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현실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기 위해
<엘리자의 내일>(크리스티안 문쥬, 드라마, 15세, 2017)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작품은 루마니아 정치상황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루마니아의 역사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이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칸은 물론이고 각종 영화제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인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과 <신의 소녀들>(2012) 모두 그렇다. 전자는 불법적인 낙태 행위를 매개로 과거 루마니아의 폭력적인 정권의 실상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현실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었다면, 후자는 수녀원에서 일어나 사망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차우셰스쿠의 시대가 마친 후 루마니아의 현재를 비유적으로 조명한다. 이번에 나온 <엘리자의 내일>은 2016년 칸 영화제에서 <퍼스널 쇼퍼>(2016)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 함께 공동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루마니아의 내일을 고민하는 감독의 성찰을 담고 있다. 세편의 영화를 통해 문쥬 감독은 루마니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한 셈이다. 그는 적은 자본으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 있는 감독이다.
루마니아의 역사와 현실의 상황에 대한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상세한 역사를 숙지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영화 관객으로서 영화이해를 위해 루마니아의 현대사를 다 파악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다만 동유럽 최악의 지도자로 알려진 차우세스쿠 치하에서 루마니아 국민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실과 마침내 1989년에 일어난 민중 봉기와 그에 따른 사형으로 20여년 이어진 독재 정권이 종결한 후에 변화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정도면 특히 대한민국 관객은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면 우리 자신의 역사적인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하나는 유신정권이 무너진 이후 80년대의 봄이고, 다른 하나는 촛불혁명으로 무너진 박근혜 정권 이후 오늘의 현실이다. 당시 우리는 끔찍한 과거를 거쳐 온 이후에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전두환의 폭력적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대를 갖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왔던 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했다. 그 이후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촛불혁명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큰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과연 이 기대는 얼마나 충족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화두로 내세우며 과거의 적폐가 반복되거나 현실의 부조리가 지속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준다. 어느 정도 현실로 나타날지는 계속해서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문쥬 감독이 가진 문제의식과 질문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그는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진 후 EU 가입 문제와 관련해서 무력함을 드러내는 루마니아의 현재를 <신의 소녀들>에서 다루었고, 부패하고 또 불안정한 현실에서는 결코 쉽게 조망할 수 없을 정도로 두터운 어둠에 쌓인 루마니아의 미래를 <엘리자의 미래>를 통해 성찰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영화의 루마니아어 원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어로 ‘졸업’으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내용을 반영하여 ‘엘리자의 내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엘리자의 졸업시험을 화두로 삼아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엘리자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루마니아의 미래를 비유적으로 성찰한다. 영화의 개괄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포일러 있음)
의사 로메오(아드리안 티니에니)는 과거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진 후에 새로운 조국에 대해 걸었던 기대는 부패한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였다. 서방 세계에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놓친 상황에서 로메오는 아내와 함께 딸 엘리자만은 가능성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민주주의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이뤄나갈 길을 열어줄 것을 다짐한다. 엘리자는 이런 뜻을 가진 부모의 노력에 힘입어 어려서부터 과외와 특별교육을 받아 마침내 마지막 졸업시험을 앞두고 영국 대학의 장학생으로 유학할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시험 전날 엘리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에 의해 강간 미수로 그친 폭행을 당한다. 이야기의 실마리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풀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로메오의 과거와 현재가 하나씩 드러난다. 그는 정권이 바뀐 이후에 기대와 달리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부정부패로 가득한 루마니아의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을 품고 있고,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며, 그리고 과거 그의 환자로서 딸이 다니는 학교에 근무하는 산드라와 불륜의 관계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로메오는 비록 사고를 당했다 해도 딸이 유학의 길에 오르는 걸 포기하지 않도록 노심초사한다. 그런데 막상 딸의 졸업시험에서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로메오는 딸의 유학이 좌절되지 않도록 해결방법을 찾아다니는데,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심지어 성적조작의 가능성까지도 모색한다.
이처럼 딸에게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펼쳐지는 로메오의 동선을 추적하면서, 감독은 루마니아 사회 각계각층에 만연해 있는 부패의 구조를 폭로한다. 감독은 비록 그동안 정직한 의사로 소문이 난 로메오였지만 딸의 미래를 위해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잔혹할 정도로 보여준다. 도대체 어디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로메오의 족적을 추적하면서 영화가 조명하는 측면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로메오와 그의 부인이 불의와 부패에 연루되지 않고는 정상적으로 살기 힘든 현실에 직면에 있다는 사실과 이것에 대해 갖는 로메오의 강한 불만족이다. 로메오는 정권이 무너진 후 한 순간의 판단의 실수로 어쩔 수 없이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감수하며 살 수밖에 없었지만, 딸만은 새로운 세상에서 살길 바란다. 다른 하나는 로메오가 딸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바람은 물론이고 딸의 미래가 좌절되지 않도록 부패와 불의와 타협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런 자신의 부정하고 불의한 태도에 대한 검사의 태도와 불의를 행하지 않고도 무사히 졸업시험을 마친 딸의 모습이다. 영화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딸을 통해 딸의 미래, 곧 루마니아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다.
<엘리자의 미래>는 루마니아의 부조리한 현실을 여과 없이 폭로하면서도 어느 정도 밝은 미래를 예상하는 문쥬 감독의 시선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한편으로는 원칙에 따른 삶이 비록 힘이 들어도 끝까지 견지할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교육과 관련해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자녀를 위한 희생이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사실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부모들이 현실의 부조리와 타협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과거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고 또 정권이 바뀐 후로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던 로메오가 어찌해서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을까? 그건 아내와의 관계에서 자기 스스로 원칙에서 벗어나 불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또한 현실을 대하는 시선이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자기와 아내는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적응하며 살면서 아내는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았지만, 로메오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불만족은 불륜의 관계로 이어졌고, 현실에 대한 불만은 도피를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딸을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그토록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현실은 부조리하고 부패로 가득하다 해도 그것을 보는 관점마저 부정적이어야 할까? 영화에 나오는 유리가 깨지는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장면은 바로 이런 그의 시선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우치는 듯하다. 하나는 누가 던졌는지 모르는 돌에 의해 창문이 깨지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자동차 앞 유리를 깨뜨린 장면이다. 감독은 로메오가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비판하기 위해 이런 장면을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엘리자의 남자 친구를 대하는 시선에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직업을 가진 그를 바라보고 또 평가하는 시선이 곱지 않았을 뿐 아니라, 딸이 폭행을 당한 현장의 CCTV에 비친 딸의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시선도 일방적이었다. 결국 딸에 의해 그런 시선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지적을 받고 나서야 로메오는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이 잘못이었음을 시인한다. 다시 말해서 로메오는 자신의 바람과 달리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현실을 피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딸에게서 밝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대하는 검사의 달라진 태도마저도 로메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딸과 검사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자신의 미래를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 있지만, 마지막 장면을 통해 짐작한다면, 로메오는 그렇게 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쥬 감독은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루마니아의 과거와 현실을 매우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미래를 보는 그의 태도에서 많이 달라져 있음을 <엘리자의 미래>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곧 영화를 통해 그는 과거와 현실이 비록 부정적이라도, 그것이 미래를 보는 시각마저 결정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현실에서 밝은 미래를 얻기 위해선 원칙에 충실한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검찰과 교육의 분야에서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과감한 개혁을 시도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