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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소설가 , 경남소설가협회 회원이 <경남소설> 2012. 제7호에 단편소설 "장마 예보"를 발표하였다.
단편소설 장마 예보 박혜원
9시 30분. 어김없이 약이 나왔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쓰다. "몸은 유기체라서 모든 부위가 다 연관돼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자궁 보강를 위해서 약을 좀 바꿨어요. 그래서 좀 쓸 겁니다." 주치의가 마지막 침을 뽑으면서 하던 말이 떠오른다. 체온은 37.5도 C, 혈압은 60에서 90. 좋은 상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을 만큼 나쁜 것도 아니다. 늘 그렇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상태다. 발끝에서부터 미세한 전류가 찌르르 타고 오른다. 전침을 꽂은 것보다 더한 통증이 손끝을 타고 올라와 허리를 찌른다. 침대에 몸을 길게 눕힌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온몸을 파고들어 육신이 시트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다. 눅눅한 바람이 창문 너머로 스며든다. 그 바람에 희미한 밤꽃 냄새가 묻어서 파고든다. 창 밖 숲에는 안개가 희뿌옇게 깔려 있다. 장마가 예보되었다. 맞은편 침대의 할머니가 튜브를 코에 끼운 채 멍한 눈길을 보낸다. 나는 눈을 감아버린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동굴 같은 그녀의 동공이 내 몸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할머니가 입원한 이래 반 년 넘게 일요일마다 찾아온다는, 와서는 한 시간 동안 아무 말없이 자기 아내를 바라보다 돌아가던 할아버지의 우울한 얼굴이 떠오른다. 할머니의 목구멍에 꽂힌 흡인기의 구멍만큼이나 어둡던, 무덤 같은 표정이었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어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들면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먼저 따라나설 듯, 이미 모든 욕망이나 갈증을 거둬들인 체념이 할아버지의 걸음을 앞서가는 것 같았다. 지난 밤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밤내 끌려 다녔다. 털어버리고 싶은 애착들. 그 망상에서 벗어나려고 홀로 이곳에 왔는데 마음의 고리는 집요하게 여기까지 따라와서 자리 잡고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의 아픔을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상처받기도 싫었다. 그러나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곳의 생각들이 더욱 강하게 휘감겨 들었다. 매일 아침마다 꽂히는 세침細針처럼 끝없는 잡념들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건, 어차피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예요. 그러니까 병원엔, 혼자 가겠어요. 가서 하라는 대로 해 볼게요." "그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몸이나 낫게 하고 와." 남편은 무심한 듯 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함께 가겠노라고 하지 않는 남편의 메마른 표정이 서운했다. 눈을 뜬다. 하얀 빛깔로 부풀어 오른 벽면의 빈 칸들이 상장喪章처럼 떨어져 내린다. 안개가 침대 머리맡에까지 밀려온다. 다시금 통증이 다리를 거쳐 아랫배로 가슴으로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누구나 제각기 자신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감싸며 침대 깊숙이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몸을 눕히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10시. 주치의의 회진이 막 끝났다. 여일한 시간이 병실을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시계를 올려다보며 마음이 급해진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주부 백일장, 여류문인협회 주최 병실을 돌아다니는 신문에서 얼핏 본 기사 조각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그 기사의 문구를 보는 순간부터 나는 오늘의 외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병원규칙상 입원 환자의 외출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 기사의 문구는, 며칠 전부터 나의 작은 일탈을 종용해 왔던 것 같다. 별다르게 무슨 목적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피처처럼 이곳을 향해 홀로, 먼 길을 허위허위 오게 한 그 무엇이 그곳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기대감과 목마름이 나를 내내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생명을 키워내지 못하는 내 마음과 몸을 다시금 살아나게 할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며 재촉하는 것 같아,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본다. 마침내 나는 침대를 내려선다. 그리고 환자복 상의를 벗는다. 사물함에서 꺼낸 나의 옷은 때늦은 긴팔이다. 상관없다. 나는 긴팔 셔츠를 입는다. 간병인들 눈이 둥그레진다. "잠깐 나갔다 올 거예요." 7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을 뛰게 하는 설렘이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것을 느낀다. * 아스팔트 길 위에 하늘이 한껏 내려앉아 있다. 보이진 않지만 증기 속에 숨은 해가 열기를 뿜어내 지면은 눅눅하고 공기는 후텁지근하다. 꽤 오랫동안 택시를 기다리며 길가에 서 있지만 한 대도 오질 않는다. 아까부터 허리가 무지근하게 아프고 종아리가 당기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택시가 한 대도 보이질 않는다. 택시 승강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아스팔트 길을 내다본다. "웬일이야? 파업인가?" "맞아. 그러고 보니 택시들 파업한댔어. 뉴스에서 본 것 같애." "그게 오늘인가? 에이 뼝신들!" 사람들은 누구를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욕지기를 뱉고는 아스팔트로 내려서거나 몸을 돌려 버스정류장을 향한다. 나도 그들을 따라 눅눅한 길을 걷는다. 군데군데 뜯겨나간 아스팔트 바닥은 전단들로 어지럽다. 마사지, 키스방, 단란주점의 상호를 찍은 원색 딱지들이 때 이른 낙엽처럼 깔려 있다. 지난밤 쓰고 버린 욕망의 찌꺼기들처럼 너저분하고 추레하다. 발바닥에 전류가 통하는 것처럼 통증이 파고든다. 정말 이젠 온몸 구석구석 예기치 않게 불쑥불쑥 통증이 찾아든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버스정류장으로 다가선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거리에 널린 전단들처럼 어지럽게 뒤엉긴다. 그들은 서로를 밀치며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길이 막힌다. 차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다 멈추고 나가다 또 멈추기를 반복한다. 승객들 얼굴에 짜증이 어린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밀리는군." "택시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밀려? 또 한판 붙었나?" "데모는 파업 안 하나?" 운전수가 신경질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아댄다.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보조기를 댄 허리에 힘이 몰린다. 보조기 없이 홀로서기조차 힘든 자신의 모습에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병원에 입원하던 첫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통증이 몸 곳곳을 파고들었고 복도 끝에서부터 꿈같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탈진한 육신을 더욱 깊은 허무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혼자라는 사실이 몹시도 두려웠다. 그 순간 칼로 베는 것 같은 통증이 아랫배를 훑고 지나갔고 또다시 한 뭉텅이 하혈을 했다. 다음 날 아침 7층 높은 창틀까지 빵부스러기를 찾아 날아든 비둘기를 보았을 때 그리고 그 날짐승의 왕성한 생명력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시트 자락을 덮어쓰고 숨죽여 울었다.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검사가 끝나고 지쳐 누워 있을 때 그가 왔다. 그는 가운을 벗고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힘들지? 너 보고 퇴근하려고……." "너 덕분에 빨리빨리 진행된 것 같다. 병원엔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더니……." "내일 한두 가지만 더 검사하면 돼.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뭐한 거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련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잘난 척하기는? 그나저나 어때? 늦게 차린 살림이라 재미가 쏠쏠하지?" "그래, 깨가 막 쏟아진다. 남자 여자가 같이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쉽게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그저 공존하는 거다, 하고 살아야지." "근데, 내일부터는 육인실로 바꿔 달랬다. 아무리 니가 있어도, 내가 뭐, 특실에 있을 만큼은 아니니까." "어쩌면 그게 정신건강에 나을 수도 있겠네. 잘 생각했다. 어쨌든, 너 편한 대로 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래야 병도 낫지." "이제 들어가. 집에서 기다릴텐데." "생각해 보니까, 우리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더라. 그래서 너와 나를 위해 장미꽃 좀 샀지. 간호실에 맡겨 놨으니까 나중에 찾아와……. 그런데, 삼십이면 이립而立이라는데, 이렇게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 어떡해? 하긴 형은, 시간보다 앞서가려는 사람이니까, 니 허리가 휘청거리기도 하겠지. 뛰는 사람은 뛰어가게 두고 서 있는 사람은 그냥 느긋하게 서서 봐 주기만 해. 그래야 병도 안 나지." 시퍼렇게 날선 언어를 휘두르던 그의 모습은 조금 나온 뱃살과 함께 무디게 깎였고 그의 예리하던 영혼에도 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간호원의 손을 통해 그의 꽃을 전해 받으며 잠깐 사이좋게 과거가 되었던 시간을 생각했다. 그러나 어둠 속으로 그는 사라졌고 나는 다시 밤새 혼자 앓았다. 차창 밖으로 태양이 뿌옇게 퍼지고 기온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가로수마저 무망한 얼굴로 한 점 바람도 일으키지 않는다. 옛날의 뜨거웠던 시간들조차 지금은 한 장의 순간사진으로 떠올리고, 무척이나 긴 시간의 이야기도 단 몇 구간의 버스가 달리는 거리로 줄여 버리는 것을……. 창밖으로 무심히 지나치는 얼굴들. 나는 창 안에서 그들을 쳐다보고 그들 또한 지나가는 차창에 어린 하나의 그림자를 일별할 뿐이다. 모든 사물이 무심히 흘러간다. * "어머나, 접수시간이 끝났는데요? 원고마감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도 한 번 해 보시겠어요?" 공원 벤치에서, 자가용 안에서 대회장 곳곳에서 원고지를 붙들고 있는 게 무슨 폼 잡는 일 같아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다. 이걸 해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병원을 나와 이곳을 찾은 데에는, 그냥 돌아서기에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남아 있다. 선심처럼 주어진 30분이라는 시간과 원고지를 받아들었을 때 시계는 마감시간에 거의 임박해 있다. 식순이 붙은 게시판 뒤쪽에 자리를 잡는다. 원고지를 바닥에 놓고 읍한 자세로 몸을 구부린다. 하얗게 비어 있는 원고지 공백이 아득하기만 하다. 주어진 두 개의 제목, 장마와 엄마의 방 사이에서 잠시 멍해진다. 생각이 마구 헝클어지고 그것을 다시 정리할 틈도 없이 시간은 바삐 흘러간다. 온종일 벽에 기댄 채 움직일 생각조차 않고 있던 병원의 시계와는 달리, 이 순간의 시간은 생명력으로 부풀어 오르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장마 후에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는 생명력을 감당하기엔 내 몸과 영혼이 너무 지쳤고, 직무유기 상태인 나의 방은 텅 비어 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엄마의 방에 조용히 들어앉고 싶다. 엄마의 방에서 따스한 온기가 배어 나오고 볼펜을 거머쥔 나의 손아귀에도 힘이 차오른다. 엄마의 방에 담기는 단어들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가난하든 부유하든, 그것들은 종이 위에 태어났고 태어나는 순간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갖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상투어조차 빛을 내며 반짝이고 나의 빈한한 방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자궁을 긁어내는 통증 속에서도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가 원고지 칸 안에 있는 것처럼 나는 빈 칸을 하나하나 채움으로 나 또한 조금씩 살아나고 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나의 자궁 안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뜯겨나간 여린 살에 다시 피가 돌고 그 피가 팔딱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직도 안 낸 사람 있어요? 이제 정말로 시간이 다 됐습니다. 마감하겠습니다~~." 뼈대조차 제대로 서지 못한 미완성의 방 그대로 원고지를 낼 수밖엔 없다. 나는 본부에서 제공하는 보따리를 주섬주섬 받아들고, 대회장으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는다. 몸이 의자 뒤로 꺼지며 허리와 배에 압박을 준다. 아랫배가 뜨거워지고 무지근한 통증이 허리를 누른다. 통증과 함께 충일하던 만족감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무언가 내 속에서 빠져나간 것 같은, 심한 허탈감에 빠진다. 자궁을 휘젓고 지나가는 통증과 함께 목이 마르다. 멍하게 앉아 있는 의자 너머로, 유리창이 정오를 넘은 하늘의 뜨거운 기운을 여과하고 후끈한 바람이 탈진한 육신 위로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나는 보따리 속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낸다. 뚜껑 터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선다. "어머 너! 정인이 아니니? 긴가민가했더니 정말이구나! 그래도 설마 했었지." "아니, 어쩜 여기서 또?" 대학 동창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데자뷰 같다 했더니 실제로 똑 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대사가 반복되었다. 그때 나는 남해 미조리 해안 외딴집에 방을 하나 얻어 머물고 있었다. 내 뱃속에서 막 싹트기 시작한 작은 생명에 부대끼며 몸조차 지탱하기 힘들었다. 나를 둘러싼 상황들은 엄청난 무게로 나를 내리눌렀고,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서럽고도 뼈를 에이는 낙조가 바다를 적실 무렵이었다. 한 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이 스러지며 떠날 채비를 하는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가끔씩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동백꽃은 피었고 길 위에 가득 핏빛 꽃잎이 통째로 떨어져 있었다.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파도와 붉은 욕망을 사르며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바다를 보며, 잊는다는 일에 대해 끝없이 생각했다. 나는 해안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세월과 물결에 마모된 각양각색의 조약돌들이 자그락거리며 밀려갔다 밀려오곤 했다. 반들반들 깎이고 닳아서 마침내 각이 없어진 자갈이 이야기하는, 시간과 아픔의 의미를 묻고 또 물으며 시시각각 해변으로 밀려드는 잿빛 안개를 바라보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도 소리와 조약돌 구르는 소리가 부풀어 올랐다. 검보라색으로 젖어드는 안개 너머로 한 쌍의 남녀가 실루엣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었다. 가끔씩 긴 머리를 한 여자가 몸을 젖히며 웃었고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았다. 옛날에 봤던 프랑스 영화 《남과 여》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왠지 여자의 낯이 익었고 그녀 역시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 너! 정인이 아니니? 정말이구나!" 대학 동창이었다. "어쩐지 너 같다고 했더니만…… 그래도 설마 했지." 남자는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남자의 등 뒤로 바다가 어둡게 밀려들었다. 친구의 눈에 마지막 남은 낙조의 붉은 기운이 잠시 피어올랐다.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빨리 가 봐." "이렇게 만났는데…… 미안해." "아냐, 어서 가. 담에 보면 되지." 친구는 서둘러 남자에게로 달려갔고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친구의 등 뒤로 갑자기 어둠이 확 밀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난 이 시간 똑같은 해후를 반복하고 있어, 마치 우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시간만 우리의 곁을 바삐 스쳐 지나간 것 같다. 친구의 눈에 그날의 낙조 같은 붉은 기운이 잠시 스치면서 눈시울이 젖는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세월 만큼한 딸애가 서 있다. "딸인가 보네. 얘기 안 해도 알겠다. 너랑 빵틀이네." 유부남과의 관계로 괴로웠던 친구의 아픈 시간은 아득히 멀어져갔고 그녀의 손아귀 속에는 하얗고 말랑말랑한 딸애의 손이 쥐어져있다. "넌 잘 지내고 있지? 그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게 힘들었을까?" "그래 요새는 재미있어? 딸을 보니, 그러겠네." "재미? 그래, 재미있다 할 수 있겠네.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시부모, 우리, 그리고 딸년. 사대가 한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죗값이라고 생각하지." "쓸데없는 소리 한다." "근데 웬일이야? 지방 있다고 들었는데……." "응, 병원 왔다가……." "어디가 아파서? 건강해야지?" "좀 아픈 걸, 핑계 삼아 쉬는 거야. 넌, 글 쓰는구나?" "나중에 짠! 하고 나타나려 했는데, 들켰네." 친구는 백일장에 나온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욕심과 기대에 비례하는 부끄럼일 것이다. "어디 가서 좀 앉을까?" 공원에는 비둘기들이 푸드덕대며 날아올랐다 다시 모이 위로 내려앉곤 한다. 아이가 그 가운데를 향해 달려간다. 비둘기들이 깃털과 함께 흩어지며 솟구친다. 어지럽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북소리가 공원 안으로 밀려들고 있다. * 거리에는 만장輓章이 파도처럼 넘친다. 북소리에 실린 만가가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덮는다. 시꺼먼 깃발에 새긴 얼굴과 이름이 너울거리며 흘러간다. 꽃 같던 얼굴이 깃발에 펄럭이어 일그러지고 글자들 또한 구겨진다. 눅눅히 젖은 햇빛이 아스팔트 위로 흘러내리고 새까만 조복의 무리들이 도로를 느린 속도로 행진한다. "누구 노제지?" "아마 댐 공사 때문일 거야. 얼마 전에 분신자살이 있었잖아." 행렬을 따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다. 검게 탄 얼굴 위로 만장들이 펄럭거린다.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 피켓을 든 어린이들도 어른들을 따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하늘이 내려앉고 있는 아스팔트 위를 걷는다. 아이들의 가슴에 피어나는 미래의 꿈이 채 피기도 전에 말라버릴까 안쓰럽다. 수많은 운동단체의 깃발이 대오를 지어 그 뒤를 이어간다. 깃발과 구호의 행렬이 지루하게 차도 안으로 흘러들고 나는 인도 위로 한 칸 올라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아스팔트 건너편 길에는 근처 병원에서 나온, 병원복을 입은 환자들이 행렬을 건너다본다.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길게 이어지는 대열을 바라본다. 활동가들은 걷고 우리는 그들을 바라본다. 나의 아픔에도, 남편은 안타깝긴 하겠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가 아무리 나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예리하게 긁혀나간 자궁의 통증을 알 리 없고 앞으로도 그것은 그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꽁지머리를 한 젊은이 하나가 서명 용지를 들고 인도 위로 올라선다. "강을 살립시다! 생명을 살립시다!" 작은 화판을 들고 따라오는 어린 학생의 콧등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친구가 화판 위에 용지를 놓고 딸과 함께 서명을 한다. 나도 사인을 한다. 시위대는 앞으로 나아가다 멈춰서다를 반복하면서 오랜 시간 거리의 열기 속에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떠밀려간다. 장마는 예고되었고 습도는 높다. 무거운 대기 속에 무리의 얼굴은 지쳐 있다. 친구의 딸이 구호를 따라 외면서 촐랑촐랑 뛰어다닌다. "우리 딸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 "글쎄, 얘들 세대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땐 또 그만큼의 도전과 응전이 있겠지? …… 그런데, 어디 들어가서 차라도 마시자." 골목에는 닭장차들이 있고 전경들 또한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시위행렬 무리와 똑같이 얼굴이 피로에 찌들어 있다. 장마 직전의 눅진한 공기가 거리로 쏟아진다. 어떤 이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졸고 있다. 하늘이 땅에까지 한껏 눌어붙어 내린다. "우리 대학 다닐 때는 왜 그렇게 우울했을까? 공부하는 건 패배주의에 빠지게 했고 데모는 죽음을 각오하는 역사적 선택이었고…… 참 살벌했지?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조화로운 삶을 제대로 못 사는 것 같아. 요즘 애들은 호불호가 분명하면서, 스스로 즐기며 선택하는 것 같은데……." "요즘 애들한테 물어봐라. 걔네들은 우리보다 더 힘들다 그러더라." "암튼, 요즘 어떻게 지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여기 나와서 글 쓰는 게 젤 큰 낙이다. 그래서 백일장에 나오게 된 거고. 넌, 대학 다닐 때, 글 쓰지 않았니? 학교 문예지에도 내고 학보에도 내고……." "내가 그랬구나……. 병원에서 갑갑하던 차에 기사를 보고 나왔지." "남편은 내가 이러고 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전통적인 장남 스타일 있잖니? 어떨 땐 한 이불 덮고 자면서도 남남 같을 때가 많아. 하긴 돌아서면 남이지만……. 그런데, 넌,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야?" "자궁이 좀 약하대. 벌써 두 번 이상 반복유산을 했거든. 습관성 유산이라고 하더군." "요샌 의술이 좋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친구는 문득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그리고 나를 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가 감자스낵을 커피에 찍어서 입에 넣고는 친구를 향해 살그머니 눈웃음을 지으며 눈치를 살핀다. 미소가 말랑말랑하다. 갑자기 밑으로 뜨거운 것이 주르르 흐른다. 핏덩어리가 한 웅큼 빠져나가는 것 같다. 허탈감과 함께, 어지럽다. "그러고 보니까, 너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괜찮은 거야?" "응, 조금 피곤하네. 난 병원으로 갈게, 넌 시상식 보고 와라." "그래, 어서 가야겠다. 그런데 정인아, 이상하지 않니? 가장 비밀스럽게 나를 지키고 싶을 때마다 너를 만나게 되는 거. 참 묘한 인연인 것 같다." "것도 그러네. 좋은 결과 나왔으면 좋겠다. 계속 좋은 글 써. 남편과도 동상이몽 꾸지 말고." "그래. 내, 병원에 한 번 갈게. 빨리 완쾌해." * 지하철 역을 나와 종각으로 올라섰을 때, 마침내 하늘이 땅에 닿고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랫배가 칼로 긋고 불로 지지듯 아파서 나는 길에 주저앉을 것만 같다. 기를 쓰고 계단을 올라 가장 가까운 찻집으로 들어간다. 어느덧 창밖에는 빗방울이 굵어져 있다.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진다. "나, 시내 나왔는데, 택시가 파업 중이야. 이상하게 움직이기가 힘드네? 나 좀 데려다줄 수 있어? 서두를 필요는 없어. 기다리고 있을게. 미안해." 일군의 무리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거리로 흘러가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파업까지 하는데, 나는 나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절망스럽다. "너 지금 여기 놀러온 줄 알아? 암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책 없기는." 언제 왔는지 그가 내 곁에 앉으며 핀잔을 준다. "오늘 같은 날 대학로에다 종로에다……. 죽기 전에 투사 노릇이라도 해 보고 싶었던 거야? 운동은 형이나 하게 놔 둬라." "안 그래도 잔소리할 줄 알았다. 이제부턴 곱게,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할 거니까 그만하세요." 그의 미간이 좁혀지고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패인다. 사랑한다고 서툴게 말하고는 돌아서던 골목길에서 은밀하게 피었던 시간의 꽃. 불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보였던 젊은 날의 그 꽃은 이제 시들어버렸다. "대학로 나갔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났어. 걔하곤 인연이 특별한 거 같아. 이상하게, 인생의 고비마다 만나네. 지나 나나……." "고비고 뭐고 오늘 같은 날, 환자가 지 맘대로 돌아다니고……. 도대체 간호사들은 감독을 어떻게 하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 간호사들 나무라지 말고……. 그런데, 어쩜 그렇게 소신 있게 자기 생각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내가 오늘 만난 사람들은 다 용감했어. 나는 늘 문제를 피해 도망치기 바빴는데…….나는 항상 도피자이고 구경꾼이었던 것 같아. 나 자신의 문제까지도." "또 자기학대. 이 세상에, 해답을 얻고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어? 다 상처를 안고 사는 거지. 그나저나 너는 지금 환자야. 병원에서 무단이탈해 가지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꿈 잡는 이야길랑 집어치우고 빨리 병원이나 가자. 얼굴이 말이 아니구만." 그가 전화로 이것저것 오더 내리는 것을 들으며 나는 병동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싸우다시피 해서 그를 돌려보낸다. 아침에 여기저기 날아다니던 비둘기들은 비를 피해 일찌감치 잠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병원 광장에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대기실 의자에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죽음이 도처에 돌아다니다 틈입자처럼 어느 곳으로 찾아들지 알 수 없는, 그리고 병원에서조차 그렇게 찾아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이제 병실로 들어가면 목에 구멍을 뚫고 호스로 음식물을 섭취해 호흡을 이어가는, 죽음과 친숙한 사람들을 친구처럼 곁에 두고 누워야 한다. 불뚝불뚝 일어서는 정염을 나의 몸 깊숙이 밀어 넣던 남편의 뜨거운 몸이 문득 그립다. 나의 몸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서 자라는 여리디여린 한 덩이의 생명체를 뜯어낸 후 어그러지기 시작한 생체 리듬과 아직도 제자리를 찾아들지 못하고 주저앉은 뼈마디처럼, 남편과의 사이도 그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아픔을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무딘 신경과 방관자 같은 태도에 나는 치명적인 배반을 하고 싶었다. 그 겨울 바닷가에서 나는 홀로 산부인과를 찾아가 중절수술을 했던 것이다. "자궁의 형태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근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유산이 되는 건지, 저희로서도 이해가 안 되는군요. 하긴 습관적인 유산 원인이 정확하게 뭔지, 아직도 과학적으로 규명된 건 아닙니다. 다들 쉽게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지요. 환자 분을 괴롭히는 과도한 스트레스가 있는 겁니까? 여기서 심리치료도 병행할 수 있습니다." 주치의는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나는 새로운 생명체를 원하지도 않았고 그냥 그대로 내 몸이 주저앉길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짙은 먹빛 하늘이 병실 안으로 밀려든다. 어둠이 깔리고 환자들은 제각각 자신이 짊어진 환부를 안고 고통의 자리로 들어서고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통증 또한 깊어지곤 한다. 나 역시 환도뼈가 시큼거리며 아파온다. 내일 아침이 되면 침대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것 같다. 나는 아픈 몸을 침대에 눕힌다. 어떻게 자세를 잡아야 몸이 편해질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뒤척거리다 이불을 머리 위에까지 뒤집어쓴다. 깔끔하게 세탁된 베갯잇과 침대시트 냄새가 코를 감싼다. 어린 시절 엄마가 깨끗하게 빨아서 갈아주던 이불홑청 냄새를 떠올린다. 어린 나는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으면서 이불을 온몸에 둘둘 감곤 했다. 시트 냄새가 몸을 따듯하게 감싸고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면서, 대학로 대회장 엄마의 방에서 태어나던 자잘한 언어들이 떠오른다. 거리를 흐르던 생명의 행렬이 그려진다. 솟구쳐 오르던 비둘기의 날갯짓이 떠오른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친구 딸애의 말랑말랑하던 볼이 생각난다. 시꺼먼 창틈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든다. 빗방울이 후드득 창에 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더욱더 세차게 시트를 온몸에 감아 덮는다. 이제 지겨울 만큼 내리 비가 내리면 어둡게 굳어 있던 땅이 물러지고, 무수한 생명이 그 부드러운 흙을 밀치고 솟아올라 뻗어나갈 것이다. 내 몸 또한 이곳에서, 딱딱하게 굳었던 피와 살들이 물러지고 부드러워질 것이다. 뼈만 남은 앙상한 세포들이 다시금 살아나고, 그 세포들이 뼈대를 제대로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 뼈대에 살이 차오르고 메마른 나의 방은 생명력 가득한 엄마의 방으로 변해갈 것이다. 문득 도시 전체가 힘들게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제1추간판, 요추 탈출증과 함께 습관적 유산을 겪고 있는 것이리라. 병실에서는 불이 하나 둘씩 꺼져가고 있다.
박혜원│이화여대․계명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4년 청구문화제 수필부문 대상, 1999년 《세기문학》 소설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수필집 《그 길 위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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