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신~대성골~큰세개골~영신봉
1:25,000지형도= 대성
2016년 5월 28일(토) 구름조금, 기온 :16.3~27.5도 ,평균풍속 : 1.1m/s,평균습도 : 57%
일조시간:6.0hr, 일출몰: 05:19~19:36[도상16.51km, 14:30분 소요]
동행: 녹림처사,칠성+2
지리산에는 산과 더불어 살아 숨쉬는 수많은 마을이 있다. 의신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조선전기까지 있었던 ‘의신사’라는 사찰에서 유래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대학자 최치원이 호리병속의 별천지라고 시를 읊었던 화개동 골짜기 상류에 자리 잡은 아늑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지리산과 지리산의 삼신동(청학동)에 얽힌 전설이 깃들여 있는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의신마을은 지리산과 이땅이 전란 또는 혼란에 휩싸일 때마다 그 소용돌이에 말려 큰 홍역을 치르기도 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으며 한때는 마을 전체가 사찰이어서 서산대사가 출가한 원통암등 불교문화의 산실이기도 했다 한다.
산간벽지의 조그마한 마을의 왜구의 침입과 이념 대립의 현장이면서 불교문화의 산실이었던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 마을이 지리산 마을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양지 바른 기슭에 자리잡은 의신마을은 산간 오지이면서도 예로부터 비교적 양호한 지리적 여건 탓에 온갖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것이다. 남서쪽으로는 남해 바다와 섬진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가 하면 북동쪽으로는 삼남 지방의 대로였던 벽소령을 끼고 있는 요충지인 셈이다.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의신마을은 깊은 산속의 마을이면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마을의 한자 지명이 바뀌기도 했다 한다. 의신마을 은 원래 한자로 "依神" 또는 "義神"이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의병 활동 근거지로 재난을 입게 되자 "神"자 대신 "信"자를 사용해 지금은 "義信"마을로 고쳐 쓰고 있다. 원래 의신마을의 "神"자 유래는 지리산의 삼신동 개념에서 비롯했다. 의신마을 4km 아래에 있는 "神興"과 덕평봉 일원의 "靈神"등 "神"자가 든 세 곳을 삼신동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의신마을은 깊은 산속의 마을이면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마을의 한자 지명이 바뀌기도 했다 한다. 의신마을 은 원래 한자로 "依神" 또는 "義神"이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의병 활동 근거지로 재난을 입게 되자 "神"자 대신 "信"자를 사용해 지금은 "義信"마을로 고쳐 쓰고 있다. 원래 의신마을의 "神"자 유래는 지리산의 삼신동 개념에서 비롯했다. 의신마을 4km 아래에 있는 "神興"과 덕평봉 일원의 "靈神"등 "神"자가 든 세 곳을 삼신동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삼신동의 개념은 신라 정강왕 첫해(886년) 이곳을 찾았던 최치원선생이 이들 마을이 있는 일대를 신선들이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라 해 신흥동 마을 입구에 "삼신동"이란 각자를 친필로 새겨 넣은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지리산의 삼신마을은 근래에 접어들면서 잦은 전란들에 휩싸여 수난을 겪으면서 일제시대 당시 한자 지명이 바뀌게 된다. "依神" 또는 "義神"마을은 "義信"으로 "神興", "영신"은 "德平"으로 각각 고쳐졌다. 이는 주민들의 뜻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일제의 말살정책에 의한 개명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신마을에 가면 마을청년회에서 의신마을의 연혁에 관한 안내문을 커다랗게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인근 등산로도 상세하게 표시돼 있어 이채롭다.
이 안내판에 기록된 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은 500여년 전에 의신마을로 형성됐다고 한다. 당시 경주 정씨, 단양 우씨, 전주 최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경주 정씨는 하동 함양 남원을 연결하던 삼남대로 벽소령을 넘어 의신마을에 안착했으며 그후 단양 우씨와 전주 최씨가 입주 안착한 이후 큰 마을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란을 피해 이주해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마을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에는 의신사란 절이 있었는데 서산대사가 이 절에 들어와 암자인 철굴암에서 수도를 했다 한다.
서산이 15살 때 초시에 낙방하고 남쪽지방의 산천을 유람하던 중 화개동천에 이르러 의신마을의 의신사에서 불교에 입문했다는 것이다. 서산이 구태여 의신사에서 수도 정진하게 된 것은 의신마을이 예로부터 지리산의 삼신동(청학동)으로 지목돼 온 길지였기 때문이라는 게 마을 주민들의 얘기다. 그러나 의신마을은 근세에 이르러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왜적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외치던 동학 농민군이 1908년 이곳을 지나면서 왜병과 교전을 벌였으나 신무기에 밀려 30여 명이 전몰하는 비운을 겪게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 의병들의 공동묘지가 마을에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지금은 사라지고 표시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당시 장렬하게 쓰러져간 동학농민 의병대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라도 건립했으면 하는 바람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또한 의신마을은 1950년 전란을 전후해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과 토벌대가 격렬하게 교전한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 위의 빗점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유명하며 인근의 대성골은 빨치산이 몰살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모두 의신마을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의신마을 사람들 중 당시 사상이나 이념에 물들거나 심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의신마을의 터가 좋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의신마을은 1945년 이후 삼성 이외에 이씨 김씨 전씨 강씨 허씨 등 다수의 성씨가 들어오면서 인구가 늘어나 130여 가구의 큰 마을을 이루었다가 1948년 여순 반란과 한국전쟁으로 두 차례 마을이 전소되고 수복 후 마을이 복구돼 80가구에 달했으나 이농 현상으로 지금은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의신마을에 의신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있는데 절은 평지에 있었으며 절벽에 김언신, 김미의 제명이 보이고 30여 명의 승려가 범패를 부르며 정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안내문과 속두류록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의신마을에는 신라 시대부터 신사란 대찰이 있었으며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전란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동학운동과 경술국치, 여순반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의신마을은 화마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빼어난 지세로 지금도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수백년 전부터 수호신으로 마을 앞에 당산신을 모셔 두고 음력 섣달 그믐날이면 수일 동안 목욕재계한 제주가 등을 밝힌 뒤 설날 아침에 온 동민이 참석해 동제를 올리고 있다. 주민들은 해마다 새아침에 정성껏 올린 당산제 덕분에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지금은 2014년부터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과 야생화 학습장이 조성되어 다양한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http://cafe.naver.com/jigongsa/1672
▼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에도 아랑곳 없이 출발을 한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서둘러서 출발했지만 의신에 도착하니 10시 반쯤 산행을 시작한다.
지리산 비박은 나도 처음이고 군대동기와 둘이서 대부분 준비하고 게스트 두사람은 개인장비만 단촐하게 준비했다.
▼ 입구에 시그널과 이정표 배웅을 받으며 대성골로 향한다.
▼ 우측으로 벽소령 산장 앞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로 오른다.
▼ 약간 흐린날씨에 비방울이 날리더니 그마져도 그치고, 비가 내린 덕분에 멀리 산그리메는 더 운치가 있다.
▼ 집에서 출발할때 20.5kg에 우리가 잘 텐트 달고 소주 4홉드리 2개와 생필품을 여기저기 틈사이에 담고 보니 30kg에 육박하는 박짐에 등짝에는 땀이 줄줄 흐른다. 평지길도 습도로 더운 날씨에 목이 칼칼할 때쯤 지친 나를 응원해 주는 간판이 보인다.
▼ 이번 산행에 흔쾌히 산행대장을 맡아준 군대동기가 대부분의 장비를 챙겨와서 새로 구입한것 없이 진행할수 있었다.
대성주막 가기전 폐쇄된 입구로 가보자고 한다. 친구는 20년쯤 전에 버스를 타고 수시로 비박을 왔을 만큼 대성골이 좋아 했단다. 예전엔 감으로 산에 들다보니 영신대를 못찾아 몇차례 헛걸음한적이 있단다.
지금은 정밀한 전자 지도가 보급되면서 대성골 골짝마다 모두다 가고싶단다.
▼ 어라~ 민가가 나오네. 바로 집옆으로 난 길에 주인이 나와 앉아있다. 머석하게 있다가 산행대장이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간다. 우리도 졸졸졸~
주인 아저씨는 토종 벌통을 만들고 있었다.
▼ 대성골 지킴이 소나무
▼ 드디어 대성주막에 도착했다. 여긴엔 두 가구가 장사를 한다. 첫번째집은 유명한 임씨 아저씨 집이고, 그 옆엔 인간극장에 출연한 형제가 하는 집이란다. 친구는 임씨집이 원조라 훨씬 맛있다고 한다. 일단 어제 술독을 시원한 계곡물로 씻어 낸다.
▼ 바쁜 걸음에 막걸리만 시켰지만 반찬은 여러가지 나온다. 임씨 아저씨 안주인이 해주는 감자전이 맛있다고 친구가 귀뜸해준다. 요즘은 임씨 아저씨는 일선에서 물러 나셨는지 보기 어렵고 서울에서 시집온 며느리만 있다. 우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기가한 감자전도 맛있단다. 우린 내려올때 먹기로하고 명함 하나를 받아갔다. 전화번호가 대박이네! 계곡옆 아랫채엔 군불때는 민박도 운영한단다.
▼ 옆집엔 계곡물을 끌어다가 아기자기한 분수를 설치해 놓았다. 식수란 말에 친구가 한잔 쭉~~ 드리킨다
▼ 긴 비탈을 올라 한숨 돌리던 친구가 등산로 옆에서 산더덕을 찾았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갔는데도 못본 것을 친구가 단번에 발견했만 바위속에 뿌리 내린 더덕의 몸통은 볼수 없었다.
▼ 매주 지리산을 다니는 우리보다 체력이 좋은 허차장은 몇번의 승진??후 결국 박짐을 맨다.
▼ 큰세개골 다릴 건너 계곡으로 향한다. 저바위에 붙은 나무들은 묵묵히 그곳을 지키고 있다.
▼ 허차장은 박짐을 매고도 사쁜사쁜 계곡을 건넌다ㅎㅎ
내꺼를 줘야하나? 고민이네ㅋ~~
내가 산행에 초대해 놓고 짐꾼으로 만들어 버렸네ㅠㅠ
▼ 계곡물은 대성골을 적시고, 모든 땀구멍에서 땀들이 줄줄 흘러 내몸을 적신다ㅋ~
입수는 하고 싶지만 계속 오른다.
▼ 대성골과 잘어울리는 허윤^^ 그 미소가 늘 함께 했으면 좋겠다.
▼ 유체이탈 전에 라면으로 영혼을 달래본다. 아직은 갈길이 멀기만 한데...
▼ 계곡에서 만난 때늦은 두릅
▼ 엄마 오리따라 더 깊숙히... 구름은 그치고 햇빛까지 쨍쨍하네
▼ 그것 뽕배낭 아닌가?? 여유롭기만 하네
▼ 한번은 함께 하고 싶었던 평생지기
▼ 박짐도 지고 가야되고 내 주문따라 여기저기 사진 모델 해준다고 바쁘다.
▼ 친구는 그동안 조금씩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으로 힘은 들지만 꾸준히 따라온다.
▼ 바위는 점점 크지고 비경들이 나타난다.
▼ 물소리만으로도 피로가 풀린다
▼ 대성폭포에 도착했다. 바위에 난 물길 끝엔 멋진 소가 있다.
▼ 애라 모르겠다. 폭포에서 알탕이나 하고가자 친구야!
▼ 폭포에서 바라본 기암과 낙낙장송들
▼ 이제 박배낭은 주인의 등짝에 붙었다. 참당귀도 어루만져주고
▼ 협곡 위로 보인는 파란 하늘
▼ 막바지에 갈수록 계곡의 경사는 가파르게 변한다.
▼ 창불대 계곡 초입에서 한컷.
▼ 막바지에 계곡을 버리고 급경사길로 오른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토해내며 능선부근에 올랐다.
잠시 쉴틈도 없이 비박터를 구축한다
▼ 버려진 샘터는 깨끗이 청소해서 냉장고로 사용한다^^
▼ 짐 정리하고 씻고 저녁준비를 한다.
▼ 노을에 붉게 물든 반야봉
▼ 아름다운 붉은 병꽃
▼ 힘들게 매고 온 장비들이 빛을 발한다.
▼ 오늘 소비한 칼로리 150% 충전중
▼ 대성두릅도
▼ 당귀 담금주 맛이 끝내준다.
▼ 늦게까지 이야기 꽃은 만발하고 간간히 별도 보인다. 내일 일출을 볼수 있을라나?
다들 기절 수준으로 ZZZ
2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