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웨슬리의 생애
(John Wesley, 1703-1791)
감리교회의 유명한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생애와 가르침은 사도들 이후 영적 생활을 심화시키는데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감리교회 헌장 서두에는 감리주의가 “성경적 성결의 은혜의 전파”를 위해 하나님의 인도로 일어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감리주의는 큰 불과 같이 세계를 휩쓸게 되었는데 두 세기가 못되어 다른 어떤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보다 더욱 많은 지지자를 얻게 되었다.
이 성공의 비밀은 당시 개신교 각 교파들 중에 흔했던 캘빈주의의 주장에 비해 그 신학이 숙명론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은데 있었고, 또한 요한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 전도자들의 깊은 영적 경험에 있었던 것이다.
많은 감리교 전도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열심히 설교하고 권고할 때에 청중들은 죄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설교를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죄들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넘어지거나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던 것이다.
웨슬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또 그의 아버지는 모두 영국 국교회의 교역자들이었고, 그 교회에서 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아 죽기까지 머물러 일했으며, 죽은 후 2년까지 영국에서 감리교회는 독립적인 교회를 형성치 않았다.
요한과 찰스 웨슬리의 어머니인 수산나 웨슬리는 위대한 에니스리 박사의 딸이었다.
수산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목사였고, 수산나는 경건하며 지각 있는 생활로 유명했다.
요한 웨슬리는 영국 린커셔에 있는 엡워스에서 1703년 6월 17일에, 열아홉의 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났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10명뿐이었다.
요한이 6세 되는 해 아버지의 집이 불탈 때 불 속에서 간신히 구출을 받았다. 웨슬리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매우 주의를 기울였고, 아이들은 모두 “주의 양육과 교훈 안에서”키움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좋은 사회교육도 받았다.
요한은 17세가 되어 옥스퍼드 대학교 그리스도 교회 대학에 보냄을 받기 까지 런던에 있는 챠터 하우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부지런한 학생이었고 그의 공부는 뛰어난 진보를 보였다.
그가 23세때 고전들에 대한 그의 연구가 뛰어났으므로 린컨 대학의 특별 연구원으로 뽑혔고, 학사 시험 위원으로 뽑혔으며, 다음 해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떠나기 전 그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논리학에 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후에 독일어에 관한 지식도 얻었다.
웨슬리는 10세가 넘도록 어떤 면에서나 의식적으로 불순종함이 없이 부모님의 경건한 충고를 따랐다.
“다음 6,7년은 학교에서 보냈다”고 그는 말했고, “거기서 외적 제한들이 풀리게 됐고, 이전 보다 많이 태만해졌으며, 외적 의무에도 그랬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못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일지라도 자신이 아는 바로는 외적 죄들에 대한 죄책감이 거의 계속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성경을 읽었으며 아침과 저녁에 기도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구원을 외적 행동들과 교회 출석하는 일, 또 다른 사람들처럼 나쁘지 않다는데 의존하고 있었다.
옥스퍼드에 간 후 약 5년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것으로 아는 것들을 계속 행했고, 그러나 그는 계속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엘 다녔다.
그가 22세 때쯤 되어 토마스 아 캠피스 의 글을 읽고 그는 눈을 뜨게 되어 참 신앙이란 외적 행위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요,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나 나는 캠피스(Kempis)가 너무 엄격한데 화를 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또한 말하기를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의 책을 읽고 큰 안위를 얻었고, 내 대화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고 했다.
테일러 박사의 책 “거룩한 삶과 죽음”은 웨슬리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의 생애는 매우 진실하게 되었다.
이제 웨슬리의 친구들은 그가 안수를 받도록 권했고, 1725년 그가 22세때, 많은 기도와 숙고 끝에 포터(Potter) 감독에 의해서 안수를 받게 되었다.
1727년에 웨슬리는 로우(Law)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과 “심각한 사명”이란 책들을 읽고 자신이 더욱 주님의 것이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로우씨의 저서는 아퀴나스의 책들이 사보나롤라의 생애에 영향을 준 것처럼 웨슬리에게 성경 다음으로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웨슬리가 감리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마도 로우씨의 책 때문인 것 같다.
몰간(Morgan)씨에게 후에 쓴 편지에서 웨슬리는 첫 감리회의 창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729년 11월에 나는 옥스퍼드에 거하게 됐는데 당신 아들과 나의 동생, 내 자신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일주일에 서너 저녁은 함께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개인적으로 읽은 고전들을 매 저녁에 다시 읽기로 하고 주일 저녁에는 신학 서적을 읽기로 했습니다. 그 여름에 엠씨는 내게 아내를 죽인 까닭에 감옥에 갇혀있는 한 사람을 방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빚진 자들 중 한 사람과 나눈 말에서 그는 현재 고통 받는 사람이 그들과 함께 말하게 되면 참 좋으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매우 자주 반복해서 말했으며, 1730년 8월 24일 나는 그와 더불어 동생과 함께 그곳에 가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나눈 대화에 우리는 매우 만족하게 되었고,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가기로 결정했으나 우리는 그 일을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가 나에게 동내에 아파 누워있는 가난한 부인을 가 보도록 청했습니다. 이런 일도 역시 유익한 일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겸손한 방법으로 첫 감리회가 형성되었고 감리주위의 위대한 창시자가 능동적인 기독교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감리회가 형성되어 수가 늘었고, 휫필드가 그에게 가담하게 됐을 때는 15명의 회원이 있었다.
그들은 곧 “거룩한 클럽”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드디어 “감리교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계적으로 위대한 설교가들인 요한 웨슬리와 죠지 휫필드 두 사람과 유명한 찬송가 작가 챨스 웨슬리를 이 작은 그룹에 함께 하도록 하신 일은 놀라운 일이다.
이 그룹은 1735년 웨슬리가 대학을 떠날 때까지 선한 일을 계속했다.
1735년 요한과 챨스 웨슬리는 미국 인디언들에게 선교사가 될 생각에서 미국으로 항해하게 되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 몇 명이 배에 함께 있었는데, 그들의 경건한 행동은 웨슬리에게 강한 인상을 준 까닭에 그는 그들과 말을 나누고 싶어 독일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큰 폭풍이 일어나 영국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큰 불안 중에 있을 때 웨슬리의 마음도 실망에 빠져 있었으나 모라비안 사람들은 침착히 또 즐겁게 기도와 찬송에 힘을 모았다.
여행 중에나 조지아에서 나눈 이들 경건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웨슬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회심에 의심이 일게 했다.
웨슬리는 조지아에서 거의 아무 일도 성취하지 못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높은 생활 표준에 끌어 올리려고 애썼으며, 유행했던 죄들을 공격했으므로 많은 반발을 사게 되었고, 드디어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챨스가 먼저 돌아갔고, 곧 요한이 떠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거기서 1년 9개월간 복음을 전한 후 내 나름대로 내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조지아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그는 쓰기를 ‘나는 인디언 들을 회심 시키려고 미국으로 갔으나, 아! 누가 나를 회심시키랴?’”
그는 휫필드가 미국으로 떠난 다음날 영국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 여러 곳에서 설교를 했으나 결과는 여전히 보잘 것 없었고 격려 받을 만한 것이 못됐다.
많은 반대자들이 일어났고 그의 설교에는 거의 축복이 없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피터 보로와 많은 다른 모라비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들이 성경 안에 있는 모든 회심자들은 순간적으로 회심된 것이라고 그에게 증명했을 때 그는 놀라게 되었다.
그는 이제 사람들이 구원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순간적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리주의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중생하는 순간적인 회심의 교리를 모라비안들로 부터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 찰스 웨슬리가 “새 교리”라고 불렀던 것을 반대했으나 곧 그의 잘못을 깨닫고, 1738년 5월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찰스가 믿음으로 기쁨과 평안을 얻었다는 소식은 요한 웨슬리로 하여금 구원의 참 확신을 갈망하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과 안식을 찾기 위해 10년간의 고투 후에 빛이 1738년 5월 24일 그에게 비치게 되었다.
그날 아침 그의 눈은 벧후 1:4의 말씀과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말씀에 쏠리게 됐다.
그날에 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기쁨과 안식에 매우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녁에 나는 몹시 언짢은 마음으로 엘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임에 가게 되었다. 한 사람이 거기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두를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어떻게 변화를 주었는가를 설명할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었고, 내게 확신이 주어졌으며,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제하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 축복을 받은 그 해 그는 독일의 진젠도르프 소유지에 있었던 헌후스 모라비안 정착지를 방문했다. 이 방문은 그의 신앙에 큰 힘을 주었으며, 그는 새로운 열심히 설교할 생각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설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순간적인 회심과 칭의의 교리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거의 모든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회심되었다.
1738년 10월 15일자 웨슬리의 일기와 같은 해 10월 3일자 일기의 서두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웨슬리가 보다 깊은 경험을 매우 사모했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그는 쓰기를 “나는 하나님께서 내 자신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성취시켜 주시기를 구했다.”고 했다.
그의 갈망은 어느 정도 만족을 얻게 된 것 같으며, 이름 있는 감리회 목사들과 웨슬리와 휫필드가 참석했던 런던에서 열린 감리회 연합 집회에서 만족을 얻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서 이 집회에 관하여 말하기를 “1739년 1월 1일 월요일 흘, 컨친, 잉함, 휫필드, 허친스 그리고 나의 동생 챨스와 우리의 형제 60명이 페터스레인에 있었던 사랑의 잔치에 참석했다. 아침 3시경 우리가 계속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우리에게 임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기뻐 외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넘어졌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임재로 두려움과 경이에서 깨어나자마자 우리는 한 소리로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찬송합니다. 당신이 우리의 주이심을 압니다.’라고 외쳤다.”
위에서와 같이 말할 때에 웨슬리는 성령의 강한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 같이 보이며, 그 경험 후 그의 설교에는 큰 능력이 따르게 되었다.
이제 감리회에는 급속히 사람들이 늘게 되었고,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영국 국교회들은 감리회와는 반대로 급속히 문들을 닫게 되었고, 휫필드는 브리스톨에서 옥외 집회에 모인 많은 관중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휫필드는 1939년 미국에서 돌아와 웨슬리와 협조하여 일하게 되었다.
한 동안 브리스톨에서 계속 일한 후 휫필드는 요한 웨슬리가 그 곳에 와서 그가 하던 일을 맡아주기를 원했는데 그렇게 함으로 자기는 다른 곳에 가 일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그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 기도한 후 웨슬리는 그의 요청에 응했다.
그는 옥외 집회에서의 설교에 많은 불안을 느꼈으나 휫필드가 많은 사람들에게 브리스톨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그의 편견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일요일에 휫필드가 마련한 옥외 집회에서 나는 이색적인 설교법에 좀처럼 적응할 수가 없었다”라고 했다.
옥외 집회에서 휫필드의 설교의 놀라운 결과를 본 후 웨슬리는 옥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옥외 설교자로서 유명해졌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모든 일을 “온당하며 순서 있게” 하는데 심혈을 기우렸고, 모든 육적 오락과 환상과 미혹을 피했으며, 또한 성령의 순수하신 역사를 격려하는데 깊은 주의를 기우렸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은 빈틈없이 세심하게 웨슬리가 따랐던 엄숙한 경고의 말씀이었다.
웨슬리는 한 동안 브리스톨에서 설교했고, 모였던 청중은 수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옥외 집회는 휫필드의 집회 만큼이나 컸다.
죄에 대한 강력한 책망이 사람들 위에 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다.
경이적인 사랑의 잔치에서의 경험이 런던에서 있은 3주후 웨슬리가 브리스톨에서 설교하는 동안 “잘 차려입은 중년 부인이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처럼 갑자기 울부짖게 되었다. 한 동안 그 여인은 가장 마음의 온갖 고통을 보이며 외치다가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되었다.”고 웨슬리는 말했다.
1739년 4월 17일 브리스톨에서 또 다른 놀라운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웨슬리가 막 사도행전 4장에 있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강해를 마치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자 즉시 서있던 사람이 죽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여인의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새 노래가 나올 때 까지 기도를 계속했다. 또 이어서 모든 이들에게 선한 자로 잘 알려진 두 사람이 큰 고통에 사로잡혀 마음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처럼 울부짖게 되었다 ”라고 웨슬리는 말했다. 이 사람들도 평화를 얻었던 것이다.
많은 경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웨슬리의 설교로 따라오게 되었다.
사람들이 마음의 큰 고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며 넘어지는 일들이 성령의 죄에 대한 역사로 자주 집회 때마다 있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크고 갑작스런 감격이든 사람들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흥집회에서나 다른 모임에서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넘어지는 것은 이와 같은 현상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지었던 죄들의 흉측함과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한 운명의 갑작스런 인식이 너무도 큰 까닭에 사람들이 정신적인 기능들을 흡수당해서 조종할 힘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예가 웨슬리에 의해서 종종 기록되었다.
1739년 4월 21일 브리스톨에 있는 위버스 홀에서 한 젊은이가 갑자기 맹렬하게 수분 간 떨면서 슬퍼하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도 또한 평안을 얻었다.
같은 달 25일에 웨슬리가 설교하고 있을 때 급작스럽게 한 사람에 이어서 다른 사람 또 계속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축 늘어지게 되었다고도 했다.
웨슬리는 매일 브리스톨과 베스 및 그 교외 지역에서 대중들에게 설교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 가서 똑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능력 있는 설교를 했고, 많은 감리회가 그의 설교와 휫필드의 설교로 일어나게 되었다.
웨슬리가 한 집회에 관하여 기술하기를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구원할 전능하신 분이여’라는 외침 때문에 나의 설교가 들리지 않았다” 라고 했다.
다음날 한 기도회에서 “감사를 돌리고 우리가 막 일어날 때 한 사람이 4, 5 발자국을 비틀거리다가 쓰러진 일”이 있었다.
감독 교회에 열심인 J.H 라는 사람은 가능한 모든 면에서 감리회를 반대했고, 아는 사람들을 찾아 가서 설득하기를 사람들이 집회에서 넘어지고 고통 중에 외치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다” 라고 했다.
그가 하루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안색이 바뀌더니, 의자에서 떨어져 몹시 소리를 지르고 몸으로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가는 집회마다 거의 이미 말한바와 같이 사람들이 넘어지곤 했는데 흔히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찾고는 하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웨슬리의 설교처럼 능력 있고 날카로운 설교를 들어 본적이 없었으며, 또한 죄 때문에 잃어버린 상태를 철저히 갑작스럽게 깨닫게 됨으로 고통 중에 울부짖는 일은 없었다.
구원에 대한 거짓 소망을 기뻐하던 사람들이 웨슬리의 평범한 설교로 말미암아 가면을 찢어 버리게 되었고, 큰 고통으로 괴로워 하다가 드디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얻고는 했다.
웨슬리의 평범하고 두려움이 없는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게 되었고, 생명을 잃을 뻔한 폭도들의 습격을 자주 당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으므로 아무도 비웃거나 방해하거나 입들을 열 수가 없었다.
비웃는 일이나 핍박은 웨슬리의 설교를 듣거나 그 집회에 결코 참석하지도 않았던 사람들로부터 있었다.
웨슬리가 런던으로 가는 길에 욉핑에서 설교했는데 26명이나 죄 때문에 넘어지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주저앉아 힘은 도무지 없는 것처럼 된 자들도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몹시 몸을 떨기도 했다” 고 그는 말했다.
런던에서 웨슬리는 수천의 많은 사람들에게 옥외에서 설교했다.
그것은 마치 휫필드가 브리스톨에서 했던 것과 같았다.
웨슬리는 그와 같은 큰 옥외 집회를 영국 전역에서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비가 올 때에도, 서리가 내릴 때에도 종종 수천의 관중들에게 옥외에서 설교했고, 설교는 두 세 시간 걸릴 때도 있었다.
엡워스에 있는 고향 교회들의 문들이 그를 반대하여 닫혔을 때도 웨슬리는 그의 주위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 뜰에 있던 아버지의 묘석 위에 서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옥외 집회에서 자주 설교했던 것이다.
1744년 12월 23일 스노우필드에서 설교 도중 “나는 이전에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빛과 힘을 얻게 되었다” 고 웨슬리는 말했다.
많은 일로 지쳤을 때 기도로써 웨슬리는 새 힘을 자주 얻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에 대하여 “하나님은 지친 사람이나 짐승을 고칠 수 없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기도했더니 즉시 나의 피곤과 두통이 멈추었고 나의 말들의 절룩거림도 즉시 사라졌던 것이다.”라고 1740년 3월 17일자 일기에 쓰여 있다.
웨슬리는 위대한 조직가요 또한 엄한 수련가였다.
그는 천박하거나 경솔한 사람은 감리회에서 쫓아냈다. 그는 수십명이나 제명했다. 그는 겸손한 복장과 세속적 오락으로 부터의 격리와 매일의 성결 생활을 주장했다. 그의 소원은 감리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지속적인 성결 생활로 단장하는 것이었다.
엡워스에 있는 감리회에 관하여 그가 쓰기를 “그곳 감리회는 크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역에 역사하사 안식일을 범하는 자들이나 술 취한 자들을 거리에서 볼 수 없게 하셨고 저주하는 말이나 맹세하는 말도 거의 들을 수 없게 하셨다.”라고 했다.
요한과 챨스 웨슬리 및 최초 감리회 전도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온전하며 즉각적인 성결의 교리를 강하게 옹호했다.
웨슬리의 저서 제 7 권에서 그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본 후 수년간 그 말씀을 따랐고, 만나서 말을 나눈 사람들에게 마다 같은 말씀으로 권고했다.
십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가에 대해 전보다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일러 주셨다. 즉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선포했는데,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으며 성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나는 개인적으로나, 공중 앞에서나 또는 글로 간증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수천의 증인들을 통해서 확인시켜 주셨다.”라고 쓰고 있다.
1762 년 9월 28일자 그의 일기에서 웨슬리는 “수년전에 나의 동생은 나에게 말하기를 오순절의 경험이 충분히 임하지는 않았으나 곧 있을 것을 의심치 않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듯이, 믿음으로 사람들이 성결케 될 것이요, 편견이 없는 독자들은 보게 될 것인데, 이제 전적으로 그 역사가 임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성결케 되었다는 것을 영국의 대부분의 지역에서와 듀브린에서, 아일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자주 듣던 만큼 듣게 되었는데, 성결케 되었다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고 했다.
웨슬리의 유명한 설교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1733 년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그에 의해 그 후 변함없이 인쇄 되었다.
절판이 될 것 같으면 그는 다시 인쇄하고는 했다.
어떤 이는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밝히고 있는 교리에 대하여 변경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그는 1778 년 일기에서 쓰기를 “40 년 전에 내가 알고 설교했던 그리스도교 교리를 나는 지금도 설교하고 있다”고 했다.
1762 년 6월 19일, 26일, 7월 3일, 8월 4일 자 그의 일기와 다른 저서에서 그는 사람들이 성결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766 년 12월 29일 그의 일기에서 “아침 5시 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에 대한 설교를 다시 했는데 수년전 굶주려 찾던 것처럼 사람들이 구하기를 바랬다. 얼마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최근에 두 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았고 몇 명이 더 중생케 되었다”라고 썼다.
1769 년 6월 27일 그의 일기에서 그는 “그리스인의 완전”이 무엇인가와 그의 저서 9권을 정의 했다.
그는 그 정의에서 “타고난 죄” 즉 “원죄”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죄의 근절에 대하여 설명했다.
1762 년 11월 1일자 일기에서 어떤 개인의 견해에 관하여 “나는 당신의 완전의 교리와 온전한 사랑 즉 죄를 배제하는 사랑을 단순한 믿음으로 받는다는 당신의 주장과 성결의 은혜는 순간적이며 바로 지금 받게 된다는 주장은 찬성하나, 사람이 천사 같이 완전케 된다든가 절대적으로 온전케 되며, 시험을 받을 수 없고 타락할 수 없는 것이, 성결케 된 자는 넘어질 수 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성결케 된다는 것이 알려지고 가르쳐진 것이 이삼년 밖에 안됐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고백한 셈이고 당신은 내게 즉각적인 성결의 은혜의 역사를 반복해서 부인했으나 나와 나의 동생은 저서들이 말하듯이 성결의 은혜를 알고 가르쳐 오기를 20년이 넘도록 했다.”고 쓰고 있다.
1765 년 5월 14일자 그의 일기에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를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와 그 경험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생각이 어떻게 내 마음에 오게 되었을까? 나는 간략하게 말하리라.
1725년 나는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들’ 이라고 제목이 붙은 테일러 감독의 글을 읽게 되었다. 나는 특별히 의도에 대한 장에서 놀라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확고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나의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갈망했다. 이것이 지금 ‘온전’이라고 말하는 나의 의미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것을 계속 구했다.
1727년 나는 로우씨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책과 ‘심각한 소명’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 책들은 나로 더욱 몸과 영혼 전체를 하나님께 바칠 결심이 있게 했다.
1730년 나는 성경 외에 다른 책들을 공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후 나는 이전에 가질 수 없었던 더욱 강한 빛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함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이를 위해 한 가지 즉 내적이요, 외적인 성결의 필요를 알게 되었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갈망했으며, 하나님께 전력으로 봉사하려고 애썼다.
1733년 1월 1일 ‘마음의 할례’에 대하여 내가 설교했는데 그것은 내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 것으로 모든 죄로 부터의 구원과 일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나는 처음 출판을 하게 되었는데, 학생들을 위한 “기도의 형태의 모음”이라는 책으로서 나는 이 책에서 명백하게 “전적으로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드릴 것을 말했다.
이전에나 지금이나 내가 말씀에서 시작한 “온전‘의 사상은 이와 같은 것이다. 1735년 나는 린콘셔에 있는 엡워스에서 송별 설교를 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설교에서도 우리의 말에나 행동에서 추구해야할 소원 즉 온전한 사랑을 갖는 것에 대하여 극히 분명하게 전했다.
1738년 1월에 나는 나의 소원을 다음과 같은 말로 썼다.
“내 영혼에 다른 것은 그만두고 당신의 순전한 사랑만 있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이 전적으로 나를 소유하사 나의 기쁨, 나의 보화, 나의 왕관이 되소서. 내 마음에서 이상한 불꽃은 멀리 사라지고, 내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이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도 주 예수께서 그의 보혈로 나를 사신 것은 사랑이라 믿고 있다.” 웨슬리는 거의 계속적으로 여행하며 설교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은 웨슬리의 유명한 모토였다.
1774년 그는 1년에 4,500마일 이하로 여행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썼다.
수년 동안 매년 그의 여행 기록은 8,000마일이었고, 이 기간 동안 5,000번 이하로 설교한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는 36세 이후에 순회 설교자로서 225,000마일을 여행했고, 40,000번 이상의 설교를 했으며 때로는 20,000명 이상이 모이는 여러 집회에서 설교했다. 그는 아침 4시에 일어나 거의 매일 5시에 설교했다.
1789년 웨슬리는 시력과 기력이 쇠하여 스스로가 지극히 노쇠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죽기 며칠 전 까지도 설교하고 글을 썼다.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가운데 1791년 3월 2일 승리롭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순간 그의 간증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이었다.