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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하나님이 아닌 자들(갈4:8)
1. 우상숭배(롬1:23)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좌우된다.
사람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부지불식간에 그의 마음에 틈타서 반드시 그의 행동의 방향과 그의 가치관을 결정짓고 만다.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
진정 무엇을 최우선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은 결정될 것이다.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찾지 않고 언제나 세상 적이고 쾌락적인 것을 찾으며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꾸미고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세상적인 것을 자기 생의 제일로 삼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쫓아가면서, 꼭 힘을 합쳐야 될 상황에서 거리를 핑계된다는 것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음을 잘 증명해준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곧 사라질 부귀와 영화를 위하여 모든 힘을 다 기울이고 있고 차지한 세상적인 권력과 재물을 자랑하며 섬기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길인지도 모르고 말인 것이다.
땅위에 사는 동안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육체가 필요로 하는 필수품을 구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영적 축복이다.
영적축복을 도외시한 채 육적 필요만 구한다면, 그는 결국 영적패망을 보고 말 것이다.
오늘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중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세상은 사람의 존재 여부를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의 세계로 양분하여 한발은 이 땅, 한 발은 저 땅을 디디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처세술을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안일한 생존이 최상의 행복인양 몸을 사리기만하며 보다 숭고한 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조소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부지기수이다.
이와 같이 현대를 사는 신앙인에게는 종교적 측면의 일관성, 통일성 문제는 사뭇 심각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만치 현대의 삶은 제각기 분리된 여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제각기 다른 가치와 자율성을 지닌 채 돌아가는 삶의 모든 부분은 일종의 분열증적 삶을 강요 한다.
즉 신앙생활 따로 사회생활 따로 하는 식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분열된 마음으로 경배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것은 어떤 때는 신앙인으로 어떤 때는 사단의 종으로 변신을 자유자재로 하여 영적 위안과 세상 적 쾌락을 동시에 추구하는 그야말로 간음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마음 관리는 신앙생활 전체를 좌우한다.
땅에 마음을 빼앗기면 영적 간음이란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마음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긴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가 주저주저하면서 마음의 절반만을 주님께 드릴 때 그 나머지 절반은 마귀의 차지가 된다.
마귀는 이러한 절반의 마음을 보면 흐뭇해하면서 얼른 덤벼들 것이다.
무서운 것은 우리가 마귀에게 1센티만 내어주어도 마귀는 곧 1마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온다는 사실이다.
혹 자신이 소유한 어떤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해드리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주의하라.
당신은 끊임없이 마귀의 침략을 받을 것이며 어느새 그에게 끌려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좇는 자기 중심주의적 세속 주의적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회복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신앙은 성도의 생활에서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전 생활이 곧 신앙의 전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어떤 영역의 삶에서든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이란, 제 아무리 복잡다단한 형태의 삶에 놓였더라도 자신의 전 존재를 갖고서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이 두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다만 단 하나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마6:24) 하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사단의 지배 아래서 결코 참다운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중에서 양자택일하는 상황마저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비록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눈물을 감수해야 할지라도 항상 곁에 계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안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인만이 가지는 비밀스런 힘이며 기쁨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타협하는 삶과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신앙의 삶 중에 어느 것이 진정 지혜로운 삶일까?
얼핏 보기엔 전자의 삶이 안녕과 행복의 삶인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결국 더 큰 범죄로 나아가 굴욕적인 결말을 약속해 줄 뿐이다.
반면, 후자의 삶은 처음에는 모진 핍박과 험난한 길이지만 후에는 영원한 영광과 상급이 보장된 삶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자신을 돌아보면 신앙과 세속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적당히 살려는 비겁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편안한 현실에 안주해 있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평탄하고 수월한 삶을 즐기려 하는, 우리 자신들의 안일함을 돌이켜 보게 된다.
오직 자기의 소욕을 따라 그저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고 신앙적인 투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이 왜 그리 커 보이는지, 세상을 두렵게 생각하고 환경의 어려움을 지나치게 고려한다.
이렇게 성도가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얻으려 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상의 눈은 높은 곳에 두되, 허황된 욕심은 저 아래로 떨쳐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상보다 현실을 선택하고 있는데, 이런 신앙은 현세의 안락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해 버리기 마련이다.
이들의 생각이나 이상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만 자신의 발은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욕망의 수렁 속에 빠져 한 발작도 움직이지 못한다.
현실의 안락에서 박차고 일어나 앞을 향해 뛰어나가지 않고 달리는 것은 제자리 뛰기에 불과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이름을 오용해 자신의 현세적 만족과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극단적인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 같지 아니한 방식으로 현실과 직면해야 하는 신앙인은, 현실을 떠나 살 수도 없지만 현실에 영합해서도 옳지 못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적당히라는 말에 매력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신앙과 세상을 적당히 혼합하여 산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현대인의 처세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교묘한 사단의 생각에 미혹된 불쌍한 사람이고 이미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가련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결코 세상과 타협될 수 없다.
한발은 세상에, 그리고 다른 한발은 주님께 내딛고 적당히 눈치만 살피는 기회주의자들을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신다.
우리가 이처럼 죄와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채찍과 연단의 풀무를 사용하여 징계하시는 것이다.
신앙에는 적당이란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언제나 죄악의 땅을 완전히 떠나야 하는 냉엄한 결단이 요구되는 자리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을 사모하는 귀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되 종속되지 아니하고, 진리로 세상을 극복하는 진취적 신앙을 늘 유지 한다.
그렇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여 세상과 타협 한다면 이는 하늘에 속한자의 신분에 맞지 않는 것이며, 두 마음을 품은자로서 심판 받아 마땅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이란 불의한 세력에 안주하지 말고 독수리가 날개치고 날아가듯, 살아있는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세상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나아갈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되 세상에 결코 종속되지 않고 진리로 세상을 극복하는 진취적 신앙을 지향해야 하겠다.
사람은 안일할 때에 가장 죄의 유혹을 받기 쉽다.
대개 미혹에 빠지게 되는 자들의 마음에는 욕심과 탐심이 감춰져 있게 마련이다.
마치 세균의 감염은 깨끗지 못한 부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듯 말이다.
믿음이 떨어지면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에서 변화되는 것을 주저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현세적인 즐거움이나 쾌락 등을 놓치기 싫어하는 데서 온 것이다.
바로 그것들이 그들의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진정 당신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죄악 된 세상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혹시 당신 안에 숨겨진 우상이 당신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내가 언제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을 하였냐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 이유는 우상들이 오늘에 와서 교묘하게 자기를 변장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나무토막이나 돌덩이만이 아니다.
저것이 우상이다.라는 확실한 형상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지금의 성도들에게는, 우상숭배에 관하여 고민을 한다는 것이 전혀 비현실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 내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구나.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십계명 중에서 첫째로 하나님께 관한 계명1-4계명 모두를 범하는 범죄이다.
고대에 사람들은 자연을 숭배했지만, 현대의 사람들은 사람 자신을 숭배하고, 옛날에는 보이는 형체를 섬기는 우상으로 망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사람의 힘을 믿는 우상으로 망한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속을 꼽아야 할 것인데,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이다.
이와 같이 눈, 앞에 있는 신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우상이 있으면 그것도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고 실망시키는 것이다.
우상숭배란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집착하는 것’ 무엇이든지 간에 네 마음이 쏠려 있고 의지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 우상이다.
어떤 사람이 현재의 직업이나 어느 세속적인 것에 자기 삶의 비중을 가장 많이 둘 때, 그것이 곧 그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마10:34-39) 부모, 자식, 등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일반적으로 명성, 힘, 세상적인 성공, 등을 우상으로 열거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음주, 호색, 남을 비판하는 것, 분노와 자만,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것 등도 우리가 추방해야 할 우상들이다.
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황금만능주의 출세제일주의 극단적 이기주의등도 우상숭배나 다름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중 어느 것에라도 신성을 부여하고 또 어떤 영적인 지도와 계시, 신적 권위가 있는 줄 알면 그것이 불신앙이고 우상이다.
만약 우리들이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신은 어떤 신이든지 간에 오래 가지 않아 우리에게 파멸을 안겨 줄 것이다.
물질주의적 사고와 쾌락주의적 물결이 범람한 세상 속에, 사단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멸하게 하고 부지중에 모독하도록 간교한 책략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진리를 가장하여 생존이란 차원을 이용해 접근하는 사단을 분별해야만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한 우상이었다.
또한 돈은 유사하나님으로서 사람에게 숭배를 강요한다.
돈은 사람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고, 신앙과 사랑의 대상으로 존재하려고 한다.
돈은 무한한 기쁨과 가능성을 약속하며 끊임없이 추구의 대상으로 등장하여 사람의 최고선이 되려고 하나님께 도전한다.
이러한 힘을 소유한 가짜 하나님으로 행세하려는 돈은, 또한 익명성과 비밀성의 특징을 지닌다.
그러므로 돈은 다른 소유물들에 비해 자신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위장할 수 있다.
돈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고상함을 유지할 수 없으며, 돈의 차가움 앞에는 무차별적으로 객관화 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대로 돈은 단순한 중립적인 대상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소유한 사단의 도구로 변신할 수 있다.
돈은 타락한 세상과 사람 속에 무한한 욕망을 촉발시킴으로써, 사단이 추구하는 세상의 혼돈과 왜곡을 무한정으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돈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신앙을 통하여 물질의 우상화를 극복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실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욱 신뢰하는 것은 가증한 행위요, 변형된 우상숭배이다.
성직자들과 성도들 사이에 만연된 배금주의를 단연코 물리쳐야 할 것이, 재물은 단순한 경제적 효용가치가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띤 우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머무는 동안 재물을 주인으로 섬길 것이냐 예수를 주인으로 섬길 것이냐 하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성경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므로 이 두 가지를 겸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신다.
건강, 학식, 명예, 부, 쾌락, 등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고 빠져 버린 우상에게서 우리가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그에게 지고 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참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타락시키고 마침내 멸망시키는 악령과 사귀게 하는 이중적인 악이다.
그분께 돌려야 할 마땅한 영광을 도리어 허탄한 피조물에게로 돌리는 것이 곧 우상숭배 행위이다.
따라서 사람의 행위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이 여기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러기에 개인이거나 교회거나 할 것 없이 개혁에는 우상숭배의 척결이 필수적인 일이다.
우상숭배 죄와 같은 배은망덕하고 가증스러운 죄악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철저히 징벌되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될 수 있다.
오늘날 금, 권력, 정욕, 명예욕. 탐욕의 우상숭배 등은 인류의 정신을 가장 크게 병들도록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금, 은과 같은 보물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구원 진리와 지혜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실로 하늘의 참된 보화에 비하면 세상의 것은 아무리 진귀한 것이더라도 비교할 것이 못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우리는 세상의 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그 위에다 하늘의 것을 더 받으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죄에 속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 죄로 인하여 장래에 임할 형벌에 대해서는 듣기를 원치 않는다.
이로써 그들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결코 도망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 이외의 우상에게 마음을 쏟을 때 당신의 그 거룩한 속성상 질투하신다.
(요일5:4, 갈5:16-17)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은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
아무리 몇 백 년 동안 지켜온 전통이라 할지라도 반 신앙적 악습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히 제거하고, 또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매개체라 할지라도 그것이 숭배의 대상이 되면 가차 없이 없애야 한다.
하늘의 참된 보화를 얻으려면 먼저 세상의 보배 따위는 지푸라기처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손에 든 것을 먼저 버리지 않으면 다른 귀중한 것을 받을 수가 없다.
여러분이 버려야 할 우상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물질, 명예나, 지위에 대한 탐욕, 혹 자신에 대한 자만, 이러한 것은 과감히 포기하여 버림으로 위대한 개혁자의 자질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먼저 자기 안에서부터 이러한 우상을 척결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