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4장 요약 – 부정을 정결하게 하라!
1. 들어가면서
1) 14장은 부정한 자/것의 회복과 회복으로 나아가는 통과 의례이다.
2) 13장이 암울하다면, 14장은 밝다. 13장의 거룩한 하나님이 엄격하고 가혹하다면, 14장의 거룩한 하나님은 너그럽고 자비롭다. 잘 말했듯이 하나님의 이 양면성을 동시에 보지 않으면, 한쪽만 보고,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면, 잘못된 신앙에 이르게 된다. 양자의 조화와 균형, 그러나 최종 선언은 회복이어야 한다.
3) 주의할 점
⑴ 이 본문은 치료절차가 아니라 제의절차를 다룬다.
⑵ 제사장은 의사가 아니다. 제의 전문가이다. 오늘날과 달리 많은 것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제사장은 현대의 공중위생 검사관 같다고 할까.(웬함 233쪽)
4) 14장을 몇 번 읽으면서 드는 의문 혹은 인상적인 부분
⑴ 왜 속건제인가? 속죄제, 번제, 소제는 이해되지만.
⑵ 두 마리 새 중에 한 마리를 왜 놓아주는 걸까?
⑶ 왜 제사장 위임식과 유사할까?(10-20절)
⑷ 가난한 자를 왜 배려하는 건가?
⑸ 집에 핀 곰팡이가 왜 문제가 되는가?
2. 구조와 흐름
1) 일단 14장의 구조, 흐름을 파악하고, 파악함으로써 저 질문에 답해 보도록 하자.
2) 시간과 공간이라는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다.
⑴ 시간
① 첫째 날(2-8절)
② 일곱째 날(9절)
③ 여덟째 날(10-32)
⑵ 공간
① 진 밖에서(2-8절)
② 진 안에서(9절)
③ 성소에서(10-32)
3) 간단한 설명
⑴ 2-8절 : 첫날(진영 밖에서) 정결 여부를 확인한 다음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드리고, 한 마리는 날려 보낸다. 부정한 자는 자신의 몸을 씻고, 털을 모두 민다. 그리고 진 안의 장막에 7일이 되는 날까지 거주한다.
⑵ 9절 : 7일째가 되면 다시 한 번 더 씻고 닦고 털(수염과 눈썹까지) 깎는다.
⑶ 10-20절 : 앞에서는 새 두 마리이었는데, 이번에는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를 드리고, 문제의 속건제를 포함한 속죄제, 번제, 소제를 드린다.
⑷ 21-32절 : 가난한 사람을 배려한 제사와 제물 규정을 다룬다.
⑸ 그리고 집의 부정함에 관하여(33-53절), 맨 마지막은 13-14장 전체를 요약하는 말(54-57절)로 끝난다.
3. 새 두 마리(5-7절)
1) 백향목, 우슬초, 홍색 실 등은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모두 정결과 관련된다는 것만 파악하고 넘어가면 좋을 듯하다. 그 하나 하나를 세세하게 살피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다윗이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해 달라는 그 유명한 기도(시 51:7)를 기억하면 될 듯 싶다.
2) 특이한 것은 새 한 마리는 죽여서 피를 바르고, 다른 한 마리는 날려 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16장의 염소 두 마리 중 하나는 죽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로 내보내는 것과 흡사하다.
3) 날려 보내는 이유는 추측건대, 하나는 부정한 자의 부정을 갖고 훨훨 날아가서 다시 오지 말라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부정한 자가 진 밖에서 보낸 서럽고 서러웠던 모든 감정을 날려 보내라는 뜻도 담긴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부정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4. 왜 속건제인가?
1) 8일째는 네 개의 제사를 드린다.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
2) 다른 세 개, 곧 속죄제와 번제, 소제는 그럭저럭 이해가 된다. 속죄제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 못지않게 정결하게 하는 측면이 강한 제사이니 당연한 것이고, 번제는 모든 제사의 기본인데다가 자기를 태우는 충성의 의미이니 드릴 수밖에 없는 제사이고, 소제는 곡식의 일부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제사이므로 얼추 연결이 된다. 그럼 속건제는 뭔가?
3) 속건제는 타인(하나님과 이웃 모두)의 권리와 물건을 침해하고 손상을 입힌 경우에 배상하는 제사이다. 그렇다면 몸과 옷이 부정해진 자가 하필 속건제인가?
4) 몇 가지 가능한 해석
⑴ 진 밖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할 것들(웬함에 의하면 십일조와 제사, 기타 예물 등)을 드리지 못했고, 이는 하나님의 것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⑵ 두 번째 해석은 몸과 옷, 집의 피부와 표면의 병과 곰팡이는 전염성이 있는 것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속건제를 드리라고 한 것이다.
⑶ 마지막 해석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나, 하나님의 소유인 나를 그 주인의 것을 다름 아닌 내가 훼손했으니 그 주인에게 마땅히 속건 제물을 드려야 한다. 이는 하틀리라는 신학자의 해석이다.
⑷ 나름 훌륭한 신학자들의 해석이므로 취사선택하면 된다.
⑸ 나는 레위기 전문 연구자가 아니므로, 이럴 경우는 대개 모두 맞다는 쪽으로 해석하고 교우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친다.
⑹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나는 후자, 곧 하나님의 소유물인 나의 몸을 침해한 것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13-14장은 몸의 거룩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5) 내 인생은 나의 것?
오, NO!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롬 12:2)
5. 왜 제사장 위임식과 비슷한가?(10-20절)
1) 8일째 의식은 제사장 위임식(8:22-30)과 비슷하다.
2) 특별히 제사장과 정결하게 된 사람의 신체에 제물의 피를 바르는 행위이다. 모두 오른쪽 귀와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이다.(14, 17절. cf. 8:23-24)
3) 그 의미는
⑴ 제사장 역시 이사야의 그 유명한 말(사 6:5)을 가져와서 말한다면, 부정한 자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되었고, 정결한 자가 되었고, 부정한 자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자기 자신이 부정한 자의 한 사람이었음을, 지금도 부정함을,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정결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⑵ 이는 헨리 나우웬의 그 유명한 책 제목,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설명할 수 있다(발렌틴, 「레위기」, 182쪽). 이때는 악성 피부병이라는 객관적 언어 보다는 ‘나병’ 혹은 ‘문둥병자’라는 가치를 듬뿍 담은 언어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제사장도 문둥병자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진 밖에 살아야 하는, 살았던 자로 감히 성소에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예배를 인도/주관하다니! 아멘, 할렐루야!!
6. 가난한 자를 배려하라(21-32절)
1) 가난한 자는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를 드리기 어려울 테니, ‘넉넉한 제물을 바칠 수 없을 때에 지킬 규례’(32절)이다.
2) 그 의미는 분명하다. 나의 경제적 형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충분히 배려하라!
3) 그러나 속건제물은 숫양 한 마리를 드린다. 타인의 권리와 소유를 침해한 것에 관한 배상은 가볍게 덜어주지 않는다.
4) 그렇지만 ‘힘이 닿는 대로’(새번역), 또는 ‘힘이 미치는 대로’(개정) 드려야 한다(22, 30, 31절). 핑계하지 마라!
7. 집의 청결함에 관하여(33-53절)
1) 건물에 생기는 곰팡이에 관해 다루고 있다. 내 생각에는 13장 말미에 들어가면 제 격이다. 그러면 몸과 옷, 집의 피부와 표면에 생기는 일체의 것들을 다루고, 14장에서는 그것들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만을 설명하면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든다.
2) 구조와 내용은 앞의 집과 옷을 다룰 때랑 거의 같다. 뭔가 문제가 있으면 가서 확인해보고 판결을 내리고, 너무 심하면 헐어버리고, 괜찮으면 정결 의식을 치르고 고쳐 쓴다는 것이다. 다만, 검사할 때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나온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혹 부정하다는 판정을 받을지 모르는데 그곳에 있으면 안 되겠지.
3) 한참을 들여다보니, 다시 이런 생각이 든다. 앞의 두 개(몸과 옷)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측면이 강하다. 제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자기 옷을 관리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 아닌가. 앞에서 옷의 사회적 의미를 조금 다루었지만 말이다.
이에 반해, 아니 옷과 마찬가지로 집은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자기 집을 허술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거환경의 청결을 요구한 것은 나 하나만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전체가 사는 환경을 잘 관리하라는 말도 된다.
그러기에 데렉 티드볼은 집의 곰팡이를 ‘제도화된 죄’라고 지적한다(「레위기 강해」, 231-32쪽). 곰팡이로 오염된 집은 사회 제도에 자리 잡은/뿌리 내린 부정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나의 묵상과 일치한다. 사회적 제도 자체를 고치지 않으면, 그 제도 안에 사는 우리도 부정해질 수밖에 없다.
4) 옷의 청결함 – 옷은 자기를 뽐내는 것. 관리를 안 했거나 필요 없는 옷이라서 입지 않았을 것, 그리고 그럴 여벌의 옷이 있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매일 노동하고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지느라 해어지고 곰팡이가 피었을 수도 있다.
8. 최종 결론(13-14장)
1) 이제 보니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 11장 44-45절이다. “너희는 몸을 구별하여 바쳐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2) 그 몸은 불가피하게, 또는 고의적으로, 게으름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진 밖으로 쫓아내야 할 만큼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부정한 것이다. 왜냐고? 거룩한 몸을 잘못 사용하였으니까. 다른 한편으로 반드시, 기필코 치유 받고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고? 거룩한 몸이니까.
인간을 회복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가 부패로 치닫는 인간의 타락한 의지를 능가하신다.
3) 내 몸의 거룩함, 내 몸이 거하는 곳의 거룩함을 13-14장은 다루었던 것이다. 내 몸으로 하는 일의 거룩함은 17장 이후에 소상히 설명된다.
4) 내 몸(몸, 옷, 집)을 청결히 씻고 관리하여 악성 피부병이 생기지 않게 하라. 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자연적 기후와 사회적 환경에 의한 피부병이 생기는 것도 인정해야할 것이다. 오롯이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내 몸이고, 내 옷이고, 내 집이 아니던가.
4) 결론
깨끗하게 씻어라, 쫌!
깨끗하게 닦아라, 쫌!
깨끗하게 살아라, 쫌!
첫댓글 어제 종인자매(아내)와 나눔하면서 진영밖에 쫓겨난 자의 슬픔에 대해 나눔을 하였는데 오늘 본문이 진영으로 돌아오는 자에 대한 본문이라 그 슬픔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해석일지 모르는 삶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삶을 다시 깨닫게됩니다
네, 우리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신적 의지가 타락과 부패로 치닫는 인간의 육적 의지를 능히 이기시지요^^
댓글 달고 보니 아주 맘에 들어서 본문에 포함시켰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