한 인본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이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에 왜 그토록 열중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더 큰 수수께끼에 맞닥뜨린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짐승 같은’ 터키인들을 쫓아낸 뒤에 “사회주의의 모태가 된 프랑스를 독일인과 함께 손잡아 박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즉 권위주의적인 독일 제국과 함께 사회주의를 허용할 만큼 ‘타락한’ 민주적 프랑스를 멸망시키는 것이 러시아의 ‘민족적 사명’이라는 이야기다.
그 과정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슬람 짐승들과 적그리스도인 사회주의를 예수의 이름으로 이기는 성전(聖戰)”이라고 부른다.
끈질긴 ‘훈육주의’경향
작품 속에서는 ‘생명 존중’을 그토록 강조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자신의 사회 참여적인 잡지에서 이처럼 끔찍한 군사주의적·배타주의적 언어를 썼을까?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농노를 학대하다가 살해당한 가혹하고 속물적인 아버지를 두었고, 군사기술자학교(일종의 사관학교)에서 온갖 집단 괴롭히기를 목격·체험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었을 때부터 악(惡)의 문제에 대해 매서운 성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1840년대)에 그는 초기 사회주의적 성향의 혁명가와 어울려 개혁·혁명을 통한 악의 제거와 인간·사회의 개선을 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젊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구도(求道)를, 제정 러시아 정권은 가혹하게 차단해버렸다.
갑작스러운 체포(1849년)와 사형 선고, 총살 현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영원한 듯한 수십분,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감형(사실 ‘훈육을 위한 연극’이었다.).
그 뒤 4년간 시베리아 감옥살이를 하고 졸병으로 오지에서 4년간 복무한 그에게는 ‘사상범 전과자’라는 빨갱이 딱지가 붙었다.
혁명적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에서 망명을 하거나 혁명에 투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때부터 정반대 길을 가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불온한’ 과거를 애써 부정하고 오히려 반사회주의운동의 선봉에 서는 특별한 ‘충성’을 보인다.
특히 귀족계·황실과 관계가 가까워진 1870년대 후반에 그는 ‘빨갱이 딱지를 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일제 시대의 많은 전향자들처럼 러시아 제국의 국체(國體)인 정교회 신앙과 관제 민족주의로 돌아온 전향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국체 명징(明徵)’- 즉 어용적 이념의 강조·선포- 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전향’ 이후에도 그의 평생 화두인 ‘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민의 형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악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단순한 표피’로 규정한 채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 속의 악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이러한 탐구는 종교를 명분으로 내거는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영혼 속에 악한 본질이 내재돼 있다는, 성악설(性惡說)적인 면모가 짙은 그의 결론은 러시아 국교인 정교회의 교리보다는 고대·중세의 신비주의적 이단인 그노시스교(Gnosticism·靈知敎)에 더 가깝기도 했다.
자신의 ‘온건함’을 입증하려는 욕망에 불탄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
러시아 진보진영으로부터 오랫동안 비웃음을 받아온 최초의 ‘반사회주의적 소설’ 가운데 하나인 을 쓴 1870년대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회와 국가가 없는 한 인간의 악한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 사회가 생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 ‘기독교적 국가’의 광신도였다.
“하나님이 없는 한 모든 것들이 다 허용돼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언은, “하나님의 신앙을 강요·훈육하는 교회와 국가가 없으면 모든 악이 허용돼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체벌과 범죄에 대한 엄벌을 옹호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끈질긴 훈육주의적 경향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악을 억제해주는’ 국가와 교회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제1호 적이었다.
19세기 초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책을 읽었을 뿐, 그 외의 진보운동 관련 소식을 보수적 신문을 통해서만 읽은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억제를 받지 못해 악한 본질이 발전된 적그리스도형 인간’으로 취급했다.
노동자들이 빼앗긴 여유의 자유, 경영 참여와 정치 참여의 자유를 노동자에게 돌려주려는 것이 사회주의의 취지였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배태한 유럽의 문화토양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작가로서의 위대성을 바로보기 위하여
그는 사회주의를 배태한 유럽- 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강한 프랑스- 의 자유주의마저도, ‘하나님의 은근한 부정’으로 규정해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였으면 러시아 제국의 경쟁자인 터키 같은 비유럽 국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인간의 악한 본질을 억제하는 구세(救世)의 위업(偉業)’으로서 가장 ‘건전한’- 즉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러시아와 독일의 세계 제패는 그의 열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1877년 11월호에서 러시아 육·해군에 대한 애착과 관심의 비결은 바로 이 같은 세계관과 욕망의 구조였다.
이념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광적인 수구주의로 기울어졌다고 해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천부적 재능에 고생과 고민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외부로부터의 훈육’에 대한 기대 심리, 국가 권력에 대한 거의 맹목적 시각 등을 바로 이해해야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거인의 명암을 다 아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거인에 대한 존중이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