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랑 白 주교를 이어서 조선교구 8대 주교로 성성된 뮈텔 閔德孝 주교는 조선에 새로 배속된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신부, 샤르츠보프(Chargebaeuf, 宋德望) 신부와 함께 1890년 11월 파리를 떠나 이듬해 2월 22일 제물포에 상륙한다.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며 다음날 새로 축성된 명동의 2층 적벽돌 주교관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원장으로 떠난 지 6년 만에 다시 밟은 조선의 땅, 동안 많은 변화를 거쳐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었다. 성당은 7곳이 생겼으며 성직자수 20명 신도수는 18,000명이었다. 뮈텔 閔德孝 주교는 당해년에 준공된 용산 예수 성심신학원 축성식을 하고 이듬해에는 명동 종현 대성당, 약현성당을 신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약현성당은 1893년 9월 25일 축성하게 되었으나 명동 종현대성당은 8월 5일 정초식을 갖은 후 힘든 난공사 부분이 있었고 공사도중 1894년 동학 신도들의 반란으로 청일전쟁이 터져 전후 6년의 세월이 흘러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종현 대성당 공사가 늦어진 이유는 공법상에 문제 때문이었다. 40m 종탑을 세우면서 지지목구조도 없이 쌓아 올리다 보니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일반적인 조적공법으로 쌓아 올리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굳을 때까지 기다리다 다시 공사를 하는 방식이라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공사 기간 중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청국인 인부 수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축성식날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던 정부 고관들과 관리까지 참석하고 외국 공사들과 전국에서 몰려온 교우들이 성황을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승리를 자축하는 장소가 되었다. 종현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하고 영광스러운 3종 소리는 한양성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위안의 소리였으며 전국의 교우들에게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음성으로 들려왔다 이는 뮈텔 閔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강당 성성식에서 받은 활짝 피어라 순교의 꽃이여 라는 표어를 상징하는 것과 같았다.
뮈텔 주교는 여세를 몰아 전국적으로 전교의 의지를 세웠다 목자가 없던 함경도, 평안도 지방까지 신부를 보내기 시작한다. 1894년에는 브르트(Bret. 白類근) 신부를 원산으로 보내어 사목과 전교활동을 하게 하고 멀리 간도 지방까지 전교의 대상지로 삼는다. 1895년 가을에는 르장드로(LeGendre , 崔昌根) 신부를 평양에 보내 성당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청일전쟁을 일본은 1894년 일으키고 조선정부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하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모든 제도를 근대화시키니 대원군은 공덕리 별장으로 은신하고 개화운동을 싫어하던 왕비 민비는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의 손에 칼을 맞아 죽는다. 이에 놀란 고종은 그해 12월 그믐날 1896년 2월 11일 몰래 엄비와 세자만 거느리고 정동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여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조선의 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 철도 부설권, 등을 미국 ,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시기에 홀로 운현궁에 살고 있던 고종 어머니 민 부대부인(閔 府大夫人). 대원군 부인은 느낀 바가 있어 30여 년 전에부터 배우고 있던 천주교의 교리를 유모 朴 말다의 딸인 元 수산나 등에게 다시 익혀 배우고, 閔 주교에게 하인을 보내어 세례 받기를 청원한다. 閔 주교는 1896년 9월 5일 밤에 운현궁 앞에 있던 婢女 李 마리아의 집으로 가 민 부대부인( 閔 府大夫人)을 그곳으로 맞이하여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주고 세례식을 갖는다. 다시 견진성사까지 주었다. 이때 79세 나이었던 민 부대부인 (閔 府大夫人)은 유창하게 천주교 경문을 외우고 환희심을 갖고 세례에 임하였다. 당시 영세 대모는 元 수산나였다.
이렇게 영신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마리아는 1년 동안 교우로서 본분을 다하다가 1897년 8월 9일 밤중에 閔 주교를 운현궁 내전으로 불러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성체성사도 갖는다. 성사를 갖은 閔 마리아는 12월 초부터 노환을 앓다가 12월 16일 80의 나이로 죽는다. 민 부대부인 (閔 府大夫人)은 하인을 주교에게 보내어 천주께 기도하여 주기를 바라고 병석에 누운 대원군을 찾아보고 입교하도록 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閔 주교는 먼저 대원군에게 서신을 보내 만나주기를 기다렸지만 대원군은 하인과 선물을 보내어 부인과 관련된 일에 대하여 감사의 표시를 하고 왕궁의 어렵고 힘든 정세로 말마암아 閔 주교를 만날 수 없다는 뜻을 전해 왔다. 대원군은 승려들을 운현궁으로 불러 불공을 드리다가 1898년 1월 13일 79세로 운명을 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閔 마리아와 대원군 장례는 그해 윤 3월 25일 같은 날 치르게 된다. 공덕리 별장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파주 쪽으로 이장되었다 가 다시 양주군 녹동으로 재 이장된다. 박해에 앞장섰던 대원군의 부인이 개종하였다는 의미는 실로 엄청난 그리스도의 승리가 아닌가 한다.
뮈텔 閔 주교는 병인박해로 희생된 목격자 이야기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1895년에 치명일기(致命日記) 활자본을 순국문으로 정동 성소활판소에서 간행하여 목격자들과 순교자 가족이나 후손에게 나누어 주어 정확성을 확인하였는데 162장 전문에 324면으로 되어 있으며 서문에 이어서 각 지역 도읍별로 구분하여 번호를 매겨 8백76명의 순교자 약전을 수록해 놓았다. 조선교구에서는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사이 1894년 7월부터 진보 정치 개혁인 甲午更張을 일으켜 사민평등(四民平等)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12월 16일에는 高宗 칙령으로 억울하게 죄로 몰렸던 이들을 사면하고 관직을 회복해 주면서 귀양가 있던 후손들과 가족들도 다 풀어 주었다 이러한 특별한 사령에 입각하여 천주교도로 처형된 승지 남종삼, 홍 봉주, 조 연승, 조 낙승 그리고 정치범으로 단죄를 받은 홍 국영, 박 영효, 홍 영식, 김 옥균을 비롯하여 36명의 정치범에게 관직을 회복시켜 주고 귀양과 노비의 신분도 풀어 주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천주교인으로서 처형된 이 승훈은 5대 손 이 원모는 예식원 주사로 특채되고 교우 이 유인은 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부터 환궁한 후 덕수궁 수리를 맡아 高宗을 지척에서 모시게 되었다.
갑오경장(甲午更張)로 교인들의 죄명도 벗어지고 천주교 죄인을 다루던 의금부, 형조, 좌우 포도청도 경무청과 법부 재판소로 통폐합되어 구문서를 정리하게 됨으로 閔 주교는 평소 알고 지내던 관리로부터 교회박해 때 작성해 두었던 압수문건 등을 선물로 받게 된다. 그러한 결과로 의금부에서 보관하던 황사영백서 원본인 비밀문서도 받게 된다. 황사영백서는 기다란 흰 명주천에 1만 3천 여자의 한문으로 박해사항을 기록하고 서양군대의 힘을 빌려 종교의 자유를 챙취하기 위한 비밀서한이다. 이러한 문서는 사진으로 찍어 양지 한 장으로 된 영인본을 만들어 학계에 나누어 주고 이를 프랑스 말로 옮겨 책자로 홍콩에서 간행해 두었다. 그리고 1925년 7월 5일 바티칸 대성당에서 조선 순교복자 79위 시복식이 열렸을 때 이 원본을 갖고 가서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쳤다. 閔 주교는 순교사와 관련된 자료 수집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관에 숨어 생활하다, 러시아 공관에서 나와 경운궁으로 거처를 정하고 국호를 大韓이라 고치고 황제로 오르 적에 뮈텔 閔 주교는 고종황제 자문역을 한 적이 있었다. 大韓이라는 국호는 옛날 우리나라를 삼한(三韓)이라 부른 데서 기인하였는데, 천주교 간행물인 韓佛字典, 韓語字典의 책 이름에서 韓 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볼 수 있겠다.
조선교구 뮈텔 閔 주교는 전교의 자유권리를 이용하여 정부로부터 호조(護照)라는 여행 허가증을 발급받아 전교의 허가지역으로 설정받지 못한 지방에도 성직자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신부들을 이끌었다. 1900년도에 이르러 조선교구는 전국적으로 프랑스 신부 40명, 조선인 신부 12명, 신학생 26명, 전국 성당은 41곳으로 신자수는 4만 2천 명이었다. 그리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도 복음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천주교 복음이 전래된 것은 제주 함덕이 고향이며 무역업을 하던 김 기량
때문이었다. 김기량은 제주해협에서 멀리 떨어진 광둥반도 부근해엽까지 표류하다 영국배에 구조되어 홍콩 파리 외방전교회에 넘겨진다. 그곳에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하여 유학 와 있던 조선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우고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1857년 5월 31일 귀국하여 전교하면 서다. 그는 예비자들을 위하여 거제도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장살 되어 순교한다. 이후 전남 목포에서 머물던 제주도 대정 군 출신 양 베드로가 1898년 4월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며 같은 고을 사람 신 아오스팅, 신 바오로 형제, 김 생원, 강 도비아 등을 입교시키며 전교의 범위를 이웃 고을인 정의군과 제주군까지 넓혀 나갔다. 1899년 경에는 많은 이들이 입교하게 되어 뮈텔 閔 주교는 12월에 페이네(Peynet. 裵嘉䘵) 신부와 김 원영 신부를 제주읍으로 보내 성당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페이퍼 신부는 풍토가 맞지를 않아 다른 지방으로 가고 대신 6월에 라크루스그(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하고 다시 1901년 5월에 뭇세 問 문(Moussett. 文濟萬) 신부가 새롭게 부임하게 된다. 구 신부는 제주읍에 성당을 마련하고 문 신부와 김 신부는 정의군, 서흥리, 서귀포 부근에 성당을 만들어 전교에 힘을 기울인다. 김 신부는 다시 목포로 가고 새로운 신부 1명이 더 들어와 대정 군에서 전교를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은 당시 고종황제로 부터 모종의 보호를 받고 있는 신분이었다. 이러한 권세를 이용하려 입교 한 사람도 있었다. 1901년 봄까지 제주도 신자수는 2백4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700여 명이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제주도에 성직자가 입도한 지
2년 만에 신자수는 1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 가운데 벼슬을 살다가 죄로 몰려 귀양온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 출신 전 홍문관 교리 이 용호, 전 감찰 장 윤선, 최 형순 요안 있었고 목사인 이 상규에게 많은 재산을 빼앗긴 도민들도 있었다. 제주 목사 이 상규는 부패한 관리였다 이 상규는 1만 냥 돈을 가로챈 죄로 파직돼도 3월에 제주 군수로 부임한 김 창수가 잠시 목사직을 맡고 있었다. 또한 천주교가 먼저 들어온 대정과 정의군은 제주 출신 채 구석과 김 희주가 각각 봉직하고 있었다. 이때 왕실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여러 섬마다 봉세관을 두어 세금을 걷었는데 제주도는 평안도 출신 강 봉헌이 봉제관을 맡고 있어 도민들 원성이 컸다.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상 육지에서 들어오는 제도나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민들끼리 똘똘 뭉쳐 거부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도민들은 바다에 갇혀 살다 보니 저절로 무당에게 의지하게 되고 사신(蛇神)을 믿는 경우가 많아 가는 곳마다 신목이나 신당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를 부를 때 堂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천주교로 개종한 도민들이 새롭게 시행된 토지 등기법에 의하여 차지하게 된 토지에 속해 있던 神堂과 神木을 불살라 버리는 일로 도민들에 반감을 사게 되었다.
원성과 반감이 겹쳐 1901년 5월에서 6월까지 신축교난이 일어났다. 복음이 깊어진 대정 군을 시작으로 도민출신 군수 채 구석이선동하는 대로 교난이 불같이 일어난 것이다. 채 구석은 유림대표 오 대헌과 손을 잡고 商務社 라는 상인조합을 만들어 천주교인은 가입을 불허하고 대정 군을 왕래하던 일본 멸치 상인 아라가 와로부터 총, 과 칼을 사들여 이 재수에게 주고 그동안의 모든 분풀이를 천주교 교인들에게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商務社를 중 심으로 뭉친 도민들과 봉세관을 중심으로 단결되고 벼슬했던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1901년 2월 8일 상무사(商務社)를 중심으로 뭉친 도민들이 돈 1만 냥을 가로채 파면된 목사 이 상규가 그대로 눌러앉는다는 이상한 소문이 들자 도민들을 날카로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의군(旌義君)에 있던 천주교 성당에서 오 신락(吳信洛)이라는 도민을 잡아다 죽였다는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사실 오 신락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살한 사람인데도 정의군 군수의 친척 유림 현 유신(玄有信) 부자는 군수의 권세를 믿고 헛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이는 천주교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계략이었다. 정의군 군민들은 통발을 3개의 군에 보내 정월 대보름을 기하여 제주읍 관덕정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정의군 성당에서 발생했다고 믿는 일에 대하여 판가름을 내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상대의 계략을 알게 된 천주교 측에서도 교우들에게 소식을 알려 대비책을 세웠다.. 그런 사이 파직된 제주목사 이 상규가 3월 4일 배를 타고 제주도를 떠나 도민들은 움직임은 일시적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제주읍에 상주하고 있던 라크루스(具瑪瑟) 신부가 한양에서 열리는 성직자회의에 참석하러 4월 중순 제주를 떠나자 5월 6일을 기해 대정 군민들이 수백 명 상무사의 이름으로 모였다가 천주교인 7명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단초는 교회를 다니던 대정 군 아전 강 우백(姜遇伯)이 그곳 유림 座首 오 대현(吳大鉉)의 기생첩을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대정 군수는 두 군민을 체포하여 형벌을 가한 후 강 우백만 옥에 가두었다. 이러한 불공평한 대정 군수의 대처에 불만을 갖은 교우 김 진사가 50여 명과 함께 대정군수에게 달려 가 교우들의 가입을 불허하는 상무사의 방침에 대하여 그 이유를 묻고 옥문을 열어 강 우백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상무사 사람 몇 명을 잡아가려다 오히려 상무사 사람들에게 맞아 2명이 중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대정충돌 사건 후 5월 9일 상무사 사람들이 제주읍에서 모인다는 설이 떠돌았다. 3월 22일에 한양으로 성직자 회의차 떠났던 구 신부가 새로 부임하는 뭇세 文濟萬 신부와 함께 제주까지 타고 온 배를 타고 봉세관 강 봉헌이 육지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떠돌자 흥분한 도민들은 봉세관에 대한 분풀이를 천주교인들에게 돌려 버렸다. 대정 군 유림 오 대헌이 5월 16일 통문을 돌리자 제주읍에 몰려들어 1901년 신축교난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놀란 제주도로 돌아온 구신부 일행은 만일 사태를 염려하여 천주교 교우들을 제주 읍 성 안으로 모이게 하고 한양에 있는 뮈텔 閔 주교를 통해 프랑스 공사 콜랑(Collin)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었다.
대정 군민들이 유생 오 대헌의 선동에 따라 5월 11일 제주읍에 모이고 정의군을 포함하여 제주 군민들도 합세한다는 소문이 돌자 천주교 교인들은 긴장하며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목사와 군수를 겸직하던 김 창수와 구 신부는 대정 군 한림까지 가서 군중을 해산시키고 군중을 이끌던 6명을 옥에 가두었다. 대정 군 군민 수백 명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 총 3백 자루로 무장하고 이 재수의 지휘를 받으며 5월 5일 제주읍으로 몰려왔다. 수백 명의 교인들도 이에 맞서 군기고의 총포를 들고 양쪽은 성벽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16일부터는 1만 명의 민병대가 제주읍성을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교인들을 죽였으며 5월 28일 읍성을 함락시키고 수백 명의 교인을 죽였다. 제주 교난은 일본 상인들이 도민들에게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확대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교난은 외국인 프랑스 신부들이 관련되어 복잡한 국제문제로 비하되기 시작하게 된다. 제주읍 성당 주임신부를 맡고 있던 구신부는 교난이 확대될 것임을 예측하고 5월 20일 고 후여(高後汝)를 육지로 보내 뮈텔 문 주교에게 중국 상해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 함대장에게 구원을 청하게 하여 함대장 포티에(Pottier)는 2척의 군함과 270명의 군사를 데리고 5월 31일 제주 산저포(山底浦에 닺을 내렸으나 교난은 고비를 넘기고 700명의 교인들만 학살된 후였다.
함대장은 해병 50명을 상륙시켜 성문을 지키게 하여 난민의 기세를 일단 꺾었다. 난민 측도 27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프랑스 군대가 출동한 사실을 프랑스 공사의 통지로 알게 된 정부는 5월 31일 강화도 진위대병 100명과 궁내부 미국인 고문관 샌드스와 안핵사 박 용원을 제주로 보냈다 그들은 기선 한성호를 타고 인천을 출발 6월 2일 산저포에 상륙하고 일본 군함 제원호도 산저포에 닺을 내렸다. 정부는 다시 6월 10일 수원 진위대병 1백 명과 순검 13명을 제주로 보내왔다. 정부에서는 교난의 책임을 물어 제주 3개 군, 군수를 6월 5일 면직시키고 홍 희(洪喜)는 제주 군수로 허 철(許澈)은 대정군수로 , 유 긍한(兪兢煥)은 정의 군수로 삼아 6월 9일 찰리사(察理事) 황 기연과 함께 산저포로 도착하여 부임하게 된다. 이에 앞서 교난의 징조가 보일 때 제주 목사로 임명된 이 재호는 제주 읍성이 함락될 때까지 부임하지 못하다가 5월 31일이 되어서야 프랑스 함선을 타고 부임하게 된다. 인천으로 잠시 돌아갔던 프랑스 함대는 다시 제주로 돌아와 난민의 우두머리를 잡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까지 제주읍 성밖에 만 명의 난민들이 모여 있어기에 취한 요구였다.
제주 목사와 찰리는 관군 300명을 6월 10일 풀어 위협하며 그들의 소원을 듣고 교난과 관련된 자중에 , 봉 세관, 강 봉헌, 입교한 유배죄인 이 용호, 이 범주, 장 윤선과 전 대정 군수 채 구석을 잡아들이고 13일에 난민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난민 우두머리 오 대헌, 강 우백, 이 재수를 잡아 가두었다. 그들은 7월 18일 순검에 이끌려 한양으로 가 법부 감옥에 갇혔다. 프랑스 공사 콜랑은 7월 30일 교난에 관련된 자 59명의 성명과 상무사 직책, 교난과의 관계를 적은 명단을 외무대신 박 제순에게 보내 조속히 그들을 처벌하고 제주교구가 입은 가재 손해액 5천1백60원을 보상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평리원에서는 미국인 고문관 샌드스, 법관 양성소 교사 프랑스인 그리마시, 제주성당, 구 신부와 문 신부, 한양의 약현성당 도세 신부를 재판관으로 구성하여 8월 1일부터 우리나라 판사 검사와 함께 교난의 주모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10월 9일 교난의 주모자 오 대헌, 강 우백, 이 재수는 교수형에 처하고 김 남혁, 조 사성, 고 영수, 이 원방은 징역에 처하였으며 교난을 선동한 전 대정 군수 채 구석은 배상금이 해결될 때까지 2년 반 동안 옥에 가두었다.
정부는 프랑스 공사로부터 20여 차례 손해 배상금의 청산과 순교자 유골 매장지 선정에 대하여 독촉을 받게 되어 제주 도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배상금을 도민들에게 거두고 만유지인 사라봉 아래 황사평을 순교자 유골 매장지로 결정하고 1903년 11월 16일 채 구석을 석방한다. 채 구석은 즉시 제주도로 내려 가 순교자 시신을 황사평에 안치하고 제주도민 4만 명에게 돈을 거둬 배상금을 청산하여 신축교난을 무사히 정리한다. 신축교난은 정부와는 관련이 없는 사건이었다. 단지 부패한 관리가 단초를 제공하였지만 천주교 신자들도 깊은 생각 없이 민속신앙의 상징적인 신목과 신당을 불살러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박해처럼 정권의 권력 차원에서 벌어진 교난은 아니다. 신축교난으로 도민들은 깊은 상처를 남겨지만 그러한 아픔을 겪고 봉합되며 세월은 흘러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6.25 동란을 겪으며 어렵던 시절인 1954년 4월에 콜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아일랜두 출신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한국명 임 피제 신부가 제주도로 부임 와 한라산 중턱 금악오름 부근 황무지를 개발하여 성인 이시돌 이름으로 목장을 만들어 가난을 벗겨내기 시작하였다.
제주 지역 최초의 전기업목장(全企業牧場)으로 양돈 사업을 실시하고 면양을 사육하여 추후 모직사업 발판을 마련한다. 특히 양모로 생산된 담요는 전국적으로 많은 소비를 불러일으켜 생산공장을 쉴사이 없이 가동해야만 하였고 제주도 여성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어 자립의 길을 터 주었고 십 대의 소년들에게는 돼지를 한 마리씩 분양해 주어 양돈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 자립심을 키워 주고 소년들은 돼지 숫자가 늘어나면 다른 소년들에게 재분양하게 하여 돈사 운영 늘려 나가도록 힘썼다. 그리고 소년들이 성장하여 군대를 다녀오면 소를 키우는 목장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제주도 대정에는 정 난주 묘가 있어 성지화 된다. 정 난주는 남편 홍 사영이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자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귀양 왔다. 정 난주는 1801년 11월 21일 두 살 난 황 경한을 끌어안고 귀양 길에 올라 추자도 이르러 인적이 없는 갯바위에 아들을 올려놓고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는다. 정난주는 깊은 믿음과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이웃에게 존경과 함께 칭송을 받으며 37년을 대정에서 자식을 그리며 살다 1838년 66세 나이로 생을 마감 하자 그녀를 양모처럼 부양하던 집주인과 이웃들은 모슬봉 북쪽 들판에 서울 할망 정난주를 매장한다. 정 난주는 순교자의 길은 걷지 않었지만 생애 자체가 신앙의 증거자의 삶이었다. 그의 가족들과 후손들은 여지없이 정 난주를 순교자 반열에 올려놓는다.
또 제주에서 기억할 순교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이다. 그는 함덕 출신이다. 1857년 초 제주 근해를 항해하다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다 광둥 성 부근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인도된 무역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 신학생 이만 돌 바 올리니에게 교리를 배운 후 1857년 5월 31일 제주도 출신으로는 최초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는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예비 신자들을 위하여 육지를 오고 가는데 여비 마련을 위하여 거제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통영옥에 투옥되었다. 심문을 받고 장살형을 받아 곤장을 셀 수 없을 만큼 맞았으나 결코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냈다. 그리고 51세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여. 복자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제주 교구에서는 그의 고향 함덕리에 순교 현양비를 세워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