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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인조 1년(1623) 3월 14일에 한찬남과 백대형 등이 처형되었다.
2 찬남 등은 적신 이이첨의 심복으로 폐모론을 주장하여 흉패한 상소문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3 ○ 박승종이 그 아들 박자흥과 함께 달아났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4 승종은 선묘조 때 출신하여 재간과 기국이 있는 자로 일컬어졌고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5 유영경과 결탁하여 오랫동안 요로에 있었는데, 광해 때에 이르러 그 아들 자흥의 딸이 폐세자의 빈이 됨으로써 권세가 날로 성해졌다.
6 7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아첨으로 총애를 굳히며 오직 탐욕만 부려 전택을 널리 점유하였다.
7 본래 그의 처부 이이첨의 간교함을 미워하여 가까이한 적이 없었고, 박대엽의 무리를 개, 돼지 같이 보았는데,
8 그 딸을 폐세자의 빈으로 들여보냄으로부터 권세를 빙자하여 전민을 널리 점유하여 저택을 크고 화려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매도하였다.
9 ○ 19일에 박응서와 한희길을 주살하였다. 희길은 광해의 측근으로 포도 대장이 되어
10 강도살인자 박응서를 체포, 여러 날을 두고 그를 사주하여 역모를 고변하게 하였다.
11 응서는 죽음에서 살기를 구하여 서양갑 등을 무고함으로써
12 마침내 계축 옥사를 일으켜 국구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 대군 또한 유폐되어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
13 ○ 25일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번의 역적 토벌은 반드시 당시의 소차와 계사를 찾아 상고하여
14 그 사실을 증거로 등급을 나누어 죄목을 정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경중의 진실을 상실하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15 승정원으로 하여금 계축년 이후 삼사의 계차, 각사의 소장, 유생의 상소로서 폐모론에 관계된 모든 것을 찾아내 그것을 참고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였다.
16 ○ (서인파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려 대북파 수십명을 처형하였고,
17 광해군 때와 같이 인조 때에도 끝없는 역모 사건이 터져, 인조 역시 친족을 죽이기에 이른다.
18 이 과정에서 인조는 또 다시 반역과 국제 정세와 외교를 몰라 후금의 침략을 받게 되니,
19 조선이 사라질 뻔 하였으나,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나서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20 조선의 왕들은 잘못을 깨닳지 못하여 멸망에 이르니, 광해군의 외교를 따르지 않고, 폐쇄적 외교로, 국제 사회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21 인조의 가장 큰 잘못이라면, 국제 정세가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왕권을 탐내어 난을 일으킨 것이니, 서인들의 죄도 또한 크다.)
22 ○ 5월 22일에 폐세자 이지가 위리 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파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혔다.
23 폐세자 지가 체포된 지 3일째에 폐빈이 스스로 유배지에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24 ○ 6월 3일에 헌부가 또 폐인 이지의 처단에 대한 일을 논계하고, 간원과 옥당도 간쟁하니, 한참 뒤에야 따랐다.
26 ○ 9월 12일에 지사 서성이 아뢰기를 "경기의 선혜청은 당초에는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으나
27 지금에 와서는 이미 폐단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네 도에 다 시행하였다가 행여나 불편한 일이 생긴다면 참으로 우려할 일입니다.
28 먼저 충청도에만 시행해 보아서 폐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른 도에도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29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은 원래 시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아니면 한 도에만 먼저 시행하여 보자는 것인가?" 하였다.
30 ○ 29일에,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멸족의 화를 잊은 채 큰일을 이룩하였으니, 그 공은 종묘 사직에 관계된다.
31 의당 재능에 따라 녹용하여 공에 보답하는 법전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32 이조와 병조가 서로 잊은 양 버려두었으니, 어찌 불평스런 뒷말이 없겠는가." 하였다.
33 ○ 10월 1일에 이시언이 소장을 올려 고변하였는데 첩의 남동생 신득영을 시켜 대신 올리니,
34 대신과 의금부 당상과 양사의 장관을 불러 궐내에서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35 득영과 시언을 먼저 신문하였는데, 시언은 공초하기를 "황현이 말하기를
36 '지금의 주상이 모든 왕자를 제쳐두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37 또 의거하던 날 궁궐을 불사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38 근일 하는 짓이 폐조 때보다 더 심하여 제배가 공변되지 못하고
39 부역이 날로 더 번거로와져서 상하 사이에 금이 가고 원근에 원망이 자자하니,
40 이러한 때에 거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이다.' 하고,
41 황현이 '왕자 중에서 흥안군은 성품이 본시 호협하여 재물을 흩어 무사를 모아 사교(死交)를 맺었고 또 그 집의 종들도 적지 않다.
42 그리고 이유림이 모은 사람이 2백여 명은 되고 문희현과 내가 모은 사람도 모두 1백여 명은 되는데, 모두 정예한 군졸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43 의민은 끝까지 실토하지 않다가 형장 아래서 죽었다.
44 한효립, 곽종노, 신득지, 이형연, 이중남, 이정수, 정애인, 성우길 외 12명 등은 형신을 가하여도 모두 승복하지 않고 죽었다.
45 흥안군은 적의 초사에서 수없이 나왔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46 ○ 윤10월 27일에 한성부가 처녀를 숨긴 집의 가장을 적발하여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7 이때 왕자 부인을 간택하느라 처녀 단자를 받들도록 한바,
48 사람들이 궁가와의 결혼을 기피하여 숨기고 내놓지 않았으므로 부관들이 적발할 수가 없었다.
49 사대부가 처녀를 숨긴 것도 진실로 잘못이 있지만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킨 것도 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2 ○ 인조 2년(1624) 1월 17일에 문회, 이우, 권진, 정방열, 윤안형, 한흔 등이 대궐에 나아가 고변하니,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2 ○ 24일에 부원수 이괄이 금부 도사 고덕률, 심대림, 김지수 등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3 이에 앞서 상변한 사람이 이괄 부자가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하였으나, 상이 반드시 반역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여
4 그 아들 이전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는데 이전은 그때 이괄의 군중에 있었다.
5 ○ 25일에 기자헌에게 사약을 내리고, 성철, 성효량, 한욱, 이시언, 윤수겸 등 69인을 참하니, 17일의 고변과 관련된 것이다.
6 이때 갇혀 있는 죄인은 혹 형신을 받아도 승복하지 않아 미처 구명하지 못하였는데, 역적 이괄의 반서가 갑자기 이르자 인심이 어수선하였다.
7 ○ 29일에 도원수가 치계하기를 "역적 이괄이 남은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강동으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8 ○ (바야흐로 국제 정세가 전쟁터임에도 내부에서 서로 전쟁을 하니,
9 광해군의 잘못도 있지만, 선조의 잘못이 더 크다 하겠다.
10 선조는 스스로 내부에서 전쟁하였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가? 조선이 남김없이 도륙되지 않은 것은 천운이다.)
11 ○ 2월 4일에 이괄의 아내와 이괄의 아우 이돈을 죽였다.
12 좌찬성 이귀가 역적의 아내를 참형에 처하는 것은 법전에 없으니, 새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3 ○ 2월 7일에 관군이 평산 마탄에서 적과 싸워 크게 패하였는데 방어사 이중로, 이성부가 죽었다.
14 적이 여러 장수의 머리를 실어보내자 군사들의 기가 모두 꺾였다.
15 ○ 전라 병사 이경직이 군사를 거느리고 아뢰기를 "적봉(賊鋒)이 이미 다가왔으니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는 것은 직분입니다.
16 신은 비록 서생이지만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에 나아가 목숨을 바칠까 합니다." 하였다.
17 ○ 2월 8일에 김류가 용서하기 어려운 흥안군 집의 종 7인과 한흔, 한총, 김극전, 김극명 등을 모두 효시하기를 청하였다.
18 김자점이 사람을 시켜 먼저 김원량을 참수토록 하고 그 나머지는 미처 처형하지 못하였는데,
19 김극전, 김극명과 흥안군의 종과 이충길의 아들 등이 옥중에서 난을 일으켜 옥문을 쳐부수고
20 조희형, 이광호, 이순, 이원, 이욱, 박종립, 윤인손, 윤인귀 등과 함께 모두 탈출하여 달아났다.
21 ○ (이날에 결국 선조는 내부의 역적으로 인해 궐을 버리고 도망하기에 이르니, 광해를 내쫗은지 불과 1년이였다.)
22 이 날 밤에 자전과 중전이 모두 가교를 타고 나갔다. 조금 뒤에 상이 말을 타고 떠났는데, 중궁의 나인과 시신은 더러 걸어가는 자도 있었다.
23 이때 공조 정랑 이진영을 먼저 한강에 보내어 배를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진영이 그 배를 거느리고 하류로 갔으므로
24 대가가 한강 나루턱에 닿았을 적에는 한 척의 배도 기다리는 것이 없었고, 몇 척의 배가 건너편 언덕에 숨겨져 있었는데 불러도 오지 않았다.
25 대가를 강가에 멈추어 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무사 우상중이 칼을 뽑아들고 헤엄쳐 건너가서 배 안에 있던 한 사람을 베고 배를 끌고 돌아왔다.
26 어주가 강물 한가운데에 떠서 도성을 돌아보니, 궁궐이 난민에게 불태워져 불꽃이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27 ○ 2월 10일에 왕대비가 중외의 신민에게 의병을 일으키라고 하유하였다.
28 ○ 11일에 관군이 적과 안현에서 크게 싸웠는데, 적병이 크게 패하여 도망쳤다.
29 ○ 14일에 대장 신경진의 군관이 와서 말하기를 "적이 12일에 역적 이괄과 한명린이 그의 수하에게 참살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30 ○ 15일에 양사가 합계하기를 "역적 이제가 몰래 적의 무리와 결탁한 정상이 죄다 적들의 공초에 나왔습니다. 처단하소서." 하니, 따랐다.
31 ○ 16일에 상이 공주에 머물러, 전라도의 장관들을 불러 하유하기를 "너희들이 천리 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호종했으니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농사를 버린 것이 매우 미안하다." 하였다.
32 ○ 이괄의 난 이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33 ○ 6월 24일에 상이 장명 공주에게 1백 70칸을 지을 재목과 기와를 날라 들이게 하였다.
34 ○ 11월 2일에 상이 이괄, 한명련 등의 적몰한 가재와 전택을 장만 등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35 ○ 인조 2년(1624) 11월 8일에 의관 이이와 무인 김인, 심일민 등이 상변하여
36 박홍구 등의 역모 사실을 고하여, 국문하도록 명하여, 죽이고, 유배 보내는 일을 차등 있게 하였다.
37 국청이 인성군 이공 부자를 잡아내어 처치할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인성군 이공은 역적의 초사에 나온 것이 전후에 한두 번만이 아니었는데,
38 이번에 박윤장 등이 또 이공 및 둘째 아들을 구실로 삼았습니다. 서로 호응한 흔적을 알 수 없기는 합니다마는, 선처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39 상이 답하기를 "경들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인성군이 흉적의 구실이 되었다 하더라도
40 조금도 서로 호응한 흔적이 없는데, 경들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41 ○ 인조 3년(1625) 2월 23일에 좌의정 윤방, 우의정 신흠 등이 인성군의 안치를 청하자, 결국 그 의견에 따르다.
42 ○ 10월 18일에 인성군 이공을 석방하게 하였다.
43 ○ 11월 15일에 인성군 이공을 원주에 이배시키다
44 ○ 인조 4년(1626) 11월 1일에 인성군 이공의 어머니가 위독하니 인성군을 석방토록 하교하다
3 ○ 인조 5년(1627) 1월 17일에 정주 목사 김진이 치계하기를 "14일에 금나라 군대가 와서
2 능한을 포위하였다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여 곧바로 읍내에다가 대진을 쳤습니다.
3 이미 선천, 정주의 중간에 육박하였으니 얼마 후에 안주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였다.
4 상이 이어서 묻기를 "이들이 모장(毛將,모문령)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 하니,
5 장만이 아뢰기를 "홍태시란 자가 매번 우리를 침략하고자 했다는데 이 자가 일을 맡게 되면 그 계획을 성취시킬 것입니다." 하고
6 이귀가 아뢰기를 "해서 지방도 반드시 지켜지게 될지는 보장하기 어려우니 강화도를 피난처로 정해놓았다가
7 만일 안주에서 패보가 오거든 상께서는 곧바로 강도로 들어가소서." 하였다.
8 상이 이르기를 "얼마를 징발해야 하겠는가?" 하니,
9 장만이 아뢰기를 "2만∼3만 명 정도면 혹시 대항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10 ○ 이틀 후에, 종묘 사직의 신주와 자전과 중궁을 받들고 강도에 들어가 피난토록 하였다.
11 ○ 인조는 말하였다. 내가 즉위한 시초에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여 그것을 덜어주라는 명령을 누차 반포하였는데
12 받들어 시행하는 자가 제대로 못하여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으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나더러 기만한다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민심을 잃은 첫번째이다.
13 패역한 일들이 누차 발생하고 큰 옥사가 연이어지니 잘못을 저지른 우두머리야 본시 법에 따라 처벌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14 거기 연루시키는 일이 여러 번에 걸쳐 있었으니 어찌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없겠는가.
15 한 지아비가 원한을 품어도 족히 하늘의 화기를 손상시키는데 더구나 비단 한 지아비뿐이 아닌 데이겠는가. 이것이 민심을 잃은 두 번째이다.
16 서쪽 변경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출발하는 사람은 양식을 싸서 떠나 보내고
17 부세는 혹독하게 거두어 들었으니 백성들은 곤궁에 빠지고 국고는 탕갈되어 안과 밖이 소동을 겪었다.
18 비록 부득이한 일이지만 백성들이 어떻게 감내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민심을 잃은 세 번째이다.
19 호패법에 있어서는 본래 도망갔거나 고인이 된 사람들의 결원을 보충하고, 인족(隣族)의 폐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백성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20 그러나 1백 년 동안이나 폐지되었던 법을 갑자기 거행하여 허다한 유민을 강제로 묶어놓았으며
21 일을 추진하는 데 급급하여 점진적으로 하지 못하였다.
22 구속하기를 지나치게 엄정하게 하고 독촉하기를 너무 치밀하게 하니, 나는 중간에 중지하기가 어려웠다.
23 따라서 뭇사람들의 많은 분노를 샀으니 누가 나의 본심을 이해하겠는가. 이것이 민심을 잃은 네 번째이다.
24 이제 내가 장차 마음을 돌리고 계획을 바꾸어서 여러 백성들과 함께 고쳐서 다시 시작하여 새롭게 하려고 한다.
25 양정(良丁)들을 끌어 모아 여러 가지 종류의 군역을 정한 자는 그대로 두고서 고치지 않았고, 각도의 적군(籍軍)의 성안(成案)은 불살라버리지 않았다.
26 아, 그대들 중외의 사민들은 비록 나를 임금답지 못하다고 하겠지마는
27 열성들의 사랑하고 보살펴주신 후세에 남겨진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8 내가 나라를 잃는 것이야 오히려 안타까울 것이 없겠지만 종묘의 제사가 끊기고 팔도가 어육이 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9 이에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좇아서
30 제도의 어사를 소환하여 호패를 모두 파기하고 그 성적(成籍,문서)들을 불사르며
31 무릇 전후에 걸쳐서 호패의 일로 인하여 구류되었거나 도배된 자들도 다 사면시켜 석방한다.
32 나의 진심을 한 장의 종이에 담아 사방에 널리 고하노니 모두 나의 이 마음을 이해하여 충의를 격앙하고 온 몸의 힘을 다하여,
33 혹 의병을 소집하여 행재로 달려오기도 하고 혹 군량미를 모아서 군인들 앞으로 실어 보내기도 하여,
34 제각기 힘이 미치는 대로 분의(分義)의 당연함을 다하도록 하라.
35 ○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에는 이렇듯 백성을 필요로 하여, 모으지만, 결국 호패는 사라지지 않고, 신분제도는 변화하지 않았으니,
36 깨닳으면 무엇하는가? 이어지지 않으니, 불쌍하고 어린 백성이여.)
37 ○ 20일, 정주 목사 김진, 곽산 군수 박유건, 선천 부사 기협이 치계하였다.
38 ○ 적장이 선천군의 뒷고개에 주둔하여, 병마로써 각각 일곱 면을 노략하였는데
39 아직 인명을 살해하지는 않았으며, 한윤의 형제도 강홍립을 따라 건너 와서 의주에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40 ○ 1월 24일 밤에 윤방이 아뢰기를 "평양이 이미 무너졌으니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감사를 논죄하고 다른 장수를 임명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고,
41 이정구가 아뢰기를 "화친서를 보내는 일은 이미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42 저 적들이 27일로 기약을 하였는데 선봉이 이에 가까운 곳까지 들어왔으니 금나라 사람이 맹약을 안 지킨다는 것을 여기서도 징험할 수 있습니다.
43 인심이 이미 요동하여 진정시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스스로 목숨 바쳐 싸워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44 ○ 2월 2일에 호차가 갑곶에 이르렀는데, 호서에 이르길 "대금국 이왕자는 조선 국왕에게 답서를 보냅니다.
45 두 나라가 화친하고 좋게 지내자는 것은 다 함께 아름다운 일입니다.
46 귀국이 참으로 화친을 바란다면, 꼭 종전대로 명나라를 섬기지 말고 그들과 왕래를 끊고서 우리가 형이 되고 귀국이 아우가 됩시다.
47 명나라가 노여워하더라도 우리 이웃 나라가 가까운데 무슨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48 과연 이 의논과 같이 한다면, 우리 두 나라가 하늘에 고하고 맹세하여 영원히 형제의 나라가 되어 함께 태평을 누릴 것입니다.
49 일이 완결된 뒤에 상(賞)을 내리는 격식은 귀국의 조처에 달려 있으니, 국사를 담당할 만한 대신을 차출하여 속히 결정하여 일을 완결하십시오.
50 그렇지 않으면 오가는 길에 시간만 지연되어 불편할 터이니, 우리를 신의가 없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하였다.
51 ○ 3일에 태학생 윤명은 등이 상소하기를 "차호와 박난영 등의 머리를 베고,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하여 성을 등지고 일전을 벌이소서." 하였다.
52 ○ 6일에 상이 하교하기를 "모든 관료 및 크고 작은 장수와 병사들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적을 섬멸하도록 하라. 고식적인 계책은 세우지 말라." 하였다.
53 ○ 21일에 청나라 사신이 서신을 보내오기를 "보내온 서찰을 보니 그 안에 천계(天啓,명나라) 연호를 썼기 때문에 우리 한황(汗皇)에게 진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54 오늘날 힘쓰는 것은 원래 귀국이 남조(南朝)와 마음을 같이하기 때문에 이렇게 군대를 일으킨 것인데, 지금 온 서찰을 보니 역시 예전 규례와 같습니다.
55 보아하니 귀국이 천계의 연호로 우리를 제압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천계에 소속된 나라가 아닙니다.
56 국호가 없다면 우리의 천총(天聰,청나라) 연호를 써서 입술과 이의 관계에 있는 나라로 교결하여
57 우리 나라에 일이 있으면 귀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하고 귀국에 일이 있으면 우리 나라가 귀국을 구원하여 영원히 신의를 잃지 맙시다.
58 천계라는 글자를 도로 쓴다면, 바로 아우님(영제,令弟)을 되돌려 보내고
59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 달리 처리(구처,區處)하겠습니다." 하였다.
60 ○ 3월 3일, 이날 밤 상이 대청에 나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행하였다.
61 좌부승지 이명한이 맹세문을 읽기를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62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63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64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65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66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67 ○ 6월 16일에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의주의 적이 용천으로 진영을 옮겼는데, 도독(모문룡)의 군사가 20여 기(騎)의 적을 만나자
68 무기를 버리기도 하고 물에 뛰어들기도 하였으며 병선을 모두 이끌고 가도로 돌아갔으니, 의주의 일은 가망이 없습니다." 하였다.
69 ○ 8월 2일에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한인(漢人)들이 선천에 머물러 있으므로 본부의 인민들은 대부분 쫓겨나서 경내가 텅 비었습니다.
70 한인들이 우리 백성이 지어 놓은 곡식을 거두기 위하여 구성, 청룡 등지에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습니다.
71 또 달적 30여 기가 본부로 갑자기 들어와서 군병의 전마를 빼앗아 갔습니다." 하였다.
72 ○ 19일에 달병(몽고)이 철수하면서 의주의 백성 200여명을 잡아갔다.
73 ○ 9월 9일에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요즘 머물고 있던 적들이 모두 철수하려 하니
74 흩어졌던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옛 강토를 회복하여야 하는데, 병민(兵民)을 조발하여 들여보내는 일이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75 왜냐하면 처자들을 두고 갈 경우 서로 구제하지 못하고 사생(死生)에도 서로 알릴 수 없으니, 인정과 사리에 비추어 처자들과 함께 보내야 합니다.
76 들여보내고 나서 그들의 처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급료를 주지 않으면 이는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됩니다.
77 그래서 객병 수천 명을 들여 보내는 것보다는 토인 몇 백 명을 모으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78 들여보낸 뒤에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을 뿐 아니라 겨우 모였던 백성들이 다시 흩어지게 됩니다." 하였다.
4 ○ 10월 1일에 강원도 횡성 유학 진극일이 상변하기를 "이인거가 지난달 군사를 일으켜 본현의 군기를 탈취하여 '창의 중흥 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습니다." 하였다.
2 ○ 홍보가 또 치계하기를 "신은 횡성 현감 이탁남과 함께 일시에 진군하여, 적역의 괴수와 그의 아들 이신백, 이자백 그리고 고찬, 김득명, 고계립, 고대립, 김여약 등 8인 등을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3 ○ 11월 1일에 왜와 조총을 무역하기 위한 자금으로 전라도 도군의 속목을 거두어 부산에 보냈다.
4 ○ 인조 6년(1628) 1월 3일에 죽산에 사는 김진성, 김득성, 신서회, 이두견 등이 정원에 나아와 상변하기를
5 "본 고을에 사는 허유, 허정, 이우명 등이 군사를 모아 모반하여 이미 한강에까지 이르렀습니다.
6 내응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도감의 중군, 천총, 파총과 내관 배희도 등이고,
7 괴수는 폐조 때에 승지를 지낸 사람입니다. 4일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8 상이 대신들과 의금부 당상, 양사의 장관, 좌, 우포도 대장을 명초하여 역당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9 ○ 9일에 양사에서 허유 등의 역모와 관련된 인성군 이공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10 ○ 20일에 대비전이 언문으로 대신과 육경에게 하교하기를 "이공이 역적의 초사에 거론된 것이 전후에 낭자하여 서로 호응한 형적이 분명한데
11 밀지를 받았다고 가탁한 말이 다시 역적의 입에서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흉참스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12 이공은 지난날 광해군 때에 신하와 자식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을 했는데 나는 그가 선왕의 피붙이임을 생각하였고 불문에 부쳤었다.
13 듣건대 주상께서 아직껏 윤허하여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경들은 극력 간쟁하여 기어어 윤허를 받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14 ○ 인조 6년(1628) 2월 13일에 역모와 관련하여 충청도를 공청도라고 고치고 감사, 병사, 수사와 충원 현감의 병부를 모두 다시 만들어 내려보냈다.
15 ○ 3월 4일에 유학 임지후가 정원에다 고변서를 올렸다. 이때 임지후의 삼형제가, 뜻을 펴지 못해
16 불궤를 도모하는 무리들과 교분을 많이 맺어 그들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발각되려 하자 상변하였다.
17 그런데 진심은 숨긴 채 뜻을 펴지 못한 사람들을 거짓 끌어대어 공을 세워 자신들은 벗어나려는 계책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해 하며 욕을 하였다.
18 ○ 3월 15일에 이조가, 역적 이종충, 박동기 등이 모두 광주에 산다는 이유로 목사 이경용을 파직하기를 청하고,
19 읍호는 선왕의 능침이 본주에 있으므로 강호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0 ○ (조선은 외부에, 대마도를 왜구라 하여 버려 적으로 만들고, 만주를 동이라 하여 버려 적으로 만들어, 모두를 적으로 만들어 침략을 받게 되었고,
21 ○ 내부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역적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풍조는 한국 시대에 까지 이르렀으니, 그 폐단이 너무나 크다.)
22 ○ 21일에 정충신이 청나라와 모문룡이 강화할 움직임을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23 ○ 4월 27일에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중국의 기병과 보병 2천여 명이 선천 길을 경유하여 의주로 향하였습니다.
24 그 이유를 물으니 '구련성으로 경작하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25 ○ 5월 14일에 대신과 직관이 인성군을 처형할 것을 청하자 인성군으로 하여금 자결하도록 하였다.
26 28일에 인성군 이공이 제주에서 죽었다.
27 ○ (비록 인조가 인성군을 살리려 노력한 흔적은 크지만, 결국 인성군은 유배되어 죽었으니, 인조와 대신들은 스스로 광해군을 내쫗은 명분이 틀렸음을 보였다.)
28 ○ 인조 7년(1629) 윤4월 19일에 훈국 포수 김예정이 고변하여, 임경사 등이 반란을 음모하다가 처형되었다.
29 그 고변에, '전 훈도 임경사가 우두머리로서 도감의 초군 손대순, 이선신 등과 서로 맹세하고 음모하였는데,
30 한양 도읍지는 이미 쇠하여 다시 도읍지가 될 수 없으니 연산의 신도(新都)로 옮겨야 한다면서
31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훈련 대장을 죽인 후 종묘와 도문을 불태우고
32 폐주 광해군을 다시 옹립하려고 하였다.' 하였다.
33 ○ 6월 30일에 김시양이 치계하기를 "6월 5일에 경략이 전별연을 열어 도독 모문룡를 접대하다가 갑자기 성지와 영전을 소매 속에서 꺼내 보이고는
34 좌우를 명하여 도독을 끌고 나가 목을 베었고, 허감군이란 자가 경략의 차관으로 가도에 와 군병들을 위안 점검하자
35 섬 안의 장졸들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36 ○ 인조 8년(1630) 8월 1일에 경상도 하양, 경주, 함안 등 여덟 고을에 도적이 날뛰었으므로 체포를 독려토록 하였다.
37 그리하여 고문을 가하여 자복받은 자가 17인이었는데 모두 참형에 처하였다.
38 ○ 12월 11일에 민성징이 치계하기를 "유 부총의 차비 역관 이현남이 와서 말하기를
39 '유장이 글을 아는 영리한 사람과 솜씨 좋은 장인들을 서울에 들여보내 사대부집이나 여염집에 다니면서 여러 소식을 탐지시킨다고 하였다.
40 그래서 금의 차사가 왕래할 때에도 여기에서는 알지도 못하였는데 가도에서 먼저 알고 있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41 비국이 회계하기를 "한인이 우리 나라를 탐지하여 가도에 알리는 것은 알려 주는 우리 나라 사람이 있기 때문이니, 통분스럽습니다.
42 오부에 명하여 서울에 있는 한인을 일일이 색출하여 모조리 압송시키게 하소서.
43 그리고 가도에 있는 마시장을 없애지 않으면 역관 및 장사치들이 매매하는 길이 끊어지지 않아
44 우리 나라 사정이 흘러 나갈 것입니다. 금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5 ○ 인조 9년(1631) 2월 3일에 옥천인 조흥빈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46 금부 도사를 보내 권대진, 권계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47 ○ 30일에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 문일광, 정부, 정한은 합천 사람이고, 양천식은 대흥 사람으로 이들은 이미 정형에 처해졌으나,
48 법으로 보면 그 고을의 수령을 파면하는 동시에 다른 고을에 합병해야 마땅합니다.
49 그러나 합천은 물산이 많고 땅이 넓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풍속이 더럽다고 소문이나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으니,
50 그 지방을 다스리는 관원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별도의 조치를 취해야 마땅할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51 영의정 오윤겸 등이 아뢰기를 "역적을 고을을 혁파해야 된다는 것은 법으로 볼 때 당연합니다.
52 그러나 지금 합천을 강등시켜 현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실은 큰 고을입니다.
53 게다가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소문이 났는데,
54 이들을 제압하고 수습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하루라도 그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될 듯합니다.
55 해조가 청한 대로 그 수령만 파직하고, 그 고을은 그대로 두는 것이 참으로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6 ○ 3월 10일에 간원이 아뢰기를 "요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57 죄를 진 자들이 오랑캐들에게 투항하면서 나라의 정세를 알리고 있으니, 놀랍습니다.
58 함경남, 북도의 병사 및 평안 병사가 평상시에 관진을 단속하지 못해 이렇게 되었으니, 파직하소서.
59 양 도의 감사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우니, 모두 추고를 명하시고, 각별히 기찰하는 법을 밝혀 이런 폐단이 없게 하소서.
60 강릉은 영동의 중요한 지역인데, 예전에 없던 변까지 당하여, 전우(殿宇)를 중건하는 부역이 있게 될 예정입니다.
61 신임 부사 윤천구는 담양의 수령으로 있을 때 창고의 저축 물량을 거의 다 소진시켜 담양 사람들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62 ○ (지역주의의 폐단이 여기에서 부터 시작되었는가? 이는 이러한 방식으로 조선 초에서 부터 계속 되었고, 심지어 고려시대에도 존재했으니, 통탄 할 일이다.)
63 ○ 19일에 참찬관 이성구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옥(逆獄)과 강상(綱常)의 변이 잇따라 일어났기 때문에
64 혁파된 고을이 매우 많아 백성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없지 않은데, 법문을 살펴 보아도 이런 조항은 없습니다." 하니,
65 상이 이르기를 "사실 경의 말과 같다. 그러나 이미 규례로 굳어졌고 사체 또한 중하니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66 홍서봉, 이성구 등이 아뢰기를 "함양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는데, 이미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으니, 지금 혁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67 ○ 4월 8일에 고부 사람 봉춘이 그 주인을 죽였으므로 그 군을 현으로 강등하였다.
5 ○ 부제학 최명길이 아뢰기를 "술에 빠지는 일은 고금의 공통된 근심거리인데, 근래 사대부들 사이에 이런 습성이 있으니 어찌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2 상이 이르기를 "덕을 잃고 품위를 손상할 뿐만 아니라 끝내는 그 몸을 망치는 데 이른다.
3 그런데 심한 자는 가는 곳마다 술을 찾으면서 구차한 것도 따지지 않으니 어찌 염치에 손상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4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술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화가 매우 크다." 하였다.
5 최명길이 아뢰기를 "여염간에 잔치를 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심지어 외방 사람들 중에는
6 이런 흉년을 만나서도 살림은 헤아리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을 일삼는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7 상이 이르기를 "일찍부터 금령이 있었는데도 그 폐단이 이같으니, 정원은 다시 경계시켜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8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처럼 가뭄이 극심한 날에 대군의 집을 짓는 공사가 있는데, 외간에서 모두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9 신의 생각으로는, 혼인한 뒤에 집이 없어서는 안 되니 공사를 정지할 수는 없지만, 그 칸수를 줄여서 민정(民情)에 부응해야 됩니다." 하니,
10 상이 이르기를 "전번에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수십 칸을 줄였는데, 가뭄이 이같으니 결국 공사를 중지시켜야 하겠다." 하였다.
11 최명길이 아뢰기를 "근일 여염간에는 장사와 빚을 거두는 폐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12 여러 왕자들이 전택을 점유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 원성이 길에 가득한데, 상께서 어떻게 모두 살필 수 있겠습니까.
13 선왕조에서는 왕자, 대군들이 대간을 두려워하였고, 임해군의 숙노는 여러 번 법사에서 죄받았습니다.
14 지금의 왕자군은 모두 숙부의 항렬입니다만, 국가의 법금이 지엄하니 어찌 폐단을 알면서 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15 김남중은 아뢰기를 "여염 사람들이 빚을 받을 수 없으면 그 문권을 왕자군의 집에 넘겨 줍니다.
16 그러면 가두고 독촉하는데 사람들은 감히 따지지도 못합니다." 하니,
17 상이 이르기를 "다른 왕자는 이같지 않을 것인데, 그 중에 경평군은 실성한 사람이다.
18 그리고 문권을 넘겨 주는 자는 법사에서 치죄하되 죽을 죄로 처리하라." 하였다.
19 ○ 인조 9년 11월 4일에 가도의 도독 황룡은 끝없이 탐욕을 부려 장관을 임명할 때면 반드시 뇌물을 받는가 하면
20 서쪽에서 보내온 은자와 양식을 군사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21 그리고 손 군문(손원화)이 배를 구입하여 조총등의 물건을 보내 주었는데, 이것도 모두 자기가 차지하였다.
22 이에 군중이 모두 원망하여 마침내 병기를 가지고 도독 이하 여러 장관을 결박하였는데, 심세괴도 그안에 포함되었다.
23 세괴가 스스로 결박을 푼 뒤 다시 황룡을 풀어주고 말하기를 "비록 장물을 범한 죄인이지만
24 일찍이 도독이었던 사람인데, 어찌 권도(權道)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25 섬 안에 선포하기를 "지금 양식이 없는 관계로 군병이 반란을 일으켜, 본협(本協)을 서리(署吏)로 삼아 섬 안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하고,
26 이에 군사를 이끌고 곧장 물화를 쌓아둔 곳으로 가서 은화 5만여 냥을 꺼내어 각 영의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7 ○ 다음날, 부원수 정충신과 평안 병사 이완 등이 치계하기를 "가도의 난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때에,
28 도독을 결박하고 감금하여 관인을 빼앗아 임시로 다스리는 변이 일어났는데,
29 이는 모두 심세괴가 모의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였다.
30 ○ 우리 나라가 격문을 보내어 문죄하자 섬의 대중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31 "오늘의 변은 도독이 자초한 것이긴 하지만, 조선이 우리의 양곡 보급로를 끊어버리고
32 격문을 보내어 문죄하면, 온 섬 사람들이 똑같이 반역의 무리가 될 것이고, 굶어 죽게 된다." 하고,
33 이에 경중유, 왕응원 등 10여 인을 잡아 참하고 도독을 나오게 해서 일을 보도록 하였다.
34 ○ 인조 10년(1632) 6월 24일, 전에 등주의 반란군 모유공, 모유화, 공유덕, 경중명 등이 수령을 죽이는 등 세력이 점차 커졌다.
35 그러나 명나라는 그때 오랑캐에 대한 걱정 때문에 토벌하지 못하였다.
36 이때에 이르러 내주가 함락되자 명에서는 특별히 면사패를 하사하며 귀순하라고 하였으나
37 적은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지금 이미 내주를 함락시켰는데 무엇 때문에 구차하게 살겠는가. 반드시 북경까지 진군한 후에야 그만두겠다." 고 하였다.
38 ○ 인조 11년(1633) 4월에 6일에 명나라를 배반한 모승록 등이 등주를 점거하여 그 세력이 강성하였는데,
39 이때에 이르러 관군에게 패배를 당하여 진유시, 이구공은 포탄에 맞아 죽었고,
40 모승록은 공유덕을 살해하고 귀순하려다가 발각되어 공유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41 ○ 22일에 공유덕, 경중명 두 적이 진지를 옮겨 노병과 서로 연하여 진을 치자 중국이 가도로 물러갔다.
42 ○ 7월 11일에 춘추관이 아뢰기를 "광해군 초년 이후로는 사필이 이이첨의 문객에게서 나왔으므로
43 그 더럽고 어지러운 정치를 모두 사실대로 바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44 반정 초기에 사대부들 집에 소장된 일기 및 장소, 조보에서 주워 모으고 또 듣고 본 것에서 채취하여 찬수하였습니다.
45 그런데 갑자년 변란에 거의 반이나 유실되었고 뒤에 병화로 인하여 강도 사고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46 사관을 시켜 가져다가 사국을 설치해 수정하여 역사를 완성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7 ○ 인조 13년(1635) 12월 2일에 한성부가 제도에 벗어난 집들을 적발하여 처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의지할 곳 없는 고아나 과부 서민들이었고
48 김류나 홍서봉과 같은 집들은 한 동네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니, 사람들이 다 그르게 여겼다.
49 ○ 인조 14년(1636) 1월 17일에 비국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 지난해 각곡 2만 5백 13석을 나누어 주어, 받지 못한 것이 5천 1백여 석이라고 합니다.
50 납부하지 않은 중에 더욱 심한 자는 죄를 다스리고 납부를 독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1 ○ 28일에, 간원이 아뢰기를 "즉위하신 이후로 세 번이나 중국 사신을 겪었고 자주 국상을 당했습니다.
52 금나라 사람들을 책응하는 횟수와 중국 장사꾼이 억지로 물건을 파는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53 시정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소득이 없는데도 빌려 쓴다고 하고는 곧바로 값을 갚지 않고 있습니다.
54 경기 백성들이 받는 폐해에 이르러서도 지금이 더욱 심한 형편입니다.
55 만일 변통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원성이 날이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
56 호조에 마련해 둔 무명 1천여 동이 있으며 선혜청에도 쓰고 남은 쌀 수천 석이 있습니다.
57 호조의 무명을 내어 시정 백성들에게 빌어 쓴 것을 갚아 주고
58 선혜청의 쌀을 내어 경기 도내 봉수군의 품삯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9 ○ 9월 5일에 판윤 최명길이 척화론에 부화 뇌동하는 사간원을 상차하였다.
6 ○ 인조 14년(1636) 11월 12일에 이성구가 아뢰기를 "돌아온 호역의 말을 들으면 도적(금나라)이 군대를 동원시킬 낌새가 있다 하니,
2 외방의 병마를 국경에 불러모아 몇 달 동안 변고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3 상이 이르기를 "호역이 어떻게 오랑캐의 실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4 성구가 아뢰기를 "이미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니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하니,
5 상이 이르기를 "수어는 형세가 이와 같고 기미는 명사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6 ○ 13일에,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박인범 등의 서계를 보고, 또 김명길의 말을 들으니,
7 저 오랑캐가 우리 나라와 절교하려고 아니하는 것이 말이나 표정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8 우리로서는 막연히 보답하지 않아 짐승 같은 자들의 노기를 도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9 춘추로 정례적으로 보내는 사신은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10 박난영을 별사로 삼아 일찍 들여보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황을 탐색하고
11 한편으로는 우리가 절교하지 않았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2 ○ 16일에 김류가 아뢰기를 "박난영의 행차는 정말로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13 만약 구박하여 내어쫓기는 변이 생긴다면 뒤에 신사를 보내려고 하더라도 형편이 몹시 어려울 것입니다.
14 추신사는 지모와 사려가 깊은 사람으로 각별히 가려서 보내고, 국서에는 안부만 언급하고 빨리 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15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조용히 떠나보내어 연말에 도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16 그리고 부득이하여 다시 기미한다는 뜻을 중외에 포고하라." 하였다.
17 ○ 24일에 병조 판서 이성구가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청'이라고 호칭은 그들이 건국하면서 참람하게 부른 명칭인데,
18 우리가 그들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는 좇고 하나는 좇지 않는 것이니 사리에 옳지 못합니다.
19 저들은 위협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황제의 호칭을 삭제한 까닭을 힐책할 것입니다." 하였다.
20 ○ 12월 13일에 도원수 김자점의 치계에 적병이 이미 안주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21 상이 삼공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왔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22 김류가 아뢰기를 "사태가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속히 징병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3 또 송경의 병사 1천 6백 명을 원수에게 넘겨주어 조용(調用)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동의하였다.
24 김류가 기보의 군사를 소집하여 어가를 호위하게 해서 강도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는데,
25 상은 적이 반드시 깊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니 잠시 정확한 보고를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26 그러나 김류가 굳이 청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27 ○ 15일에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강화에 대한 일을 계달하면서 적이 왕제(王弟) 및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28 ○ 16일에 능봉군 칭과 심집이 노영으로 가서 강화를 의논하였다.
29 오랑캐가 묻기를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 사람은 진짜 왕제인가?" 하니, 심집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30 또 묻기를 "그대는 진짜 대신인가?" 하니, 심집이 또 대답하지 못하였다.
31 오랑캐가 마침내 박난영에게 묻자 난영이 칭은 진짜 왕제이고 심집은 진짜 대신이라고 답하니, 오랑캐가 크게 노하여 난영을 죽였다.
32 인하여 말하기를 "세자를 보내온 뒤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33 이 때에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34 ○ (조선은 임시방편으로 항상 일을 처리해 왔고, 이로 인해 더 큰 화를 불러 일으켰다.)
35 ○ 12월 25일에 상이 이르기를 "이토록 지구전을 벌이다가 장차 어찌할 것인가. 형세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한 번 싸우도록 하라." 하였다.
36 이틀 후에, 공청 감사 정세규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37 ○ 29일에 유도 대장 심기원이 사람을 모집하고 납서로 아뢰기를 "경성에 주둔한 적은 대략 5백∼6백 명이고 아군은 겨우 2백 70명이었는데,
38 다행히도 화공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어 낙후된 포수를 불러 모아 이정길을 영장으로 삼았습니다." 하였는데,
39 공을 과장하여 자랑하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그 때문에 꽤나 사기가 배가되었다.
40 ○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41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42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43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하니, 상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7 ○ 인조 15년(1637) 1월 1일에 비국 낭청 위산보를 파견하여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새해 인사를 하면서 형세를 엿보게 하였는데,
2 청나라 장수가 황제가 이미 왔으므로 감히 마음대로 받지 못한다고 하며 공갈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산보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3 상이 삼공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어떠한가?" 하니,
4 영의정 김류 등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형세가 필시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인 듯합니다." 하고,
5 이조 판서 최명길이 아뢰기를 "한(汗)이 만약 온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면 분명 까닭없이 군사를 되돌리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 병력으로는 결단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6 따라서 화친하는 뜻으로 저들의 실정을 은밀하게 탐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7 이어 사신을 파견해서 한에게 보내어 '듣건대 황제가 나왔다고 하니 본국의 실정을 모두 진달해야 하겠다.'고 한다면 저들이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8 그러나 제신들은 모두 이를 불가하다고 하였으므로 오래도록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9 상이 마침내 최명길의 말을 따라 드디어 김신국, 이경직을 파견하여 오랑캐 진에 가서 화친을 청하게 하였다.
10 오랑캐 장수 마부달이 말하기를 "황제가 지금 성을 순찰하고 있으므로 천천히 여쭈어 결정해야 할 것이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파견하시오." 하였으므로, 김신국 등이 되돌아왔다.
11 ○ 다음 날,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 등이 한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12 그 글에 "대청국의 관온 인성 황제는 조선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한다.
13 짐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14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15 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16 그대 나라가 광해11년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17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을 얻고 난 뒤로
18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19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20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인조 5년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21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22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23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24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25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26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27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28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29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30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31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32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33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34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35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하였다.
36 ○ 동양위 신익성이 상소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오랑캐의 계략에 말려 후세에 비난만 받게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37 전하께서는 오랑캐의 글을 태워 버려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의를 펴소서." 하였다.
38 ○ 1월 3일에 홍서봉이 오랑캐에게 상을 '신하'라 일컫을 것을 아뢰었다.
39 상이 울면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죽지 않고 오래 살아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40 ○ (조선은 전에는 청국으로 부터 부모의 나라로 높임을 받았다.
41 이후 형제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명을 노골적으로 도와 결국 신하의 나라로 불리우게 되었다.
42 그러나, 생각해 보면, 조선이 명국의 신하로 자청하였으니, 청국의 신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43 스스로를 낮추고 낮추는 자는 명분에서, 실리에서, 누구 위에 설 수 있겠는가? 이는 조선의 운명이였다.
44 또한, 청국은 만주를 통일 하고 스스로 황제라 하였으니, 그들의 자존감에 감동하지 못하였고, 조선을 황제국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만들지 못하고,
45 오히려 저들을 오랑캐라며 비하하였으니, 명나라가 조선을 신하로 칭하며 비하하는 것을 깨닳지 못함이니, 통탄 할 일이다.)
47 ○ 15일에 체부가 아뢰기를 "지기룡, 김기량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와 구원병의 소식을 알렸으니, 논상하소서." 하니, 따랐다.
48 남병사 서우신과 함경 감사 민성휘가 군사를 합쳐 양근의 미원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2만 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49 경상 좌병사 허완이 쌍령에 도착하였는데, 교전하지도 못하고 군사가 패하여 죽었으며,
50 우병사 민영은 한참동안 힘껏 싸우다가 역시 패하여 죽었다.
51 충청 감사 정세규가 진군하여 용인의 험천에 진을 쳤으나 적에게 패하여 생사를 모른다고 하였다.
52 ○ 16일에 홍서봉, 윤휘, 최명길을 오랑캐 진영에 보냈는데,
53 용골대가 말하기를 "새로운 말이 없으면 다시 올 필요가 없다." 하였다.
54 최명길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이신검이 여량과 정명수의 뜻을 전하였는데, 이른바 새로운 말이란 바로 무조건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55 인군과 필부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어떻게든 보존될 수만 있다면 최후의 방법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56 새로운 말을 운운한 것은 우리가 먼저 꺼내도록 한 것이니, 적당한 시기에 우리가 먼저 그 말을 꺼내어 화친하는 일을 완결짓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57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갑작스레 의논해서 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58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런 이야기를 사책에 쓰게 하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59 ○ 17일에 홍서봉 등이 무릎을 꿇고 한(汗)의 글을 받아 돌아왔는데, 그 글에 "대청국의 관온 인성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고 하였다.
60 그 대략에 "짐(朕)이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 그대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고 그대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치의 곡직(曲直)을 따지려는 것뿐이다.
61 지금 그대가 짐과 대적하므로 내가 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여기에 이르렀으나,
62 만약 그대 나라가 모두 우리의 판도에 들어 온다면, 짐이 어떻게 살리고 기르며 안전하게 하고 사랑하기를 적자(赤子)처럼 하지 않겠는가.
63 지금 그대가 살고 싶다면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다면 또한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하였다.
64 ○ 18일에 사신들이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니, 용골대가 마부대가 나갔다는 것을 핑계대고 받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폐하라는 두 글자를 더하였다.
65 ○ 이조 참판 정온이 "화친을 배척하였으니, 청나라 진영에 나아가 죽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66 ○ 19일에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67 ○ 20일에 오랑캐가 답서를 보내어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묶어 보내라 하였다.
68 ○ 28일에 제사(諸司)의 문서를 모두 태웠다. 문서 가운데 간혹 적(賊)이라고 호칭한 등의 말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69 ○ 2월 1일에 상이 용골대, 마부대 두 장수를 양화당에서 접견하였다.
70 용골대가 황제의 명으로 고려 왕의 도장 및 신경원의 부원수의 도장을 올리니, 왕이 사례하였다.
71 상이 이어 몽고 사람들이 아직도 도성에 있으면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한다고 말하니,
72 용골대가 즉시 종호로 하여금 몽고 사람들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게 하고, 진달로 하여금 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73 ○ 5일에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니, 신하들이 길 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하였다.
74 ○ 9일에 사신은 논한다. 김류가 만약 국가의 병력으로는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면,
75 어찌 그 때에 기미책을 극력 주장하지 않고서 국가가 망하고 난 뒤에야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린다."고 말을 하는가.
76 신진 인사들이 국가의 대사를 경솔하게 논의한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주장(친명배금)을 취사 선택한 자는 또 누구였던가.
77 그리고 최명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친을 주장했는데, 지금에 와서 명나라에 주문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니, 이것이 과연 진정에서 나온 것인가?
78 ○ 4월 14일에 청나라 장수 마부달이 주사 70여 척을 이끌고 와서 가도를 격파하였다.
79 도독 심세괴가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으며 군병도 사망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80 ○ 25일에 상이 "광해가 착용하는 입자가 심하게 떨어졌다고 하니, 입자 및 망견과 금관자를 잘 만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81 ○ 11월 8일, 이때 청나라 사신과 정명수가 연로의 각 고을에서 방기 바치기를 요구하였는데 기녀들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82 묘당이 아뢰기를 "그 뜻을 맞추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 ○ 인조 16년(1638) 2월 4일에 옥과현에 간사한 백성이 있었는데 그 고을 수령을 미워하여 파면시키고자 하였다.
2 이에 밤에 향교에 들어가 도국공과 낙국공의 위판을 쪼개버렸다. 상이 끝까지 체포하고, 그곳 현감을 파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3 ○ 12일에 선천의 백성들이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심양으로 도망해 갔는데, 청나라에서 잡아 우리 나라로 돌려보냈다.
4 비국이 대명률의 '본국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몰래 들어가기를 꾀한 법'에 따라 금부로 하여금 의율(擬律)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5 이에 금부가 수모인은 참형에 처하고, 그의 처첩과 자녀들은 노비로 삼아 속공하였다.
6 ○ 3월 13일에 동래 부사 정양필이 치계하기를 "가강이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7 길리시단이라고 하는 남만인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 단지 신에게 기도하는 것만 일삼고 인사(人事)는 폐하였으며,
8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며 혹세 무민하였는데, 가강이 잡아다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9 이 때에 이르러 도원 지방의 조그만 동네에 두서너 사람이 다시 그 술수를 전파하느라 마을을 출입하면서 촌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더니,
10 드디어 난을 일으켜 비후수를 죽였습니다. 이에 강호의 집정 등이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11 ○ 9월 14일에 영해 토민(土民)이 수령을 모함하니, 잡아다 국문하고 정배(定配)하였다.
12 ○ 19일에 전라 감사 구봉서가 치계하기를 "본도가 한번 재앙을 입은 뒤로 곤궁한 백성들이 궁벽한 요해처에 흩어져 살며
13 재물을 겁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있으니, 불러 모아 떼를 이룰까 참으로 염려됩니다.
14 그런데 병사는 남쪽 해변에 있어 두루 살피기 어려운 형편이니,
15 전주 부윤 한흥일과 광주 목사 이후원으로 토포사를 삼아 잡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6 ○ 인조 17년(1639) 7월 20일에 함경도 홍원, 함흥 등지에 충해가 들었다.
17 ○ 9월 25일에 평안 병사 임경업이 치계하기를, "만장의 행차가 정주에 당도했기에 신이 가서 만났는데,
18 그와 대화할 때에 신이 말하기를 '과군(寡君)께서 세자, 대군과 이별하신 지 오래되어 병환이 나셨으니, 신민들의 망극해 하는 모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19 만장이 대답하기를 '내가 국왕을 문안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황제께 돌아가 고하면 자연 결말이 있을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20 ○ 10월 29일에 강화 마니산 제단을 다시 수축하였다.
21 ○ 12월 10일에 비국이 남한 산성에 새로 수축한 곳을 헐어 버려 통보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2 ○ 26일에 전 판서 김상헌이 상소하기를 "근래 조정에서 5천 명의 군병을 징발하여 심양을 도와 대명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23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의심하는 마음이 정해지지 못한 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4 지금은 전하께서 난을 평정하고 와신 상담해 오신 지 3년이 되었습니다.
25 그리하여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찌 가면 갈수록 미약해져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26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27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죄를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28 ○ (조선은 태초부터 함께하며 가까웠던 만주를 버려 오랑캐라 하고, 천하의 원수 중국을 부모라 칭하고 있으니, 통탄 할 일이다.
29 처음 부터, 만주를 형제와 이웃으로서 깨우쳐 다스리지 못하고, 오랑캐라며 버린 것이 잘못이다.
30 일본의 경우도 조선을 강점하였으나, 오랑캐 처럼 여겼으니, 일본이 패망한 것은 당연하였다.)
32 ○ 인조 18년(1640) 1월 18일에 청나라에서 대군과 함께 원손을 보내라는 칙서가 오다.
33 윤1월 9일에 원손이 북행하고, 대군과 부인도 함께 떠났다. 서울의 백성들이 모두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34 ○ 인조 20년(1642) 5월 17일에 이사 이경석이 심양에서 돌아왔는데, 상이 불러 접견하여 위로하고
35 이어 묻기를 "중조(中朝)가 화친을 청했다는 설은 사실인가?" 하니,
36 대답하기를 "조대수는 관외의 대장으로서 힘이 모자라 항복하고 수만 명의 병사가 하루아침에 살해되었으며,
37 토적이 강성하고 환시가 권력을 잡고 있으니,
38 화친은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으나 중조의 운은 이미 쇠퇴하였습니다." 하였다.
39 ○ 인조 21년(1643) 12월 24일에 우부승지 이행우가 아뢰기를
40 "요즈음 사치 풍조가 심해져서 혼인을 할 때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고 복식을 화려하게 입는 일이 한도가 없고
41 시부모에게 올리는 예물까지도 남보다 낫게 하려고 힘써 소비가 극심합니다.
42 무식한 시정의 무리들이야 굳이 책망할 것이 없더라도 유식한 가정에서도 이러한 풍조를 면치 못하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43 만약 철저히 금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44 청컨대 엄중 경계하며 무거운 율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5 ○ 인조 23년(1645) 2월 18일에 세자가 돌아왔고 청나라 사신도 함께 서울에 들어왔다.
46 ○ (지난 해(1644년)에 명나라의 숭정제가 자살을 함으로서 명나라가 멸망하였으나, 일부 잔당들이 남명을 만들어 남쪽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9 ○ 인조 24년(1646) 1월 3일에 궁인 정렬, 계일, 애향, 난옥, 향이, 천이, 일녀, 해미 등을 내사옥에 하옥하고 내환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는데, 자복하지 않았다.
2 처음에 상이 세자빈 강씨를 미워해 오다가 드디어 여러 강씨를 귀양보내니 안팎이 의구하였다.
3 이에 이르러 상이 전복구이를 드시다가 독이 있자, 강빈을 의심하여 그 궁인과 어주 나인을 하옥시켜 심문한 것이다.
4 정렬 등 다섯 사람은 빈궁의 나인이고 천이 등 세 사람은 어주의 나인이다.
5 후원의 별당에 빈궁을 놓고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을 주게 하고 시녀는 한 사람도 따라 가지 못하게 하니,
6 세자가 간하기를 "강씨가 비록 불측한 죄를 짊어졌다 하더라도 간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7 더구나 죄지은 흔적이 분명하지도 않은데, 한 사람도 따라 가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시녀 한 명을 따라가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8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9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10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11 ○ 갑신년 봄에 청나라 사람이 소현 세자와 빈을 보내 주었는데,
12 그때 내간에서 혹 말하기를 "강빈이 청나라와 도모하여 왕위를 교체하는 조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를 듣고 매우 미워하였다.
13 ○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시종들이 세자를 동전(東殿)으로, 강빈을 빈전(嬪殿)으로 불렀는데, 대개 저들이 보고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세자와 빈이 스스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14 2월 3일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 적의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15 이것으로 미루어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16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하루도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으니, 율문을 상고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17 최명길이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해 잘 조치하여 은혜와 의리가 둘 다 온전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8 ○ 15일에 소현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하고 교명 죽책, 인, 장복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19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을 통해 나가니,
20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 섰고 남녀 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21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22 그러나 그 죄악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추측으로 법을 집행하였기에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조 숙의에게 죄를 돌렸다.
23 ○ 28일에 공청(충청도) 감사 임담이 비밀리에 치계하기를 "이석룡이 고변하기를
24 '고을 사람인 유탁이 서울에 사는 진사 권대용 등과 반역을 공모하여, 임경업이 대장이 되었다고 사칭하고
25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인하고 군사를 몰래 모아 장차 4월 1일에 거사하려 한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6 형방 승지 여이재가 아뢰기를 "경상, 전라 두 도와 공청도의 감사, 병사에게 살피도록 하고 붙잡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27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전라, 경상 두 도는 살피게만 하라." 하였다.
28 대개 이석룡이 고변한 가운데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는 적의 당류들이 동시에 함께 일어날 것이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29 대신이 지나치게 우려하여 세 도의 군사를 아울러 징발하기를 청하였던 것인데, 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30 ○ 10월 14일에 상이 하교하기를 "자식에게 아비의 죄를 증거대도록 하는 것은 풍속과 교화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이미 금지하도록 하였는데,
31 지금 포도청에서 딸에게 아비의 죄를 증거대도록 하니 매우 잘못되었다." 하였다.
32 당시 강승이 방물로 쓰는 유둔과 채석을 훔친 죄로 그의 딸을 추문하여 증거를 작성하고 효시하도록 하였기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33 ○ 인조 25년(1647) 9월 9일에 호조 판서 원두표를 추고하고, 그의 아들 원만석과 만리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34 사간 이시만이 논계하기를 "원만석 등은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려 타인을 때려 죽였으며,
35 원두표는 죽은 자의 친족을 협박하여 그 정상을 폭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36 상이 원두표는 추고하고 만석 등은 가두라고 명하였다. 원만석 등이 치대하여 스스로를 밝혔다.
37 형조가 고한이 이미 지났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사람을 죽인 죄는 없으나 함부로 한 죄는 면하기 어렵다." 하고, 결장을 명하였다.
38 ○ 인조 26년(1648) 1월 15일에 전남 감사 이시해가 치계하기를 "보성의 전 군수 조필달은 벼슬살이를 청근하게 하고 검소함으로 자신을 규제하였습니다.
39 금구 현령 이침은 비용을 아껴 저축을 늘렸고 백성들의 부역을 견감시켰는데, 고을 사람들이 유임시켜 줄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하니,
40 상이 아울러 논상하라고 명하고 이침은 1년 동안 더 잉임시키게 하였다.
41 ○ 필언산언에 이르기를, 집의 성이성이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42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43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하니, 시를 써 주기를,
44 금동이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45 소반 위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옥반가효만성고(玉盤嘉肴萬姓膏)
46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 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47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 소리 높구나.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하였다.
48 그 날에 파출 시킨자가 여섯이였다.
49 ○ 인조 27년(1649) 5월 7일에 상이 위독하였다.
50 약방이 구전으로 아뢰기를 "오늘부터 시약청을 설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폐단이 있으니 설치하지 말라." 하였다.
51 ○ 5월 8일에 상이 창덕궁의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하였다.
10 ○ 효종 즉위년(1649) 5월 8일에 인조가 창덕궁 정전에서 승하하고 5일 뒤에 세자가 즉위하였다.
2 효종은 다섯 살 때 비로소 글 공부를 시작했는데 글 읽기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고,
3 지난 역사에서 제왕들의 골육 사이의 변란을 볼 적마다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
4 인조15년에 소현 세자를 따라 인질로 심양에 들어갔을 때 소현 세자와 한 집에 거처하며 정성과 우애가 두루 지극하였으며,
5 난리를 만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안팎으로 주선한 것이 모두 매우 적절하였다.
6 연경으로 들어간 뒤 청인들이 금옥과 비단을 소현과 왕에게 주었으나 왕은 홀로 받지 않으며
7 포로로 잡혀온 우리 나라 사람들을 대신 돌려주기를 바란다 하니 청인들이 허락하였다.
8 얼마 뒤 우리 나라로 돌아왔는데, 소현 세자가 이미 죽었으므로 대신과 경들에게 물어 세자로 삼았다.
9 인조의 병세가 위독하자 왕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인조가 승하하였다.
10 ○ 6월 22일에 내시 김광택을 잡아다가 치죄하라 명하였다.
11 전에 소현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에 안치하고서 광택을 보내어 보호하게 하였는데
12 얼마 되지 않아 두 아이가 잇달아 병으로 죽으니, 상은 광택이 잘 보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이 명을 내렸다.
13 그리고 잠시 있다가 세째 아이를 남해현으로 옮겨 안치하라 명하고, 또 함양군으로 옮기게 하였다.
14 ○ 효종 즉위년(1649) 8월 23일에 응교조빈이 상소하고,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헌의하기를
15 "조빈의 소장 가운데에 '옥책과 지석에 연호를 새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16 지금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뒤에 비록 고치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17 영의정 이경석 등의 의논도 이와 같으니, 마침내 따랐다.
18 ○ (만약 명나라가 계속 존재했더라도,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기를 주장했을까 생각하니, 안타깝다. 그러나, 이것은 자존이니, 훌륭하다 해야겠다.)
19 ○ 19일에 명하여 응교 김홍욱이 대행 대왕의 만장을 지어 올렸는데,
20 그 내용에 "어찌 오랑캐를 섬기겠는가." 하고, "입을 다문 신하의 죄가 크다." 하였다.
21 그리하여 상이 기롱하고 풍자하는 의도가 있다고 여기고 그 제술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22 이에 김홍욱이 상소하여 스스로 논열하니, 상이 소장을 받아들인 정원을 엄하게 힐책하고, 명하여 홍욱을 파직시켰다.
23 이어 하교하기를 "홍욱이 지은 만장이 이와 같은데도 아직까지 대간의 논핵이 없으니 몹시 해괴하다." 하였다.
25 ○ 효종 1년(1650) 1월 21일에 집의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민간의 고통을 아뢰고자 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더욱 살피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26 상이 이르기를 "시종의 신하로서 보고 들은 일을 말해주지 않으면 어디를 통하여 알겠는가." 하였다.
27 시열이 아뢰기를 "지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으니 성명께 기대함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8 옛사람이 '어두운 군주에게는 원망하지도 않고 밝은 군주를 원망한다.'고 한 말이 이런 때문인 것입니다.
29 근래의 일을 예를 들자면, 산릉 역부의 값을 처음에는 감제(減除)한다는 영을 내렸다가 다시 징수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30 조정이 신의를 잃음이 이와 같으니 백성이 어떻게 믿겠습니까.
31 조정에서 처음 35척으로 정하였던 것을 얼마 안 되어 40척으로 고치니, 백성들이 원망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니,
32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이 원성이 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해조에서도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런 뜻으로 묘당에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33 시열이 아뢰기를 "묘당에서는 아름다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반대하고 나서므로 신은 매양 한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34 상이 이르기를 "군국(軍國)에 관한 중요한 일을 독단하기란 쉽지 않으니 반드시 자문한 뒤에 시행해야 한다." 하였다.
35 시열이 아뢰기를 "근래에 조정이 화합하지 못합니다. 이조 판서 김집이 그 직위에 있기가 불안하여 이제 또 물러갔으므로 신은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니,
36 상이 이르기를 "아침에 그의 상소를 보고 놀라 탄식하였다. 국사가 이러한데도 물러가기만을 생각하니, 내가 부덕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37 ○ 2월 7일에 정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치적 중에서는 세종조가 가장 훌륭하여 모두 후세의 법이 될 만합니다.
38 실록 중에 시무에 절실한 여러 정교와 양법과 아름다운 뜻을 모두 등사해 올려서 항상 좌우에 비치해 두면,
39 성상의 덕을 넓히고 다스리는 도에 유익함이 어찌 작겠습니까.
40 지금 사관으로 하여금 열람하여 적어서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1 이어 하교하기를 "성묘조 때의 일도 초록하여 올리게 하라." 하였다.
42 ○ 18일에 간원이 아뢰기를 "어사를 파견해서 불법을 염탐하도록 한 것은 새로운 정사에 규율을 세우는 일입니다.
43 이번에 수령으로서 죄를 범한 자가 수십여 인인데, 그 중에서 용서할 만한 자도 혹 있겠으나,
44 죄상이 분명히 드러나 의심할 것이 없는 자가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
45 그런데도 스스로 변명하는 말만을 근거로 갑자기 풀어주니, 탐관오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46 사실대로 조사해서 율에 따라 죄를 바루게 하소서
47 이번에 권영은 수많은 재물을 탐하였으니 용서하기 어려운데도 유배하는 데 그쳤습니다. 율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니,
48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권영은 지방에 있는 대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49 당초 권영이 위원 군수로 있으면서 삼 수백 근을 범하여, 감사와 어사가 연이어 계문하였다. 이에 하옥하도록 명하였는데,
50 금부가 아뢰기를 "권영은 나이가 70세입니다. 법으로 보아 형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51 대신이 아뢰기를 "법이 그러하니 죽을 죄를 감하여 유배하고 그 장물은 관에서 몰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52 상이 하교하기를 "일단 장물을 몰수하는 이상 죄상이 이미 드러났는데, 율에 의하여 처단할 수 없단 말인가.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는데,
53 좌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도류 이하는 혹 용이하게 처리할 수도 있지만
54 사람의 목숨은 매우 소중합니다. 사형은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전의 의논대로 하소서." 하니,
55 상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양사가 율대로 할 것을 극력 청하니, 오랜 뒤에야 따랐다.
56 ○ 4월 6일에 육진이 번호의 난을 만나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자, 조정에서 농우(農牛,소)를 나누어 보냈다.
57 그리고 각 고을에서 그 수효를 기록하고, 그 소가 죽게 되면 그 대가를 징수하곤 하였는데,
58 그로 인해 침해하는 폐해가 자손과 인족에게까지 미쳐 백성들이 괴로워하였다.
59 이때에 이르러 암행 어사 이행원이 백성의 호소로 인하여 그 폐해를 아뢰니, 상이 조사해서 탕감해 줄 것을 명하였다.
60 ○ 8월 3일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저번에 성상께서 궁한 백성에게 관심을 쏟으시어 진구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61 그런데 해당 관청에서 성실하게 봉행하지 못하여 권세가의 노복들이 10분의 6, 7을 차지한 반면,
62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은 참여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서로 이끌고 거리에서 원망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63 심지어는 사부(士夫)들이 허명(虛名)을 적어놓고 쌀을 싣고 가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64 만약 이 습관을 통렬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곡식을 나눠주어 진휼하는 일은 반드시 아무 실속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니,
65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부관들을 적발해서 중하게 과죄하게 하소서." 하니,
66 답하기를 "나도 원래 이런 폐단이 있을까 염려했는데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다.
67 사람들의 비양심적인 행위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68 쌀을 싣고 간다는 말은 이야기하기도 부끄럽다. 사부란 두 글자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11 ○ 효종 2년(1651) 8월 13일에 상이 하교하기를 "들으니, 내전의 책례 때에 여러 물품을 비단 보자기로 싼다고도 하는데,
2 어찌 사치스럽게 비용을 남용하는가. 지금부터 개정하여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 하니,
3 책례 도감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여기에 이르니,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시는 뜻을 누가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4 단, 전후 책례에 쓰일 모든 기구가 이미 다 준비되었고 기일이 또 임박하였는데,
5 만일 개조하려고 한다면 형편상 할 수 없고 낭비도 많을 것이니, 하교하신 깊은 뜻을 어기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6 지금은 이대로 쓰고 이후로는 한결같이 성교에 따라 후일의 법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7 ○ 11월 23일에 상이 봉서를 내려 보여주었는데, 선조의 후궁인 조 귀인이 저주한 일이었다.
8 영이란 자는 조귀인의 딸, 효명 옹주의 여종이다. 나이가 어리고 자색이 있었으며, 또 자수를 잘 놓아 조씨가 사랑하였다.
9 이에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영특하니 나의 며느리로 삼아야겠다." 하고는,
10 숭선군과 함께 살게 하였는데, 숭선군의 부인 신씨를 몹시 미워하였다. 신씨는 바로 자전의 여동생의 딸이다.
11 자전이 이 말을 듣고는 몹시 노하여 영이를 불러 꾸짖었다.
12 영이가 이에 조씨가 음해한 일에 대해 고하기를 "조씨가 매번 '자전이 나를 구박하기를 어찌 이리도 심하게 하는가.'하고 말하면서, 심복인 두세 시비와 모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13 얼마 후에 일이 발각되어 상이 영이 등을 내옥에다 가두고 내관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14 이에 죄인들이 혹 승복하고서 복주되기도 하고, 불복한 채 그대로 죽기도 하였다.
15 ○ 12월 3일에 양사가 합계하기를 "효명 옹주가 흉악한 짓을 행한 실상이 이미 여러 역적들이 승복한 공사에서 나왔습니다.
16 낙성위 김세룡은, 그의 처가 흉악한 짓을 행한 실상을 단연코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17 효명 옹주는 법을 적용하여 처치하고, 김세룡은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니,
18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김세룡을 잡아다 국문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19 ○ 7일에 해원 부령 이영과 진사 신호가 상변하기를 "저의 장인인 조인필이 김자점과 더불어 서로 통하여 왕래하는데, 반역의 정상이 있는가 의심스럽습니다.
20 그리고 이효성, 이순성 형제는 바로 자점의 가신인데, 그 모의를 참여하여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1 조인필은 바로 조 귀인의 종형으로 영 등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해서 그들의 음모를 고한 것이다.
22 ○ 14일에 역적 조씨를 스스로 자결하게 하였다.
23 효종 3년(1652) 3월 7일에 도승지 이응시가 아뢰기를 "연경에 가는 역관에게 2백 금을 주어 준마 1필을 사 오도록 하였습니다.
24 신은 이를 보고 탄식을 금치 못하였는데, 명철하신 전하께서 필시 이렇게 했을 리가 없으리라고 여겼습니다.
25 우리 나라에 양마가 없다고 하더라도 조종조 이래로 제릉을 행할 적에 한 번도 북쪽 지방에서 나오는 명마를 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26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어찌 꼭 다른 나라에서 말을 사들인단 말입니까.
27 더구나 1백 금은 열 집의 재산과 맞먹으니 명철한 임금이라면 이 금액을 허비하는 것도 아깝게 여길 것인데,
28 어떻게 스무 집의 재산과 맞먹는 돈을 허비해 가며 멀리 수 천리나 떨어진 외국에서 말을 사올 수가 있겠습니까.
29 그리고 말 1필의 값이 무려 2백 금이나 나간다는 것도 신은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입니다.
30 사방에서 이를 듣는다면 누군들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31 ○ (말이 아무리 훌륭해도 열 집의 재산과 맞먹는 말이 존재 했을 리 없기에, 상이 사려는 것은 말이 아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의 의미는 소중하다.)
32 ○ 효종 4년(1653) 8월 6일에 제주 목사 이원진이 치계하기를 "배 한 척이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 권극중를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
33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34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인가?' 하니, 다들 '야야' 하였고,
35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하고, 본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라 하고,
36 중원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이라고도 하고 대방이라고도 하였으며,
37 서북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이라 하고,
38 정동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라고도 하였는데,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39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40 전에 온 남만인 박연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네덜란드)이다.' 하였으므로
41 드디어 금려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42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43 ○ (이 때에, 조선은 일본이 네덜란드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네덜란드와 교류 할 기회를 버렸다.)
44 ○ 효종 5년(1654) 2월 2일에 거원이 예부의 자문을 바쳤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45 "조선에서 조창을 잘 쏘는 사람 1 백 명을 선발하여, 앙방장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을 정벌하되, 영고탑에 도착하시오." 하였다.
46 상이 이르기를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하니,
47 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하였다.
48 ○ 7월 2일에 북우후 변급이 청병과 함께 나선(러시아)를 격파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영고탑으로 귀환하였다.
12 ○ 효종 7년(1656) 1월 15일에 예조 참의 김응조가 상소하기를 "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이니,
2 첫째는 마음을 한데 모아들이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며,
3 둘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4 셋째는 학문을 숭상하고 학교를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하였다.
5 ○ 3월 15일에 수찬 홍위가 상소하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의 운명을 끊으려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리도 혹독하게 변고를 보이십니까.
6 비록 군신 상하가 머리털을 손질할 틈도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7 마치 불에 타는 자를 구원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는 것처럼
8 급급히 하여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9 지금은 낮은 목소리와 느린 걸음으로 태만스레 세월만 보내어 평상시 일이 없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0 하늘의 노여움이 지극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떠났는데도 오히려 무사 안일하게 지내면 고금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11 기수는 하늘에 있고 인사는 나에게 달려 있는데 나에게 있는 것을 닦지 않고 하늘에 있는 기수에 핑계를 대는 것이 될 일이겠습니까.
12 잘할 수 없는 시기란 없고 구원할 수 없는 폐단이란 없는 것인데, 만약 오늘날 구원할 수 있는 계책이 없다고 한다면 신 또한 가슴아플 것입니다.
13 ○ 오늘날 재앙을 불러 일으킨 것은 민심의 원망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14 재앙을 구제하는 계책도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데 있을 뿐입니다.
15 옛사람이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고,
16 또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한다'고 하였으며,
17 또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18 또 역대를 상고해 보건대 민심을 얻고서 망한 자와 민심을 잃고서 흥한 자는 없으니,
19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고 선치(善治)를 말하는 자의 상법(常法)입니다.
20 오늘날의 일로 말하면 이것이 더욱 급선무가 되니 진실로 이를 버리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21 ○ 오직 그 괴롭고 궁핍한 상황이 임금의 면류(冕旒)에 들어가지 않고
22 근심과 탄식하는 소리가 임금의 주광(黈纊)을 뚫지 못하니,
23 깊숙한 구중 궁궐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24 전하께서는 반드시 나는 일찍이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어찌하여 괴로우며,
25 일찍이 백성을 침탈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어찌하여 곤궁한가라고 여기시고는,
26 또한 반드시 말하는 자를 의심할 것입니다.
27 그러나 오래된 폐단과 여러 병폐가 마치 고질이 몸을 두르고 있는 듯한데,
28 하나의 선정을 발휘하여 하나의 폐단을 고쳤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으며
29 간혹 시행하는 것은 대부분 백성들의 마음에 거슬리니, 어떻게 곤궁하고 또 괴롭지 않겠습니까.
30 어찌하여 나라에서 나라의 근본을 도외시하고 일찍이 구원하지 않습니까.
31 ○ 창고에 가득 채우고 쓸데없는 곳에 쌓아두어 태반이나 벌레와 쥐가 훼손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훔쳐가는데,
32 이러한 때에 위급한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고 반드시 인조14년 처럼 버리고 가 도적에게 싸다준 꼴이 된 뒤에야 뜻밖의 수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33 백성이 잘 살고 나라가 편안하면 재물이 없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고,
34 백성이 흩어지고 나라가 쓰러지면 비록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35 신의 말도 또한 저축한 재물을 다 쓰자는 것이 아닙니다.
36 ○ 사전에 대비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사태에 대응하기 어렵고 군사를 훈련시키지 않으면 군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37 영장을 설치한 것이 어찌 폐단을 끼치고자 그런 것이겠습니까.
38 신하 중에는 부적격자가 많아 오로지 독촉만을 일삼고 어루만질 줄은 모르기 때문에 군읍이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39 ○ 무기가 조금이라도 날카롭지 않고 군복이 조금이라도 선명하지 않으면 큰 곤장으로 벌을 주어 고칠 것을 독촉하니,
40 이에 혹은 소나 말을 전당잡히고 혹은 전답을 팔아 무기를 장만하고 군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41 무기는 그래도 괜찮지만 군복이 선명한 뒤에야 부릴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42 군사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위급할 때 그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3 지금은 평상시인데 크게 그 마음을 잃었으니 혹시라도 변란이 있으면 창을 거꾸로 들이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텐데
44 어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45 연습은 참으로 폐할 수 없으나 또한 먼저 그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46 그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기술이 비록 정밀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내가 쓸 수 있지만
47 이미 그 마음을 잃었으면 기술이 정밀할수록 더욱 염려스러운 것이니 이해(利害)의 차이가 큽니다.
13 ○ 오늘날에는 전원(田園)이 나라안에 분포되어 빽빽하기가 주판 알과 같은데
2 대부분 모두 세금이 없으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3 일이 없는 태평시대에도 정한 제도가 있었는데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궁핍한 지금에 이르러 조종조에도 없었던 법을 굳게 지키시겠습니까.
4 여러 궁가의 세금 면제도 또한 모두 등급을 보아 규정을 만들고 한결같이 국법을 따라 공정하고 균일한 정치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5 각 아문의 둔전으로 말하면 당초부터 계하가 없는 경우와 백성의 전답을 약탈한 경우를 조사해내어 바로잡자는 뜻을 일찍이 진달하였습니다.
6 이미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덮어두고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7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사는 자치고 누가 임금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8 그런데 혹은 수고롭고 혹은 편안하여 고르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9 인심은 복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나라도 또한 정책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 죄를 얻어 원통함을 품은 경우가 10에 8, 9나 됩니다. 그 부모와 기약없이 이별하고서
11 그 처자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뒹굴며 굶주리고 고달파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니,
12 그 원통함을 품고 울부짖는 것은 보고 듣기에도 비참합니다.
13 저 소민(小民)들은 무식하여 자신이 비록 죄가 있어도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14 또한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여 근심과 한탄을 면치 못하는데, 더구나 죄가 없는 자이겠습니까.
15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죄의 경중을 논하지 말고 모두 깨끗이 씻어준다면
16 살리기 좋아하시는 전하의 덕이 아래에 흡족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원근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17 ○ 그 근원을 따져보면 죄가 없는 자는 많고 죄가 있는 자는 적어 경중의 분별을 지금까지 밝히기 어려우니,
18 많은 자를 인하여 적은 자에게 미쳐야지 적은 자를 탈잡아 많은 자를 금고(禁錮)해서야 되겠습니까.
19 죄가 없는 자가 방면되더라도 또한 감동하여 기뻐할 것인데,
20 더구나 죄가 있는 자가 은혜를 입으면 기뻐하고 춤을 추며 죽어서도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21 ○ 신의 이 말은 다른 죄에는 적용할 수 없으나 이 무리에게는 적용할 수 있으며,
22 평소에는 행할 필요가 없으나 오늘날에는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23 ○ 정치하는 것은 인재에 달려 있으니, 인재를 얻지 못하고서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24 그러나 인재는 참으로 알기가 쉽지 않고 인재를 쓰는 것도 또한 쉽지 않습니다.
25 비록 뛰어난 재주와 특이한 능력이 있더라도 초야에 숨어 있으니 무엇을 통하여 알겠습니까.
26 또 비록 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험을 거친 뒤에 승진시키니,
27 나라의 법과 오늘날의 세도로서는 반드시 성 쌓던 사람을 기용하여 정승을 삼지 못할 것이고
28 낚시질하던 사람을 얻어 스승을 삼지도 못할 것입니다.
29 ○ 그렇다면 오늘 어진이를 구하고 내일 어진이를 부르며 올해에 인재를 얻고 내년에 그 재능을 시험하여
30 그가 어질고 또 재능이 있는 것을 잘 안 뒤에야 직책을 제수하고 정사를 맡긴다면 그 사이에 몇 년의 세월이 지나버릴지 모릅니다.
31 그런데도 또한 팔짱을 끼고 앉아 있고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면서 다만 그 인재가 등용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32 ○ 신의 말은 어진 인재를 꼭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진 인재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33 오늘날 인재가 없다고 나랏일을 위급한 지경에 버려둔다면 어진 인재를 얻는다 하더라도 어디에 그의 능력을 쓰겠습니까.
34 지금 전하께서 사공(事功)을 일으키려 하지 않으신다면, 비록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전하를 위해 거취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35 신들처럼 단지 지위와 먹을 것을 도적질하는 자만 얻을 것입니다.
36 ○ 전하께서 진실로 먼저 큰뜻을 분발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태평시대를 이루려는 것으로 사업을 삼아
37 이 뜻으로 어진 인재를 초빙하고 이 일로 어진 인재에게 요구하며 성의와 예를 다하여 이르를 때까지
38 계속하신다면 초야의 어진 인재가 또한 반드시 전하를 향하여 올 것입니다.
39 어리석은 신은 어진 인재가 이르지 않을까에 대해서는 걱정되지 않고
40 다만 전하의 뜻이 확립되지 않을까가 염려됩니다.
41 ○ 지금 묘당(廟堂)에 있는 자가 어찌 모두 용렬하여 쓸데없는 사람이겠습니까.
42 그 지혜와 학식이 또한 충분히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다만 담당하려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43 그러므로 끝내 의견을 내어 이해를 논하지도 않으며 한 마디 말을 채용하지도 않고 한 가지 일을 시행하지도 않으니,
44 묘당을 설치한 것이 어찌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45 ○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직접 체험하는 것만 못하니,
46 지금 마땅히 따로 어사를 보내어 여러 도를 두루 다니면서 백성의 고통을 직접 물어보고
47 이어 그 지역을 지키는 관리들과 함께 구제할 만한 계책을 의논하고서 돌아와
48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여 채택 실시하는 기반을 만드소서." 하였다.
49 ○ 3월 27일, 이에 앞서 상이 수찬 홍위의 상소를 비국에 내려 의계토록 하였는데,
50 비국이 본래의 뜻을 모두 잃어버리고 흐릿하게 회계하여 시행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51 이에 홍위가 또 상소하기를 "옛 사람이 '대관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소관이 말한다.'고 하였는데,
52 지금은 스스로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말하는 것까지 싫어하고,
53 그 말을 채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말한 자까지도 경시합니다.
54 신이 비록 외롭고 천하지만 소임은 논사(論思)의 직책이고
55 말이 비록 망령되지만 그 상소는 상의 뜻에 응하여 한 것입니다.
56 이미 성상께서 열람하셨고 또한 회계하게 하였는바,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국의 회계한 당상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4 ○ 윤5월 1일에 헌부가 아뢰기를 "신하가 명령을 받고 국경을 나갔을 경우, 나라에 이로운 일이 아니면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지난번 사은사 금림군 이개윤은 조정에 아뢰지 않고 멋대로 글을 올려 그 딸을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며,
3 부사 이하도 막지 못하고 또 따라 찬성하였으니, 이런 일을 그대로 두면 뒷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4 금림군 개윤을 잡아다 죄를 결정하고 부사 이행진과 서장관 이지무를 아울러 삭탈 관작하소서." 하였다.
5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다만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6 ○ 10일에 대사간 조한영과 사간 심세정이 아뢰기를 "의순 공주가 청나라로 간 것은 조정의 명령 때문이었으니
7 의순 공주가 돌아오는 것도 또한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8 그런데 이개윤은 일의 체제를 생각하지 않고 조정을 업신여기며 멋대로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9 이행진과 이지무 등은 도리어 찬성하였으며 말할 때에도 망발이 많아 사신의 임무를 형편없이 수행하였으니 그들의 죄도 똑같습니다.
10 어찌 파직만 시키고 말 수 있겠습니까.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쫓아내소서." 하고, 여러 번 아뢰자, 상이 따랐다.
11 ○ (명나라 때에도 조선의 딸들이 명나라에 갔음에도 당시 신하들은 명나라 왕을 황제로 떠 받들었으니, 스스로 부끄러워 하여야 한다.
12 그러나, 오늘 날에도 외국에 자국의 자존을 파는 자들이 있으니, 고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13 나아가, 외국이 우리에게 자존을 팔게 하는 것 또한 돌이켜 헤아려야 할 것이다.
14 약소국이 자존을 팔게 하는 나라가 어찌 덕이 있는 강국이라 할 수 있는가)
15 ○ 6월 4일에 권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중국을 정벌하고자 함을 잊지 못하는 뜻을 품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16 참으로 그런 뜻이 있다면 더욱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말아 시종 중단함이 없어야 합니다.
17 만약 한 가지 호령 한 가지 거조가 모두 만백성이 심복하는 바가 된다면
18 사람들이 장차 '이와 같은 임금이 있으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며
19 모두 사랑하고 추대하는 마음을 가져 다투어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뜻을 품을 것이니,
20 이와 같은 뒤에라야 큰일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하니,
21 상이 답하기를 "돌아보건대 부덕한 나는 재주와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 배움이 충분하지 못하여 지나친 거동을 면치 못한다.
22 이에 바로잡고 구원하는 그대들의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데,
23 그대들이 늘 멀리 떠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내가 이 때문에 탄식하는 것이다." 하자,
24 권시가 아뢰기를 "조정에 있으면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어찌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마는,
25 신의 아비가 신에게 경계하기를 '과거에 급제하기를 원하지 말고 벼슬하기를 원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26 신은 훈계를 지켜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에 어리석은 저의 분수를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27 이어 병을 이유로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28 ○ 7월 18일에 새로운 체제의 조총을 만들었다.
29 이보다 먼저 만인(蠻人,네덜란드)이 표류하여와 그들에게서 조총을 얻었는데
30 그 체제가 매우 정교하므로 훈국에 명하여 모방해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
31 ○ 효종 8년(1657) 3월 4일에 청나라에서 공문을 보내 조총 1백 자루를 곧 봉황성으로 운송하도록 요구하였다.
32 ○ 5월 16일에 예조 참판 민응형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33 응형이 아뢰기를 "신이 백성을 화합케 하는 데 대한 말을 성상을 위해서 진달하겠습니다.
34 서(書)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세 번이나 잘못하였는데 원망이 어찌 큰 잘못이 드러나야만 있겠는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방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5 이것은 그 원망이 이미 드러나면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 방비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36 오늘날 폐단의 조목이 셋인데, 형정과 군정과 추쇄입니다.
37 나라 안에 한 사람도 편안한 사람이 없고 한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 원망이 드러나서 하늘을 거스렸습니다." 하였다.
38 ○ 8월 16일 찬선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그가 올린 조그만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9 "고려가 거란 시대에 송나라에게 의원을 요청하면서 비밀히 충성된 마음을 아뢰었고
40 금나라 오랑캐 시대에는 또 송나라 조정에 달려가 위문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에 이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41 임금과 신하 가운데 망극한 은혜를 입기로는 또한 우리 조정과 명나라의 사이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42 ○ (송나라가 고려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이 말은 잘못된 말이다.)
43 ○ 삼가 듣건대 오늘날 한줄기 정통(正統)이 중국의 남녘 외진 곳에 붙어 있다고 합니다.
44 전하께서도 고려 조정에서 송나라에 했던 것같은 일을 이미 하셨는데도 기밀에 부치고 있어서 아랫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45 만일 그렇다면 하늘의 노여움이 그치고 백성들의 마음도 기뻐할 것이므로 잘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46 만일 그렇지 않다면 대륜(大倫)이 훼손되고 대의(大義)가 무너졌는데 하늘이 도와주고 백성이 심복하는 일은 있지 않을 것입니다.
47 ○ (조선이 명나라의 사신들로 인한 폐해가 적지 않았다, 조선이 명나라에 대항할 수 있었다면, 모든 백성이 오히려 왕을 도왔을 것이니, 이 말도 잘못된 말이다.)
48 ○ 신이 듣건대 '인심이 의혹을 품고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 오랑캐들에게 소문이 날까 싶으니 군사에 관한 일은 폐지해야 한다.'고 합니다만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49 대개 변란의 단서는 어두운 속에 잠복되어 있어 어느 시기에 발발될 지 모르는 것이고 보면 어찌 창졸간에 생기는 변에 대응할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50 대개 민심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부역이 번거로운 데에서 말미암고 부역이 번거롭게 되는 것은 용도를 절약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51 주자가 말하기를 '쓸데없는 경비를 깎아내 군사를 기르는 자본으로 삼는다면 오랑캐의 머리를 벨 수 있다.'고 했습니다.
52 ○ (주자가 말한 오랑캐는 북방민족과 조선이며, 아홉의 오랑캐, '구이'였다. 송시열은 어찌하여 저런 망말을 스스로 하는가.
53 이러니 깨닳지 못하고, 스스로 매국노가 되어 조선의 딸을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내는 것이다.
54 조선의 백성들이 이러한 매국노에 칼을 던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55 그러나,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은 좋은 글이다.)
56 ○ 오늘날의 급선무는 백성을 기르고 군사를 양성하는 것만 일삼는다면, 근본이 튼튼해지고 대비책도 마련되어 국사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57 ○ 허형은 근세의 유자로서 오랑캐인 원나라에게 몸을 망친 사람입니다.
58 그가 요임금의 대통을 여진에다 놓고 또 요금이 대통을 전해 받았다고 하면서 송은 열국으로 취급해버렸습니다.
59 전하께서 문묘에 배향된 허형의 위패를 제거해 공자와 주자의 공을 잇도록 하소서.
60 ○ 10월 22일에 충청 감사 이경억이 당진 현감 윤지미가 보고한 것에 의해서 치계하기를
61 "이정 등이 상변하였는데, 이정은 바로 당진 감관입니다. 자기 서출 동생인 이경과 함께 본현에 와서
62 보고하기를 '집안 사람 유영을 통해 들으니, 서울에 사는 진사 정세중이 도당들을 많이 결합하여 모반을 꾀하려 한다고 한다." 하였는데,
63 그들을 잡아다가 국문해 보니, 사실 무근이었다. 그래서 모두 풀어주라고 명하고, 무고한 사람 이정은 안핵하여 복주시켰다.
15 ○ 효종 10년(1659) 3월 19일에 공천(公賤)에게 소를 바치고 양민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2 전남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농사에 부리는 소를 죄다 팔아 먹었기 때문에
3 정작 농사짓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농민들이 모두 속수 무책으로 있었다.
4 이에 해당 감사 서필원이 공천으로 하여금 소를 바치고 양민이 되는 길을 허락해 주기를 청원하였으므로 따른 것이다.
5 ○ 윤3월 3일에 평안도 이산군의 백성 가운데 복통을 앓다가 죽은 사람이 70여 인이나 되었는데
6 도신이 장문하였다. 의사에 명하여 의관을 뽑아 보내고 약물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였다.
7 ○ 윤3월 16일에 함경 감사 정지화가 파직되었다.
8 당시 관군 엄대봉이라는 자가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캔 죄 때문에 갑산부에 갇혀 있다가 탈옥하여 도주했었다가
9 정평부에 체포되었는데, 족인 한춘일에게 뇌물을 주고 대신 갇혀 있게 하였다.
10 사형을 집행하려 하니 춘일이 크게 외치기를 "나는 죄가 사형에 해당되는 줄 모르고 뇌물을 받고 대신 갇혀 있었습니다." 하였으나,
11 감형관이 묻지 않고 참형에 처하였다. 그 뒤 춘일의 처자가 관에 호소함에 따라 대봉을 찾아서 체포하였고,
12 감사 정지화가 이를 조정에 장문하였다. 비국이 정지화는 파직시키고 감형관은 잡아다가 신문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3 ○ 5월 4일에 상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14 약방 도제조 원두표,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 등이 대조전의 영외에 입시하고
15 의관 유후성, 신가귀 등은 먼저 탑전에 나아가 있었다. 이때 신가귀는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이날 병을 무릅쓰고 궐문 밖에 나아가니, 드디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16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17 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증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18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고,
19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20 왕세자가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다시 침을 맞을 것을 의논하자고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쳤다.
21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하고,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22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23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24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25 ○ 훈련 대장 이완이 도감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하였다.
26 ○ 정원이, 입시했던 의관 유후성, 신가귀, 조징규, 박군, 이후담, 최곤 등을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따랐다.
27 ○ 효종의 행장에 이르길 "국왕의 휘는 호이고,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28 ○ 연경에서 청나라가 자기들이 노획한 금옥과 금수를 나누어 보내주었으나 왕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29 말하기를 "그 대신 우리 나라의 포로를 돌려달라."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 따랐다.
30 ○ 인평대군 이요와는 어릴 때부터 잘 적에 반드시 이불을 같이 덮었고 하루도 차마 떨어져 지내지 못하였다.
31 효종7년 여름에 인평 대군이 마침 참판 오정일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떤 조사 하나가 술에 취하여 무망스런 말을 했는데,
32 군수 서변이 고하기를 "인평 대군이 소를 잡아 놓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데 일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였다.
33 왕이 진노하여 직접 국문했는데 서변은 장하에서 죽었고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찬출시키니, 유언이 종식되었다.
34 인평이 효종9년 봄부터 병을 앓아 점점 고질이 되었는데 왕이 주야로 사람을 시켜 문안하고 의약을 보내는 것이 길에 잇달았었다.
35 5월 13일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급함을 알리니 왕이 소여를 타고 왕이 임어하여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36 그의 누이 동생은 옹주로서 그 어미를 도와 흉한 짓을 하였으므로 백관과 삼사가 율에 의거하여 조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37 왕은 차마 법을 가하지 못하고 사죄(死罪,죽을죄)를 용서하여 외방으로 옮겨 보냈는데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였었다.
38 이때에 이르러 그 또한 석방하여 돌아오게 한 다음 노비와 전토도 도로 내주어 의식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하였다.
39 ○ 일찍이 경연에 임어하여 개탄하기를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으레 겁이 많다고 하였다.
40 인조 15년 토산의 일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군졸들이 정예롭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좋은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41 일찍이 듣건대 이광은 군중에서 밤에 조두를 치지 않고 척후병을 멀리 보내어 적정을 탐지했다고 하였다.
42 병자 호란때 장수가 된 자들이 이 점을 전혀 몰랐던 탓으로 신경원은 이미 잘 싸우지도 못하면서 잘 피하지도 못하였다.
43 그리고 문관은 글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무관은 무예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으로
44 국가에서 취하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문관으로서 무변(武弁)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으레 경시당하기 일쑤이지만
45 무관으로서 서생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바야흐로 용납받고 있다. 따라서 무관으로서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광패스럽다고 지목하니, 풍조가 괴이하기 그지없다.
46 지금 세상에 무관으로서 서생처럼 생긴 자가 어떻게 전진 사이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7 ○ 효종 5년 봄 저녁에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사서(史書)를 읽는 것은 장차 이를 거울로 삼기 위한 것이다.
48 오늘날의 군신은 극력 힘써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을 보기를 당나라 때 노기가 덕종을 보듯이 하는 일이 없게 해야 된다." 하였다.
49 ○ 왕이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숨는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수치이기는 하다.
50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다고 모두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면 이는 신하의 도리에 있어 또한 불가한 일인 것 같다." 하였다.
51 ○ 효종 6년 봄 주강에서 명나라의 일에 언급이 되자 왕이 이르기를 "숭정 황제가 망할 적에
52 조정의 신하 가운데에는 사절(死節)한 사람은 내관 하나뿐이었으니,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53 내가 명나라의 법제를 살펴보건대 사람으로 하여금 무기를 잡고 시위하게 하고서 신하들이 일을 아뢰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박살하였고,
54 또 동•서창을 설치하여 환관들에게 주관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일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나가게 되어 있었다.
55 그 소위를 추적하여 보면 나라가 망한 것이 너무 늦었다." 하였다.
56 ○ 또 이르기를 "반드시 내정(內政)이 잘 닦여진 뒤에야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니, 지금의 급선무는 인심을 얻는 데 요점이 있다." 하였다.
57 ○ 이르기를 진나라의 제왕 유는 바로 아우인데, 무제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아우에게 물려주었어도 실로 종사의 복이 되었을 것이다.
58 그런데 참언을 믿고 도리어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내어 끝내는 골육 상잔의 비극을 연출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나라가 스스로 망하기를 재촉한 것이다." 하였다.
59 ○ 또 이르기를 "정일(精一)에 대한 이야기가 요, 순에게서 나왔지만 요 순 이전에 이미 이런 의리가 있었던 것이고,
60 경의(敬義)에 대한 이야기가 공자에게서 나왔으나 공자 이전에 이미 이런 도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61 ○ 연신에게 이르기를 "소인은 진실로 슬기로운 자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자신도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62 간사한 짓을 멋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결국 나라가 망함에 따라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인데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63 송나라의 가사도, 한탁주 같은 자들은 흉계를 멋대로 부리다가 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친족이 먼저 주멸되었으니, 그들의 계교가 실은 졸렬한 것이다.
64 송나라 때에 또 주자를 참(斬)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예로부터 소인이 기필코 어진이를 해치려는 마음을 먹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참혹한 일이다." 하고,
65 ○ 또 이르기를 "송나라에서 도학을 금한 것이 사죄율(죽을죄)과 다름이 없었으니 통분스럽고 개탄스러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66 원나라는 비록 이적(夷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도학을 숭상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포로들 가운데 유사의 부류가 있을 경우에는 석방하여 존대하였다.
67 그리하여 성인을 존숭하는 마음이 지극했다고 이를 만하다.
68 송나라는 중국이면서도 도학을 금한 것이 저와 같았고 원나라는 이적(夷狄)이면서도 도학을 숭상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16 ○ 현종 즉위년(1659) 5월 9일에 왕세자가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백관이 진하하고, 사면령을 내리고,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2 ○ 13일에 간원이 또 훈국 별장 김경이 궁성을 호위하던 날 군막 속에다 여인을 두고 있었다며
3 사판에서 그를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후 들으니 그 여인은 밥을 나르는 김경의 여종이었다.
4 그리하여 여러 관원들 모두가 사실을 잘못 알았던 책임을 지고 인피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5 그후 다시 사판 삭제의 명령을 환수하고 먼저 파직부터 하고 뒤에 추고할 것을 청하니,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6 ○ 8월 7일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선왕께서 평소에 세상 일을 개탄하신 나머지 예를 갖추어 어진이를 초치하여 심복의 자리에다 발탁해 두시고는,
서로 도의를 강마하며 이 시대를 삼대로 만회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려고 하셨으니,
이 사실을 다시 명백하게 지어내어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7 ○ 11월 13일에 영의정 정태화가, 호위청 군관을 혁파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줄일 것을 청하자,
8 여러 대신들과 널리 논의하도록 명하였는데, 모두가 혁파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 ○ 12월 25일에 예조가 아뢰기를 "즉위하신 초기에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두 자전 외의 모든 진상 물건을 일체 올리지 말도록 하셨는데,
10 그를 보고 듣는 자들이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명년 탄일의 진상물에 있어서는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11 상이 이르기를 "흉년이 들어 민생이 곤궁한데 탄일에 구애받을 것이 있겠는가. 진상하지 말도록 하여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12 ○ 현종 1년(1660) 4월 11일에 종친부가 아뢰기를 "하향한 종실들에 대하여 4월부터 녹봉을 주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데,
13 종실들이 법을 어기고 하향한 것이 죄는 죄이나, 다만 그 아문이 말한 대로 빈한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였다면 정상으로도 가여운 데가 있고 죄라도 용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4 신들이 상고하였더니, 외방에 나가 살고 있는 이들이 직무를 폐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15 국상 이후로만 말하더라도 문안 때나 거둥 때 와서 참여한 자들이 많게는 50, 60차례를 참여하였고, 시골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는 사대부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6 지금 신화(新化) 초기에 비록 일반 백성들이라도 자기 생업을 잃는 한탄이 없는데 유독 여러 종실들이 혜택을 입지 못한다면,
17 전하께서 친족을 사랑했던 조종들 마음을 체득해야 할 입장으로 보아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18 상이 이르기를 "만약 아뢴 내용과 같이 직무를 폐기 않고 있다면 녹봉을 주지 않는 것이 부당할 것 같다." 하였다.
19 ○ 7월 6일에 청주 사람 전 찰방 박정린이 집이 매우 부자였는데, 명화적에게 살해되어,
20 상이 본도 감사, 병사로 하여금 비밀리 조사하여 체포하게 하였다.
21 그리하여 병사 유여량이, 충주에서 적 14명을 체포하여 승복을 받고는 정린을 살해한 적이라고 아뢰었는데,
22 옥정이 분명하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받은 인상이 있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여량이 조정을 속인 것이라고 하였다.
23 ○ 26일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승지는 나 대신 교서를 초안하여 직언을 널리 구하여
24 대소 신민들이 조금도 숨기지 말고 나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게 하라." 하였다.
25 ○ 손필대 등을 금부에 하옥하였는데, 이유는 하리 단속을 잘못하여 조흘첩을 몰래 팔아먹게 한 죄 때문이었다.
26 ○ 8월 17일에 대사간 이정영이 분부에 따라 차자를 올렸는데, 각 아문에서 재물을 거두어 백성들이 곤궁하게 된 폐단을 빠짐없이 진달하니,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27 ○ 19일에 송도 유생 양우석이 자기 형 양몽석이 본부에 수금되자 징을 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28 이에 앞서 송도 유생 김영과 임부양 등이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서로 헐뜯은 사건이 있었다.
29 그 뒤 본부의 문묘 대문에 화재가 발생하자 김영은 임부양의 짓이라고 소장을 올려 다투었는데 결말이 나지 않았다.
30 그 뒤 서원의 위판을 훔쳐 훼손한 사건이 발생하자 또 임부양의 무리가 한 짓이라고 지목하여 서로 헐뜯어 드디어는 큰 옥사로 발전했다.
31 그런데 남노성은 김영의 무리가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부양을 무함한다고 판단하고
32 경솔히 고문을 가하니, 당시 의논이 노성을 허물하기도 하였다.
33 ○ 9월 19일에 상이, 굶주린 백성들이 앞으로 세금을 줄여 진휼하는 조치가 있을 것임을 모르고
34 지레 흩어지는 폐단이 있을까 하여 불쌍하고 민망히 여기는 뜻을 갖추어 팔도 감사에게 하유하였다.
35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임금의 자리를 지키자니 중임을 감당할 수 없어 근심과 두려움에 항상 얇은 얼음을 밟듯, 깊은 물가에 다다른 듯하다.
36 식량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으로 식량이 없으면 백성이 존재할 수가 없고,
37 백성은 국가의 근본으로 근본이 동요하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38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내 마음이 타는 듯하여 잠도 편히 잘 수가 없고,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는다.
39 비록 병중이지만, 자주 신료를 접견하고 널리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여 구휼하는 방책을 강구하였으나 실제적인 혜택을 입히지도 않았다.
40 이후로는 연분(年分)의 등급을 살펴 결실의 상태를 자세히 안 뒤에 심하게 재상을 당한 곳은 부역 등을 덜어 주겠고, 흉년이 든 곳에도 정도에 따라 부역을 줄여줄 것이다.
41 아무리 선정을 베풀더라도 이미 흩어진 뒤에야 무슨 시행할 일이 있겠는가.
42 농토에 정착하여 편안히 살며 옮겨 가기를 싫어하는 인정은 누구나 같은 것인데, 고향을 떠나는 것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겠는가.
43 이번의 재해는 팔도가 모두 마찬가지니 다른 곳에 가더라도 살아갈 방도가 없을 것이다.
44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필시 요역을 치룰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침탈을 면해 보고자 해서이다.
45 이것이 내가 조정의 뜻을 먼저 알리려는 본의이다.
46 경들은 모름지기 이러한 사실을 도내에 두루 알려 심산 유곡에까지 모르는 곳이 없게 하라.
47 그리고 경들 또한 여러 고을 수령들과 정성을 다하여 위문함으로써
48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갑자기 향토를 떠났다가 길에서 쓰러져 죽는 자가 잇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49 ○ 11월 5일에 함경 감사 조계원이 치계하여 '전 단천 군수 이지천이 재임 중에 수리(水利)에 힘을 써서
50 산으로 물길을 뚫어 개간한 농토에 물을 대게 했으므로 백성들이 그 공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상이 특별히 가선 대부로 가자했다.
51 ○ 12월 9일에 숭선군 이징이 배리(陪吏)의 방역을 면하려고 마을 백성들을 잡아다 곤장을 때렸는데
52 한성부에서 그 사유를 아뢰자 상이 명하여 징의 집 하인을 가두고 엄하게 다스려서 다른 궁가(宮家)에 경계가 되게 하였다.
53 ○ 19일에 절의 여비로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자가 상언하여 신역을 면제받기를 바라니,
54 상이 하교하기를 "이단의 교는 매우 허망하다. 절을 헐고 환속시키는 일은 비록 갑자기 거행할 수는 없지만
55 이러한 무리들이 멋대로 중이 되니,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민정은 날로 줄어들고 승니는 날로 증가할 것이니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56 경외의 양민으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키고,
57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리나 환속 대상자를 막론하고 모두 특별히 죄를 준다는 뜻을 분명히 알려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7 ○ 현종 2년(1661) 8월 17일에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가 탄생했으니, 각도에서 진하하는 방물을 봉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2 답하기를 "자전 두 분 외에는 봉진하지 말도록 하여 굶주리는 백성에게 조금이나마 폐단을 덜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3 ○ 9월 5일에 평림군 이원경이 이웃집 사람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중상을 입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4 집의 이준구 등이 상서하면서 사실을 숨기고 허위로 도삼년으로 의율하였는데,
5 승지 김좌명에게 "법부에서 의율한 것을 보건대 멋대로 높이고 낮추었으니 정말 놀랍다." 하였는데,
6 좌명이 아뢰기를 "본래 주먹다짐한 것으로 원경의 율을 정해야 하는데, 헌부가 다른 율을 잘못 적용했습니다." 하였다.
7 ○ 7일에 홍명하가 상에게 아뢰기를 "이만은 부모를 개장한다고 하면서 큰 마을의 인가를 훼손시켰으니, 조사해 처리케 하소서." 하였는데,
8 도승지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만이 철거시킨 것은 단지 집 두 채뿐으로서 그것도 매각한 지역이니 심각하게 따질 일이 못됩니다.
9 게다가 진휼하는 정사를 바야흐로 펼치고 있는 중이니, 가벼이 체직시킬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소서." 하였다.
10 비국이 이만의 행동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하여, 결국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도록 하였다.
11 ○ 10월 14일에 조복양과 유계 등이 관작(관직과 작위)을 팔아 곡식을 모집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니, 국가의 비축량이 떨어져 갔기 때문이었다.
12 ○ 11월 5일에 지중추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이일상을 배척한 대계의 내용을 들었습니다만,
13 그 가운데 감영의 곡식을 요리했다고 하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신 역시 그와 비슷한 일을 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14 신이 미처 스스로 자백드리기도 전에 연신이 신의 이름을 들어 아뢰었다는 말이 이어 들려 왔습니다.
15 신의 죄가 이에 커지게 되었으니, 직명을 깎으시고 일상과 똑같이 조사하여 처단케 하소서." 하니,
16 답하기를 "감영의 곡식에 관한 이야기는 추악하게 헐뜯으려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 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
17 가난한 사부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의리를 해치지 않는 곡식이 있는데도 그 곡식을 내다 먹지도 못하고 그냥 죽어야 한단 말인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8 ○ 다음날, 병조 판서 홍명하가 상차하기를 "송시열이 지푸라기 하나도 사람에게서 취하지 않지만
19 집이 가난해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감영의 곡식을 대여받은 적도 간혹 있었는데
20 적곡을 상환할 적에 이쪽에서 받았던 것을 저쪽으로 납부하기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21 그래서 신의 생각에 '이일상이 환곡할 때, 미곡으로 1곡 받았던 것을 정조(털없는 곁벼)로 2곡을 상환하였다 하는데,
22 미곡을 정조로 바꿔 바친 것은 차이가 있지만, 이쪽에서 받았다가 저쪽으로 납부한 것은 시열의 경우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23 그런데 지금 시열이 이렇게 소장을 진달했으니 신은 지극히 두려워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24 신의 생각에는 이 일이 실로 시열을 손상시키는 점은 하나도 없겠기에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진달드렸던 것인데,
25 결과적으로 유현이 인혐하도록까지 하였으므로, 본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의 망언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26 답하기를 "어찌 경이 의도를 갖고 말한 것이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서 속히 나와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27 ○ 11월 16일에 교리 민유중이 상소하여, 자주 경석을 열어 아랫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것을 청하고,
28 관작을 너무 많이 팔아 국체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면서 수천 마디에 걸쳐 누누이 아뢰었는데, 상이 포답하였다.
29 그러나 뒤에 진휼청 당상 조복양의 의논에 따라 옛날처럼 관작을 팔기 시작하였다.
30 ○ 현종 3년(1662) 1월 23일에 조복양과 유계가 호남의 전세를 서울로 운반해오지 말고 기민을 진휼하도록 청하고,
31 정치화는 미곡을 운반해 와 경비를 보충할 것을 청하니, 상이 재해를 입은 19개 고을은 전액 감면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경창에 운송해 들이도록 명하였다.
32 유계가 아뢰기를 "일찍이 도신(道臣)의 계문에 따라 호우 지방에 대해 경자년의 전세를 추수 때까지 기한을 물려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33 그런데 신축년의 흉년든 상황이 경자년보다 더 심하였는데, 물려서 징수하기로 된 전세와 올해의 전세를 한꺼번에 독촉하여 징수한다면,
34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백성들로서는 더욱 마련해 낼 길이 없을 것이니, 변통해 주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35 조복양이 아뢰기를 "새 곡식이 익은 뒤에는 필시 바치기 어려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36 정치화는 아뢰기를 "추수는 으레 겨울 초에 끝나므로, 얼어붙기 전에 상납하기는 사세상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37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절반은 올봄에 상납토록 하고, 절반은 추수할 때까지 기한을 물려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38 ○ 1월 28일에 좌의정 심지원이 죽었다. 삼가 살피건대, 병자 호란 때 미처 어가를 수행하지 못해 유배를 당했다가 석방된 뒤로 주군이나 맡으며 초라하게 지냈는데,
39 그의 아들 심익현이 부마가 되면서부터 다시 기세를 떨쳐 마침내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40 일 처리를 우물쭈물하고 자리만 지킨다는 비난이 있긴 하였으나, 경박한 논의를 좋아하지 않았고
41 전형의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뇌물과 관련된 소문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꽤 칭찬하였다.
42 ○ 6월 17일에 황해 감사 홍처윤이 치계하기를 "이정두라는 자가 임전과 동모한 뒤 평산의 민전을 궁가에 몰래 팔아 넘겼습니다.
43 그리고 재령, 신천의 전지 역시 본토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경작해 오던 토지인데,
44 아무리 문기(文記,계약서)가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루아침에 탈취할 수 있단 말입니까.
45 신의 감영에 소속된 화전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또한 해마다 세금을 징수하여 각참의 수요와 진휼하는 자본을 보충하고 있으니,
46 만약 모두 탈취당할 경우에는 감영의 입장으로 볼 때에도 절박하게 될 근심이 있습니다.
47 그런데 더구나 이곳 몇 이랑의 전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소민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48 그런데 세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원한에 찬 부르짖음을 듣고 있으면서도
49 궁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영문에 품하지도 않고
50 성책하여 지레 먼저 올려 보내는 등 정말 형편없기 짝이 없는 짓을 했으므로 세 고을의 색리를 잡아들여 중하게 형추하였습니다.
51 신천과 재령의 민전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속히 복계하여 처치토록 하고,
52 평산의 민전을 몰래 팔아넘긴 이정두라는 자도 잡아 전지의 주인과 한 곳에서 조사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다.
53 그 뒤에 이정두와 임전을 구금하여 조사해 간악한 정상을 밝혀냈는데, 임전은 장을 맞다가 죽고 이정두도 옥중에서 죽었다.
54 ○ 7월 28일, 호남 무안현의 남녀 18인이 섬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갑자기 광풍을 만나 유구국까지 표류하였다.
55 그 나라 사람들은 삭발하거나 장발 차림이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56 그러다가 그들이 북 하나를 가지고 앞에 와서 손으로 가리키며 고무(鼓舞)하는 모양을 지었는데,
57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채고 노래를 부르며 북춤을 추자,
58 그때에서야 그 사람들이 고려인이라고 부르면서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는가 하면 쌀을 주어 밥을 지어먹게 하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59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왜국 살마주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대마도로 보내져 어려움 끝에 간신히 귀환하였다.
60 ○ 7월 29일에 사간 이민적, 헌납 박세견이 아뢰기를 "정사의 권한이 한 집안에 집중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경계하는 일입니다.
61 한 집안의 숙부와 조카가 마주앉아 양전의 권한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물정이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62 뒷날 걱정거리를 발생하게 할 수도 있으니, 병조 판서 홍중보는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63 ○ 10월 7일에 예조 낭관을 송도에 보내 고려의 제능을 살펴보게 하고 1백 보로 한계를 정해 그 안에서는 경작과 장례를 금하게 하였다.
64 그 가운데 태조의 능은 선조 때 정한 제도를 써서 1백 보를 더 늘려 한계로 잡고,
65 현종, 문종, 충경왕의 3개 능은 50보를 더 늘려 잡았는데, 이 세 임금의 공덕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8 ○ 현종 4년(1663) 5월 22일에 이경석이 아뢰기를 "의관이 말하기를 '옥체의 습창에 온천 물이 제일이다.' 고 하니, 그 물을 가져 와야겠습니다." 하니,
2 상이 이르기를 "가져온 물은 오래 쓸 수가 없는데, 자주 가져오게 되면 민폐를 끼칠까 염려된다." 하자,
3 김좌명이 아뢰기를 "성명께서 민폐를 염려하십니다만, 우역을 두고 번갈아 전해오게 하면 어찌 백성을 수고롭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4 경석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민폐를 염려하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이 기회에 감히 진달드릴까 합니다.
5 일찍이 대계를 인하여 민간인 가옥을 뺏어 들어가 사는 것을 일체 금단토록 하였는데,
6 근래 듣건대 이름있는 사대부가 예전처럼 멋대로 뺏어서 들어갔다 합니다.
7 어리석은 백성이 만약 '조가(朝家)에서 알고도 금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될 경우 그 입으로 저주하는 것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하니,
8 상이 이르기를 "제조 는 듣지 못했는가?" 하였다.
9 김좌명이 아뢰기를 "어떤 조사가 교자를 타고 부인 차림으로 꾸민 뒤 어떤 집을 뺏어 들어가 살고 있다 하는데, 이런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하니,
10 상이 이르기를 "집 주인이 빌려주지도 않았는데 뺏어서 들어간 자를 적발하게 하고 엄금토록 하라." 하였다.
11 ○ 현종 5년(1664) 1월 20일에 광주 저자도의 사노 선이 동네 사람 세현과 힘 겨루기를 하다가
12 이기지 못하자 성을 내어 세현을 찔러 죽였는데, 동네 사람이 그를 결박하니
13 세현의 처 임생이 남편이 비명에 죽은 것을 원통하게 여겨 즉시 칼을 잡고 선을 찔러 죽여 복수하였다.
14 형조가 아뢰기를 "처가 남편을 위해 복수했을 때 적용할 만한 율이 없는데
15 정표할 만한 열녀이니만큼 복주(처형)되어야 할 죄도 덮어 주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16 율에 '조부모나 부모가 남에게 살해되었을 때 흉악한 행위를 한 자를 자손이 멋대로 죽인 경우에는 장 육십이고 현장에서 즉시 죽인 경우에는 논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17 부처(夫妻)는 삼강의 하나인 만큼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위해 복수한 경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18 마침내 장 육십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현장에서 죽인 이상 장 육십의 율을 적용하는 것은 타당치 못할 듯하다. 논하지 말라." 하였다.
19 ○ 윤6월 3일에 왜인이 퇴계집과 고사촬요를 구입하고자 하였는데, 허락치 않았다.
20 ○ 11월 24일에 경기우도 암행 어사 여성제가 복명하였다.
21 그 서계 가운데 수령으로서 잘 다스린 이는 김포 군수 유호연, 고양 군수 김중일, 양천 현령 윤게, 마전 군수 허질, 인천 전 부사 이단상이었다.
22 ○ 12월 18일에 약방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가 민간의 말을 들으니, 자전께서 거처하시는 궁중에 도깨비의 변괴가 있는데 통명전이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하니,
23 상이 이르기를 "오래 전부터 옮기려고 하였으나 자전께서 따르지 않으신다." 하였다.
24 ○ 이 해에 강원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역병이 행하여,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25 ○ 현종 6년(1665) 1월 27일에 영부사 이경석도 이무 등이 죄받은 일로 진소하니,
26 답하기를 "붕당의 논의는 망국의 화이니 국가가 깊이 미워하고 빨리 근절해야 할 것이다.
27 말세의 고질적인 버릇을 통렬히 개혁하지 않는다면 조정의 우환이 어찌 얕겠는가.
28 오늘날 이무 등의 일은 곧 당론일 뿐이다. 처음에 삭탈 관직, 문외 출송의 율을 적용한 것은 참으로 그 시비를 밝히는 데서 나왔으니 참작한 뜻임을 대개 볼 수 있으리라.
29 서로 비호하고 오로지 당론을 일삼으면 귀양보내는 벌도 헐하다고 하겠다.
30 어찌 대관의 언로를 핑계하고 용서할 수 있겠는가.
31 경의 차자 가운데 이른바 '사람마다 다 감히 말하지 못한다. 내 말을 어기는 사람이 없다.' 하는 말을 인용한 뜻을 내 깨닫지 못하겠다.
32 왜냐하면, 이쪽 저쪽을 가르는 당을 만들고 이쪽 저쪽을 가르는 논의를 조성하는 것이 오늘날보다 심한 때가 없는데
33 '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한다. 내 말을 어기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면
34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여 그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35 이해를 계산하지도 않고 국가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두어야 하겠는가.
36 나의 견해로 말한다면 붕당의 언로는 참으로 막고 또 막고자 하는 것이다.
37 경의 이 말은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경은 마음을 가라앉히라." 하였다.
38 ○ 2월 21일에 우의정 허적이 18번째 정사하니,
39 상이 답하기를 "재변이 더욱 혹독해지니, 나의 걱정스런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40 지금 같은 때를 당해서는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더라도 위태로움을 구제하기가 어렵다.
41 그런데 인피하여 들어가기만 하니, 경은 국사를 잊은 것은 아닌가? 속히 정사하는 것을 중지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42 ○ 4월 23일에 정원에 하교하기를 "비가 이처럼 오니 호위 군병들이 어떻게 비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43 정원이 아뢰기를 "각 군영에 물어보니, 군사들이 모두 좋은 목면 포장을 갖고 있어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44 ○ 현종 7년(1666) 6월 18일에 정언 김징이 아뢰기를 "감역 박순의 처 조씨는 성격이 본래 패악스러운데,
45 그의 남편이 가까이하는 여종을 질투하여 혹독한 형벌을 마구 가하여 끝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46 또 고 익풍군 이속이 살아 있을 때에 가까이하던 여종이 있었는데, 그의 처 임씨가 질투심이 많고 사납고 성질이 괴팍스러워,
47 이속이 죽은 뒤에 그 여종이 두려워 달아나 숨자 그 여종의 어미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을 가해 죽이고는 시체를 도성 안에 버렸습니다." 하니,
48 상이 형조로 하여금 그 문장과 가장을 함문하게 하고, 또 매질을 했던 종을 추문하게 하였다.
49 ○ 현종 8년(1667) 10월 9일, 당초에 김선립이 명화적으로 체포되었는데, 그의 아비인 김막금을 같은 도적이라고 끌어대었다.
50 이에 형조가 아뢰기를 "선립은 그의 아비를 죽을 곳으로 기필코 빠뜨리려 하니, 몹시도 흉악합니다.
51 강상죄에 관계되니 단지 자식으로서 아비를 고발한 율로 조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전례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52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이는 실로 천지간에 없었던 커다란 변고로 강상 대죄를 저질렀음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53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참수하라고 명한 것이다.
19 ○ 5월 13일에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간은 십분 잘 가려서 임용해야 합니다.
2 이동로가 집의로서 입시하여 살인한 죄수인 이세공을 풀어주기를 청하였는데, 어찌 이와같은 대간이 있단 말입니까.
3 이미 지나간 일이나 중한 벌을 내려 뒷사람을 징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4 상이 이르기를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먼저 법을 무너뜨리다니, 실로 뒤 폐단에 관계가 된다. 파직하라." 하였다.
5 ○ 허적이 또 아뢰기를 "이완의 말을 듣건대 '포도청에서 몰래 엿보는 일이 있는데,
6 어떤 대관이 본청의 하인을 잡아다가 속히 몰래 엿보는 일을 정지하게 하고
7 도리어 정장한 사람을 치죄하였다.'고 합니다. 어찌 이와 같은 대관도 있단 말입니까." 하니,
8 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허적이 아뢰기를 "최문식인데 지금은 대간의 직에 있지 않습니다." 하니,
9 상이 이르기를 "일이 몹시 놀라우니 최문식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10 ○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사사로운 뜻을 끊어 버려야만 국사를 다스릴 수 있다고 진달하였습니다.
11 요즈음 듣건대 신천의 어의궁 둔전 백성이 선격들에게 침해를 당하자
12 본군 향소의 7인을 경기에 옮겨 가두고 5차례나 형신하였다고 합니다.
13 둔전 백성을 침해하는 것은 참으로 죄주어야 하나 본도로 하여금 죄주게 하면 충분합니다.
14 하필 옮겨 가둔단 말입니까. 죄인들의 자녀가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소리가 듣기에 애처롭습니다." 하니,
15 상이 이르기를 "이미 형벌을 시행하였으니 풀어주라." 하였다.
16 ○ 민정중이 아뢰기를 "진휼할 곡식을 경기 고을에 주어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주게 한 것은 실로 기근을 진념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17 그런데 지금 듣건대 각 고을의 수령들이 사사로이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 주었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여 비방하는 말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18 수령으로 있는 자가 굶주린 백성들이 먹을 것을 빼앗아 아는 자에게 생색을 낼 밑천으로 삼고 있으니, 가증스럽고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19 이 일은 사사로움을 따르고 법을 무시한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일일이 적발하여 계문한 다음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0 뒤에 끝내 적발하지 못하였다고 감사 장선징이 계문하고 대죄하였다.
21 ○ 7월 19일에 승지 오두인, 강호 등이 대간에게 논핵을 당했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잘못된 말이 많았다.
22 심지어는 '양사의 아전이 죄를 지었을 때에 본원에서 손을 쓸 수가 없으면
23 정원의 사체는 날로 낮아지고 대간의 사체는 날로 높아져서, 여러 관사에 호령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24 이에 헌부가 너도나도 일어나서 인피하며 공격하였는데,
25 장령 신명규가 피혐한 말은 적절한 말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26 ○ 7월 20일에 상이 이르기를 "허질은 치적이 가장 현저하고 또 진구할 곡식을 별도로 준비한 것이 1천 석이 넘으니, 가자하라.
27 정창도와 이흥직에게는 모두 숙마를 사급하라." 하였다. 허질은 좌상 허적의 아우이다.
28 ○ 11월 24일에 죄인의 시집간 딸에게는 연좌하지 말 것을 명하고,
29 각 해당 사, 읍, 도에서 판에 새겨 벽에 걸고 정해진 법식으로서 준행하되 근실하게 봉행하지 않는 자는 죄를 주게끔 하였다.
30 승지 남구만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형조 판서 서필원이 율을 참고하여 품계한 것이다.
31 ○ 현종 11년(1670) 8월 30일에 경상 감사 민시중이 치계하기를 "다른 도의 유민들이 진주, 함양 등 10여 고을에 가득하여 꼭 굶주린 까마귀 떼 같은데 도둑질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32 앞으로 노약자는 구렁에 엎어져 죽을 것이며 건장한 자는 도적이 될 것이니, 제때에 구제해서 다른 근심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33 진휼청이 회계하기를 "조금이나마 농사가 된 영남 고을에 나누어 보내 스스로 살길을 찾도록 하되,
34 특히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은 현재의 그곳에서 죽을 끓여 주어 구제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5 ○ 9월 29일에 모든 도의 임기가 만료된 수령을 명년 보리 추수 때까지 유임시킬 것을 명하였다.
36 이때 팔도에 큰 흉년이 들어, 수령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이 고을 백성들의 큰 폐단인데다
37 진휼을 처리하는 정사를 솜씨가 서툰 자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38 ○ 10월 29일에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대신과 형조 판서의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참담하였다.
39 큰 기근 뒤에 추운 절기를 만났으니, 얼어 죽는 자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40 해조와 해청으로 하여금 한성부에 분부하여 특히 그 중 심하여 의지할 데가 없어 얼어 죽게 된 자에게는 동옷을 주거나 옷감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41 허적, 정지화 등이 경연에서 도로에 얼어 죽은 자가 많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42 ○ 12월 26일에 상이 참의 김만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하니,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 김씨이다. 숙종 6년에 병으로 죽고, 두딸이 있었으나 역시 죽었다.
20 ○ 12월 28일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불러 보았다.
2 예조 판서 조복양, 좌참찬 민정중이 아뢰기를 "삼남의 전세는 지금 거두어 바치기 어려우니 감면하심이 마땅합니다. 관서의 쌀을 진휼에 옮겨 쓰소서." 하니,
3 허적이 아뢰기를 "6도의 전세를 감면한 후에 관서의 쌀을 옮겨 쓴다면 후에 무엇으로 그 수를 채우겠습니까. 전세는 전부 감할 수 없습니다." 하고,
4 호조 판서 권대운이 아뢰기를 "정중이 아뢴 것은 백성들의 진휼을 위한 것이나, 경비를 장차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 하고,
5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금년의 수미 상납은 예년에 비하여 10분의 1입니다. 또 감면한다면 국가의 비용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됩니다.
6 전세는 절대로 감할 수 없고 관서의 곡식을 가져오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7 상이 이르기를 "명년의 풍흉은 비록 알 수 없으나 진휼청은 다른 곡식을 옮겨 쓰라.
8 전세는 전부 감하기는 어려우니, 내 생각으로는 올릴 수 있는 것은 올리고 올릴 수 없는 것은 올리지 말게 하되
9 참작하여 받아들여 본도에 두게 하여 내년 봄에 가져다 쓸 수 있는 바탕으로 하는 것이 실질적인 혜택이 될 듯하다." 하였다.
10 대운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진실로 옳습니다. 마땅히 받아서 저장해 두고 훗날의 쓰임에 대비해야 되겠습니다만,
11 미리 감면한다는 의논이 있으면 외방의 사람들이 관망하고 납입하지 않게 될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12 조복양이 나아가 아뢰기를 "기근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어찌 금년처럼 심한 때가 있었겠습니까.
13 외방에서 굶주리고 얼어 죽는 상황이 끊임이 없으며 또 추위에 얼어 죽는 것으로는 감옥보다 심한 곳이 없습니다.
14 중죄수가 아니라면 어찌 한결같이 지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15 이제 새해가 다가오는데 각도에 특별히 하유하는 글을 내리시면 틀림없이 크게 생각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16 서울 옥중의 죄수 가운데 심하지 않은 자도 역시 속히 처결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17 ○ 12월 29일에 충청도 임천 등의 읍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백 20여 명이었다.
18 경상도에 소의 전염병이 심하여 전후로 죽은 수가 3백여 마리에 이르렀다.
19 ○ 현종 12년(1671) 1월 1일에 충청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2백 20여 인이었다.
20 ○ 3일에 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5천 1백여 인이었는데 여역이 또 뒷따라 번져 죽은 자가 2백여 인이었고 우역도 줄곧 치열하게 만연하였다.
21 ○ 18일에 예조 판서 조복양이 상차하기를 "신이 접때 등대하였을 때에 양호의 전세는 혹 감면해 주거나 혹 남겨 두어 진휼하는 데 쓰게 하고
22 관서의 쌀을 가져와서 대신 채우자는 뜻으로 누누이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23 요즈음 외방의 말을 들으면 민간에 굶어 죽는 무리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날마다 들리는 것이 모두 놀랍고 슬픈 일들입니다.
24 이런 때에 굶주린 백성에게서 전세를 독촉해 받아 수송해 온다는 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25 이제 전량을 남겨 두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긴다면 양호의 연해안 고을만 상납하게 하되 쌀과 콩의 두수를 적당히 줄여 주게 하고
26 산간 고을은 모두 받아서 본도에 두었다가,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는 것은 결코 그만 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27 이에 앞서 조복양이 민정중, 김만기 등과 함께 입시하였을 때에 삼남의 전세를 감면해 주자고 청하였는데,
28 허적, 김좌명, 권대운이 다들 '경비가 염려되므로 전세는 결코 줄일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의논이 결정되지 않았다.
29 그러자 조복양이 물러가서 또 상차하고 며칠이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30 상이 차자의 사연을 신하들에게 여러번 물어 보고는 마침내 전세를 받아서 남겨 두었다가 진휼하는 데 보태 쓰라는 명을 내렸다.
31 ○ 10일에 예조 판서 조복양이 죽었다. 조복양은 좌의정 조익의 아들인데 병이 난 지 며칠 안 되어 죽었다.
32 조복양은 젊어서 글재주가 있어 호화로운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조정에 있는 동안 일컬을 만한 일은 없었고 당론만 좋아하였다.
33 전조의 권한을 잡게 되어서는 벼슬을 판다는 비방이 많이 있었으므로 식자가 비루하게 여겼다.
37 ○ 16일, 경기에서 12월 보름 이후로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1백 70여 인이고, 죽은 소가 30여 마리였다.
38 ○ 이날 서울 안 선혜청, 한성부, 훈련원의 세 곳에다 비로소 죽을 장만하여 두고 굶주린 백성에게 먹였다.
39 첫날에는 죽을 먹으러 간 자가 6천여 인이었고 이튿날에는 이미 1만이 넘었다. 빌어먹는 무리에게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이고
40 죽을 먹으러 가기 어려운 사족의 부녀자와 죽을 먹는 사람 중에 시골로 돌아가 농사짓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모두 마른 식량을 주었다.
41 ○ 17일, 원양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67인이고 소의 돌림병도 줄곧 치열하였다.
42 ○ 19일, 경상도에서 전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1만 1천 5백 53명이었다.
43 ○ 21일, 충청도 정산 등 고을에서 굶주리고 얼고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43인이었다.
44 ○ 23일, 상이 숭문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45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나라에 저축된 것이 있다면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저축된 것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하자,
46 유혁연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조금 풍년이 들어 쌀값이 자못 싸지자 공사간에 함부로 쓰고 아낄 줄을 몰랐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하고,
47 민정중이 아뢰기를 "모든 일에서 적당히 줄여써야 하겠습니다만 군사에게 드는 것이 가장 많으니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48 김만기가 아뢰기를 "예전에 송나라 때 도성에다 군사를 많이 양성하다가 나라의 저축이 헛되이 소비되고 말았습니다. 중국도 이러한데 더구나 우리 나라이겠습니까." 하고,
49 민정중이 아뢰기를 "서울의 구휼에 있어서는 이미 설치하여 시행하였습니다만,
50 반드시 어사를 보내어 민간의 고통과 원망이나 구황 정책의 잘잘못을 탐문하여 아뢰게 한 다음 처리해야 하는데,
51 이것은 실로 외방의 백성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각도에 두루 보내지 아니해도 경계하는 효과가 저절로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52 ○ 29일, 함경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사뭇 많았다.
53 30일, 충청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5백 54인이었다.
54 2월 3일에 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2만 3천 5백 53인이고 함경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4천 8백 69인이었다.
55 전라도에서 정월 8일 이후로 굶주린 백성 중에서 얼고 굶어 죽은 자가 2백 39인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52인이었다.
56 5일,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이 2만 1천 6백 48인이었다.
57 6일, 경기에서 정월 보름 이후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1백여 인이었다.
58 ○ 7일에 헌부가 또 아뢰기를 "훈련 도감이 1천여 석의 곡물을 내다 팔고 어영청이 판 것도 수백 석이 넘는데
59 이익을 꾀하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여 사사로이 매매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며, 수어청, 총융청 및 사복시도 곡물을 판 일이 있습니다.
60 그런데 간사한 무리가 교묘하게 정장(呈狀)하여 서울과 지방에 유치된 곡물을 내어가고자 꾀하여 한 사람이 많게는 수백 석을 받기도 하고 혹 1천 석에 가까운 자도 있다 합니다.
61 각 아문을 시켜 많이 받은 자를 엄히 살펴서 무겁게 죄주게 하고,
62 이 뒤로 파는 곡물이 있으면 모두 진휼청의 예에 따라서 하여 서울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63 ○ (왕이 무슨 죄이겠는가? 돈에 눈먼 자들이 전염병과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자들을 보고도 이익을 챙기기에 바쁘니, 후세에도 이러한 자들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니, 경계해야 한다.)
64 ○ 10일, 이때 국가의 재정이 바닥이 났다.
65 호조의 삼창에 저축된 것이 4만 석도 채 못되어 두어 달도 버틸 수가 없었으므로
66 강도의 군향미(軍餉米) 3만 석과 관서의 쌀 3만 9천 5백 석을 가져다 경비를 채우고,
67 또 강도의 쌀 2만 4천 석과 관서의 쌀 1만 5백 석을 가져오고
68 또 어영청의 보미(保米) 5천 석을 대여하여 진휼의 밑거리를 채웠다.
69 ○ 서울의 기근이 날로 심하여 한 섬의 쌀 값이 은으로 3냥이었으므로
70 진휼청이 쌀 8천 3백여석을 내되 한 섬의 값을 1냥 8전으로 정하고
71 또 목포로 계산하여 바치는 것을 허용하여 백성을 편리하게 하되 한 사람이 1냥을 넘지 못하게 하여 때를 타서 이익을 노리는 폐단을 막았다.
72 또 쌀 1만 2천 8백여 석을 내어 서울 백성에게 대여하되 호수를 계산하고 등급을 나누어 주었다.
73 대호(大戶)는 1석, 중호는 10두, 소호는 5두, 독호(獨戶)는 2두였고, 봉료를 받는 군사는 대호, 중호, 소호를 막론하고 모두 3두를 주었다.
74 이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자못 구제되었다.
75 ○ (이 정도이면, 먹을 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는 자는 역적으로 몰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76 ○ 6월 7일에 집의 이단하가 상소하여, 군정(軍政)을 변통하여 나라의 저축을 넉넉하게 하고
77 백성에게 곡식을 심도록 권장하여 개인의 저축을 늘리게 하기를 청하였다.
78 ○ 14일, 물가가 폭등하여 사대부도 굶주리다
79 ○ 17일, 경기 감사 오정위가 도내에서 진휼을 잘한 수령을 보고하였는데, 음죽 현감 이명빈에게는 숙마를, 포천 현감 이형식에게는 표리를 하사하고 김포 군수 강욱에게는 준직을 제수하였다.
80 ○ 7월 3일에 상이 묻기를 "곡식을 팔 때 값을 얼마로 정하였기에 간원이 논계하였는가?" 하자,
81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시장 가격은 쌀 한 섬에 은 6냥을 치고 콩은 3냥을 치는데 각각 1냥을 줄였습니다.
82 간원이 줄인 값이 시장 가격에 비하여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83 다시 의논하여 시장 가격에 비하여 반으로 줄여 팔기로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21 ○ 11월 10일에 경상 감사 민시중이 도내 수령 중에서 진휼을 잘한 자와 별도로 장만한 것이 많고 적은 것 등을 급을 나누어 아뢰었다.
2 성주 목사 조성은 진휼을 잘한 가운데서도 으뜸이었고 또 특별히 장만한 곡물이 무려 3천 40여 석이나 되었는데 가자하라 명하고 또 숙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3 그 다음은 진보 현감 윤명우, 청도 군수 유비, 영천 군수 이휘조, 비안 현감 이민도였는데 모두 가자하였고,
4 그 다음은 영덕 현령 이상정, 함양 군수 남몽뢰였는데 준직을 제수하였고,
5 그 다음은 상주 목사 이관 등 30명이었는데 승서하고, 각각 차등을 두어 말과 표리를 내렸다.
6 정언 정유악이 아뢰기를 "경상도 예순아홉 고을을 반이 넘게 죽 적어서 상을 주기를 바랬으니 자못 상세히 살펴서 분별하는 뜻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 또 아뢰기를 "곡물을 장만하고 진휼을 잘한 수령에게 넉넉히 포상하는 것은 본디 격려하는 지극한 뜻입니다마는,
8 경상도 한 도내에서 상받은 수가 37명이나 되니, 너무나 지나칩니다. 일컬을 만하게 뚜렷이 나타난 자 이외는 상을 주라는 명을 모두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9 청송 부사 김정하 등 8인은 별도로 장만한 것이 5백 석이 못 되었으므로 상을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었다.
10 그 뒤에 장령 윤계와 지평 김환, 권기 등이 '굶주려 죽은 참상은 영남이 더욱 심하였는데
11 옥관자의 상을 받은 자가 가장 많으므로 남녘의 백성들이 모두 분노하고 있다.' 하여
12 본도로 하여금 명백하게 다시 살피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휘조, 이민도는 이 때문에 가자를 도로 거두었다.
13 ○ 11월 15일에 진휼을 잘한 황해도의 수령을 논상하였다.
14 서흥 부사 이우주가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게 하고
15 연안 현감 이민장, 신계 현령 김홍진 등은 모두 승서하고
16 평산 부사 조성보에게는 숙마를 내렸다.
17 이때 이우주는 이미 죽었으므로 벼슬을 추증하였다.
18 지난 11일, 조대립은 면서원이었는데 전결을 속여 숨겼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조대립이 이우주를 죽였다.
19 ○ 12월 4일에 청나라의 사자가 함경도에 와서 회령, 경원에다 무역 시장을 열고 소 1백 20두와 소금 9백 20여 석과 가마솥 74개와 보습 9백 78장을 사가지고 돌아갔다.
20 ○ 현종 13년(1672) 1월 5일에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21 ○ 3월 29일,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의 기근은 옛날을 통틀어봐도 없었던 것인데다
22 신해년부터 올봄까지 돌림병이 크게 번져 2월 이후로 굶주림과 병으로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23 함경도가 7백여 명, 황해도가 4백 70여 명, 평안도가 4백여 명, 전라도가 4백 30여 명, 경기가 3백여 명, 충청도가 2백 60여 명, 경상도가 5백여 명, 원양도가 1백여 명이었다.
24 이때 상평청과 진휼청에서 진휼할 죽을 쑤는 곳을 나누어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는데,
25 조석으로 와서 먹는 자가 많을 때는 4천 3백여 명이었고 적을 때는 2천여 명이었다.
26 외방의 백성들은 먹을 곳이 없자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였는데 명화적처럼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27 그런데 민간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어 그들이 훔쳐 봤자 겨우 한 되나 한 말 밖에 안 되었으므로
28 길에서 장사꾼을 만나면 서로 앞을 다투어 죽이고 빼앗는데 호남과 영남 사이가 더욱 그들의 소굴이었다.
29 충청도 청주 등의 고을에서는 반 달 동안에 무려 열네 군데에서 인명이 살상되었다 한다.
30 ○ 4월 1일에 팔도에서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였다. 경상도에 굶주린 백성이 3십 3만이었는데 여러 도 중에서 가장 많았다.
31 ○ 2일에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경술년 조의 받아들이지 못한 전세를 받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32 두 해의 세금을 한꺼번에 받아 들이는 것은 비록 풍년이 든 해라 하더라도 마련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33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는가 하면 심지어는 세금을 받아들이는 색리가 차관 앞에서 자결하고 있으니,
34 여기에서도 백성의 실정이 절대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5 이미 받아들인 것 이외에 그 나머지는 특별히 면제하라고 명하신다면, 남은 백성들을 보전할 수 있고 은혜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36 상이, 이미 받아들인 것은 서울로 실어오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독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7 ○ (이스라엘의 경우, 예수 시대에 유대인들 또한 로마의 지배하에서 굶주림에 시달렸는데,
38 당시에 헤롯이 유대인이 이나면서 로마 황제의 군대를 이끌고 유대인의 왕노릇을 하고 있었다.
39 그 때에 유대인들로 부터 인정과 사정을 안 보고 세금과 사채 빚을 거두었고, 과부를 이용해 창기장사를 통해 강제로 동침케 하고 돈을 거두었다.
40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기를, "세금과 빚을 받치지 않으면 영원히 감옥에 가두겠다" 협박하고,
41 당시 헤롯의 성이였던 산위의 동네를 칭송하며, 헤롯과 로마에 세금 바칠 것을 주장하며,
42 세금을 적게 거두거나, 거두지 않는 세금징수원이였던 세리와 유대인들을 굴속에 감금하여 협박과 고문을 자행하며,
43 빚을 강제로 걷기 위해 갈릴리인 수만명을 학살하고,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 3천명 이상을 학살하고,
44 자칭 예수의 제자라는 바울은 유대인 전부를 학살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그 빼앗은 돈과 노예를 이용하여 로마시 화재를 복구하고, 콜로세움을 세우는 공을 세웠다.
45 어떤자가 말하기를 바울은 유대전쟁사를 기록한 요세푸스와 동일인이라고 하였다.
46 한국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자칭 기독교라 하고, 사채 빚과 세금을 복음이라 하니, 사람들이 많이 속았다.)
47 ○ 12월 13일에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숙천의 색리가 관청의 방출곡 3천여 석을 빈민에게 주지 않고
48 중간에서 가져다 판매하다가 손해를 보아 지금 갚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49 이같이 간교한 색리는 전례대로 변방 고을에 이주시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별도로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50 상이 이르기를 "색리는 효시하고 그 곡물은 전부 면제하라." 하였다.
22 ○ 현종 14년(1673) 11월 16일에 충청도 생원 김민도 등이 상소하기를 "대동법을 혁파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2 이때 호서에서 거둔 대동미로는 경상 비용이 부족했으나 조정에서는 더 부과하기가 어려워 바야흐로 혁파할 것을 의논하였다.
3 때문에 김민도 등이 상소하기를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는 1년에 1결당 부과되는 것이 무려 8, 9십 말이 되었으나,
4 지금 대동법은 1년에 부과되는 것이 다만 1결당 10말입니다.
5 원컨대 호남, 경기의 예에 따라 쌀 두 말을 더 납부하겠으니 그 법을 혁파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6 비국의 회계에 의거하여 그 말을 따랐다.
7 ○ 12월 18일에 부교리 신익상이 일찍이 사관을 맡았을 때 역사를 수찬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고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8 이어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그 대략에 "연이어 기근이 들어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려 하는데도 무릇 세금을 독촉해 거두는 것은 모두 백성을 못살게 하는 정치입니다.
9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려 세금을 부과하는 아약 첨정과
10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받는 백골 징포와
11 족속에게 대신 거두는 일족 침학의 폐단에 있어서는
12 실로 천하의 심한 고통이며 재앙을 불러오는 큰 뿌리입니다.
13 조사하여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서 어린이와 죽은 자에 대해 모두 탕척하고
14 도망자의 부자, 형제 외에 먼 일가를 침학하는 폐단을 모두 없애소서." 하였다.
15 ○ 또 아뢰기를 "조정이 백성들의 일을 두루 생각하고 환자[還上]를 감하여 받아들이도록 한 명령은 어느 해고 없던 적이 없었습니다.
16 그러나 토호는 세금을 독촉하여 거두어도 아무렇지 않는데 백성들은 전답을 팔아 빚을 갚고는 밤낮으로 원통하다고 울부짖으나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17 백성을 구휼하는 은택이 오막살이 집에까지 미치지 못하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18 1, 2년간 바치지 못한 것을 골라내어 모두 탕감하고 민심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19 ○ 또 아뢰기를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20 그러므로 수령을 정밀하게 선발하는 것이 오늘의 절실한 일인데 자주 수령을 바꾸니 진실로 큰 폐단입니다.
21 비록 시종에서 외직으로 나온 자라도 3년 안에는 체직하여 바꾸지 않도록 한다면 백성들이 입는 은혜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22 ○ 또 아뢰기를 "사론(士論)이 둘로 나뉘고 색목(色目)도 여러 갈래로 갈린 지 지금 백 년이 되었으나 화합될 날이 없습니다.
23 전하께서 이 습속을 타파하고자 한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24 그러나 붕당을 타파하는 데는 요령이 있습니다.
25 진실로 마음을 비워 처리하고 자기를 바르게 하여 솔선 수범하며 남북동서의 다름을 모두 잊고
26 다만 사정(邪正), 시비(是非)의 나뉨을 분명히 한다면 오늘날 뭇 신하들이 누가 마음과 뜻을 깨끗이 하여 전하를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27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현부(賢否)와 일의 시비를 도무지 성찰하지 않고 한갓 당을 미워하는 마음만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사람마다 의심하고 일마다 억측합니다.
28 이상은 말을 가려서 할 줄 몰라 광망 경솔한 것에 불과한데도 중죄에 처했고,
29 이민적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대략 진술한 것으로서 결단코 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한 번 폐해져서 죽음에 이르렀고,
30 기타 견책을 받은 조정의 신하가 전후로 잇달았습니다. 전하의 처분은 이미 지극한 공정성을 잃었으니,
31 남의 약점을 들춰낸 김휘의 상소가 있게 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32 민희에게 조금이라도 청렴하고 근신하는 절조가 있었다면 이숙의 논핵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33 권력이 상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 대신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면 김만중의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34 지금 시비의 근원은 따지지 않고 반드시 당파가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는 죄로 말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하니,
35 이것이 어찌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36 ○ 또 말하기를 "박천영의 과거시험 답안지에 이미 보태고 고친 흔적이 있으니 대계가 그를 삭제하자고 청한 것은 다만 국법을 엄하게 하고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37 그런데 지금 천영을 위해 신구(伸救)하는 소장으로 인하여 대신과 연신이 되풀이해 기어이 합격시키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38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었다면 이런 말은 필시 임금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39 ○ 19일,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일찍이 박천영의 재합격을 논열할 때에 신익상의 배척을 받았으니, 신의 직을 체직시켜 공론에 답하소서."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40 이조 참판 강백년, 참의 김익경이 또한 상소하여 사면했는데 이는 일찍이 김익렴을 관관에 의망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1 ○ 현종 15년(1674) 2월 23일 축시에 왕대비 장씨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42 ○ 29일에 대왕 대비와 중전이 모두 편찮은 증세가 있자, 약방 도제조 김수흥을 불러들여 약을 의논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43 이때 의관들을 나추한 일 때문에 김수흥이 불안하여 내국에 출사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명초한 것이다.
44 ○ 5월 16일에 유생 나석좌, 조현기 등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렸는데
45 그 대략에 "오삼계가 이미 남방을 차지하자, 몽고도 북경과 가까이 하지 않고 있으니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훈련하고 식량을 저축한다면
46 크게는 원수를 갚아 수치를 씻을 수 있을 것이고 작게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누설될까 염려해 비답하지 않았다.
47 ○ 6월 5일에 약방이 아뢰기를 "고기 반찬 없이 수라를 드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장례를 치렀으니 여느 때처럼 수라를 드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8 ○ 7월 1일에 포의 신 윤휴가 북벌의 밀소를 올리다.
49 ○ 8월 7일에 상의 기운이 몹시 지쳐 인삼차를 연거푸 들고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려 하다가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자, 뒷날 와서 기다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50 ○ 18일에 상의 병이 크게 위중해지더니 이날밤 해시에 창덕궁의 재려에서 승하하였다.
23 ○ 숙종 즉위년(1674) 10월 12일에 안주의 유민 임오금이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2 "먹을 곡식이 없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3 도신(道臣)이 이를 임금께 보고하였다.
4 이 해에 양서에 더욱 혹심한 흉년이 들고, 안주, 숙천 등 몇 고을은 거의 적지가 되어,
5 죽는 자가 서로 잇달았는데도, 수령이 숨기고 아뢰지 않았다.
6 임금이 비망기을 내리기를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데,
7 팔로가 흉년이 들어 대명(大命)이 멈추려 하고, 백성이 기한을 괴로와하며 스스로 목매어 죽기까지 하였으니,
8 더욱 당황하고 놀라 근심 걱정을 견디지 못하여 먹고 쉬는 것이 편치 않다.
9 각도의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나의 지극한 뜻을 체념하게 하여,
10 우리 적자(赤子)로 하여금 죽어서 구렁을 메우는 근심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극히 바라는 바다.
11 이 뜻으로 승지가 내 대신 글을 지어 즉시 분부하라." 하였다.
12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인심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위대하신 왕의 말씀만한 것이 없습니다.
13 관례에 따라 대신 짓게 하는 것은 도리어 문구(文具)로 돌아갈 뿐이니, 청컨대 비망기로서 직접 고하여 알리소서." 하니, 이 말에 따랐다.
14 ○ 각 고을의 군포, 역역, 전세, 대동미 등의 감세를 명하다
15 ○ 숙종 1년(1675) 1월 16일에 상이 말하기를 "근래 이들은 송시열을 죄주었기 때문에 장차 나라를 망치게 될 것이라 하니,
16 이제야 송시열의 세력이 두려운 것을 알겠다. 죄주지 않으면 거의 국가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17 ○ 22일에 시독관 이유가 상소한 유생을 귀양보내는 것이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한다고 극진히 말하고
18 또 말하기를 "접때 경연에서 송시열의 기염(氣焰)이 두렵다는 분부가 계셨으나
19 예전에는 양진이 죄받으며 태학 제생이 대궐을 지키며 울부짖었고,
20 이번에는 유생들이 마음으로 송시열이 어진 줄 알아서 이렇게 아뢰어 변명하거니와
21 송시열에게 무슨 기세가 있기에 사람을 시켜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하였다.
22 ○ 23일에 허적이 북한 산성 터에 김만기, 오시수를 시켜 살피고, 성을 쌓는 일을 의논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다 따랐다.
23 ○ 임금이 윤휴의 소를 허적에게 읽게 하고 상의하게 하였다.
24 소에 이르기를 첫째는 "지난 경술년, 신해년의 기근과 역질 때에 국가에서 조적곡을 흩어 주고 죽을 장만하여 구제하였는데
25 당초에 일체 탕감하라는 영이 있었으나 중간에서 유사에게 저지되었으므로 백성에게 신의를 잃은 것이 큽니다.
26 팔도에 사신을 나누어 보내어 읍리에 백성을 모아 덕의를 선유하고 그 문권을 내어다가 불사르고
27 또 어리거나 죽은 사람에 대한 징포를 면제하도록 하여 큰 은혜와 큰 신의를 보이소서.
28 탐포(貪暴)한 수령과 무단하는 토호도 검거하여 탄핵해야 합니다.
29 또 사방의 백성이 모두 제 뜻을 정부나 헌부에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30 둘째는 "예전에는 임금이 큰 일을 만나면 백성을 불러다가 크게 묻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31 세째는 "언로를 여는 것은 옹폐(甕蔽)된 것을 터서 민정을 통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고,
32 네째는 "우리 나라에는 선비를 뽑는 것이 오로지 과거에 달려 있으나, 과거법으로는 반드시 선비를 얻지 못합니다." 하고,
33 다섯째는 "근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조정의 분부를 수령이 거행하지 않습니다.
34 왕년의 환자는 일부를 줄여서 면제하고 전세, 대동은 반을 줄여서 받지 말라고 이미 명령이 있었는데도 명령을 봉행하지 않는 자가 있다 합니다.
35 어사가 갔을 때에 각별히 검거하고 핵실하여 그 벌을 중하게 시행하고
36 백성을 돌보아 교화하는 일을 맑게 이행한 자도 포상하여, 권장하소서" 하고,
37 여덟째는 "양반, 서얼을 불문하고, 그 가운데에서 선발하여, 사방의 재주가 특이한 자와 상서한 쓸 만한 사람 등을 직위하게 하고,
38 또 문무를 가리지 말고 효경, 대학 등의 글과 궁마, 차승 등의 기예를 강습하여 창을 들고 숙위하는 임무를 갖추소서.
39 그러면 오위의 제도를 회복할 수 있거니와, 인재를 널리 거두어서 급하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40 아홉째는 "걷는 것이 말을 타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말을 타는 것이 수레를 타는 것에 미치지 못하니, 수레는 군(軍)을 만들고 진(陣)을 세우는 나라의 대기(大器)입니다.
41 그러면 농사와 수송에도 반드시 크게 힘입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42 ○ 사방의 백성이 원통한 일을 정부 및 헌부에 하소연하는 일을 논하였는데,
43 권대운이 "이것은 난잡한 폐단이 있을 듯하고, 물은 것이 있어도 행하지 않는다면 백성을 속였다는 원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도 다 권대운의 말과 같았고,
44 윤휴는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고 시행할 수 없는 것은 버려둔다면, 백성도 사람의 마음을 가졌는데, 반드시 원망을 말하겠습니까?" 하고,
45 김석주는 "임금은 참된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데, 이것은 겉치레에 가깝고 또 익명서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46 윤휴가 말하기를 "대의(大意)가 좋다면 시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백성의 질고를 묻는 것을 폐단이 있다면, 전좌(殿坐)만 하셔도 되겠습니다." 하고,
47 허적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뜻인데, 어찌 겉치레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48 ○ 또 언로의 일을 논하였는데, 오시수가 말하기를 "의논이 같지 않은 자에게 각각 아뢰게 하는 것은 대간이 피혐하는 규례와 같으므로, 국가에서 분부할 일이 아니나,
49 붕당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같이 공격하는 일이 있으면, 국가에서 벌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50 허적이 말하기를 "제 소견에 따라 각각 상소하는 것은 그 다툼을 권장하는 방도이니 더욱 어지러움을 가져옵니다.
51 국가의 시비가 공정하고, 또 사유의 어른을 가린다면, 이런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52 ○ 또 과거에 관한 일을 논하였는데, 허적이 "폐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은 전에 이미 아뢰었습니다." 하고,
53 김석주가 말하기를 "이미 실정에도 힘쓰지 못하는데 과거도 폐한다면,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
54 다만 윤휴가 말한 식년시로 인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옳습니다. 식년시에 급제한 자가 초기를 쓰지 못하니, 한심합니다." 하였다.
24 ○ 2월 26일에 임금이 숭릉에 사사로이 제사한 이구천의 일을 물으매,
2 허적이 말하기를 "그 죄는 죽어도 아까울 것 없습니다." 하고,
3 윤휴가 말하기를 "무식한 자는 반드시 죽일 것 없습니다. 임금이 형벌을 쓸 때에는 강경한 자를 제거해야 마땅한데, 어찌 이들에게 시행할 만하겠습니까?" 하고,
4 허적이 말하기를 "귀한 자에게는 법이 이미 펴지 못하거니와, 천한 자에게도 너그러이 용서하면 기강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서겠습니까?" 하고,
5 윤휴가 말하기를 "형벌은 귀한 자를 용서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잔민을 용서하면서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6 윤휴는 반드시 송시열을 죽이려 하였으므로 말마다 이러하였다.
7 윤휴가 또 백성에게 뽕을 심고 수리(水利)를 일으킬 것을 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 ○ 30일에 윤휴가 또 허적, 권대운 등과 영칙(迎勅)하는 일을 다투었는데, 양편이 거의 싸움과 같았다.
9 윤휴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대신, 중신이 다 신의 말을 그르게 여기니,
10 전하께서 이 사람들과 나라의 일을 하시면 족한데, 머물러두어 무엇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사퇴하지 말게 하였다.
11 ○ 5월 16일에 청나라 사람 다섯 명이 두만강 가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한인으로서 영고탑으로 옮겨왔는데
12 너무나 굶주려서 거의 죽게 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밥을 빌어먹기 위하여 여기에 왔다." 하였다.
13 회령 부사가 군관을 시켜 한 말 남짓한 쌀을 가져다 주며 즉시 돌아가라 하고는 그들이 영고탑으로 옮겨온 까닭을 물으니,
14 그들이 답하기를 "영고탑의 갑군으로서 군공(軍功)이 있으면 예에 따라 인구를 상으로 주었습니다.
15 그런데 오왕의 군사가 일어난 뒤로부터는 한인이라 이름하면 모두 죽이려 합니다.
16 그런 까닭으로 가만히 조선에 의탁하고 싶지만 조선에서 거절함이 이와 같아서 처음 계획이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17 ○ 또 영고탑 가운데 갑군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금년 정월에 갑군 1천 명이 초출되어 대장이 영솔하여 갔었고, 남아 있는 군사는 늙고 약한 자 겨우 3백여 인 뿐입니다." 하고,
18 또 말하기를 "오왕의 군사가 대부분 몽고와 연합하여 청나라 군사를 여러차례 패퇴시켰으니, 중원을 회복하는 일은 가을 전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19 그래서 묻기를 "몽고는 청나라에 복속하고서 어찌 오삼계와 연합하였는가?" 하니,
20 그가 대답하기를 "몽고가 처음에는 청나라 군사를 따랐지만 청나라가 패전하여 오왕에게 투항하자 다른 몽고도 모두 청나라를 배반하고 오왕에게 투항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21 ○ 다시 묻기를 "청나라 군사가 패전하였으니 혹 우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겠는가?" 하니,
22 그가 대답하기를 "조선을 방비하고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거짓이 많기에 구원병을 요청할 수가 없다.' 합니다." 하였다.
23 다시 묻기를 "북경이 패전하면 황제는 어느 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니,
24 그들이 돌을 가지고 땅을 치면서 말하기를 "그러한 때를 당하면 우리도 황제를 때려죽이겠소." 하였다.
25 ○ (청나라에서는 한(漢)족이 자신들을 오랑캐라 하며 저항하여, 학살하였는데, 중국에서는 그 수를 5천만에서 1억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시기에 조선의 역병으로 죽은 자를 보면, 역병이 발생하여 죽은 자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26 ○ 5월 25일에 동래부의 임진년 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자손에게 천역을 면제시켰다.
27 ○ 윤5월 8일에 우참찬 허목이 송시열을 죽일 것을 상소하였다.
28 임금이 답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의리를 붙들고 인륜을 밝히었으니, 내가 매우 흠복한다. 어찌 체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29 허목이 기필코 송시열을 죽음으로 처치하고자 하여 화란으로써 임금을 움직이려 한 것이니, 듣는 자가 크게 놀라지 않음이 없었다.
30 ○ 15일에 옛 정승 송시열을 남변에 안치하고, 민정중과 이단하는 관직을 삭탈하여 성문 밖으로 내쫓았다.
31 대사헌 윤휴, 조사기, 유하익, 이항 등이 말하기를 "송시열이 북로에 있게 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순박한 풍속을 의란케 하였습니다.
32 그리고 민정중 등은 죄인의 괴수를 높이 받들고 바른 의논을 저지하여 억눌렀습니다. 아울러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3 송시열이 시를 지었으니, "서산의 피는 견디겠지." 하니, 사림이 서로 전하면서 외니, 당시의 무리들이 듣고는 더욱 미워하였다.
34 ○ 민정중은 정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아우 민유중과 더불어 함께 당시의 인망이 무거웠다.
35 남인들이 가장 꺼려하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 명목을 얻기가 어려웠다.
36 처음에 민정중이 윤휴와 더불어 교유하면서 마치 형제처럼 즐겼으며, 그러나 윤휴가 이미 출세하고서는 연이어 두 민씨를 탄핵하였으니,
37 그것은 허적이 민정중의 형제가 두 송씨가 자기를 공격한 소(疏)에 참여하지 않았나 의심하고 원망하였기 때문이다.
38 이에 사람들은 이를 '기르는 개에게 발꿈치를 물린 격이라' 고 말하였다.
39 ○ 6월 15일에 김수홍이 상소하여 서얼을 통용하기를 청하고,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 갚기를 청한 하였다.
40 당시 수상 허적이 아들이 없어서 서자로 적통을 이었는데, 김수홍이 허적의 뜻에 아부하였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었다.
41 또 청나라의 연호를 받든 것을 온 세상이 다 비웃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자'는 강론을 펴서 스스로 해명하려는 것이었다.
42 ○ (명나라와 상관없이, 조선 스스로 당한 치욕을 갚자고 했어야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역시 조선에 끼친 폐해가 적지 않았으니, 이를 참는 것은 치욕이 아닌가?)
43 ○ 7월 6일에 사간 조창기가 상소하기를 "우리 나라 붕당이 이미 1백여 년이 되오나, 화근이 날로 깊어가서 나라를 망친 뒤에야 그만둘 듯합니다.
44 지난날 서인들이 국정을 담당하였을 적에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여 억누르고 동류를 끌어들여 후원하매,
45 인심이 날로 변하고 풍속이 날로 박하여졌으니, 이는 서인들의 죄입니다.
46 ○ 동인에 관계되면 그 옳고 그름은 물을 것도 없이 발탁하여 혹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고,
47 명색이 서인이면 어질고 어질지 아니한 것도 물을 것 없이 억색하고 빈척하기를 마치 거제를 버리듯 하여서,
48 강한 자는 더욱 강하게 만들어서 한없이 펴게 하고, 약한 자는 더욱 약하게 하여서 기운을 잃어서 스스로 설 수 없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49 ○ 조창기는 선조 말년에 상소하여서 붕당을 없애기를 청하였는데, 간혹 맞지 않는 말도 있었다.
50 이때에 이르러 당시의 무리들이 조창기가 반드시 서인을 원망할 것으로 여겼으며,
51 또 그의 누이가 복선군 이남의 부인이 되었다. 이에 서로 다투어 칭찬하였다.
52 그러나 조창기는 그 농락을 받지 않고 소를 올려 바른 말을 하였다.
53 그러나 그 소가 다만 색목의 강약만을 말하였을 뿐 사정과 시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견식이 밝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4 그러나 남인들이 때를 타서 보복하고는 권력을 독단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고,
55 임금이 편벽되게 남인만을 사랑함을 말한 데 이르러서는
56 사람들이 다 통쾌함을 일컬었으나, 사당(邪黨)들은 크게 놀랬다.
57 ○ 9월 16일에 임금이 사대부로서 백성의 집을 빼앗아 사는 자를 기록해 아뢰어, 겨울철에 궁민(窮民)이 살 곳을 잃고 유이하는 근심을 방지하게 하였다.
25 ○ 숙종 2년(1676) 1월 7일에 허적이 말하기를 "윤휴가 고식(姑息)한 계책으로 상소하여 신을 배척하니, 신이 어찌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2 신은 윤휴와 견해가 다르니, 윤휴는 바로 중원으로 쳐들어가려고 하고,
3 신은 비밀히 준비하여 때를 기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4 누가 명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만, 시세로 보아 불가합니다." 하였다.
5 ○ 3월 21일에 어좌를 돈화문에 설치하고, 문과 9인, 무과 1만 4천 2백 7인을 창방하였다.
6 ○ 4월 25일, 처음 대흥산성을 쌓기를 의논할 때에, 조정 의논이 때가 좋지 않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겼는데,
7 허적과 훈련 대장 유혁연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8 군정(軍丁)은 훈국의 별대 5천여 명과 각색 공장 1천 1백 명을 쓰고, 군량은 강화 쌀 6천여 석을 썼고,
9 3월 5일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50일 만에 공사를 마쳤는데, 무릇 1천 5백 31첩과 주위가 4천 3백 37파이다.
10 ○ 12월 23일, 이 무렵에 적곡(糴穀)의 독촉으로 인하여 기읍에서 목매어 죽은 자가 있어서 영상과 좌상이 입시하여 아뢰고,
11 세후(歲後)에는 거두는 것을 멈추게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 무릇 근본이 되는 지역이라 사리로 보아 마땅히 넉넉하게 구휼해야 할 것인데,
13 지금 기민이 독촉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을 맨 자가 있고,
14 묘당에서 이를 듣고도 경동하는 일도 없었으며, 또한 그 수령을 구책(究責)하지도 않았다.
15 세후에는 거두는 것을 정지하는 것이 본래 상사로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써 백성의 원망을 풀고자 하니, 그 누가 속겠는가?
16 ○ 26일에 유명현이 임금이 장차 친정(親政)을 행하기를 상소하였다.
17 ○ 숙종 5년(1679) 11월 6일에 승지 강세귀가 내탕의 것을 내어 가난한 백성을 구호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18 ○ 숙종 6년(1680) 4월 5일에 정원로, 강만철이 상변하기를 "신 정원로는 허견과 더불어 숙종2년 부터 서로 사귀어 정의가 자못 두터웠는데,
19 작년 정월에 허견이 이태서와 더불어 신 강만철의 집에 모여서 복선군을 접견할 일을 더불어 의논하였고,
20 뒤에 이태서가 갑자기 신 정원로를 초청하기에 신이 나아가니 자리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복선군이었습니다.
21 그 훗날에 허견이 말하기를 '주상의 춘추가 젊으신데 몸이 자주 편찮으시고 또 세자가 없으니,
22 불행한 일이 있으면 대감(大監,복선군)이 임금자리를 면하려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니, 복선군이 대답이 없었습니다.
23 허견이 말하기를 '이제 나라가 망하려는데 반드시 잘 하여야 할 것이며, 당론을 마땅히 타파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24 신이 듣고는 고하려고 하였으나, 주상께서 영상을 신임하고 존중하시므로 무고했다는 죄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25 이제까지 주저하다가 이제 감히 숨길 수 없어서 감히 이를 자세히 아룁니다.
26 그때 왕래한 서찰로 허견의 편지 두통, 이태서의 편지 한 통, 복선군의 간갑 하나를 아울러 봉하여 올립니다.
27 신 강만철은 허견과 처형제 자매부 사이가 되는데, 신의 누이 동생이 죽은 것은 현종 3년에 있었습니다.
28 허견이 신을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고 신이 조금 의술을 아는 까닭으로써 영상의 풍병을 신에게 치료하게 하였는데,
29 허견의 하는 짓을 알지 못했으나, 작년 정월에 신이 강원도에 내려갔다가 아들의 병이 있음을 듣고 급급히 달려 돌아오니,
30 그 때 허견이 복선군과 더불어 처음 서로 보았고, 여름에 두 번째 보았다는 말은 정원로의 말을 인하여 들었기 때문에,
31 침묵할 수 없어서 감히 정원로와 더불어 동시에 와서 아룁니다." 하였다.
32 ○ 훈련 대장 김만기, 어영 대장 김석주를 인견하고 궁성을 호위하기를 명하였다.
33 ○ 12일에 비망기에 이르기를 "이남은 왕실의 지친으로서, 비록 모역을 하였다 하더라도 차마 나라의 형벌로써 처단할 수 없으니, 특별히 교수형에 처하게 하라." 하였다.
34 죄인 허견은 군기시 앞 길에서 능지 처사하였다.
35 ○ 26일에 이정을 사사하고, 국청을 폐지하였다.
36 ○ 8월 17일에 오시복은 정원로가 끌어들였으므로 잡혀들어왔으나, 명백한 증거가 없었고, 김우성도 또한 단서가 없어서 모두 석방되었다.
37 ○ 윤8월 10일에 정원로가 복주되었다. 정원로는 정지연의 서예였는데, 처음에 허적의 문객이 되었다.
38 허견과 깊이 교결하여 흉악한 역적 모의를 수창하였는데, 사건의 단서가 이미 나타나게 되자, 죽음을 두려워하여 상변하였으나 오히려 실토하지 아니하였다.
39 이때에 이르러 이원성에게 고발당하여 다시 국문이 베풀어졌으나, 말들이 모두 궤휼하여 분명하지 아니하였다.
40 강만철이 잡혀 들어오자, 강만철이 말하기를 "정원로가 일찍이 허견과 모의하여, 오정창의 딸을 후궁으로 바쳐서 내전을 동요시킬 계책을 꾸몄습니다." 하였다.
41 드디어 정원로를 장신하고, 또 강만철과 더불어 대변시키니,
42 비로소 자복하기를 "숙종 4년 즈음에 과연 허견과 더불어 강만철의 집에 모여 체부를 다시 설치할 일을 함께 모의하고,
43 드디어 갑병을 매복시킨다는 말을 스스로 만들어서, 이것을 가지고 조정을 경동시키려고 하였고,
44 또 이태서로 하여금 이원정, 윤휴를 부추겨서 마침내 다시 설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45 법으로는 능지 처참에 해당하였으나, 임금이 그가 상변한 공을 생각하여 특별히 처참하도록 명령하고, 또한 연좌시키지 말게 하였다.
46 ○ 윤8월 23일에 평안도 용천 사람 지기도의 딸이 나이가 19세였는데, 그 부모가 밭에서 돌아오는데 거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47 서로 대하여 통곡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48 ○ 숙종 6년(1680) 10월 26일에 중궁(인경왕후)이 두창 증세를 앓다가 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49 ○ 11월 1일에 날씨가 침침하였다.
50 흰 기운이 서쪽으로부터 중천에 뻗쳐서 그 모양이 혜성과 같았고 여러 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51 당시 국상은 혜성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났으므로, 이러한 이변의 출현 조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52 그 후에 장녀가 일개 폐희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왕후에 승진 하기에 이르러 화란을 끼쳤는데,
53 그녀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하늘이 조짐을 보여 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
54 ○ 숙종 7년(1681) 1월 28일에 용천 유학 장신한이 상소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要諦)는
55 힘써 예의(禮義)를 배우고 학교를 일으키고, 진퇴(進退)를 명백하게 하고, 법령을 살피고, 상벌을 엄정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고,
56 인해서 청하기를 "“서로(西路)의 읍재(邑宰)는 문관으로 차송(差送)할 것이며,
57 궁중의 시녀는 기간을 한정하여 보내어서 일생 동안 유폐당하는 원망이 없게 하소서." 하고,
58 또 말하기를 "양계(兩界)의 문사와 무사는 마땅히 청요직(淸要職)에 통용되게 해야 합니다." 하니,
59 임금이 "진언한 정상을 보아 내가 가납하겠다." 하였다.
60 ○ 12월 27일에 역적 허견 등으로부터 적몰한 노비 5백여 명를 충훈부로 옮겨 보내어, 원훈으로 하여금 여러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61 ○ (이 해에 인현왕후 민씨가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민씨의 아비는 여양부원군 민유증이다.
62 훗 날, 희빈 장씨에 의해 폐서인 되나, 복위하게 되니, 숙빈 최씨의 공이였다.
63 희빈 장씨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나, 일찍 죽었다.
64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 김씨와 인원왕후 김씨와 사이가 좋아, 그의 아들이 경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영조대왕이다.)
26 ○ 숙종 8년(1682) 1월에 전라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가 1천 5백 여 마리였다. (작년에도 전라도에서 수천마리가 죽었다.)
2 ○ 숙종 9년(1683) 8월에 함경도 감진 어사 심극이 도내의 수령으로서 곡물을 스스로 갖추어 진휼을 잘한 자를 초계하니,
3 길주 목사 목임기는 가자하고, 그 나머지에게도 말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4 ○ 숙종 10년(1684) 9월 25일에 비변사에서 황해도의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고을에는 여러가지 신역과 미포를 각각 3분의 1 감해 주고,
5 그 다음 고을 이하는 차등을 둘 것을 청하였는데, 도신(道臣)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6 ○ 10월 3일에 내탕미 50석, 목면 5백 필, 마포 3백 50필을 진휼청에 내려 명년 봄 진자(賑資,빈민을 구제에 필요한 물자)에 보충해 쓰도록 명하였다.
7 ○ 7일에 영의정 김수항이 말하기를 "호남의 피해가 여러 도에서 가장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23개 고을은 여러 가지 신역을 이미 전부 감하였는데,
8 비록 조금 나은 고을이라 하더라도 서울에 상납하는 곡물은 본도에 머물러 두도록 허락하여 진휼하는 데 보태게 하고,
9 서울 아문에서 대신할 곡물을 갖추어 보상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10 인하여 말하기를 "금년의 흉황은 팔도가 똑같으나, 호남이 더욱 심하니, 수십만 생명을 어떻게 구제해 살리겠는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였다.
11 ○ 12월 4일에 비변사에서 말하기를 "평안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겨우 재해를 입은 고을에서 거두는 쌀을 헤아려 감하도록 허락하였으나,
12 강변 여섯 고을은 생활이 간고(艱苦)한데다가 금년에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으니,
13 거두는 쌀 6두를 특별히 전감하여 변민(邊民)을 우대해 덕의(德意)를 보이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14 ○ 숙종 11년(1685) 1월 29일에 청하(淸河)의 해부(海夫)가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 죽은이가 일곱명이었다. 구휼하기를 명하였다.
15 ○ 2월 29일에 궁녀 25인을 내보냈으니, 이는 가뭄 때문이었다.
16 ○ 5월 11일에 평양성 안에서 실화하여 불타 없어진 인가가 거의 1천 호에 가까왔다.
17 감사가 이를 보고하니, 비국에서 관향미(管餉米) 5백 석을 나누어 주고 1년의 신역을 견감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
18 ○ 7월 1일에 승지 송창이 아뢰기를 "간성의 해부(海夫)의 아내 막개는 남에게 약탈되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19 그의 뜻과 절개가 높이 여길 만하니, 포상하여 장려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20 임금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계문하게 하였다.
21 ○ 8월 6일에 동부승지 이여가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조정의 의논들이 조용하지 못한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22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문치를 주로 하여 비교하자면 삼대의 주나라나 후세의 송나라와 같습니다.
23 그런데 그것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겨서 허위(虛僞)가 날로 증가되어 사물의 외모를 전례를 삼고, 전해오는 폐해를 경법(經法)으로 삼았습니다.
24 묘당은 전하께서 함께 나라의 일을 도모해야 하는데 진현(進見)하는 데 일정한 날이 있고 인접(引接)하는 데 성례(成例)가 있습니다.
25 그래서 좌우에 이들을 두어 정치를 깊이 연구하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26 대각은 전하의 귀와 눈을 붙이는 곳인데도 진부한 말로써 베껴서 아뢰거나 의례적인 말로써 보고하고 끝낼 뿐이고,
27 대관들은 위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낼 뿐 심원한 장래를 염려하여 나라를 자기집처럼 근심하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으며,
28 소관들은 아래에서 그럭저럭 되는 대로 지낼 뿐 마음을 다하여 직무에 종사하고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29 온갖 법도가 폐해지고 해이해져서 다시는 기강이 없어져서 국가의 큰 혜택은 간사한 이서들의 주머니에 돌아갑니다.
30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깊은 궁중에 거처하고 높은 곳에서 팔짱만 끼고 있으면서 문득 규도(規度)만을 따르고
31 차츰차츰 쇠미해지는 근원에 이르러서는 일체를 정리(整理)하지 않으십니다.
32 ○ 신의 소견으로는 지금의 폐단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형식적으로 미봉하는 것을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그 실상에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요
33 번쇄(煩碎)한 것을 덜어버리지 않고서는 그의 간편함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34 요컨대 실사(實事)로 실효를 책임지워야 하고 전하께서도 지성으로 몸을 가져 힘써 행하고 이를 인도하면
35 공경의 보필과 좌우의 시종신들이 어찌 게을리하는 습관으로 전하를 받들겠습니까?
36 대저 그런 뒤에야 전해 내려온 폐해도 조금은 변할 수 있으며 정치의 방법도 조금은 확립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37 ○ 전해 내려온 폐해는 심심풀이하는 쓸데없는 말이 성행하게 되고
38 실행하는 것은 없어지게 되어서 의논만 성하고 정치상의 공적은 무너지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39 선정신(先正臣) 이이가 이른바 '정치는 떠도는 의논에서 어지러워진다' 한 것이 이것입니다.
40 이 폐단이 이미 극도에 이르자, 동인과 서인의 색목(色目)이 나누어져서
41 온 세상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임진년의 패전에 이르렀고,
42 혼조(광해군)에 이르러서는 그 화가 이미 극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43 지금 번거롭고 바쁜 형세는 동인과 서인 때보다 도리어 심합니다.
44 처음에는 의견의 차이로 인하여 자기의 이기기를 힘써서 서로가 틀어지고 막혀서, 완전한 사람이 없는 형편입니다.
45 ○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지금의 폐단을 구제하는 데에는 믿을 수 없는 의논을 억눌러 줄이지 않고서는 조정을 화합할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46 이는 다만 전하께서 표준을 세워서 다스리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47 전하께서 갑과 을, 저쪽과 이쪽을 가슴에 두지 말고 다만 인재의 우열을 보아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시며,
48 돈후 질박을 숭상하고 경망 조급을 억누르시며 질직(質直)을 취하고 교식(矯職)을 물리쳐서
49 등용하고 않는 것이 이미 분명하고 형상이 이미 정당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징계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27 ○ 숙종 12년(1686) 1월 13일에 당초에 호남 백성들이 본읍의 전부(田賦)가 너무 지나치게 무거운 것은 꺼려하고,
2 내수사의 수세가 가벼운 것을 이롭게 여겨 토지를 억지로 내수사에 소속시켜 놓고, 내수사의 위호(位號)로써 양안(量案)에 달아 놓았었는데,
3 그 뒤 내수사에서 이를 움켜잡고 그 토지를 추심하고는 차인(差人)들이 그대로 그 수세를 균등히 분배하니,
4 백성들이 비로소 민망하게 여겨 앞을 다투어 세전의 문권을 가지고 호소하기를 마지 않았다.
5 암행 어사 김만길이 그 실정을 아뢰자,
6 임금이 양안에 달아 놓은 지 오랜 토지를 이제 갑자기 문권을 가지고 호소하는 것은 그 정상이 몹시 간악하다 하여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7 우승지 윤이도가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처음에는 비록 거짓을 꾸몄다 하더라도
8 그 세전의 문권이 다 함께 있고, 양안에 주인의 이름이 분명히 실려 있는데,
9 백년 뒤에 와서 하루아침에 빼앗긴다면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10 어찌 내수사의 약간의 토지를 삼아 먼 지방 백성의 무한한 원망을 사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11 임금이 드디어 전의 명을 거두고 각 고을에 명하여 감색(監色)을 정하여 수세(收稅)하여 내수사에 들이라고 하였다.
12 이때에 이르러 김수흥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는 전에 없었던 법규로서 뒷날에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13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만 내수사의 차인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4 ○ 숙종 12년(1686) 3월 28일에 명하여 김씨를 숙의로 삼고, 노비 1백 50명을 내려 주었다. 김씨는 곧 현감 김창국의 딸이다. 4월 26일에 입궐하였다.
15 ○ 6월 13일에 영의정 김수항이 진휼에 쓴 공명첩 값의 쌀을 다시 징수하지 말 것을 진달하고,
16 또 후궁에게 절급(折給)하는 공전(公田)이 너무 많아서는 아니되며,
17 사복시의 목장을 궁가에 절급하는 것을 윤허하지 말 것을 논계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18 ○ 19일에 지평 한성우가 아뢰기를 "근래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민가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폐단을 대신의 진달로 인해 모두 조사할 것을 윤허하셨습니다.
19 그러나 명례궁, 수진궁, 어의궁, 용동궁 및 명안 공주방의 것은 현종13년 이후에 절수한 것이므로 거론하지 말라고 하니,
20 궁중과 관부를 일체로 보는 의리에 어긋납니다.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모두 사정(査正)토록 하소서." 하니,
21 답하기를 "다섯 궁은 임자년(현종13년) 이후에 신설한 곳이므로 숙종9년의 전교에 의거하여 혁파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22 계해년 이후의 것은 저절로 조사 대상 속에 들어 갈 것이고,
23 명안 공주의 봉작은 임자년에 있었는지라, 일례로 함께 혁파한다면 남은 토지가 거의 없을 것이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24 ○ 11월 11일에 이 무렵 임금을 대신해서 지은 문사 중에,
25 '무관은 백성의 재물을 착취해서 치부하는 자가 많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26 임금이 사람의 청렴하고 탐욕스러운 것은 문관과 무관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글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27 ○ (이 일은 매우 옳다. 한국시대에 이르러, 각 부처와 각 정당의 소속 사람들은 모두 청렴 혹은 깨끗하다고 하지만, 자신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 깨끗할 수 있는가? 이러한 말을 하는 자는 모두 거짓된 자들이다.)
28 ○ 11월 17일에 상평청에서 아뢰기를 "숙종10년 겨울에 진휼청에서 구황촬요에 기재된 바 솔잎을 먹는 방법을 민간에 권유하였는데,
29 각 고을에서는 태만하여 이를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민간에서는 알지 못하고 실행하지 아니합니다.
30 이렇게 좋은 빈민구제 방법을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쇄하여서 민간에 널리 보급하도록 할 것이며,
31 향민 중에 모르는 사람이 많으면, 그 고을의 담당관리를 문책하고, 더욱 심한 고을은 그 수령을 처벌할 것입니다.
32 또 사방의 모든 산의 솔잎은 전례에 따라 채취를 허용한다는 뜻을 널리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3 ○ 12월 10일에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34 전에 역관 장현은 거부로서 복창군과 복선군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에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35 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워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은총을 받았다.
36 명성왕후가 곧 명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 이징의 아내 신씨가 자주 보살펴 주었다.
37 ○ 내전이 중전에 오르자 명성왕후에 아뢰기를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미안하니 불러들이소서" 하니,
38 명성왕후가 말하기를 "내전이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는데,
39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될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나의 말을 생각시오." 하였다.
40 내전이 말하기를 "어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헤아려 국가의 사체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명성왕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41 명성왕후가 승하한 후에 내전이 그 일을 말하고, 자의전도 또한 힘써 권하니, 임금이 불러들이고 총애하였다.
42 ○ 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43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 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다.
44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너는 마땅히 전교를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45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46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47 ○ 내전이 근심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의 딸이 뽑혀 들어왔으나,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48 얼마 있지 않아서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49 이때 징의 아내는 자의전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었는데, 자의전은 나이가 많은데다 또한 징의 아내를 믿으므로, 장씨를 사랑하고 내전과는 소원하였다.
50 이때 징의 아내는 안으로는 임금과 자의전에게 차츰차츰 참소하고,
51 밖으로는 그 아들 항으로 하여금 장씨의 형 장희재와 모의하여 정, 남의 여당과 결탁해서 중전을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하였다.
52 ○ 이에 앞서 계해년 3월 13일은 인조반정의 회갑이 되는 날이었다.
53 정명공주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어 조정 대신 이하의 관원이 모두 공주의 집에 모였는데,
54 기녀를 많이 모아 그들로 하여금 술을 따르고 가무를 하게 하였다. 그 중에 숙정이라는 자가 노래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55 술을 마신 후 손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숙정과 더불어 희롱하려 하였는데, 숙정의 남편이 곧 장희재였다.
56 장희재는 이때 포도부장으로서 대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몰래 숙정을 불러내어 달아나 버리니 어떤 사람이 여러 대신들에게 그 일을 고하였다.
57 좌의정 민정중이 '조정의 큰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술을 따르는 기녀가 먼저 달아났으니 사체가 놀랄 만하다.' 하고,
58 비국의 낭관으로 하여금 기녀를 불러내어 데리고 간 그 남편을 곤장으로 엄하게 다스리게 했다.
59 장희재는 이 일로써 독을 품은 것이 뼈에 사무쳤는데, 혹자는 '이 일이 또한 화의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60 ○ 가을에 부교리 이징명이 소를 올려 논하기를, "종사의 존망이 반드시 여기에 매여 있지 않다고 기필할 수 없으니, 방출할 것을 간곡히 청합니다." 하니,
61 임금이 답하기를, "잘못 전해진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62 그 후 대사성 김창협이 재앙을 만나 경계할 일을 아뢰었는데, 궁중에서 집을 새로 건축하는 일을 아뢰기를,
63 "어제 사헌부의 계(啓)에 대해 전하께서는 전해 들은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근래에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64 대목(大木)을 구하는 공사가 자못 민간에 출입하니 대간의 아뢴, '장인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운반하는 데 반드시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한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65 흑자는 말하기를, "임금이 장씨를 위하여 별당을 지으면서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다." 하였다.
66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하교하시고는 안으로는 급하지 않은 역사를 일으키고,
67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는 변명을 하시니,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고,
68 또 아뢰기를 "이징명의 소가 전하의 노여움을 거듭 범하자, 그 때의 성교는 전적으로 '척리' 한 조항으로써 죄를 삼으셨고,
69 아래의 한 가지 일은 잘못 전해들은 것으로 핑계대셨지마는, 전하는 얘기들이 끝이 없이 모두 궁중에 실지로 그 사람이 있다고 하니,
70 전하께서 이징명에게 노한 것은 실로 이 일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71 ○ 그 후 민암, 민종도, 이의징의 무리들이 장희재의 힘에 의지하여 끝내 기사의 변을 이루어
72 어진이를 죽이고 나라를 해쳐 종실의 제사를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고,
73 끝내는 내전을 사제로 물러나게 하고, 장씨가 대신 곤위에 올랐으니, 명성모후의 밝은 예견은 실로 역사상 없던 일이다.
74 그리고 우리 성상의 영명하고 강의한 자질로서도 오히려 이같이 전에 없던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었으니, 심하도다.
75 여자를 총애함이 마음을 고혹시키고 덕을 해침이여,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28 ○ 숙종 13년(1687) 3월 27일 시독관 김만길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말이 비록 윤선거를 절박하게 몰아세운 일이 있었기는 하지만,
2 모든 것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 나온 것이므로, 그의 아들이 사사로이 통탄할 일이 아닙니다.
3 윤증이 스승이라 하고 제자라 하며 송시열의 문하에 드나든 지 이미 수십년이 되었습니다.
4 이제 와서 그의 당이 많아진 것을 믿고서 배척할 생각을 하는 것은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고, 또한 불효한 일입니다." 하였다.
5 임금이 이르기를 "이 무리들이 이제 와서는 나양좌 등의 일을 이처럼 급급하게 구원하고 있으니,
6 겉으로는 높이고 속으로는 배척하고 있다는 말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7 ○ 4월 6일에 멀리 귀양간 죄인 민희가 순천의 배소에서 74세로 죽었다.
8 민희는 탐오하고 방탕하며 용렬하고 고루하므로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겼었다.
9 허적에게 붙어 정승 자리에 오르면서는 음흉한 계획을 조성하고,
10 옥후(玉候)가 위급해진 날을 당해서는 복선(복선군 이남)이 있다는 말을 했었다.
11 ○ 이 날에 전 판서 박신규가 57세로 졸하였다.
12 박신규는 거칠고 난폭하며 무식했고, 또한 고집스럽게 이기기 좋아하는 병통이 있었는데,
13 청렴 결백하기에 스스로 힘써 관절(關節)에 통하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자못 칭찬받았었다.
14 ○ 6월 16일에 대사헌 이수언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 교리 민진주가 전일의 복상(卜相)에 관한 일로 논하여 열거하게 되자,
15 전하께서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대신을 침해하여 몰아붙였다.'하면서 준엄하게 책망하시게 되었다고 하니, 지극히 개탄(慨歎)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16 민진주는 대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한 것이 아니라, 특히 거조(擧措)가 합당하게 되지 못했음을 들어 말했었습니다.
17 이는 어찌 유독 민진주만 그렇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당혹하게 되었던 것은 중외가 모두 그러했었습니다.
18 어찌하여 억눌러서 실정 이외의 분부를 내리시어 이처럼 좌절시킬 수 있겠습니까?
19 만약 언자(言者)를 좌절시키는 것을 가지고 대신을 위안시키는 길로 여기신다면, 더욱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20 ○ 또 이징명과 한성우의 상소가 설사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21 그들이 진언을 한 성의는 각기 나라 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22 한결같이 배척해 버리고 오래도록 은덕을 베푸는 낙점(落點)을 아끼셨습니다.
23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리켜 말하기를, 강직한 말로 성지(聖旨)를 거스리는 사람인데 아량 있게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하니,
24 도리어 성상의 덕에 누가 되고 있으므로,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25 무릇 이 두어 신하에 대해서는 통쾌하게 용서해 주시고 겸하여 수용하시어
26 다시 언관의 자리에 둔 다음에야 언로가 넓어지게 되고 성상의 덕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27 ○ 당초에 후궁 장씨의 어미는 곧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었는데 조사석이 젊었을 때에 사사로이 통했었고,
28 장가(張家)의 아내가 된 뒤에도 오히려 때때로 조사석의 집에 오갔었다.
29 동평군 이항은 또한 조사석의 종매의 아들이었는데, 조사석이 정승에 제수되자, 온세상이 모두 궁중 깊은 곳의 후원에 의한 것으로 여겼었다.
30 이수언이 문언박의 일을 인용한 것은 반드시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바로 기휘(忌諱)에 저촉하게 되었고,
31 이징명과 한성우는 또한 장씨를 논계한 사람들인데 연관지어 언급했기 때문에, 임금이 더욱 노여워 하여 비답의 뜻이 그처럼 화평하지 못했었다.
32 당초에는 '태아(太阿)를 거꾸로 들었다.[太阿倒特]'라는 네 글자가 있었는데,
33 승정원에서 삭제하였다. 이수언이 황송하게 여겨 상소하여서 인책하자, 임금이 즉각 체직하였다.
34 ○ 6월 29일에 여양 부원군 민유중이 58세로 졸했는데,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35 민유중은 성격이 강직하여 방정하고 총명하여 통달했었는데, 형 민정중과 함께 경술(經術)을 가지고 진출하여 사림들의 두터운 인망을 지녔다.
36 임금이 왕비를 그의 가문에서 정하였음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이 올바름을 살폈기 때문이다.
37 ○ 7월 14일에 사비(私婢) 명춘을 정려(旌閭)하도록 명했다.
38 명춘은 대구 사람인데 그의 지아비가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게 되자,
39 자신의 손으로 그 이웃 사람을 쳐 죽이고 주의 관가에 고하니, 주의 관가에서 의롭게 여겨 불문에 붙였었다.
40 나이 60세가 넘도록 굳게 절의를 지키므로 도신(道臣)이 치문하니,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41 ○ 숙종 14년(1688) 3월 23일에 정지화가 76세로 졸하였다.
42 정지화는 관직에 있을 때 엄숙함을 자못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하면 그쳐지는 효과가 있었다.
43 성품이 음악과 여색과 거문고와 퉁소를 좋아하여 분대(粉黛,곱게화장한 미인)가 좌우를 떠나지 않았으며,
44 즐겨 노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공무에 게을러 힘쓰지 않았으므로, 직위가 열경에 이르렀으나, 정책을 수립하여 밝힌 것이 없었다.
45 가세(家世)로써 입상하였는데,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은 시기를 만나자 곧 사임하여 체직되고 집에 있었다.
46 그러나 윤휴와 허목의 무리가 송시열을 죽이려고 할 때에 곧 차자를 올려 그들의 잘못을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47 사의가 밝고 정대하여 흉론이 조금 좌절된 것은 정지화의 힘이었다.
48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한 가지 일이 자못 정광필의 후손 된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49 젊어서는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늙어서는 사알(私謁)을 자못 행하였다.
50 ○ 숙종 14년(1688) 10월 27일에 왕자가 탄생하였으니 소의 장씨가 낳았다.
51 ○ 11월 10일에 사헌부에서 "고 도사(都事) 이인한의 아들 이용석이 스스로 신령스런 무당이라고 일컫고
52 요사스런 말로 대중을 미혹시키자, 다투어 전백을 가지고 남녀가 몰려들었습니다.
53 그 아비의 상사를 당하여서는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여염집에 드나들며 종적을 속이고 감추니,
54 청컨대 가두어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29 ○ 숙종 15년(1689) 1월 14일에 유학 유위한이 상소하기를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나라의 국본을 정하자고 청하는 이가 없습니다.
2 선왕의 법에 이르기를 '왕후에게 적자가 없으면 맏아들을 뽑아 세운다.'고 하였고,
3 어찌 유독 오늘의 일만을 너무 서두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4 전하께서는 빨리 결단을 내려 의심하지 마시고, 전하께 사자(嗣子)가 있음을 알게 하소서" 하고,
5 임금이 말하기를 "내 나이 30에 비로소 한 아들을 얻었으니, 비록 백성들이 무지하다 하더라도 기뻐하지 않음이 없거늘,
6 궁위, 친척들이 일찍이 치하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였다.
7 이돈이 아뢰기를 "이는 외정의 신하가 알 수 있는 바가 못됩니다." 하니,
8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에게 이미 명호를 정하였으면 나이 들기를 기다려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저절로 응당 행할 것이다.
9 그런데 유위한이 성급하게 곧장 청했으니, 이것은 국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이다."
10 그리고 적소에 있는 제신들을 논급한 것 또한 족히 책망할 것은 아니나,
11 뜻의 근원을 캐어보건대 은연중에 화를 조정에 전가시키려는 계획이 있으니, 몹시 괘씸하다." 하였다.
12 이언강 등이 아뢰기를 "유위한이 말한 것이 위험함은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니, 이를 어찌 유벌로써만 징계하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정배하게 하였다.
13 ○ 임금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원자의 명호를 세워 종사를 맡기고, 군신의 분수를 크게 정하였으니, 누가 감히 다른 뜻을 그 사이에 두겠느냐?
14 그러나 귀신과 물여우와 같은 음흉한 무리가 또 계속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면 마땅히 중률로써 다스리겠다." 하였다.
15 ○ 유위한은 다만 한 사람의 무뢰자일 뿐이었다. 정원에서 그 사람을 시험한즉, 스스로 그 상소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16 대개 한쪽편의 사람으서로 실지한 자의 지시를 받고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임금의 마음을 격동시켜 자기와 뜻이 다른 무리를 물리쳐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17 이 이후로부터 30년 사이에 일종의 흉악하고 간사한 무리가 걸핏하면 동궁에게 불리하다는 말로 당조의 제신을 얽어서 무함하였으니,
18 임보, 이잠의 말과 같은 것은 모두 유위한에게 근원을 둔 것이다. 통탄스럽다.
19 ○ 1월 15일에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다.
20 당시에 장씨에 대한 총애가 날로 성하였는데, 이항과 장희재가 민암, 민종도, 이의징 등과 체결해 관통하여 모의함에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
21 국가의 화가 장차 조석에 있어,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서 떨었다.
22 ○ 4월 21일에 대사헌 목창명, 응교 이식, 지평 정선명, 배정휘 외 8명이 청대하여, 송시열을 엄히 국문해서 빨리 나라의 형전을 바룰 것을 청하였다.
23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송시열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궁위 사이에도 변괴가 있으니, 대간이 다 논진한 다음 말하겠다." 하니,
24 목창명 등이 또 홍치상을 율에 의거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다.
25 이만원이 "홍치상은 위를 무함하는 부도를 범하였고, 송시열은 위복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베지 않는다면 법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하고,
26 목창명은 "송시열은 효묘(효종)의 죄인이고, 홍치상은 동조(東朝)의 죄인입니다.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극력 요청하였다.
27 심계량은 "전하께서 처음 홍치상에게 사형에 처하지 않을 것을 허락하고 그에게 사실대로 고하게 하였는데도 숨겼습니다.
28 그러다가 이사명과 대질하여 비로소 그 사실을 다 진술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전하를 끊은 것입니다." 하니,
29 임금이 말하기를 "말세로 올수록 인심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30 경들에게 발본 색원할 뜻이 있으니, 나도 말하고 들은 것이 있다.
31 궁위(宮闈,중궁)에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32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말하기를 「내전과 귀인은 복록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33 그러나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34 투기가 통하지 않게 되자 이러한 말을 만들었는데 삼척 동자인들 어찌 이 말을 믿겠는가?
35 그리고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 하였다.
36 조식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들에게 아버지이시고 내전께서는 신들에게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37 그런데 오늘 성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38 신이 바라는 바는 더욱 정가(正家)에 힘쓰고 화평에 힘을 다하여 주시라는 것뿐입니다." 하고,
39 이시만은 아뢰기를 "부인들은 귀천을 가릴 것 없이 으레 편색(褊嗇)한 이가 많습니다.
40 어찌하여 너그러이 참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41 이만원은 아뢰기를 "정가(正家)하는 방법은 상하가 모두 같습니다.
42 부인의 성품이 편색할지라도 반드시 교회(敎誨)를 받게 되어 무사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43 지금 이 하교는 삼가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인가 합니다." 하고,
44 강선은 아뢰기를 "중궁께서 원자에 대해 곧 자신이 낳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이 전하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45 임금이 더욱 노여워 말하기를 "중전의 마음이 이러하니 원자를 자기가 낳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46 임금의 의도는 귀인 김씨를 가리킨 것인데, 척언(斥言)하지는 않았다.
47 이시만이 아뢰기를 "이는 김수항의 죄입니다. 그러나 부인은 지식이 없으니 책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니
48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과 김수항이 서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다.
49 속담에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홍치상이 혼자서 한 일이겠는가?
50 이시만이 어떻게 감히 구해(救解)하려 한단 말인가? 이윤수의 말이 옳다." 하였다.
51 제신들이 이시만을 위하여 구해(救解)하는 이가 많으니,
52 임금이 "이시만은 무례하기 그지 없다. 통곡할 만하고 눈물 흘릴 만하다는 말까지 하여 마치 절의를 세우려는 자처럼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다. 파직하라." 하였다.
53 목창명이 "이시만이 결단코 다른 뜻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궁위 사이의 일은 반드시 대신들과 상세히 의논하여 조처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54 드디어 전지를 내리기를 "귀인 김씨가 김수항과 내외에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으므로 궁위의 일이 누설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55 그리고 주가(主家)와 교결하여 유언 비어를 날조하고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처치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56 ○ 22일에 홍치상을 교형에 처하게 전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가산은 적몰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57 ○ 귀인 김씨의 작호를 삭탈하고 교지를 소각한 다음 폐출하도록 명하였다. 김씨가 사제로 돌아갔다.
30 ○ 4월 23일, 이날은 곧 중궁의 탄신일이다. 신하들이 양전에게 문안하려 하니 임금이 받지 말라고 명하고,
2 이런 사실을 품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중궁 내관 주빈을 잡아다 추문하게 하였다.
3 승지들이 잡아다 추문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4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은데 경들이 종묘 사직을 위해 먼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5 승지들이 성비(聖批)가 매우 엄하다는 것으로 대죄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6 ○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김덕원, 민암, 심재, 이관징, 민종도, 이우정 등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7 "탄일에 문안을 올리는 것은 신자들의 상례인데 성명의 처분은 뜻밖에서 나온 것으로,
8 성심(聖心)이 무엇에 격분되어 갑자기 이런 전교가 있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9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종묘 사직의 원대한 장래를 염려하는 것은 진정시켜 화평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요,
10 사리를 어기고 종내 하여오던 상례를 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니,
11 답하기를 "치란과 흥폐는 모두 후비에게서 연유되는 것이다. 지금 궁위에 마음씨 곱고 정조가 바른 그런 덕은 없고
12 도리어 여곽(呂霍)의 패려스러운 행실만 있어서 평시의 언동이 모두 분노와 원망에 차 있었기 때문에 세월이 쌓여 갈수록 감화의 기대가 끊겨가고 있었다.
13 투기하는 마음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아 어찌할 수 없게 되어서는 스스로 선왕과 선후의 분부를 지어내어 생각을 멋대로 부렸다.
14 내 나이 30에 비로소 원자를 두었으니 이것은 종묘 사직의 무한한 복인 것이다.
15 경사스럽게 여기는 마음과 돌보아 아끼는 정이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16 그런데 원자가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매우 노여운 기색을 드러내며 도리에 어긋난 불평하는 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17 그리고 주가(主家)와 더욱 친밀히 지내는 것이 주도면밀하여 뒷날의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일찍 국본을 정한 것이다.
18 이런 사람이 일국의 국모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 구전을 상세히 조사하여 속히 거행해야 한다." 하였다.
19 권대운은 "부인은 으레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뭅니다. 서서히 진정시킨다면 어찌 감화시키기 어렵겠습니까?" 하니,
20 임금이 "감화시키기 어려운데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21 민암이 아뢰기를 "먼저 감화시키는 도리를 극진히 하고 나서 그래도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제신을 불러 조처하여도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22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이렇게 하시니 너무도 과합니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하였다.
23 이우정, 김덕원, 유하익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교한 방법으로 무함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경우가 일찍이 없었는데,
24 지금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자가 있다.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즉시 내보내라." 하였다.
25 ○ 4월 28일에 중궁의 유사에게 날마다 공진하던 물품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26 좌의정 목내선이 아뢰기를 "조석의 공물을 올리지 못하게 한다면 궁중의 식도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됩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하니,
27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이것 때문에 왔는가?" 하고는 끝내 듣지 않았다.
28 ○ 사신은 논한다. 목내선이 이미 강력히 간쟁하여 곤위를 부지시키지 못하였으면서 조석의 공물에 대해 규정하려 하였으니,
29 참으로 이른바 밥을 흩고 국물을 흘리는 것은 그대로 두고 마른 고기를 이로 끊는 작은 일을 따진다는 것이니, 또한 어긋난 처사가 아닌가?
30 ○ (어떤 도둑이 쌀을 훔치러 들어 갔다가, 쌀이 없음을 보고 쌀을 넣어 주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31 비록 죄인이라 해도, 사람의 마음은 비슷한 것이다. 사신의 논박은 옳지 못함이 아닌가?)
32 ○ 5월 2일에 왕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33 임금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오늘날 민씨는 허물을 지고 범한 것이 윤씨보다 더하고, 선왕, 선비의 하교를 지어 내어 종사에 죄를 얻었다.
34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제로 돌려보내니,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5 ○ 삼가 살펴보건대, 중궁은 왕후의 자리에 오른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36 안으로는 후궁의 투기와 이간이 있었고, 밖으로는 간신의 부추김이 있어서, 위험이 핍박하는 변에 빠져 폐출의 액운을 당하였다.
37 임금이 총애에 치우치고 분노에 과격하여, 잘못을 크게 드러내어 그 죄를 만드는 것에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
38 ○ 중궁이 소교를 타고 요금문으로 나가서 본 것으로 돌아가니, 따르는 이가 넓은 길을 메웠다.
39 (이 때 중궁의 나이 22세로, 장희빈과 싸우기 위해, 선조와 선후에 관한 꿈이야기를 하여, 장희빈에게 후사가 없음을 이야기 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하고 귀여웠는가? 생각해 보자.)
40 이조 좌랑 이현조는 통곡하였다. 이 때에 이현조는 국가의 대변을 당하고서도 간하지 않았는데, 다만 구구한 소절을 과시하려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비웃었다.
41 ○ 예조에서 말하기를 "중궁에 공상과 외방 물선을 봉진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42 이때 민종도가 이를 청하고 의기 양양하였는데, 길에서 사람들이 눈짓을 하였다.
43 ○ 5월 6일에 영의정 권대운, 예조 참판 유명현, 참의 유하겸이 명을 받들고 빈청에 모였는데,
44 임금이 "희빈 장씨는 좋은 집에 태어나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 인효 공검하여 덕이 후궁에 드러나 일국의 모의(母儀)가 될 만하니,
45 이에 올려서 왕비를 삼노니, 예관으로 하여금 일체 예절에 따라 즉각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46 권대운이 말하기를, "엎드려 전지를 보건대, 곤위가 이미 비었고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밑에 있는 사람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47 하지만 이는 중대한 일이므로 신과 예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의논해 정하도록 할 수가 없습니다.
48 이와 같이 한다면 사체가 도리어 가벼워지니, 2품 이상을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49 임금의 기색이 자못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수의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50 유명현이 말하기를, "권대운의 말은 그 일을 중하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순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51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전대의 역사를 보건대, 단지 승상, 어사만 불렀고 아조 비빈을 간택할 때에도 단지 삼공과 예관만 불렀기 때문에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52 ○ 6월 7일에 궁녀 가을헌을 참하였다. 임금이 대각에서 죽이기를 청한 논의를 허락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서 형을 집행한 것이다.
31 ○ 숙종 16년(1690) 3월 6일에 남원의 사인 신익룡의 아내 이씨를 정려하라고 명하였다.
2 이씨는 그 지아비와 함께 길을 가다가 도둑을 만나 신익룡이 칼을 맞아 죽어 가는데,
3 이씨가 말에서 내려 나아가 신익룡을 감싸 가려 자신이 여러번 찔려서 살갗에 온전한 데가 없었다.
4 도둑은 그들을 버려두고 갔고, 지아비와 아내는 다 살았다.
5 ○ 6월 16일에 원자를 왕세자로 봉하였는데, 이때 3세였다.
6 ○ 9월 15일에 정언 송정규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폐서인이 집으로 돌아간 뒤로는 친척이 서로 다니지 않아서 집안이 적막하고 잡초가 뜰에 찼으며
7 부리는 종이 적고 밖에는 어린 아이도 없습니다. 땔나무나 쌀의 어려움은 본디 돌볼 것도 없으나,
8 전하께서 그 괴로운 정상을 가엾이 여겨 별궁에 거두어 두고 옷, 양식, 찬물(饌物)도 대어 주어 은혜를 베푸소서" 하였는데,
9 답하기를 "금령을 업신여기고 앞장서서 상소하니,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10 ○ (당시에 폐비 민씨를 위한 상소를 하면 배척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일은 임금의 매정함을 보기전에, 상소한자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1 ○ 16일에 장씨가 왕자를 낳았는데, 낳은 지 겨우 열흘만에 죽었다.
12 ○ 10월 22일에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13 지난해에 이 명이 있었으나, 장렬왕후의 상제, 담제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책례를 치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거행하였다.
14 그 옥책문에 이르기를, "장씨는 일찍부터 아름다운 자태를 타고나고 훌륭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에 예를 갖추어 왕비로 책명한다." 하였다.
15 교명문에 이르기를, "장씨는 늘 내칙을 따라서 덕이 후궁 중에서 으뜸이니, 성품이 그윽하고 고요하고,
16 몸소 문안하여 대비를 섬기게 되더니, 마침 중궁 자리가 비었을 때에 존귀한 중전 자리에 합당하다." 하였다.
17 ○ 11월 10일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공명첩 2만 장을 만들어 팔도에 나누어 보내어 팔도록 하였다.
18 ○ 숙종 17년(1691) 2월 4일에 비국의 계청으로 인하여, 함경 도사를 급히 보내어, 본도의 곡식 1만 5천 석으로 영남의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게 하였다.
19 ○ 13일에 장령 손만웅이 말하기를 "금산의 사민 30여 인이 연명하여 정장하기를
20 '평안도에서 절수(折受)한 곳은 혁파를 허락하였는데, 본군의 세 면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흉년을 당하여 백성이 보존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21 공가(公家)의 둔전도 내어 주었는데, 민전이겠습니까? 국가의 사체에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22 ○ 4월 29일에 병조 판서 민종도가 말하기를 "금군이 장희재는 능히 군사의 고통을 잘 어루만져, 어거한다 하여 서운하게 여깁니다. 잉임(仍任)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3 민종도는 장희재를 심복으로 삼았으므로, 군사들의 뜻이 그러하다고 한 것은 임금을 속인 것이 심하다.
24 ○ 12월 3일에 북한에 성을 쌓는 이해를 의논하였는데, 대신이 강도의 성을 쌓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 하여 어렵게 여기니, 임금이 강도의 일이 끝나거든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25 ○ 21일에 양전에 명하여 삼남, 서북의 인재와 성삼문 등 육신의 후예도 수용하게 하였다.
26 ○ 숙종 18년(1692) 1월 27일에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서울 안의 사대부 중에 떠도는 말에 놀라고 동요되어
27 가족들을 이끌고 시골로 내려간 사람이 그 수효가 30집인데,
28 조사해서 물어보아도 자수하는 사람은 없고, '나는 가난해서이다.' 하고 '나는 시초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하여
29 각자가 덮어 숨기고 있어서, 마침내 사실을 핵실해 내기는 어렵고 한갓 소란만 더하게 됩니다." 하니,
30 전교하기를 "구별하여 죄를 논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우선 너그럽게 면죄해 주고,
31 이 뒤부터는 다시 놀라서 소란을 피우며 급급하게 도망가는 자가 있으면 무거운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을 법으로 정하여, 거듭거듭 신칙하라." 하였다.
32 ○ 대사헌 이현일이 상소하기를 "지금 조정 안에서는 옳음과 그름을 감히 분별하지 못하고 있어,
33 재상들은 굳이 성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 하고, 성상께서는 또한 재상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시어,
34 천하의 감히 옳음과 그름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조정에 모아 놓고 있으니, 어떻게 일을 해갈 수 있겠습니까?
35 무릇 일은 옳은 것은 잃지 말고서 지켜가야 하고 그른 것은 서슴지 말고 버려야 하는 법이니, 이는 위로도 곧고 아래로도 곧은 도리인 것입니다.
36 지난번 성상께서 '정직한 기개는 없어지고 이리저리 돌아보는 것만이 풍습이 되어버렸다.'고 하신 것이 또한 이와 뜻이 같은 것입니다.
37 대개 천하의 환난은 옳은 사람인 줄 알면서도 쓰지 못하고 그른 사람인 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법입니다.
38 어찌 간해도 시행해 주지 않고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데 구태여 떠들어대기를 그만두지 않아, 달이 지나고 해를 넘기도록 그칠 줄 모를 수 있겠습니까?
39 임금된 분은 또한 마땅히 그 하는 말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를 자세히 살펴보아, 옳은 말이라면 받아들여 써주고 옳지 않은 말이라면 배척하여 물리치는 것이 옳으며,
40 그가 하는 말을 써주지도 않으면서 그 사람을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하니,
41 답하기를 "진달한 말의 대의(大意)가 비록 좋기는 하지만, 일을 논할 적에는 살피지 않아서는 안되는 법이니,
42 다시 더욱 익숙하게 헤아려 보아 되도록 공평하고 성실하게 했으면 하는 것이 곧 경에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43 ○ 3월 8일에 전 대사헌 이현일이 시골로 돌아가려 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사관을 보내어서 만류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44 ○ 9월 26일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문신이 무신을 멸시하는 것이 이미 고질의 폐단이 되었으니,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45 무릇 순라 장관은 비록 대궐문 앞을 지나가게 되더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이 곧 군문(軍門)에서 통행해 오는 규정인데,
46 사관이 성내어서는 안될 자리에서 성을 내며 장황하게 승정원에 글을 써서 보냈고,
47 해사에서 추핵하기에 미쳐 마침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었다.
48 무신들을 능멸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낸 것이 자못 너무나 놀랍고 괴이하다.
49 해당 주서를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윽고 사간원에서 승지를 탄핵하여 체직하였다.
50 ○ 27일에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음죽 현감 안후윤은 길에서 과유(과거보려는 유생)를 만나게 되자
51 말에서 내리라고 꾸짖어 금지하다가 유생들이 분노하여 끌어내려 구타하여서 모욕하였으며,
52 안후윤이 두서너 사람을 잡아다가 다시 따져서 핵실해 보지도 않고 갑자기 형신을 가했습니다.
53 유생들의 소위도 진실로 어그러진 짓이지만 상사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형벌을 쓰기까지 하였으니, 자못 놀랍고 괴이합니다.
54 안후윤은 잡아다가 추문하고, 난동한 유생들은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과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5 ○ 10월 24일에 무신 장희재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주관하고 있는 총융청은 군수가 피폐하므로,
56 이미 병조 판서 민종도와 상의하기를, 본조의 은 1만 냥을 꾸어다가 교련관에게 주고
57 연경에 사신이 갈 적에 같이 가서 잘 처리하여 그 이득을 가지고 동을 무역해다가 주전하는 재료로 삼기로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58 이때 민종도와 장희재가 서로 안팎이 되어 마구 뇌물 주기를 오직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
59 ○ 12월 13일, 이때 도둑의 괴수 장길산이 양덕 땅에 숨어 있으므로, 포도청에서 덮쳐서 잡도록 했었는데 관군이 놓쳐 버렸었다.
60 대신이 그 고을 현감을 죄주어 다른 고을들을 경계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2 ○ 숙종 19년(1693) 4월 26일에 최씨를 숙원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최씨는 희빈 장씨를 내쫗고 인현왕후를 복귀시키는데 큰 역활을 한다. 숙원은 내명부 품계에서 제일 낮은 종4품이다.)
2 ○ 5월 15일에 대사헌 이현일이 부름을 받고 강외(江外,한강 밖)에 도착하니, 속히 도성에 들어오도록 명하고, 월급으로 주는 곡식과 땔감과 숯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3 이현일이 들어오니, 임금이 인견하고 선온(宣醞)으로 그를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4 ○ 18일에 대사헌 이현일이 집안을 바로잡고 자신을 수양하는[正家修身] 뜻을 유추해서
5 말하기를 "궁곤(宮梱,궁중)을 바로잡아 청탁을 막으며, 인척을 단속하여 화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6 ○ 6월 7일, 이때 경덕궁에 한창 수리하는 역사가 있었는데, 부수찬 정시윤이 고향에서 입조하여
7 상소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진술하기를 "원주 지경에 노소(老少)의 인민들이 아람드리 나무를 끌어내느라고 길가의 곡식을 손상시키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8 그것을 물었더니, 경덕궁을 수리하는 데 나누어 배정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9 전하께서 구중 궁궐에 깊숙하게 거처하시면서, 백성들이 시름하고 한탄하는 상황을 어떻게 모두 알겠습니까?" 하니,
10 비답하기를 "백성들이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은 참으로 나의 과실인데,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1 ○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을 돌보는 것이라 하겟는가?
12 그러나, 나무를 끌어낼 때에 곡식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관리를 했어야 옳으니, 임금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관리의 잘못이다.)
13 ○ 10월 6일에 왕자가 탄생하였는데, 소의 최씨가 낳았다.
14 ○ 11월 18일에 홍중하가 아뢰기를 "왜인이 이른바 죽도(竹島)는 바로 우리 나라의 울릉도(鬱陵島)입니다.
15 지금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버린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리 명확히 판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 그리고 또 만약 저들의 인민(人民)이 들어가서 살게 한다면 어찌 뒷날의 걱정꺼리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17 목내선, 민암은 아뢰기를 "왜인들이 민호를 옮겨서 들어간 사실은 이미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18 이것은 3백 년 동안 비워서 내려둔 땅인데, 이것으로 흔단을 일으키고 우호를 상실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민암 등의 말을 따랐다.
19 대체로 울산의 고기잡이 하는 사람이 해변에서 표류하여 울릉도에 이르렀는데,
20 섬 위에는 세 봉우리가, 하늘에 닿아 있고 섬 가운데는 수십 호되는 인가의 허물어진 터가 있었으며,
21 초목으로는 대나무와 갈대가 많았고 날짐승과 길짐승으로는 까마귀, 소리개, 고양이, 너구리, 살쾡이가 많았는데,
22 왜인들이 잡아가는 바가 되었으며, 그 섬으로부터 백기주까지는 7주야가 걸린다.
23 이때 왜가 국경을 침범한 죄로 고기잡는 사람을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24 태종조의 재신 신숙주가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 살펴보고 그곳의 형지를 기록하여 왔었는데,
25 지금 고기잡이 하는 사람이 말한 바가 그 기록에서 말하는 것과 서로 부합이 되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것은 분명 울릉도라고 여겼지만,
26 묘당에서는 버려둔 땅과 같이 여기고 분변하여 다투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 계책이 잘못되었다.
27 ○ 12월 13일에 새로 태어난 왕자가 졸하였다.
28 ○ 24일에 전 좌의정 조사석이 귀양간 곳에서 62세로 졸하였다.
29 조사석은 조정에 벼슬하면서 시속을 따라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었으므로,
30 언어와 의논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동평군 이항의 무리와 결탁하여 정승의 지위에 임명되기를 도모하기까지 했으므로, 더욱 비루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었다.
31 뒤에 왕비의 지위가 뒤집힌 것도 화단이 실제로 조사석에게서 비롯되었으므로,
32 조사석이 마음에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여 몰래 알선하여 지난번의 잘못을 속죄하려고 하다가
33 흉당들에게 발각당하여 죄를 얽어 고성으로 멀리 귀양가게 되었는데, 근심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것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33 ○ 숙종 20년(1694) 2월 23일에 숙종 19년 봄에 울산의 고기잡이 40여 명이 울릉도에 배를 대었는데,
2 왜인의 배가 마침 이르러, 박어둔, 안용복 2인을 꾀어내 잡아서 가버렸다.
3 그 해 겨울에 대마도에서 정관 귤진중으로 하여금 박어둔 등을 거느려 보내게 하고는,
4 이내 우리 나라 사람이 죽도(竹島)에 고기잡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는데,
5 그 서신에 이르기를 "귀역의 바닷가에 고기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의 죽도에 배를 타고 왔으므로,
6 토관이 국금을 상세히 알려 주고서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이 알렸는데도,
7 올봄에 어민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8 토관이 그 2인을 잡아두고서 한때의 증질(證質)로 삼으려고 했는데,
9 본국에서 번주목이 동도(東都,일본의 수도)에 빨리 사실을 알림으로 인하여,
10 어민을 폐읍(弊邑,대마도) 에 맡겨서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11 지금부터는 저 섬에 배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두 나라의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12 ○ 예조에서 회답하는 서신에 이르기를 "폐방에서 어민을 금지 단속하여 외양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니
13 비록 우리 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또한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그 밖의 섬이겠는가?
14 지금 이 어선이 감히 귀경의 죽도에 들어가서 번거롭게 거느려 보내도록 하고,
15 멀리서 서신으로 알리게 되었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정의는 실로 기쁘게 느끼는 바이다.
16 바다 백성이 고기를 잡아서 생계로 삼게 되니 물에 떠내려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마는,
17 국경을 넘어 깊이 들어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는 것은 법으로서도 엄하게 징계하여야 할 것이므로,
18 지금 범인들을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과하게 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 엄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하도록 할 것이오." 하였다.
19 ○ 이내 교리 홍중하를 접위관으로 임명하여 동래의 왜관에 이르게 했는데,
20 귤진중이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서신 중에 '우리 나라의 울릉도란 말'을 보고는 매우 싫어하여
21 통역관에게 이르기를 "서계에 다만 죽도라고만 말하면 좋을 것인데, 반드시 울릉도를 들어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면서,
22 이내 여러 번 산개(刪改)하기를 청하고는, 사사로이 그 따라온 왜인을 보내어
23 대마도에 통하여 의논하기를 거의 반 달이나 되면서 시일을 지체하여 결정하지 않으므로,
24 홍중하가 통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책망하니, 따라온 왜인이 사사로 통역관에게 이르기를,
25 "도주는 반드시 울릉이란 두 글자를 깎아 버리려고 했으니, 난처한 일이 있는 듯하며,
26 또한 자세히 고치기를 청하는 정관의 서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절로 이와 같이 되었다." 하고는,
27 또 번갈아 근거 없는 말을 하면서 다투므로, 우리 조정에서 마침내 들어주지 않았다.
28 ○ 귤진중이 꾀가 다하고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그제야 서계를 받고서 돌아갔다.
29 이에 울릉도에 배를 정박했던 사람을 치죄하여 혹은 형신하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30 ○ 후에 승지 김만귀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옛날에 강원 도사가 되었을 때,
31 바닷가에 이르러 거주하는 사람에게 울릉도를 물었더니 가리켜 보이므로,
32 신이 일찍이 일어나 멀리서 바라보니 세 봉우리가 뚜렷했는데, 해가 뜰 때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33 이로써 영암의 월출산에서 제주를 바라본 것에 비한다면 오히려 가까운 편입니다.
34 신은 마땅히 이 섬에 진을 설치하고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35 지난번에 고기잡는 사람을 귀양보낸 일은 아마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36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또한 소견(所見)이 있도다." 하였다.
37 ○ 사신은 논한다. 왜인들이 말하는 죽도란 곳은 곧 우리 나라의 울릉도인데,
38 울릉이란 칭호는 신라, 고려의 사서와 중국 사람의 문집에 나타나 있으니 그 유래가 가장 오래 되었다.
39 섬 가운데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또한 죽도란 칭호가 있지마는, 실제로 한 섬에 두 명칭인 셈이다.
40 왜인들은 울릉이란 명칭은 숨기고서 다만 죽도에서 고기잡는다는 이유를 구실로 삼아서,
41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말을 얻어서 그 금단을 허가받은 후에 이내 좌계(左契,약속한 서계)를 가지고서 점거할 계책을 삼으려고 했으니,
42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서계에 반드시 울릉이란 명칭을 든 것은, 그 땅이 본디 우리 나라의 것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43 왜인들이 반드시 울릉이란 두 글자를 고치려고 하면서도, 끝내 죽도가 울릉도가 된 것을 드러나게 말하지 않는 것은,
44 대개 그 왜곡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스스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45 조종의 강토(疆土)는 남에게 줄 수가 없으니 명백히 분변하고 엄격히 물리쳐서 교활한 왜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할 것이 의리가 분명한데도,
46 주밀하고 신중한 데에 지나쳐서 다만 견제하려고 한 것이 범인들에게 과죄하는 말과 같이, 더욱 이웃 나라에 약점을 보였으니, 이루 애석함을 견디겠는가?.
47 ○ 이해 여름에 남구만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동래 부사의 보고에 왜인이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우리의 죽도에 마땅히 다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48 신이 지봉유설(이수광이 저술한 책)을 보니, '왜놈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했는데, 의죽도는 곧 울릉도이다.’라고 했습니다.
49 지금 왜인의 말은 그 해독이 장차 한정이 없을 것인데, 전일 왜인에게 회답한 서계가 매우 모호했으니,
50 마땅히 접위관을 보내어 전일의 서계를 되찾아와서 그들이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일을 바로 책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51 신라 때 이 섬을 그린 그림에도 또한 나라 이름이 있고 토공(土貢,토산물)을 바쳤으며,
52 고려 태조 때에 섬 사람이 방물을 바쳤으며,
53 우리 태종 때에 왜적이 침입하는 근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안무사를 보내어 유민을 찾아 내오게 하고는,
54 그 땅을 텅비워 두게 했으나, 지금 왜인들로 하여금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55 조종의 강토를 또한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56 ○ 신여철은 아뢰기를 "신이 영해의 어민에게 물으니 '섬 가운데 큰 물고기가 많이 있고, 또 큰 나무와 큰 대나무가 기둥과 같은 것이 있고, 토질도 비옥하다.'고 하였는데,
57 왜인이 만약 점거하여 차지한다면 이웃에 있는 강릉과 삼척 지방이 반드시 그 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니,
58 임금이 남구만의 말을 들어 써서 전일의 서계를 돌려오도록 명하였다.
59 ○ (이 한가지 일로서, 숙종은 조선과 한국을 살렸으니, 위대한 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34 ○ 4월 5일에 유집일이 논하기를 "조사기는 방자하게 상소하여 선후를 무욕하였으므로 성상께서 시원히 강단하여 방형(邦刑)을 바루셨으나,
2 그때 조사기를 구제하려던 자만은 형벌을 면하였으므로, 살펴 내어 경중에 따라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3 조사기를 구제하려 한 것은 김덕원, 이현일인데, 정원에서 상고하여 아뢰니,
4 임금이 이현일은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고, 김덕원은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5 ○ 6일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전에 대신이 송시열의 죄상을 열거한 것은 한둘뿐이 아니나,
6 임금을 낮추고 계통을 어지럽힌 말은 국가에서 전에 이미 밝혔거니와
7 이것은 저들이 위협하여 복종시키려는 제목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니, 어찌 따질만하겠는가?
8 종묘를 망령되게 논한 일은 더욱이 아주 뜻밖이니, 많은 말을 할 것도 없다.
9 다만, 숙종 15년의 상소 가운데에 병들어서야 비로소 태자를 책봉한다는 따위 말이 있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으므로,
10 당초에 벌받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인데, 내가 평정한 마음으로 찬찬히 살피니,
11 송시열은 효종의 특별한 대우를 가장 많이 입었으므로 보답하려는 정성이 남보다 뒤지지 않는데, 어찌 다른 뜻을 가졌겠는가?
12 반드시 한때의 망발일 것이니, 전일의 처분이 마땅하지 못하여 원망을 품지 않겠는가?
13 이 때문에 마음에서 스스로 생각하며 회한(悔恨)하였다.
14 지금에 와서는 뭇 억울한 일이 다풀렸으니 은전이 있어야 마땅하다. 특별히 복관하고 사제(賜祭)하여 내 뜻을 나타내라." 하였다.
15 ○ 7일에 정원에서 아뢰기를 "이시도가 밤중에 종 네 사람을 거느리고 포도 대장 장희재의 집에 곧 들어가 가슴을 잡고 욕하고 패도를 뽑아 찌르려 하였는데,
16 가동(家僮)들이 일제히 구원하여 면할 수 있었고, 이어서 이시도를 묶어 공초를 받고 놓아 보냈습니다.
17 대저 이시도는 정배된 죄인으로서 곧 길을 떠나지 않고 대장의 집에서 변을 일으켰으므로 일이 매우 놀라우니, 해부를 시켜 도로 가두고 핵실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18 대장이 사사로이 난장을 쓰고 공초를 받고 보낸 것도 흐릿한 일이니, 장희재는 추고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19 ○ 9일에 비망기를 내려 "거센 신하의 흉악한 잔당이 감히 폐인을 신구(伸救)하는 자는 역률로 논단하겠다고 중외에 포고하였는데,
20 이것은 오로지 신설(伸雪)하고 복위(復位)하여 우리 나라의 일을 어지럽히는 것을 엄히 막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21 그러나, 예전부터 임금은 이러한 일에 대하여 이미 죄를 밝혀 폐출하였더라도 반드시 참작하여 선처하고 은위를 아울러 베풀어서 너그러이 용서하는 도리를 손상하지 않았다.
22 지난 해에 한 대신이 폐인을 별궁으로 옮겨 두자는 일로 차자를 올리기에 윤허한 바 있었으나,
23 다시 생각하니 폐치한 지 오래지 않고 세자가 아직 아보(阿保,보모)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24 이렇게 처분하는 것은 너무 갑작스러움을 면하지 못하므로, 우선 정침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25 이제는 은례(恩禮)가 아주 없을 수 없으니, 해조를 시켜 별궁에 옮겨두고 수직하고 늠료를 주는 일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26 ○ 임금이 "고 판서 민종도는 자신이 재상줄에 있으면서 널리 당여를 심고 어진이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되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27 악을 엄하게 징계하는 도리로서는 이미 죽었다 하여 내려둘 수 없으니, 관작을 추탈하라." 하였다.
28 민종도는 탐욕하고 방종하며 음흉하고 간사하여, 죄가 민암보다 더한데 집에서 죽고 끝내 처형을 면하였으므로, 인심이 모두 추한(追恨)하였다.
29 ○ 10일에 장령 유집일, 지평 김시걸이 논하기를 "유명천은 음흉하고 교활하며 대대로 그 악을 행사하며 마음대로 위권(威權)을 농락하고 경재(卿宰)를 부렸습니다.
30 무릇 임금을 협박하고 진신(搢紳)을 함부로 죽인 죄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며 탐욕하고 방자한 정상을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가,
31 흉악한 무리와 맺고 비밀한 일을 꾀한 것은 거리의 논의가 민암, 유명천이라고 지목하니, 민암과 유명천은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32 뭇 간사한 자가 내쳐졌고 민암은 그 우두머리로서 이미 위리 안치의 형벌을 받았으니,
33 유명천이 어찌 집에서 누워 쉴 수 있겠습니까? 극변에 안치하소서." 하니, 따랐다.
34 ○ 임금이 하교하기를 "그 억울함을 이미 알았는데, 어찌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신설하지 않겠는가? 전 감찰 연최적을 특별히 복직하라." 하였다.
35 ○ 11일에 금부에서, 장희재의 집에서 소란을 일으킨 일을 이시도에게 물으니,
36 이시도가 대답하기를 "수금(囚禁)에서 벗어난 날에 내가 종을 보내어 장희재에게 문안하였더니,
37 장희재가 서로 만나기를 바라므로, 장희재에게 가니, 장희재가 술을 먹이고 무릎을 가까이하여 앉아서 나를 변변치 못하다고 책망하였습니다.
38 수작할 즈음에 장희재가 갑자기 크게 노하여 사람을 시켜 나를 끌어내려 묶어서 발에 매를 쳐서 발가락이 죄다 부러지게 되었고,
39 이어서 포청에 잡아가서 불쑥 들어와 욕하고 가슴을 잡고 칼을 뽑은 것을 죄라 하였으나,
40 나는 '본디 그런 일이 없고 취하여 기억하지도 못한다.' 하였습니다.
41 장희재가 다시 자기 집으로 메어 가게 하여 매를 맞는 곳을 다시 살펴본 뒤에야 놓아 보냈습니다." 하였다.
42 이것을 포도 군관에게 물었더니, 말하는 것이 이시도와 거의 같았고, 가슴을 잡고 욕한 것은 모른다고 하였다.
43 금부에서 의주하기를 "이시도는 과연 범한 것이 있더라도, 바야흐로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되어 있는 중이니, 가벼운 죄는 따질 것 없겠습니다." 하니,
44 판비하기를 "장희재가 이시도와 대좌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면, 불쑥 들어온 것이 아닌데,
45 감히 조정에 품하지 않고 마음대로 형벌을 썼으므로, 방자하고 꺼리는 것이 없으니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46 ○ 12일에 비망기를 내려, "국운이 안태를 회복하여 중곤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의 의리이다.
47 장씨는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가 문안하는 예는 폐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48 ○ 임금이 장형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 교지를 불사르라고 명하고, 또 장씨의 왕후 옥보를 부수라고 명하였다.
49 ○ 17일에 장희재를 잡아 하옥하고 엄하게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50 이때 민암과 민장도를 대질하니, 다 말하기를 '한결같이 함이완의 말대로 작은 종이에 써서 위에 아뢰었을 뿐이다.' 하였으나,
51 함이완은 '민암, 민장도가 나를 협박하여 증좌를 만들게 하였다.' 하였으므로,
52 임금이, 민암 부자가 전에 거짓말을 만들어 금중에 흘려 들여 '왕비가 본제에 있을 때에 귀인과 함께 은화를 내고 액정(掖庭)과 맺었다.' 하였으므로,
53 이것을 먼저 민암, 민장도에게 물으라고 명하였으나, 민암, 민장도는 승복하려 하지 않았는데,
54 임금이 또 그 말이 장희재의 언서(諺書)에서 나왔다 하여, 드디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55 ○ 비망기를 내려 "죄인 궁녀 정숙은 사람됨이 간독하고 온갖 악을 다 갖추어,
56 임금을 업신여기고 제 뜻을 방자하게 행하고 허무한 것을 날조하고 조금만 원망이 있으면 반드시 갚으므로,
57 작년에 절도로 귀양보냈으나, 그가 범한 것을 논하면 여기에 그칠 수 없으니, 해조를 시켜 빨리 방형을 바루라." 하고,
58 또 하교하기를 "나인 영숙은 정숙과 악을 같이하고 서로 도왔으니, 놀랍고 놀랍다.
59 그 단서가 같지 않으나 경중의 구별이 없지 않으니, 한 차례 엄하게 형신하고 절도에 정배하라." 하였다.
60 ○ 국청을 설치하여 김인 등을 국문하였다.
61 ○ 24일에 비망기를 내려 "기사년의 일을 생각하면 절로 속에서 부끄러워진다.
62 진정을 살피지 못하고 말만 들추어서 양좌(良佐)를 잘못 의심하여 드디어 은례(恩禮)가 떨어지고 억울한 마음이 펴지지 못하게 되었는데,
63 내가 일찍이 평심으로 찬찬히 살피고 멍하니 깨달아 크게 뉘우치고 자나깨나 불안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어찌 오늘에 그치겠는가?" 하였다.
64 ○ 25일에 기사년 왕비를 폐출할 때의 영의정 권대운, 민암 등을 위리 안치 극변에 귀양보내다
35 ○ 이때 국청에서 김인이 말하기를 "변서(變書) 가운데에 '김인이 이익화, 이양중과 피를 마시고 동맹하고
2 윤희를 시켜 민암, 이의징, 장희재에게 고하게 하였다.' 하였으나, 피를 마시고 동맹한 일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3 대개 윤희가 이의징에게서 와서 이성기와 함께 글을 불러 주어 그 아들 윤대남을 시켜 썼으니,
4 거기에 '금영에 불을 놓고 먼저 민상, 장장을 제거하며, 돈을 흩어 주어 인심을 얻는다.' 한 것은 다 윤희와 이성기가 날조한 말입니다.
5 김해성은 최숙원의 내구(內舅,외삼촌)의 사위로서 늘 윤희와 말하기를 '숙원이 벗어나게 되면 처모를 보내어 대궐 안에 들어가서 꾀하는 것이 있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6 왕자가 탄생하게 되니 윤희가 크게 놀랐습니다.
7 김해성이 말하기를 '뒤에도 어찌 기회가 없겠느냐?' 하고,
8 또 숙원의 생일에 음식에 독을 넣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9 윤희가 또 말하기를 '장희재가 김해성에게 돈 50냥을 주고 참봉 이삼달이 오시복에게서 꾀하여 돈 50냥을 얻어서 기다린다.' 하였습니다.
10 이삼달이 윤희에게 스스로 훈련 대장, 병조 판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11 윤희가 신천에서 김원섭, 민장도, 성호빈에게 보낸 글 가운데에서 이의징과 비밀히 의논하고 깊이 생각하여 후회를 가져오지 말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12 그 밖의 말에도 음흉한 것이 지극히 많았고,
13 ○ 윤희는 말하기를 "김해성이 왕자가 탄생한 뒤에 음식을 장만한다는 핑계로 돈 수십 냥을 얻기를 바라므로 내가 주었으나, 어찌 독을 쓸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14 김인과 윤희, 성호빈이 서로 대변하게 되어서는 윤희의 말이 많이 어그러졌다.
15 드디어 윤희를 일곱 차례나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16 ○ 김인이 또 말하기를 "성호빈이 나를 데리고 국청에 들어가 함께 잤는데, 무릇 이렇게 교통한 것은 대개 서인의 일을 염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7 성호빈이 또 말하기를 '일이 성취되지 않으면 영숙문을 거쳐서 대궐에 침범하려 하는데,
18 훈련 대장(이의징)이 선구하고 내가 국출신을 거느리고 들어가면 누가 감히 막겠는가?' 하고,
19 이어서 나에게 금낭을 주고 또 임금을 폐출한다는 따위 말을 하였고,
20 또 박귀근에게 은을 주어 꾀하여 이수언 및 서인의 모역한 서찰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하였고,
21 ○ 김인의 변서가 성호빈의 상자 안에 있었고, 그 밖의 문서에도 의심스러운 것이 많았다.
22 또 그 가운데에 있던 소지(所志,장소)는 남의 불궤한 말을 고하는 것이었는데,
23 성호빈이 '김인이 내 첩을 간음한 것을 분개하였다.'는 핑계로 바야흐로 관가에 정소하려고
24 드디어 김인이 전에 말한 것을 모두 열거한 것은 내승 장만춘이 써서 반드시 정소하도록 권한 것이었다.
25 드디어 성호빈을 일곱 차례 형신하였으나,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26 김인이 끌어댄 이무득, 실은 다 피를 마시고 동맹하였다는 것이 거짓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모두 놓아 보냈는데,
27 대개 이무득, 실은 처음부터 닭을 산 것이라고 증거를 보였기 때문이다.
28 ○ 국청의 신하들이 청대하여, 영의정 남구만이 말하기를 "이무득 등은 이미 놓아 보냈으나,
29 이성기는 윤희와 함께 글을 불러 주어 변서를 만들었고,
30 또 김인이 말하기를 '상변할 때에 이성기가 김인을 꾀어 제 집으로 오게 하여 해치려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임금이 말하기를 "윤희, 성호빈은 우선 형신을 멈추고 이성기만을 형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32 ○ 남구만이 말하기를 "이제 듣건대, 김해성의 처모는 후궁의 숙모인데, 장희재가 돈 50냥을 주어 독을 넣게 하였다 하는데,
33 지친 사이에 정리가 어떠하다는 것은 물론하고 사세로 헤아려도 이런 일은 반드시 없을 듯하니, 윤희가 자복하기를 기다려서 처치하려 합니다." 하니,
34 임금이 말하기를 "독을 넣는다는 것은 인정을 벗어난 일일 듯하다." 하였다.
35 ○ 남구만이 말하기를 "독을 넣는다는 것과 대궐을 침범한다는 것은 다른 증좌와 문서가 없고 김인의 입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36 이 때문에 윤희, 성호빈의 말에 관련된 사람들도 윤희, 성호빈이 승복하기를 기다려서 나래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7 ○ 이때 금부에서 장희재에게 물었으나 스스로 승복하려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판비하여 엄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명하였다.
38 남구만이 "장희재는 왕세자의 지친이니, 팔의의 법으로 논한다면, 문득 형신하는 것은 매우 미안합니다." 하니,
39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죄를 감정(勘定)하게 하라." 하였다.
40 ○ 남구만이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수십 년 이래로 네 번 조정이 바뀌었는데, 바뀔 때에는 주륙(誅戮,형별로 죽임)이 으레 행하여졌으므로,
41 사람마다 두려워서 스스로 위태로와하고, 한 나라가 반으로 갈려서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42 신이 외람되게 큰 은혜를 입어 자리를 다시 더럽히므로, 세상이 다 뒷날 죽일 사람이라고 지목하니, 장차 어떻게 인심을 진정하여 나라의 일을 하겠습니까?
43 지금의 생각으로는 전일의 한 일은 모두 돌이키지 않아서는 안되겠는데,
44 법을 집행하는 신하는 번번이 모두 다스리자는 논의를 고집하니, 어제의 대계는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45 기사년의 일은 신하들이 혼자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처분에서 나온 것이니,
46 대간의 말이 이러하더라도 위에서는 '이것은 내 허물이다. 어찌 신하들의 죄가 될 뿐이겠느냐?'고 말하셔야 합니다.
47 이어서 그 죄를 너그러이 줄이게 하신다면, 인심이 감동하고 후세에서 흠앙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48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49 ○ 삼성 국청을 설치하여, 전패(殿牌)에 변을 일으킨 사람 영휘, 몽선을 국문하여 승복받아서 법대로 처형하였다.
50 ○ 27일, 이때 임금이 남구만의 말에 따라 장희재의 형신을 멈추라고 명하였는데,
51 입시한 대관 박세준, 이의창이 쟁론하지 못한 것을 사람들이 다 비난하니, 박세준 등이 인혐하여 스스로 허물하였다.
52 지평 김연이 논하기를 "장희재의 공사는 반은 토하고 반은 삼켜서 오히려 명백하지 않은데,
53 다시 구문하지 않고 형신을 그만두고 배소로 돌려보내는 것은 옥사의 체모에 어그러지니, 엄히 실정을 알아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곧 멈추게 하였다.
54 대개 임금이 언찰(諺札)의 일로 장희재의 죄를 감정하라고 명하였는데,
55 대관이 배소로 도로 보내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아뢴 말이 이러하였다.
56 이튿날 남구만이 차자를 올려 그 그른 것을 말하였으므로, 김연이 비로소 인혐하여 벼슬을 떠났다.
57 ○ 28일에 영의정 남구만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며 아뢰기를 "예전에 옥사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58 친족과 늙은 자와 귀한 자에게 차마 고략(拷掠)하는 형을 가할 수 없으면, 증거로 그 죄를 정하는 것이 법례이었습니다.
59 이제 장희재가 좌죄된 것은 위에서 친히 보고 물으신 것이므로, 그 명백한 것이 뭇 증거뿐이 아니니,
60 이것으로 조감하면 절로 그 율이 있을 것인데, 반드시 승복받으려고 문득 혈육의 형을 가하면 마침내 불안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61 민암으로 말하면, 승복하지 않았으니, 승복받으려 한다면 또한 형신을 가하여야 할 것인데,
62 국조의 고사를 물론하고 근자에 허적, 오시수도 형신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63 그렇다면 이제 민암이 좌죄된 것은 반드시 이 두 사람보다 더한 것이 있지 않은 데다가
64 더구나 그 일이 명백하고 성명이 친히 그 서찰을 보셨으니, 또한 뭇 증거를 기다리지 않아도 죄를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65 신의 뜻은 본디 여기에서 나왔으나, 입시한 대관이 이미 쟁집하지 못한 것을 인혐하여 갈렸고,
66 또 그대로 가두어 두고 엄히 사핵하기를 청한 것이 있었으니, 신의 경솔한 죄가 큽니다." 하였는데,
67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도타이 답하였다.
68 ○ 5월 4일에 임금이 승지를 보내 영의정 남구만에게 유시하기를 "불행히 시끄러운 일이 뜻밖에 발생하여 사람들을 너무 지나치게 의심해서
69 대신과 여러 재신들을 일시에 인입(引入)하여 조정이 거의 비다시피 하였으니, 모양이 아름답지 못하다.
70 사람의 심정이란 여러 차례 사변을 겪다보면 자연 경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인데, 더구나 십수년 이래로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었음에랴?
71 이것은 내가 이치에 밝지 못한 잘못에서 온 것이다. 나는 바야흐로 깊이 뉘우치고 몹시 자책을 가하여 의심을 깨끗이 떨쳐 버리고 성의를 다 하려 노력하노라.
72 바라건대 경은 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여기지 말고 역시 스스로 조심하고 근신하며 간직한 포부를 펼쳐서
73 위와 아래가 서로 수양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국가가 화평의 복을 누리게 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74 지난 일은 개의치 말고 잠시 기다렸다가 (그 당시 남구만이 병을 구실삼았기 때문이다.) 곧 일어나 정사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36 ○ 5월 11일에 예조에서 사복시에 소장된 장 희빈이 옛날에 타던 연(輦)과 말안장 등 여러 가지 도구들을 불사를 것을 청하니, 이를 승락하였다.
2 ○ 23일, 이때 윤희, 성호빈은 모두 죽었으며 국청에서 이성기를 형신하였는데, 승복하지 않자, 드디어 다시 신문할 것을 청하였다.
3 국청에서 의논하기를 "김인이 '이성기가 사실 모역에 급급하다는 설을 저에게 말했다.'는 것을 누차 인용하였고,
4 또 김인이 말하기를 '이성기가 자기를 살해하려 하였다.' 하였으니 여기에 대해서 조사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그리고 또 김인이 훈련 도감의 군량미를 바꿔치기 한 일과
6 이조 판서로 하여금 임금의 의중을 탐지해 보도록 하였다는 내용을 말하였는데,
7 그것은 질문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안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사랑은 '이것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였으니,
8 지금 김인을 여러 죄수들과 대질시킴에 있어 이 두 가지 단서를 가지고 질문해야 합니다." 하니, 좋다고 하였다.
9 ○ 김인이 대답하기를 "성호빈이 말하기를 '큰 일을 하려면 군인들의 마음을 얻어야 성취할 수 있다.'고 하기에,
10 제가 말하기를 '사복시의 말은 입쌀을 먹고 훈련 도감의 군인은 좁쌀을 먹으니 이것을 바꾸어 먹인다면 군인들이 기뻐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11 성호빈이 훈련 대장에게 말하여 임금에게 아뢰려고 하다가 결국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12 성호빈이 저에게 말하기를 '최 숙원이 왕자를 낳았는데, 민암과 이의징이 주상의 은총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
13 이현일로 하여금 주상의 의중을 알아보도록 하니, 이현일이 「적서의 분의를 분명히 해야 된다」는 뜻으로 아뢰었고,
14 주상이 「나도 그 점을 알고 있다」고 답변하자,
15 이현일이 나와서 민암과 이의징에게 「주상의 뜻이 이러하니 그 은총이 두터운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16 이성기는 또 저에게 말하기를 "숙원이 왕자를 낳았기에 형세가 있지만 나의 조명으로써 본다면 죽을 운명이다.
17 아마 반드시 청평, 인평, 익평 세 공주를 살해하여 그런 다음에 남인은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
18 그러나 이미 죽일 수 없게 되면 형세는 장차 역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19 ○ 국청에서 드디어 청대하여 남구만이 아뢰기를 "김인을 추고하였으니,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이현일이 참으로 이런 말을 하였습니까?" 하니,
20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그러하다. 내가 이미 그들이 언젠가 시험해 본 것을 알고 있노라." 하였다.
21 ○ 윤5월 2일에 김해성의 아내 구월은 말하기를 "숙원이 출산할 임시에 저의 의모(義母,봉영)가
22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이미 왕자를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23 숙원의 생신 때 또 반찬을 장만하여 올리려고 하였는데 궐내에서 저지하여 결국 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24 국청에서 의논하기를 "김해성, 구월, 봉영 등이 독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인정과 사리에 가깝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25 ○ 이시도가 말하기를 "장만춘이 저로 하여금 민장도를 만나보도록 하였고,
26 민장도는 저에게 최격 등의 은화를 모아 시국을 바꾸려는 모의를 탐지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27 장만춘은 말하기를 "3대장이 이담명, 김원섭과 명년 봄에 대사를 모의해 거행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28 ○ 민장도와 대질시키니, 이시도가 '장만춘의 집과 민장도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민장도도 시인을 하였으나,
29 좋은 벼슬로 꾀어서 환국(換局)의 모의를 정찰해 알아내도록 하였다는 것과
30 한중혁, 김춘택 등이 세 공주와 결탁하여 모의(謀議)를 탐사한 상황에 대해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31 ○ 남구만이 아뢰기를 "장희재를 옥체(獄體)로써 논한다면 진실로 형벌을 청해야 합니다.
32 다만, 장희재의 언문 편지는 주상께 그가 직접 드린 것이 아니고 경유하여 전달한 사람이 있을 터인데,
33 지금 이것을 가지고 장희재를 심문한다면 그 형세가 어찌 희빈에게 미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34 희빈의 오늘의 심정은 사람의 일반적인 정리로 추측해 본다면 분명 황공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35 희빈이 만일 불안하면 왕세자는 또한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36 지금 장희재로 인해서 불안을 초래한다면 일후에 궁궐의 안에 어찌 그 화평을 보장하겠습니까?
37 그러므로 신은 장희재에 대해서 법대로 할 것을 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38 임금이 말하기를 "민암 부자의 죄는 백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다.
39 더구나 장희재와 내통한 편지가 발견되어 민장도가 형벌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않는 것인가?" 하였다.
40 ○ 이세백은 아뢰기를 "왕세자의 지친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41 하지만 주상으로부터 이미 국모를 모해하였다는 하교가 계셨으니 그 경중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42 ○ 남구만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세자에게 종사 만년의 책임을 부여하시게 되니, 희빈을 돌보지 않으실 수가 없으십니다.
43 처음에 전하께서 등극하신 지 14, 5년만에 세자가 비로소 탄생하였으니
44 전하의 신하된 사람이 누군들 기뻐 뛰고 우러러 떠받드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45 원자의 정호를 너무 성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신하들 가운데 더러는 논란하는 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46 그러나 그들의 본의는 딴 뜻이 없었는데 한쪽 사람으로서 남을 참소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
47 이에 세자에게는 저들만이 홀로 마음이 쏠려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48 그래서 망측한 화가 기사년 5월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던 것입니다.
49 지금 만약 세자가 불안해하는 바가 있는데도 대책을 세우지 못해 뒷날 표현하기 어려운 일을 초래하게 된다면
50 한쪽의 사람들이 말한 것과 방불하지 않겠습니까?
51 이것이 오늘날 신하된 사람이 마땅히 사생(死生), 화복(禍福)을 돌아보지 않고 정성을 다해 힘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하니,
52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말한 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하고, 장희재를 전일 판결한 비답에 따라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53 ○ 6월 2일에 특별히 숙원 최씨를 숙의로 삼도록 명하였다.
54 ○ (최씨는 훗날 영조대왕의 어머니이시며, 작년(숙종19년)에 왕자를 두 달만에 잃었지만,
55 이 때에 영조를 잉태하고 있었으니, 숙종은 왕자와 공주를 상관없이 종2품의 품계로 올린것이다.
56 이후에 왕자를 더 낳으니, 숙종의 총애가 희빈 장씨 보다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57 숙종 25년에 숙빈으로 봉해지니, 정1품의 가장 높은 품계였다.
58 숙빈 최씨의 본관은 해주로, 후일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의 딸로서 1670년에 태어나, 이 때에 25세였다.
59 훗날에, 모두가 희빈 장씨의 세자(경종)를 두려워 하여, 숨죽일 때에, 숙종이 장희빈을 사사하는데에 최숙빈이 뒤에서 숙종을 움직였다고 전해진다.
60 인현왕후 민씨는 최씨를 총애하고, 숙종 27년에 죽고, 최씨는 숙종 44년에 죽으니, 숙종과 생애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61 그러나 민씨를 이은 인원왕후 김씨의 총애를 받아 최숙빈의 아들이 경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고,
62 인원왕후는 영조 33년에 죽는다. 영조대왕의 인원왕후에 대한 효심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63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서, 후사가 없었으므로, 인원왕후 등의 뜻에 따라 최숙빈의 아들을 왕세제로 삼아 위를 잇게하니, 숙종의 뜻이였다고 한다.)
37 ○ 윤5월 11일, 처음 기사년에 임금이 송시열에게 효종의 어찰을 올리라고 명령하자, 송시열이 기록해 올렸다.
2 ○ 1. 성조께서 일찍이 탄식하시기를 '대개 적의 침입을 당한 나라들이 외방은 비록 쑥대밭이 되어도 근본이 견고하기 때문에 끝내 패망하지는 않았다.
3 그런데 우리 나라는 조금만 병란이 있게 되면 도성이 먼저 무너져 공사의 축적이 모두 적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4 천신(賤臣)이 대답하기를 '남한의 성을 축조할 때에는 승도(僧徒)만 쓰고 민정(民丁)은 일체 쓰지 않았습니다.
5 지금은 승도(僧徒)의 수효가 남한 산성을 축조할 때보다 배나 됩니다.' 하였습니다.
6 ○ 1. 중들은 놀고 먹어 다만 양민들이 생산한 곡식만을 축내고 있으니 손해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7 그렇다고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한다면 또 뜻밖의 변이 있을 것이니,
8 고법에 따라 첩지를 주어 그들만 중이 되게 하고 또 약간씩 세포를 거두어 들인다면
9 중이 점점 적어질 것이요, 양민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10 ○ 1. '우리 백성 중의 세력이 있고 교활한 자로서 오랑캐에게 의탁한 자가 뜻대로 되어 날뛰는 것을 보면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다.
11 그러니 하루아침에 병란이 생기면 모두 피하려 하지 않고 그들을 맞아 항복을 하는데, 이것이 가장 염려스러운 일이다.' 하셨는데,
12 성조의 말년에 기내의 사람으로서 무단히 저들에게 들어간 자가 있었는데, 저들이 압송을 하면서 죽이지는 말라고 했지만
13 성조께서는 '이 놈을 죽이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하시고, 즉시 효시하라는 논의를 정했는데,
14 현종의 초년에 결국 선왕의 교지를 받들어 죽였습니다.
15 ○ 1. '백성으로 군사를 기르자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백성이 병들게 되니, 군사로써 백성을 기른다면 군사와 백성이 둘 다 편하게 된다.' 하셨는데,
16 그러나 받들어 행하기를 성실히 하지 않아 훈국의 군사가 아직도 많습니다.
17 ○ 1.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한사(漢史)에 조광한이 호강들을 위력으로 제어하여 약소민이 살 길을 얻었다 했는데,
18 우리 나라 전결(田結)이 줄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어사가 염문(廉問)을 할 적에는 이런 등류도 겸해서 살펴 다스리도록 해야겠다' 하셨습니다.
19 ○ 1. '재생청을 설치하여 낭비를 없앤다. 그러나 반드시 먹는 자가 적어야 낭비를 덜 수 있다.'고 하셨는데,
20 대저 성조께서 생각하시기를 '지금 나라의 일이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떻게 폐단이 생기는대로 고칠 수 있겠는가?
21 그 요령은 다만 사(私)란 한 글자를 없애는 데 있으니, 우선 나부터 이 한 글자를 없앤 뒤에
22 신하로서 따르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대신일지라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23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건대 몸을 닦아, 황극(皇極)을 세우고 백성을 보호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24 선비를 가르쳐 속학(俗學)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 언제나 하시는 성교였습니다.
25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 잡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니겠느냐?' 하셨습니다.
26 ○ 이 상소가 다 쓰여졌지만 미처 올리지 못하고 제주로 귀양가게 되었다.
27 ○ 7월 8일에 민암을 사사했다. 민암은 사람됨이 야비하고 패리(悖理)하며 흉악하고 간사했다.
28 장희재와 결탁하여 모후를 폐출하게 만들었으니, 더할 수 없이 무거운 죄를 저질렀음은 이전의 역사에서도 거의 들을 수 없는 일이었다.
29 그가 탐음(貪淫)하고 방종하여 명행(名行)을 멸시하였음은 특히 그 중에도 자잘구레한 것이었다.
30 남구만이 몸소 장희재를 보호하여 저지른 일을 묻지 않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31 민암의 음모도 또한 모두 밝혀 내지 못하여 끝내 사저시조 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이 실형한 데 분개하였다.
32 그 뒤 신사년의 옥사 때에 와서야 비로소 역적으로 논죄하게 되었다.
33 ○ 9월 20일 숙의 최씨가 왕자를 낳았으니 (영조대왕이시다.) 준례대로 호산청을 설치했는데, 임금이 호산청의 환시와 의관에게 내구마를 상으로 주었다.
34 우의정 윤지완이 듣고서 차자를 올려 진달하기를 "국조 고사를 신이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35 효종조부터 근친, 의빈, 장신 외에 일찍이 내구마를 내린 일을 듣지 못했습니다.
36 그러니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37 요사이 보건대 은전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는데, 이 일은 더욱 과람합니다.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칭찬하며 유시했다.
38 ○ 11월 27일에 장령 원성유가 논계하기를 "숙종 18년 봄에 중궁께서 사제에 계실 때에
39 무뢰한 네 사람이 담장을 뛰어 넘어 왔다가 후문을 부수고 나갈 적에 이웃에 사는 무인 한재만에게 잡혔습니다.
40 관에 고발하여 죄를 다스렸는데, 단지 여귀동 한 사람만 죄를 다스리고 그 나머지 세 사람은 불문에 붙였고,
41 바로 간소(諫疏)에 따라 여귀동을 편배(編配)하기로 했다가 끝내 끝까지 핵실하지 않았습니다.
42 이는 궁궐 담장을 넘어간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다시 구문하게 하고,
43 그때의 형조 당상과 낭관을 모두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4 또 논계하기를 "거제 현령 장우극은 중궁께서 손위(遜位)하셨을 때를 당해 감히 여러 사람이 있는 좌중에서 공공연히 마구 패만한 말을 하므로,
45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분개하여 질책하며 서로 싸우는 사람이 있기까지 했으니,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재차 아뢰자 비로소 윤허했다.
46 ○ 숙종 21년(1695) 6월 5일에 무신 이홍술이 북로의 군병의 조총 사용을 허락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47 대개 우리 나라는 조총을 장기(長技)로 삼는데, 북로에 범월의 우환이 잦았으므로, 민간의 조총을 관부에다 거두어 두어 사용할 수 없게 하니,
48 연소(年少)한 군병 중에는 간혹 조총이 어떠한 물건인지 알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49 이때에 와서 이홍술이 민간의 사용을 허가하고, 매양 3일마다 점명할 때 총을 가지고 와서 모이게 한다면,
50 무기를 정비하여 환란에 대비하는 방도를 둘 다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어렵게 여겼다.
51 그 뒤에 권시경, 민진후 등이 다 북로로부터 돌아와 이 일을 청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52 ○ (후대에도 우수한 기술을 썩게 하는 짓을 하는 지도자가 있을지 모르니 깨닳고 경계해야 한다.)
53 ○ 6일에 예조에서 황해도 삼성사에 있는 단군의 축문을 평양 단군사의 예에 의거하여 '전조선 단군'이라 쓸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54 ○ 8일에 숙의 최씨를 귀인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55 ○ 8월 23일에 지평 최계옹이 상소하여 장희재를 참하기를 청하였는데,
56 그 내용에 이르기를, "춘궁(春宮)의 사속(私屬)이라고 하여 용서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57 이는 국모의 중함이 춘궁의 사속보다도 경한 것이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58 ○ 9월 4일, 이때에 희빈이 비빈의 지위에 물러나 있어서 분수에 편안치 못하고 원독이 뼈에 사무쳐 양전의 기거의 예를 한 번도 행하지 않았고,
59 세자가 때때로 가서 살피면 문득 손을 잡고 체읍하였으며 세자는 한 말도 꺼내지 않고 물러나니,
60 궁중의 시어하는 사람들이 조정에서 또한 일후(日後)의 도모(圖謀)를 할 줄로 알아서 두려워하여 공경하여 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61 희빈의 심복 시녀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을 타서 대내의 침어의 곳을 출입하면서 거리낌이 없는데 꾸짖어 금하는 자가 없었으니, 궁인의 연로한 자가 근심했다고 한다.
38 ○ 숙종 22년(1696) 1월 6일에 동활인서, 서활인서에서 죽을 마련하여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먹였다.
2 ○ 7일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팔로의 올해 세두의 반을 줄였다.
3 ○ 25일에 전교하기를 "설죽소에 지난번 별감을 보내어 굶주린 백성이 먹는 죽을 가져오게 하였더니,
4 홉수(合數)가 자못 넉넉하고 쌀알이 많았는데, 시종 이러한지 보려고 또 가져오게 하였더니,
5 홉수가 전보다 크게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쌀알도 매우 드물었다.
6 이렇게 하여 그치지 않으면 설죽의 본의에 매우 어그러지고, 굶주린 백성이 결코 이에 힘입어 살리가 없을 것이니,
7 동서의 설죽소에 이 뜻으로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8 ○ (숙종이 관리를 믿지 못하여, 재차 직접 확인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에 합당하다 하겠다.
9 관리도 사람이니, 어찌 사사로이 이득을 취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 할 수 있겠는가?
10 확인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 관리를 관리하는 지도자의 도리이다.
11 어떤 부서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자신하여 자신들의 부서에는 부도한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어리석은 지도자이니, 이치를 깨닳아야 한다.)
12 ○ 2월 5일에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는데, 임금이 그것이 몹시 굶주려서 실성하였기 때문이라 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13 ○ 11일, 이해에 흉년이 들고 백성은 빈곤하여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14 해서, 영남에서 불이 나고, 관동에서 물이 넘쳐 장문이 잇달아 이르렀다.
15 물과 불 때문에 죽은 자는 하루에도 수십 인을 헤아렸는데, 해도에 명하여 휼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16 ○ 14일에 영의정 남구만이 말하기를 "경기 백성은 거의 다 가난하여 농사를 본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17 구차하게 눈앞의 얼마 안되는 늠료를 좇아 고향을 떠나서 서울로 흘러 들어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18 간사하게 속이는 것이 또 그 반을 차지하므로 조금 막아야 마땅하니,
19 그 가운데에서 토전(土田)이 있는 자는 농사철이 다가왔다는 것을 타일러 본업으로 돌아가게 하고,
20 따라서 양식과 씨앗을 주어 그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21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나 그 정심(精審)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22 좌의정 유상운이 말하기를 "그 정심을 보장하기는 어려우나 1만에 가까운 사람이 모여 있으면, 혼잡하여 돌림병이 더욱 치열해질까 염려됩니다." 하고,
23 제신은 혹 정심할 리가 없다고 말하거나 타일러 보낼 수 있다고도 말하니, 임금이 타일러 보내라고 명하였다.
24 ○ 24일에 참찬관 심평이 말하기를 "상주의 사인 유성우는 관가에 곡식을 많이 바쳐서 진구에 보탰으니, 마땅히 등용하여 다른 백성을 권장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5 이때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고을에서 진구를 많이 베풀었는데,
26 상인(商人)을 시켜 곡식을 들여오는 것을 허가하여, 서인(庶人)에게는 자급을 주고 사족에게는 이따금 정직을 제수하기도 하니,
27 심평이 상주목에서 체임되어 고을 사람을 벼슬시키려고 이 청을 한 것이다.
28 제도의 방백도 곡식을 바친 자를 전후 열 두어 번 장문하여 풍도가 넉넉한 사람에게 벼슬을 제수하기를 청하였으니,
29 관서의 김후징과 해서의 김효흥 등이 다 일명(一命)을 받아 전야(田野)에서 일어나 조정의 반열에 끼었다.
30 서인으로서 자급을 받은 자는 더욱 많아서, 농부, 목자로서 옥관자를 달고 붉은 띠를 띤 자가 길에 두루 찼다.
31 조정의 의논이 구황하는 데에 급하다 하나, 식자는 명기(名器)가 날로 가벼워지는 것을 근심하였다.
32 ○ 경기 감사 김재현이 백성의 굶주림은 날로 급박해져 가는데, 고을에서 진구하는 일은 이어갈 수 없다 하여,
33 다시 3, 4만 석을 얻어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구제하기를 장청하였는데,
34 비변사에서는 강도, 남한에 저축된 것이 넉넉하지 못하고, 각 아문에도 저축이 없다 하여 허가하지 말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35 이때 제도(諸道)에서는 진구하는 일이 중하다 하여, 전곡을 많이 얻으려고 청하느라 장계, 첩보가 매우 많았는데,
36 영의정 남구만이 처음에는 자못 어렵게 여겼으나, 청하는 자가 점점 더 많아지므로 묘당에서도 뜻이 요동됨을 면하지 못하여 청을 들어주었다.
37 한 해 동안에 경외의 관가의 저축과 여러 성의 군향(軍餉)이 다 없어지고, 지부(地部)의 경비는 신구를 이어 가지 못할 염려가 심하여지니, 식자가 매우 근심하였다.
38 ○ 3월 12일, 이때 백성의 굶주림이 날로 급하여져서 서울과 각 고을에서 다 구제하였는데,
39 먹으러 오는 자가 날로 늘어나 서울은 1만 명이 넘고 팔도는 각각 수만 명이며,
40 영남에서 신보한 것은 56만여 인에 이르렀으며, 죽은 것은 전후에 모두 수만 인이었다.
41 ○ 15일에 영의정 남구만이 말하기를 "경기 백성은 곤궁이 날로 심하여지는데다가 또 농사철을 당하였으므로,
42 빨리 곡식을 다시 주어 파종을 도와야 하겠으니, 진청의 조 1만 석과 광주의 군저(軍儲) 1천여 석을 경기 고을에 나누어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3 ○ 29일에 어사 여필용을 강원도에 보내어 암행하게 하고, 4월 2일에 어사 민진후를 경기에 보내어 암행하게 하였다.
44 ○ 숙종 23년(1697) 윤3월 6일에 비변사에서 광주 분원에 살고 있는 백성 39명이 굶주려 죽었다고 하여, 부윤 박태순을 추고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45 ○ 6월 8일에 경상도 관찰사 이언기가 장계한 것으로써 의금부의 나졸을 보내어 백성의 재물을 탐하는 관리인 남해 현령 이상휘를 잡아왔다.
46 이상휘가 임지에 부임한 뒤로 비루하게 탐하는 것을 일삼아 관의 소유물을 횡령하기를 어지러이 하였으므로,
47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경사(京師)에까지 알려졌기에, 이언기가 비로소 그의 죄상을 계문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48 이상휘가 봄 사이에 쌀 1백여 석을 실어다 조신(朝紳)으로 요직에 있는 자에게 많이 주었으며,
49 그 중에 본디부터 청렴하고 명망이 드러난 자에게는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보내지 못하고,
50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두루 보내지 않은 이가 없었다.
51 조대수, 유중무, 오명준 등과 같은 이는 받은 것이 더욱 많았으며,
52 이정겸에게 보낸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전해져 그 일로 인해서 발각되었고,
53 이 뒤에 대론(臺論)이 또 발설되자 자수한 사람은 이정겸, 정제태 등 약간인이었으며,
54 조대수와 유중무는 일이 발각된 뒤에 비로소 되돌려주었다고 말했고,
55 이상휘도 죽기를 작정하고 굳게 숨겼는데, 조대수와 유중무가 여러 고을에 청탁하여 뇌물을 받아 바치게 하였으므로
56 조신(朝紳)들 가운데서도 더욱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는 자였다.
57 이제 또 이상휘의 쌀을 많이 받은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도 의기 양양하게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58 사람들이 이상휘의 일이 발각되었음을 전하자,
59 밤중을 이용하여 쌀 섬을 실은 짐바리를 남해 저인의 집으로 보내는 자가 매우 많았었는데, 어느 곳에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60 형조 판서 이언강도 그 쌀을 받았기 때문에 원래 착실하게 끝까지 조사할 뜻이 없어,
61 마침내 그 죄를 폭로하고 그 법을 바로잡을 수 없었으니, 세상의 도의가 무너짐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62 ○ 6월 29일에 양주 지역에 흉악한 호랑이가 인명을 많이 살해하므로, 어영청에 명하여 잡도록 하였다.
63 ○ 7월 1일에 호조에서 전세를 바치지 않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등의 여러 고을 수령을 아울러 우선 종중 추고하도록 청하니,
64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러한 풍습을 만약 엄하게 고치지 않는다면,
65 아무리 풍년이 든 해라고 하더라도 받들어 행할 리가 전혀 없으니, 잡아다가 장형을 집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66 수령들이 분주하게 당시의 재상에게 청탁하여 죄벌을 면하려고 도모하였다.
67 좌의정 윤지선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그 가운데 직질이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심한 자를 가려서 장형을 집행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니,
68 임금이 허락하여 단지 일곱 고을의 수령에게만 장형을 집행하였다.
69 직질이 높은 자는 으레 장형의 집행을 면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70 그 밖의 수령은 무엇 때문에 뒤섞어서 죄벌을 면제시키는가?
71 공심(公心)이 사심(私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탄식하였다.
72 ○ (사관이 말하기를 '직위가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장형의 집행을 면제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으니,
73 조선시대에 재상들이 이렇듯 임금을 겁박하여, 법에서 벗어나니, 그 아래의 관리들과 사대부들이 어떻게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엇겠는가?
74 그러니 죄를 범한 수령들이 의롭지 못한 재상들에게 청탁을 할 수 있으니, 법을 마음대로 범하고,
75 이를 보는 또 다른 수령들도 죄를 가볍게 여겨 법을 마음대로 범하는 것이다.
76 그런데, 심지어 사관도 추악한 재상을 두둔하고 있으니, 권력을 가진자들의 생각은 동색이였던 것이다.
77 이러한 기사를 찾고자 하였는데,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이치를 깨닳고, 한국시대에 권력을 가졌다 하여 법을 벗어나는 자가 있는지 보아야 한다.)
39 ○ 숙종 24년(1698) 5월 11일에 청나라 시랑이 쌀과 물화를 가지고 무역을 청하였다.
2 임금이 비답하기를 "오랑캐와 금수는 의리로써 책망할 수 없는 것이다.
3 쌀은 백성을 구제하는 물건이라 허락하는 것이 옳겠지만,
4 물화의 매매는 단정코 허락할 수 없다.
5 아직 국서는 보내지 말고 개인적인 서신으로 서로 통보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6 ○ (쌀을 사서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면 이로은 것이다. 조선은 무역의 좋은 점을 깨닳은 것인가? 아닌가?)
7 ○ 20일에 접반사가 아뢰기를 "청나라 해운미에 대해 한 달 넘게 가격을 다투다가, 비로소 육운미의 예에 따라 1곡마다 은 5냥 7전씩으로 정했습니다." 하였다.
8 ○ 23일에 접반사 김구가 장계를 올려 사상(私商)을 처리하기 곤란한 상황을 아뢰니, 영의정 유상운, 좌의정 윤지선, 호조 판서 이유가 청대하였다.
9 유상운이 아뢰기를 "지금 김구의 장계를 보니 저들이 또 돌아가려 한다 하는데,
10 대개 신후명은 곧장 먼저 올라오고, 김구는 접대하지 아니하여서 노여움을 산 바 있습니다.
11 지금의 형세로는 사상의 물화 역시 막기 어려우니 상고(商賈)의 무리로 하여금 사사로이 화매(和買)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12 윤지선과 이유 역시 찬성하였으므로 임금이 윤허하였다.
13 유상운이 또 청하기를 "병조, 진휼청, 금위영으로 하여금 각각 은 2만 냥씩을 내게 하여 상고의 무리에게 나누어 매매하게 하고, 개인이 가진 은이라 말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4 ○ 6월 16일에 뱃사람 이순이라는 자가 부안현의 공미 57석을 도둑질하여 먹었는데,
15 임금이 법률에 의거해 참형에 처하고 강가에서 효시하라고 명하니,
16 형조 판서 최규서가 복주하기를 "자백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앞질러 사형에 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17 임금이 처음에는 듣지 않다가 뒤에 형관의 진달로 인해 비로소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18 ○ 7월 10일에 새로 탄생한 왕자가 졸하였다.
19 ○ 11일에 지평 남취명이 상소하기를 "조정에 과격함이 풍습을 이루어 기상이 아름답지 못하고,
20 격분하여 다투며 성내고 꾸짖는 습관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21 똑같은 대신이면서 분주하고 구차하다는 배척을 시비를 논쟁하는 외에다 마구 가(加)하곤 하는데,
22 마땅히 사리에 대하여만 변파(辨破)할 뿐이지, 어찌 꼭 상대를 짓밟은 뒤에야 시원하단 말입니까?
23 또 큰아버지를 원수같이 본 죄는 윤상에 관계가 되는 것인데,
24 가령 이 사람에게 이 죄가 있다면, 죄가 어찌 사적에 끼이지 못하게 하는 데만 그치겠습니까?
25 만약 그것이 의사(疑似)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주달하는 글에 또한 이와 같이 말하여 부자(父子) 사이에 증거를 짓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26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공정히 듣고 아울러 살펴보아서 힘써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지나치게 과격한 풍습을 중지시키겠습니까?" 하니,
27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에 진달한 일은 그 대의가 진실로 좋다. 어찌 마음에 두지 않겠느냐?" 하였다.
28 김덕기, 이세석, 임원성 등은 이 때문에 인혐하고, 남취명도 역시 대피했는데,
29 집의 정호가 처치(處置)하여 김덕기 등을 출사시키고 남취명은 체직시켰으나,
30 임금이 남취명의 상소의 대의가 진실로 좋다고 하여 특명으로 체임하지 말게 하였다.
31 이에 정호가 다시 성교(聖敎)로 인해 인피하니,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32 ○ 10월 24일에 영부사 남구만이 말하기를 "세조께서 정난한 일을 비록 선위하여 주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혁명과 같은 것이고,
33 비록 처음에는 높여서 상왕이라 하였으나, 그 후에 능히 끝맺음을 못하였습니다.
34 ○ 노산 대군의 왕호를 추복한다면 그 위차는 마땅히 세조의 윗자리로 올라가야 하는데,
35 그렇게 되면 하늘에 계신 세조의 영령께서 옛날 일을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놀라고 슬퍼하여 능히 스스로 종묘에 오르내리시는 데 편안치 못할 것이며,
36 노산 대군께서도 반드시 슬퍼하며 마음 편하게 흠향하시지 못할 것이니,
37 신의 도리나 사람의 심정이 어찌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38 ○ 그리고 이미 대례를 거행하게 되면 마땅히 태묘에 고하고 중외에 반포해야 하는데,
39 당시의 변고를 만약에 사실대로 한다면 감히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고,
40 만약 숨긴다면 이는 허위가 되는 것인데, 그래서야 어떻게 신(神)과 사람을 깨닿게 하겠습니까?
41 ○ 옛날 전현(前賢)께서도 노산 대군의 일에 대하여 모두 슬퍼하면서 임금에게 아뢴 자가 많았으나,
42 혹은 그 묘역을 수치할 것을, 혹은 치제하기를, 혹은 그 후사를 세워 줄 것을 계청하기도 하였으나,
43 일찍이 복위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고, 오직 윤휴 만이 그 문제를 계청한 적이 있었으나 시행되지 아니하였습니다.
44 그런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또 다시 윤휴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45 ○ 그리고 신씨를 복위시키는 일에 이르러서도 역시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하고,
46 ○ 영돈녕 윤지완은 말하기를 "지금 이 두 가지 일은 곧 백세(百世)에 바꿀 수 없는 정론으로서,
47 오직 지극히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감히 입으로 발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48 다행히 성상께서 감동하시어 이렇게 널리 자문을 구하시니, 우리 열성(列聖)께서 시행하지 못했던 궐전이
49 오늘까지 기다렸던 것은 사실상 하늘의 뜻이었지 어찌 사람의 생각이었겠습니까?
50 그에 따른 예절을 강마하여 성대한 의식을 갖추는 것은, 오직 성상의 판단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고,
51 ○ 판중추부사 최석정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께서는 일찍이 대위의 자리를 밟으셨던 분으로 깎여서 강등이 된 것도 덕이 없어서가 아니었으며,
52 신비는 지존의 배필로서 폐출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었는데, 지금 그 신주가 오래도록 민가에 있으니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53 만약 관에서 사당을 지어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한다면 신민들의 맺힌 한도 조금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고,
54 좌참찬 윤증은 말하기를 "2백 년 동안 맺혀 있던 원한이 오늘에야 펴질 수 있게 된 것으로,
55 밝으신 열성이 위에서 오르내리시어 성상의 일념이 위로 하늘에 통한 것으로, 예사로운 일이 아니므로 오직 성상의 결단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56 ○ 호조 참의 권상하는 말하기를 "정난 때에 노산 대군께서 겸양하는 덕으로 전위하였고 상왕으로 높였으니,
57 본래 추방시켜 폐위한 임금과 같지 않으며, 나중에 있은 조처도 사실은 세조의 본뜻이 아니었습니다.
58 세조께서는 비록 마지못하여 육신에게 죄를 주기는 하였으나, 심지어는 '당세의 난신이나, 후세의 충신이다.'라고까지 포상하였습니다.
59 그 뒤에 중종 때에 와서 이약빙이 상소하여 노산 대군을 위해 후사를 세워 주자고 계청하니,
60 중종께서 하교하시기를 '이와 같은 말은 지극히 귀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열성의 속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61 ○ 신비의 일에 이르러서는 중종 대왕의 원비로서 죄없이 폐출되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김정, 박상의 상소가 진실로 정당한 의논이었습니다.
62 그 자손과 백성의 도리에 있어서 선왕의 폐비를 태묘에 추배시킨다는 것은, 아마도 상례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63 ○ 임금이 마침내 빈청에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세조께서 초기에는 노산 대군을 존봉하여 태상왕으로 삼았고, 또 한 달에 세 번씩이나 문안하는 예를 시행하였다.
64 불행하게도 마지막에 내린 처분은 아마도 세조의 본뜻이 아닌 듯하며, 그 근원을 추구해보면 육신에게 말미암은 것이다.
65 그런데 육신이 이미 정포되었는데, 그들의 옛 임금의 위호를 추복하는 것은 또다시 어떤 혐의와 장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66 나의 생각으로는 이제 추복하게 되면, 이는 세조의 성덕에도 더욱 빛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67 그 일을 끝내 시행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68 천자(天子)나 왕가(王家)의 처사는 필부(匹夫)와는 같지 않다.
69 예관으로 하여금 속히 성대한 의식을 시행하도록 하라.
70 ○ 그리고 신비의 일에 있어서는, 지금 의논하는 자가 추복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이가 많으며, 옛말을 증거 삼으니,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71 (중종이) 승정원에 내린 하교에는 (복위시킬) 뜻이 없었으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추복할 수 없는 사세가 별도로 있었던 것 같다." 하였다.
72 ○ (이리하여,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그리고 다시 단종으로 추복하게 되었다.)
40 ○ 숙종 25년(1699) 7월 15일에 강원도 월송 만호 전회일이 울릉도를 수토(搜討)하고 대풍소로 돌아왔다.
2 본도의 지형을 그려 올리고, 겸하여 그곳 토산인 황죽(皇竹), 향목(香木), 토석(土石) 등 수종(數種)의 물품을 진상하였다.
3 ○ 10월 23일에 귀인 최씨를 숙빈으로, 숙원 유씨와 박씨를 숙의로 승급시켰는데, 이는 단종 대왕을 복위시킨 경사 때문이었다.
4 ○ 숙종 27년(1701) 8월 14일에 왕비 민씨가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5 ○ 9월 23일 밤에 임금이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대행 왕비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6 희빈 장씨는 비단 한번도 기거 하지 아니하고, 중궁전 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라고 일컬었으며,
7 또 말하기를, '민씨는 실로 요사스러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8 취선당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9 이것을 참을 수가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제주에 유배시킨 죄인 장희재를 먼저 처형하여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10 ○ 이보다 앞서 대행 왕비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 민진후 형제가 입시하니,
11 왕비가 하교하기를, "갑술년에 복위한 뒤 조정의 의논이 세자의 사친(私親)을 봉공하는 등의 절목을 운위하면서,
12 '마땅히 여러 빈어 들과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희빈에게로 기울어졌다.
13 ○ 궁중의 구법에 의한다면 빈어에 속한 시녀들은 감히 대내 근처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14 희빈에 속한 것들이 항상 나의 침전에 왕래하였으며, 심지어 창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는 짓을 하기까지 하였다.
15 그러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꾸짖어 금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너무나도 한심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16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
17 ○ 궁인 시영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사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18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고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19 다만 나는 갖은 고초를 받았으나, 지금 병이 난 두해 사이에 소원은 오직 빨리 죽는 데 있으나,
20 여전히 다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여 이처럼 병이 낫지 아니하니, 괴롭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21 ○ 이때에 이르러 무고(巫蠱)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에서는 혹 전하기를
22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하였다." 하였다.
23 ○ 24일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궁녀 영숙의 죄상은 정숙과 한가지인데,
24 사령을 만나 모두 석방된 뒤에도 조금도 징계되지 아니하여 하는 짓이 방자하니, 용서할 수 없다." 하고, 다음날 참형에 처하였다.
25 ○ 25일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수사에 갇힌 죄인 축생, 설향, 시영, 숙영, 철생 등을 아울러
26 금부로 하여금 도사(都事)를 보내 잡아오게 하라. 내일 인정문 밖에서 내가 친국할 것이다." 하였는데, 축생 등은 모두 궁녀였다.
27 ○ 비망기를 내리기를 "신당(神堂)을 몰래 설치하여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하면서, 내전을 모해하였으니, 이것이 어떠한 흉모인가?
28 그런데도 동부승지 윤지인은 감히 본부에서 추국하자는 따위의 말을 진달하였다.
29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면서 지극한 한(恨)을 씻지 못하고 있는데,
30 신자(臣子)가 국모를 모해한 적(賊)을 대수롭지 않게 본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31 지극히 통탄스럽다.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 시키라." 하였다.
32 ○ 밤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죄가 이미 밝게 드러났으므로 만약 선처하지 아니한다면 후일의 염려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니,
33 실로 국가를 위하고 세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다. 장씨로 하여금 자진하도록 하라." 하였다.
34 ○ 26일에 인정문에 나아가 궁녀 축생 등을 친히 국문하였다.
35 ○ 27일에 영의정 최석정이 병을 핑계대고 국청에 나오지 않았다.
36 이어서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희빈이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37 춘궁을 낳아서 기른 은혜를 생각한다면, 춘궁이 걱정하고 마음 상할 것을 염려하여 조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어,
38 그 죄상을 끝까지 캐내어 세상에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하소서.
39 ○ 우리 춘궁께서도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시어 명호(名號)가 일찍부터 정해졌고,
40 바야흐로 초츤(齠齔)의 나이에 곤전(坤殿)께서 취하여 아들로 삼으시어 어머니의 깊은 자애와 아들의 돈독한 효성이 자기 친자식보았다 더한 감이 있었습니다.
41 이러한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퍼져 나가니, 이것은 곧 종묘 신령이 보호하고 도와주신 것이며, 실로 전하의 하늘과 같은 큰 복입니다.
42 그러나 갑자기 뜻밖에도 나이 어린 몸으로 망극한 변고를 당하고, 또 불안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43 하늘이 무너질 듯한 놀라움과 괴로움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44 만약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미치도록 괴롭게 하여 스스로 그 성정(性情)을 보전할 수 없게 한다면,
45 비단 전하께서 지극히 자애하시는 은의를 거듭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종묘 사직에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46 신은 일의 방편에 따라서 세자를 보호하는 데 뜻을 기울이도록 힘쓰기를 원합니다.
47 ○ 금일 대신과 육경에게 순문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병으로 경연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48 바라건대, 그대로 중지시키고 시행하지 마시며, 여러 신하들의 하정(下情)을 본받도록 하소서." 하였다.
49 ○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서 장차 여러 죄수들을 친국하려고 하면서,
50 최석정의 차자를 내어 보이고 대신들을 돌아보면서 묻기를 "이 차자의 말단에서 한 말이 어떠한가?" 하니,
51 판부사 서문중이 말하기를 "이번 일을 성상께서는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영상의 뜻은 세자를 위하여 염려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52 좌의정 이세백은 말하기를 "다만 걱정하는 바는 세자께서 몹시 놀라 손상될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럴 것이니, 헤아려서 처리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53 ○ 10월 3일에 궁녀 숙정, 숙영, 축생 등을 모두 결안 취초하고 군기시 앞길에서 참형시키다
54 ○ 8일에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희빈 장씨가 내전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하여,
55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하며 흉악하고
56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57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후일에 뜻을 얻게 되었을 때, 국가의 근심이 실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58 전대 역사에 보더라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59 지금 나는 종사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60 장씨는 전의 비망기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하게 하라." 하였다.
61 ○ 29일에 국청 죄인 장희재를 결안 취초하고 군기시의 앞길에서 복주하였다.
62 ○ 11월 9일에 의금부의 청에 의거, 이항의 처첩을 종으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게 하다.
63 ○ 28일에 민암의 첩의 아들 민유도를 당고개에서 교형에 처하고, 민암의 처, 첩 및 딸, 며느리는 모두 각 고을의 종으로 삼고, 그 아들, 조카들은 먼 곳에 유배하였다.
64 ○ 12월 1일에 민언량을 당현에서 참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65 ○ 8일에 인현 왕후를 발인하니, 세자(희반 장씨의 아들)가 궁관을 거느리고 홍화문 밖에서 지송 하였다.
66 ○ (희빈 장씨가 죽지 않았다면, 숙빈 최씨는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며, 영조 또한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41 ○ 숙종 28년(1702) 5월 25일에 연잉군(영조)의 궁에서 평택, 직산 등의 현에 개[浦,물가 혹은 바닷가]를 파서
2 근방의 민전(民田)과 인가(人家)가 모두 피해를 당하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매우 많았다.
3 본도(本道)에서 장계를 올려 그 폐단을 진달하고, 그 역사를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4 비국에서 그에 따라 시행할 것을 청하기를 "궁차(宮差)가 거짓으로 꾸며 상달한 죄를 각별히 추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 ○ 28일에 삼척 영장 이준명과 왜역(倭譯) 최재홍이 울릉도에서 돌아와 그곳의 도형과 자단향(紫檀香), 청죽(靑竹), 석간주(石間朱), 어피(魚皮) 등의 물건을 바쳤다.
6 울릉도는 2년을 걸러 변장을 보내어 번갈아 가며 찾아 구하는 것이 이미 정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올해에는 삼척이 그 차례에 해당되기 때문에
7 이준명이 울진 죽변진에서 배를 타고 이틀낮밤 만에 돌아왔는데, 제주보다 갑절이나 멀다고 한다.
8 ○ 9월 10일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같이 여기는 법이다.
9 그런데 불행히도 금년의 홍수의 재난은 옛날에 없던 것으로, 능곡이 뒤바뀌고 전주(田疇)가 쓴 듯하여,
10 추수할 때가 되었으나 살아갈 길이 없으니, 내년 봄에 굶어 죽는 자가 많을 것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1 생각이 이에 미치자 마치 고통이 내 몸에 있는 것 같다.
12 흉년에 진휼하는 계책은 방백(方伯)에 달려 있으니, 방백이 만약 내가 주야로 근심하는 것을 본받아
13 수령들을 신칙(申飭)하고 진정(賑政)에 힘써서 잘 무마하여 편안하게 하되,
14 진실로 백성을 편하게 하는 데 관계되는 일을 조목을 마련하여 아뢰면, 거의 착실한 효과가 있게 될 것이니, 이로써 여러 도(道)의 감사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15 근본이 되는 기전(畿甸)의 땅에 이르러서는 도리상 우휼(優恤)해야 할 것이니,
16 앞으로 재실(災實)을 분등하여 계문한 후에 별도로 부역을 감해 주어서, 내가 백성을 보기를 질병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17 ○ 12월 13일에 범이 홍제원 근처에 함부로 다니면서 어린이를 물어 해치니, 삼군문에 잡도록 명하였다.
18 ○ 18일에 호랑이가 안현에 들어왔는데, 이를 잡았다.
19 ○ 숙종 29년(1703) 2월 4일에 평안도 영변 사람 김후남과 은산 사람 함귀현이
20 족역(族役)을 견디기 어렵다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는데, 관찰사 이세재가 그 일을 장문하니,
21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몹시 가엾고 슬프다. 본도에서 각별히 휼전을 거행할 것이다.
22 생각하건대, 사람의 싫어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일이 있으니,
23 그 역이 무거워서 지탱하기 어려운 형상을 상상할 만하다.
24 빨리 변통하여 백성의 곤란을 조금 풀어 주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25 ○ 이세재가 또 양덕 사람 박명익 등 5명이 굶어 죽은 일을 장문하고, 이어 대죄하니,
26 임금이 말하기를 "놀랍고 참혹한 일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경은 모름지기 대죄하지 말고 구제하는 일을 엄하게 신칙하여,
27 백성으로 하여금 죽은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는 참혹함을 면하게 하라." 하였다.
28 ○ (족역(族役)이란, 백성이 도망하거나 사고가 있으면, 그 신역(身役)을 친족에게 대신하게 하는 일이다.)
29 ○ (일제시대와 한국시대를 거치면서 이 땅에 호랑이와 범이 한마리도 남지 않았다.
30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산골로 들어가 홀로 밭을 갈거나 농사 하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였다.
31 또한 지역을 벗어나 도망하여, 홀로 농업을 일으킬 수 없었다.
32 이러한 이치를 깨닳지 못하고, 조선인이 게을러서 굶어죽었다는 일제의 망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통탄 할 일이다.
33 또한, 백성이 외로이 흩어지면, 국가의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34 다만, 논과 밭을 거머잡고 이웃을 굶도록 한 권세가들을 왜 못 보는가?)
35 ○ 3월 15일에 이조 판서 김구가 아뢰기를 "예전에 완풍 부원군 이서가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 조정의 의논이 갈래가 많았는데,
36 이서가 홀로 자신이 담당하여 마침내 그 역사를 완성하여 병자년(인조14년), 정축년(인조15년) 난리에 힘을 크게 얻었습니다.
37 ○ 또 듣건대, 이서가 공조 판서가 되어 대선(大船) 10여 척을 감독해 만들었는데,
38 사람들이 모두 의혹스레 여기므로 함릉 부원군 이해가 그 만든 까닭을 물으니,
39 이서가 말하기를 '만일 사변이 있어 장차 강도(江都)로 들어가게 되면, 건너갈 배를 만들어 기다리게 하려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40 선배(先輩)가 나라를 위하는 깊은 생각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41 ○ 방금 국가가 안일에 빠져서 구차하게 무사한 것만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사변이 있으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도,
42 한 사람도 깊이 근심하고 먼 앞일을 생각하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43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을 거듭 살펴보니, 천지 만엽(千枝萬葉)이 둘러 쌓여서 진실로 아주 안전하고 함락되지 아니할 형세가 있었으며,
44 또 깍아지른 듯한 곳이 많아서 성을 쌓을 즈음에 공역이 크게 줄어들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음이 이곳보다 더 낳은 곳이 없었으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5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도성(都城)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지만
46 군부(君父)를 받들고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위태로운 일이니, 먼저 북한산성을 쌓아서 도성과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47 대가(大駕)를 따르는 군병은 북한산성을 지키고, 도성 백성과 다른 군사는 도성을 지키면,
48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족히 급함에 임하여 물러가서 지킬수 있습니다." 하니,
49 ○ 우의정 신완은 말하기를 "이 일을 발단(發端)한 자는 신(臣)인데 조정 의논이 서로 달라서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저으기 개탄하고 있습니다.
50 북한산성은 지세가 높아서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 보고 있으니, 사람에 비유하면 목을 조르고 등을 누르는 형세입니다.
51 만약 도성을 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삼고 힘을 합하여 같이 지킨다면 진실로 좋을 것이나,
52 북한산성을 버린다면 도성이 아무리 튼튼하다 하더라도 결코 홀로 지킬 수 없습니다.
53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형편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입니다." 하였다.
54 ○ 김구는 말하기를 "쌀 1만 석, 면포 1천 동과 역군 1만여 명으로 두어 달 역사를 하면 완전히 쌓을 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55 ○ 승지 홍수주는 말하기를 "대개 민정(民情)을 들어 보건대,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이 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난리에 이르러서 처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며,
56 모두 같은 말로 성을 쌓기를 원하는데, 만약 중지하면 반드시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57 ○ 임금이 신완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도성(都城)은 넓고 커서 또한 지킬 수 없으니 형편으로 말하자면 북한산성이 가장 좋다.
58 인조 4년에 비로소 남한산성을 쌓았는데, 병자년 난리에 처음에는 강도(江都)로 들어가려고 하였다가 마침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니,
59 그때에 만약 남한산성이 없었다면 나랏일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지 알지 못하겠다.
60 생각이 이에 이르자 마음이 떨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오늘날 사변의 준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니,
61 ○ 형조 판서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도성을 지키기를 청하였는데,
62 성상께서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병사에 어두워서 끝내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63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도성을 지킬 수 있다고 하면 또한 마땅히 더 쌓아야 할 것인데, 공력이 새로 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64 ○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도 도성(都城)을 더 쌓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65 산성 중에 넘보는 산이 없는 것은 아주 적으니, 비록 넘보는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방어할 대책이 없겠습니까?
66 만약 북성을 쌓은 뒤에 도성을 포기하여 청야의 법과 같이 한다면 혹시 될 수가 있겠지만,
67 '우선 민병(民兵)으로 성첩을 지키다가 급할 때에 다다라서 물러가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68 황급히 옮겨 들어갈 즈음에 백성이 장차 짓밟혀서 모두 죽을 것이며,
69 북성의 사민(士民)의 마음도 또한 반드시 놀라 소란할 것인데 어찌 능히 성을 지키겠습니까?
70 이 일은 거의 아이의 장난과 같으므로 결코 옳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71 ○ 임금이 "북성의 형편은 진실로 아주 안전하므로 이때에 비록 역사를 시작하지 못하더라도, 내 뜻이 이미 정해졌다." 하자,
72 신완이 일어나 하례하기를 "성상의 계책을 이미 굳게 정하셨으니, 진실로 종사(宗社)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73 ○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이 자주 갈려서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이 있는데, 고을의 탕패(蕩敗)는 진실로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74 대계는 풍문에서 나왔으니 비록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마는, 상하가 서로 버티면 한갓 사체만 손상시킬 뿐이어서 윤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75 그러나 뜬소문으로 전하는 말은 사실과 틀리기가 쉬우며, 바꾸는 장리(長吏) 또한 반드시 어질지는 못할 것이다.
76 이 뒤로는 대각(臺閣)에서 마땅히 발론(發論)할 처음에 자세히 살필 것이다." 하였다.
77 ○ 임금이 말하기를 "대각의 논의가 어찌 반드시 모두 옳겠으며, 또한 어찌 모두 그르겠는가?
78 탄핵이 한 번 일어나면 반드시 벼슬이 갈리고야 말게 되니, 내가 자세히 살피도록 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42 ○ 3월 22일에 경상도 합천의 수군 문순천의 형이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2 문순천이 죽음을 무릅쓰고 사나운 호랑이를 쳐죽여 그 형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군역을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3 ○ 25일에 행 사직 이인엽이 상소하기를 "그윽이 듣건대, 양서와 경기, 관동의 굶주린 백성들이 삼남으로 흩어져 내려오는 자가 길에 잇따르고 있다 합니다.
3 삼남이 비록 농사가 조금 낫다고 하더라도 사사로이 남에게 생활을 의지하기는 진실로 어려우니,
4 만약 관에서 구휼하지 않으면 반드시 장차 모두 굶어 죽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5 청컨대 삼남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여러 고을에 분부하여 구제해 살리기에 특별히 힘써서,
6 구렁에 쓰러져 죽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고, 만일 구제를 잘하지 못하여 죽은 자가 가장 많은 곳은 적발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며,
7 유민(流民)의 신역, 성명, 거주, 구수(口數)를 진휼청에 보고해 알려서, 변통 처리할 방법을 강구하게 하여
8 진휼하는 뜻을 보이면, 반드시 하늘이 만물을 아울러 기르는 덕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9 ○ 사신은 논한다. "이인엽의 상소는 어찌하여 김구의 해읍(海邑)을 경책(警責)하라는 주청과 서로 같은가?
10 이인엽과 김구가 같이 진휼의 임무를 맡았는데, 한 명의 굶주린 백성도 능히 살리지 못하고,
11 건의해 아뢴 바는 오직 본고장으로 거느려 보내는 계책 뿐이었고 또한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12 저 굶주린 백성이 외방으로 흩어져 내려간 것은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13 그 실제의 은혜는 강구하지 않고 한갓 빈말만 이와 같이 하고서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려고 하면 되겠는가?"
14 ○ 강원도, 함경도의 도신(道臣)이 굶주린 백성의 사망이 매우 많은데도,
15 구제해 살리지 못한 책임으로 치계하여 대죄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6 ○ 4월 3일에 특진관 민진후가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북한산성의 역사를 장차 시작한다고 합니다.
17 전번에 전하께서 떠드는 말을 염려하시어 여러 번 대신에게 물으셨는데, 이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이 역사를 일으키시니,
18 저 사람(청나라)들이 만일 혹시 듣게 된다면 장차 무슨 말로써 미봉하겠습니까?
19 자문(咨文)을 보내거나 혹은 응변할 계책을 강구한 뒤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20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왕래하던 통관은 대부분 늙어 죽었으니, 전일의 약조를 누가 다시 자세히 알겠는가? 나는 그들이 반드시 물을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21 ○ 참찬관 김진규는 말하기를 "굶주린 백성은 비록 나라에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적자(赤子)인데
22 북한성이 설사 험준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백성으로써 쌓게 하고 이 백성으로써 지켜야 하는데, 어찌 둘째의 일이란 말로써 먼저 민심을 잃겠습니까?" 하니,
23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진노하여 말하기를 "국가가 조금 편안한 지 70년이 되어 인정이 안일(安逸)에 익숙해졌는데,
24 부제학이 이른바 '아직 목전의 근심은 없다.'는 것은 진실로 웃을 만하다.
25 예로부터 전쟁의 경고는 풍년, 흉년을 구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니, 반드시 굶주린 백성이 없는 뒤에 바야흐로 수비할 계책을 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말이 되는가?
26 바다의 도적은 육지의 도적과 달라서 수로(水路)가 서로 연하였으니, 어느 날에 어떤 변고가 있을지 알지 못한다.
27 강도(江都)는 갈 만한 땅이 못되고 남한산성은 외롭게 떨어져서 또한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장차 어느 곳으로 가야 하겠는가?
28 지나간 일로써 말하면 선조조에는 인심과 세도(世道)가 오늘날에 비길 바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한 모퉁이에 파천하여 어렵고 곤궁함을 갖추어 맛보았다.
29 하물며 지금은 시국의 형세가 위태롭고 국가의 실력이 고단하고 약한데,
30 만일 불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흙처럼 허물어지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31 부고(府庫)의 병기는 도리어 적군의 소용이 되고 도성의 백성은 모두 어육(魚肉)이 될 것이다.
32 유생(儒生)은 오활(迂濶)하여 후일의 염려를 생각하지 아니하니, 속담에 이른바 '언 발에 오줌 누기'라고 하는 것에 가깝다." 하였다.
33 ○ 민진후와 김창집이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떠맡겠다. 나는 두렵지 아니하다. 나는 두렵지 아니하다." 하며, 말소리와 얼굴빛이 모두 엄하였다.
34 ○ 다음 날에 이유가 이어 아뢰기를 "굶주린 백성을 역사에 나가게 하는 일은 물정(物情)이 불쾌하게 여겨서
35 시비(是非)가 어지러우니, 잠정적으로 이를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6 ○ (굶주린 백성에게 일을 시키고, 음식을 내려 준다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37 ○ 주청사의 행차가 돌아오다가 의주 중강(中江)에 이르러 역졸 다섯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38 임금이 이를 듣고는 놀라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역졸이 비록 미천할지라도 만 리 길을 왕복하여 겨우 우리 국경에 이르러 뜻밖에 물에 빠져 죽었으니,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하다.
39 압록강이 어찌 패선(敗船)할 곳인가? 그런데도 본부에서 썩은 배로 사람을 건너다가 이런 사고를 초래하였으니,
40 부윤 홍숙을 먼저 파면한 후에 추고하라." 하였다. 이어 본도에 명하여 빠져 죽은 사람을 우휼하게 하였다.
41 ○ 7일에 비로소 구창(舊倉)에서 죽을 마련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였다.
42 ○ 10월 14일에 평안도에 사나운 호랑이가 횡행하여 물려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43 ○ 11월 26일, 이 때 근교에 호환(虎患)이 극심하였으므로, 삼군문에서 포수를 내어 호랑이를 잡도록 하였다.
44 묘당에서 말하기를 "무사 이정방이 가장 용감하여 호랑이를 잘 잡는다고 이름이 났습니다.
45 청컨대, 서북인을 모집하여 일대를 만들고, 이정방으로 하여금 영솔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6 ○ 12월 17일에 옥당관을 소대하여 동국통감을 강하였는데, 고구려 안시성의 일에 이르렀을 때
47 임금이 한탄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수, 당의 백만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48 그러나 우리 나라는 지방이 고구려에 비하여 배나 크고 산천이 험준한 것은 고금이 같은데도,
49 병자년의 난리에 오랑캐 병졸이 마치 무인지경같이 밀려 들어와, 마침내 하성(下城)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 일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하고,
50 또 말하기를 "이경석의 삼전도 비문은 내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사람을 시켜 보았더니, 그 글의 내용이 극도로 찬양한 것이었다.
51 비록 하는 수 없는 상황에서 쓴 글이라지마는, 어찌 이렇게 미화할 수 있는가? 문장 중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매우 많았다." 하였다.
52 시독관 이만성이 아뢰기를 "우리의 사정을 정백 견양(鄭伯牽羊)에 비유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숨은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니,
53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명에 응하여 지은 것을 잘못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54 칭송하고 찬미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송시열의 비난이 마땅하였다.
55 이하성의 무리가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선정을 추욕한 것이 끝이 없었으니, 참으로 몹시 한탄스러운 일이다.
56 비문을 보고 난 뒤에야 바야흐로 그 비난이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57 ○ 15일에 제주에 큰 기근이 들었으므로, 곡식 8천 석을 양남의 연해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하고, 배로 운반해서 진휼하게 하였다.
43 ○ 숙종 30년(1704) 1월 4일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을해년(21)과 병자년(22)에 큰 흉년이 들고
2 무인년(24) 과 기묘년(25)에 지독한 여역이 있은 이래 마치 병화를 겪은 것과 같아서 백성들이 아직도 소생하지 못하고 있다.
3 거기다가 3년 동안 홍수가 져서 재해가 비상했기 때문에 팔도가 계속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데, 서북이 더욱 극심하다.
4 다친 사람 보살피듯 하는 애틋한 나의 마음이 궁궐에서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렇게 저축이 탕갈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5 오늘날 군신 상하가 진실로 성심으로 진구하는 일에 마음을 다한다면 어찌 구제하여 살릴 방도가 없겠는가?
6 안으로 진구를 맡은 신하와 밖으로 어사와 방백은 나의 이러한 측은해 하는 마음을 본받아 구황책을 강구하고, 부지런하여 나태함이 없도록 하라.
7 권농에 이르러서는 평년에는 이를 급선무로 삼는 것인데, 더구나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는 때이겠는가?
8 사목을 신명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에 힘쓰게 해서 전야(田野)를 묵히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9 ○ 4월 17일에 전교하기를 "왕자가 저택이 있어야 출합(出閤) 할 수 있는데,
10 연잉군은 길례(吉禮)가 이미 지났어도 아직 제택이 없고, 방금 큰 역사가 한참이어서 영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11 이것도 또한 부득이한 일이니, 먼저 해조로 하여금 값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12 연잉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이현에 갑제(甲第, 큰 집)가 있는데,
13 임금은 또 왕자를 위하여 별도로 저택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14 조신들 사이에 말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우선 부득이하다는 전교를 내렸으니, 중외가 남몰래 탄식하였다.
15 ○ 충청도 유생 서후경이, 고 충무공 이순신을 위하여 아산 땅에 사당을 세우기를 청했으니,
16 이는 이순신이 생장(生長)한 고향이고, 구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7 ○ 숙종 31년(1705) 6월 10일, 당초에 서로(西路)의 적곡에 축난 것이 많으므로, 그때의 수령들이 터무니없이 수를 불려 탕감하였다.
18 그 수가 많아 30여만 석이나 되었으므로 조정에서 다시 사핵하게 하였더니,
19 각 고을에서 게을리하여 끝까지 사핵하지 않고, 늘거나 준것이 없다고 첩보한 자가 31인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렀다.
20 ○ 6월 22일에 흥양 사람 이화에게 대대로 전해 오는 언전(堰田,둑을 막아 만든 밭)이 있었는데,
21 출신 정광우가 샀다 하고 몰래 연잉군에 팔았으므로, 해마다 잇따라 송사하여 항변하였다.
22 이때에 이르러 판윤 민진후가 피차의 문서를 가져다가 살핀 뒤 율문에 따라 죄주고, 그 전토를 본주에게 돌려주기를 계청하였다.
23 전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명백하게 살펴서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24 ○ 사신은 말한다. "전토를 훔쳐 판 자와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는 거의 다 궁가에 투탁하는데,
25 한 번 궁가에 들어간 뒤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따지지 못한다.
26 혹 정사(呈辭)하여 호소하더라도 법관이 또한 흔히 두려워하며 미루고 결정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손을 쓰지 못하고 빼앗기니, 세상의 풍조가 다 그러하다.
27 이따금 이화처럼 스스로 호소하고 민진후처럼 밝게 결정하는 자가 있어도
28 명백하게 살펴서 품처하라는 명이 있으니, 이미 명백히 살폈는데 무엇을 살펴서 다시 밝히겠는가?
29 이에 앞서 구가(具家)의 송사에도 이런 분부가 있었다.
30 귀한 친왕자(親王子)로서 이것이 없더라도 어찌 부유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31 성상이 이 폐단을 살펴 알아서 돌려주라고 명한다면,
32 생업을 잃은 고달픈 백성에게 힘입을 것이 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니, 어찌 공평하고 밝은 정치에 흠이 없겠는가?"
33 ○ (임금을 욕보일 생각을 하지 말고, 이 일을 경계하여, 세상의 사람들을 경계하고, 살펴야 할 것이다. 이 말의 이치를 깨닳아야 한다.)
34 ○ 9월 9일에 왕자 연령군 이헌이 숙은(肅恩)할 때에 이조의 낭관이 교지를 전해야 하는데, 미처 오지 않아 왕자가 오랫동안 뜰에 꿇어앉아 있었다.
35 임금이 대내에서 보고 진노하여 정랑 조도빈의 벼슬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36 임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으므로, 액정(掖庭)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37 ○ 10월 1일, 금년 인민의 호구수는, 경성 오부와 팔도의 원호가 1백 37만 1천 8백 90이며,
38 인구가 6백 13만 8천 6백 40인데, 남자는 3백 7만 5천 6백 2명이고, 여자는 3백 6만 3천 34명이었다.
39 ○ 숙종 32년(1706) 3월 3일에 사학 유생 송무원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40 "영의정 최석정은 인조 때에 화친을 주장한 사람인 최명길의 손자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으니,
41 우리 임금을 대신하여 황단(皇壇)의 제사를 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42 승정원에서 대신을 쳐 흔들고 조정을 괴란시켰다는 명목으로써 아뢰니,
43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려 송무원을 먼 변지로 정배하고, 그 소는 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44 ○ 9일에 영의정 최석정이 진소하여 그의 조부 최명길의 일을 신백(伸白)하였는데,
45 대략 말하기를 "신의 조부가 화친을 주장한 의논은 스스로 본말(本末)이 있어,
46 인조 5년의 일은 뜻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데 있고,
47 인조 14년 봄의 일은 근심이 흔단을 도발하는 데 있었으니,
48 남한 산성의 일에 이르러서 어찌 그만두어도 될 일을 하였겠습니까?
49 그 때의 청론이 혹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로만 주장을 하였으나,
50 신의 조부는 말하기를 '명나라에 진실로 망극한 은혜가 있으나, 이미 사직과 백성이 있는데 어떻게 필부(匹夫)의 양지만을 변통성 없이 굳게 지키겠는가?' 하고,
51 종국(宗國)이 거의 망하게 된 것을 민망히 여겨 일신(一身)의 이해를 돌아보는 데 겨를이 없었으며,
52 황폐한 땅에 조정을 세우고 잿더미에서 국력을 수습하여, 안으로는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하고 밖으로는 대의를 신장시키며 마음이 피로하고 힘이 다하였으니,
53 인인 군자(仁人君子)는 마땅히 측연한 마음으로 그 뜻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54 ○ 답하기를 "화친을 의논한 것은 진실로 종사를 위하는 데서 나왔으니, 존주하는 의리를 마음에 잊지 않고,
55 반드시 죽어야 할 처지에 뛰어들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을 나도 익히 알고 있는데,
56 이것이 어찌 하찮은 송무원 같은 무리가 감히 방자한 뜻으로 헐뜯을 수 있는 것인가?" 하였다.
57 ○ 11월 20일에 사노(私奴) 예룡이 술에 취하여 대궐 안으로 넘어 들어갔으므로 죽을 죄로 논하려 하는데,
58 임금이 취한 나머지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
59 ○ 12월 25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송무원은 선비라고 이름하는데 이런 일을 하였으니, 정상이 가증스럽다." 하자,
60 우의정 이이명이 말하기를 "일은 매우 괴망(怪妄)하나, 그때 판부사 서종태가 10세를 용서한다는 말을 인용한 것은 그 뜻이 매우 좋습니다. 석방하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고,
61 형조 판서 김우항이 말하기를 "송무원은 송시열의 손자입니다. 국가에서 유현을 대우하는 것이 자별하니, 특별히 은전을 쓴들 불가한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62 집의 이덕영, 사간 이관명이 말하기를 "말이 광망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반드시 쳐서 흔들려는 뜻에서 나왔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63 10세를 용서하는 뜻으로 석방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하였다.
64 임금이 말하기를 "석방하라." 하였다.
65 이관명이 사치의 해독을 말하고 왕자의 혼례 때에 검약하게 하기를 힘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44 ○ 숙종 33년(1707) 1월 5일에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서 백관의 조참을 받았다.
2 이이명이, 재신 윤이도와 이광적이 나이가 모두 여든이라고 하여 은전을 더해 줄 것을 청하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3 이인엽이 농사를 권장하는 뜻을 진달하고 그 부지런하고 태만한 데 따라서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 집의 이덕영이 최계옹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5 오로지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유감을 풀려고 말한 것이었는데, 임금이 즉시 윤허하였다.
6 ○ 사신은 말한다. "조종조에 상참과 조참이 있었으니, 그 뜻이 매우 아름다웠으나, 근세에 이르러서는 상참은 폐지되어 시행하지 않았고, 단지 조참만이 있었다.
7 대개 곧 그 한 해의 처음이자 만물이 장차 새로와지려고 하는데,
8 왕자는 정사를 베풀어 백성과 더불어 모든 것을 혁신하려 하니,
9 무릇 백성을 구제하고 치도(治道)를 이루는 요점에 관계된 것을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상주하도록 허락하였다.
10 한 해의 치화(治化)를 여기에서 점칠 수 있으니, 대개 이는 조종조의 아름다운 일인 것이다.
11 ○ 근년 이래로 비록 고사(故事)를 거행하기는 하지만, 그 보람이 없어서 대신은 이미 그 치도(治道)를 이루는 상주(上奏)하지 않고,
12 소신 또한 감히 자잘한 일을 상문하지 못하여 천이나 되는 관원이 우두커니 서서 고요하게 서로 바라보고 있다가,
13 잠깐 사이에 통례(通禮)는 예가 끝났음을 큰 소리로 알리는데 대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니,
14 돌아보건대 치도(治道)를 함에 무슨 도움이 있으리오?
15 ○ 일찍이 군부(君父)를 만나 보는 것으로써 어렵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저는 대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6 지금 세상에 어찌 말한 만한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성상의 청납(聽納)을 싫어함이 이를 터놓은 것인가?"
17 ○ 8월 29일에 헌부에서 아뢰기를 "서원의 설치는 일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래가 오래되자 폐단이 생겨납니다.
18 새로운 건물이 날로 증가하고 은액(恩額)이 두루 미쳐, 한 고을에서 세운 바가 혹은 5, 6개나 되어서
19 싸우고 떠드는 장소를 이루고 신역(身役)을 면하는 소굴이 되었으니, 변통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20 만약 각 고을에 있는 서원을 한 곳에서 합쳐 제사하게하여 한 고을 안에서 각각 세우지 않게 하소서" 하였다.
21 ○ 숙종 34년(1708) 12월 3일에 임금이 박권에게 명하여 강도(江都)의 형편을 먼저 진달하게 하니,
22 박권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대저 천연의 요새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요해처를 버리고 축성하는 일로써 불가하다고 합니다.
23 대개 한 섬의 주위는 1백 40리나 되는데, 지방은 넓고 장벽은 없으니, 한 곳을 실수하면 존망이 결정됩니다.
24 이제 만약 축성하는 데에 내외의 험고함을 의거하고 수륙(水陸)의 성원을 의지한다면 적군은 반드시 감히 들어오지 못할 것이며,
25 비록 들어왔더라도 그 형세도 반드시 감히 머물러 있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26 ○ 박권이 말하기를 "진강(鎭江)의 목장은 오랫동안 도민의 해가 되었습니다.
27 곁에 가까운 전지(田地)가 늘 유린을 당하는데, 곡물이 여물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말을 몰아내기 위하여 밤마다 떠들고 있으며,
28 거주하는 백성이 울타리가 없으므로 수확하여도 덮고 저장하지 못한 것은
29 한 번 말떼가 지나가면 죄다 없어지고 남은 것이 없으니, 백성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는 것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30 지금 만약 백성에게 경작을 허락한다면 수년이 되지 않아서 여러 백호의 백성을 얻어 병졸과 식량이 풍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31 선조의 유의(遺意)를 사람이 누군들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다만 고금이 형세가 다르므로 이해가 명백합니다." 하니, 이인엽이 따라서 찬동하였다.
32 임금이 마침내 명하여 목장을 혁파하고 그 말을 다른 섬에 옮기게 하였다.
33 ○ 이때 한필영이란 자가 있었는데, 사람됨이 영교(佞狡)하고 요악(妖惡)하였다.
34 일찍이 김석주의 집에 출입하였는데, 김석주가 졸하고서는 즉시 배반하여 버렸다.
35 이때에 와서 이인엽이 바야흐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보고는 그 재능으로써 이인엽에게 자랑하니,
36 이인엽이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여 말하는 것을 모두 그대로 따랐다.
37 대개 그가 진달한 여러 곳의 축성과 설진 등의 일은 대부분 한필영의 구획에서 나왔던 것이다.
38 그 뒤에 이인엽이 임금에게 주달하기를 "노강 첨사 한필영은 항상 국가를 위하여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39 한 방면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또 그 재능이 쓸 만합니다.
40 청컨대 선사포 첨사로 옮겨 임명하여 관방의 중지(重地)에서 힘을 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1 ○ 선사포는 대개 웅진(雄鎭)이라고 일컫는데, 한필영이 이를 탐내어 계략으로써 이인엽을 꾀어서 이를 취득했다고 한다.
42 이때에 국가가 승평(昇平)한 지 70여 년에 백성이 병란을 알지 못하고 군무(軍務)가 폐이해졌으므로, 묘당에서 이로써 근심한 지가 오래 되었다.
43 이때에 이르러 민간에서 전언하기를 "청인이 관동의 표하군 2만을 영고탑에 내어보낸다." 하였는데,
44 잇따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나오는 청인이 있으므로, 물어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에 조야(朝野)가 모두 의심하여 두려워 하였다.
45 ○ 12월 26일에 장령 조석주가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붕당(朋黨)의 화해(禍害,재난)가 어찌 우리 조정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있겠습니까?
46 진신(搢紳)의 일족이 문호(門戶)를 나누어 처음에는 둘에서 셋이 되고 중간에는 넷에서 다섯이 되었습니다.
47 경신년(숙종6년)에도 경계하지 않고 갑인년(현종15년), 기사년(숙종15년)에도 경계하지 않았으며 경신년, 갑술년(숙종20년)에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48 기사년에는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고 살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49 옛적 우리 인조와 효종께서는 오랫동안 외방에서 노고(勞苦)를 겪으시어 인정(人情)을 환하게 아셨으므로,
50 모두 서둘러 고위에 진열하고 전조의 당상관과 낭관들도 또한 서로 섞어져 있도록 하여
51 당의의 편견이 그 사이에 틈입(闖入,난입)하면 엄하게 화내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52 그런 까닭으로 당시의 군신은 마음을 순수하게 가지고 생각을 바꾸어서 공적인 경우는 국사를 서로 의논하였고,
53 사적인 경우는 경조사에 서로 위문하여 점차로 대동 단결하는 지경에 들어갔으며,
54 우리 현종에 미쳐서는 정령(政令)과 시조(施措)를 성헌(成憲)만을 살펴보았으니,
55 신민(臣民)은 욕되게 죽는 근심이 없고, 조정에는 환역(換易)하는 거조가 없어
56 후인(後人)에게 좋은 계획을 끼쳐 주신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57 ○ 신은 생각하기를 평시에 식록(食祿,녹을 얻어 생활)하는 것은 사람마다 가능하지만
58 만약 불행하게도 외적의 침입이 변경에 있을 경우 한쪽 편의 사람으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고,
59 네 편의 실지(失志,뜻을 잃은,낙담)한 무리들이 그 뒤에서 비평하면서
60 그 패망하기를 바란다면, 알 수 없지마는 국사가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61 군정(軍政)이 어설프게 조심을 하지 않아 잘못을 저리는 것이 이 때와 같은 적이 없습니다.
62 ○ 열읍(列邑)의 속오병을 기재한 문안에는 천(千) 혹은 만(萬)이라 하였지만 그 실지(實地)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63 그런 까닭으로 갑인년(현종15년)의 거짓 경보에 모두가 도피하고 한 사람도 집에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64 ○ 타노(他奴)가 양녀(良女)에 장가든 자를 모역(母役)에 따라서 양민으로 삼으면
65 양민의 수효는 반드시 날로 사라지고 달로 줄어드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66 ○ 또 삼가 생각하건대 궁가(宮家)에서 산해(山海)를 절수(折受)하고 전토(田土)를 매취(買取)한 것이 오늘날처럼 분분(紛紛)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67 유원(幽遠)한 곳에 사는 백성이 앉아서 구업(舊業)을 잃고 있으니, 원하건대 도신(道臣)을 명확하게 다스려주고,
68 또한 마땅히 그 인연(夤緣)하여 지도하는 사람을 적발하여 엄격히 징계하며 다스림을 더하소서.
69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고 인심이 교사(巧詐)한 것은 모두 돈에 말미암았으니, 무궁한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70 ○ 잘 떠들면서 할 말을 다하여도 끝내는 멀리하여 물리침을 당하고,
71 마음을 다하여 일을 맡아도 자칫하면 비평과 탄핵을 만나게 되니, 오늘날의 국사는 또한 어렵습니다." 하였다.
45 ○ 숙종 36년(1710) 10월 19일에 경상도 삼가의 출신 홍방필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되자,
2 그 처 최씨와 그 딸 홍씨가 여러 해 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손수 칼로 찔러 원수를 갚았는데,
3 도신(道臣)이 이를 계문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최씨, 홍씨 두 여인은 뜻이 반드시 복수하려는 데 있었으므로,
4 마침내 기회를 엿보다가 직접 칼로 찔렀고 또 관문에 나아가 자수하였으니,
5 그 늠름한 절의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이는 특별히 함부로 죽인 죄를 용서해 줄 뿐만이 아니다." 하고, 인하여 대신에게 물어서 품처하도록 하였다.
6 판부사 이유와 좌의정 서종태가 모두 말하기를 "법에 의하여 함부로 죽이는 것은 뒷날의 폐단이 염려되므로,
7 정려하는 일은 가볍게 시행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급복(給復,부역을 면제) 하여 가상하게 여김을 보이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8 ○ 20일에 금부 도사 이언위 등이 상소하여 북한 산성을 쌓을 것을 청하자,
9 임금이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생각하여 헤아리겠다." 하였다.
10 진사 허극이 상소하여 도성을 수축할 것을 청하자,
11 임금이 답하기를 "넓고 큰 데다가 견고하지 못한 병폐가 있어서 지키면 반드시 위태할 것이므로, 내가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다.
12 묘당의 여러 신하와 더불어 특별히 다른 곳을 의정하여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킬 것이다." 하고,
13 임금이 하교하기를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특별히 다른 곳을 의논하겠다는 뜻을 진사 허극의 소비에서 유시하였다.
14 도민(都民)은 바로 나의 적자인데, 어떻게 난리에 임하여 보전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15 지금 가서 살펴본 두 곳 가운데서 대계를 정해야 마땅하나, 이는 오히려 두번째의 일이다.
16 무릇 관방(關防)에 관계된 긴요한 곳은 마음을 다하여 조치하고,
17 만약 경급(警急)이 있으면 힘을 합해 적을 방어해서 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첫번째의 급선무이다.
18 묘당으로 하여금 유의(留意)하여 봉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9 ○ 12월 28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성을 쌓는 역사는 석재를 뜨는 일이 가장 어려운데,
20 북한은 석재가 모두 그 땅에 있으니, 공력이 줄어 편할 것이다.
21 마땅히 이렇게 평온한 때에 속히 성취시켜야 하니, 일을 지연시킬 수 없다." 하였다.
22 ○ 숙종 37년(1711) 1월 10일, 처음에 삼척 사노(私奴) 후일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23 그의 처 응옥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고 그 시신을 빼앗았다.
24 감사가 의열(義烈)로서 조정에 계문하니 예조에서 정려하기를 청하였는데,
25 이에 이르러 삼척 부사가 도신(道臣)에게 보고하기를 "응옥은 연전에 개가(改嫁)하여 이거하였으니, 이미 두 지아비로 고쳤다면 정려의 은전을 경솔하게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26 감사가 이를 예조에 보고하니, 예조에서 계청하기를 "전에 내렸던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7 ○ 3월 17일에 남구만이 졸하니, 나이가 83세였다.
28 남구만은 남재의 후손인데 중간에 형세가 기울어 세력을 떨치지 못하여 호서(湖西,충청도) 의 결성에 우거하였다.
29 남구만은 젊어서부터 문재가 있었고, 필법도 또한 공교하고 아름다왔다.
30 과거에 급제하기에 이르러서는 청반(淸班)의 길에 조금도 거리끼고 막힘이 없었으며,
31 또 송준길의 문하에 학업을 청하여 문인, 사우(士友)와 더불어 종유(從游)하니 당시의 명망이 더욱 높아갔다.
32 성품이 편협하고 강퍅하며 각박한데, 강직하여 패려궂고 뽐내는 행동을 좋아하므로 세상이 입을 모아 강개(剛介)의 선비라고 일컬었다.
33 숙종 20년에 조정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제일 먼저 장희재를 옹호하였으며,
34 그 뒤 업동의 옥사에 더욱 낭패하고 실수해서 명분과 의리와는 적수(敵讐,원수)가 되었고,
35 마침내 흉악한 계략이 더욱 성하기에 이르러 화가 궁위(宮闈,궁궐)에 미치게 되었다.
36 젊어서는 자못 청렴 간결하여 사심이 없는 것으로써 자허(自許)하더니 관작이 높아지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
37 만년(晩年)에 서자를 위하여 산업을 경영했는데, 비루하고 외잡(猥雜)한 일이 많아서 천종(賤宗,천한 종실)) 의 모욕까지 받게 되기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38 남구만은 그가 이미 사류에서 용납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고는 정론(正論)을 배척하고 억제하는데 더욱 꺼리는 바가 없었다.
39 만년에 문자를 저술하면서 송시열과 김수항 부자(父子)를 침해하고 비방하였는데,
40 그 말이 몹시 해괴하고 패악하여 그 평생의 심술을 여지없이 드러냈다고들 한다.
41 뒤에 그의 무리가 국권을 잡아 시호를 '문충(文忠)' 이라 하였다.
42 ○ 4월 30일, 지난밤에 연은문에 괘서한 사건이 있었는데, 조선국에 고유한다고 일컬은 글이었다.
43 그 글에 이르기를 "대개 듣건대 이적(夷狄,동이족,만주족)을 물리치고 악인을 제거하는 것은 임금의 큰 책무이다.
44 이에 호명(胡命,청나라 운명)은 백년의 오랜 궁진함을 당하였고, 황강(皇綱)은 다시 창성할 운세에 속하였다.
45 저 청호(淸胡,청나라)라는 자가 일시적인 소와 양의 힘을 업고서
46 백대(百代)를 이어온 문물의 나라를 별안간 침입하여, 우리 종묘을 멸망시키고 우리 황통을 찬탈하였었다.
47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의 그 신무(神武)하심은 진실로 타고난 모습에서 품부(稟賦)하였고,
48 의려(義旅,의군)를 처음 일으키니, 해외의 12국이 표문을 받들어 신(臣)이라 일컬었다.
49 돌아보건대 조선은 본시 예의지국으로 일컬었고, 대대로 충정을 돈독히 하였다.
50 생각하건대 우리 만력 황제(명나라 신종)께서 명하여 궁중의 재화를 가지고 이 동방에 혜택을 베풀게 하였으니,
51 그 은택이 망극한 지라, 그대 삼한의 군신은 뼈에 새기어 후손에 이르기까지 감사하고 떠받들기를 끝이 없게 함이 마땅할 것인데,
52 어찌하여 흉노의 뜰에 무릎을 꿇고, 신첩(臣妾)의 욕됨을 달게 여긴단 말인가?
53 만약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살코기를 삼키는 법이어서 부득이 항복하여 의부(依附)하였다고 말한다면
54 혹은 그럴 수도 있겠지마는, 천조(天朝)를 공격하는 것을 돕는 데에 이르러서는, 차마 이런 흉역한 짓을 하다니, 그대에게는 편안하던가?
55 또 오랑캐에게 항복한 원수(元帥)는 그 죄가 옛 이능(李陵,흉노에게 항복한 전한의 무인)보다 큰 것이었으나 마침내 죽임을 면하였다.
56 ○ 이에 출전할 기일을 다시 가리니 날짜가 길하고 때가 좋으며, 제왕의 군사가 만전하니 명분이 바르도다.
57 귀국은 휴양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찌 일전(一戰)할 마음이 없겠는가?
58 국토는 비록 편소하더라도 천리의 땅을 가지고서 두려워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59 깊은 원수를 보복할 기회가 이 한 번의 거사에 있으리니,내조(來朝)하기를 기다리겠노라." 하고는,
60 말단에, '후홍무(명나라 태조의 연호) 3년 2월 일에 천조 대원수는 격(檄)한다.'고 쓰였다.
61 ○ 영의정 서종태가 아뢰기를 "글자의 모양과 문체가 중국 사람의 소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다.
62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이것이 중조(中朝,명나라)의 격문이라면 몰래 연은문에 걸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그 조어(措語)가 거짓되고 속인 것이 명백하다.
63 비록 중조를 가탁하여 일컬었으나 항로 원수, 매주 모신(賣主謀臣), 대보 신건(大報新建) 등의 말을 어찌 해외 사람이 알 것인가?" 하고,
64 임금이 말하기를 "명백히 이것은 인심을 혹란(惑亂)케 하려는 계략이니,
65 강도(江都)의 투서인 이유정의 예에 의하여, 1천 냥의 은과 가선의 품계를 걸어 체포 하라." 하였다.
66 ○ (이적(夷狄)이라 하면 우리 조선도 동이족으로서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를 깨닳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통탄할 일이며, 동이족에는 만주족이 포함된다.)
67 ○ 10월 19일에 북한성 역사를 4월 초3일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마쳤다.
68 3군문에서 쓴 재력은 쌀이 합계 1만 6천 3백 81석이요, 무명베가 7백 67동 12필 남짓이였다.
46 ○ 숙종 38년(1712) 3월 23일에 접반사 박권이 아뢰기를 "청나라 차관이 넘어 온 뒤에
2 응당 백두산 위를 경유하여 갈 것인데, 생각건대, 반드시 험준하여 가기 어려울 듯하고,
3 만약 억지로 다른 길을 묻는다면 산 남쪽의 길이 연변에서 조금 떨어진 깊은 곳이라 하더라도 장차 지시하려 합니다. 指示 하니,
4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험준한 곳을 지시하겠지만 억지로 묻는다면 형세상 장차 그렇게 지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5 박권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정계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6 백두산 남쪽의 텅 빈 곳은 우리 나라 백성이 들어가 거접(居接)하고 있지 않으니,
7 저 사람들이 만약 그 곳을 가리켜 그 지경 안이라고 이른다면 근거로 삼아 다툴 만한 문적이 없습니다." 하고,
8 판중추부사 이유가 말하기를 "이미 두 강을 경계로 삼았으면 중간의 육지도 또한 마땅히 강물의 발원하는 곳을 가로로 끊어 한계로 삼아야 하니,
9 이것으로 쟁집(爭執)하되, 저 사람들이 만약 듣지 않는다면 따로 대신을 보내는 것도 또한 안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10 임금이 말하기를 "강역은 지극히 중요하니 반드시 힘써 다투되,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즉시 장문하라." 하였다.
11 박권이 또 말하기를 "장문의 왕복에 언제나 여러 날이 소요되니, 사기(事機)를 점점 그르치게 됩니다.
12 큰일 외의 사소한 절목은 남병사, 북병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3 ○ 5월 3일에 총융청에서 북한 산성의 중성(重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14 ○ 15일, 접반사 박권과 함경 감사 이선부가 13일에 치계하기를 "총관이 압록강 상류에 이르러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게 되자,
15 강을 건너 그들의 지경을 따라 갔으며 늘 천리경(만원경)을 가지고 산천을 보았습니다.
16 역관이 백산 지도 1건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17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18 이선부가 또 치계하기를 "다시 혜산 첨사로 하여금 두만강의 근원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더니,
19 강의 근원은 백두산 산마루 중간에서 시작되어 거의 8, 90리 흐름이 끊어졌다가
20 감토봉 및 1식(息) 남짓 되는 곳에 이르러 땅 구멍에서 솟아나와 무릇 세 갈래로써 두만강이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21 ○ 23일에 접반사 박권이 치계하기를 "총관이 백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22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로 삼았으며,
23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24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이 되었으니 분수령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25 고개 위에 비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의 뜻이다.
26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27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28 ○ 6월 3일에 접반사 박권과 함경 감사 이선부가 치계하기를 "총관이 백두산에서 내려왔기에,
29 신 박권이 말하기를 '임강현 근처에 한 물이 흘러 와서 대홍단수에 모이니,
30 분명히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로서 이것이 곧 진짜 두만강인데,
31 흠차께서 찾으신 수원(水源)은 바로 대홍단수의 상류입니다.' 하니,
32 총관이 산도(山圖)를 꺼내서 말하기를 '내가 조선 사람과 함께 형세를 자세히 살펴서 수원(水源)을 두루 보았는데, 이것 외에 다른 물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33 ○ 신 박권이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거리가 10여 리에 지나지 않으니, 흠차께서 잠시 보시면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34 총관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필첩식을 보내어 황상께 주문하였으니, 내가 수원을 잘못 찾았다면, 국왕이 황상께 주달한 연후에야 다시 순심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35 총관이 또 산도(山圖)를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수원의 흐름이 끊긴 곳이 이처럼 모호하여 분명하지 않아
36 만약 표지를 세우지 않는다면 피차 고거(考據)하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목책으로 한계를 정함이 어떻겠는가.' 하기에,
37 신 등이 대답하기를 '목책은 그곳에 나무가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니, 차라리 그 편부(便否)에 따라서 혹은 흙을 쌓고 혹은 돌을 모으며, 혹은 목책을 설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38 하지만 감히 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니, 마땅히 조정에 품하여서 역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니, 대국 사람이 와서 간검(看檢)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39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 사람이 반드시 와서 볼 것 없이 거행 여부를 매년 절사(節使)편에 나에게 알려 다시 아뢰게 하는 근거를 삼을 것이며,
40 표지를 설치한 뒤에는 매년 순심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고,
41 또 말하기를 '산도(山圖) 1본은 돌아가 황상께 아뢰어야 하고, 1본은 마땅히 국왕 앞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42 두 강의 원류가 이미 작정되고 허다한 인마(人馬)가 하나도 손상됨이 없었으며,
43 총관이 비단 모든 일에 폐단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그 행자(行資)에서 소를 연달아 내어 주어
44 따르는 사람을 먹이고 10석의 쌀을 또 길을 여는 장졸 등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실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45 ○ 9일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저 사람들의 백두산 행차에 사명을 맡은 신하가 함께 가야 하는데도,
46 접반사 박권과 함경 감사 이선부는 대신 편비를 보내고 몸이 쇠약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47 백두산의 길이 비록 험난하다고 하지만 차원(差員) 이하가 모두 통행했으니, 접반사와 함경 감사만 유독 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48 경계를 정하는 막중한 일에 다만 1장의 수본으로 상문하였을 뿐,
49 물의 근원을 다투어 논할 즈음에는 이미 목격하지도 않고 단지 '예예'하고 답하기만 하였으니,
50 사명을 맡긴 뜻이 어찌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박권과 이선부를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51 또 논하기를 "북병사 장한상은 비국에서 강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서 지형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는데도,
52 이미 직접 살피지 않고 다만 장교의 거짓 보고에 빙거(憑據)하여 흐리멍덩하게 치계하였으니, 정죄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47 ○ 12월 7일, 이때 함경 감사 이선부가 백두산에 푯말 세우는 역사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하였다.
2 겸문학 홍치중이 일찍이 북평사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3 상소하기를 "신이 북관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4 ○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5 그 중에 가장 남쪽의 네번째 갈래는 곧 장한상이 가장 먼저 가서 살펴보려 하였다가 빙설에 막혀 전진하지 못한 곳입니다.
6 그 북쪽의 세번째 갈래는 곧 김사정 등이 추후로 간심(看審)한 곳이고,
7 그 북쪽의 두번째 갈래는 곧 나난 만호 박도상이 청차가 나왔을 때 도로에 관한 차원으로서 따라갔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8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가 된 것이고,
9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10 당초 청차가 수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의 근원이라.'고 하고,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습니다.
11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12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13 ○ 신이 여러 차사원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14 감역과 차원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15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를 두루 보지 못했습니다.
16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17 그래서 신이 허양과 박도상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18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19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0 ○ 대개 청차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21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22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23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24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25 하류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26 ○ 그러므로 신이 차원들과 함께 상의하기를 '이미 잘못 잡은 강의 수원을 마음대로 우리가 변경할 수는 없지만,
27 하류가 어떠한지는 논할 것 없이 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 이상은 진실로 마땅히 푯말을 세우는 안이 되어야 하니,
28 먼저 비를 세운 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되,
29 나무가 없고 돌만 있으면 돌로 쌓아 돈대를 만들고 나무만 있고 돌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을 세우기로 한다.' 라고 했더니,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30 ○ 그런데 신이 뒤에 들으니, 허양 등이 미봉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책을 두 번째 갈래의 수원에다 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31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32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33 이는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34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35 ○ 영의정 이유가 아뢰기를 "수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말하지도 않고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잡아다 추문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6 ○ 12월 16일, 일전에 이유가 아뢰기를 "강화의 북일 목장은 유수의 청으로 인하여 혁파했는데,
37 이번에 나누어 가진 사람은 장교 및 사대부와 품관이 대부분이고,
38 바깥의 백성을 모집하여 모은 것은 몇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39 또 거둔 세(稅)는 본부의 수용을 보충하고 있으니 더욱 조가(朝家)에서 혁파한 본의가 아닙니다." 하고, 이어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40 그때의 유수 대사성 민진원이 이 때문에 사직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우악(優渥,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48 ○ 숙종 39년(1713) 1월 22일에 임금이 홍치중에게 북관의 일을 상세히 말하도록 명하니,
2 홍치중이 말하기를 "북로(北路)는 전세(田稅)와 대동의 법규가 없으니,
3 공상(供上) 이외에는 따로 면제해 줄 만한 부역이 없고, 군역을 충당하기 어려움은 삼남과 차이가 없습니다.
4 그리고 또 그 풍속이 사납고 고집이 세어 한 번 그 마음을 결정하면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5 잘 어루만져 달래어 그들의 환심을 얻는다면 후일 나라가 위급할 경우에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는 우환은 없을 것입니다.
6 그들의 장기(長技)가 마치 흉노와 같으니, 만일 용병을 하고자 한다면 이들을 버리고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그 민심을 굳게 결속시켜야 합니다." 하고,
7 또 말하기를 "문학이 있는 사자(士子)가 점차로 많아지니,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하고,
8 이내 이재형, 윤민건, 한세양, 채진원 등 네 사람을 추천하여 특별히 수록해서 북인을 용동(聳動)시킬 것을 청하니,
9 임금이 옳게 여겨 이재형 등을 해조로 하여금 녹용토록 하였다.
10 ○ 또 백두산의 형편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무산(茂山) 70리로부터 임강대(臨江臺)에 이르기까지 또 10리가 되는데,
11 어활강(魚濶江)을 건너서 산밑에 이르니 땅은 광막(廣漠) 하나 인가(人家)는 없었고,
12 험한 길을 구불구불 올라가서 정상에 오르고 보니 산이 아니고 바로 평야였습니다.
13 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 삼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하늘의 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거의 3백 리에 달했고,
14 거기서 5리를 더 가니 비로소 비석을 세운 곳에 당도했습니다. 비석은 매우 길이가 짧고 폭이 좁았으며, 두께는 몇 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5 쪼아서 갈아 놓은 것이 정밀하지 못했고 세운 것도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16 허술함이 이 지경에 이르니, 그(청나라 목극동)가 공력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7 쌓인 눈이 사철 녹지 않으므로 백두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연유된 듯합니다." 하였다.
18 ○ 윤5월 27일에 부칙사가 말하기를 "백두산의 물줄기와 산맥의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귀국의 지도를 보고자 하는데, 이는 황제의 명령입니다." 하였는데,
19 임금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답하기를 "황폐하고 외떨어진 곳이어서 일찍이 지도를 둔 적이 없습니다." 하니,
20 부칙사가 또 반드시 보고 싶다는 뜻으로 다시 품하였다. 다시 답하기를 "백두산의 산맥과 물줄기는 동쪽으로 흩어져 곧바로 남해에 이르러 끝납니다." 하였다.
21 ○ 9월 19일에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백두산에 목책을 설치하는 역사를 흉년 때문에 우선 정지하였다.
22 ○ 12월 9일, 이때에 충주 사람 이동석이 풍수설을 몰래 새겨 벽돌을 구웠는데, 허망한 말이 많았다.
23 도신(道臣)이 붙잡아 임금께 아뢰니, 국청을 베풀어 신문하도록 명하였다.
24 ○ 숙종 40년(1714) 3월 24일에 제주에 역질이 크게 유행하여 1천여 명이 죽었다.
25 ○ 4월 21일에 전교하기를 "오늘 제주의 공인(貢人)을 다시 불러들여 물었더니,
26 이른바 여역은 염병도 아닌데 너댓새 누워 앓다가 1개월안에 4백여 명이나 죽었다 한다.
27 지극히 놀라우며 참혹하다. 의사로 하여금 이에 상당한 약품을 넉넉하게 보내어 구료하도록 하라." 하였다.
28 ○ 8월 8일에 북병사가 경원에서 호인(好人)들이 강변에 집을 짓고 전토를 개간하는 일 때문에
29 장문하기를 "경원부의 군관들이 평복으로 변장하고 강변을 거닐다가 고기 잡는 호인을 만나 집을 짓고 농사짓는 연유를 물었더니,
30 대답하기를 '이 땅은 비옥한데다 또 영고탑의 호인이 장차 옮겨 오려고 한다 하므로 집을 짓고 농사 지을 땅을 먼저 차지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31 또 황제의 명령에서 나왔는가 영고탑 장령에게서 나왔는가의 여부를 물었더니,
32 대답하기를 '아직 황제의 명령도 없고 또 장령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33 또 훈융 건너편에 집을 짓는 호인의 호수와 호수의 이름을 물었더니,
34 대답하기를 '호수의 이름은 삼거요 호수는 단지 3호이며 종호(從胡)는 5명인데, 이는 후춘(後春)에 거주하는 호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5 ○ 10월 28일에 이조 참판 권상유가 소를 올려 연석에서 진달한 말을 거듭 아뢰어
36 청하기를 "청국에 자문을 보내어 경원, 훈융의 건너편에 호인이 전지를 개간하고 집을 짓는 일을 금지하게 하여 앞날의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니,
37 답하기를 "전석(前席)에서 이미 내 뜻을 효유하였고, 재자관이 돌아올 것이니, 사정을 상세히 안 뒤에 이자(移咨)함이 완전할 듯하다." 하였다.
38 ○ 12월 3일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지금 돌아온 역관의 보고서를 보았더니,
39 영고탑 수장의 진청으로 인하여 유병(留兵)을 첨가해 두고
40 이어 의접(依接)할 곳으로 만들라고 황지(皇旨)를 이미 얻었다고 하니,
41 우리 쪽에서 편안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을 수 없습니다.
42 괴원의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이런 일들은 거의 예부에 자문을 보낸 일이 많았고,
43 곧장 주청한 예는 일찍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먼저 자문을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44 자문을 논리적으로 잘 만들어서 반드시 사신이 관사(館舍)에 머무르고 있을 동안에 도달하도록
45 급히 일을 잘 아는 역관을 보내어 잘 주선하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46 숙종 41년(1715) 7월 1일에 북병사 조상주가 치계하기를 "마침 강변으로 나오는 호인이 있기에
47 불러서 묻기를 '오라(烏羅), 영고탑 두 곳의 호인이 앞으로 후춘(後春)지역으로 옮겨 살려고 한다는데, 그런가?' 하였더니,
48 답하기를 '그렇다. 강변 근처의 땅이 비록 비옥하다 하나, 금령이 지극히 엄하여 이미 집을 헐어 버린 일이 있었으니,
49 감히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후춘의 묵혀서 황폐해진 곳과 슬해(瑟海) 가의 빈 땅을 개간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50 또 묻기를 '슬해는 어디에 있는 땅인가?' 하니, '후춘의 동해 가에서 하룻길의 거리이며 땅이 또한 매우 비옥하다.' 하였습니다.
51 이른바 슬해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4, 50리 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라 하는데,
52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번호(藩胡)가 많이 살았는데,
53 어떤 때는 육로(陸路)를 따라 강을 건너 침범해 오기도 하고
54 어떤 때는 배를 타고 바닷길을 경유해 와서 서수라(西水羅), 조산(造山) 등의 진보(鎭堡)를 약탈했므 로, 번번이 그 피해를 받았었습니다.
55 그런데 지금 피인(彼人)들이 슬해를 차지하여 살려고 한다는 말이 실상(實狀)이라면 나중의 우환이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49 ○ 숙종 43년(1717) 5월 5일에 진휼청에서, 전에 초록한 굶주리는 백성 이외에
2 풍문에 따라 모여 온 경기 백성을 합하여 2만 5천 2백여 명에게 흩어 준 건량(乾粮)이 8백 67석인데,
3 인하여 양맥(兩麥)이 거의 익게 되었으므로, 사람마다 열흘 양식을 주어 헤쳐 보내겠다고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 ○ 7월 19일에 하교하기를 "5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온 끝에 안질이 더욱 고통스러워서 물체를 보아도 더욱 희미해 수응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었으니
5 국사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세자에게 청정하게 한다." 하였다.
6 ○ 28일에 예조에서 왕세자의 청정에 대한 절목을 팔방에 반포하였다.
7 ○ 8월 1일에 왕세자가 청정하였다.
8 ○ 숙종 44년(1718) 2월 7일에 왕세자빈 심씨가 훙하였다. 세자빈이 이날 유시부터 갑자기 병을 얻어 위중하였는데, 2경에 임종하였다.
9 ○ 3월 9일에 숙빈 최씨가 졸하였다. (6년만 더 살았다면, 아들, 영조대왕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을 것인데, 안타깝다.)
10 ○ 5월 1일에 도제조 이이명이 아뢰기를 "세자께서 탄생하신 것이 숙종14년 이었는데
11 그때 성상의 춘추는 30세가 차지 않았는데도 상하 모두가 걱정하고 황급해하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12 지금 동궁의 춘추가 이미 30세를 넘었으나 아직 종사의 경사가 없는데 빈궁께서 뜻밖에 서거하시니 국가의 불행이 심합니다.
13 변례에 대해서는 아랫사람들이 감히 우러러 청할 바가 아니나 국가에서 전부터 이미 시행해 온 전례가 있습니다.
14 금일의 사세로선 하루가 급하니, 청컨대 여러 대신들에게 두루 하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15 ○ 12월 2일에 평안도 내의 각 고을 백성으로 염병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4천 5백 50여 명이고, 사망한 자는 83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6 ○ 6일에 강화부의 백성으로 염병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5백 61명이고, 사망한 자는 96명이며,
17 개성부에는 한창 앓고 있는 자가 4백 40명이고, 사망한 자가 71명이라고 두 지역의 수신(守臣)이 아뢰었다.
18 ○ 15일에 함경도 각 고을에 염병으로 한창 앓고 있는 자가 4천 5백 70여 명이고, 사망한 자가 1천 2백 43명이며,
19 경상도 각 고을에 염병으로 한창 앓고 있는 자가 2천 3백 1명이고, 사망한 자가 3백 46명이며, 소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 1백 30여 두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20 ○ 숙종 45년(1719) 1월 10일에 강원도 백성인 김만기는 숙부 김석업이 동향인 준발에게 살해되자,
21 김만기가 마침내 10년 동안 경영하다가 끝내 준발을 죽이고 관가에 자수하였다.
22 본도에서 그 옥사를 상주하여 계복하였을 때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사유(事由)가 복수한 것이면 마땅히 죽음을 용서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자,
23 세자가 다시 본도로 하여금 상세하게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24 본도의 사장(査狀)에 과연 복수한 실상에서 나왔음을 거듭 진달하였고,
25 형조에서 복주하기를 "김만기는 숙부를 위해 복수하고 자수하여 죄를 청하였으니, 정상이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세자가 용서하여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26 ○ 20일, 처음에 서소(西所)에서 입직하던 군사 차원이 집에 돌아가서 양식을 가지고 궐문에 도착하였는데,
27 궐문이 이미 닫혔으므로 취한 김에 몰래 궁성을 넘다가 다른 군졸에게 붙잡혔다.
28 형조에서는 대벽(大辟,사형) 에 해당된다고 하였으나
29 세자는 그 범한 바가 술에 몹시 취하여 인사 불성 상태에서 나왔다 하여 특별히 용서하여 유배시키도록 하였다.
30 ○ 21일에 변방의 백성 주익환을 주살하였다. 주익환이 몸은 굶주리고 신역은 무겁다고 북사에게 하소연하자,
31 대간이 주살하기를 계청하여 해를 넘기도록 다투어 논하였는데,
32 이때에 이르러 세자가 대간의 말을 따라 마침내 의주의 경계 위에서 참수하게 한 것이다.
33 ○ 2월 3일에 우부승지 권엽이 말하기를 "천안 백성 윤대흥은 그 한 몸으로 일족 20여 인의 신포(身布)를 혼자 감당하다가,
34 그 곤고함을 감내하지 못하여 마침 그 집이 실화(失火)하자, 누워서 피하지 않고 마침내 불에 타서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35 인족(隣族)를 침징(侵徵)하는 참혹함을 이에서 볼 수 있으니, 지극히 불쌍하게 여길만합니다.
36 해당 수령에게는 마땅히 경책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37 세자가 수령은 추고하고, 윤대흥은 별도로 휼전을 더하게 하였다.
38 ○ 숙종 45년(1719) 10월 2일에 임금의 세째 아들, 왕자 연령군 이훤이 21세로 졸하였다.
39 사제에 나가 살았는데, 폐해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40 임금이 병든 후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며 조금이라도 게을리함이 없었으니,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다.
41 임금이 하교하기를 "졸한 연령군의 집에 친림하는 일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거행하지 못하였다.
42 ○ 11일 사시에 임금이 졸한 연령군 이훤의 상차(喪次)에 거둥하였는데, 세자가 어가를 따랐다.
43 ○ 숙종 46년(1720) 4월 24일에 성상의 환후가 더욱 무거워져 시약청을 설치하였다.
44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고치기 어려운 병이 날이 갈수록 더욱 더해지니, 다만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45 ○ 6월 8일에 도제조 이이명이 환시(宦侍)로 하여금 중궁께 아뢰기를 "날이 이미 밝았으니, 신 등이 잠시 물러갔다가 문안드릴까 합니다." 하였다.
46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오자 사관이 뒤따라 나왔는데, 막 시약청에 이르자 환관이 급히 나와
47 내교(內敎)를 전하기를 "우선 문안드리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이이명 등이 사관과 함께 황급히 달려들어가니,
48 연잉군(영조)이 이이명을 맞으며 말하기를 "드셨던 약물을 모조리 토해 내셨습니다." 하였다.
49 여러 신하들이 와내(臥內)로 들어가니, 임금이 목구멍 속에 담(痰) 끓는 소리가 크게 났다.
50 ○ 연잉군이 내전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다만 부원군만 남아 있고 도제조 이하의 관원들은 조금 물러가 있으라." 하였다.
51 세 제조와 사관이 물러나 기둥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때 궁녀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환시들도 눈물을 흘리며 몹시 바쁘게 다녔다.
52 중궁이 연잉군으로 하여금 전교하게 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명성 왕후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는
53 단지 가슴 앞에 한 점의 미지근한 온기가 있을 뿐이었는데도 능히 회복을 하셨다.' 한다.
54 성상의 병환이 비록 위중하기는 하지만 가슴과 배에 모두 온기가 있으니, 약물을 신중히 써서 기필코 회복을 기약하도록 하라." 하였다.
55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만일 할 수 있는 방도만 있다면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56 중궁이 또 연잉군으로 하여금 나와 전교하게 하기를 "금평위 박필성, 동평위 정재륜, 임창군 이혼, 어영 대장 김석연과 시임, 원임 대신들을 모두 동궁에게 품하여 입시하게 하라." 하고,
57 또 연잉군을 시켜서 이이명에게 묻기를 "원명귀(숙경 공주의 아들), 정건일(숙휘 공주의 아들), 김도협(김석연의 아들) 등을 모조리 같이 불러 들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58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너무 광범위합니다." 하였다.
59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다시 나와 심정보(숙명 공주의 아들)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또 어유귀, 김동필 두 사람을 불러 들이라고 명하니,
60 이이명이 말하기를 "이런 때에 어찌하여 반드시 인척을 다 불러들이겠습니까? 부디 이런 뜻으로 품주하소서." 하였다.
61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나와 내교를 전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62 조금 후에 임창군, 동평위, 금평위, 어영 대장, 원주 목사가 들어왔다.
63 이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용히 탑전에 엎드려 있었는데, 임금이 기식(氣息)과 담향(痰響)이 점차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토한 뒤 승하하였다.
64 북쪽 협실 안에서 일시에 울부짖고 곡하며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다가 연잉군이 문을 막고 금하자 환시가 수족을 정돈하였다.
65 내시가 남쪽 협실에서 왕세자를 부축하고 나와 입(笠)과 사포(紗袍)를 벗기고 머리를 풀고 거애하였다.
66 연잉군이 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기둥 밖에서 거애하였다.
67 이때 비가 퍼붓듯 크게 쏟아졌다.
50 ○ 경종 즉위년(1720) 6월 13일에 경종이 경덕궁에서 3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2 ○ 경종의 지문은 다음과 같다. 거룩하신 우리 경종의 성은 이씨요, 이름은 윤이며, 숙종의 장자이며 현종의 손자이시다.
3 처음에 숙종께서 오래도록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셨는데, 희빈 장씨가 숙종 14년 10월 28일에 왕을 탄생하니,
4 숙종이 매우 기뻐하시어 여러 대신을 불러서 이르시기를,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아서 인심이 매인 곳이 없었으니, 오늘의 큰 계책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시었다.
5 인현 왕후께서 아들로 삼으시기를 자애(慈愛)와 효도(孝道)가 함께 매우 돈독하셨다.
6 ○ 숙종 43년에 숙종께서 5년 동안이나 병이 낫지 않고 끌므로 왕에게 청정을 대리하도록 명하니, 왕께서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셨다.
7 하나하나를 계품해 아뢴 뒤에 행하였으며, 사관(史官)에게 전하는 비답 역시 승정원에 물어서 하셨으니, 이는 감히 독단하지 않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8 ○ 경종 원년에 이르러 왕께서 사속이 없어 우리 전하(영조대왕)를 왕세제(王世弟)로 삼으셨으니, 이는 종묘와 사직을 중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9 ○ 일찍이 남의 늙은이를 내집 늙은이로 대접하는 은혜를 미루어 백성 중에 나이 많은 이가 있으면 꼭 은혜를 베풀어 기르시고 또 벼슬도 주었으며,
10 고려 왕조 묘소에 의물이 결함이 있으면 수신에게 개수하도록 명하였고,
11 신라 왕묘에 제향이 경건하지 못하면 그 후손에게 벼슬을 주어 받들도록 하였으며,
12 정몽주의 사우에 치제하고 김종서의 후손을 채용하도록 하였다.
13 ○ 하루는 왕께서 승정원에 하교하시기를 '한번 왕위를 계승한 뒤로부터 조신(朝臣)들의 하는 바를 보건대,
14 조금도 나라를 돕고 보호하는 일이 없으니, 시사(時事)를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통완하여진다.' 하시고,
15 곧 명령하여 삼사의 여러 신하들을 내치고 장신(將臣)의 부신을 빼앗으며 상신(相臣)의 직임을 바꾸고 아울러 찬축도 행하였다.
16 그리고 조금 있다가 변서를 올려 장상이 불궤를 꾀한다고 하므로 왕이 유사에 모두 안험(按驗)하여 토주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7 ○ 매양 태묘를 알현하시고 아무리 비나 눈이 와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조묘가 뒤로 조금 먼 곳에 있었으나 반드시 걸어서 나아가셨다.
18 ○ 왕께서 항상 당론(黨論)을 깊이 근심하시어 모든 소장(疏章)에 있어 서로 배알(排軋) 하는 데 간섭된 것은
19 대체로 조용히 진정시키는 데 힘써 조금도 좌우에게 보이지 않았고,
20 일찍이 가뭄으로 인하여 구언 하는 하교에 이르기를 '붕당(朋黨)의 고질적인 화근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21 심지어 한 집안 사이에도 방패와 창으로 서로 침해하니, 인정(人情)과 지기(志氣)의 막힘이 어찌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22 경 등은 모두 대대로 녹을 받아 온 신하로서 의리상 휴척을 함께 해야 하는데,
23 이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왕실을 협보해서
24 조종의 오르내리시는 영령을 위로한다면 그대 할아버지 그대 선조가 반드시 기쁨을 이룰 것이니, 어찌 모두 그 복을 받지 않겠는가?' 하셨는데,
25 조정 신하들이 서로 함께 이르기를 '이런 하교를 받들고도 당론을 일삼는다면 우리는 곧 사람이 아니다.' 고 하였다.
26 ○ 양가(良家)의 여인을 뽑아서 궁인에 충당하는 명령을 정지토록 하였고,
27 공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과외의 책임을 지우는 폐단을 혁파하였으며,
28 제로(諸路)가 재해와 흉년이 들면 상세(常稅)를 덜어 주고,
29 서쪽 고을이 조폐(凋弊)하면 전조(田租)를 감해 주었으며,
30 상평창에 저장된 곡식을 풀어서 도성의 백성들에게 조곡으로 주었고,
31 적몰한 죄인의 재산을 덜어내어 기내의 부세로 채웠으며,
32 모든 관사와 각영에서 차인을 두고 점포를 설치하고는 이익을 노려 백성을 해치는 것을 일체 혁파하여 제거하였다.
33 또 법이 오래 되면 폐단이 발생한다 하여 보신에게 그에 대한 확실한 상량(商量)을 명하여
34 바야흐로 군민(軍民)의 번중(煩重)한 부역을 크게 강구하여 모두 변통하려고 하셨는데,
35 일을 미처 성취하지 못한 채 경종 4년 7월에 병에 감염되어 8월 25일에 창경궁 별전에서 영원히 군신을 버리시니,
36 재위하신 지 4년이며, 춘추는 37세였다.
37 덕(德)이 있으면 수(壽)한다는 말도 징험할 수 없으니, 신(神)의 이치도 어긋남이 있나 보다.
38 ○ 계비 어씨는 영돈녕부사 함원 부원군 어유귀의 따님이다.
39 심지(心志)가 외물(外物)에 빼앗기지 않고 성정(性情)이 속사(俗事)에 얽매이지 않으셨으니,
40 검소함을 숭상하는 덕과 실지에 힘쓰신 정치는 보통 임금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융성함이 되겠지만
41 우리 대행왕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것쯤은 미세한 것일 뿐이다.
42 ○ 왕께서는 깊이 우리 전하(영조)의 총명하고 인효(仁孝)하심에 인군(人君)의 도량이 있음을 아시고 일찍이 위호를 정하여 백성들의 희망을 매어두게 하셨다.
43 궁중에 들어가면 서로 함께 침소(寢所)를 문안하고 어선을 살피시며 장락궁을 환희 속에 모셨고,
44 밖에 나가면 임금의 가마는 앞에 있고 왕세제가 타는 수레는 뒤에 있어
45 도성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거리와 마을을 가득히 메우고 지껄이며 기뻐하여 즐거운 낯빛으로 서로 고하였다.
51 ○ 경종 즉위년(1720) 7월 21일에 유학 조중우가 상소하기를 "제왕의 덕의는 효행에 지나침이 없고,
2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하게 되는 것은 춘추의 대의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종사와 신인(神人)의 주(主)가 되었는데,
3 낳아 주신 어버이는 적막한 마을에 한 줌의 무덤에는 풀만 황량합니다.
4 '희빈' 두 글자를 일찍이 삭제하지 않았으니, 선대왕의 은밀한 뜻이 어찌 그 사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5 예관에게 명을 내려 명호를 정하여 지극한 정리를 펴고 나라의 체통을 높이소서." 하였다.
6 ○ 임금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제 조중우의 상소를 보니, 오로지 명호를 바로잡는 데에 있으면서
6 그 아랫 조항에는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하게 된다고 말하였고,
7 감히 선대왕의 오르내리는 영혼이 오늘날의 거조에 대하여 어긋났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8 또 감히 선대왕의 은밀한 뜻이 그 사이에 있다고 말하였으니,
9 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입에 올릴 말이겠는가? 또한 처분하신 뜻에도 어긋난다.
10 하물며 지금 선침이 채 식지도 않은 날에 어찌 감히 무망한 말로써 이와 같이 자행하겠는가?
11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중우를 변방에 정배하라." 하였다.
12 ○ 22일에 헌부에서 조중우를 형신하고 추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3 ○ 24일에 형조에서 드디어 조중우를 형장으로써 신문하였다.
14 조중우는 전번의 배소로 향해 가다가 평구역에 이르러 죽임을 당하고,
15 박경수는 변방에 정배되었으며, 이수점, 윤천운은 모두 감등하여 정배하였다.
16 이때에 뜻을 잃고 옆에서 틈을 엿보던 무리들이 기회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고
17 시골의 무식한 조중우를 사주하여 투서하고 시험하였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18 ○ 8월 4일에 집의 조성복이 상소하기를 "백성이 고통을 근심하여 요역을 너그럽게 함은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19 그러나 유사의 신하들이 경비를 염두에 두어 무릇 도신(道臣)의 요역을 감하고 포흠을 늦추자는 청에 있어서는 일체 들어주지 않으며,
20 비록 수령 가운데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서 윗사람을 섬기는 자라도 묘당에서는 능리(能吏,능력있는 벼슬아치)라 하여 포장을 가합니다.
21 그러므로 오늘날 목민(牧民)의 임무를 맡은 자는 원망을 들어가며 봉공함을 능사로 삼아
22 백성의 곤궁함을 관련없는 듯이 보면서 근심할 줄을 모르니, 이것이 오늘날의 큰 고폐입니다.
23 신의 생각에는 수령을 차출할 즈음에 반드시 자상하고 단아한 자를 가려 무마(撫摩)의 책임을 다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24 ○ 경종 1년(1721) 7월 24일에 경은 부원군 김주신이 61세로 졸하니, 숙종 계비의 아버지이었다.
25 천품이 염정(恬靜)하고 의도(儀度)가 단아(端雅)하였으며, 소시적부터 문사를 좋아하여 사우들이 추앙하고 허여하였다.
26 국구(왕의 장인)가 되어서는 더욱 근신하는 마음을 가져 평소에 검약함이 한사(寒士)와 다름이 없었고,
27 벼슬길에 나아가 일을 처리할 적에는 자신을 낮추기에 힘썼으며,
28 가내(家內)의 행위도 독실하여 숙모를 어머니처럼 섬겼고,
29 형의 자부(子婦)를 거두어 집을 지어주고 생계를 꾸려 주었다.
30 조정의 일에는 일찍이 간섭함이 없었고 또한 부탁하는 일도 하지 않았으니, 시론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31 ○ 그러나 평소의 친구들도 혐의를 받을까봐 왕래를 끊었지만
32 김창집만은 척의(戚誼)가 있다 핑계하고 거리낌없이 왕래하였는데,
33 간혹 그에게 꾀여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되기도 하였다.
34 말년에는 세상이 점점 말 못할 지경에 빠져들어 힘으로 만회할 수가 없음을 보고서 근심과 울분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35 날마다 전국 술만 마시고 여자를 가까이 하여 수명을 재촉하였다 한다.
36 ○ 8월 20일에 정언 이정소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신데, 아직껏 저사(儲嗣)가 없으시니 중외의 신민만이 걱정하고 탄식할 뿐만이 아닙니다.
37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 일을 자성(慈聖)께 상품(上稟)하시고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시는 것이
38 바로 사직의 대책을 정하는 것이며, 억조 신민의 큰 소망을 매두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39 ○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빈청에 나가 원임 대신, 육경, 정부 서벽, 판윤, 삼사 장관을 불러 회의하여 품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40 행 판중추부사 김우항, 예조 판서 송상기, 이조 판서 최석항은 소명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41 밤 2경에 김창집, 이건명이 판중추부사 조태채, 호조 판서 민진원, 판윤 이홍술, 공조 판서 이관명, 병조 판서 이만성 등과 더불어 청대하니, 임금이 시민당에서 인견하였다.
42 ○ 김창집과 이건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자전을 모시고 계시니, 자전께 사뢰어 수필(手筆)을 받은 연후에야 봉행하실 것입니다.
43 신 등은 합문 밖에 나가서 기다릴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44 새벽 누종이 친 뒤에야 임금이 낙선당에서 인대할 것을 명하였다.
45 김창집이 "벌써 자성께 품계하셨습니까?" 하니, 임금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46 이건명이 "꼭 자전의 수찰(手札)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자,
47 임금이 책상 위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봉서는 여기 있다." 하니, 김창집이 받아서 뜯었다.
48 피봉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었는데, 한 장에는 해서(楷書)로 '연잉군'이란 세 글자가 써 있었고
49 한 장은 언문 교서였는데, 이르기를 "효종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
50 어찌 딴 뜻이 있겠오?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오." 하였다.
51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읽어 보고는 울었다.
52 조영복이 전지를 썼는데, 전지에 이르기를 "연잉군을 저사(儲嗣)로 삼는다." 하였다.
53 ○ 이제 종사의 대계가 이미 정해졌으니, 온 나라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54 그러나 당일 대신들은 모여 의논을 꺼내려 하지 않았고, 또 교외에 있는 동료 대신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55 심지어 임금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서 반드시 자성의 수필을 얻은 후에라야 봉행하겠다고 말한 것이 어찌 연석에서 주사(奏事)하는 체통이라 하겠는가?
56 이날은 갑자기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을 전알(展謁,참배,제사)하겠다는 명을 내렸었다.
57 이것은 마땅히 여러 사람의 마음에 함께 기뻐하여야 할 일인데도
58 김창집은 정섭(靜攝)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써 탑전(榻前)에서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59 사람들이 이 일로써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52 ○ 8월 21일에 왕세제(王世弟,영조대왕)가 성명을 거둘 것을 상소하였다.
2 ○ 23일에 행 사직 유봉휘가 상소하기를 "나라에서 저사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3 시임 대신으로 한강 밖에 있었던 사람마저 까마득히 알지 못하였고
4 원임 경재로 처음에 불러서 나가지 않은 사람은 재차 부르지도 않고서 졸급하고 바쁘게 굴면서
5 조금도 국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신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6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중전을 재차 맞이하고 약을 드시며, 계속 상중에 계시니, 후사의 있고 없음을 논할 수도 없는 것이고,
7 전하의 보산(寶算,나이)이 한창 젊으시고 중전께서도 겨우 계년(筓年,15세)을 넘으셨으니
8 일후에 종사의 경사가 있기만을 온 나라 신민들은 크게 바라고 있는 중입니다.
9 결국은 즉위하신 원년에 갑자기 이러한 거조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입니까?
10 ○ 이미 입품(入稟)을 청해 놓고 바로 선포하기를 청한 것이 마치 명령하듯, 독촉하듯 하였으니, 이는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11 일찍이 숙종 14년에 전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인현 왕후께서는 오래도록 후사가 없었습니다.
12 그때에도 주사가 급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건만 여러 신하들은 우선 수년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면서
13 정궁에서 득남의 경사가 없다 하더라도 왕자가 장성하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국본을 소중히 여기는 때문입니다.
14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도리는 이와 같아야 할 것인데도, 급하게 서둘러 한 시각도 넘겨서는 안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15 신은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16 비록 그 성명(成命)은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17 대신이나 여러 신하들의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8 그리고 대신 이하의 죄과를 바로잡아 온 나라 사람에게 사과(謝過)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19 ○ 상소가 승정원에 이르자 승지 한중희가 청대하여 소를 가지고 진수당으로 들어갔다.
20 한중희가 말하기를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졌고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졌으니,
21 신하된 자가 말할 일이 못되는데도 이러한 상소가 있으니, 주상께서는 준례에 따라 비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22 마땅히 대신과 삼사의 관원을 불러 물어보고 처분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23 임금이 자성에게 품하고서 처분하겠다고 하교하고 한중희에게 상소를 두고 나가라 하였다.
24 ○ 밤이 되어서야 비망기를 내리기를 "선대왕(숙종)께서는 일월(日月)같은 밝으심으로 나의 후사가 없음을 매우 염려하셨다.
25 이제와서는 나의 병이 점점 더하여 득남할 희망이 없으니,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히 지낼 겨를이 없었다.
26 엊그제 대간의 상소는 종사를 위하여 국본을 정하려 한 것이니,
27 선왕의 성려(盛慮)와 나의 우탄(憂歎)하는 마음에 바로 일치한 것이기에
28 자성에게 앙품한즉 이르시기를 '효종의 혈맥과 선왕의 골육은 다만 주상과 연잉군 뿐이다.' 하셨으니,
29 자성의 전교가 지극히 간절하였으므로, 나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30 내게 조금이라도 사속(嗣續)할 희망이 있다면 어찌 이러한 하교가 있었겠는가?
31 유봉휘의 말이 광망(狂妄)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어떤 사람이기에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는 것인가?
32 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경 등이 의논하여 계달하라." 하였다.
33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대사헌 홍계적, 대사간 유숭, 사간 신절, 장령 송도함, 부교리 신방, 정언 이성룡 등이
34 아뢰기를 "무슨 급히 서두른 잘못이 있기에 유봉휘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35 하물며 그의 '우롱하고 협박하였다.' 는 등의 말은 여러 신하들을 성토할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36 군주의 존엄으로써 군하의 우롱과 협박을 받았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7 춘저(春邸,세제,연잉군)의 마음은 편안하겠습니까?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38 청컨대 국청을 설치하여 (유봉희를) 엄중히 신문하여 왕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9 ○ 이 날에, 왕세제가 성명(成命)을 거둘 것을 상소하였다.
40 ○ 24일에 우의정 조태구가 차자를 올리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처분이 이미 정해진 뒤에
41 유봉휘가 이러한 진언을 하였으니 유망(謬妄)하다 할 수 있으나,
42 그 마음만은 나라를 위하는 단충(丹忠)으로 성실하여 딴마음이 없습니다.
43 고 상신 이경여는 효종께서 저사로 오르던 날 정경을 지킬 것을 힘껏 주장하다가 비록 찬축(竄逐)을 당하였지마는
44 효종께서 즉위하시자 맨 먼저 등용하여 마침내 명상이 되었습니다.
45 오늘날 전하께 충성하는 자는 뒷날에도 반드시 저군(儲君)에게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46 설사 말이 광망(狂妄)할지라도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려 함인데,
47 갑자기 국치(鞫治)를 명하시면 어찌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도리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48 군주를 인도하여 진언한 자를 박살토록 하는 것은 성세(聖世)의 복이 아닙니다.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49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 경의 차자를 살펴보니, 국청을 설치한 잘못을 알겠다." 하고, 다시 대신과 의논하여 품처하라 명하였다.
50 ○ 25일에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가 빈청에 나아가 국문하여 처단하기를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51 ○ 그때에 삼사는 날마다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고, 대신은 여러 재신들을 거느리고 엄국을 계청했으며,
52 종실과 관학(館學)의 유생들도 논죄하여 화색(禍色)이 날로 급박해졌는데도,
53 유봉휘는 의금부 앞 거리 위에서 짚자리를 깔고 명만을 기다리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54 도성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하였다 한다.
53 ○ 지난 8월 16일에 비변사에서 좌의정 이건명이 일찍이 계청하였던 군포 두 필을 낸 자는 한 필을 감해 주고
2 각 고을의 전결(田結)과 잡역 가조(雜役價租)를 잘라서 감포(減布,조세를 가볍게하는)를 대충(代充,다른것으로 대신 채움)해 주며,
3 읍중(邑中)의 결역(結役,세금 중에서 영저리 등에게 주는 급료)은 일반 백성의 집에서 이징(李徵)하는 일을
4 우선 삼남의 영하읍과 호서의 임천, 호남의 남원, 영남의 의령에 시험할 것을 청하니,
5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뒤에 이건명이 실패하니,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6 ○ 9월 6일에 사간원(정언 유복명)에서 아뢰기를 "조정에서 양역의 네 가지 방도를 제도에 물어 보았는데,
7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 이제 호포(戶布), 유포(游布), 구전(口錢)의 세 가지는 이미 중지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마는,
9 결역(結役)만은 아직도 강구 중에 있으니 신은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10 이제 또 별역(別役)을 덧붙인다면 불쌍한 우리 궁민(窮民)들은 장차 어디서 이것을 취판(取辦)할 것입니까?
11 비록 넉넉할 때에 4결당 1필도 오히려 의심을 가졌었는데, 하물며 지금처럼 곤란할 때에 1결당 1필을 어떻게 경솔히 시행하겠습니까?
12 하물며 결역(結役)은 베를 내던 군액이나 공사천으로 2필을 내던 것까지 모두가 통틀어 징수 되니,
13 그 하나는 감해주고 하나는 받아내는 것이 이른바 조삼 모사와 같은 것으로,
14 군민도 힘을 펴지 못하게 되므로 온 나라의 원망은 장차 10분의 9가 더하게 될 것입니다.
15 또 백성들 중 1결을 가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16 10호의 마을에서 밭을 가진 자는 하나나 둘도 못되고, 반수는 남의 밭을 빌려 경작하는 사람들로
17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상세(常稅)도 내지 못하는데
18 그 반은 전주(田主)에게 실어보내야 하고 또 응당 공사채를 갚아야 하니,
19 이제 또 별징(別徵)을 요구한다면 결국은 양전(良田)을 분토(糞土)처럼 버리고 묵히는 것도 흩어지고야 말 것이라,
20 이웃에게 위세를 부려 불법으로 빼앗는 폐단은 양역(良役)보다도 훨씬 심할 것입니다.
21 ○ 이 법의 행하기 어려움을 꼭 먼저 시험을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2 이제 병민(兵民)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펴주려 하다가
23 팔역(八域)의 백성들을 모두 원망하고 탄식하는 가운데로 몰아넣는 것이니, 이는 환산 궤멸(渙散潰滅, 흩어져 없어짐)의 방책입니다.
24 청컨대 빨리 결역(結役)을 강행한다는 영을 거두시고 즉시 사방에 알려 민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5 이보다 앞서 숙종 때부터 양역(良役)을 변통할 적의책(適宜策)을 강구하려고 하였으나, 의자(議者)들은 좋은 계책이 없었던 것이다.
26 김유가 일찍이 '결포 사의' 라는 글을 저술하여 꼭 시행해볼 만한 것이라고 여겼었다.
27 이건명이 김유의 말을 믿고 있다가 정국(政局)을 담당하게 되자 건의하여 시행코자 하였다.
28 조정 의논은 모두 그것이 불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한 사람도 통쾌하게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29 유복명이 유독 명백하게 분석하였으니, 시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30 ○ (조선의 시대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부 지역에 먼저 시험해 보고 전국적으로 시행하거나, 폐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지금은 어떠한가)
31 ○ 10월 10일에 집의 조성복이 상소하기를 "마땅히 춘궁(연잉군)을 힘쓰게 하여 서연의 법강(法講,법을 배움)을 혹시라도 정지하지 말고,
32 비록 재계하는 날을 당할지라도 곧 서사(書史)를 토론하여 십한 일폭(十寒一曝)의 근심이 없게 하소서.
33 전하께서 신료를 인접하실 즈음이나 정령을 재결하는 사이에 언제나 세제를 불러 곁에 모시고 참여해 듣게 하고,
34 가부(可否)를 상확(商確)하며 일에 따라 가르쳐 익히게 한다면, 반드시 서무에 밝고 익숙하여 나라일에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35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좋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36 ○ 곧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십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으니,
37 요즘은 증세가 더욱 침고(沈痼)해지고, 수응(酬應)이 또한 어려워서 정사가 정체됨이 많다.
38 이제 세제는 젊고 영명하므로, 만약 청정하게 하면 나라 일을 의탁할 수 있고,
39 내가 마음을 편히 하여 조양할 수가 있을 것이니, 대소의 국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하게 하라." 하였다.
40 ○ 승지 이기익, 남도규, 응교 신절, 교리 이중협이 즉시 청대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41 이기익 등이 함께 말하기를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지 겨우 1년이고 춘추가 한창이며, 또 병환이 없고 기무(機務)가 정체되지 아니하였는데,
42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하교를 하십니까? 신 등은 비록 죽을지라도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성명을 거두소서." 하고
43 이기익 등이 말하기를 "밤 기운이 점점 싸늘해지니 옥체를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44 신 등은 우선 물러가겠으나, 잠자리에서 다시 깊이 생각을 더하시어 특별히 명령을 도로 거두신다면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45 지금 대궐문이 이미 닫혔기 때문에 이처럼 고요하지만, 조정이 장차 반드시 함께 일어나서 힘써 다툴 것이니,
46 이렇게 된다면 온 나라의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비록 물러갈지라도 결코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47 신절이 이어 말하기를 "지금 신료가 동궁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효우(孝友)를 돈독하게 하고 강학을 부지런히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48 지금 이 '가부를 상확한다.'는 말은 무식하여 그릇되고 망령됨이 심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다.
49 이중협과 남도규가 서로 잇따라 힘껏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0 ○ 이때 김창집, 이건명 등이 주상으로 하여금 정무를 놓게 만들려고 조성복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고 상시(嘗試) 하였는데,
51 그 당파로서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가 혹 크게 놀라기도 하여
52 이조 판서 권상유는 큰 소리로 승정원에서 조성복의 상소를 배척하며 죄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53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려지고 비망기가 그 뒤를 잇자 승지와 옥당에서 드디어 청대하여 힘껏 다투었으나,
54 김창집 등은 예사로이 여겨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즉시 예궐하지도 않았다.
55 좌참찬 최석항이 소식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홀로 궐문 밖으로 와서 유문(留門)하여 입대하기를 청하였다.
46 임금이 최석항에게 들어오라고 명하고 인견하니, 승지와 옥당도 최석항을 따라 입시하였다.
47 최석항이 말하기를 "이제 보잘것없는 조성복의 말 때문에 막대한 일을 가볍게 거행하시니, 오늘날 나라의 일은 다시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48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이 누누이 진달하니,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49 최석항이 또 말하기를 "조성복은 죄가 중하니 파직에만 그칠 수 없습니다. 먼 곳으로 보내는 법을 베푸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50 ○ 왕세제가 교서가 내린 것을 처음 듣고 울면서 궁료(宮僚)에게
51 이르기를 "내가 다만, 자교(慈敎)의 말씀 때문에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억지로 명을 받들어 이 자리를 맡고 있는데,
52 또 이런 너무나도 뜻밖의 하교를 받았으니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선왕의 면전에 절할 수가 없다." 하고,
53 장차 상소하여 힘써 사양하려고 하였는데, 최석항이 입대하여 명을 정지하자 그만두었다.
54 ○ 12일에 조성복을 진도군에 안치하고 이진검을 밀양부로 귀양보냈다.
55 ○ 13일에 시임 대신, 원임 대신과 2품 이상, 삼사를 불러 빈청에 모이라고 명하고,
56 임금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나의 병근이 날로 점점 더하여 나을 기약이 없으니, 일찍 저사를 정한 것은 실로 대리(代理)를 행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57 이를 자성께 품한 지 오래 되었으나, 책례를 이제 막 거쳤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58 이제 여러 신하들이 나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나온 것처럼 여겨서 쟁론이 분분하기 때문에
59 우선 환수하여 나의 뜻을 보이고, 조성복의 망령되고 경솔한 죄를 다스린 것이다.
60 공사는 적체되고 수응이 절박하니, 일체 그저께의 비망기에 의해 거행하여 조섭하는 방도를 온전하게 하라." 하였다.
61 승정원 및 대신 2품 이상과 삼사의 여러 신하가 아울러 청대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소회를 글로 써서, 올리도록 명하였다.
62 대신 이하가 다시 거듭 청한 것이 세 번이었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63 ○ 왕세제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춘추가 한창하시니, 바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할 날입니다.
64 비록 편찮으신 증세가 있다 할지라도 신명이 도우시니, 약을 쓰지 않고도 회복됨에 이를 것인데,
65 갑자기 막중하고도 막대한 일을 신과 같이 불초한 자에게 더하려고 하시나,
66 신은 이미 학문이 어둡고 지식도 없으면서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받들어 감당하기를 바라겠습니까?
67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어지신 하늘에 슬피 호소하는 것이니,
68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성명을 거두신다면 천만번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69 ○ (왕세제의 상소는 당연하였다. 혹 경종의 진심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세제의 목숨이 남아 나겠는가?
70 조선에서는 이렇듯 진심이 아님을 생각하여 여러번 사양하는 풍습이 민간에 까지 퍼졌다.
71 이는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데에서 나왔지만, 반대편에서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진심을 알고자 하는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72 한국시대에 이르러, 조선의 이러한 풍습이 현명하지 않다고 하지만,
73 사양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 들인다면, 서로가 미워하게 되는 일에 미치게 됨을 깨닳아야 한다.
74 다만, 이러한 풍습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뿐이고, 그 영향과 결과도 각자의 몫이니, 조선의 풍습을 말 할 것이 없다.
75 그러나 경종 1년의 상황은 여러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궁에 있는 자전으로 부터 왕세제(영조)를 위한 압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76 그렇다면, 경종은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로 부터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은 인종과 비견되는 조선의 자랑스런 군주였다.
77 그렇다면, 세조는 단종으로 부터 끝내 왕위를 이었으니, 또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54 ○ 영의정 김창집,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좌의정 이건명이 이미 여러 재상으로 하여금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모이도록 하고,
2 밤에 비변사에서 자며 대리하는 일을 함께 의논하여 드디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3 "신 등은 비록 만 번 죽음을 당할지라도 결단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4 그런데 이번의 성교는 지성으로 슬퍼하는 데서 나왔으니, 어찌 감히 거역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5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사에게 명하여 단지 정유년의 절목에 의하여 품지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6 차자가 들어가고 정청(庭請)을 드디어 그만두니, 중외의 인심이 놀라고 분통해 하였다.
7 ○ 좌참찬 최석항이 예궐하여 상소하기를 "신이 '이 일은 비록 달을 넘기고 해를 지날지라도 받들어 순종할 리가 만무하다.'고 누누이 다투어 고집하였더니,
8 여러 대신이 '우선 차자를 진달하여 대죄하고 이어 입대를 청하여 진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9 그런데 듣건대 대신이 차자에서 '정유년의 절목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합니다.
10 밤 사이에 갑자기 소견을 바꾸어 같이 일한 신하와 모의하지도 않고, 놀라운 거조를 하였으니, 신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11 신은 저으기 통분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을 빨리 거두어서 신인(神人)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하였는데,
12 승지 홍계적이 물리치고 기꺼이 상철하려고 하지 않았다.
13 ○ 이광좌, 이태좌, 이조, 김연 등이 조방에 있으면서 청대하여 다시 다툴 것을 함께 의논하고,
14 혹은 말하기를 '우의정 조태구는 비록 대론을 만났다고는 하나, 이 때를 당하여 보통 법에 구애될 수 없으니 대궐에 나아가 죽음으로 힘써 다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15 조태구가 드디어 성 밖에서 궐하에 이르렀다.
16 ○ 이때 임금이 창경궁에 있었으므로, 여러 신하 가운데 나아가 뵙고자 하는 자는 모두 창덕궁에서 건양문을 지나 합문 밖에 나아갔다.
17 그런데 조태구는 병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어서 견여로 큰 거리를 따라 창경궁의 협문으로 들어가 사람을 승정원에 보내어 청대하였다.
18 승지 홍계적 등이 '조태구는 바야흐로 대론(臺論)을 입었는데 어찌 감히 청대하느냐?'며 물리치고 상문하지 않으니, 갔다왔다 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19 ○ 양사의 관원이 대각에 나아갔다가 조태구가 입궐한 것을 듣자 먼저 원찬(遠竄,귀양보냄)하기를 청하였는데,
20 계사가 미처 상철되지 아니하여 사알(司謁)이 합문에서 승정원으로 내달려와서 조태구를 인견하겠다는 전교를 전하고,
21 또 임금이 이미 전에 나왔음을 말하니, 승지들이 당황하고 놀라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이때 대궐 안팎이 물 끓듯 진동하였다.
22 ○ 조태구는 말하기를 "감히 제 자신이 대간의 탄핵을 입었다 하여 시골 집에 물러가 있을 수 없었으므로,
23 성 밖에 와 엎드려 여러 차례 상소로 진달하고 호소하였으나, 유음(兪意)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24 그런데 오늘 갑자기 대신이 정청(庭請)을 이미 정지했다는 것을 듣자
25 신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사생(死生)을 걸어 반드시 다투고자
26 감히 와서 청대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기를 바란 것입니다.
27 이는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곧 온 나라 사람의 말입니다.
28 신이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만일 반한(反汗)의 명을 얻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며,
29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30 여러 신하가 각각 차례차례 반복해서 진청하고 이광좌, 유복명이 더욱 힘써 다투었다.
31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전후의 비망기를 도로 거둘 것을 쾌히 허락하신 뒤에야 온 나라의 물결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32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33 김창집이 아뢰어 사관을 보내어 전후의 비망기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받아서 임금 앞에 놓았다.
34 조태구가 말하기를 "이처럼 도로 거두게 되었으니, 인심이 이제부터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35 ○ 홍석보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디로부터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으셨는지요?
36 들어와서 고한 사람을 명백하게 적발하여 영원히 후일의 폐단을 막고 군정(群情)의 의혹을 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37 어유룡, 박치원, 신무일, 황재 등이 아뢰기를 "조태구는 대각에서 토죄(討罪)하는 날 감히 마음대로 궐문으로 들어와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었으니,
38 그 방자한 행동을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9 또 아뢰기를 "무릇 신하의 접견은 승정원을 경유하는 것이 3백 년의 정규인데,
40 지금 대신은 어떤 사사로운 길로 몰래 입래(入來)한 까닭을 품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41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비록 북문의 변이 있을지라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42 청컨대 승전색, 사알을 나문하여 엄하게 핵실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3 ○ 박치원이 아뢰기를 "최석항이 혼자 독대하여 여러 신하가 힘써 다투는 길을 거꾸로 막고
44 자기가 혼자 일을 처리한 자취를 자랑하려고 하였으니,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5 ○ 사신은 말한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마음의 병이 갑절이나 심해져
46 군신을 대할 때는 말이 혹 뒤바뀌는 경우가 있고 만기(萬機)에 임할 때는 살피지 못함이 많았으니,
47 진실도 두려워할 만한 종사의 근심이 있었으니, 이는 조성복의 상소와 네 대신의 차자에서 빙자해 말한 바이다.
48 청정(聽政)은 선조로부터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고 세제의 영명함은 족히 큰 임무를 맡아 감당할 만하니,
49 성상께서 정무를 놓고 한가로운 데 나아가 조양에 전심하되 1분의 차효가 있다면 어찌 종사와 신민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50 이것이 바로 두황상, 조여우의 일이니, 어찌 곧장 역(逆)으로 논할 수 있으랴?
51 그러나 이윤, 곽광, 두황상, 조여우는 공(公)을 위한 것이었고, 왕망, 동탁, 사마의, 환온 은 사(私)를 위한 것이었다.
52 오늘날 이 무리들의 충(忠)이 되고 역(逆)이 되는 것은 또한 오직 마음의 공(公)과 사(私)가 어떠한가에 있을 뿐이다.
53 마음을 속에 감추었으니, 그 공과 사를 어떻게 분변해 낼 것인가? 그 하는 일을 추적하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54 이제 한꺼번에 네 대신을 함께 죽였으니 그 또한 참혹하다."
55 ○ 15일에 사직 권규 등 30명이 상소하기를 "춘궁(연잉군)은 어찌 편안하게 이 명을 받겠습니까?
55 한 적신(賊臣)의 말 때문에 너무나도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시니, 어찌 신하가 전하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56 전하께서는 비록 병이 있다고 하시지만 전하께 병환이 없음은 신민(臣民)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57 전하께서는 비록 나의 본의라고 하시지만 전하의 본의가 아님을 신민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58 엎드려 원하건대, 조성복의 머리를 베어서 춘궁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어제의 명을 거두소서." 하였는데,
59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권규 등이 어떻게 전하의 본의가 아님을 알아서 함부로 이 웃분을 속이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60 이 무리는 국본을 위태롭게 하고 핍박한 유봉휘보다 더합니다." 하니,
61 임금이 그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하고, 이 뒤로는 이같은 상소는 또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62 ○ 18일에 내관 최홍과 사알 김천석을 의금부에 내렸다.
63 ○ 삼사, 양사에서 마음대로 궁으로 들어온 조태구를 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55 ○ 12월 11일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종사가 장차 위태로와지려 하니, 밤낮 근시과 두려움으로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다.
2 조신(朝臣)의 하는 바를 보건대 서로 인협(寅協)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3 치고 싸우는 데 급급하여 효상(爻象)이 아름답지 못하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
4 후사(喉司)에서는 이 뜻을 중외에 포고하여 따로 신칙을 더하라." 하였다.
5 ○ 12월 22일에 왕세제가 밤에 입직한 궁관 김동필, 권익관과 익위사와 관원을 불러서 인접하였다.
6 왕세제가 궁관에게 이르기를 "한두 환관이 작용(作俑)하여 나를 제거하려 하자,
7 자성께서 나로 하여금 대조(大朝)께 들어가 고하게 하시므로 내가 울면서 대조께 청하였는데,
8 처음에는 나추(拿推)하라 명하셨다가 돌아서서 또 도로 거두셨다. 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만,
9 이미 발생한 뒤에는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자를 없애지 않을 수 없어서 다시 진달하였더니, 갑자기 감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리셨다.
10 내가 장차 합문을 나가 거적을 깔고 죄를 기다리며 사위(辭位)하려 하므로
11 강관(講官)에게 나의 거취를 알리려는 것이다." 하였다.
12 ○ 23일에 조태구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일개 집안의 종을 아끼시어 즉시 엄히 국문하여 동궁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13 최석항은 말하기를 "한두 환관이 감히 이간하여 춘궁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국청을 설치하여 엄하게 핵실하고 실정을 알아내어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14 삼사의 여러 신하도 합사해서 엄하고 분명하게 구핵하되, 유사에 맡겨 정형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15 조태구가 울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평일에 동기간(同氣間)에 만약 우애의 정이 극진하셨다면,
16 저 환관의 무리가 어찌 감히 엿보아 이런 망측한 변을 만들어 내었겠습니까?
17 세제가 편안한 뒤에야 전하께서 편안하실 수 있으며, 전하께서 편안하신 뒤에야 종사가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18 저 환관의 춘궁께 불순함이 이와 같은데 어찌 전하에게 충성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19 전하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진실로 억울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20 조태구가 이어 청하기를 "동궁을 위안하여 힘써 화락함을 다하고, 궁위를 엄하게 신칙하여 기간(惎間)을 끊게 하소서." 하니,
21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22 ○ 조태구가 이미 물러나와 합문 밖에 나아가 대비전에 문안하니,
23 대비가 또 언교(諺敎)로 답하기를 "저사(儲嗣)를 정한 것은 바로 선왕의 유교를 받든 것이다.
24 대전께서 친히 작호(爵號)를 썼고 내가 또 언서로 대신에게 하교하여 정하였는데,
25 불행하게도 궁인과 환시가 양궁(兩宮)을 교구(交構)하여 성총을 속이고 가리므로,
26 내가 일찍이 개탄하여 궁인을 불러서 화동(和同)할 방법을 개유하였다.
27 그랬더니 감히 흉패한 말을 대전과 내가 앉은 앞에서 함부로 하였다.
28 그러니 그 죄상에 대하여 반드시 마땅한 율이 있어야 할 것이다.
29 그리고 그 한 궁인은 환시와 결탁한 자이니 마땅히 율에 의하여 처치할 것이며,
30 경 등도 마땅히 우리 주상과 동궁을 조호(調護)하여 우리 3백 년 종사를 보호하고 선왕의 유교를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는데,
31 종이 끝에 석렬, 필정 두 궁인의 이름을 썼다.
32 ○ 대신과 2품 이상이 다시 청대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승정원, 삼사에서 아울러 복합(伏閤)하여
33 자교(慈敎)에 써서 내린 석렬, 필정을 빨리 법사(法司)에 맡기도록 명하고,
34 박상검, 문유도와 일체로 법을 바로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5 두 환관은 바로 세제가 하교한 교구(交構)하여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한 자이다.
36 이때 변이 궁궐에서 나와 외인은 그 단서를 알지 못하였다.
37 여러 신하들이 입대하였으나 끝내 상교의 개설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인심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안정될 수 없었다.
38 ○ 12월 24일에 석렬은 이미 집에서 자살하였고, 필정은 형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39 ○ 25일에 국청의 죄수 필정이 또 자살하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각별히 엄핵하게 하고, 두 환관도 곧 정형하게 하였다.
40 사간원에서 계론하기를 "의금부 관리가 음식물을 막아내어 보호를 잘못하여 죄인이 자폐(자살)하게 만들었으니,
41 청컨대 입직한 도사(都事)와 이졸을 나문하고, 조사해 물어서 죄를 주소서" 하니, 따랐다.
42 다음 해, 1월 4일에 문유도가 네 차례 형신을 받고 죽고, 6일에 박상검이 형벌을 받고 죽었다.
56 ○ 경종 2년(1722) 3월 27일에 목호룡이란 자가 상변하여 고하기를
2 "역적으로서 성상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으로 한다고 하며,
3 또 폐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하고,
4 또 말하기를 "역적 중에 동궁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하는 자가 있습니다. 역적의 정상을 구명해서 누명을 씻어 국본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5 드디어 내병조(內兵曹)에 정국을 설치하였는데, 목호룡이 공칭하기를
6 "흉적은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홍철인, 조흡, 김민택, 백망, 김성행, 오서종, 유경유입니다." 하였는데,
7 ○ 목호룡은 남인의 천얼로서 백망과 체결하여 김용택, 이천기, 오서종, 유경유의 사이에서 순간순간 형적을 바꾸며 노닐어
8 흉역의 계획과 음비한 모의에 어지럽게 참여하여 관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9 그리고는 마침내 또다시 김일경, 박상검과 투합하여 동궁을 위태하게 할 계책을 도모하였다.
10 국청에서 도사(都事)를 보내어 고발한 여러 적들을 잡아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1 ○ 28일에 금부 당상 김일경이 왕명을 기다리고 있을 때
12 백망이 공초하기를 "목호룡이 말하기를 '지금 소론과 남인이 세제를 모해하려 하는데,
13 소론은 청론(淸論)을 자부(自負)하지만 완론(緩論), 준론(峻論)의 구별이 있고,
14 남인은 온 산의 고목에 한 잎사귀만 푸른 격으로 벼슬하는 이가 적다.
15 나는 남인의 서얼인데, 듣건대 원휘, 김 참판, 유경유, 심수관, 오서종, 장우상의 무리가 서로 더불어 일을 모의한다고 한다.
16 만약 선래(先來)가 나와서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조정의 권세를 동궁에게 옮길 것이고, 일이 성사되면 내가 고변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17 그가 이미 상변하였으므로 나도 상변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18 김 참판은 곧 김일경이었다. 그래서 국좌에서 나와 왕명을 기다린 것이다.
19 ○ 29일에 영상 조태구와 우상 최석항이 모두 왕명을 기다렸는데,
20 백망이 어지럽게 공초하다가 또 목호룡의 말을 핑계대어 이르기를,
21 "동궁이 조만간에 반드시 위태로울 것인데, 위태롭게 하려고 하는 사류들의 의논이 각각 다르다.
22 선래(先來)가 오기 전에 모해하려고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선래가 온 뒤에 위태롭게 하려고 하는 자가 있기도 하고,
23 그 중에는 선래와 관계없이 다른 방법으로 모해하려고 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곧 세 종류의 설인 것이다.
24 선래가 온 뒤에 모해하려고 하는 부류는 소론 가운데 완론(緩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인데,
25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영상 조태구, 우상 최석항, 이태좌, 이광좌, 유봉휘이다." 하였는데,
26 이 때문에 국옥을 조사하던 두 대신이 불안하여 명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27 한 옥수(獄囚)가 흉언을 지어내어 대신을 쫓아내고, 그 계책은 반드시 옥사를 저패(沮敗)시키려고 하였으니, 또한 하나의 변인 것이다.
28 ○ (현재에도, 죄를 지은자가 무고하여 또 다른 죄인을 만들어 내는 일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9 ○ 4월 1일에 영의정 조태구와 우의정 최석항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30 비답을 내리기를 "흉인이 침공한 말은 깊이 혐의할 것이 못되니, 안심하고 국문에 참여하여 나의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31 ○ 10일에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백망이 옥을 벗어나 도망하였으니, 일이 지극히 한심합니다.
32 입직한 도사(都事)의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적발하여 나문하고, 나졸 등도 엄중하게 구문 하소서." 하였다.
33 ○ 국청에서 업이를 잡아 가두었는데, 백망의 처, 이영의 어머니이다.
34 ○ 13일에 역적 백망이 시종일관 형장을 참고 맞다가 죽었다.
35 ○ 8월 1일에 국청에서 김시태, 김성절을 옥에 가두었다.
36 ○ 18일에 조태구가 이르기를 "어제 김성절의 초사를 보고 성궁에 독약을 시험하였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뼈가 부스러짐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37 다행히 즉시 토하시었지만, 의서에 이르기를 '독을 마신 경우 3년이나 되었더라도 근심이 있다.'고 하였으니, 해독하는 약제를 복용하소서.
38 또 듣건대 '경종 즉위년 10월에 성상께서 담수를 토하시었는데, 거의 반 대야에 이르렀으며, 색깔이 몹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39 의관의 일기에는 상고하여, 그 날짜의 수라간의 나인으로 김성(金姓)이라는 자를 조사하면, 알아내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40 한배하가 이르기를 "그날 수라를 진어하신 뒤에 즉시 구토하시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였다.
41 물러나온 뒤에 일기를 상고하였더니, 경자년 12월 15일에 '어제 황수(黃水)를 토했는데, 거의 한 되 정도에 이르렀다.'는 일이 있었다.
42 ○ 국청에서 궁인을 조사해 내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김성(金姓)의 나인을 조사하였으나, 원래 없었다." 하였다.
43 국청에서 또 의계하니, 비답하기를 "나인을 조사해 내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나,
44 노론을 타도하려는 계책은 더욱 지극히 근거가 없으니, 이 뒤로 이와 같은 문자는 써서 들이지 말라." 하였다.
45 이 때에 여러 적들이 차례로 승복하였는데, 김성절의 초사에 이르러서는 더욱 음참하니,
46 인정이 바야흐로 독약을 쓴 궁인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하여 분하게 여기었다.
47 그런데 비답이 뜻 밖에서 나왔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의혹해 하였으나, 그 단서를 알지 못하였다.
48 ○ 26일에 역적 김성절이 복주(伏誅,형벌을 받아 죽음)되었다.
49 세 차례 형문을 시행하자, 승복(承服)하여 이르기를 "장성(張姓)의 역관이 독약을 샀으며, 김성(金姓)의 궁인이 성궁(聖躬)에게 시험하여 썼습니다" 하였다.
50 나인 김성이 많아서 별로 명백하게 드러낼 길이 없고, 정유년(숙종43년)의 역관에는 장성(張姓)의 사람이 없었다.
51 이로써 한 차례 형문을 다하자, 그 결안에 이르기를 "서덕수의 말을 들으면 이기지 부자(父子)가 역관 장판사로 하여금 독약을 사서 오게 하였는데, 이름과 거주는 묻지 않았습니다.
52 이기지가 서덕수에게 이르기를 '약의 일은 우리 아버지 또한 이미 알고 있다.' 하고,
53 또 말하기를 '이미 인군을 폐위하는 비망기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직 생사(生死)를 돌보지 않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54 ○ 그 약은 정우관으로 하여금 장세상에게 들여보내게 하였고, 장세상은 수라간의 김 상궁과 동모하였는데,
55 김 상궁이 많은 은화를 요구하고는 한 차례 성궁에게 시험해 썼으나, 곧바로 토하여 냈습니다.
56 이기지의 무리가 말하기를 '약이, 맹독이 아니니, 다시 은화를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57 ○ 경종 3년(1723) 1월 12일에 헌부(장령 유간)에서 논하기를 "문출 죄인 조영복은 본래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루한 자로서
2 적집(賊集,김창집)의 이웃에 살았는데, 아첨하여 복종해 섬기며 스스로 그 비굴함을 잊은 채
3 자신이 그의 시종이 되어 손수 요강을 바쳤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그 비루함에 침을 뱉았습니다.
4 적집(賊集)이 사화(士禍)를 빚어내던 날에는 전령하는 졸개가 되어, 선류(善類)를 얽어 해치려고 했으며,
5 지금은 적집(賊集)이 정법(正法)되었고 선정이 설원(雪寃)한 뒤이니,
6 흉당에게 아첨하여 정인(正人)을 모해하던 무리로 하여금 하루라도 서울 아래서 숨을 쉬게 할 수 없습니다.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 ○ 조영복은 2월에 선산부로 귀양보냈다가, 5월에 양이(量移)하도록 하였다.
8 ○ 2월 4일에 간원(권익관)에서 논(論)하기를 "김성을 가진 궁인이 여러 적과 응하여 어선에 독을 섞었다는 것은 김성절이 직접 공초한 바입니다.
9 아직 출부(出付)하는 거조가 없어, 대궐의 가까운 곳에 흉적이 가면을 쓰고 살고 있게 만들었습니다.
10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동안에도 화근이 제거되지 않으니, 종사의 우환과 신인(神人)의 분노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11 김성절의 공초에서 '약을 진어하신 뒤에 누런 물을 토해냈다.' 는 말은 약원의 일과 서로 부합하니, 약을 쓴 일월을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비록 한두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직임과 관호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이 역적을 끝까지 핵실하지 못한다면, 종사의 안위가 안정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14 청컨대 김성의 궁인 중에서 의심스러운 자는 모조리 국청에 회부하고 조사하여 왕법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15 지난날 흉당들이 몰래 불궤를 꾀할 적에 은전을 모으기를 도모하면서 백방으로 경영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6 이홍술이 훈장(訓將)의 직임을 띠고 호조와 통하여 관서의 전세(田稅)를 매득(買得)하고는
17 조흥필, 석지견으로 하여금 그 일을 분장(分掌)하게 하고, 남는 돈은 홍술이 사사로이 취득하였습니다.
18 그리고 또 1천여 금을 철산 부사 이오에게 전해 주어 은밀한 곳에 녹여 두었을 것이니,
19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문하여 엄단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20 ○ 4월 23일에 시독관 송진명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공명첩에 대한 법은 벼슬을 파는 법과 같아서
21 나무장수나 가마 메는 교군(轎軍)까지도 금옥 관자를 단 자가 많으니, 보기에 해괴합니다.
22 또 사진(私賑)하는 법에도 폐단이 있습니다. 만일 의기(義氣)를 가지고 재물을 내어 백성을 구해 주었다면 곧바로 직위를 주어서 시의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3 그렇지 않고 관에서 조금 부유한 집을 골라 가지고 강제로 곡식을 내어놓게 한 뒤에 한 장의 고신(告身)만 내린다면,
24 이는 바로 국민을 속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여러 도(道)에 금지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25 ○ 28일에 죄인 조성복이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26 조성복이 애초에 국문을 당할 때 여러 차례 형신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27 국청에서는 유배지로 되돌려 보낼 것을 품청하고, 대간은 곧바로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여 바야흐로 결안하려 하였는데,
28 그 형 조성집이 의금부의 예속에게 뇌물을 써서 독약을 전해 주게 하여 죽게 한 것이다.
29 조성복이 사주(使嗾)를 받아 임금께 청하며 임금의 뜻을 시험해 본 것은 역적이 나타날 싹수가 되었다.
30 그러나 대계는 너무 지나쳤다. 대신이 작처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하지 못하였으니, 그 역량의 모자람이 애석하다.
31 ○ 6월 6일에 영의정 조태구가 64세로 졸하였다.
32 여러 음흉한 무리들이 극성을 떨 때를 당하여 실로 고줏대 같은 명망을 지녔고,
33 몸을 떨쳐 궐문에 호소함에 미쳐 위험을 돌려 평안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세운 공덕이 뛰어나 시대의 여망(輿望)에 흡족하였다.
34 그리하여 상하가 모두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는데, 병이 이미 깊어 중무(衆務)를 처리할 수 없었고,
35 또 역량(力量)이 없어 시끄러운 잡음을 진압할 수 없었다.
36 특히 지금 막 생겨나는 의논들과 다른 의견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받아
37 마침내 낭패를 당하고 시골로 물러가 은거했으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38 평소 청렴하고 소박하여 산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여러번 번임(蕃任)을 맡았는데도 집안에 털끝만큼도 보냄이 없었다.
39 다만 타고난 성품이 좀 유약하여 자못 타인의 부탁을 잘 받았으므로 관직에 있을 때에 치적(治蹟)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40 ○ 11월 19일에 사간원 논하기를 "훈국(訓局)에서 민전(民田)을 모아 들인 것은 대가(代價)를 주고 토지를 사는 것과 구별이 있는데,
41 근래 그 세금을 더 징수하므로 그대로 묵고 버려진 것이 많습니다.
42 청컨대 각 아문에서 모아 들인 둔전은 남징(濫徵)하지 못하게 하여 그 폐단을 덜게 하소서.
43 나주, 광주, 능주, 장흥, 남평, 화순 등 여섯 고을의 장인(匠人)의 포를 1필씩 더 거두었으므로, 일찍이 비국에서 조사를 하여 정식(定式)하였었는데,
44 조정만이 나주 목사가 되었을 때 전과 같이 정해진 수량보다 많이 받아들여 유산(流散)하는 백성이 많았습니다.
45 청컨대 본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6읍을 엄중히 신칙하여 정식에 의해 시행하게 하되,
46 만일 법을 범한 수령이 있다면 일체로 논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47 ○ 12월 30일, 이 해의 총 호수(戶數)는 1백 57만 6천 1백 38호이며, 인구는 6백 84만 6천 6백 39명 내에서 서울이 19만 9천 18명이였다.
58 ○ 경종 4년(1724) 2월 6일에 선혜청에서 아뢰기를 "정언 조상경이 의논드린 바 대동미를 반으로 감해 주자는 일은
2 그 혜택이 도리어 전지의 결수가 많은 부유한 백성에게만 미치고,
3 전지의 결수가 적은 궁핍한 백성에게는 감면해 주는 것이 한두 되의 쌀에 지나지 않는지라
4 혜택도 못 되면서 한갓 실결(實結)만 축나게 됩니다. 시행치 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 ○ 20일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호남 각 고을에서 꾸어다 쓴 전곡을 사간원으로 인하여 조사해 내어 탕감해 주라는 명이 있었는데,
6 십수 년 이래 외방(外方)에서 꾸어 간 것이 진휼에 보충한다는 명분을 구실로 사사로운 영리를 취하려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7 공가(公家)의 재산을 축내어 사인(私人)의 전대(주머니)만 불려 준 결과를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큰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8 ○ 한갓 공가(公家)의 재물을 관리의 손에 의해 축을 냈는데 그 탕척의 혜택은 도리어 베풀지 않아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9 청컨대 사간원 계사에서 논한 일은 시행하지 말고,
10 그 중에서 감색이 약한 백성을 속여서 갑절의 이식을 약속한 자와
11 중간에 받아 먹고서 바치기 어렵다고 핑계하는 자를 적발해서 법에 의해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 ○ 윤4월 1일, 당초에 장희재의 어린 아들 장종경과 며느리 실애가 연좌되어 귀양을 갔었는데,
13 이때 와서 종을 시켜 호소하며 석방을 청하니, 임금이 해조의 복계를 기다리지 않은 채 윤허하였다.
14 ○ 2일에 양사에서 합계하고, 옥당에서 상차하여 김성 궁인의 일에 대한 논쟁을 날마다 하였다.
15 ○ 7일에 삼사에서 입대를 청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논쟁함에 있어 매우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16 정언 구명규는 말하기를 "명나라 궁중에서 저주한 변고가 있었는데, 황제가 궁중의 궁인을 다 죽였습니다.
17 청컨대 어선을 맡았던 궁인을 모두 찾아내어 외옥(外獄)에 넘기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8 ○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인주(人主)로서 잔인하게 학살을 감행함이 명나라 고 황제 같은 이가 없는데,
19 남의 신하가 되어 당시 임금에게 진언을 하면서 정작 이것으로 경계는 하지 못할 망정 도리어 이것으로 법을 삼으라고 권하였으니, 무식함이 심하도다.
20 ○ 21일에 도승지 이만선 등이 청하기를 "김성 궁인의 일은 의혹이 없다고 한 하교가 있습니다.
21 어찌 이 장선(掌膳) 중에 김씨 성이 없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난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죽었다는 겁니까?
22 설령 없다고 하여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한다면 백성들의 의혹이 시원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없다고 하였다.
23 여러 승지들의 차례로 진달하여 쉬지 않고 떠들어 대자
24 임금이 역정을 내며 말하기를 "승지가 감히 군부에게 침묵만 지킨다고 말하다니, 모든 승지를 일체 나문(拿問)하라." 하였다.
25 승지들이 모두 대궐 밖으로 물러나가니, 이윽고 앞서의 명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모든 승지를 불러들였는데, 승지들이 황공하여 감히 다시 입대를 청하지 못하였다.
26 ○ 우의정 이광좌가 약원에 명하여 지난해 황수(黃水)를 토한 월일을 상고하여
27 그날의 주방 나인 중에서 김씨 성을 가진 자를 찾아내어 심리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28 임금이 답하기를 "주방 나인 중에 의심스럽고 유사한 김씨가 전혀 없는데도 대신이 이처럼 조사해 낼 것을 청하니,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하였다.
29 ○ 27일에 사헌부에게 논하기를 "남한 산성의 백성이 군영의 창고에 구류되어 정월 초하루가 되어도 석방하지 않고 있다가,
30 창고 안에서 불이 나서 갇혀 있던 두 사람이 불에 타서 죽었다고 합니다.
31 청컨대 그 별장은 죄를 결단하고 타 죽은 사람에게는 휼전을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2 ○ 8월 2일에 임금의 병환이 계속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 올리는 것마저 싫어하였다.
33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을 이루었고,
34 해를 지낼수록 깊은 고질이 되었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
35 ○ 22일에 임금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해지고, 24일에 임금의 맥이 낮아져서 힘이 없었고, 음성이 점점 미약하여졌다.
36 도제조 이광좌와 제조 이조가 미음을 진어하기를 권하였으나 모두 응답하지 않았으며,
37 세제가 일어나서 청하매 임금이 비로소 고개를 들므로 미음을 올렸다.
38 ○ 의관이 입진하고 물러나와 위급함을 말하자, 모든 신하들이 희인문으로 달려 들어갔고,
39 대내로부터 제조의 입진을 재촉하여 이광좌 등이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내시를 의지하고 앉아서 눈을 몹시 부릅뜨고 보았다.
40 이광좌가 문후를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자, 세제가 울었다.
41 ○ 25일에 임금이 환취정에서 승하하니, 내시가 지붕에 올라가 고복(皐復)을 하고 곧 거애(擧哀)를 하였다.
42 ○ 임금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덕스러운 의용(儀容)이 혼후(渾厚)하였으며,
43 인현 왕후를 섬기는 데 성효(誠孝)를 돈독히 다하였고,
44 어린 나이에 일찍 학문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물욕의 누(累)도 없었다.
45 불행한 소조(所遭,고난이나 부끄러움을 당함)에 걸려서 변통하며 지내는 데
46 지극히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그에 대해 헐뜯고 칭찬함이 전혀 중외에 들리는 바가 없으니, 사람들은 모두 신성(神聖)한 덕이 있다고 하였다.
47 그러나 근심과 두려움이 쌓여 병을 이루었고 깊어갈수록 더욱 고질화해서,
48 즉위한 이래로 정사를 다스리는 데 게을리하였고 조회에 임하여는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49 정사를 여러 아랫 신하들에게 맡겼는데, 그런데도 승하하신 날에는 뭇 신하들과 백성이 달려와 슬피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50 그 애통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애통해 하였고 공경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공경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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