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에서 한국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두 개의 기적을 이루었다.
그하나의 기적은 태극전사들이 아시아권에서 처음으로 월드컵경기에서 4강에 진출한 사건을 말한다.
대한민국 축구 서포터인 '붉은악마'(Red Devils) 거리응원전이 월드컵사상 영원한 챔피언에 등극한 기적이 그 두번 째이다.
외국의 그 어떤 국가 대표팀 서포터스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조직적인 경기 응원과 장관을 이뤘던 길거리 응원의 핵심에는
‘12번째 태극 전사’로 불렸던 ‘붉은 악마’(Red Devils) 가 있었다.한국사회는 연인원 2천2백여만명이 거리응원에 참여하였으며,
온 국민들은 흥분과 열정을 느끼며 폭발적 열기와 체험을 경험하였다.이는 전 국민의 43%에 달하는 수치로 서울의 경우, 시청 앞과 광화문 네거리에만 여섯 차례에 걸쳐 무려 8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응원
방식과 규모였고, 연인원 420억 명에 이르는 지구촌 시청자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에너지의 분출이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발적이었다는 데에 있다.그러한 자발성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유지된 질서와 청소 같은 뒷정리에서도 발견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W세대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두고 훌리건들의 난동에 익숙해 있던 외국의 축구팬들과 외신들은 앞 다투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보도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월드컵 거리응원의 구심적 역할은 붉은악마였다. 붉은 악마는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 이전까지 작은 동호회 조직에 불과했다.1995년 12월 PC통신 하이텔의 10여 개 축구 동호회 운영자들이 모여 축구 응원 문화의 개선을 위한 ‘칸타타 선언’을 했을 때 새로운 응원 문화를 보여줄 ‘붉은 악마’의 태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월드컵을 계기로 12만여 명의 정식회원뿐만 아니라
국민적 열기를 모아내는 구심역할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행했다. 월드컵 거리응원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응집된 모습과 신명나는
분위기, 그리고 사회 가치의개조는 물론 역동적인 국가 이미지를 세계에 심었다.
우리 민족이 '죽어서 신이 된 한 영웅' 군신(軍神)으로 숭앙하여온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부활하여 전 세계를 호령한 것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는 전장에 나가서는 한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영웅이었다. 죽어서 신이 된 영웅이 있었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 그의 눈빛은 선하고 강렬했으며 그의 마음은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꿰뚫었다. 그의 머리는 지혜로 빛났으며
가슴은 뜨거웠고 온 몸은 힘에 넘쳤다.
그가 말을 타고 대륙을 달릴 때
그의 갑옷과 어깨에 맨 외날 칼(劍)은
태양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는 양손에 모(矛), 극(戟)을 쥐었다.
탁록의 전투에서 그가 중국 황제 헌원과 맞서 싸울 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신명을 바쳐 싸웠다. 그는 천도(天道)를 지켜냈다.
황제 헌원은 그에게 항복하였고
신시(神市)의 규범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야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중토(中土)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그를 괴물로, 도깨비로 묘사하였다.
복희(伏羲)는 나무로 병기를 만들고 신농(神農)은 돌로 병기를 만들었지만 치우(蚩尤)는 금속으로 병기를 만들었다.
그는 큰 비와 우레를 일으켜 산과 강을 바꾸는 자였으며 우주를 다스리는 자였다. 그는 4천년 전 중국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의 주인이었으며 동이족의 제왕이었다. 치우는 천수를 다하고 전쟁의 신(神)이 되었다.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가 깃발처럼 휘날리면
사람들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는 국가를 수호하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릉에 조각하였다. 그가 바로 배달국 14대 천왕 자오지(慈烏支) 한웅(桓雄)이다.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치우천왕은 부활하였다. 붉은 악마들의 깃발 위에 그의 성난 얼굴이 있다.
싸움에 있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자 신명을 다하는 자 이제 그가 2002년에 붉은 악마들과 함께 한국을 지킨다.
치우천왕 그는 도깨비가 아니다. 그는 한웅(桓雄) 할아버지이며 우리 겨레의 영웅이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한 녹유도깨비 기와이다. 높이33.7cm, 너비28.5cm의 기와로 도깨비가 중앙을 지키고 있다.
연꽃도깨비무늬벽돌이다. 보물 343-4호다.
부여 외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여덟 개의 무늬벽돌 중 하나로 연꽃위에
도깨비가 서있는 모양을 하고있다.고구려와 백제의 도깨비 문양이 일찍 등장한다.신라의 도깨비 문양은 고구려와 백제가 사라진 뒤에야, 그러니까 남북국 시대에 등장한다.백제의 소멸로 한반도의 아랫도리가 신라를 빼고 허허벌판이 된 뒤에야 신라에 사치재다운 사치가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지붕에 도깨비상을 담은 기와를 올려 주요 건물을
지키도록 하였다.이 기와에 올린 도깨비는 단순한 도깨비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군신(軍神) 불패의 장군 치우천왕을 말한다.
지붕의 기와에만 등장하는 치우천왕이 아니다.군인들의 투구에도 장군의 칼집에도 등장한다.그 군인을 지켜주는 치우천왕이다.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는
치우천왕을 모신 사당 독사당에 들어가 제(祭)를 올렸다고 한다.이순신 장군도 전쟁에 나설 때는 배에 설치한 독사당에 들여 승전무운을 기원했다.
서울 뚝섬도 치우천왕의 사당인 독사(纛祠)가 있어서 독도纛島)라고 불렀다.
그 독도가 뚝섬으로 변했다고 한다.
창경궁 정전 명정전으로 들어가기 앞서 금천(禁川)을 만난다.그 금천 위에 놓인 옥천교(玉川橋)다.
그 다리 교각 홍예문 사이에 도깨비상을 배치했다.그 도깨비상은 우리 민족의 군신(軍神) 치우천왕이다.
삼국시대 등에서는 지붕 등 중요한 위치에 치우천왕을 배치하여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조선시대에 들면서 크게 변한다.주요한 공간은 중국에서 넘어온 용(龍)이 차지한다.용이 들어서 다른 지킴이를 몰아낸 것이다.
도깨비,그 전통의 지킴이는 중국의 용에 밀려난 것이다.지붕에 터~억 버티고 있던 도깨비는 땅으로 내려와야 하였다.
끝내는 옥천교의 다리 밑으로 와야 하였다.아주 낮은 곳에서 궁으로 침입하려는 사특한 악기를 적절하게 막아내라는 것이다.
창경궁 정전 명정전으로 들어가려면 꼭 밟아야 하는 옥천교다.이 중요한 길목에 설치한 옥천교다.지붕에서 궁궐을 지키던 도깨비다.
그 도깨비 지킴이는 조선시대 궁궐 지붕에서 밀려나 끝내는 다리 밑으로 내려와야 했다.그래도 그는 묵묵히 궁궐을 지키고 있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환국의 뒤를 이어, 한웅천왕이 건국한 배달국(培達國)의 14대 천왕을 말한다.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편에 의하면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 치우천왕이다.
치우천왕은 전쟁의 신, 군신(軍神)으로서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이며,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 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치우는 지금의 중국 하남(河南) 하북(河北) 산동(山東)성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동이족의 군장으로 한족의 수장인 헌원과 싸워
연전연승했다.마지막 탁록전투에서 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는 대륙의 주도권을 한족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후부터 이들은
황제 헌원으로 대표되는 중원땅 화하족과 고조선 단군 이전 국가인 배달국(구리국) 14대 ‘환웅’인 자오지(치우) 천황으로 대표되는
동이족과 묘족의 조상이 되어 두 민족간의 이해와 협력, 갈등과 전쟁의 서막을 장식하게 된다.
치우의 역사나 전승설화는 <한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우리나라의 고유 역사서에도 간헐적으로 나오지만, 우리 사서의 일방적인 기록만이 아니고 요순시대 바로 직후에 집권한 우임금 당시 쓰여
지고 전국시대에 개찬 됬다는 <산해경>을 비롯하여,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의 <사기>나 2세기 반고의 <한서(漢書)>에도 등장한다면
역사적 실존의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다.
<산해경>은 사마천도 함부로 논평하지 못했다(사기 대완열전에서 "괴물이 있는바 내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함)는 고대 역사 지리 물산에 관한 경전의 자리(異說:원가의 산해경교주에는 經이 경전의 의미 보다는 ~에 지난다, ~걸린다 등 거리, 지경의 개념으로 보기도 함)를 차지하는 중요 기록이고, 사마천이나 반고는 뛰어난 역사가의 대명사로써,그 들의 역사서는 후대 역사기록 방식과 사실의 인용에 있어 하나의 전범이 되었기에 이들 책속에서 상세히 기록된 치우의 행적은 움직일 수 없는 실존의 역사로, 현실 속에서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B.C. 2600년대, 황제(黃帝) 헌원은 하남성 신정부근의 제후인 少典國(또는 유웅국)왕 공손씨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수구에서 태어나 희수에서 자랐기 때문에 희씨성을 하사받고 헌원의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의 부인은 염제 신농의 장녀인 뉘조(嫘祖 - 누애전잠의 시조로, 우리말 뉘, 누이, 누님의 근원어에 해당)이고 소호금천씨를 낳았다.” <史記>
“치우는 강수인근에서 태어나 자랐고, 조상 대대로 병기를 제작하는 집안이었으며 나라의 일에 있어서 군사의 임무를 맞아왔다.
치우는 신농의 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품고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색도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垈 : 양자강 위쪽의 회수와 태산의 사이 지역) 사이에 웅거했다.” <한단고기> 삼성기 전 하편
“치우는 옛 천자(古天子)이며, 구리국의 왕 이름이다. 신농이 쇠하자, 제후들이 서로 침범하여 백성을 흉폭하게 학대하여, 신농이 능이 평정치 못하자, 헌원이 받들어 모시지 안는 자를 벌하니, 제후가 다 따랐다. 그런데 치우가 가장 폭악 강력하여 능히 정벌하지 못했다. 염제가 제후를 벌하고자 했으나,제후가 다 헌원에 귀부했다... (황제 헌원은) 염제 신농과 더불어 판천의 들판에서 세 번 싸운 끝에 그 뜻을 성취했다. 치우가 군사를 일으키니 헌원의 말발이 먹히지 않았다.” <史記> 1권 오제본기
“염제를 대신하여 헌원이 섭정할 때,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쓰며 구리 이마에 철가면을 하고(銅頭鐵額) 모래를 먹고 살았다. 또한 (갈)로산으로 들어가 오병과 각종무기를 만들어 그 위세가 천하를 진동하였다.”
<史記> 1권 오제본기
"(약해) 진시황과 한고조(유방)은 도읍에 사당을 세우고 치우를 받들어 제사하였다. 전쟁의 신 兵主로 여겨, 전쟁에 임하여 숭배 존경하였다. 진시황이 동으로 바다에 순행하고, 명산대천으로부터 팔신에 이르기까지 제사의 예를 행하고, … 팔신은 예로부터 (그것이) 있었고, 혹 말하길 강태공 이래로 그것을 만들었다 한다. … 팔신이란, 첫째 천신…, 둘째 지신…, 셋째 전쟁의 신으로 치우에게 제사지낸다. 치우는 동평 륙감향에 있는데, 제나라의 서쪽 경계이다. … ” <사기> 봉선서
중국은 그동안 황제만 시조로 모셨다.1980년대부터 염제(炎帝)를 포함해 중국인은 염·황(炎黃)의 자손이라고 선전했다.
1990년대에 와서는 탁록현 반산진의 황제성과 황제천이 인접한 평원에 있는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하면서부터
황제·염제·치우제의 삼시조시대(三始祖時代)를 선전하고 있다.
치우천황의 능은 1997년, 중국 산동성의 문상현 남왕진에서 발견되었다. 탁록현의 탑사촌에도 치우릉이 있다.
이곳에는 치우의 머리 부분이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사기집해』와 『漢書』에는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감행성에 있으며 높이는 일곱 길(70자)이고, 백성들이 매년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낸다. (중략) 팔다리 무덤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