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1654-1689)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원(士元)이며, 호는 정재(定齋)이다.그는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현령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그는 후에 서계의 삼형 박세후(朴世垕: 1627-1650)에게 출계하였다.
그는 명재 윤증의 대표적인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명재 윤증과는 외삼촌과 생질의 관계이기도 하다.
박태보는 호남 암행어사,파주 목사등의 벼슬을 역임 하였고 1689년 기사 환국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도중 옥독으로 노량진에서 36세의 일기로 죽었다.

그의 묘 오른쪽에 독특한 비석이 눈에 확 들어온다.
비문 앞면에는"조선 통훈대부 홍문관 부응교 이조판서 문열공 박태보 지묘,정부인 전주이씨 부좌"라고 쓰여 있다.
조선 사대부 비문 앞머리에 등장하기 마련인 '有明'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명에 대한 사대(事大)정신이 싫어서일까?
비문 뒷면에는 고인들에 대한 기록이 쓰여져 있다.

묘역 잉(孕) 그 뒷쪽에서 바라본 정경이다.
그 묘역 앞에는 도봉산 만장봉이 듬직하게 안산(案山0으로 지켜주는 기가 막힌 곳이다.
숙종 15년인 1689년 음력 5월5일 아침 노량진.
서른여섯의 박태보는 형장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여 아버지 박세당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조용히 돌아가라!”
“조용히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냐?"
"고향 선산에 묻어 주세요."
"그렇게 하마!"
아버지 서계 박세당은 아들 정재 박태보와의 약속과는 달리 이곳에 아들을 묻었다.

"어찌된 죽음인가?
박태보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희빈을 들인 시대를 살았다.
이 사건을 두고 여러 사극이 나왔기에 사람들은 그 시절의 곡절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른 선비 박태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태보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였다.
스물네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가장 뛰어난 젊은 문인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친을 닮아서인지 허리가 뻣뻣하여 불의에 몸을 굽히지 않았다.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친분을 돌아보지 않고 공정하게 비리를 보고하여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고,
파주 목사로 나가서는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라고 한 국가의 명을 어기고 존속시켰다가 파직되었다.
박태보의 절개는 목숨을 걸고 1689년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한 일에서 가장 빛을 발하였다.
뛰어난 글재주로 폐위 반대 상소문을 기초하였기에 숙종의 진노를 샀고 이 때문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함께 일을 도모한 선배들의 만류에도 당당하게 자신이 앞장섰음을 밝혔다.
뼈가 부스러지고 살이 타는데도 얼굴빛을 편안히 하고 아프다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화가 난 숙종은 압슬형(壓膝刑)을 명하였다.
양쪽의 널빤지 사이에 두 다리를 놓고 날카로운 사금파리를 두 섬씩 깔고 덮은 다음
긴 널빤지 위에서 건장한 군사가 세 명씩 올라가 널뛰기를 하는 형벌이었다.
사금파리와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박태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숙종은 숯을 두 섬 벌겋게 피워 넓적한 쇠붙이를 달구어 나무에 거꾸로 매단 박태보의 몸을 지졌다.
낙형(烙刑)이다. 달군 쇠를 교대로 지져대니 벌건 기름이 끓어 넘쳤고 누린내가 코를 찔렀다.
숙종이 어쩌지 못하여 유배를 보내었지만, 박태보는 유배지에 이르지 못하고 노량진에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2013년 4월 26일자 한겨레신문 이종묵 교수(서울대 국어국문학과)의 '박태보의 매운 절조가 그리운 까닭'에서-

한강 나루터 승경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노량진 언덕이다.
지금은 언덕의 허리가 잘리고 육중한 시멘트 구조물이 들어섰다.
그 아파트 정문 오른 쪽에 회색 바탕의 돌에 검은 색 판에 흰 글씨를 한 '노강서원터' 표석이 있다.
정재 박태보가 세상을 떠난 자리이다. 숙종은 뒤늦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노강서원을 세우도록 한다.
노강서원은 인현왕후 폐출 반대를 죽음으로써 간언하였던 정재 박태보의 뜻을 기리고, 지방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하여
숙종 21년에 서울 노량진에 건립한 서원으로 본래 이름은 '풍계사'였다. 숙종 23년에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노강’으로 사액받았다.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지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였다.
지금 건물은 1969년에 의중부시 장암동으로 옮기면서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청절사의 터에 다시 지은 것이다.
" 노량진의 노강서원은 1950년 한국전 이후 피난민의 삶의 터전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워 그 서원터를 그들에게 팔고
수락산 자락 현재의 위치로 노강서원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종부 김인숙여사-

박태보가 노강서원에 모셔진 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색(男中一色) 바로 꽃미남'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염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말할 수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 박세당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아버지 박세당이 아들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 장애가 될 것이라고 훈계하므로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인현왕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을 잘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고문으로 생긴 장독과 화상이 심해 친구 집이 있던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 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을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젊고 기개가 곧고 대단하였던 정재 박태보를 기리는 '노강서원'이다.
지금 건물은 1969년에 의중부시 장암동으로 옮기면서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청절사의 터에 다시 지은 것으로
맞배지붕의 사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재 박태보가 숙종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올린 상소문으로 만든 병풍이다.
이 상소문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그 자리에 앉히려는 것에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노강서원을 새로 지으면서 독특한 장엄으로 치장을 하였다.
편액이 있는 서원 바깥 좌우에 힘차게 웅비하려는 얼굴 모습의 용 두마리를 배하였다.


서원 안에는 황룡과 청룡 두 마리의 꼬리를 배치하는 독특한 장엄으로 치장하였다.

“장(杖·곤장)으로 입을 치라.”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 매우 쳐라! 매우.”
“어느 곳을 지져야 되는가?”
조선 숙종이 실제로 했던 말이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는 데 반대 상소를 올린 전 파주 목사 박태보를
밤새 국문하면서 가혹한 고문을 하라는 명을 직접 내렸다.
숙종의 국문은 숙종실록 15년(1689년) 4월 25일 자에 등장한다.
박태보 문집 ‘정재집’ 은 더욱 기가 막히게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주상(숙종)이 매우 노하여 말이 빨랐고 대부분 상스러운 말로 하교했다.
그래서 사관들이 그 말을 글로 빨리 옮겨 쓰지 못하고 붓놀림이 지체됐다.
공(박태보)이 이를 보고 ‘몸을 꽁꽁(必자 모양으로) 묶고
무우석(無隅石·뭉우리돌)으로 입을 쳐라’라고 쓰지 못하고 지체하느냐며 혀를 차고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