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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 잎 치마로 가려지더냐? (1부)
허윤욱 목회자 (여천교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세기 3:7).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첫 번째 한 행동은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인간에게 노동이 시작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노동은 죄 값으로 온 것이다.
인생들의 삶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동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따분한 현실 아닌가?
인간이 노동하지 않고 편히 살아보려고 추구하지만 그 답은 아직도 얻지 못하고 있다.
사실 짐승들은 자기 자신들의 삶을 위한 노동이 거의 없는 것이다. 먹이를 찾아 싸우고 집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있으나 사람이 800년, 900년 살던 특수 기후에서는 그것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아무튼 인간의 고통과 고뇌와 고난이 노동과 관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아담의 이 노동은 죄값을 발견하는데 눈이 밝아진 것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벌거벗은 아담의 몸을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웠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는 가리워진것 같았으나 계속 가리워 지지 못하였다.
햇볕에 잎은 마르고 즉시 부서져 버렸을 때 얼마나 당황하였겠는가!
금일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자신들의 죄를 덮어보겠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표정을 바꾸기도 하며 선행으로 포장하여 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허사인 것이다. 사람들의 가리워진 부분들이 갑자기 드러나므로 놀란 적이 너무 많지 아니한가?
인간은 인간이 생각해낸 수많은 선행과 종교를 통해서 자기 죄를 가려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죽어간 것이다.
혹시 그들은 완전범죄를 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선행이나 공로로 자기 죄를 다 가리었다고 생각하고 죽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마태복음 10장 26절에 경고하기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아담 이래로 수를 알 수 없는 인생들이 죄를 가려보려고 온갖 종류의 치마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만들고 있지만 자기 죄의 수치를 결단코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었을 때의 모습을 묵상하여 본다.
아마 처음 치마를 만들었을 때 만족 스러운 생각을 잠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치마가 찢어지고 부서져 버리자 놀라서 즉시 다시 만들어 입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몇 차례 이 일을 반복하다가 아주 여러 벌의 옷을 미리 만들어 그늘에 보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인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얼마나 고민에 싸였겠는가!
이것은 또한 오늘날 율법 아래 속하여 있는 기독 종교인들의 모습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그들이 처음 예배당에 출석하여 성경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잘 믿어 부끄러움 없는(부끄러움을 가린) 훌륭한 성도가 되어 보려고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고 목사님의 가르침에 잘 순종하며 헌금도 열심히 내면서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나 부끄러움 없는(부끄러움이 가리워진) 자인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행동을 문득 보면서 충격을 받는다. 누구보다도 자기 마음을 잘 아는 자신이 자기의 속을 들여다 보니 믿은지 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더러운 죄가, 음란한 죄가 마음 속에 꽉차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회생활과 교회생활이 너무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니 "나야 말로 위선자요 바리새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고는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좋은 더 많은 무화과 잎을 엮기로 결심한다. 그때 마침 들려 오는 목사님의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회개하고 몇 날을 회개하였으나 아직도 죄는 사라지지 않고 부끄러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그는 더욱 결심하기에 이른다.
"주님을 더 열심히 믿을 뿐 아니라 성경을 더욱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모름지기 온전히 성화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리라"고
그러나 그는 놀라운 충격을 받게 된다.
그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성경을 알면 알수록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마음 속에 죄는 여전히 남아있고 예수님이 내 죄를 지고 죽으셨다는 말은 실감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인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추켜 세우는데 왜 내 속에는 여전히 더러운 죄가 가득한가?
어느 훌륭한 목사님은 이 상태에 이르러 죽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어떤 성도도 이 상태까지 오면서 수십 번이나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였다고 고백했다.
어떤 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여러 개를 뿌리 뽑으며 통곡을 하였어도 위선과 온갖 정욕으로 가득찬 죄 문제는 사라지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했다.
어떤 이는 장로님께 울면서 자기 죄 문제 해결을 상담하였던 바 장로님은 편지지에 생각나는 모든 죄를 다 기록하여 촛불에 태우며 기도하라" 하시기에 하였더니 잠깐만 시원하였다 한다.
실제로 어떤 이는 양심의 가책을 받다가 받다가 지쳐서 그만두고 머리깎고 산으로 간 사람의 이야기도 필자는 들었다.
이 경우 외에도 무종교로 돌아간 사람의 예도 얼마든지 있다.
어떤 성도는 고백하기를 "욕심은 마귀로부터 온다"는 설교를 듣고 자기의 적은 재산을 다 정리하여 교회에 내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작은 땅도 교회에 내고 월급도 받으면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 다 헌금하였는데 그래도 마음 속의 부끄러운 죄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고백 했다.
어떤 분은 목사님 섬기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고 하여 오랜 세월동안 목사님댁에서 식모살이 아닌 식모살이를 하였으나 죄 문제는 죄 문제로 남아 있더라고 고백했다.
어떤 전도사는 자기 죄를 씻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나환자촌에 자원하여 충실히 섬겨도 죄를 씻는데는 효과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드는 종교인들의 교회를 다 열거하려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기독교 종교인들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고생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며 필자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경험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필자 역시 17년이라는 세월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가?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문제는 왜 왔는가? 이 문제를 알기 위해 아래 2부에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다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기도하고 준비하여 아래를 읽고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바랍니다. 아멘.
■ 무화과 잎 치마로 가려지더냐? (2부)
허윤욱 목회자 (여천교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세기 3:7).
범죄한 아담이 무화과 잎을 엮어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애썼지만 피나는 고생에도 불구하고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여전히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위에서 생각하여 보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죄로 고민하는 인생에게 참된 해결책은 없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먼저 할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문제만 주시고 풀이와 답은 주시지 않은 적이 없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모든 인생들의 갖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시건만 인생들의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있음은 실로 탄식스럽지 아니할 수 없다.
아담과 하와의 이 심각한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이 상황을 모르실리 없고 하나님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없을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징벌을 설명하시고난 다음에 즉시 이 문제를 친히 해결하여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21).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완벽한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그 가죽의 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입혀 주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아담과 하와는 전혀 자신의 노력이나 공력이 개입 되지 아니하였다. 아담과 하와의 대책 없는 고민거리는 단번에 해결되었다. 이제는 부끄러움이 온전히 가리워졌을 뿐만 아니라 무화과 잎 치마를 만드는 수고를 온전히 그치게 된 것이다.
찢어질 걱정이나 말라 오그라질 염려 없이 아담의 부끄러움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주는 가죽옷이야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완전하게 보여주는 그림인 것이다.
아담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신 이 놀라운 사건 속에는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분명한 그림이 있기에 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첫째로 구원은 완전한 선물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하나님의 선물" 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주었을 뿐만아니라 입혀주시기 까지 하시므로 구원이 완전한 선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하여 아담이 한 일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선물인 가죽옷을 입기 위하여 몸을 내밀고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그 모든 수고가 자기들의 죄를 씻어 천국에이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자신들은 영원한 불못에서 영원히 형벌받아야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그들의 놀라움은 얼마나 크겠는가?
오늘날 거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찬송하는, 적은 무리가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5-6).
구원은 100%의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선물과 0%의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수한 선물인 것이다.
둘째로 가죽옷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의 짐승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짐승은 양이나 소나 염소의 가죽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동물이 제사에 제물이 될 수 있는 정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짐승이 죽지 않았다면 가죽옷이 생길 수 없었다.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증거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라고 하였다.
이 말씀 속에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왜 짐승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짐승같은(시 49: 20) 죄인을 위하여 짐승처럼 취급받고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들은 예수님의 몸에 채찍질 하였다. 여러분들이 아는 바로 채찍은 짐승의 몸에 사용하는 도구가 아닌가?
예수님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셔야만 했다. 주께서 이를 묵묵히 참으심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었다.
둘째로 양은 구약에서 속죄제물로 곧 잘 사용되던 동물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양을 사용하였다.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 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레위기 4:32).
죄 없는 양이 애매히 죽어서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였던 것처럼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던 것이다.
무화과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지 못하여 고민하고 고통하던 것처럼 오늘날 수많은 기독도들이 개인적인 삶을 다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교회생활에 다 헌신하여 수고하여도 천국문은 보이지 아니한다.
거의 모든 삶을 교회생활에 투자하여 남편에게 쫓겨나고 시어머니에게 미움 받으면서도 '식구가 불화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10장 35-36절의 말씀만 인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교육 기관이 있어 인성교육을 시키고, 종교교육을 시키고, 삶의 방법을 교육시키지만 그러한 무화과 잎으로 수치가 가리워지는 것도 아니다.
필자는 수많은 기독도들이 자기를 가린 무화과, 즉 종교적 열심으로 수치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천국에 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필자가 그들의 깨어지고 찢어진 무화과 치마와 드러난 수치의 죄를 지적하면 화를 내면서 대들지만 필자에게 화를 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요 근본적인 해결을 받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끝으로 가죽옷을 만드는 과정의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고 싶다.
그것은 짐승을 잡을 때 생기는 피흘림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짐승이 죽을 수 없고 짐승의 죽음 없이는 속죄가 없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
짐승이 피 흘려야만 했던 이 피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린 속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피가 죄를 속한다고 하시고 하나님의 준엄한 선포(레위기 17:11) 앞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 피로써 인류를 구원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이 얼마나 확실한 가죽옷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피묻은 가죽옷이야 말로 당신의 모든 죄가 가리워지기에 충분하지 아니한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라디아서 3:27)는 말씀이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오,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무화과 잎치마로 고생하고 있지 아니한가? 자신을 살펴 보기 바란다.
아직도 양심 속에 남아있는 해결되지 아니한 죄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죄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 하면서 예배당 바닥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죄 문제를 온전하고 확실하게 가리지 않고 호리라도 남아 있다고 하면 그 죄가 그대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로마서 4:7-8).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의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이제 십자가에서 해결하셨다. 이 말은 그대가 회개하는 이 시점에서 해결된 것이 아니고 이미 2,000년전 먼저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이 사실을 성경 속에서 확인하고 그대로 믿는 것 뿐이다.
● 요한복음 6장 47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 레위기 17장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히브리서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에베소서 2장 8-9절.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