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호 할머니
김춘희
짐을 양손에 무겁게 들고 걸음은 더뎠다. 승강기 앞에 겨우 섰는데 마스크를 쓰고 허리가 반은 굽은 할머니가 짐을 들어 주시겠다고 했다. 사양을 하면 선심을 거부하는 모습이 될 것 같았다.
11층까지 가는 승강기 안에서 짧은 인사를 건넸다. 아들이 이사를 와서 가끔 들르게 된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반가운 기색이었다. 같은 층에 내려서 문 앞까지 짐을 들어다 주시고는 이 집에 전에 살던 새댁과 친했다면서 문고리를 잡고 발길을 돌릴 생각을 안 하셨다. 그러니 문을 닫을 수도 없고 말을 끊자니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고 어정쩡한 채로 짐을 놓지도 못하고 들고 서 있는데 갑자기 손을 끌며 집에 가서 차라도 한 잔 하자고 하셨다. 이를 어째,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아들집이라 나름 시간 계획을 세우고 오는데 선택의 기로에서 순간 갈피를 못 잡았다. 하지만 젊은 사람한테 손 내미는 어르신의 인정에 이끌려 짐을 현관에다 둔 채로 따라 갔다.
할머니가 사시는 1107호 문이 열리자 집 안은 세월 묵은 짐들로 빼곡했다. 그 연세에 세간이 고급지고 뭔가 있어 보였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무늬가 수려한 자개 가구였다. 농, 화장대, 문갑, 삼층장, 반닫이가 모두 자개품이었다. 개발시대 이후 가구이기 전에 부의 상징이었던 자개 가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닦고 또 닦았을 할머니의 젊은 날을 잠시 상상하며 보고 있는데 마스크를 벗으며 연신 앉으라고 하셨다. 감으로 느끼는 연로와 다르게 코스모스를 연상케 하는 가녀리고 고운 외모였다.
할머니는 차를 끓이겠다며 부엌으로 가시면서 올해 여든 네 살 쓸모없는 노인네에다 홀로 이러고 살고 있으니 흉보지 말라고 하셨다. 노쇠한 등 뒤로 삶의 연민이 풍겨 나왔다. 차를 마시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는 봇물 터지듯 쉬지 않고 이어졌다.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을 할머니를 연민으로 바라보며 경청했다.
할머니는 공무원이었던 남편 덕에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남한테 손 안 벌릴 만큼 순탄하게 살았다. 남편이 살아생전 약속했던 대로 14개국 해외여행도 했다. 2남2녀 자식들도 반듯하게 키워 의사로 변호사로 교육공무원으로 쓰일 곳에 내보냈다고 했다. 벽에 걸린 빛바랜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가족 구성원들을 소개해주셨다. 사진으로만 봐도 다복한 가정임이 분명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궁금하여 언제 돌아가셨냐고 물었다. 큰 소리 한번 안 내시고 성품이 온화했던 분이었는데 일흔 되던 해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그 황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돌아가신 분을 깍듯하게 존대하는 것을 보면서 두 분의 성품이 가늠 되었다.
그 후로 신세한탄하며 살다가 다니던 절에다 정을 붙여 대소사를 꾸려나가는 막중한 일을 맡아 부산하게 움직이며 조금씩 정신을 차리셨다고 했다. 그럭저럭 사시다가 여든 살이 되던 해에 집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살던 주택을 정리하고 둘째 아들이 세 놓았던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단다. 아파트 생활이 편리함은 있지만 정으로 이루어진 주거환경이 아니다 보니 말벗도 없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친구 삼아 소파에서 누웠다 앉았다 하신다고 했다. 그래도 의사인 아들이 시키는 대로 다리 근력운동은 해야만 했다.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동네 밖으로는 못 나가겠고 아파트 복도를 반복해서 한 시간 정도를 걷는 것이 하루 일과라고 했다.
나는 안타가운 마음에서 “경로당에 가시면 친구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라고 했다. 하루는 경로당에 갔더니 다들 젊은 날에 잘나갔다는 이야기 아니면 자식들 자랑이고 늙으니 더 옹졸해져서 남의 이야기는 당최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십 원짜리 내기 화투판이 벌어지는데 셈을 잘 못해서 결국 판이 뒤집어지고 싸움이 일어나니 섞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두어 번 가다가 귤 한 봉지 사 넣어주고 다시는 안 가신다고 했다. 노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예전에 밭 친구 할머니들과 어울리다가 내 미래이기도 한 노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시 노인학을 공부했던 때가 잠시 떠올랐다. 소박했다면 소박했고 화려했다면 화려했던 지난날을 한숨으로 달래신다며 선반에서 젤리사탕과 견과류를 접시에 담아 맛보라고 내미셨다. 그러고는 이런 과자도 친구가 되고 이야깃거리가 된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언제 자리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나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은 듯 부산했다. 구석에 있는 꾸러미를 펼쳐 보이며 갈수록 가물거려 혹시 치매라도 올까 싶어 매일 뇌 훈련하는 비책이라고 하셨다. 월 지난 달력 낱장을 찢어 사등분하여 엮은 연습장에는 천자문 쓰기와 셈 놀이로 가득했다. 한 장씩 넘겨보니 삐뚤빼뚤 글자가 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할머니 걸음처럼 느리게 반복해서 행간을 이루었다. 알파벳 연습장도 보였다. 영어를 왜 꼬부랑글자라고 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내 짐작으로 알 수 있는 글자의 형태를 보면서 할머니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여 썼을까 싶었고 그 삶이 애틋하여 진심으로 안아드리고 싶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내 나이를 묻고는 허허로운 웃음으로 오십대도 금방 간다고 했다. 여든 네 해 적지 않은 세월동안 만들고 새겼던 숱한 이야기를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데 기억의 저편으로 잊혀질까 두려워 새김질을 하며 사는 나날이라고 했다.
텅 빈 몸이 되어 다가 올 내 노년도 쓸쓸하고 외롭겠지만 절대 고독이 찾아와 손잡자고 할 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늙음이란 생물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살면서 젊은 날 운운하며 자랑거리나 앞세우고 옹졸한 이해심으로 편협한 사고는 지양하자는 생각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말 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늙되 낡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날 1107호 할머니는 나를 성숙의 길로 초대 한 것이나 다름없다.
약력: 김춘희
경남 하동출생
수필알바트로스 회원
부산문인협회 회원
부산수필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