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끝: 페터 바이스의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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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엄청나 실감하기 어려운 폭력들, 고통이니 슬픔이니 하는
일상적 술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극단적 체험들, 제정신 가지고는 대면하기 너무 난감한 비인간적 현상들, 아우슈비츠는 이 모두를 한 공간 안에
압축해놓고 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과장법도 일면 그럴듯하다. 서정시만 아니라, 단선적
갈등에 집중하는 전통적 비극 또한 아우슈비츠의 복잡한 비밀에 도전할 만한 장르가 아니다. 냉정한 서사문학이라면 아우슈비츠의 본질을 온당하게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사?는 연극의 현장성과 서사문학의 냉정성을 결합시킨다. 실제로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던 수용소 내의 야만들을
일목요연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차례로 조망해 준다. 하차장에 도착하여 노동력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분류되고 강제노동과 굶주림과 고문과 역병들이
기다리는 수용소로 혹은 가스실로 들어가는 노정, 살해의 몇 가지 방법들과 학살 이후의 기계적인 처리과정들 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페터 바이스의 기록극 ?수사?의 기본구성이다.
기록극이라는 형식이 문학적 진실을 보장하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기록 자체도 오류나 허위일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짜맞추느냐에 따라 주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를 돌이켜보는 데에는
특정 인물 중심의 멜로드라마나 교양소설보다 기록극이 단연 적합할 수 있다. 사실기록 그 자체, 기억을 되돌리려는 단편적 노력들 하나하나가 아직
건재한 체제적 폭력과의 싸움이 될 수 있다. 기록극 형식은 선언한다. 아우슈비츠는 허구가 아니다, 어떤 형태의 감동을 아우슈비츠와 관련짓는 것도
사치스럽다, 엄혹한 착취와 학살이 있었을 뿐이다, 등등. 기록극을 표방하는 것은 사태 자체의 충격파와 흡인력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작가의 감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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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건 자체의 충격이 작품의 효과까지 결정하지는 않는다.
잔혹한 장면들이 끝없이 반복됨으로써 처음의 끔찍하다는 느낌이 점차 무뎌진다. 특정한 사건을 향해 작품 전체가 집중되어 가는 입체적 구조가
아니라, 여러 사건들이 유사한 비중으로 산재되어 있다. 더욱이 권선징악이 산뜻하게 실현되지도 않는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당당하고, 피해자들은
주눅들어 있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는커녕 그것을 죄로 인정하는 증인조차 없다. 변명의 공식은 간단하다. 우선 범죄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그러다 부인할 수 없는 증언들에 밀리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우긴다. 다들 그랬는데 왜 나만 괴롭히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과거사에 매달리지
말라는 충고를 곁들이기도 한다. 작품을 다 따라잡고 나면 씁쓸한 맛이 남는다. 어디에도 감동은 없다.
그러나 [수사]는 그러한 것이 현실임을 말하고자 하는 셈이다.
서독의 과거청산은 일본이나 남한과 비교할 때 조금 나을 뿐이다. 아우슈비츠가 법정에 선 것은 전쟁이 끝나고 20년 이상이 지나서였다. 나치
정권에서 각계각층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들은 소수의 전범을 제외하면 그대로 전후에도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아우슈비츠 재판 역시 뾰족한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났다. 재판에 등장한 인물들은 그저 조무래기들일 뿐이었다. 이는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광주청문회를 통해
수많은 사실들이 드러났지만, 학살의 주범들은 학살의 공로로 받은 훈장들을 아직 반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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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답답한 실제상황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수사??의 모든
것은 아니다. 작가는 학살 메커니즘의 원동력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 본질을 그는 자본주의적 착취라고 본다. 이주 유대인들은 새로운 땅에서
일자리를 찾아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이 소유한 최상의 귀중품들을 모두 챙겨 수용소로 들어온다. 그것들만 강탈해도 천문학적 액수에 달한다.
게다가 그들의 노동력은 산업체에 투입된다. 노동의 대가는 생명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식품이 고작이다. 하루 1000내지 1400칼로리로 중노동을
해야 하고, 체력이 쇠진하여 노동력이 없다고 판정되면 총살되거나 심장에 페놀 주사를 맞거나 가스로 살해된 후 화장으로 끝난다. 화장 전에
금이빨들을 뽑아내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게 처리되어 비는 자리는 또 다른 유대인들로 채워진다. 유대인들이 전멸하면 그 다음에는 폴란드인이 있고
러시아인도 있다. 유색인종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아리안족의 우월성에 대한 픽션들은
착취메커니즘의 손쉬운 포장일 뿐이다. 프로이트의 파괴본능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파괴본능이 아무 때나 분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내재하는 본능이 아우슈비츠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다. ??수사??는 그 특정한 사회적 조건이 바로 자본주의적
착취구조라고 지적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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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착취구조는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자본주의가 아우슈비츠로 귀결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수사??도 단지 자본주의적 착취체제가 갈 데까지 가면 아우슈비츠라고 말할 뿐이다. 갈
데까지 가기 위해서는 착취에 대한 저항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미미했고, 대개 그 착취체제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그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적응했던 근본이유를 ??수사??는 수용소의 질서와 바깥의 질서가 동질적이었다는 데에서 찾는다. 바깥에서 체득해온 약육강식
생리로 인해 포로들은 수용소 안의 억압상황에 쉽게 굴복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 도착하는 과정에서부터 저항을 마음먹기 어려웠다. 저항이 어려웠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몇 일 동안 화물열차에 갇혀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조차 해소하지 못하며 수용소에 도착하는 대부분의 포로들은 탈진상태에
빠지고 일부는 이미 사망하기도 했다. 열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빨리 쉬고 싶을 뿐이다. 노동력 없는
가족들이 헤어져 가스실로 직행해도 그들이 안전하게 보살핌을 받으리라는 안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들을 통제하는 기관총과 맹견들은 이미
고향에서도 겪었던 모습일 것이다. 수용소 내에서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력을 발휘할 수 없게 영양실조와 질병과 중노동에 시달렸다. 약간의 잘못
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고문이나 독방이 법적 절차 없이 얼마든지 자행될 수 있는 공포분위기였다. 저항을 꿈꾸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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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인 듯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미미하나마 저항은
이루어진다. 저항의식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가능한 한 서로를 보호하고, 비밀스럽게 편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화장터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도 했다. 종종 질 수밖에 없더라도,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싸우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꼭 이기는 싸움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수용소 내부의 저항은 의미심장하다. 저항이 좀더 일찍부터 외부에서 조직적으로 강력히 이루어졌다면, 아우슈비츠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이 경우에도 상당 정도의 희생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현명하지 못한 투쟁으로 일찍부터 깨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저항에는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항투쟁 속의 희생이 아무리 커도 그것은 아우슈비츠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저항은 유대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해자들 가운데에는
폭력체제의 힘을 즐기는 자들도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명령에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입대당시 김나지움 졸업반 학생이었던 분대장 슈타르크는 큰
죄의식 없이 포로들을 살해하면서 포로들과 괴테의 휴머니즘에 대해 논한다. 그와 같은 자들이 정신이상자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폭력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애국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었다. 고문전문가 이근안 경감이 남의 관절을 뽑아놓고도 양심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상황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방법을 이리저리 찾아보는 사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포로들을 살려내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한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하려는 자들도 있다. 동일한 폭력체제 속의 가해자측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학살을 즐기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한 한 억제하려는 자들도 있다. 체제에 의한 거대폭력이 개인의 책임에 대해 면죄부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가치들
가운데 개개인의 인권이 가장 소중하다는 인식이 오늘날에는 널리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당연시할 수 있는 역사적 문화적 조건을 만들어내고
지키는 것은 인문학도 본연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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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가해자들은 과거를 잊자는 억지노래를 합창한다. 그러나
역사의식은 피해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의 기본조건이다. 아우슈비츠는 인류 모두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현실이다. 칸트식의 정언명령이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다면, 아우슈비츠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하나의 정언명령일 것이다. 그런데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마루타도 있었고 히로시마도 있었으며, 스탈린 체제 속의 수많은 학살도 있었다. 물론 4. 3도 있었고, 무수한 보도연맹원들의 억울한
죽음도 있었다. 광주학살과 무수한 의문사들, 그리고 전태일의 뒤를 잇는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도 있었다. 죽음과 별로 멀지 않은 중노동은 늘
존재한다. 이 모두가, 그 밖의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무수한 고통들이 기억을 요구한다. 이를 망각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비인간화될 가능성을 높이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다.
고통의 기억만 소중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함께 일하고 노력하여
보람을 얻었던 즐거운 체험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등장인물들이 전력을 다해 자아실현할 때, 그 과정에서 객관적으로도 의미 있게 의식이
확대되어갈 때, 독자들은 편한 마음으로 감동을 받는다. 아우슈비츠에는 그러한 체험이 없다. 그러나 ??쉰들러 리스트??의 멜로드라마적 감동은
아우슈비츠 상황 전체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아무 감동도 만들어내지 않는 ??수사??가 더 역사적 체험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도 의미심장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