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오앙 에이사이 (明庵榮西) <1141-1215>
도호(道號)는 묘오앙(明庵) ,법휘(法諱)는 에이사이 (榮西)
,속성은 가야씨 ,아버지는 길비률 (吉備律)
신사의 신관(神官)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배벽 별을 보고 그를
잉태하였으며 새벽 별이 환하게 빛을 발하는 때에 출산하였다.아무런 고통이
없는 무통 분만이엇다 .그러나 채 달이 차지않은 8개월따리 아이여서 매우
작았고 이상하게 태어난 뒤에도 울음소리 한번 내지않았다.부모들은 어쩐지
기분이 나쁘고 또 그 지방에는 옛부터 달ㅇ 차지않은 아이는 반드시 부모에게
재앙을 가저온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젖도 먹이지않은채 방치해 두었다
평소에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스님 한분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그 집에 찾아가서
부모의 무정한 처사를 꾸짖으며 타일렀다.
< 이 아이는 언제 태어났는가? >
< 이제 오늘로 3일이 지났읍니다 .이상하게 태어날 때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고
아직까지 한번도 울지 않았읍니다.>
< 그럼 죽어버린 것이 아닌가 ?>
< 아닙니다 눈을 뜨고 손발을 움직이고 있는데요>
<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는 것은 깊은 인연 때문일세 ,태어난 아이를 기르지
않는 법이 어디 있는가?>이 말을 듣고 늬우친 부모들은 처음으로 목욕을 시키고
젖을 먹였다.>
어릴 때의 이름을 센주마루(千壽丸) 라고 하였으며 성장함에 다라 영리함이 뛰어나
여덟살 때에 벌써 아버지를 따라 구사론(俱舍論) 의 송(颂)을 읽었다고 한다
에이사이의 아버지는 신관이면서도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어서 에이사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불교를 배웠으며 11세 때부터는 집 근처에 있는 安養寺의 죠오신을
사사하였고 14세 때 일본 천태종의 본산인 히에이 산에 올라가서 득도 수계하였다
그 뒤 17세 때 죠오신이 입적하자 그의 法兄인 센묘오 에게서 주로 밀교의 법을 배웠고
19세 때 히에이 산에 올라가서 유우벤에게서 주로 밀교의 법을 배웠고 또 27세 때에는
기꼬오의 밑에서 다시 밀교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으며 그 뒤 히에이 산에 올라 겐이로 부터
밀관을 받았다 .밀관이란 밀교에서의 전법 또는 수계의 의식으로서 스승이 제자의 머리
위에 향수를 붓는 것을 말한다.이리하여 에이사이는 밀교승으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위에서는 < 에이사이는 뛰어난 인물이다 뒷날 반드시 큰일을 할것이다.> 라고
칭찬을 했다.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 에이사이는 신통치 않은 인물이다 .저 생긴 꼴을 봐라 >
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적지않았다.그는 키가 매우 작았으며 소위 에이사이 머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묘한 머리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자네의 학식과 언변에는 감복하지만 아깝게도 자네는 풍채가 너무 좋지않네 아마
그런 풍채로는 승려로서 존경받기 어려울걸세> 라고 대놓고 조소하기 까지 하였다
에이사이는 자기에 대한 이러한 조소에 대해
< 키가 크고 작은 것이 어찌 사람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오제의 한사람인 순 임금도 뛰어난 재상이었던 안영도 어린아이보다 작았으니
뛰어난 임금 뛰어난 재상이 되지 않았는가?>라고 항변하기는 하였으나 그도
사람인지라 내심 자신의 작은 키를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그래서 밀교의 한 수행법인
<허공장구문지법>이라는 비법을 닦음으로써 키가 커지기를 기원하였는데 백일간
열심히 기원한 덕으로 키가 四寸;약 12센티 정도 커졌다고 한다 .
1168년 27세의 에이사이는 무사히 송나라 명주땅에 도착하였다 .맨 먼저 청량(凊凉)
의 광해사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의 한 승려로부터 선의 가르침을 듣고 크게 느낀바가 있었다
밀교를 가르치는 절도 스승도 없었다 .
1185년 3월 다이라씨 일가가 멸망하고 동란이 평정되자 에이사이는 같은 해
기회를 얻어 교오또에 올라갔다. 그래서 점차로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게되고 이윽고 고또바(後鳥羽) 천황에게 까지 부름을 받아 그의 조칙을 받들어
기우제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때 에이사이의 열 손가락으로부터 대광명이 나왔으며
이에 감응하여 곧 크게 비가 내리고 더구나 풀잎위의 이슬에 에이사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기적이 일어났다 천황은 경탄하며 요오죠오(葉上) 라는
호를 내리는 동시에 다이라노 요리모리 의 주청에 따라 자주색 법의(法衣)를 하사하였다
1186년 송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던 다이라노 요리모리가 세상을 떠나자
본의아니게 자꾸 지연되었던 압송 (入宋)을 결행하기로 하고 다음해인
1187년 4월에 두번째로 송나라 땅을 밟았다
1187년 가을 그 지역에 한발이 계속되자 그곳 군주의 청에 의해 기우제의 기도를
드렸는데 그 때 그의 몸에서 千光이 발하여 하늘을 비추니 이에 감응이 일어나
크게 비가 내렸다.이 소식을 들은 孝宗황제로부터 千光이라는 호를 받게 되었다
1192년 귀국후의 에이사이는 교오또를 중심으로 오로지 선정 유포에 전념하였다
허암의 인가를 받은 에이사이는 임제종 黃龍派의 법통을 이어받고 귀국하게 된다
이 황룡파의 법맥을 직접 이은 것은 에이사이 한 사람 뿐이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새로운 차의 씨앗을 가져가고 차나무의 재배법 차 마시는 법 등도 배워가지고 간다
< 마음이란 참으로 불가사의 하다 .천지간의 모든 것을 싸고 있는 것이 마음이다.
말하자면 마음은 우주의 실상 그것이다.이 마음의 본체를 전하는 것이 바로 선이며
이것이야말로 불법의 근본이다>
< 선에서는 자신을 죽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을 죽여 無心,無我가
됨으로써 절대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 >
< 크구나 마음이여! 하늘의 높이는 다함이 없으나 마음은 하늘위를 벗어나며
땅의 두께는 알 수 없으나 마음은 땅밑을 벗어난다.天地 나를 통하여 우뚝하며
만물 나를 통하여 드러난다.크구나 마음이여!!!>
1198년 興禪護國論을 저술 선종을 융성하 게 하는 일은 호국에 연결되는
것임을 논증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 禪은 자신을 죽여 無心,無我가 됨으로써 절대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국가를 지키고 평안한 세상을 만드는 것과도 통한다>
1200년 막부의 비호아래 점차 활동 무대를 넓혀가던 에이사이는 1200년에는
가마꾸라 막부의 창시자인 미나모또노 요리또모 사망 1주기 법요식에서
그 식을 주관하는 도사의 임무를 맡는등 각종 불사에서 도사의 임무를 맡게되며
또 가마꾸라에 자신의 주도하에 壽福寺를 창건한다.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2년뒤인 1202년 2대 장군 미나모또노 요리이에의 후원에 의하여 마침내
교오또에 진출 建仁寺를 창건하게 된다
1205년 建仁寺가 창건되고 교오또에 큰 바람이 불어 그 피해가 매우 컸었다.
그가 건인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쌀쌀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 날이었는데 한 낭인이 병들고 굶주린 모습으로 추위에 떨며 찾아와선
< 보신 바와 같이 제가 오래 병이 들어서 처자식에게 먹일것이 없어 일가가 모두
굶어죽을 수 밖에 없게 됬읍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도와주십시요>하며 애원하였다.
한참 궁리하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본당에 들어가더니 정면에 안치되어있는
약사여래상의 뒤에 있는 금박의 광배를 잘라 내어와서
< 이것을 팔아서 쌀이라도 사시오 어떻게든 한때 방편은 되지않겠오?>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주고 친절하게 위로해서 돌려 보냈다.
1215년 어느날 에이사이는 장군 사네모또를 방문하여
< 여러가지로 두터운 운혜를 입었사온데 이에 교오또에 돌아가고자 하여
오늘 은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읍니다>라고 말했다.
에이사이는 그뒤 곧 건이사에 돌아와 유유ㅓㄹ 그뭄 선종에서의 중요한 법요인
포살을 행하고 보살의 대계를 설한 다음 끝마치면서
<이것이 마지막 설법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이 교오또내에 널리 퍼지고 조정에서도 알게되자 저정에서는 7월6일
뱡문안을 위해 칙사를 파견하였다.그때 칙사를 대하던 애이사이는
다른 날과 조금치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후 4시경 칙사가 돌아가자
곧 의자에 앉은 채 흡사 살아있는 듯한 모습으로 조용히 입적하였다.
세수 75세
그의 법을 이은 법맥을 千光派라 한다.그는 현재 일본에서 선종의 祖로써
추앙되고 있으며 밀교에서도 엽상류(葉上流)의 조로 받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