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 방소정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불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불교문화를 내 삶의 근간이자 뿌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며 기복적으로 불교를 믿었다. 이후 불교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불교를 삶에 대한 통찰을 안겨주는 진리탐구의 수단이자 철학적 가치로 느끼게 되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유동적이며 비어 있는 감각의 흐름을 지켜보기도 했으며, 불교적인 생성미학을 미디어아트와 접목시켜 석사 논문을 진행하기도 했다.
나는 불교가 삶의 진리를 말하는 데에서 매우 강력한 철학이자 교리라고 확신한다. 또한 불교사상에 대해서 믿음과 지지를 갖고 있으며, 현생에서 만난 불교와의 인연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교가 현대인들의 고통에 대해서 현실적인 도움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과 회의가 크다. 특히 현대사회가 당면한 수많은 고통스러운 문제에 대한 불교적 대안은 다소 관념적이고 심한 경우 회피적으로 느껴진다.
현대사회는 비참한 일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있다. 최근만 해도 IS 무장단체의 잔인한 범죄 행위, 세월호 참사, 잇따른 성폭행 사건, 흉악한 살인과 자살 등등 수많은 고통이 온 세상을 감싸고 있다.
이런 문제는 개인의 내적 수행이나 자기계발로는 치유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한때 유행하던 자기계발서의 판매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냉소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보았자’라는 허무주의와 무감각함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한다. 공감, 치유, 행복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은 붙잡기 어려운 구호들로 모호하게 떠다닌다. 심지어 모든 고통을 개인의 마음으로 환원시키는 태도는 개인이 사회 부조리에 저항하기 어렵게 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전략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나는 청소년 시절 심한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사춘기 소녀였던 나에게 그것은 부정적인 자아 이미지를 형성하게 한 트라우마였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고통을 부모님께 고백했다. 그때 아버지는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겼다는 솔로몬의 경구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 이후에도 힘든 기억을 되새기며 괴로워할 때면,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예비적 공포에 시달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과거에 얽매여 있는 심리적으로 나약하고 그릇이 작은 사람으로 인식하였다. 결국 따돌림의 원인을 나약한 나 자신으로 돌리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가했다. 그 일로 몇 년간 섭식장애에 시달렸으며,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며 나는 지금도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그러나 그 당시 나에게 필요했던 말은 ‘많이 힘들겠다.’라는 작은 공감이었다. 내 고통에 대해서 적어도 내 안에서 납득하고, 조금이나마 분노를 외부로 표출할 수 있었다면 그 일을 훨씬 더 건강하게 이겨냈을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아버지는 분명 나의 고통에 관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 공감을 해주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인간의 실존적 문제로 일반화시켜서 관조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고 분노나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우선적으로 토해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인 후에야 집착이 사라지며 자신의 고통을 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솔로몬의 경구처럼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말로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초연해질 수 있도록 위로하곤 한다. 현상이 지닌 비고정적이고 인과적인 논리를 깨닫고 집착을 버리는 것을 통해 고통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마음을 비우고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집중하며 중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말한다.
그러나 집착에서 벗어나 순간순간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재구성한다.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곧 기억의 총체이다.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체화된 감각과 의식이 자아를 구성하는 것이다.
아무리 삶이 비고정적이고 연기적이라고 해도 인간은 자아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동일화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경험한 과거의 상처와 축적한 기억의 층위에 따라서 고통의 원인과 실체 해결방안은 무수히 개별적이고 다양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사회의 불교는 고통에 대해서 다층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물론 개인이 마음을 비우고 삶의 진리를 통찰하며 성장해나가는 것, 자신의 깨달음을 기반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나가는 것은 이상적인 불교적 가치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서 고통을 극복해왔으며 나 또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성장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상처와 고통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고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구나 마음의 평정심을 찾고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보다 다양하게 개인적, 사회적 층위에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설명은 자칫 다층적인 고통을 ‘인생의 고(苦)’ 혹은 ‘전생의 업(業)’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언어들로 회피하고 관조하는 태도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부조리, 불평등, 모순들마저도 추상적 인식 틀로 묶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식의 구호가
때로는 약자들에게 폭력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가 이 복잡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그것이 불교가 지닌 가치와 의미를 더욱 빛나게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