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추억(1)
'아득한 지평선에 해가 저무는데/
나를 반겨줄 사람은 오늘도 없네/
흘러간 반평생이 하도 허무해/
껄껄 웃고 떠나간다 방랑 삼천리...'
1968년, 내가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던 무렵.
제법 히트곡 대열에 올랐던 한 노래가 있었다.
곡명은 ‘방랑 삼천리’.
아버지(김석보)가 작사, 전오승씨가 작곡하고
여운이 부른 노래였다.
가수 ‘여운’은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곡으로
이미 유명세를 탄 이후였다.
1950년대 중반, 대사업가의 꿈을 안고
고향 울산(강동 금천마을)을 떠난 아버지(1998년 작고)는
부산 범일동에서 날염업(捺染業)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하며 큰돈을 거머쥔다.
이어 새로운 사업인 건설업에 투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불운일까 아니면 과욕이었을까?
경험부족과 전문 사기단의 농간에 휘말려
아버지는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날리고 말았다.
1964년, 강추위가 몰아친 겨울 새벽.
어머니가 단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잠에 취한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폈다.
백열등은 대낮처럼 환했고
이미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은 형과 누나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새벽,
정든 범일동 저택과 가슴 아픈 작별을 고하고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가족은 모두 아홉.
슬하에 2남 3녀를 둔 아버지에게는
출가하지 않은 여동생과 중학생 남동생까지 딸려 있었다.(계속)
나의 삶, 나의 추억(2)
그로부터 약 6개월,
아버지는 몇 안 되는 친척이나 지인들을 찾아 다니며
취직자리를 알아보려 분주히 떠돌았다.
그러나, 낯선 타향은 일자리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기대를 걸고 찾아가면,
‘알아보는 중이니 좀 더 기다려 달라’는 말만 듣기 일쑤였다.
저녁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짙게 깔리면
아버지는 축 처진 어깨를 가누며
장충동 산동네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명동에 있는 당숙 회사로 출근하라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하늘이 우리 가족을 도운 것이다.
이듬해인 1965년,
나는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숙의 회사를 다니던 중인 1966년,
아버지는 강원도 정동진에 있는
‘영풍탄광’ 책임자로 발령을 받아 홀로 서울을 떠났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
인생의 환희와 쓰라림을 번갈아 맛보아야 했던
지난날들을 가슴에 묻은 채
아버지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에는 평화롭고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던 정동진.
아버지는 모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아늑한 품에 안겨
일과가 끝나면 시나 수필, 가요 작사 등의 글쓰기에 젖어
가슴에 남은 지난날의 아픔을 달래곤 하였다.
바로 그 당시에 여러 편의 작사를 하였는데
그중에서 제법 히트 대열에 올랐던 곡이 바로 ‘방랑 삼천리’였다.
지금 회상해 보면
그 때 아버지가 40대 초반이었니
지금 내 나이보다 열다섯 살 쯤 더 젊었을 때였다.
우연일까?
아버지의 직업은 나와 달랐지만
나도 타향인 서울에서 어느덧 30년 넘게 살고 있다.(계속)
나의 삶, 나의 추억(3)
정동진과 가까운 강릉은
나의 인생에서 세 번의 소중한 인연과 맞닿았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혈연과는 무관한 특정한 지역이
세 번씩이나 특별한 인연으로 다가왔던 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 첫 번째 인연이 바로 1960년대,
내가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에 다가온 것이다.
나는 방학 때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근무지인 정동진으로
즐거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는데
그 무렵 정동진은 그저 평화롭고 조용한 어촌에 불과했다.
아늑한 그곳에서 아버지는 일과가 끝나면
시나 수필, 가요 작사 등에 몰입하며
지난날의 아픔을 달래고 있었다.
특히 주말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강릉으로 나가
낯선 도시에서의 새로운 추억거리를 안겨 주곤 했다.
그중 가장 신나는 일은 영화 관람이었는데
그 무렵 ‘마리솔’이 주연한 스페인 영화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은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리는 대히트작이었다.
결론은 해피엔딩이지만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만큼 능청스러웠던
마리솔의 연기는 아직도 나의 기억에 생생하다.
가수 하춘화 씨가
아버지와 결의(結義)의 딸을 맺은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가요 작사에 몰두하던 아버지가
강릉 모 극장에서 공연된 ‘쑈’를 관람한 뒤
어린 나이에 너무 깜찍하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7세 소녀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부모의 동의 아래 그 소녀는 결의의 딸이 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동안 연락이 닿았던 하춘화 누나는,
16년 전 울산에서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들도 객지로 흩어지면서
그만 연락이 뜸해져버렸다.(계속)
나의 삶, 나의 추억(4)
강릉과의 두 번째 인연은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한 1981년 가을에 찾아왔다.
1981년 가을 어느 날,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복학한 나는,
우연히 캠퍼스 게시판에 나붙은 포스터 한 장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강릉대학(현 강릉원주대학) 주최
‘전국 대학생문예현상모집’
순간 뇌리를 빠르게 스쳐 가는
어떤 강렬한 빛을 느꼈다.
‘그래, 바로 저거야!’
나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닿자마자 방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나는
그간 틈틈이 습작 중이던 작품을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무엇에 홀린 양,
펜을 꽉 거머쥔 나의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저녁식사도 거른 나는
다음날 새벽 동이 틀 무렵,
기어코 ‘탈고(脫稿)’의 단맛에 푹 빠져들었다.
제목은 ‘각본 없는 하루’로 달았다.
그날 오전, 나는 초췌한 얼굴로
북정동 우체국으로 달려가
누런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원고를 보내고 나서 한 달쯤
초조한 나날이 흘렀다.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혹, 잠이 가까스로 들면
당선의 단꿈과 탈락의 씁쓸한 꿈이 뒤엉켜
나를 옭아매곤 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 강의가 끝나 학생식당으로 향하는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과대표였다.
급히 달려왔는지 그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전보 왔어!”
과대표가 노란 전보용지를 꺼내
무심코 나에게 건넸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전보용지를 펼친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축하드립니다. 단편소설 부문 대상 당선.
시상일정 추후 알림.’
그러나 날아갈 듯한 기쁨도 잠시
나는 이내 침울해지고 말았다.
가을축제 기간에 열리는 시상식에 다녀 올
여비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 무렵,
울산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기만 했다.
결국 불참 통보를 한 나는
그날 저녁 가까운 문우(文友)와
태화강변 어느 포장마차에서
쓴 소주를 털어 넣으며 애환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그해 늦가을,
나는 대상 수상에 힙 입어 서울로 진출,
잡지사 기자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계속)
나의 삶, 나의 추억(5)
그로부터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 사이 강릉과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그저 오랜 추억의 흑백 필름으로 자리매김하는 듯 했다.
그런데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2012년 여름,
긴 세월의 침묵을 깨뜨리며
강릉에서 불쑥 날아온 낭보는
세 번째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다시 이어진 것이다.
‘제3회 백교문학상(白橋文學賞)’
수상자로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전국 문인을 대상으로 한 백교문학상은
젊은이들에게 애향심과 효사상을 일깨워주기 위해
강릉백교문학회(회장 권혁승)에서 제정한 상이다.
강릉시 죽헌동 경포핸(흰)다리 마을
사모정(思母亭) 공원에서 열린 시상식에서는
조순(학술원 회원) 전 경제부총리와
심사위원장인 김후란(예술원 회원) 시인이 쓴
사친시(思親詩) 현판식도 곁들여져
행사를 더욱 빛내 주었다.
고도(古都)의 멋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예향의 도시 강릉이
나의 삶 속에서 몇 차례나
특별한 인연으로 다가온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수상작은,
종갓집 며느리로 들어와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의 고난을 표현한 작품이었기에
나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여학교를 마치신 어머니는
조국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자
한국어도 전혀 모른 채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낯선 조국으로 귀국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
숱한 고난과 시련을
피눈물로 극복한 어머니에게
나는 이 수상작을 바쳤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뒷모습은
치열한 삶 속에
은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나는
보려 한 적이 없다
어머니 뒷모습은
고단한 삶의
일기장이었기 때문이다
치열했던 삶도
고단했던 삶도
두터운 위장막이 걷히고
어머니는 숨죽이며
줄어든 뒷모습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억울한 뒷모습은
빛바랜 세월의 몫이기 때문이다’
(수상작 ‘어머니의 뒷모습’)
- 계속
첫댓글 은근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덕분에 조금 더 빨리 선생님을 알아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