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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영화 ‘시’를 보고
전에는 영화나 책을 보며 종종 울곤 했다. 우연히 알게 된 타인의 아픔에 밤 잠을 설치기도 했고, 나를 찾아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어주기도 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시’ 만이 아니라 담벼락에 적혀있는 글 귀에도, 보도 블록 사이로 자라나는 풀잎 하나에도, 어두움 밤 깜빡이던 가로수 등불에도 마음은 여러 모양으로 반응했고 그것들과 대화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렇지 못하다. 거의 매일 TV를 통해 끔찍한 사건들과 죽음이 전해지지만 ‘그랬구나’ 정도이지 아픔이 나에게 전달되진 않는다. 심지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에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에서 생활한지 오래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친척들의 죽음 앞에서도 내 마음은 고요했다. 최근에 깨달은 사실인데 다른 사람들을 깊이 공감하기도 어렵다. 나에게 와서 힘들다고 투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저 이해하는 척 표정을 짓지만 마음은 ‘누구나 힘들게 살아’, ‘너보다는 내가 더 힘들어’라 외친다. 종종 딱딱해지는 마음에 대해서 의아해 하지만 굳이 고민스럽지는 않았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이런 나에게 불편함을 안겨주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왠지 속이 미식겁다. 시, 꽃, 무관심, 죽음과 삶 여러가지 생각이 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특히 죽음에 대한 많은 이들의 태도가 기분 나쁘게 한다. 영화의 형식도 그렇다. 이렇게 관객들에게 많은 숙제를 내어주는 영화는 웬만해서는 나 스스로 찾아보지 않는다. 배경음악도 없이 지루하지 않게 몰입감을 주는 것은 놀랍지만 관객에 입장에서 고민하고 해석해야 할 거리가 많은 지치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무슨 의미일까' 궁금증을 가지게 하는 영화이다.
죽음
영화의 시작은 흘러가는 강과 함께 한다. 흐르는 강물과 아이들의 노는 소리는 누구나에게 동심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장면은 강물과 함께 흘러온 소녀의 주검과 함께 완전히 전환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내내 영화를 타고 흐르며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주인공 미자가 처음 소녀의 죽음을 목도한 것은 자신의 알츠하이머를 확인하고 병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상복을 입은 사람, 하얀 국화, 소녀의 죽음 앞에 주저앉은 어머니, 화면은 그저 주인공 미자의 인식 세계인양 천천히, 그러고 분명하게 미자에게 소녀의 죽음을 각인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가게 여주인은 소녀의 죽음에 코웃음을 친다. 그것이 자신과 상관이나 있냐는 표정이다. 소녀를 겁탈하여 그녀의 죽음의 원인이 된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어떻게든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할뿐이다. 돈과 합의만이 그들의 목표의 전부일뿐 누구도 소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도 가족에 대한 용서도 말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들의 태도도 마찮가지다. 혹여나 학교에 대한 나쁜 소문이 나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심지어 소녀의 어머니도 마지막에는 돈 앞에 자녀의 죽음도 씁쓸한 웃음으로 넘겨버린다. 한 번쯤은 소리치며 미친 년 처럼 그들의 뺨이라도 후려 갈길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손자의 모습이다. 자신의 겁탈로 자살에까지 이른 어린 소녀의 죽음 앞에 지독하게 태연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존재인 듯, 그는 할머니가 식탁 위에 둔 소녀의 작은 영정 앞에서도 귀찮은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아마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들이 그저 그가 매일 앉아 있는 TV나 컴퓨터 속에 나오는 한편의 영화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하다.
미자
주인공 미자는 65세 아니 66세의 가물가물한 나이의 이상한 할머니다.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4차원’이라 불리는 부류다. ‘꽃을 좋아하고 엉뚱하다’는 딸의 표현이 정확하다. 죽음 보다 힘들다는 알츠하이머병을 알게 된 순간에도 그녀는 장난스럽다. 평생을 시작하지 않았던 '시'를 굳이 명사와 동사를 잃어가게 되는 그 시점에 시작하겠다는 것인지... 한 학부형의 “참 개념 없는 할머니네”라는 말처럼, 영화 곳곳에서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은 민망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시
시는 그런 미자와 죽은 소녀를 잇게 하는 매개이며 그녀로 삶을 다시 보게 하는 통로이다. 사진을 찍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진을 시작하면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갔던 것들을 나도 모르게 사진 프레임에 넣어보게 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작은 것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 심지어 파리 한 마리 놓이지 않는다. 미자에게 시는 아마 이런 것이지 싶다. 미자의 첫 시 수업에서 시인 선생님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것’이라 말한다. 사과를 하나 들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여러분은 몇 번이나 사과를 봤어요?” 그리곤 수더분한 아저씨에 입에서 뼈를 때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사과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대부분은 사과를 거의 매일 보지만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사과를 보고 관찰하며 살아가진 않는다. 어떤 색인지 모양인지 어떤 향이 나는지 아무런 관심 없이 그저 깎아먹을 뿐이다. 우리는 사과를 보지만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시인 선생님은 주변 사물을 자세히 보며, 관심을 가지며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그럴 때 시가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어설프지만 미자는 주변의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사과를 바라보고 나무와 대화한다. 금방 방해받고 실패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미자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그 소녀와 죽음에 관심을 가진다. 손자에게 희진에 대해서 물어보고, 희진이 당했던 과학실을 찾아가 본다. 희진의 장례미사에 참석하고 그녀의 작은 영정 사진을 훔친다. 결국에는 그녀가 자살했던 다리까지 찾아가 본다. 영화에서 희진의 죽음과 아픔에 관심 두고 아파한 유일한 사람이다. 영화 중간에 미자가 간병하던 할아버지와 성관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을 보며 굳이 왜 이 장면을 영화에 넣었을까 생각했다. 아마 손자의 합의금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희진이 자살한 다리를 방문한 직후였음을 생각할 때 그것으로 미자는 희진의 고통을 더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자는 희진의 고통과 죽음을 따라가며 그녀와 대화하고 깊이 공감한다.
시, 꽃, 삶
영화는 간접적으로 시를 삶으로 삶을 시로 비유하고 있다. 특히 문화센터의 시 수업은 삶과 시를 하나로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먼저 첫 수업에서 시인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것'이라 말하며 이것을 시와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시도 그렇다는 것이다. 시를 아름다운을 찾는 것이라 말하며 영화 중간중간에 삶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나누게 한다. 이것도 삶과 시의 깊은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꽃과 시를 연결한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를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꽃을 좋아한단다. 주인공 미자가 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소도 바로 꽃이다. 그녀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꽃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종종 꽃의 의미를 알려 준다. 꽃과 시의 연관성은 아름다움과 의미가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다 그녀의 두 번째 기록인 ‘시간이 흐르고 꽃은 시들고’를 통해 꽃과 삶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와 꽃과 삶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삶이 시와 꽃은 아닌 것 같다. 시는 그냥 삶이기 보다 꽃과 같은 것이다. 꽃은 아름답고 각각의 의미가 있다. 시도 그렇다. 그렇다면 삶이란 아름다움과 의미를 가진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시와 꽃과 삶을 동일 선상에 둔다는 것은 우리의 삶도 그저 살아져가는 것이기 보다 아름다움과 의미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감독은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시를 통해 참된 아름다움과 의미 있는 삶을 찾아가길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영화 내내 시를 쓰기 위해 고뇌하고 질문하는 미자는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시 낭독회 회식에서 미자는 우연히 방문한 시 선생님에게 “시를 쓰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렵냐”고'질문을 한다. 그리고 밖에서 우는 미자에게 형사 회원이 시가 안 써져서 우느냐고 묻는다. 미자는 삶 때문에 우는 것이고 시 때문에 우는 것이다.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와 같아서 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 선생님의 “시가 죽어가고 있다”라는 회식 자리에서의 말은 작은 소녀의 죽음에도 반응하지 않는, 살고 있으나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향해, 삶이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외침이 될 수 있다. 강력한 외침이다. 모니터 속 세상을 살아가는 손자 같은 삶에 대한 수동적, 피상적인 자세와 합리성이라는 허울 아래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지우고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강력한 외침이다.
몰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와 꽃처럼 살 수 있을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몰락이야 말로 새로운 출발점이다. 내말로 바꾼다면 사람은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게 된다.
미자가 시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그녀는 시에 대한 관심도 자질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명사와 동사를 잃어가고 있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후 그녀는 갑작스럽고 담대하게도 문화센터에 찾아가 수강 신청을 받을 수 없다는 직원에 말에도 굴하지 않고 억지로 ‘시’ 창작 수업을 신청했을까? 상실이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언어를 잃어가자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강 노인에게서도 발견된다. 미자가 혹시 잘 못 알아들을까 큰 소리로 말하자 귀는 먹지 않았다고 역정을 낸다. 병으로 몸의 많은 기능을 잃어버린 후에서 가진 청각에 대하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자가 삶의 아름다운 시상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손주가 저지를 만행을 들었을 때 꽃을 보며 시상을 기록하고, 죽은 희진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힘겨운 길에서 아름다움에 도치되어 평생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을 찾는 것처럼, 고통과 죽음에 앞에서, 그것을 바로 노려볼 때 그곳에서 새로운 가능성, 아름다움을 향한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의 마직막에도 강하게 나타난다.
손자를 고발한 것은 할머니 미자였던 것 같다. 손자가 잡혀가기 전날 밤, 피자를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손톱과 발톱을 정리해 준다. 또 손자를 데리러 온 형사가 다름 아닌 할머니와 함께 시를 낭송회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손자와 베드민턴을 치다가 잡혀가는데 할머니는 아무런 반응이나 놀람도 없이 그저 베드민턴에 집중한다. 다음 날 딸을 바쁜 딸을 불러내린 것도 아마 미자가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을 충분히 암시한다.
손자의 사건은 다 해결된 일이었다. 돈을 줬고 합의를 봤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지 못했다. 소녀의 고통과 죽음을 경험한 미자는 그냥 그렇게 살 수도, 살게 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몰락을, 소녀의 아픔을 경험한 할머니는 고통스럽지만 바른 선택을 한다. 손자를 고발하였을 것이다. 손자 입에 음식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할머니, 미자였는데 스스로 손자를 보낸 것 또한 진정한 몰락이라 볼 수 있다. 미자는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세번째 기록에서의 살구처럼 스스로 떨어져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바르게 사는 방법이고 손자를 바르게 살아가게 할 방법이었다.
그런 미자 덕분에 희진이는 웃게 된다. 첫 장면에 물에 떠내려 오는 소녀의 시체는 사라지고 그저 평화로운 강물만 흘러간다. 다리 위에서는 희진이가 환하게 웃고 모습으로 서있다. 찜찜하게 흘러 왔던 죽음의 문제가 해결 된 것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결국 미자는 소녀의 뛰어내린 다리 위에서 푸를 강물을 향해 뛰어들지 않았을까? 고통스러웠지만 용기내어 소녀의 죽음을 직면 함으로 아름다운 꽃 처럼 산 그녀는 두려움 없이 적극적으로 그곳으로 걸었을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 미자의 시가 소녀의 목소리로 낭독된다. 그녀의 시 어디에도 후회나 애환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살아온 삶에 대한 만족과 다가올 것에 대한 소망이 담겨진다.
죽음이 있기에 삶의 의미가 있다. 삶에 의미는 죽음에 있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을 정직하게 볼 때 결국 아름다움과 진정한 삶의 의미와 방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테다.
조화(造花)
두 번째로 의사를 찾아갔던 미자는 창가에 놓여있던 동백꽃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그것이 ‘조화’라 고 말한다. 조화, 아무것도 없는 무관심도 병이지만, 아름다운 꽃인 척하는 조화가 더 문제다. 차라리 추악한 것은 그것을 직면하게 하는 불편함이라도 준다. 그러나 꽃인 척하는 조화는 그저 거기에 만족하게 하는 삶의 최고의 위험이다. 무관심 속에 서 있는 나를 다그치고, 조화로 만족하는 나를 질책한다. 시인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어렵다.” 아무도 모르게 피고 지는 길가의 풀 꽃이더라도 꽃으로, 시로 살자고 마음 먹는다.
첫댓글 와~~ 멋진 시 같은 글이네요!!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흐르는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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