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언사이드의 생애
풍부한 믿음의 토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서슴지 않고 했던 까닭에 "영원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 또한 남편 못지 않은 선교의 사명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버지의 너무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아이언사이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물질적으로 양재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어주기 위한 기도를 통해서 아이언사이드와 그의 동생을 부양하였다. 실제로 당시 순회하면서 전도의 사역을 수행하였던 순회 성경교사를 대접하는 일이 그녀의 큰 임무이자 즐거움이었고, 집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정도로 영혼에 대한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복음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인사이드는 세살 때부터 성경암송을 시작하였고 14살 때까지 14번이나 성경을 통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거듭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집을 자주 방문했던 순회 설교자들의 "꼬마야, 너 거듭났니?"라는 말은 어린 아이인사이드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아이언사이드가 10살 되던 해 온 가족이 모두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아이언사이드는 장막집을 지어 직접 주일학교를 개설, 스스로 설교까지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에게는 숙명적인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바로 D,L. 무디와의 만남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무디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게 된 아이언사이드는 "주님, 언젠가 저도 이처럼 많은 청중에게 설교하고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데, 이 기도는 그가 42년 뒤 무디가 세운 시카고교회의 목사가 됨으로써 응답 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온 기도가 되었던 것이다.
순회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문로 아저씨로부터 "너는 설교하면서도 아직 자신이 거듭났는지 아닌지 알지 못하다니"라는 말을 듣게 된 아이언사이드는 마음에 큰 갈등을 느끼게 된 나머지, 잠시 세상 적인 일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평강을 찾지 못하고 한 청소년 모임에 참가한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마음에 말씀이 떠올라 그의 마음을 찌르는 듯 했다. 자정 넘게 집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때 요한복음 3장과 로마서 3장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관문이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해 낸 그는 요한복음 3장을 주의 깊게 읽게 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읽고 그의 마음에 이스라엘 사람이 살기 위해 뱀을 쳐다보았듯이 자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뭔가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던 그는 계속 기도를 올리게 된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말씀을 의지하여 당신께로 갑니다. 저는 제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신께서 지금 나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바로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신 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 이때 구원의 빛이 그의 영혼에 비취었고, 그는 말씀에 따라 구원함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 14세, 이때부터 "그의 이름을 위한 그의 사역은 대장정의 닻을 올리게 된다"
아이언사이드가 구원받을 당시는 구세군이 창설 된지 얼마 안 된 시기였고 그들은 잃어진 영혼들을 찾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들의 열정과 어린 아이언사이드의 새로운 발견에 대한 기쁨과 확신이 합치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구세군에 의한 가두집회가 열린 날은 그가 구원받은 지 이틀 뒤였고, 그는 간증을 자처, 성경 이사야서 53장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는 말씀으로 30분이 넘도록 설교를 하였다. 이때부터 아이언사이드는 복음 전도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절실해진 나머지 모든 시간을 투자하기 위해서는 학업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사진관에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소년 설교가로서 구세군 집회에 참가하기도 하고 전도지를 배포하며 직접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내 직업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 비용을 대기 위해 난 이 구두 수선을 하고 있지요"라고 한 유명한 설교자의 말이 아이언사이드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구세군에 전심으로 가담, 사역을 하던 중 오클랜드 사관학교에 입학, 장교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구세군의 완전성화 교리 때문에 많은 갈등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 말씀만큼이나 확실한 그리스도인이지만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과 모든 의와 완전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구세군을 떠나게 된다.
구세군을 떠난 아이언사이드를 기다린 것은 '플리머스 형제단'과의 교제였다. 이곳에서 형제들과의 교제를 통해 설교가로서의 명성이 알려지게 된다. 플리머스 형제단의 설교방식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고정적인 보수 없이 사역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개인적인 고난을 많이 초래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언사이드는 그날의 필요를 그날 공급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해야만 했다, 구세군 대위였고 같은 신앙을 소유한 헬렌과의 결혼으로 가정까지 꾸려나가야 했던 당시의 아이언사이드는 음식을 먹지 못한 채 3일간 아홉 번의 설교를 한 적도 있었고, 세 끼를 모두 콩으로만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매일의 필요에 대한 그들의 믿음대로 10달러 짜리 지폐가 든 봉투, 이름 모를 사람으로부터의 40센트 이러한 것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느끼게 해 주는 매체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생 아슬아슬한 순간도 많았고 낙심한 때도 있었지만 아이언사이드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생각하며, 거듭 말씀을 암송하며 극복해 나갔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일에 아무에게도 대가를 요구하지 말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물러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그에게 오는 무엇이든지 그것을 만족스럽게 기다릴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그의 이름을 위해서 난 떠나야 한다"는 그의 일기의 한 페이지가 나타내 주듯이 1906년 설교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잦은 전도 여행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어쩌다 집에 있게 될 때에는 전도지, 소책자, 강해서 집필로 평생 90여권의 책과 팜플렛을 저술했다.
1930년 아이언사이드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그 유명한 무디교회의 목사직에 대한 권유를 받게 되면서부터 이다. 한 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자신의 신념 때문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주님 안에서의 소명의식을 새로이 갖고 새로운 시작을 확신하게 되었고 무디교회 목사직을 수락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곳서, D.L. 무디, R.A, 토레이, A.C. 딕슨, 폴라더, PW.필포트 등 저명한 목사의 뒤를 이어 18년간 무디교회 목사로서의 삶을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18년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던 것은 물론, 한 설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무디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각지로 선교여행을 다녔고, 여름에는 하계수양회도 주재하곤 했다. 그의 설교 방식은 성경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아이언사이드는 무디교회 시절의 18년을 포함, 평생 7,500회의 멧세지를 전했고 그러한 멧세지는 사고의 명료함과 단순성, 간결함을 생명으로 하였다.
1890년 소년 설교자로 시작, 51년 주님께 돌아가기 전 60년 동안의 사역에 그의 설교는 "말로‥‥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그리스도를 위한 놀라운 열정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또한 그는 평생 7,500 페이지의 일기를 남겼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한 나약한 인간이자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깊은 내면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 주님을 좀 더 확고하게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 찌어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러한 말씀을 적용하는데 얼마나 무력한 자인지 절실히 깨닫는다."
1948년 무디교회에서의 사역을 끝내는 그의 멧세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일생을 두고 지켜온 믿음의 여정이 추구했던 바를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를 위해 제 마음이 하나님께 바라고 기도하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 각자가 그리스도께 대한 보다 깊은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다 강력한 사랑 속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
1948년 이후 아이언사이드는 이제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순회 사역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후 백내장으로 인해 시력에 큰 제한을 느꼈지만 끊임없는 사명감과 주변사랑들의 도움으로 저술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 이다"라는 마지막 설교를 뒤로하고 아이언사이드는 1951년 1월 15일 새벽, 주님 곁으로 감으로써 이 땅위에서의 자신의 삶을 다하였다.
아이언사이드 그는 오로지 단 한가지 생각을 위하여 산 사람이었다. 무디의 "나의 한가지 생각은 영광된 것이다.... 하나의 생각을 가지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인데 나에게는 이 한가지 생각의 소유자가 필요하며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아이언사이드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