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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열며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인 송도에서 1960~1980년대 해수욕을 즐기고 해상다이빙, 케이블카, 구름다리, 포장 유선(包裝遊船)[양쪽을 하얀 포장 천막을 씌운 놀잇배] 등의 놀이 문화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추억담이다.
해운대는 알아도 송도는 모른다
2013년 8월 7일 절기상 오늘은 가을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이다. 하지만 연일 밤낮으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맞아 사람들은 바다로 강으로 산으로 떠나고 있다. 뉴스에선 한여름 더위를 피해 나온 피서 인파에 관한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단연 ‘해운대 해수욕장’이다.
해운대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인파, 시설 그 어느 것도 일등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해운대는 언제부터 ‘일등’이었을까? 여기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해보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이 어디인가?”
이 물음에 쉽게 답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정답은 바로 송도 해수욕장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개장을 했으니 올해로 개장 100주년을 맞이한다. 해운대 이전 우리나라 최고 해수욕장의 위치에는 송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송도는 비단 해수욕장뿐만 아니라 케이블카, 구름다리, 해상 다이빙대, 포장 유선, 보트, 붕장어회 등 수많은 명물을 가진 전국적인 복합 놀이 문화 공간이었다. 송도는 부산 사람에게는 자랑거리었고, 타지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얼마 전 필자가 페이스 북에 송도 해수욕장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수도권에 사는 어떤 사람이 송도는 인천에 있는데 부산에도 송도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긴 부산에 사는 젊은 사람들도 송도를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니 당연한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송도는 낯설다. 송도의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이제 송도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낡은 흑백 사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나 줄곧 서구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30여 년을 공기업에서 근무하다 얼마 전 은퇴하고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서중율[57]에게 송도는 어떤 곳이었는지, 그가 기억하는 송도는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놀 것도 갈 곳도 마땅찮던 내 어린 시절 송도는 최고의 놀이터였고, 가난하고 어렵던 청년기엔 최고의 데이트 장소였다.”
일본인들의 송도 해수욕장 개발
개항 후 본격적으로 부산에 정주한 일본인들은 처음에 초량 왜관이 있던 용두산 주변에 모여 살았다. 온천욕과 해수욕을 즐기던 일본인들이 부산에 거주하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지금의 남포동 자갈치 시장 일대인 남빈(南濱) 해변의 자갈밭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이후 점차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신창동, 부평동, 부민동 등 보수천 일대로 시가지가 확장되었고, 여기서 나온 각종 생활 오폐수가 남빈 해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로 인하여 남빈 해변에서 물놀이하기가 적합하지 않게 되자 일본인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었다. 그 결과 도심에서 가까우면서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가진 송도가 자연스레 주목을 끌었다.
송도(松島),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소나무 섬’이다. 그런데 송도 해수욕장, 그러니까 행정 구역상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일원에 소재한 이곳에 소나무 섬은 없다. 섬이라고는 아주 작은 바위섬인 거북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송도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거북섬에 소나무가 자생적으로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고 해서 송도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데, 거북섬의 규모나 지형적 특성을 봤을 때 여기에 소나무 숲이 울창했을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송도가 개발되기 전 오래된 옛날 사진을 보더라도 거북섬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그냥 바닷가 암초 덩어리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에서는 거북섬이 아닌 송림 공원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송도 해수욕장 동쪽 끝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작은 언덕인 송림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의 지형이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작은 반도(半島) 형태이고, 그 위에 해송(海松)이 울창하게 자라 있어서 여기의 해송과 반도가 결합하여 송도라는 지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송도에서 나고 자라서 수십 년을 송도에서 살고 있으며, 송도 인근의 사하구 감천동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이미숙[60]에게 송도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기게 됐는지 지명의 유래에 대해 물어봤다.
“이름의 유래? 내는 그런 거까지는 모르지. 그저 옛날부터 어른들이 백사장 끝에 송림 공원 있는 데에 소나무가 많아 송도라 불렀다고 하더만.”
그 말을 들으니 송도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것에는 필경 소나무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송도 해수욕장은 1913년부터 일본인들이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는 니혼산케[日本三景]의 하나로 마쓰시마가 있다. 이 마쓰시마를 한자로 쓰면 송도(松島)이다. 일본인들이 한적한 부산 암남동 어촌 마을에 해수욕장을 개발하면서 자신들에게 친숙한 송도라는 명칭을 끌어와서 일본인들에게 선전하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송도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부산 이외에 인천에도 송도가 있고, 원산에도 송도가 있다. 공교롭게도 부산, 인천, 원산 세 곳은 모두 초기 일본 개항장이었다. 왠지 앞의 송도 유래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일본인들이 송도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교통 문제였다. 당시 부산에서 송도로 가는 길이라고는 천마산을 따라 난 오솔길인 송도 웃길이 유일한 길이었다. 사람들은 녹정[완월동] 유곽 앞을 지나 산길을 따라 걸어서 송도까지 가야 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배를 대절해서 송도로 가기도 하였다.
송도가 이처럼 교통이 불편했음에도 그 이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이 되었다. 각종 위락 시설들이 하나둘씩 들어섰고, 해수욕장 서쪽 바위산[덕성관 주변]을 깎아 제2 송도 해수욕장[2사장]도 개장하였다. 조선인들은 모지포 쪽 어촌에 살았는데, 벌거벗고 해수욕을 즐기는 일본인들을 상놈이라 불렀다고 한다.
1925년을 전후해서는 남빈과 송도 사이를 운행하는 정기 순항선이 생겼고, 또한 송도 웃길이 신작로로 정비되어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됨으로써 교통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배편과 차편이 마련되면서 송도는 여름철의 해수욕장을 넘어 사계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종합 유락지가 되어 갔다. 부산 시내 각급 학교 학생들의 주요 소풍지가 되었고, 각종 관공서, 사회단체, 친목 단체들의 모임과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나아가 고급 요정들도 하나씩 문을 열고, 부산권번의 예기들까지도 수시로 출입하였다.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송도는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전국 제일의 해수욕장이자 부산을 대표하는 유원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6·25 전쟁 시기에는 전쟁의 고통과 피난살이의 힘든 일상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송도를 찾아 지친 심신을 달래고 휴식을 취하였다. 특히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면서 서울에서 피란 내려온 많은 유명 인사들이 송도를 찾았다. 전쟁의 난리 통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이 자신들의 욕망을 분출하는 곳으로 삼으면서 송도는 일종의 해방구 구실도 하였다. 일부 권력층은 대낮부터 요정에 출입했고, 카바레를 비롯한 많은 유흥 시설들이 새롭게 생겨나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한편, 전쟁으로 전시 연합 대학이 만들어지고 각 대학들이 부산에 문을 열면서 송도에는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등의 임시 교사가 들어서기도 하였다.
해수욕장에서 다이빙을?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던 송도는 1960년대 절정을 맞이한다. 1963년 부산직할시가 될 당시 부산의 인구가 130만 명 정도이던 시절에 송도를 찾은 여름 피서객 수가 무려 350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송도는 전국 제일의 해수욕장이었다. 매년 여름이면 송도 해수욕장 백사장은 피서 인파로 넘쳐나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송도로 가는 차편이라고는 충무동 로터리와 송도를 오가던 시내버스가 유일하였다. 1940년 무렵 남항 일대가 매립되면서 새롭게 송도 아랫길이 만들어졌지만 이 길은 충무동 로터리에서 남부민동 남항 방파제까지만 난 길이었고 지금처럼 송도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서고 있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미숙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의 서구청 앞에 ABC 볼링 센터가 있는데, 그 앞에서 버스를 타면 송도 웃길로 해서 송도 곡각지, 그러니까 지금 송도교회가 있고 육교가 있는 데서 내려 백사장까지 걸어 내려갔지. 그런데 버스가 하루에 몇 번밖에 안 다녔기 때문에 버스를 한 번 타려고 하면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거든. 그래서 버스 안타고 걸어서 송도까지 가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1961년 7월 16일자 『부산 일보』 기사는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올 여름 들어 첫 대목을 맞은 송도 업자들은 신바람을 내고 있었으나 이날 상오는 손이 적고 보트, 뜨게, 수영복 장수들이 호경기였다. 바다의 벌거숭이들의 8할은 중·고등, 국민학교 학생들이 차지했고, 그 밖에 가족 동반들도 많다. 25분마다 왕래하는 만원 버스와 택시로 송도~충무로 간은 두 줄로 차량이 늘어서 오가고 해수욕객의 반수는 도보로 땀을 짜는 장사진이 송도 가는 아랫길 웃길로 충무로까지 연달았으며, 정오 지나면 인파는 폭발적일 것 같다.
1960년대 중반에 송도 아랫길이 연장되어 충무동에서 송도까지 연결되었지만 버스는 여전히 송도 웃길로만 다녔다. 서중율은 버스를 타지 않고 항상 걸어서 송도에 갔다고 한다.
“1970년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송도 가는 버스는 16번 영신버스 하나밖에 없었는데, 버스비가 없기도 했거니와 친구들과 걸어서 가면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걸어서 송도에 갔다.”
물론 서중율도 광안리 해수욕장이나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해수욕을 갈 수 있었지만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송도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훨씬 유리하였다고 한다.
“걷느라 땀범벅으로 송도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 백사장에 구덩이를 파고 파묻었지. 하드 꼬챙이를 표식으로 꽂아 놓기도 하고……, 뭐 요즘이야 탈의실이니 샤워장이니 잘 되어 있지만 그땐 다들 그랬다. 더구나 수영복이란 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다닐 땐 홀딱 벗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입고 왔던 팬티만 입고 물에 들어갔다가 대충 말려서 그대로 옷을 입고 집에 왔지.”
하지만 그가 송도를 고집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해상 다이빙대 때문이었다. 송도가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로 이 다이빙대를 빼놓을 수가 없다. 요즘이야 대형 워터파크가 도처에 있지만 당시는 변변한 실내 수영장 하나 없던 시절이라 다이빙대라는 것을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마땅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없던 당시에 송도 해수욕장에는 바다 한가운데에 3단 다이빙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했고, 여기에 한껏 실력을 뽐내며 다이빙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 또한 큰 볼거리였다.
송도 다이빙대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는데 1사장 앞 150m 정도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콘크리트 지지대 위에 쇠로 된 몸체와 3단 형태의 나무 발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이빙대 아래는 수심이 4~5m 정도로 다이빙하기에 적합한 깊이였다.
“다이빙대에 가려면 백사장에서 100m 이상을 수영해서 가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수영 실력으로는 가기가 쉽지 않았어.”
서중율은 짐짓 수영 실력을 뽐내며 말하였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2~3m 높이의 1단이나 2단에서 다이빙을 했는데, 다이빙이라기보다는 그냥 물에 뛰어드는 수준이 정확하겠다. 그런데 5m 정도 높이의 3단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바다 속에 뛰어드는 청년들도 더러 있었지.”
송도 해상 다이빙대는 수없이 많은 태풍을 맞으면서 여러 차례의 위기를 이겨냈지만, 1987년 불어 닥친 태풍 셀마로 인해 크게 파손되어 흉물로 방치되다 결국 철거되었다. 다이빙대에 유달리 애착이 강하였던 서중율은 송도 해수욕장이 다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한 방안으로 다이빙대의 재설치를 첫째로 내세웠다.
“송도 다이빙대는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유일한 해상 다이빙대였다. 지금 부산에 해운대를 비롯해 해수욕장이 많지만 다이빙대가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왜 다이빙대를 철거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다이빙대만큼은 꼭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던 그의 바람이 얼마 전에 실현되었다. 부산광역시 서구청은 송도 해수욕장 개장 100년을 맞은 2013년 올해 송도의 상징과도 같던 해상 다이빙대를 해수욕장 개장에 맞춰 25년 만에 새롭게 설치하였다.
비록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부활한 해상 다이빙대는 서중율과 같이 옛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산의 젊은이들이나 타지에서 온 피서객들은 바다 한가운데 설치된 다이빙대를 마냥 신기해하며 바다 다이빙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새로운 추억이 생길 것이다.
케이블카와 구름다리: 전국 제일의 신혼 여행지
송도는 백사장을 찾은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여름뿐만 아니라 봄부터 일 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단 바닷물에 해수욕을 하지 않더라도 송도에는 즐길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상 케이블카와 구름다리는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부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위락 시설을 갖춘 휴식 공간이 많지 않았다. 송도는 부산 시내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수많은 시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수십 개의 호텔과 여관을 가지고 있던 송도는 타지 관광객, 특히 신혼부부의 신혼 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다. 성업 중이던 고급 요정들이 더해져 일본인 등 외국 관광객까지 끌어들였다. 1사장과 2사장의 중간에 있던 덕성관은 박정희 소장이 5·16을 구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김현욱이 초대 부산직할시장이 되었다. 부산시는 시민에게 편의 시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유엔군 및 외국 관광객에게 휴양 시설을 제공하여 외화를 벌 목적으로 송도와 태종대를 연결하는 케이블카 설치를 구상하고 송도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김현욱은 ‘불도저 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 사업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민간 사업가에 의하여 1964년 4월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다. 송도 케이블카는 지금의 송도 탑스빌 아래에서 송림 공원 끝 거북섬까지 약 400m 구간을 운행한 부산 최초의 케이블카로, 이것의 성공을 바탕으로 후에 금강 공원에도 케이블카가 생겼다.
“케이블카는 2대가 30분 간격으로 왕복 운행했는데, 대개는 15명 정도가 탔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정확하지는 않은데, 요금은 1970년대 기준으로 아마 한 100~200원쯤 했었던 것 같고, 왕복 요금하고 편도 요금이 달랐어.”
송도 아지매 이미숙의 설명이 이어진다.
“지금 송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탑스빌 바로 옆에 거북 맨션이라고 있는데 그 밑에가 큰 바위거든, 그 바위 위에 삼사 층쯤 되는 케이블카 탑승장 건물을 지었다. 반대편 거북섬에도 비슷한 탑승장 건물을 지었고. 그런데 나는 송도에 살았어도 케이블카는 지나다니는 거 구경만 했지 타 본건 사실 한두 번밖에 안 되는 거 같다. 돈도 돈이었지만 딱히 재미가 없더라고. 우리 동네 경치야 만날 보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구름다리는 여러 번을 건너다녔지.”
케이블카가 설치된 이듬해인 1965년에 길이 약 100m의 구름다리가 놓이면서 송도의 또 다른 상징물이 되었다. 해변과 불과 70m 떨어져 있는 거북섬은 섬 아닌 섬이다. 오랜 시간 구름다리와 케이블카로 연결된 인위적인 반 육지였기 때문이다. 다리와 케이블로 연결되기 전에도 거북섬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루 두 차례씩 밀물과 썰물 때면 육지와 섬이 연결되었다. 그것도 2개씩이나 길이 열렸다. 구름다리가 가설되기 전의 옛날 사진을 보면 거북섬과 육지 사이에 2개의 바닷길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구름다리가 놓인 이후로는 영업상의 이유로 준설을 한 탓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걸어서는 거북섬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구름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거북섬하고 그 앞에 선창 사이를 다니는 배가 있었다. 어릴 때이기도 하고 하도 오래돼서 요금이나 이런 건 기억이 전혀 안 나네. 아무튼 거북섬에 들어갈 때 케이블카를 타고 간 사람들이 다시 나올 때는 구름다리를 건너서 나오기도 했었지. 구름다리는 요금이 18원인가 20원인가 했던 거 같은데 영화관처럼 조조할인이 있었어.”
이미숙의 기억을 보완하기 위하여 서중율에게 구름다리 요금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1970년대 버스 요금하고 비슷했던 것 같다.”
옆에서 그의 아내 김경수[54]가 거들고 나섰다.
“요즘은 구름다리보다 더 좋은 다리도 많지만 당시는 거북섬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에 돈이 아까워도 다들 구름다리를 이용했죠. 고작 다리 하나 건너려고 돈을 낸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고, 막상 섬에 들어가도 그다지 볼 건 없었어요.”
사실 거북섬에 들어가 봐야 별거 없었다. 인위적이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 건물 대여섯 동이 들어서 있었고, 이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케이블카 탑승장과 대부분 횟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케이블카와 구름다리를 통해 섬 아닌 섬 거북섬에 들어갔다. 그것도 비용을 지불하고서 말이다. 김경수가 남편을 장난스런 얼굴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구름다리를 건넜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다리를 건널 때는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마냥 신나 했었는데, [남편을 힐끗 쳐다보며] 꼭 다리 중간에서 짓궂게 발을 세게 굴러 다리를 출렁이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나는 겁이 나서 소리를 마구 지르고, 그렇게 다리를 다 건너오면 또 돈 생각이 나고 그랬어요.”
필자 역시 어린 시절 구름다리 위에서 좌우로 발을 구르거나 콩닥콩닥 뛰면서 다리를 출렁이게 하며 동생들을 겁주던 기억이 있어 그녀의 말이 새삼스러웠다. 섬과 육지 양쪽 끝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거기에 나무다리를 매달아 구름처럼 허공에 둥둥 떠서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케이블에는 그리스(grease)[윤활유]가 잔뜩 발라져 있었는데 다리 위에서 장난치고 놀다가 손에 그리스가 묻어 난감해 했었던 것도 생각이 난다.
“나는 고향이 경상남도 산청이고, 커서는 전포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해수욕장은 광안리로 가기도 했었지만 고향에서 친척들이 오면 부모님은 꼭 송도로 모시고 갔었어요. 예전엔 부산에 마땅히 가 볼만한 곳이 딱히 없었는데 송도엔 보고 즐길 것들이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얘기하는 김경수뿐만 아니라 다른 부산 사람도 친지들이나 손님이 오면 으레 송도로 안내하였다. 지금이야 신혼여행을 다들 해외로 나가지만 1980년대에는 제주도로 많이 갔다. 하지만 그 이전 1960~1970년대에는 송도가 최고의 신혼 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다. 더불어 섬과 육지가 케이블카와 다리로 연결된 거북섬은 일약 전국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유람선, 유선, 보트. 어떤 배를 타고 놀까?
1970년대 서수남과 하청일이 불러 크게 유행한 「팔도 유람」이란 가요의 출발지이자 종착지가 바로 송도였다. 송도에는 해수욕장과 케이블카, 구름다리 말고도 또 다른 즐길 거리가 있었다. 바로 뱃놀이였다.
송도에 있던 놀잇배는 모두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유람선인데 45명 정원의 큰 배와 20명 정원의 작은 배 2척이 태종대에서 두도까지 코스와 거북섬에서 두도까지 코스를 운행하였다. 지금도 태종대나 오륙도 앞바다를 도는 유람선이 운행하고 있어 부산 사람에게 송도 유람선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아 보인다.
반면 놀이만을 위해 특화된 놀잇배인 포장 유선은 그야말로 송도의 명물이었다. 송도 포장 유선은 모두 40척 정도가 있었는데,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내가 남성여자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놀잇배가 있었으니까 아마 1960년대 중반부터 장사를 한 모양이다. 1사장에서 배를 타서 지금의 암남 공원 근처까지 한 두 시간 정도 배를 탔는데, 요금은 사람 수에 관계없이 시간당 계산했지. 1970년대에 여름에는 6~7천 원이고, 겨울에는 3~4천 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미숙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놀잇배는 뱃사공이 노를 저어 다니던 작은 나룻배였다. 배 양쪽으로 하얀 천막이 덮어 씌워져 있어 한여름 뜨거운 햇볕을 막아 줬고, 뱃사공하고 손님 사이에도 천막이 쳐져 있어서 뱃사공 신경 안 쓰고 놀 수 있었지. 예닐곱 명 정도가 한 배에 탔는데, 보통 가족 단위로 타거나 연인끼리 탔는데 연인끼리 탈 때는 낯선 두 쌍이나 세 쌍이 조를 짜서 배를 같이 탔지.”
그러면 한두 시간 동안 그냥 배만 타는 거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물론 배만 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뱃사공하고 연결된 횟집들이 다 있어서 생선회를 시켜 배에서 술도 마시고, 해녀들이 따온 해삼, 소라, 굴, 피조개 같은 해산물을 사서 먹기도 했지. 술에 취해 노래도 부르고 연인들은 손도 잡고……, 참 낭만이 있었는데.”
하지만 포장 유선을 이용한 뱃놀이는 가족 나들이나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 남녀라면 한번쯤 이용해 볼만했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금전적인 부담이 있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보트를 탔다. 송도에는 250여 척의 2~3인용 간이 보트가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하고 걸어서 송도에 간 이유 중에는 주머니가 가벼웠던 탓에 버스비를 아껴 보트를 타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 보트는 한 시간 타는 요금이 천 원 정도여서 친구들과 돈을 모아 탔었는데, 보트를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서중율은 놀잇배는 타본 적이 없지만 버스비를 아껴 친구들과 보트를 종종 탔었다고 하였다. 필자도 송도에서 보트를 탔던 기억이 남아 있다. 꼬맹이였던 필자와 동생을 앞에 태우고 아버지가 보트의 노를 저어 물놀이 하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지나가면 필자와 동생은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벌써 삼십 년도 지난 옛날 기억이다.
40여 척의 포장 유선은 사람들이 송도를 외면하던 1980년대 들어 하나둘씩 줄어들다가 88 서울 올림픽을 전후한 시기에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도 1990년대 말까지 몇 척의 배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하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 송도 연안 정비 사업으로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보트 역시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
아나고 한 사라 하이소: 송도, 부산 사람의 기억에서 멀어지다
송도 해수욕장은 흰 모래사장과 병풍처럼 둘러선 뒷산 송림의 자연 풍치와 모든 시설이 좋아서 여름 요양지로 적격이다. 교통편은 버스가 수시로 다니고 있으며, 시설 좋은 여관이 많아 숙박에 불편이 없다. 오락 시설도 갖추어져 있어 케이블카, 회전 그네, 유람선 등이 많다.
이것은 1970년대 초 서울의 한 유명 백화점에서 수영복을 판매하며 송도 해수욕장을 소개하던 문구다. 송도를 최상의 조건을 갖춘 해수욕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은 서서히 송도를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부산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200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중구, 서구, 동구 등 원도심은 포화 상태에 빠졌고, 외곽 지역으로 빠르게 도시가 확장되었다.
도심의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각종 생활 하수가 그대로 바다로 유입되었다. 항상 어선들로 가득한 남항에서는 기름이 대거 유출되었다. 부산 앞바다의 수질이 점차 악화되면서 도심과 가까이에 있던 송도 해수욕장의 수질도 급격하게 나빠져 갔다. 해수욕을 즐기기에 부적합한 수질뿐만 아니라 번잡한 도심 한복판을 지나야 하는 교통 체증도 송도의 발목을 잡았다.
이제 사람들은 송도가 아니라 보다 쾌적한 광안리나 해운대로 몰려갔다. 어떤 이는 더 멀리 송정까지도 갔다. 게다가 1970년대 들어서는 부산시에서도 의욕적으로 해운대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1980년대가 되면서 송도는 더 이상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되면서 송도의 명물 케이블카와 구름다리가 영업을 중단하고 방치되다가 철거되었다. 놀잇배와 보트도 사라져 갔다. 태풍에 다이빙대마저도 파괴되었다.
“아나고회 한 사라 하이소!!”
그나마 송도에서 명맥을 유지한 건 횟집뿐이었다. 일본말인 아나고[穴子]는 붕장어로, 고급 어종은 아니지만 뼈째 씹어 먹으면 고소함이 단연 일품이다. 회초장에 찍어 깻잎이나 상추에 싸먹으면 그 맛의 조화가 끝내준다. 필자도 참 좋아한다. 붕장어는 원래 통영 앞바다에서 잡아 왔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대량 수출될 정도로 송도 아나고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났다. 거북섬 앞 선창 방파제에 늘어선 붕장어 통발과 늘어선 횟집들은 장관을 이루었다.
지금은 자갈치나 광안리 횟집이 유명하지만 1960~70년대 당시엔 단연 송도 횟집이 유명하였다. 해녀들이 송도 앞바다에서 막 따온 싱싱한 각종 해산물도 빼놓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송도를 외면하고 떠나갔다. 그래도 아나고회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도 송도 횟집을 찾는다. 물론 송도 횟집들도 예전만 못하다.
“송도 해수욕장에서 혈청소 가는 길이 지금은 암남 공원으로 정비도 되고 차도 많이 다니고 하는데 예전에는 진짜 한적하고 좋았다. 가진 돈도 없었지만 워낙에 경치가 좋고 조용해서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멋진 데이트 코스였지.”
지금도 서중율과 김경수 부부는 송도 백사장 끝에서 걸어서 암남 공원을 한 바퀴 돌곤 한다고 하였다.
“암남 공원 쪽이 정비가 많이 됐는데 케이블카, 구름다리, 다이빙대, 놀잇배 이런 것들이 도심 바로 옆에 있던 곳은 송도밖에 없었다. 이것들은 복원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 것 같지도 않은데, 복원이 되면 나처럼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송도를 다시 찾을 것이고, 새로운 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다.”
서중율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부산광역시 서구청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송도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백사장도 훨씬 넓어졌고, 주변 환경도 대폭 정비되었다. 그 결과 2010년대 들어서는 사람들이 다시 송도를 찾기 시작하였다. 올해는 송도 개장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들이 송도에서 열리고 있다. 과연 송도가 다시 부산 사람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해수욕장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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