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인들이 헌법을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비판한 책. 미국과 독일등 세계의 여러나라의 경우를 들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보고, 헌법의 전문과 총직, 인권의 원리, 정신적 인권, 정치·경제적 인권 등 헌법의 인권에 대해 상세히 서술했다.
박홍규법학자이지만 여러 예술가들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작가이다.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법대, 영국 노팅엄 대학교 법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오사카 대학교, 고베 대학교, 리츠메이칸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내 친구 빈센트』 그리고 풍자 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의 평전인 『오노레 도미에 - 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 고야를 반권력의 화신으로 본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무엇이 정의인가?』(공저) 등이 있다. 또한 『아나키즘 이야기』, 『플라톤 다시 보기』,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세상을 바꾼 자본』 『리더의 철학』등의 책을 집필했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처음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 외에 『간디 자서전』, 『자유론』, 『유토피아』,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 『예술과 기술』, 『인간의 전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예스24 제공]도대체 '누가' 헌법을 죽였는가
영남대 법대의 박홍규 교수가 한국 헌법학에 대한 전면 비판에 나섰다. '전면' 비판이란 뚜렷한 강조가 가능한 것은,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헌법이 '죽었다'(아프다거나 다쳤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함과 동시에 과연 '누가' 헌법을 죽였는가를 명시적으로 지목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그들'은 바로 헌법학자들로, 특히 그들이 해낸 작업들 가운데 오늘날 최고(?)의 '헌법 교과서'로 자리잡고 있는 4권의 책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있다.({헌법학원론} -권영성, {헌법학개론} -김철수, {신헌법학원론} -박일경, {한국헌법론} -허영)
그러나 학자들이 비판의 초점이 된다고 해서 헌법에 어긋나는 위헌 법률을 만들고 위헌 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이나, 또는 헌법을 왜곡하여 위헌 재판을 하는 재판관들이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학자들이 헌법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위헌 책을 써대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한 비판의 대상의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학자들로 인해 여타의 모든 위헌적 행위가 소위 '학문적'으로 정당화되고 관행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의 비판은 결코 학자들간의 '학문적인' 논쟁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이러한 비판이 전문적인 학문의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저자가 말하는 '헌법의 죽음'이 일상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헌법의 죽음'을 증언하는 생생한 증거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상식의 죽음은 곧 헌법의 죽음
'헌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부터 중·고교, 대학에 이르기까지 헌법을 가르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헌법에 '국민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상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조금도 어색할 이유는 없다. "헌법은 곧 국민의 상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예를 통해 '헌법과 상식의 관계'를 되묻는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경찰이 조사할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경찰서에 가자고 하는 경우가 있다. 소위 말해 '임의동행(任意同行)'이라는 것이다. 헌법에 의하면, 이 경우 경찰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아니, 필요가 아니라 그런 경찰의 요구는 '위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꼼짝없이 끌려가고 만다. 왜? 국민의 상식인 헌법이 유독 그때만은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아서? 또한, 도저히 집을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국가에 대해 주택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국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공공주택을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헌법은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제35조 3항)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본문 26쪽)
상식이란 헌법에 규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헌법에 이를 규정했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고도 확고한 상식이자 우리 일상의 가치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런 헌법에 반하는 불법적 관행이 판을 친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그런 불법적 관행을 합리화하는 위헌적 학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민들이 어떻게 불법적 관행에 맞서 상식을 내세울 엄두를 내겠는가 하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실익 없는 외국 헌법 이론
기존 헌법학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읽는 이에 따라서 매우 과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격함은 어디까지나 콜럼버스의 달걀이 가져다주는 신선함에 기인할 뿐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강조하는 '상식으로서의 헌법'이 왜곡된 헌법학 비판의 잣대로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헌법 교과서가 1,2천 쪽에 달할 만큼 방대해야 하는가?"
그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는 대부분은 외국의 헌법 이론이다. 물론 저자가 무조건적으로 외국 이론의 소개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소개의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소위 '선진국'의 이론이라 하더라도 이는 각기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립된 것이므로 우리 나라의 여건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천 쪽이나 되는 교과서 그 어디에도 그런 이론을 소개해야만 하는 '명시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그 '실익'의 정체가 모호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명시적인' 근거 대신에 오히려 '명시적이지 않은' 근거가 포착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정당화인가
허영은 그의 {한국헌법론}(박영사, 1997)에서, 우리 헌법 제31조 4항에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는 대학의 자치에 대해 그 내용으로서 학생회의 결정참여권에 대해 유독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1973년 학생 등의 대학기구 대표 참가제에 '적신호를 보낸' 것으로 스스로 평가하는 독일 판례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문제가 된 독일의 법률은 대학 내 여러 합의제 기관을 교수, 연구보조자, 학생 및 직원의 대표로 구성하게 했는데, 여기서 교수대표의 구성원에 교수가 아닌 사람들(예컨대 법관이나 공무원)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헌법상 보장된 교수의 직업관리제에 위배된다고 주장한 것에 불과했고,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그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즉 교수 외에 연구보조자, 학생 및 직원의 대표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문제삼지 않았고,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어떤 '적신호를 보낸' 적도 없다.
저자는 묻는다. 세계적인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계인권규약이나 인권에 대한 이중기준론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면서, 왜 이렇듯 그야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식의 억지에 불과한 독일 판례의 원용은 불사하는가? 학생의 대학자치 차원의 결정참여권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의 정당화가 그다지도 필요했던가? 그 필요는 누구의 것인가? 그 필요는 도대체 누구의 실익인가?
헌법에 대한 사랑
저자가 취하는 비판의 잣대를 고려할 때, 지금껏 우리 나라 헌법학에 대한 이와 같은 전면적인 비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비판이 갖는 현실적인, 그리고 다분히 정치적인 위험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헌법에 대한 사랑, 그것도 결코 맹목적이지 않은 사랑 때문이다.
"완벽한 헌법은 없다. 부족하면 내용을 법률·재판·학설로 보충해서 완벽하게 만들자. 헌법은 본래 튼튼한 주춧돌, 거대한 그물 망, 한없이 넓은 바다에 불과하다. 그 위에 다시 옳은 법률로 기둥을 세우고 바른 재판으로 가리며 훌륭한 학설로 가득 채워야 한다."
어쩌면 저자는 그 '한없이 넓은 바다'가 이제 자정작용의 한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9번이나 큰 격랑을 겪어야 했고, 그 사이사이 이를 데 없이 더럽혀졌고, 게다가 위헌 교과서로 공부하는 수많은 학생들로 인해 점점 더 늘어만 가는 잠재적 오염요인까지. 저자가 '위험'을 무릅쓰는 진짜 이유는 아마도 그러한 절실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