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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관문(鳥嶺關門)트레킹
- 위 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충북 괴산군 연풍면
- 높 이 : 조령 642m
<단체기념사진>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5. 1. 22. 08:00
2. 장 소 : 문경새재도립공원 내 조령관문트레킹
3. 참석인원 : 33명(새내기 3명)
4. 트레킹코스 : 문경새재도립공원주차장 – 주흘관 – 조곡관 – 조령관 – 조령산자연휴양림 - 고사리주차장
▶ 제1관문 ➠ 마당바위(1.5) ➠ 2관문(3.0) ➠ 동화원터(5.3) ➠ 3관문
(6.5km/ 2시간소요) → 고사리주차장(8,7km / 3시간소요)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KBS춘천방송총국 ➠ 문경새재도립공원
▶ 거 리 : 165,9km
▶ 소요시간 : 2시간37분
- 안내정보 : 중앙고속도로 남원주IC – 목행사거리 – 단원삼거리 – 유즈막삼거리 – 수안보휴게소 – 진안길 – 문경대로 – 신안삼거리 – 문경새재도립
공원주차장
- 찾아간 길 : 영동고속도로 만종IC – 중앙고속도로 여주IC –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JC – 문경대로 – 신안삼거리 – 문경새재도립공원
- 돌아온 길 : 위 안내정보 역순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13 권 희 성
6. 날씨상항
◆ 주간날씨예보
- 2015. 1. 20. 06:00 발표 기상전망은 기압골 영향으로 26~27일에 경상남북도에서 비가 오겠고, 그 밖의 날은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어 가끔 구름 많겠으며 기온은 평년(최저기온 : -11 ~ -1도, 최고기온 : 2 ~ 8도)보다 높겠다고 하였다. 강수량은 평년(강수량 : 0~2mm)보다 많겠다고 전망하였으므로 오늘도 좋은 산행환경을 예고할 수 있었다.
◆ 오늘의 날씨
-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절후(節候)인 大寒을 이틀 전에 넘긴 시점에 맞이한 정기산행일이다. 대한은 양력 1월 20일경이다. 태양의 황경이 300°되는 날이다. 대한은 음력 섣달로 매듭을 짓는 절후이다. 원래 겨울철 추위는 입동(立冬)에서 시작하여 소한(小寒)으로 갈수록 추워지며 대한에 이르러서 최고에 이른다고 하지만, 이는 중국의 경험에 입각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가 1월 15일게 이므로 다소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소한의 얼음 대한에 녹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아무튼 소한 무렵이 대한 때보다 훨씬 춥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아무튼 일 년 중 가장 추운 절기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은 추위에 대한 걱정은 뚝하고 오전 이른 시간대에 1 ~ 4㎜ 정도 눈이나 비 내릴 것에 대해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기상속보 : 2015년 01월 22일 06시 10분 발표
o 강원산간과 경북북동산간에 대설주의보가 발효 중이며, 강원도, 충청내륙과 경북북동산간에는 비 또는 눈이 내리고, 충청이남지방에는 비가 오고 있음
o 이번 강수는 아침에 대부분 지역에서 그치겠으나, 강원도영동과 경상남북도동해안, 일부 경북내륙은 동풍의 영향으로 밤에 그치겠음
o 강원도영동에는 많은 눈이 쌓이겠으니, 교통안전과 시설물 관리에 유의바람
o 대설주의보 : 경상북도(봉화군산간, 울진군산간, 영양군산간), 강원도(양구군산간, 평창군산간, 강릉시산간, 홍천군산간, 양양군산간, 인제군산간, 고성군산간, 속초시산간, 정선군평지, 평창군평지, 동해시산간, 삼척시산간, 정선군산간, 태백시)
기상도 삽입
7. 활동상황
○ 08:00 --- KBS춘천방송총국 앞 출발(충주휴게소 경유)
○ 10:34 --- 문경새재도립공원주차장 도착
○ 10:40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10:44 --- 들머리진입
○ 10:50 --- 문경새재도립공원관리사무소
○ 10:51 --- 선비의 상
○ 10:52 --- 옛길박물관
○ 10:58 --- 문경새재자연생태공원
○ 11:03 --- 주흘관 - 영남제1관문
○ 11:08 --- 신길원현감충렬사
○ 11:16 --- 문경새재오픈세트장
○ 11:29 --- 조산
○ 11:32 --- 지름틀바위
○ 11:35 --- 등룡문
○ 11:38 --- 조령원터
○ 11:41 --- 무주암
○ 11:45 --- 팔왕휴게소
○ 11:53 --- 마당바위
○ 11:59 --- 주막
○ 12:00 --- 문경새재 박달나무군락
○ 12:04 --- 교귀정
○ 12:12 --- 기도굴
○ 12:24 --- 소원성취탑
○ 12:25 --- 조령 산불됴심 표석
○ 12:29 --- 조곡폭포
○ 12:33 --- 주흘산등산로입구
○ 12:35 --- 조곡관 – 영남제2관문
○ 12:42 --- 조곡약수
○ 12:50 --- 문경새재아리랑비
○ 12:54 --- 바위굴과 새재우
○ 13:09 --- 이진터
○ 13:16 --- 후미그룹 점심식사
○ 13:52 --- 동화원터
○ 13:58 --- 문경초점 – 낙동강발원지
○ 14:07 --- 문경새재 책바위이야기
○ 14:15 --- 조령관 –영남제3관문
○ 14:29 --- 백두대간조령비
○ 14:52 --- 만수사입구
○ 14:53 ---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
○ 15:04 --- 고사리주차장 도착
○ 15:20 --- 고사리주차장 출발
○ 15:27 --- 연풍레포츠공원 하산행사
○ 15:53 --- 연풍레포츠공원 출발
○ 18:00 --- KBS춘천방송국 앞 도착
Ⅱ. 지역특성
<문경새재도립공원 일원 전경>
1. 지역유래
◆ 문경읍
► 유래
- 오늘 들머리가 소재한 문경읍은 신라 전기에는 관문현(일명 고사갈이성) 또는 관현이라 불렀으며통일신라 경덕왕(서기 750년)때에 관산현 이라 개칭하고 고녕군(현 함창)의 영현이 되었고고려 현종(서기1020년)때에 문희군이라 고쳐 상주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그 뒤에 문경이라 불리었는데 그 확실한 년대는 미상임.
► 연혁
- 신라시대 : 고사갈이성, 관문현, 관산현으로 호칭
- 고려시대 : 고려 초에는 문희, 고려 34대 공양왕 때에는 현재의 지명인 문경으로 개칭
- 1892(고종32년) : 문경군으로 지정(대전회통, 1895년)
- 1924 : 문경면 개칭(초곡면과 읍내면 병합)
- 1932 : 산북면을 병합(경상북도 훈령 제33호)
- 1973 : 문경읍으로 승격(대통령령 제6542호)
- 1981 : 조령관문을 중심으로 한 새재일원이 도립공원으로 지정
- 1996 : 개발촉진지구, 폐광지역진흥지구로 지정
- 1998 : 문경새재를 자연생태공원으로 지정
◆ 연풍면
- 오늘 날머리가 소재한 연풍면은 동부에 점위 되어 동남으로는 경상북도 문경시와 접하고 있으며 북은 충주시 수안보면, 서는 장연면, 남은 칠성면과 인접해 있다. 연풍면은 충청북도 일대가 고구려 영토가 되면서 연풍 장연면과 중원군 상모면 대부분을 합하여 상모현(上芼縣)이라 한 후부터는 명칭이 바뀌어 940년(고려 태조 23)에 장연현과 장풍현으로 분현됨에 따라 장연현으로 되었다. 1403년(조선 태종 3)에 장연현과 병합하여 장풍부(長豊府)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연풍현으로 격하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연풍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에 괴산군에 병합되면서 폐군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사리면의 신혜원과 장풍면의 음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연풍군의 이름을 따서 연풍면이라 하고 분지·주진·삼풍·행촌·원풍·유상·유하.적석·갈금리 등 9개리로 개편하여 괴산군에 편입되었다.
2. 문경새재도립공원 살펴보기
<문경새재도립공원안내도>
- 문경새재도립공원은 이 지역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 6. 4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문경새재도립공원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원 5,495㎢에 걸쳐있다. 지난 7, 12 다녀온 조령산과 오늘 다녀온 주흘산이 이에 포함된다. 주흘산은 主人 主, 산 우뚝할 屹 자를 쓴다. 主屹山이란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이 지역의 주인 행세를 하는 산으로 느낌이 가슴에 와 닫는다. 예로부터 영남과 한양을 잇는 영남 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갯길인 문경새재를 중심으로 백두대간의 주흘산과 조령산 일대의 원시림이 자연그대로 보존 된 청정 휴식공간이다. 새재도립공원에는 사적147호로 지정 된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등 세 개의 관문을 비롯한 많은 문화 유적과 옛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넘나들던 장원급제길, 책바위, 교귀정, 원터등 선현들의 발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장렬히 순국하신 신길원현감의 충절과 이곳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지 못하고 달래강에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의 애환이 함께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는 조선사를 재조명하는 세계최대의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을 비롯하여 민속박물관, 유스호스텔, 사계절 썰매장, 자연생태공원 등이 잘 갖춰져 있다.
◆ 문경새재(명승 제32호) 유래
-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새(新)재」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 김덕현 교수 (경상대학교 교수, 전 문화재위원)
- ‘새재’의 어원은 새도 넘기 어려운 길, 억새가 많이 우거진 길, 그리고 계립령(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길이라는 여러 설이 있는데, 세 번째 설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충주를 넘는 고갯길 조령 삼로 가운데, 고려시대까지 계립령이 주로 역할을 하였다면, 조선시대에는 새재, 그리고 신작로가 닦여진 20세기에는 이화령이 주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새재는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황정환 교수 (경주대학교 교수, 문화재전문위원)
-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에 관도(官道)로 개통되면서 영남과 기호를 잇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길(嶺南大路)이다. - 조선시대에 문경새재는 국방상의 요충지, 경제․사회․문화 유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새재 주변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여러 계곡 등에서 서식하는 희귀동식물, 기암괴석, 약수 등으로 인하여 환경적, 자연적 중요성이 높게 평가됨. 또한 관문, 충렬비, 표석, 원터, 교귀정, 군막터, 동암문, 북암문, 이진터, 봉수터, 성터, 대궐터 등의 유적이 남아있어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큼 - 새재를 넘나들면서 남겨놓은 인간세상의 많은 이야기, 보부상인, 산도둑, 화전민, 과거길에 오른 선비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영남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역사자료가 됨
◆ 문경새재에 얽힌 전설
► 새재산신령 전설
- 조선 태종 때 처음으로 조령의 길을 개척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이 긴급히 조정에 치계(馳啓)하여야 할 중대 안건이 있었다. 현감은 요성 역졸 중에 신체가 건강한 역졸을 골라서 조정에 상계(上啓) 할 장계를 가지고 급히 다음 역까지 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감의 명령을 받은 역졸은 다음 역을 향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데 새재의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호환(虎患)을 당하였다. 문경현감은 체송간 역졸이 호환 당한 줄도 모르고 조정에 상계하였으니 그 비답만 내릴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차 조정에서는 문경현감에게 관계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문경현감은 깜짝 놀라 요성역으로 가서 체송한 역졸을 호출하였더니 그 역졸은 지금까지 귀임하지 않고 행방불명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안 현감은 즉시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호령하고 그 역졸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문경새재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호랑이가 먹다 남은 신체 일부와 행장이 발견되었다. 현감은 또 다시 지연된 사유와 아울러 조정에 사건의 경위를 상보(上報)했다. 이 장계를 받은 태종은 대노하여 즉시 봉명사(奉命使)를 차원(差員)하여 문경새재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봉명사는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을 포착하려고 하나 산신령을 잡을 묘안이 나지 않았다. 궁여일책으로 새재 산신사(山神祠)에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한 후 제문을 불사르고 혜국사에 머무르면서 하회(下廻)를 기다렸다. 그날 밤 만월로 월광이 교교하여 잠도 못 이루고 전전반측(轉轉反側)하고 있는데 삼경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울부짖음이 일어나더니 잠잠해진다. 그 이튿날 새재 산신사 앞마당에 여산대호(如山大虎)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그 호랑이를 박피하여 태종대왕께 호피를 바치고 사실을 상주(上奏)하였다. 그 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전진공(錢珍公 : 聞慶錢氏 2世祖)이 혜국사에 유숙하여 있는데 그의 꿈에 새재 산신령이 현몽하기를 '나는 새재 산신령이요 나라에 득제하여 아직 면죄를 못 받았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나라에 상소(上疏)하여 억울한 죄명을 씻어줄 수 없겠는가?'하고 간청했다. 그는 쾌락(快諾)하고 즉시 새재 산신령에 관한 사죄상소를 올렸더니 태종께서 친히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새재 산신령의 죄를 사(赦)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 새재와 신립장군 전설
- 신립 장군은 1546년에 태어났다. 자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생원(生員) 화국(華國)의 아들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 도사 경력 진주판관을 거쳐 은성부사가 됐다. 육진을 괴롭힌 니탕개를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가서 소탕하고 함경북도 병사로 승진했으며 니탕개를 잡아 죽이는 등 전공이 혁혁하여 평안병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선조가 친히 검을 하사하며 격려하였다. 같이 간 김여물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적이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부딪치면 위험하고 우리 병정은 아무 훈련 없는 장정들이라 사지(死地)에 갖다 놓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않을 것으로 알고 천험의 요새인 새재를 버리고 달천(達川)에 배수진을 쳐서 장열 한 전사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란을 당하여 영남의 패보가 서울에 도달하자 조정에서는 대경실색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모병 대적하게 하고 일방 순변사 이일 장군을 상주에 급파하여 방어케 하였다. 대치중인 왜장 소서행장은 임진 4월 24일 상주를 포위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이 장군은 대패하여 문경 조령으로 진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중도인 당교에서 남하하는 신 장군과 만나 대패한 사실을 전하고 신 장군과 함께 문경으로 회군하여 방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제장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의를 주제하는 신 장군 앞에 한 도승이 나타나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포진반격을 가하면 왜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간곡히 진언하였다. 그러나 신 장군이 인솔한 병사는 충청도 태생으로 산악전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사기가 저하되어 평야인 충청도 지대에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많으므로 신 장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유예미결하고 있었다. 그 때에 신 장군의 소식에 장군을 사모하다가 함원자결한 처녀의 원귀가 장군 앞에 나타나 "신 장군은 대명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라" 말하니 새재에서 싸울 마음이 없던 충청도 출신 장병들이 떠들고 일어나는지라 신 장군은 요사스런 원귀의 말을 믿고 부장 김여물 등은 회군의 불가함을 극간하고 조령방어책을 주장하였으나 신 장군은 그 계략을 묵살하고 충주 탄금대에 포진하였다. 왜적과 대진한 신 장군과 전 장병은 순사 대패하고 말았으니 조령을 사수하였던들 임란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달성판관의 명판결
- 옛날에는 신임사또가 임명되면 육방관속이 그 본가까지 모시고 왔었다. 어느 시대 서울 사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고 얼마 후 달성 판관으로 임명된지라 달성의 육방관속은 관례대로 사또를 모시러 갔다. 신임 사또가 인물이 어떠하며 성격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마음에 급히 사또 집을 물어 찾아가니 기대와는 딴판으로 사또의 키는 5척도 못되는 단구요 거기다 얼굴까지 빡빡 얽었고 나이도 겨우 스물이 넘을락 말락하는 애송이로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육방관속들은 별 것 아니 구나 속으로 만만히 보며 함께 내려오는데 문경새재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그때 찢어진 갓을 쓰고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상주가 사또에게 울면서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내용인즉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비용을 마련키 위해 상주의 몸인데도 닭 다섯 마리를 팔러 장에 나왔다. 평생 물건을 팔러 시장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파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한 장수가 가까이 와 자기가 맡아 있다가 팔아주겠다면서 상주의 닭 다섯 마리를 자기 닭장 속에 집어넣었다. 한나절을 지나 그 닭 장수에게 맡긴 닭을 달라니 맡은 일조차 없다고 잡아떼 본관사또에 이 사실을 알리고 닭을 찾아 달라했더니 "이놈 네 닭을 내가 어찌 안단 말이야" 고 호통만 칠 뿐 찾아줄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달성판관은 곧 사령을 보내 닭 장사를 잡아오게 했다. 상주에게 자기 닭을 찾아라 하니 여러 마리 중에서 하나하나 골라낸다. 사또가 먼저 닭 장수에게 물었다. "이놈 저 닭이 정녕 네 놈 것이라면 저 닭에게 아침에 뭘 먹였느냐" 닭 장수는 쌀, 보리 등 온갖 것을 주어 섬기며 횡설수설한다. 상주에게 다시 물으니 아무 것도 먹일만한 것이 없어 집에 있는 수수 한줌을 먹였다는 대답이다.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으니 과연 수수가 나왔다. 닭 장수는 꼼짝 못하고 백배 사죄한 후 그를 얼러 닭 값을 열배나 물게 하고 문경 본관사또에게 5백 냥을 빌어 상주에게 장례비용으로 쓰도록 마련해 주었다. 교묘히 사건의 곡절을 가려내는 판관의 기질을 본 육방관속들은 혀를 내둘렀고 경멸이 여겼던 것을 뉘우쳤다. 달성판관이 부임한 후 여러 달이 지나도 문경사또에게 빌린 돈 5백 냥을 갚지 않자 문경사또가 사람을 보내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달성판관은 심부름 온 사람을 불러 "돈을 벌써 갚았는데 네 고을사또가 그렇게 정신이 없으시냐?"고 되려 나무란다. 심부름꾼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자 사또에게 돌아가 대전통편 몇 장 몇 조를 보면 알 것이라 이르도록 했다. 대전통편 그 장은 본래 자기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관사또가 처리 못했을 때는 사또가 벌금을 5백 냥을 물도록 규정한 것이다. 달성판관은 그것을 이용, 5백 냥을 빌린다고 받아 불쌍한 상주에게 도움을 베풀고 똑똑치 못한 사또를 그 나름대로 징벌한 것이다.
► 새재 성황사와 최 명 길
- 최명길은 조선조 인조 때 강화파의 대표적인 정객(政客)으로 자(字)는 자겸(自謙) 호는 지천(遲川)이고 전주인이다. 좌우의정(左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으로 정사원훈 1등공신(精社元勳 一等功臣)에 완성부원군(完成府院君)에 봉해졌다. 최명길이 소시(少時)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께 문후 차 안동으로 갈 때 조령을 통과하였다. 그때 용모가 단정하고 자색이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뒤를 따라 오면서 "험한 산길이라 여자 혼자 무서워 갈 수 없으니 동행(同行)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최명길은 성격이 호방한데다가 젊은 여인이 동행을 원하는지라 쾌히 승낙하고 같이 동행하면서 그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여 마음속에서 살피고 있었다. 앞서가던 여자도 그 눈치를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고 방긋이 웃으며 "공이 저를 의심하는 모양이니 내 정체를 말씀하리. 이다. 저는 사람이 아니고 새재성황신인데 안동사는 좌수(左首) 모(某)야가 서울갔다오는 길에 성황당 앞을 지나면서 성황당에 걸려 있는 치마를 보고 욕심을 내어 치마를 훔쳐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좌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인데 우연히 공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고 말을 하면서 최명길의 눈치를 살핀다. 최명길은 마음속으로 놀랐으나 태연자약하게 "인명은 재천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소" 하면서 용서할 수 없느냐고 말했다. 그 여자는 한참 대답이 없더니 "공은 미구(未久)에 정사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를 몸이요, 병자호란이 일어나는데 공은 큰공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는 흥할 것이니 부디 청과 화친하여 이 나라 사직(社稷)을 보전하셔야 합니다.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일 것이되 공의 체면을 봐서 징벌(懲罰)을 할 것이니 공은 이렇게 하여 제 체면을 세워 주시오" 하고는 간 곳이 없었다. 최명길은 이상히 여기고 급히 서둘러 안동 모 좌수 집을 찾으니 좌수 딸이 급사(急死)하여 집안이 발끈 뒤집혀 경황이 없었다. 최명길은 주인을 찾아 인사를 나눈 후 "딸을 내가 회생시킬 수 있으니 딸 있는 방으로 안내하시오?"라고 말했다. 주인은 죽은 딸을 살리겠다니 감사히 여겨 최명길을 딸 방으로 인도하였다. 새재서 본 성황신이 좌수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일어나면서 "이제야 오십니까?" 하고 인사를 한다. 성황신과 최명길의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나 성황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빨리 불사르고 깨끗한 음식을 장만하여 치제하면 딸이 회생할 것이니 염려 마시오"라고 말하자 좌수는 백배사례(百拜謝禮)하고 최명길의 말대로 치성하니 딸이 다시 살아났다. 그 후 과연 최명길은 벼슬이 차츰 올라 영상이 되고 병자호란 때 중의를 물리치고 당시 정세를 잘 파악하여 치욕을 참고 화청정책을 채택하여 국난을 수습한 사실은 새재성황신과 관련된 인연이었다는 사화가 구전되고 있다.
Ⅲ. 산길여정
<조령관문 트레킹코스 개념도>
- 경북지역에서 충북지역으로 넘는 고개는 이화령(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괴산군 연풍군), 조령(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괴산군 연풍면), 하늘재(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죽령(경북 영주시 풍기읍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추풍령(경북 금릉군 봉산면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등으로 기억된다. 대부분 과거 산행 목적지 접근로 상에 위치해 있어 차를 타거나 걸어서 넘어본 고개들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산행과 관련하여 추풍령만이 기억이 생소할 뿐이다.
- 오늘 조령관문트레킹코스는 최근 2012. 7. 13. 조령산 정기산행 당시 하산 길에 제3관문인 조령관을 경유하였었고, 2012. 11. 29 주흘산 정기산행 당시 제1관인 주흘관과 제3관인 조곡관 일원을 경유한바 있다. 또한 2014. 9. 11. 월악산 사문리탐방지원센터 – 마패봉 – 부봉 – 하늘재 구간 백두대간코스를 다녀오면서 마패봉과 부봉 정상에서 조령관문 일원을 지척에 두고 지나치면서 눈 팅으로 즐긴바 있다. 본인 개인적으로는 지난 2012. 8. 11. 08:30에 연풍면사무소를 출발하여 이화령 – 조령관문을 거쳐 16:00에 연풍면사무소에서 일상을 갈무리하면서 7시간30분 트레킹을 체험한바 있다. 위 체험을 통하여 트레킹과 더불어 역사문화체험을 곁들인 트레킹코스로 문경새재도립공원 내 조령관문 일원이 제격일 것으로 염두 해 뒀었다. 그 염원을 오늘에 이르러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 평소 산행일정을 운영하면서 참석인원 30명 선을 마의 선으로 여겼었다. 30명 선을 넘기는 것을 소박한 작은 소망으로 여길 정도로 그 선을 넘기가 참으로 어려웠었다. 그러나 을미년 새해 벽두부터 산행일정에 변화를 가져오면서 일말의 기대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지난주 만 차에 가까운 참석률을 보이더니 오늘 역시 만 차 대비 신청률 82%, 참석률 73%를 상회하면서 만족할 수 있었다. 이 분위기가 끊임없이 쭉 이어지기를 기대해마지 않으면서 우리 모두님들의 변함없는 성원을 주문해 본다.
- 빠른 길 찾기 정보에서는 위 교통정보 내용과 같이 중앙고속도로 남원주IC – 목행사거리 – 단원삼거리 – 유즈막삼거리 – 수안보휴게소 – 진안길 – 문경대로 – 신안삼거리 – 문경새재도립공원주차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개념 보다는 시간개념을 염두에 둔 듯영동고속도로 만종IC – 중앙고속도로 여주IC –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JC – 문경대로 – 신안삼거리 –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였다. 결과는 예정시간대와 딱 맞아 떨어졌다. 돌아오는 길은 날머리 상황을 감안하여 위 안내정보 역순으로 귀로에 올랐다
- 문경새재도립공원주차장은 개점휴업 상황이었다. 그 넓은 주차장은 우리 고객이 유일한 단체고객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정차하는데 필요한 주차료 4,000원은 어김없이 징수하였다. 주차장 밖에 잠시 정차하여 주차료 4,000원을 벌어볼까. 하고 망설이기도 하였지만 우리 모두산악회에서 쩨쩨하게 4,000원 때문에 눈꼴사나운 행동거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잘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주차장 현장에서 단체기념과 더불어 일정안내를 마치고 들머리에 들었다. 오늘 일정운영방식은 자유 투어 형식으로, 점심식사는 조령관 쉼터에서, 하산예정시간은 운영시간을 4시간으로 잡고 15:00까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소재 고사리주차장까지 하산을 예고하였다.
<새재계곡>
- 오늘은 날씨예보 상 눈이나 비를 각오했었다. 그러나 현장의 상황은 아니올시다. 이었다. 한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 덕분에 이미 탐방로 길바닥은 지난밤 내린 눈이 녹아내려 질퍽댔다. 당일 현장의 상황은 그런대로 트레킹하기 딱 좋은 환경으로 전개되는 바람에 기분 좋게 일상을 열수 있었다.
- 문경새재도립공원주차장에서 곧바로 새재계곡 상류로 진입하였다. 주차장에서 문경초점 낙동강발원지까지 내내 새재계곡을 끼고 올라간다. 백두대간의 조령산을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문화,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새(사이)』, 새로 된 고개의『새(新)재』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 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 터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 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 (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오늘 일상은 계곡 상류 문경초점 낙동강발원지로 이어졌다.
<선비의 상>
- 10:51 선비의 상 경유
- 주차장을 출발하여 상가단지를 벗어나면서 진행방향 오른쪽에 자리한 선비의 상이 눈길을 끌었다. 이 길은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다니던 길이었고, 지방 수령들이 임지로 부임하던 길이었다. 또한, 보부상들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넘던 길이다. 특히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은 이곳을 포함하여 추풍령 및 죽령이 있었는데,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그리고 죽령은 거리가 너무 멀어 주로 새재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선비 상을 중심축으로 앞으로 원형의 광장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광장 좌우면 에 부조를 설치하여 선비와 관련된 시를 새겨 넣었다.
<옛길박물관>
- 10:52 옛길박물관 경유
- 선비의 상을 눈 팅 하면서 발길은 자연스럽게 옛길박물관 경내로 진입하였다. 오늘 일정안내시간을 통하여 가능하면 옛길박물관 관람을 권고한 탓인지 대열을 이탈하시는 분 없이 박물관으로 향했다. 입장우대혜택을 누리시는 분들 중심으로 일부 일행 분들이 입장하는 것은 확인한 후 나머지 분들과 동행하여 주흘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 옛길박물관은 2009. 4. 개관하였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疏通路)로서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명승 제32호)가 있고, 우리나라 최고(最古, 서기 156년 개척)의 고갯길인 ‘하늘재’, 옛길의 백미(白眉)이자 한국의 차마고도로 일컬을 수 있는 ‘토끼비리’(명승 제31호), 영남대로 상의 허브 역할을 담당했던 유곡역 등이 있다. 이러한 옛길관련 문화유적은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길’로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옛길박물관은 이러한 문경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잘 나타내기 위하여 건립된 박물관으로 당초 향토사 중심의 문경새재박물관을 리모델링하여 2009년 재개관 하였다. 옛길 위에서 펼쳐졌던 각종 문화상을 옛길박물관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어 이곳을 찾는 행락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주흘관(主屹關) - 영남제1관(嶺南第1關)>
- 11:03 주흘관 경유
- 사적 제147호인 영남제1관문은 주흘관으로 불린다. 주흘관은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하였고, 영조 때에 조령진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다. 한말 항일의병 전쟁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다. 주흘관은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고,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cm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m, 길이 188m이고, 부속산성은 높이가 1-3m, 폭 2-4m,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쪽이 400m이다.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965년 11월 9일 문경군교육청에서 제 1관문 수선공사의 설계승인을 얻어 1966년 보수하였다. 1969년 문화재 보호업무가 교육청에서 시군으로 이관되고 1972년부터 문화재 감시원이 배치 됐으나, 1988년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이후 전략요충지라 하여 1973년 예비군 700여명이 성벽위에 폭과 높이 1m정도 증축하여 총구를 만들어 원형이 변경되었다. 1974년 문경군에서 보수정화 공사를 시행하였다. 이때 성문, 후문 좌우계단, 좌측 성곽 320m, 협문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주흘관을 지나면 좌측 옆 전나무 그루터기에 "경상북도 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매설한 타임캡슐장소를 볼 수 있다. 곧이어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향토를 빛낸 분들의 비석군이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으로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이 나온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
- 11:16 문경새재오튼세트장 경유
- 여기서도 입장우대혜택을 받는 분들 중심으로 함께 입장하여 동행하였다. 본인도 그동안 늘 탐방로에서 건너다보면서 눈 팅으로 만족해야만 했었기에 아쉬움을 남겼었는데 오늘은 드디어 탐방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동행하신 분들 모두 처녀 체험인 관계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은 혜국사 입구에 들어서면서 용사골 새재계곡 건너편에 있다. 이곳은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는 곳이다.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한국방송공사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사극 대하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하여 2000년 2월 23일 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건립하였던 곳이다. 당시 공사비는 32억원을 투입하여 65,755㎡의 부지에 왕궁2동, 기와집42동, 초가40동, 기타 13동으로 건립한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촬영장이었다. 촬영장을 문경새재에 설치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어 사극 촬영장으로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대조영, 근초고왕, 성균관 스캔들, 대왕세종, 광개토왕의 촬영 주 무대가 되었고 영화는 스캔들, 낭만자객 등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문경시의 제작지원으로 과거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트장을 허물고 새로운 조선시대 모습으로 2008년 4월 16일 준공한 것이다. 공사비는 75억 원을 투입하였으며 규모는 70,000㎡ 부지에 광화문, 경복궁, 동궁, 서운관, 궐내각사, 양반집 등 103동을 건립 하였으며 기존 초가집 22동과 기와집 5동을 합하여 130동의 세트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조령원터>
- 11:38 조령원터 경유
- 주흘관에서 조곡관 어간에는 조산, 지름틀바위, 등룡정, 무주암, 마당바위, 주막, 조령산불됴심 표석, 조곡폭포 등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이를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지면 할애 상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 카페 목요산행방에 탑재된 영상자료를 참고하실 것을 권고하고 대표적으로 조령원터와 기도굴 유래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안내하고 넘어간다.
- 조령원터의 유래는 위 사진 내용으로 갈음한다.
<기도굴>
12:12 기도굴 경유
- 聖地는 종교의 발상지이거나 종교적인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나 성이 있던 자리를 일컫는다. 聖地巡禮는 종교적인 전승(傳承)에 따라 성화(聖化)된 땅이나 본산(本山)이 있는 곳을 차례로 찾아가 참배하여 신앙을 두텁게 하는 일이라고 풀이한다. 평소 성지순례 길에 올라보지 못한 본인의 입장에서 우연한 기회에 기도굴 성지순례의 기회를 잡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떡을 얻은 꼴이었다. 한마디로 횡재한 셈이었다. 이 구간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도 기도굴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니 눈뜬장님이나 다를 바 없었다. 기도처는 기도굴 안내판에서 급사면길 20여m 돌계단 길을 올라야만 접할 수 있다. 기도굴 내부에는 제대와 고상, 성모상 등이 모셔져 있다
기도굴의 유래에 대해서는 위 사진으로 갈음한다.
<교귀정>
- 12:04 교귀정 경유
- 교귀정은 조선시대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 받던 교인처(交印處)이다. 조선시대 신임감사의 인수인계는 도경계 지점에서 실시하였으며 이 지점을 교귀라 한다. 1470년(성종 초) 경에 건립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二翼工),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앞 우측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교귀정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매년 가을 문경문화제 때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문경새재의 교귀정은 복원된 것이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인처이다. 주흘관과 조곡관의 중간 지점인 용추(龍湫) 옆에 있다.
☞ 監司란 조선 시대, 각 도의 으뜸 벼슬. 그 지방의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 따위의 행정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종이품(從二品) 벼슬.
<조곡관(鳥谷關) - 영남제2관(嶺南第2關)>
- 12:35 조곡관 경유
- 주흘관에서 3.0km지점 좌우 계곡이 좁아지면서 아름다운 경치 속에 문경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조곡관은 천혜의 요새임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 기암절벽이 조곡관을 굽어보며 우람하게 서 있고, 조곡관 뒤 우거진 송림은 신립장군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로이 우리 일행 분들을 맞이하였다.
- 조곡관 직전 주흘산등산안내도 앞에서 오른쪽으로 진입하면 주흘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2012. 11. 29 주흘산 정기산행 당시 이 지점으로 하산하여 조곡관을 경유한 다음 주흘관방향으로 하산한바 있었기에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였다.
- 사적 제147호인 영남제2관문은 조곡관이라 불린다. 조곡관은 조선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하였으며 1,2,3관문 중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을 설치하였다. 1907년 을미의병 시 훼손되어 문화재로 지정 후 1978년에 복원하였다. 성의 육축 부분은 화강암을 다듬어 바른 층으로 쌓은 반면 좌우로 연결된 성벽은 자연석 허튼 층 쌓기 이다. 통행에 필요한 육축의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5.8m이며 여기에 설치된 대문은 높이 3.6m, 폭 3.56m, 두께 11㎝의 판문이다. 육축 상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익공계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인 문루를 세운 다음 양 측면 쪽으로 출입 할 수 있도록 협문을 2개 세웠다. 문루의 정면은 어칸이 425㎝이며 양 퇴칸은 200㎝로서 어칸이 퇴칸 보다 약 225㎝넓고 측면은 185㎝로 간살이 동일하다.
- 조곡관을 지나자마자 진행방향 왼쪽 계곡 징검다리 건너편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지점에 용천수인 조곡약수(鳥谷藥水)가 있다. 이곳 약수는 물맛이 좋아 길손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고도 남음이 있다. 큰 물바가지로 한 바가지 푹 퍼서 단숨에 들이켜고 나니 한결 몸이 개운해지면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갈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이곳을 지나는 산객들의 급수원으로 기능할 것으로 보였다.
- 조곡관에서 조령관 어간에는 위에서 언급한 조곡약수를 비롯하여 문경새재아리랑비, 바위굴과 새재우, 이진터, 동화원터, 문경초점 낙동강발원지, 문경새재책바위이야기, 시비 등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가 풍성하다. 이곳 역시 일일이 나열하여 언급하기에는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우리 카페 목요산행방에 탑재된 영상자료를 참고할 것을 권고하고 그냥 넘어간다.
<조령관(鳥嶺關) - 영남제3관(嶺南第3關)>
- 14:15 조령관 경유
- 조곡관을 지나면서 부터 해발고도가 차츰차츰 높아지면서 눈길이 깊어졌었는데 조령관 앞 광장에 이르면서 설원을 맞이하였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금년 겨울 들어 처음 맞이하는 눈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눈의 고장 강원도에 살면서 눈 구경을 제대로 못 하고 남의 동네에 와서 눈 잔치를 벌이자니 쑥스러움이 앞서기도 하였다. 조령 정상일원 숲을 뒤덮은 눈꽃과 더불어 자욱한 운무가 운치를 더해줬다.
- 조령관 앞 광장에 이르면서 후미 일행 분들을 기다리고 있는 회장님을 비롯한 잔류 팀 몇 분과 합류하여 동행하였다. 조령관 광장에 첫걸음을 들여 놓는 순간 2012. 7. 13 조령산 정기산행 당시의 상황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 당시 광장 한편에 자리한 휴게소 사장님 왈! 조령산은 단체산행을 하는 산이 아니라고 언급했던 그 한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아니하고 뇌리에 생생하였다. 그 분 말씀대로라면 겁 대가리 없이 무작정 덤볐다가 혼쭐난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한 점 후회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전사님들께서 100% 완등이라는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다.
- 조령관 왼쪽 조령산 입구에는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 길을 재촉하던 영남의 선비와 길손들에게 갈증을 풀어주던 역사속의 명약수인 새재약수터가 있다. "한국의 명수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싶었다. 조령관 문루에 올라보면 소백의 높고 낮은 봉우리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도계(道界)를 이루며 조령관 용마루를 타고 서남쪽으로 흐른다. 조령관 지붕위에서 떨어진 빗물이 남쪽으로 떨어지면 낙동강물이 되고 북쪽으로 떨어지면 남한강물이 된다. 한마디로 조령관 용마루는 남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발원지이자 도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또한 문경새재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 6,5km 구간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쉽게 오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오늘 트레킹을 통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이 길을 넘나들던 그 옛날 선비들의 행적을 기리면서 문경새재 옛 길을 체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 사적 제147호인 영남제3관문은 조령관이라 불린다. 조령관은 새재 정상에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초(숙종 34년 : 1708)에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 홍예문과 석성 그리고 누각을 복원했다. 조령관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청북도 충주 땅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패봉을 지나 북암, 동암문, 부봉, 주흘산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깃대봉, 조령산 공산진, 이화령으로 이어진다. 이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홍예문 문은 높이 3.88m 폭 2.98m, 길이 6.12m이며,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부속산성의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높이는 3.9m, 폭 3.56m, 뚜께 19cm이다. 문루의 북쪽 정면 상부에는 조령관(鳥嶺關)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반면 남쪽 배면 위에는 영남 제3관(嶺南第三關)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문루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육축의 뒤편 양쪽에 ‘ㄴ’자형과 ‘一’字形으로 각각 달리 설치되어 있다.
<조령산성>
- 조령관문 일원의 조령산성을 소개한다. 조령산성은 마패봉에서 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내내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명나라 측에서도 선조가 안주에 파천하여 있을 때 백상루에서 유원외가 선조에게 조령관 설비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에 따른 물자의 결핍으로 인해 중국 산해관처럼 하자느니 조령만이 천험은 아닌데 다른 곳은 설관하지 않아 되겠느냐는 등 논의만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평안감사 이원익, 병사 신집, 우승지 유몽정, 주서 김상설, 검열 조유한 등의 논의로 죽령과 조령에 설관하기 위한 자료수집차 화공 12인을 중국에 파견토록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파견이 중지되었다. 선조 26년 12월 영의정 류성룡이 성에 의지하여 승전한 경험을 들어 조령 설관을 다시 주장하여 선조도 조령 설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류성룡은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의 조령지세와 설관 및 설관 후 파수 계책에 대한 것을 듣고 선조 27년(1594) 2월에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조령은 나라의 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되고 충주가 함락되면 한강수백리(漢江數百里)를 자연히 잃게 된다. 충주 사는 수문장 신충원이 조령지세를 잘 알고 있다. 조령의 영상(嶺上)에는 잡로(雜路)가 많아 막기가 힘들고, 영(嶺)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내려가면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고 그 가운데로 물이 흘러 행인들이 나무를 걸치고 건너야 한다. 이와 같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된다. 또 응암(鷹巖)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설관하여 적이 이곳에 이를 때 다리를 철거하고 물을 막았다 트면 감히 발붙이기가 어렵고 궁노(弓弩)와 능철화포 등을 쏘면 백여 명이 지킬 수 있다. 문경 동쪽에는 구로(舊路)가 있어 조령의 서쪽에 이르게 되나 백년간 사용치 않아 산림이 울창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아 다니기 어렵고 문경 서편에도 소로가 연풍현의 동쪽에 닿으나 워낙 험준하여 여기도 수십인이면 지킬 수 있다. 연풍읍과 수회촌의 땅이 기름지니 승군(僧軍) 산척(山尺) 백여인을 얻어 둔전경종(屯田耕種)하여 군량에 충당하고 화약총포를 얻어 주야로 조련하면 정군(精軍)을 얻을 수 있으니 농자(農資)를 주어 파견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신충원은 곧 사람을 모아 축성을 하였으니 선조 27년 10월의 일이다. 용장에게 수백 명을 주어 지킨다면 대병(大兵)이 쳐들어 온데도 전일 같이 유린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충원이 성을 쌓고 난 후 죽령에도 축성케 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것 같다는 상계(上啓)가 있었으나 물력이 부족하여 시작하지 못했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징천인(徵賤人)이 축성의 거역(巨役)을 마쳤다고 포상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논의뿐이던 설관이 수문장에 의하여 완공되자 요새방어를 위하여 용장의 배치 건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경상좌도에서 방어를 맡으라는 등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선조 30년(1597) 2월 신충원이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守禦)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仁祖)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조령 등 남관요충(南關要衝)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영비(營裨) 손명대에 의하여 수마석(水磨石)과 잡석소편(雜石小片)으로 쌓아 가자(加資)되었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 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 당하고 논죄(論罪)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성이 3곳의 골짜기를 막고 있는데 하나는 고개 정상에 있어 충청, 경상 두 도의 경계를 이루며 조령관(鳥嶺關)이라고 하고, 하나는 응암에 있는데 신충원(辛忠元)이 쌓은 옛 성으로서 조동문(鳥東門)이라 하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홍예문이 있으며 대로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여러 갈래의 개천이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간다. 제1, 2, 3관문은 양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하며 높이 솟은 봉우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조령산자연휴양림>
- 14:53 조령산자연휴양림 경유
- 조령관에서 고사리주차장방향 하산 길은 조령정상 이정표 기준 2,2km, 조령관문안내판 기준 2,6km이다. 문경새재도립공원주차장에서 조령정상까지 6,5km인 점을 감안하면 고사리주차장까지 8,7km 내지 9,1km 정도이다. 하산 길 내내 눈길이었다. 아이젠을 착용하기에는 번거로움이 앞섰고 그냥 내려가자니 조심조심 거북이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을 비롯한 몇 몇 분께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땅을 사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웃음보가 절로 터졌지만 억지로 참다 보니 배꼽이 빠질뻔 하였다. 만약 배꼽이 빠졌다면 눈길에 찾을 길이 없었기에 별도 날을 잡아 가야할 판이었다. 그 바람에 조령산자연휴양림 방향 계곡 길을 접고 임도를 따라 하산하기에 이르렀다.
- 조령산자연휴양림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 1-1번지에 위치해 있다. 1995년 1. 25 개관하였으며 충청북도가 관리주체이다. 구역면적은 766 ha에 이르고 수용인원은 일일 170명 정도이다. 조령산자연휴양림은 충북 괴산의 연풍면소재지와 온천관광지인 수안보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과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 준령의 조령3관문 아래, 아늑한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위로 조령산과 신선봉, 마역봉 등 명산이 휴양림을 감싸고 있다. 아름드리 송림 속에 통나무로 만든 가족단위 숲속의 집과 단체용 임간수련장이 있으며 사계절 썰매장, 어린이물놀이장, 놀이터 등 놀이시설과 산림욕장, 매점, 임산물판매장, 야영장, 취사장, 샤워장 등 야영 및 휴양시설을 갖추고 있다.
- 휴양림 인근에는 충주호, 수안보, 월악산, 쌍곡계곡, 화양동계곡 등 충북의 유명관광지가 있으며 연접한 경북에도 문경새재도립공원이 있는 등 휴양림을 중심으로 많은 관광지가 분포되어 있어 다양한 관광이나 등산이 가능하다. 또한, 조령산자연휴양림은 옛 선비들이 넘나들던 새재 과거길, 조령 제3관문(사적 제147호)에 얽힌 역사 등 조상의 얼과 문화가 살아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 하산길목 조령산자연휴양림입구 표석 바로 아래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신선봉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신선봉에서 마패봉을 경유하여 부봉으로 이어진다. 부봉에서 주흘산으로 이어지고 그 중간지점에 진행방향 왼쪽으로 하늘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고사리주차장>
- 15:004 고사리주차장 도착
- 오늘 하산예정시간 15:00을 넘기면서 고사리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고사리주차장은 낮선 곳이 아니다. 2012. 7. 13. 조령산 정기산행 당시 날머리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하산예정시간을 무려 3시간상당 지체하면서 낙오자 산행시간기준 9시간10여분 만에 어렵게 일상을 갈무리했던 곳이기에 3년여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도 그날의 기억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날따라 부상자가 유난히 많았었다. 다행이 큰 부상자 없이 찰과상 정도에 그쳤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 또 그 자리에 서고 나니 감회가 새로울 수뿐이 없었다. 그 당시는 진로를 이탈했던 분까지 있었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의 혼쭐난 산행 중 각별했던 하루로 기억되는 일상이었다. 그날 진로를 이탈했던 분께서 단독 하산했던 길이 바로 아래 Ⅳ편 주요(주변)볼거리 편에 소개한 수옥폭포이다.
- 오늘 날머리가 소재한 원풍리(院豊里)는 연풍면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서쪽은 유상리, 남쪽은 행촌리, 북쪽은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에 인접하여 있으며 원풍리는 연풍군 현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풍동 사동, 고사리면 수옥리, 신혜원을 병합하여 신풍과 신혜원의 이름을 따서 원풍리라 하여 연풍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고사리(古沙里)는 조령 삼관문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다. 옛날 주막 마방집 등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펜션, 민박 등 위락시설이 들어서 있다.
<연풍레포츠공원>
- 고사리주차장은 공영주차장이 아니다. 고사리산장에서 직영하는 주차장이다. 주차료는 4,000원씩 어김없이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차장 내 취사행위는 금지사항이다. 텅 빈 주차장인데 인심 한 번 쓰면 안 되나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구차하게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조령관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임에도 불구하고 공영주차장이 개설되지 아니한 점이 흠으로 남았다.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이 지역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위로를 삼았다. 눈물을 머금고 하산행사 장소를 물색해 보았지만 허사이었다. 조령산 정기산행 당시 하산행사 장소였던 소나무 밑을 가보니 울타리가 쳐져 접근 불가 상황이었다. 별수 없이 귀로에 올라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기로 하고 현장을 서둘러 벗어났다.
- 고사리주차장을 출발하여 5분 남짓 지나면서 이화여대수련원이 나왔고 곧이어 연풍레포츠공원이 나왔다. 공원 내 상황은 썰렁하였지만 정자 등 쉼터 공간이 있어 하산행사 장소로는 딱 이었다. 때마침 제설작업 중인 현지 주민이 있어 허락을 받고자 단 숨에 달려갔다. 어르신 여기 잠시 쉬었다 가도 되나요? 라고 인사를 건네자마자 마음대로 쉬었다 가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서는 충청도 후한 인심을 맛볼 수 있었다. 오늘 메뉴는 컵라면을 준비하였다. 오늘 반응을 보고 호응이 좋으면 가끔 특별메뉴로 상을 차릴 요량이었는데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점심식사를 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변이었지만 연세 지긋한 분들의 메뉴로는 아닌 듯싶었다. 간단히 이슬이를 나눈 후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Ⅳ. 주요(주변)볼거리
- 오늘 주변볼거리 편은 날머리 인근에 소재한 수옥정. 수옥폭포와 보물 97호로 지정된 마애불 좌상을 선정하였다. 이는 2012. 8. 11 오지회 활동 일환으로 연풍면사무소 – 이화령 – 조령관문 – 연풍면사무소 구간을 트레킹하면서 체험한바 있었기에 다시 재조명해 보는 차원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 수옥정과 수옥폭포
- 수옥정은 원풍리 새재 제 3관문 아래 수옥폭포 옆에 있는데 폭포의 암벽에 裕壽書』라고 숙종 37년(1711)에 東岡 趙相愚(1640-1719)가 정자를 지었다고 그의 조카인 後溪 趙裕壽(1663-1741)가 써 놓았는데 세종록에 숙종 32년(1706)에 연풍현감에 부임한 조유수가 우연히 이곳 개암나무 숲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폭포를 발견하고 수옥정을 세우니 연풍 사람들이 그를 기리어 바위에 글을 새기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폐 되었다가 1960년 괴산군의 지원을 받아 연풍 유지들이 그 자리에 팔각정을 세우고 수옥정 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 마애불 좌상 : 보물 97호
- 소재지 :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 124-1번지
- 개요 : 큰 암벽에 감실을 조성하고 이구의 불상을 조각하여 놓았으며, 조성수법을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 불상은 12m나 되는 큰 안벽에 감실을 3.63x3.63m로 파서 마련하고 이구병좌상으로 조각하였으며 얼굴은 둥글고 평판하며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을 묘사하여 치졸하지만 미소가 번지고 있으며 어깨는 반듯하고 가슴은 평평하다.
Ⅴ. 특기사항
- 오 경 희 부회장님 김밥, 이 영 국 님 묵무침, 채 예 경님 소시지 안주 협찬
Ⅵ. 산행을 마치고
- 오늘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던 가장 큰길이었던 嶺南大路 조령관문을 트레킹 하였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국방상 요충지이면서 경제․사회․문화 유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오늘 트레킹코스 일원을 거닐면서 샛길박물관, 조령관문, 충렬비, 표석, 조령원터, 조산, 지름틀바위, 세트촬영장, 등룡정, 무주암, 마당바위, 주막, 박달나무군락지, 기도굴, 수원성취탑, 산불됴심표석, 조곡폭포, 섹시폭포, 조곡약수, 바위굴과 새재우, 이진터, 동화원터, 문경초점 낙동강발원지, 책바위이야기, 군막터, 시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볼거리, 읽을거리를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역사적 의의가 매우 컸던 곳임을 실감하였으리라 본다. 또한 조령(새재)을 넘나들면서 남겨놓은 옛 선인(仙人)들의 세상사 이야기, 보부상인, 산 도둑, 화전민, 과거 길에 올랐던 선비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음미하면서 역사문화체험에 대한 감회가 새로웠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난주 고성 화진포에서는 분단의 현장에서 현대사의 아픔을 재조명해 보았다면 오늘은 역사적 사료가 잘 보존된 현장에서 고대사에 대한 역사의식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 오늘 현장 여건을 감안하여 자유 투어 형식으로 운영한 관계로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허접하게 일상을 갈무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만족한 일상이었다고 분에 넘치는 후한 점수를 주시는 바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트래킹코스나 여유 있는 일상이 너무 좋았다고 하시면서 이런 코스 자주 넣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한껏 업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오늘 분위기 끊임없이 쭉 이어져 나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시고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면서 조령관문 트레킹 일상을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