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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처음 운행되기 시작한 것은 1903년 고종황제가 외국공관을 통해 미국제 승용차 1대륽 들여 오면서 부터였다. 그 뒤 1911년 황실용과 조선 총독부용으로 영국제 리무진을 각각 1대씩 구입하였으며, 그 이후 조선 말기 개화의 물결을 타고 자동차 대수가 급격히 늘어났다.이 당시 우리나라의 기계공업분야는 불모지와 다름없었으므로 자동차 생산은 꿈조차 꿀 수도 없었다. 다만 운송사업이 시작됨에 따라 자동차 정비업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인사동에 자리잡은 강천 자동차에서 왕실용 자동차 및 인력거를 수리하면서부터 정비는 시작되었다.
1930년 이 당시 자동차 생산은 어려웠고 자동차 정비업이 먼저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楠本(남본)상점, 京城(경성)보디, 昭和(소화)보디, 京城(경성)서비스등 10개 정도의 정비업체가 있었다.일제 식민지였던 1931년 만주사변, 상해사변, 국제연맹 탈퇴등 정치변화를 겪으면서 일본은 군사용 자동차 양산체제를 강력히 추진했다.그러다 일본이 대륙침략이 장기화되고 1939년 미제 차량및 품공급이 완전히 끊기자 일제차량 및 부품공급을 위해 일산, 풍전, 이스즈등 3사의 판매회사를 한국에 진출시켜 부품을 판매하고 제작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점차 군수용 부품이 부족하게 되자 수송기기의 일부분을 우리나라에서 주물로 만들고 대강 가공하여 부품을 만들었으나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대전에 조선리연 항공주식회사에서 피스톤링을 만들었으며,영등포에 있는 조선자동차공업회사가 슬리브, 기어 볼트, 너트등을 생산했다.
영등포의 조선 타이어 회사에서는 타이어를 , 부평의 조선베어링에서는 베어링을 , 휘경동의 경성스프링에서는 스프링을 생산하였다. 이 때 정비공장으로는 경성서비스. 명륜동의 경성공업사, 홍제동의 삼화서비스, 광화문의 대륙모터스, 신설동의 아도서비스, 보링공장으로는 서대문에 자기공업사, 동대문에 조선리연공업사가 있었다.
1945년 광복으로 인해 일본군은 물러나고 나자 부품품귀현상이 발생하고 전산업이 마비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기계공업분야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앞장서서 우리의 힘으로 철판을 두드리고 자동차 부품을 만들기 시작했다.부품업자들은 부품을 만들도록 자금을 모아 선금을 마련해 주기도 하면서 부품 자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8.15 광복이후 미군정 시대를 거치면서 미군제 부품 및 자동차가 증가함으로서 일제차량을 감소해 가고 미군제 자동차가 판을 치게 되었다. 한동안은 보디는 일제차이면서 엔진, 밋션은 미제부품으로 변조된 차량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정부는 50년도에 피스톤링. 베어링. 슬리이브. 개스켓트. 클러치디스크. 소음기.밸브등 13개 품목을 군납토록 하고 AID자금을 지원하는 정책도 폈으나 6.25가 일어나면서 자동차 공업은 존립조차 할 수가 없었다. 53년 휴전협정 조인과 함께 전쟁은 끝났지만 공장은 쉽게 가동할 수는 없었고 전쟁의 전리품인 차륜과 UN군에서 폐차 처분되어 나온 차량 부품들을 이용해서 철판을 두드리고 조립하여 버스와 승합차 및 트럭을 제작하는 공장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조립공장의 전국춘추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립차들이 엔진 용량은 무시되어 제작되기 쉽상이고 출력이 모자라 사고를 일으키기도 하고 오르막길이나 과부하가 걸리면 그대로 무너지는 불량품 그 자체였다. 아뭏튼 이런 중고차나 폐차를 가지고 두들기고 만들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의 모체가 된 것은 사실이다.
55년에 시발 자동차를 조립함으로써 국내에서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때는 미군 잉여차량인 지프차. 트럭 쓰리쿼타를 개조하여 승합택시.버스로 사용이 한창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을지로 2가에서 천막을 치고 자동차를 조립하던 시발자동차 주식회사에서 미제 지프차형 실린더헤드만을 국산화하고 보디를 조립하여 시발자동차를 만들었다. 이 차는 4기통 엔진을 보링. 재생하여 장착하고 트렌스밋션. 액슬은 미제 중고품을 사용하여 만들었다.우리나라 최초로 국산 승용차가 생산되자 생산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주문이 쇄도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6기통 승용차까지 생산했으나 국내의 유류사정으로 인해 허가를 받지 못했다. 56년 8월 등록된 차량을 폐차하지 않고서는 증차를 못하도록 하는 5.8라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자동차 운송사업 신규면허는 물론 증차인가를 일체 하지 않게 되어 결국 3000대 생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58년까지 자동차 보유대수는 2만9천대 정도로 집계되어 있다.
4.19혁명과 5.16을 거쳐 제3공화국이 출범하여 계획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자동차 공업이 발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62년 5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제정 공포하였는데 주요 골자로는 자동차 공업에 대한 허가를 상공부장관이 하도록 했고, 외국산 자동차와 부품을 수입 제한했으며, 국내 자동차 부품생산 및 시설재를 면세토록하였으며, 이법은 67년까지만 유효토록한다는 내용이다.
자동차공업 보호법이 공포되자 국내 최초의 근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이 설립됐다. 자본금 1억원으로 부평에 공장을 세우고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고 새나라 자동차는 탄생한다. 하루 평균 10대를 생산했는데, 부품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막대한 외화가 유출되고 결국 국산화를 위한 시설투자는 하지를 못해 국회로까지 문제가 확산되고 63년 7월에 생산을 중단하고 말았다. 결국 새나라 자동차는 SKD(semi-knock-down: 중간분해부품))을 도입했다는 기록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2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57년 설립한 신진공업사는 62년 11월 대형차량 조립공장 인가를 받아 마이크로버스 보디 제작을 하여 63년 11월 부터는 엔진. 밋션. 액슬등을 미군불하품을 재생시켜 유선형 승용차인 신성호를 제작하였다.하지만 중고품에다가 판매 가격이 고가여서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318대 생산에 머물렀다. 64년 5월 소형 자동차 조립인가를 받으면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으면서 66년 5월 21%를 국산화한 코로나 승용차를 생산하게 된다. 이때부터 완전 분해부품(CKD: complete knock down)조립방식으로 발전되어 갔다.
55년 창립한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가 62년 10월 자동차 조립 및 차체제작 공장 인가를 받고 버스제작 전문업체로 활동을 시작한다. 기타 63년도에 기아산업이 일본 동양공업과 기술제휴하여 K-300. T-600등 삼륜차를 생산하기도 했다.
현대자동차는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합작회사를 만들어 자동차 정비업을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 일제시대에는 기업정리령에 따라 손을 떼기도 했으나 일제 말기에는 운수업에 손을 대고 8.15광복후에는 다시 현대 자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서비스업을 시작했다. 47년에 현대 토건사를 설립하여 건설업에 착수했으며, 50년에 이 두 회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 주식회사를 건립하였다. 현대건설은 단기간에 국내 1위의 건설업체로 성장했는데, 이렇게 급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기공장의 운영을 통해 기계화 시공을 한것이 주효하였다고 보여지고 또한 그동안 배워놓은 정비기술과 사업운영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아산리에서 가난한 농가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친의 농사일을 도왔다. 농사일이 너무 고되고,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항상 생활이 어렵기만 한 것이 싫어 농촌을 떠나 도회지에 나가 일하기를 원했다. 정주영은 17살 때부터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에 걸쳐 가출을 시도하였으며 마침내는 19살 되던 해 도회지로 나오게 되었다. 도시로 나온 청년 정주영은 인천.서을 등지에서 부두 하역일이나 공사장의 막노동 등 온갖 일을 하며 전전하다 20살 때 신흥상회라는 쌀-소매상에 취직, 배달원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3년 동안 일하면서 큰 신용을 쌓은 정주영은 23살 되던 38년 1월 서을 신당동에서 경일상회를 개업, 쌀 도소매업을 하였다.
경일상회는 청년 정주영이 처음 착수한 독립적인 사업이었는데 황해도 연백등 산지에서 쌀을 수집해 서울에서 도매와 소매를 겸하였다. 이 사업은 곡가의 전시적 앙등 속에서 호경기를 누려 수익금으로 고향에 논 30마지기를 구입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일제는 39년 들어 전쟁수행을 위해 식량통제를 본격화하였는데 이해 2월에는 만주. 중국등지로의 쌀 수출을 제한했고 8월에는 미곡최고 판매가격제를 실시하였으며 12월 말에는 마침내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금지, 쌀 배급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경일상회 또한 이해 12월 개업 2년만에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 정주영은 쌀 도산매업에 이어 자동차 정비업에 손을 댔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공업인으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정주영은 적은 자본으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을 물색하던 중 당시「아도써비스」라는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엔진 수리 기술자로 일하던 이을학이라는 사람의 권유에 따라 40년 3월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그때 돈으로 3천5백원을 주고 인수하였다. 사업자금은 평소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분으로부터 3천원, 고향친구로부터 5백원을 빌리고, 이을학씨가 3백원, 이씨와 같이 「경성서비스」에서 일했던 김명현씨가 2백원, 그리고 정주영이 1천원을 출자하는 등으로 모두 5천원으로 시작하였다.
「아도서비스」는 합자형식으로 운영하였으나 모든 경영은 정주영이 맡아 하였다. 「아도서비스」는 3월 1일 계약금을 주는 동시에 허가를 내·서 일을 시작하였다. 인수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아도서비스」공장을 단번에 혹자로 돌려 놓는 데 성공하여 20일만에 빌린 돈의 절반을 갚았다. 그러나 3월 20일에 잔금을 치루고 5일째 되던 3월 25일에 종업원이 물을 데우다 신나를 잘못 다루는 바람에 화재가 일어나 공장과 수리 중이던 자동차가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공장 안에서는 트럭 2대, 임진강에 빠졌던 개인 트럭 1대, 그리고 일제시대에 세도가였던 윤덕영의 올스모빌 승용차 1대를 수리 중이었고 길가에도 트럭 2대를 세워 둔 채 고치고 있었는데 이들 자동차도 상당 부분 불에 탔다. 정주영은 1천원을 빌려 부속품 외상을 물어주고 타버린 차에 대해 배상을 해준 후 이번에는 공장을 신설동으로 옮겨 자동차 정비업을 계속했다. 이때 공장 규모는 대지가 3백50평 정도였고 종업원은 북가현동 공장 때 50명 정도였던 것이 이 때는 6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서울에는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경성서비스」, 「경성공업사」등 비교적 큰 규모의 정비공장들이 있었으나 『아도서비스」는 고장난 차들을 남보다 신속히 고쳐줌으로써 신용을 쌓아 많은 일거리를 주문 받았다. 그러는 한편 트럭 운송사업도 하며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그러나 자동차 정비공장도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부족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는 강압책의 일환으로 42년 군소 기업체들을 강제합병토록 하는 기업정리령을 내리는 바람에 그만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조치로 아도서비스」는 43년 초 당시 종로5가에 있던 일진공작소에 합병하게 되었는데 원래의 동반자 이을학· 김명현 양씨는 회사를 떠났고 정사장도 얼마 후 회사운영에서 손을 때고 말았다.
정주영은 아도서비스를 운영하는 3년동안 바쁠 때는 밤 12시까지 각종 차량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공장에서 직공들과 똑같이 일했는데 이 기간 동한 자동차 엔진을 중심으로 한 기계원리와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체득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건설업을 할 때 장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계화 시공을 추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 것이다.
자동차 정비업에서 손을 뗀뒤 보광광업 주식회사로부터 광석운반 하청을 맡아 운수업을 시작하였다.회사에 보증금 3만원을 예치하고 새트럭 30여대, 헌트럭 10여댁를 구입하여 황해도 홀동금광으로부터 평양 성교리까지 광석을 운반하였다. 광복직후 고향에 돌아와 미군 병기창에서 자동차 수리하는 일을 청부맡아 하면서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하였다.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선포하고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 소유로 이관됐는데 이때 미군정은 일부 주택이나 토지를 불하해주었다. 정주영은 이 기회에 서울 중구 초동에 200여평을 불하받았다.
이 불하받은 땅에 정비공장을 짖고 현대 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설립초 종웝원은 30명 정도로 작은 회사였다. 작업 내용은 일제 차량의 고장난 곳을 수리하거나 휘발유차량을 목탄차나 카바이트차로 개조하는등의 일을 했다. 45년 해방 당시 자동차는 4500정도였던 것이 47년에는 9000대로 들어나는 바람에 창업1년만에 종업원도 80명으로 늘어났다.
현대건설은 57년 초동 옛 자동차 정비공장 자리에 중기사무소를 설치하여 장비관리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처럼 현대건설이 장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6·25동란이 끝난 후 시공한 다리공사에서 장비부족으로 막대한 적자를 초래한 것을 계기로 장비의 중요성을 절감한 데다 특히 57년을 전후하여 활기를 띤 미군 발주공사에서는 시방서상에 엄격한 장비조항을 삽입하고 있어서 장비의 확보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었다.
현대건설은 기계화 시공이 보편화되자 장비관리체제를 더욱 정비하기 위해 원효로 4가에 중기공장을 약3200평을 구입하여, 86평의 공장건물과 창고를 신축하여 61년 11월 초동 중기공장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67년 말 원효로 중기공장 소속 종업원은 모두 2백 40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기구 또한 중기사물실의 경우 중기 ·경리 ·차량 ·노무·발송·구매부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공장의 경우는 각종 부속재생부 ·경차량부· 선반분 · 중기운전부 · 제관부의 5부로 운영되었다.
중기공장은 각종 장비의 수리 ·정비, 건설 혈장에서 청구하는 각종 부속의 구입 ·발송, 정비수리요원의 확보 ·훈련 ·배치, 각종 부속의 제작·재생 등의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룹의 주력 기업인 현대건설의 이같은 각종 장비에 대한 경험과 인력의 확보는 나중 현대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과정과 포드사와의 제휴과정에서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정주영사장은 젊었을 때부터 자동차에 대해 친근했고, 자동차 정비로 출발해 그룹창립과 사업을 통해 공업인으로서의 애틋한 열망과 애착이 그를 성공으로 이끈 것이라 본다.
오렌만 에 적어보는 역사 한 페이지 라 조금은 변동된 소개라 본다
이해와 시대을 잘 정리 해봄도 근대화 에 발전상 을 읽을수가 잇다
다각 적으로 생각해 주시길~~~~~~~~~!!
문교부가 짤은 국민학교 4학년이 전부인 구석대기 가 자동차 역사을 간추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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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동차에 관한한 구석대기 형님처럼 박식하신 분이 누구 있으랴만... 여튼~ 자동차 역사를 알게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눈도 침침한데다 글이 너무 잘아서 읽다말다~~~~ㅋㅋ.
논문 하나 쓰시죠
근디 왜 오늘은 즈나도 읍는겨?
날 잡아 한잔 하자구~~~
3월18일 한 70명은 온다네
회포한번 풀자구
금욜 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