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363(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본문 : 마가복음 5장 25-34절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수없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환자는 예수님이 전혀 고치려는 의도가 없었던 사람인데 병고침을 받았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12년 동안 혈루증(하혈)을 앓아 온 한 여인이다.
이 혈루증에 대해서, 레위기 15장에는 '유출병' 즉 몸에서 무엇이 계속 흘러나오든지 혹은 나오는 것이 막히는 증상이라고 소개하면서 유출병은 부정한 병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특히 여성의 경우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면 7일 동안 불결하고, 심지어 그녀를 만진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사람이 누웠던 곳이나 앉았던 곳도 부정하다고 하셨다.
생리 때가 아닌데도 피가 흐르면 그 피가 흐르는 동안은 계속 부정한 자라고 하셨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여인은 12년 동안 소위 '부정한 병을 앓는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어서 사회적으로 매우 소외되고 고립된 자였을 것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추측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26절을 보니까 그녀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고 적혀 있다.
이 구절은 이 12년 된 혈루증이 당시 의술로는 불치의 병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 그녀가 절망적인 상황을 맞고 있음을 의미한다.
건강도 잃고 재산도 잃고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여인에게 한 줄기 희망이 생긴다.
예수라는 사람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친다는 소문이다.
27절을 보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녀는 분명히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고쳐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가?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가서 '나 좀 고쳐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몰래 사람들 뒤로 가서 무리 틈에서 손을 뻗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다.
28절에 보니까 이것은 그 여인이 "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한다.
이러한 모습은 앞에서(23절) 언급된 야이로 회당장이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린 모습과 비교된다.
여러분 보기에는 어떤 믿음이 더 놀라운 믿음이라고 생각되는가?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리고 도와주심을 구하는 믿음인가, 아니면 그냥 그 옷에 손만 대도 나을 것이라고 믿는 것인가?
사실 어떻게 보면 이런 믿음은 미신에 가깝다.
실제로도 마가복음 3:10절과 6:56절을 보면, 당시에 이 여인과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6:56절을 보면, 실제로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지는 것으로 병고침을 얻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놓고 보면 24절이 좀 애매해진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에워싸고 밀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열열히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에워싸고 미는데,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거나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이 없었을까?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예수님에게 반문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면서 만졌을텐데 누구를 말씀하시는거냐고 묻는거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병이 나았다거나,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흘러가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것이 믿음의 행동이라고 인정하신 것이다.
똑같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었지만, 누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반면에 누구는 12년 동안 그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그래서 자신의 삶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바로 그 질병이 고침을 받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님을 만졌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열히 환호하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짐으로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한 이 여인은 아무도 몰래 자기 혼자 조용히 주님께 다가가 주님의 옷을 만진 자였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난 다음 그 여인의 몸에서 흐르던 피가 곧 말랐다.
그래서 29절을 보면 그 여인 스스로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그 다음 30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사건을 아시고 그 여인을 찾으신다.
3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찾을 때까지 계속 살펴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랬을까?
33절을 보면 그 여인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아마도 자신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서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 그런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출병은 부정한 병이어서 그 사람을 만지는 사람까지도 부정하게 되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레위기 15장의 말씀대로라면 누가 부정하게 된 건가?
바로 예수님이다.
그러니 아마도 이 여인은 조용히 이 일을 끝내려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여인을 찾으신다.
그러니까 여자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떨면서 모든 사실을 아뢴다.
그런 여자를 향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 여인의 회복을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신다.
예수님은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혈루증 걸린 여인을 찾으시고 사람들 앞에 나타내신다.
그래서 그녀가 완전히 나았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확증시켜 주신다.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내심으로써 그녀가 더 이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외되고 고립되지 않도록 만드신다.
간혹 신앙생활을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신앙의 문제를 나누기를 꺼려하는 분들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와 감격, 기쁨 같은 것이 있어도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지 않는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매우 꺼려한다.
신앙생활을 철저히 자기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 이 여인에게 그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12년 간 이 여인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질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끊어지고 단절되었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주님은 그녀를 끝까지 찾으시고 그녀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도록 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신앙의 지체들과 은혜를 나누길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역모임을 모이는 이유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믿음의 자리를 자꾸만 스스로 소외되고 피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스스로 더 고립되고 믿음은 성장하지 않는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찾으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놀라운 일을 드러내고 알리신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혼자서 살아가지 않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